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신당'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03.25 ‘정명훈’인가 ‘정명박’인가? (1)
  2. 2008.11.06 디자인올림픽에 유쾌하게 딴지 걸기 - 서울디자인올림픽 평가토론회, ‘삶을 파괴하는 디자인은 폭력이다’
  3. 2008.10.06 때 이른 자서전, 심상정의 다음 행보를 기대하며 - 심상정, 『당당한 아름다움』 (2)
2009. 3. 25. 12:40

‘정명훈’인가 ‘정명박’인가?

예술가의 연대요청에 대한 정명훈식 대응법
목수정 _ 진보신당 당원
합창단원이나 오케스트라단원 정도는 그저 자신의 위대한 예술을 위한 사소한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듯한 정명훈의 발언은 연대나 인권, 노동자의 권리 따위의 개념을 송두리째 결핍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 합창단원이나 오케스트라단원 정도는 그저 자신의 위대한 예술을 위한 사소한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듯한 정명훈의 발언은 연대나 인권, 노동자의 권리 따위의 개념을 송두리째 결핍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파리에 있는 진보신당 당원들은 하루아침에 유례없는 방식으로 전원 해고된 국립오페라단 합창단 소식을 접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통해 그들의 복직을 위한 연대활동을 벌이고 있다. 우리가 이곳에서 만난 거의 모든 사람들 - 공연예술노조 위원장, 파리 오페라 합창단 단원들,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 단원들 등 - 은 우리의 설명을 들은 지 3분 만에 정황을 파악하고, 이 놀라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연대와 지지의 뜻을 즉각 표했다. 공연예술노조에선 하루 만에 지지 성명서를 발표해 주었고, 바스티유오페라의 합창단원은 거의 대부분 주저 없이 서명해 주었으며 한국 오페라 합창단 단원의 복직을 지지하는 거리콘서트 에 대한 논의도 자체적으로 진행 중이다. 그리고 그 모든 프랑스 예술가들은 한결같이 정명훈을 만나서 지원을 호소할 것을 조언했다. 그들이 보기에도 정명훈은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예술권력자의 한사람이었기에.
 
그가 2004년 국립오페라합창단과 까르멘 공연을 한 후, 자기가 만난 최고의 합창단이라고 극찬했던 바로 그 합창단의 해체 소식에 예술가의 양심을 발휘해주기를 우린 바랬다. 정명훈은 또한, 1994년 그를 부당 해고한 오페라 바스티유극장 측과 힘겨운 소송을 했던 경험을 갖고 있기도 하다. 당시 오페라 바스티유 극장의 노조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으며 뼈아픈 경험을 이겨낸 그였기에, 비슷한 사안에 대하여 그가 충분히 이해하고 자신의 힘을 보탤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비록 이명박과 막역한 사이이긴 하나, 예술가의 순진함에 기인하는 불행한 사건일 것이라고 애써 짐작하며.

3월 20일, 그를 만나기 위해 그가 지휘하는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보러 샤틀레 극장에 갔다.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된 그 콘서트는 완벽하게 우리를 고무시켰다. 나와, 함께 간 성악을 공부하는 학생당원은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사람의 정신이 맑지 않을 수 없고, 정의와 진리를 담지 않을 수 없다는데 전적으로 동의했다. 

공연이 끝나고, 극장 뒤편으로 가서 그를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린 한국 사람들이고 선생님께 간곡히 부탁을 드리고자 하는 일이 있어서 찾아왔다고
운을 떼자, 그는 대뜸 비서를 불러서 그 사람한테 말하라고 했다.
 
그의 비서에게 우리가 가져간 서명운동 용지를 보여주며, 한국에서 일어난 사태를 설명했다. 그녀는 정명훈이 아마도 이 사실들은 모를 것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오페라 합창단원들이 그의 형을 통해 정명훈의 지원을 호소했던 것을 우린 알고 있었지만, 그 비서의 말을 믿고 싶었다. 그가 다음날 아침 비행기를 타고 떠나기 때문에, 이 내용을 전달해 주고 그에게 서명하도록 할테니 아침에 호텔에 와서 찾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불어로 된 문서를 보고, 한국어였으면 더 좋았을 뻔 했다고 언질을 주었다.

한국의 합창단원들은 문화부, 오페라단과 담판을 벌이는 중요한 날인 다음 주 화요일까지 이 모든 서명을 받기를 원하고, 그는 내일 아침 떠나고... 우린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근처 사이버까페에 가서 한국어 본을 출력하여 밤에 호텔에 전달하기로 했다. 서명보다 더 중요한건 그의 생각이고, 지지의 발언이다. 중요한 사람들과 중요한 저녁식사 약속이 있어서 갔다는 정명훈씨가 지금쯤 와 있으리라 생각하고. 뫼리스 호텔에 도착했더니 그는 1층 레스토랑에서 몇몇 사람들과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기왕 온 김에 단 3분이라도 그에게 우리의 육성으로 절박한 현실을 전하고 그의 예술가적 양심에 호소하고 싶었기에. 우린 그에게 전달할 문서를 들고 기다렸다. 그러다가, 호텔의 한 직원이 우리에게 누구와 약속이 있냐고 묻고, 그렇지 않다면 나가달라고 요구했다. 돈 많은 현대의 귀족들의 충실한 심복 같은 그들은 우리를 물리적으로 쫓아낼 판이었다. 실랑이 끝에 겨우 정명훈에게 남길 메시지와 한글로 된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는 문서를 남기면 호텔측에서 그 문서를 전달하기로 하고, