'한독협10주년'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11.05 상상 이상의 '센 영화'들을 기다린다 -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 -②]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2. 2008.10.29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 - ①]'한국독립영화의 아버지' 김동원 감독 (1)
2008. 11. 5. 18:29

상상 이상의 '센 영화'들을 기다린다 -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 -②]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한독협 10주년 인터뷰의 두 번째 주자는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이다. 그 역시 한독협의 역사와 자신의 인생이 구분가지 않는 10년을 살아왔다. 특히, 서울독립영화제와 인디포럼에 깊숙이 관여해 오면서 독립영화의 지형을 세세히 관찰한 그의 시선은 날카로우면서도 독립영화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묻어난다. ‘독립영화 무한도전’을 연상케 하는 한독협 초기의 좌충우돌 시기부터 어엿한 정책의 주체로 목소리를 내게 된 시기를 지나 독립영화전용관을 가지게 된 지금까지. 때로는 활동가로, 때로는 제작자로 종횡무진 독립영화계를 누벼온 그를 통해 한독협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봤다.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소감 한 마디 해달라.

좀 짠한 마음이 들었다. 10주년 기념식 때 풍물놀이도 하고, 처음 사무실 오픈 할 때 동영상도 봤다. 감회가 새로웠다. 옛날에 고생했던 생각도 들고. 이렇게 커졌구나... 아무도 이렇게 커질 거라고 생각 안했던 것 같은데. 의지도 있고 열심히 한 것 같다. 예전에는 독립영화를 인정하지 않았고, 운동권 영화라고 치부했는데 이제 정부에서 지원도 한다. 한독협이 이제 정책 파트너가 됐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뿐만 아니라 문화관광체육부(이하 문화부)도 그렇다.

한독협 창단멤버다. 어떻게 한독협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나. 

문화학교서울이라는 단체에 있었다. 외국에서 비디오를 공수해 자막을 넣어 상영하고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또 영화공부, 제작, 강좌를 했다. 외국영화만 틀다보니까 한국영화를 발견해야하지 않나 하는 목적의식이 생겨 1996년에 ‘인디포럼’이라는 영화제를 열었다. 그런데 그때 인디포럼을 같이하던 김동원 감독이 잡혀갔다. 당시 푸른영상을 중심으로 영화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그때 무슨 얘기를 나누었나.

제일 중요한 것이 표현의 자유였다. 당시 김동원 감독이 불법비디오유포죄로 들어갔다. 그때 독립영화인들을 아우르는 단체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원래는 곽용수 씨가 가야하는 자리였는데 대신 갔다가 한독협 준비팀이 되었다. 당시 오정우, 이한숙, 이주영 등이 모여 정강, 회비 등에 대한 논의를 했다. 그때 워낙 쟁쟁한 감독들과 제작단체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무국장이 된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사무국장이 되었다. 결국 문화학교서울은 그만두고 한독협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게 됐다. 

원래 시네마 키드였나.
 
중고등학교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다. 근데 그때는 영화학과 경쟁률이 높아서 영화과 가기가 힘들었다. 배우들만 가는 줄 알았으니까. 그냥 영화보기 좋아하고, 영화에 대한 글을 쓰기를 좋아했다. 그때 집이 용인이었는데 혼자 영화를 찾아 서울로 자주 왔다. 그러다 문화학교서울을 알게 되었다. 회원 가입하러 갔다가 운영위원회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해서 위원회로 활동하게 되었다.

문화학교서울을 할 당시에 ‘독립영화’라는 인식을 명확히 갖고 있었나.

그건 나중 일이다. 1993년에 문화학교서울에 들어가, 1994, 5년에 가장 열심히 활동했다. 갓 대학졸업한 사람들이 모여 비전에 대해 고민했다. 처음에는 외국영화만 틀고 외국의 예술영화만 보다 왜 한국영화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많은 이들이 할리우드키드라고 하지만 나는 충무로키드였다. 김기영 감독 영화를 찾아보는 등 한국영화를 많이 봤다. 자연스레 충무로에 비판적인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영화를 보면서 토론하고 대안적인 방향에 대해서 고민했다.

고민에 대한 답이 나오던가.

당시 선댄스영화제가 생긴지 5, 6년 지나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던 때였다. 스티븐 소더버그, 쿠엔틴 타란티노 등 새로운 감독이 주목받았다. 근데 한국에는 왜 그런 사람들이 없을까 고민을 하다가 우리도 독립영화의 역사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푸른영상, 노동자뉴스제작단(이하 노뉴단) 등이 그 예다. 그래서 1995년 독립영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류승완, 송영숙 감독 등의 작품을 상영하고, 작가와의 대화를 진행했다. 문화학교서울에 모인 사람들이 대부분 20대 중후반이었다. 추상적인 비전을 갖고 있었지만 영화평론, 제작 등 자기 관심 분야로 자기 일을 찾아 갔다.


한독협 초창기? 무한도전이 따로 없다.

새로운 단체가 생기면서 어려움도 많았겠다. 한독협 초기의 난제는 무엇이었나.

기본적으로 돈이 없었다. 문화학교서울에서 40만원 받았는데, 그때는 그게 작은 돈은 아니었다, 한독협은 그 절반이었다. 새 직장으로 옮겼는데 돈이 반으로 준 거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했다.(웃음) 한독협 인건비로 쓸 수 있는 돈이 한달에 50만원정도였는데 사무차장에게 “니가 25만원 받고 나는 20만원 받겠다”했다. 근데 사무차장이 “사무국장이 20만원 받는데 내가 어떻게 25만원 받냐”면서 자기 월급 5만원을 줄였다. 바보같이 한 사람 월급을 올렸으면 됐을 텐데.(웃음) 다른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했다. 근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었다. 워낙 없어서 여기저기 손 벌리기도 편했다.(웃음)

손을 벌리는 건 벌리는 건데,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돈이 필요하지 않았나.

그때는 지금처럼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도 없었고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지원받는 시스템이 없었다. 아는 사람을 통해 기획안 들고 찾아가서 만나보고 사업을 확장하는데 노력했다. 근데 그게 될지 안 될지 모르니까 계획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그럼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거 아닌가. 완전 무한도전이다.

나는 한독협을 만드는 입장에서 어떤 모습을 그리고 있었지만 회원들은 그런 상이 없었다. 회원들이 가입은 했지만 협회가 뭔지 잘 몰랐던 거다. 협회가 무엇을 위해 있고, 왜 회비를 내야 하는지 설득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초기에는 한독협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독립영화인들을 직접 만나 하나하나 직접 설명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런데도 회원이니까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단체의 목적과 방향을 인식시키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협회 설립 초기 1, 2년 동안 그게 가장 어려웠다.

그렇다면 한독협이 처음 그리고 있던 상이 무엇인가.

그게 한마디로 얘기하기 어렵다.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위해 있다”고 해도 자기가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고, “제작 지원 정책을 만들고자 한다”고 해도 그건 남의 일이었다. 이런 건 사람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 근데 독립영화 감독들이 자기 영화 만들기에도 바쁘고. 먹고 살기도 바쁜데 자신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쉽지 않았다. 쉽게 말해 자기 일이 아니었던 거다. 그때 내가 주로 했던 말이 “혼자서 잘되는 것은 없다. 너 영화 잘 만들어봐라. 몇 년 가나.”(웃음)라고 했다.

어허, 그건 일종의 저주 같은데.(웃음)

아니다. 서울단편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 받는 사람들에게 “상 받았다고 혼자 잘 되는 거 절대 없다. 잘 나갈 때 회원가입하고 회비도 내고 해야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아무리 영화 만들면 뭐 하냐 틀면 잡혀가는데”라고 얘기했다. 절대 “도와주세요”라고 하지 않았다. 이게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이었으니까. 근데 논리적으로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위해 일하고, 제작 지원 정책이나 이런 독립영화발전을 위해서 일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게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자기들에게 실질적인 이익이 없으니까. 이걸 설득하는 게 한독협 사무국의 일이다. 지금 한독협은 어떻게 하면 감독들이 가려운 부분을 긁어줄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

 "2001년까지 한독협 사무국장과 서독제 사무국장을 같이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유령단체? 한국영화계의 비타민!

한독협 활동이 본 궤도에 올라간 시기는 언제인가.

2000년 이후인 것 같다. 의외로 빨리 자리를 잡았다. 영진위가 1999년에 생기고 더 투명해졌다. 예전에는 알음알음 대종상에 몇 억 주고, 그들 세미나에 2천만원씩 지원해주고 했는데 위원회로 바뀌면서 단체지원사업이 생기고, 독립영화제작지원제도(1998)도 생겼다. 처음에는 ‘소형단편영화제작지원’이었다. 처음엔 정액으로 300만원씩 줬는데 우리가 “100만원짜리 영화도 있고 1000만원짜리 영화도 있는데 똑같이 주면 어떡하나 차등지원해라”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명칭도 독립영화제작지원으로 바꾸고 다큐멘터리도 지원해 달라”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파트너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영화인회의가 1999년도에 생기고. 문화연대도 생겼다.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영진위가 구성되면서 우리끼리 성명서만 내는 게 아니라 정책적으로 이야기하게 된 거다. 정책적인 관점에서 파트너로 인정받았다. 당시 사단법인으로 바뀌는 것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1999년). 협회가 생기면서 독립영화인들이 김동원, 변영주 등 개별 창작자들이 아니라, 영화, 진보적인 문화 안에서 시민권을 획득한 것 같다. 영화제, 책 출간, 토론회 외에도 스크린쿼터 운동에 대해 제일 앞장서게 됐다. 독립영화계가 영화판에 활력을 불어넣게 된 거다. 물론 힘 있고 협상하고 했던 사람은 충무로에 있던 사람들이지만 동을 트는 역할은 우리 독립영화계가 했다. 표현의 자유 영역에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유효적절한 시기에 한독협이 생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고 해서 한독협의 발자취가 순조롭지만은 않은 것 같은데.

유령단체로 취급받고 명예훼손 소송에 걸릴 뻔한 사건이 있었다. 영진위 위원을 구성할 때 한독협에서 ‘영진위 위원이 되면 안 되는 인물 5인’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이건 한국 영화 문화 전반에 대한 차원에서였다. 그런데 김지미 영화인협회 이사장이 “문성근, 명계남이 한독협이라는 유령단체를 시켜서 괴문서를 뿌렸다”고 해 신문에 나오고 그랬다. 우린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으니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립영화인들이 위원회에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보다는, 위원회 구성이 잘 되고 투명하게 운영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그런 사건으로 사람들이 한독협의 존재에 대해 알기도 했다.

한독협이 많은 사건을 겪었다.(웃음) 이제 한독협과 서울독립영화제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내가 한독협 사무국장으로 있을 때 영진위가 꾸려지면서 ‘영화제를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냐’는 제안이 있었다. 그때 이효인 선생님이 집행위원장을 하고, 내가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 사무국장으로 갔는데 둘 밖에 없었다.(웃음) 보도자료는 영진위에서 돌리고, 후원도 영진위에서 따고 했다. 그러다가 2001년부터는 한독협이 서독제를 위탁받아서 진행했다. 2001년까지 한독협 사무국장과 서독제 사무국장을 같이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상반기 인디포럼, 한독협 사무국장하면서 하반기 영화제 사무국장을 했다. 미친 듯이 일만 한 거지. 너무 지쳐서 2001년쯤 한독협을 정리했다. 인디포럼도 그만두고. 한독협 사무국장만 4년, 인디포럼 진행을 6년 했다.

몸이 닳고 닳아 다른 일을 생각했을 법도 한데.

쉬면서 개인적인 일도 찾아보고 돈도 좀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체력과 정신력이 고갈된 상태였다. 근데 갑자기 이효인 집행위원장이 그만두고 내가 서독제 집행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결국 한독협 그만두자마자 영화제로 잡혀 와서 다시 일하게 됐다. 영화제 중심으로 일이 집중됐다. 2002년 서독제로 이름 바꾸면서 체제정비하고 스탭도 뽑고 하면서 지금은 영화제 중심으로 일하고 있다. 

한국 독립영화계의 가장 큰 영화제의 집행위원장, 멋지지 않은가.

영화제가 일년 내내 인건비를 주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이효인 선생님이 계실 때는 3달 인건비 받고 6개월 일했다. 나도 4, 5달 밖에 인건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보릿고개를 많이 넘었다.(웃음) 1월부터 4월, 5월까지는 정말 추웠다. 후원받으러 다니고, 영진위에 ‘이게 말이 되나. 좀 올려야 하는 거 아니냐’ 얘기하기도 했다. 뭐, 별로 오르진 않았다.(웃음) 그러면서 사업들을 구상했다. 순회상영, DVD 제작, 온라인 상영 등 다양한 사업을 구상했다.  그러면서 스탭들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게 했다. 근데 웃긴 게 영화제 끝나고 나면 나만 남았다. 사무국장도 새로 구해야 했다. 누구한테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으니까. 다행히 지금은 상근 시스템을 어느 정도 마련했다.

그놈의 지긋지긋한 보릿고개는 어떻게 넘겼나.(웃음)

글을 많이 썼다. EBS시네마천국 작가를 했는데, 한 달에 한 번 써도 작가 인건비가 한독협 사무국장 인건비보다 많았다.  대학 학보부터 교지까지 청탁 오는 건 다 썼다. 매일 통장 들고 다니면서 입금됐는지 확인 하는 게 취미였다.(웃음) 


독립영화, 두 마리 토끼를 잡아라!

서독제 집행위원장 하면서 한국의 독립영화는 지겹게 봤겠다.(웃음) 그러면서 한국 독립영화의 흐름과 경향을 봤을 거 같다. 

인디포럼을 할 때만 해도 침잠하는 영화들이 많았다. 당시 대부분이 사회, 문화운동, 학생운동 하던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우울하고 암울한 루저들의 이야기가 많았다. 재밌는 영화는 찾아보기 어려웠으니까. 이때는 사회적인 인식과 그것을 높은 영화적인 완성도를 성취한 영화가 좋은 영화였다. 이런 경향이 1990년대 후반까지 갔다.

뉴 밀레니엄이 오면서 독립영화의 경향도 바뀌었나.

2000년대가 오면서 디지털로 찍은 재기발랄한 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세대가 다른 젊은 친구들이 어설프게 SF를 한다거나 류승완 감독처럼 액션을 찍는다거나 하는 경향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 주류도 아니었고, 좋은 평가를 받기도 어려운 시기였다. 하지만 ‘독립영화는 이래야지’하는 고정관념이 깨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한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인가.

음, 그러한 경향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반면에 지금은 너무 장르영화나 드라마에 치우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근래 영화들은 사회이면을 다루거나 인물을 다룰 때 드라마는 강해졌지만 인물의 개성이나, 영화적인 표현들이 많이 약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 장편영화들이 많이 등장했다.

2004년 이후로 장편영화가 많이 나오고, 개봉도 할 수 있었다. 단편중심에서 장편으로 옮겨갔다. 인디스페이스에서 개봉을 할 수 있는 것도 큰 역할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봉 할 수 있는 영화들은 제한적이었다. 이제는 4, 5억들인 저예산 영화보다 독립영화가 완성도 면에서 뒤지지 않는다.

최근 장편 독립영화들의 경향은 어떤가.

기복이 있다. 예전에는 사회적 문제의식은 있었는데 영화적인 퀄리티가 떨어졌고, 요즘에는 영화적인 퀄리티는 높지만 사회 이면을 바라보는 안목들이 옅어져 아쉬운 영화들이 많다. 이주노동자, 장애인 등 신문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들, 잔혹한 현실의 이야기를 다루기만 하는 건 의미가 없다. 영화적 성찰이나 사회를 바라보는 깊이 있는 시선이 필요한데 10년이 지나면서 바뀐 것 같다. 영화 편수도 많아졌고, 어떻게 보면 영화가 쉬운 매체가 됐다. 예전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다. 지금 시대에 다룰 수 있는 얘기들이 어떻게 영화적 깊이와 사회적 안목과 결합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세다, 그래서 흥미롭다.

이번 서독제에는 사회적인 안목과 영화적인 완성도가 결합된 작품들이 보이나.

매년 눈에 띄는 작품들이 보이지만 성이 안 찬다. 이런 얘기하면 감독들이 섭섭해 하겠지만, 나는 제작자고 좋은 영화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분명 그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작품들이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욕심을 부리고 싶다.

2008년 서독제 슬로건 '상상의 휘모리'는 최근 독립영화들이 너무 자기 일상의 이야기,
주변의 이야기를 그리는 것에 함몰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거기서 벗어나
'센 영화'
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지은 것이다.


2008년 서독제 <상상의 휘모리>에 대해서 말해 달라.

결국 문제는 상상력이 아닌가. 사회를 비판하든 연애 이야기를 하든, 창작자가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문제다. 휘모리는 좀 더 세게 해야 한다는 의미다. 최근 좀 센 영화들이 없는 것 같다. 사회의 치부를 까발린다거나, 배우 몸이라도 벗긴다거나 하는(웃음). 너무 자기 일상의 이야기, 주변의 이야기를 그리는 것에 함몰된 것이 아닌가 싶다. 거기서 벗어나 ‘센 영화’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에 지은 것이다. 실제로 올해 예심을 하면서 기대보다 그런 영화가 많았다. 세고, 끝까지 가는 영화들.

센 영화? 이번 서독제가 기대가 된다.(웃음)

우리가 슬로건을 이렇게 지어서 그런가, 우연히 맞아 떨어졌다.(웃음) 장편부문에서 ‘아니 이런 영화가 있었단 말야’하는 영화들이 있다. 문제는 관객들이 이걸 어떻게 볼까 하는 것이다. 걱정 반 기대 반이다. 특히 장편영화들이 볼만한 영화들이 많다. 기대가 된다.

주목할만한 작품은?

그건 내가 얘기하면 안 된다.(웃음) 보도자료 보고, 영화 보고 기사 써 달라.

전체적 영화제 출품작들의 경향?

장편부문에서는 어떤 상황의 끝을 보여주는 것들이 많다. <고갈>, <사랑을 찾습니다>, <낙타는 말했다> 등은 어떤 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을 그냥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끝까지 쭉 가는 영화다. 상상 이상의 힘이 있다. 파워풀한 영화들을 좋아하는 편인데 그런 영화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다큐멘터리 같은 경우는 편수가 조금 줄었는데, 올해 볼 수 있는 최고의 작품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단편영화는 어떤가.

단편영화 같은 경우도 새로운 경향들이 발견되고 있다. 일상을 다루는 것에서 벗어나서 인물들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끌어내는 영화들이 많다. 이전 영화들이랑 조금 다른, 드라마 구성에만 머물러 있지 않은 그런 영화들이 많다. 우리 영화제에서 다 수용은 못했지만 최근 영화들을 보면 한국 문제만을 다루지 않고, 외국에서 찍은 영화도 있고, 외국 사람이 실제로 등장하는 영화들이 있다. 이전의 영화들처럼 이주노동자들이 주인공으로 나와서 그들의 문제를 보여주는 선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글로벌한 문제들이 독립영화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흥미로운 건 이런 현상이 다큐멘터리, 극영화, 단편 등에 고르게 나타나고 있다는 거다.

주요 섹션이 궁금하다.

항상 그랬듯 본선 경쟁이 있는데 작년과 편수가 똑같이 51편이다. 단편 40, 장편 11편. 올해는 촛불 영상을 별도로 공모했다. 익히 예상할 수 있는 것들부터 예상하지 못한 문제들 까지 촛불집회 현장에서 볼 수 있었던 다양한 논쟁들을 다룬 영화들이 출품됐다. 6ㆍ10항쟁 이후 20년이 됐는데, 6ㆍ10항쟁과 2008 촛불정국을 연결시키는 영화들이 많았다. 실험적인 작품, 학생 작품들도 있고, 칼라TV 같은 미디어 운동 단체도 있다. 최근 미디어 활동, 독립영화진영이 촛불과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에 대한 포럼도 기획하고 있다.

매년 해외 섹션이 흥미롭다. 올해의 해외 섹션은?
 
올해는 ‘상상의 휘모리’인만큼, 평범하게 않게 ‘성인영화 특별전’을 준비했다. 이른바 ‘섹스와 영화’.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센 영화들을 골랐다. 프로그래머들이 추천하고 감독들이 직접 소개할 거다. 이들이 영화소개하고 토크도 진행한다. 과연 ‘한국에 포르노그라피가 가능한지’, ‘섹스와 영화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한 포럼이 있을 예정이다. 성적인 부분을 건드리는데 있어서 관음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제를 통해서 인간 관계의 문제, 권력의 문제 등을 도발할 수 있는 좋은 주제라고 생각한다. 최근 그런 영화들이 너무 없어서 이런 영화들이 왜 중요한지 짚어보는 포럼도 필요할 것 같다.


하던 일이나 잘해! 이 친구야!

오호, 관객의 한 명으로 완전 기대된다.(웃음) 정신 차리고, 중요한 질문하겠다. 현재 독립영화인으로서 고민하는 지점은 무엇일까.

‘언제 그만둘까?’(웃음) ‘어떻게 더 재밌게 살까’가 고민이다. 집행위원장만 7년째하고 있는데, 개인적인 고민이 크다. 흐흐, 농담이다. 독립영화계에 영화들이 많이 나오고는 있는데 시장에 파란을 일으킬 수 있는 작품은 많지 않다. 관객 1, 2만 명이 아니라 2, 30만 명 들어서 ‘이런 영화들도 되는구나’하는 것을 관객들, 영화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영화제 하나가 잘 되고, 영화 한 편이 잘 되서 판이 좋아질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런 영화들이 많아져서 지원받지 않아도 다음 영화들이 제작될 수 있는 그런 환경이 되면 좋겠다. 그런 영화들이 나올만한데 왜 안나오나. 이런 고민들이 있다.

한독협 10년에 관한 제언 한 마디 해 달라.

어려운 얘기다. 현재 같이 일하고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측면도 있고. 그동안 사업이 많았다. 인디스페이스도 있고, 내부 사업도 있고. 그런 사업들이 아직 안착되지 못한 면이 있는 것 같다. 한독협 조직도 그렇고. 월급 줄 때마다 돈 없는 문제도 있고. 십년 됐으면 이제 이런 문제들은 극복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기존 사업은 어떻게 안정화 시킬지, 한 편의 영화가 나왔을 때 어떻게 대우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정책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음, 하던 일이나 잘해라(웃음)


 

*2008-11-04 오후 3:28:57    컬처뉴스 김나라 기자, 필름온 안효원 기자



Trackback 0 Comment 0
2008. 10. 29. 15:35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 - ①]'한국독립영화의 아버지' 김동원 감독

10월 23일 푸른영상 사무실에서 김동원 감독을 만났다.
▲ 10월 23일 푸른영상 사무실에서 김동원 감독을 만났다.

한국독립영화협회(한독협)가 10주년을 맞았다. 한때 생소하기만 했던 ‘독립영화’라는 존재의 정체성 확립과 자리매김의 역사는 한독협의 10년 역사와 나란히 놓여져 있다. 영화인들이 자본과 검열로부터 ‘독립’해 진정한 의미의 ‘표현의 자유’를 누리기까지 한독협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줬다. 컬처뉴스는 한독협 탄생 10년을 맞아 독립영화계의 10년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시대 한독협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해 보고자 감독, 배우, 활동가, 제작자 등 독립영화인들 10명의 인터뷰를 기획했다. 이번 기획은 한독협 사무국과 팀블로그 필름온이 함께해 이루어졌다.

첫번째 인터뷰 대상자는 '한국독립영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송환>의 김동원 감독이다. 여러모로 한국 독립영화계의 상징적인 인물인 김동원 감독은 한독협의 초기 모습과 현재의 지점을 역사적인 맥락에 위치시켜 새롭게 보게해 준다. 그가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에 입문하고 활동하게 된 계기들 역시 놓치기 아까운 역사의 기록이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 바란다. / 편집자.

독립영화, 무에서 유를 만들다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소감 한 마디 해 달라.

김동원 감독: ‘벌써 10년인가’하는 생각이 든다. 내 나이 또래는 세월이 빨리 가니까.(웃음) 한편으론 독립영화 활동한지 오래됐는데 10년밖에 안됐나 싶기도 하고. 내가 초대 이사장을 하면서 한독협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현재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조영각 사무국장하고 어린 사무원은 그 때 월급 20만원씩 받고 시작했다.

독립영화계에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예상했던 것인가. 

이런 날이 올지 몰랐다. 지금은 미디어 센터, 독립영화전용관, 독립영화 제작지원제도 등이 생겼다. 이런 건 외국사례로 말로만 듣던 것들인데, 일반 영화계에서 질투할 만하다.(웃음) 막 없던 게 생기고 점점 늘어나니까, 있던 게 없어진 사람들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독립영화계만 편애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근데 지원금 총액으로 보면 굉장히 작다. 

그만큼 독립영화계가 가시적인 변화를 일으켰다는 반증이 아닌가 한다.  

무엇보다 10년 전만해도 독립영화라는 말을 할 때 약간 켕기는 게 있었다. 그때 독립영화하면 반정부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당시 영화진흥공사(현 영진위)에 독립영화라는 말이나, 독립영화 지원은 없었다. 또 영진위 1기 위원회 생기고도 몇 년간은 없었고, 그 이후에 생겼다. 독립영화라는 단어를 공식화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 강한섭 위원장이 다시 뺀다고 한다. ‘작은 영화’ 이런 식으로 바꾼다고.

작은 영화라... 김동원 감독이 다큐멘터리를 시작한 게 20년이 지났는데, 독립영화란 말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난 원래 상업영화 지망생이었고, 독립영화란 말도 없었다. 1980년대 얄라성이나 장산곶매 등에서 영화를 만들고, 미국식 개념의 이름을 붙여준 거다. 사실 미국식 개념과는 많이 다른데,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사실 나는 독립영화를 하려고 한 건 아니다. 상업영화 조감독을 했는데 이게 나랑 안 맞더라. 당시 전두환 정권 때 이런저런 일이 많았는데 방송에서는 누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때 내가 결혼식 비디오를 찍은 아르바이트를 했을 땐데, 사회의 모습을 찍어서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날라리, 가장 감동적인 올림픽을 만나다

원래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나. 김동원 감독의 젊은 시절이 궁금하다.

날라리였다. 데모도 안했고.(웃음) 1970년대에 학교를 다녔는데 당시엔 운동권이란 개념도 없었다. 언더그라운드에는 좀 있었는데 그때는 몰랐다. 난 연극 많이 하고, 놀기 좋아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 때 무의식적으로 뭔가 답답함을 느꼈다. 고등학교 때는 ‘왜 우리학교는 데모 안하지? 데모하면 휴교하는데’하면서 데모가 나길 원하기도 했다. 출처가 불분명한 유인물 만들어서 뿌리기도 했다. 휴교 때문에. 그런 걸 보면 약간 반골 기질이 있었나 보다. 그런 게 정리가 안 되다가 상계동 가서 정리가 됐다. 사회과학 책도 한두 권 읽어봤지만 전혀 안 와 닿았는데, 상계동 가서 구조적 모순이라는 걸 느끼게 됐다.

상계동에 어떻게 들어간 건가.

상계동 철거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내가 아는 신부님이 거기 들어가 계셨는데 강제철거 당하는 장면을 증거자료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하셨다. 하루만 와서 촬영해달라고 부탁을 하셨다. 그게 내 팔자를 바꿀 줄을 몰랐다.

처음 <상계동 올림픽>을 촬영할 때 ‘다큐멘터리는 이런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었나.

처음에는 관심도 없었고, 또 당시 우리나라에는 필름으로 만든 다큐멘터리도 거의 없었다. 대학 영화과에서도 단편영화제를 했지만 다큐멘터리는 없었다. 서울영화집단에서 8미리 필름으로 십 분짜리 다큐멘터리를 1985, 6년인가에 만든 게 전부였다. 그저 머릿속에는 TV에서 본, ‘추적 60분’유의 다큐멘터리만 있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그런 관성들을 떨쳐버리기 힘들었다. 그런데 외국 나가서 여러 다큐멘터리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보니까 ‘아 다큐멘터리가 할 만한 거구나’ 싶었다. 상계동 시절에는 전혀 몰랐는데, 가서 보니까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작품들이 있었다. 그 때 ‘다큐멘터리의 영역이 이렇게 넓구나’ 했다.

그 이후에 다큐멘터리의 매력을 느낀 건가? 어떤 매력을 느껴서 다큐멘터리를 계속하게 된 건가.

조연출을 한 4년 정도 했는데, 현장이 지겨웠다. 촬영할 때도 긴장감을 못 느꼈다. 그런데 상계동에서 철거 현장을 찍을 때, 특히 위험한 상황에서 철거 깡패들이 위협해도 전혀 무섭지가 않은 거다. 카메라가 알아서 막 돌아다니는 신들린 경험을 했는데, 그게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다. 촬영하는 게 이런 거구나. 또 철거, 투쟁 현장 모습들이 외부에 알려지기 힘든 상황에 <상계동 올림픽>을 발표했는데, 엉성하게 만들었지만 대학가에서 상영되고 그러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 때 다큐멘터리의 굉장한 힘을 느꼈다.

그래도 뭔가 손에 잡히지 않을 시절,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았을 거 같다.

<상계동 올림픽> 하면서 사회가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촬영할게 많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외국영화 직배 관련해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는데 정지영 감독이 나에게 ‘다큐멘터리를 해라. 극영화 하는 사람은 많지 않냐. 넌 잘할 것 같고, 너라도 해야 한다’라고 하더라.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닌 것 같고, 싫지도 않고, 또 극영화가 잘 안 풀리고 해서 다큐멘터리의 길을 걷게 됐다. 그렇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 길을 걷게 됐다.

총 제작기간만 12년이 걸린 <송환>은 비전향 장기수를 다룬 다큐멘터리로, 2004년 선댄스영화제 '표현의 자유상'을 시상하기도 했다.

투사? 난 그런 사람 아니다

1990년대에 <송환> 촬영하랴, <명성 그 6일의 기억> 발표하랴 정신없었을 거 같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부터 장기수들이 출소하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경험한 사람이니까 저분들의 증언은 기록할 필요가 있다 생각해 촬영을 시작했다. 사실 그걸 어떻게 쓸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에 장기수들의 삶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어머니들이 함께 벌인 석방운동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몇 편 나왔다. 그 때까지만 해도 <송환>에 대한 생각도 없었고, 그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다. 사실 내가 오며가며 찍은 거지 찍어야겠다 해서 찍은 게 별로 없었다.(웃음)

 그럼 <송환>은 어떻게 나오게 된 건가.

1999년 초부터 송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그들의 송환을 돕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사회적으로 이슈화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남북정상회담하면서 송환이 급물살을 타면서 엄청 급해졌다. 그 다음 6월부터 9월까지는 정신없이 찍었다. 그 전에는 판판히 놀다가.(웃음)
 
1990년대 들어오면서 한국 다큐멘터리의 파이가 커졌다. 주로 어떤 사람들이 촬영했고 어떤 관심을 가졌나.

지금도 우리나라 다큐멘터리는 액티비즘, 즉 투쟁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1980년대에는 당연히 그래야한다고 생각했고. 서울영상집단, 노동자뉴스제작단(이하 노뉴단) 등의 집단은 일종의 운동으로 한 거다. 노뉴단은 노동운동, 서울영상집단이나 민족문제연구소, 민족영화연구소 등은 그 외 사회문제를 다뤘다. 한국의 다큐멘터리는 태생단계의 특수성 때문에 액티비즘이 강하다.

김동원 감독은 어느 편에 속했나.

난 아무데도 속해있지 않았다. 굳이 얘기하면 빈민운동 쪽인데, 빈민지역 청년들과 활동을 하면서도 작업은 혼자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내가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정체성은 없었다. 영화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는 현장의 기록이고, 일상이었다. 빈민운동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했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느 순간에 찾았나.

나는 아직도 감독이라는 말을 안 좋아한다. 난 다큐멘터리에서 감독이 너무 앞서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무리 감독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해도 감독이라고 부르고, 또 ‘그럼 뭐라고 부르냐’고 하니까 이젠 그냥 ‘맘대로 부르라’고 한다.(웃음) 감독이라는 말이 옛날보다는 많이 거슬리지는 않는다. 옛날에는 엄정한 사실성, 객관성 이런 것들이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래야 하는 줄로 알았는데 요즘에는 다큐멘터리도 연출을 해도 괜찮다는 게 일반적이니까. 내가 아무리 연출을 안 하려고 해도 할 수밖에 없다.

작업을 하면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경우도 많이 있었겠다.

글쎄, 잡혀갔던 거?(웃음) 푸른영상 하면서 몇 번 잡혀갔다. 1993부터 2년 터울로. 그 때만해도 영화법이 손질되기 전이고, 장기수들을 찍는다는 게 시찰 대상이었다. 안기부 직원한테 매일 안부전화를 받았으니. 그쪽에서 조작간첩 사건들과 엮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잘 안됐다. 1996년에는 심의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음란비디오 단속법을 걸고 넘어졌다. 참, 음란비디오라니. 그 외에도 청소년 보호법, 국가 보안법 등 다양하게 조사받았다. 다행이 변호사를 잘 만나서 기각시켰다. 

투쟁의 역사다.(웃음)

투쟁은 무슨.(웃음) 난 투쟁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냥 내가 그걸로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잘못한 것도 없으니 당당한 거다. 심의를 받으려면 10분에 얼마 돈을 내야 하는데 내가 골이 비었나.(웃음) 여하튼 몇 번 들어갔다 나오면서 이미지가 그렇게 됐는데, 내가 용감해서 싸운 건 아니다. 그냥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 때문에 그런 거 같다.

김동원 감독은 2004년 선댄스영화제 표현의 자유상(<송환>) 등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한국 다큐멘터리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이면의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면서 주변의 따가운 시선도 받을 거 같다.

글쎄. ‘왜 이렇게 구질구질한 얘기만 하냐’는 사람은 있지만 따갑지는 않다. 당연히 알려야 할 이야기고. 지금은 방송에서 그런 얘기를 많이 하지만, 그때만 해도 전혀 안했는데 당연히 나라도 해야지 그랬다.


한독협. 힘든 시작, 지금은 괜찮아 무엇이든!

한독협이 세워지기 전, 독립영화인들은 어디를 구심점으로 모였나.

1991년에 독립영화협의회라는 단체가 세워졌다. 내가 의장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거기는 구속이 너무 많았다. 그 때만 해도 운동한다는 기분으로 작업을 했고, 모여 봤자 운동하는 독립영화인들만 모이는 거 같고. 1990년대 중반 넘어가고, 독립영화계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다양한 독립영화인들과 함께 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립영화가 뭐냐’ 하는 정체성 논란도 있었고, 일련의 산통 끝에 한독협이 생겼다.

한독협이 생기고 어려움은 없었나.

내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웃음) 앞서 얘기한대로 한독협의 정체성 찾기가 가장 힘들었다. 한독협 초기에 독립영화협의회나 민예총 영화분과 등과 관계 설정하는 게 어려웠다. 1996년부터 한독협 설립 논의를 시작했으니까.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이 협회를 만든다는 거에 의구심 어린 시선도 있었고. 하여튼 초기에 발동 거는 게 좀 어려웠는데 발동 걸고 나서는 최근까지는 잘 굴러왔다고 생각한다.

영진위 3기 위원이었다. 어떻게 하게 됐나.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가면 회의만 많고, 그렇다고 독립영화에 관한 회의만 하는 것도 아니고. 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는데 가서 목소리를 내야 하니까, 가야 된다고 하니까 갔다. 별 재미는 없었다.(웃음)

어떤 목소리를 내고 싶었나.

목표가 너무 분명했다. 독립영화전용관 만드는 거. 10년 동안 만들자는 말만 있었지, 만들지 못했다. 더 이상 늦출 수 없었다. 난 다른 건 못해도 전용관 하나 만큼은 만들겠다는 각오로 들어갔다. 다른 영진위 위원들이 너무 적나라하게 의도를 내비치는 거 아니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런 독립영화인들의 노력 끝에 인디스페이스가 생겼다. 근데 인디스페이스가 위치한 중앙시네마 재건축 때문에 몇 년 안에 장소를 옮겨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럼 다른 곳을 찾아봐야겠지. 3기 영진위 때 미디어센터, 시네마테크, 독립영화전용관을 다 포괄하는 500억 규모의 복합상영관을 짓기로 서울시와 결정했다. 그런데 강한섭 위원장이 무슨 아시아센터를 건립한다고 한다. 지금 어떻게 진행 중인지 모르겠다.

규모를 500억에서 1,000억으로 늘린다고 들었다. 그런데 규모가 커지고, 새로운 사업계획을 만들면 그 만큼 그 과정이 늦춰지는 거 아닌가. 현재 미디어센터 미디액트나 서울아트시네마, 독립영화전용관 모두 공간 확보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아무래도 그런 측면이 있다. 음, 어떻게 보면 위기를 겪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어려움을 겪어보면 전화위복의 기회를 맞을 수 있다. 이건 좋은 극장이 생긴다는 측면이 아니라 독립영화인들에게 뭔가 좋은 공부가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하는 말이다.


다른 얼굴, 하지만 우린 가족이다

한독협 홈페이지를 보면 초기에는 게시판에 서로 안부도 묻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영화도 보고, 얘기도 하고, 술도 먹으면서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한독협 10주년을 맞이한 2008년. 지금 가장 큰 고민이 무엇인가.

글쎄. 내가 고민한다고 되나?(웃음) 이제 독립영화가 나름대로 사회적인 위상을 이제 갖게 됐다. 그런데 대안영화로서의 자기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영화가 잘 안 나오고 있다. ‘지금쯤 나올 때가 됐는데’하는 기대가 있는데 잘 그게 쉽지 않다. 예를 들어서 <은하해방전선>등 몇몇 작품은 기대를 많이 했고, 영화도 좋았음에도 불구라고 잘 안됐다. 영화는 관객과 함께 완성된다. 과연 이걸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보게 할 수 있을까. 영화가 안 좋은 게 아닌데, 왜 안볼까. 이런 고민들을 한다. 답 없는 고민.

최근에 등장하는 후배들의 작품들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나.

다큐멘터리만 보자면,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본 <워낭소리>란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좋았다. 나와 스타일은 다르지만 반가운 작품이다. <우린 액션배우다> <우리학교> 등 1년에 한 편씩은 문제작들이 나온다. 한편으론 기쁘고, 한편으로는 ‘아 이런 게 일 년에 열편은 나와야 하는데’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인 코드가 약해지고 있지만 그게 그렇게 아쉽지는 않다. 오히려 열심히 만들고, 진정성이 보이는 다큐멘터리가 1년에 3-4편만 나오면 좋겠다. 인디다큐페스티벌에 70여 편의 작품이 응모됐다고 한다. 아르헨티나만 해도 다큐멘터리 영화제 하면 700여 편이 응모된다고 하는데, 우린 고작 70여 편이다.

요즘 진행하고 있는 작업이 있나.

촛불 문화제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하고 있다. 올해는 촛불이 가장 활활 타지 않았나. 찍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간 건 아닌데, 나가다 보니 찍을 게 보이더라. 뭐 큰 건 아니지만 해야 할 거 같은 마음이 들어서 촛불 문화제에 대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독협의 또 다른 10년을 위한 제언을 해 달라.

제언이라. 아쉬운 건 한독협 홈페이지를 보면 초기에는 게시판에 서로 안부도 묻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물론 욕도 하고.(웃음) 뭔가 공동체적인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커져서 그런지 그렇지 못하다. 사실 이건 사업을 하는 게 아니다. 사업도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하는데.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끼리 식구라는 생각을 하면 좋겠다. 도움도 주고받고, 영화도 봐주고. 이런 커뮤니티가 활성화 되어야 하는데 그런 계기를 못 만들어 주는 거 같다. 여러 영화제가 그런 역할을 했는데 요즘엔 형식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영화도 보고, 얘기도 하고, 술도 먹으면서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 2008-10-28 오전 11:35:02  컬처뉴스 김나라 기자, 필름온 안효원 기자

 

 


Trackback 0 Comment 1
  1. Favicon of https://beforesunset.tistory.com BlogIcon 은-유 2008.10.30 08:1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감독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요... 좋은 기사 잘 봤어요.. ^^ 독립영화 10년 축하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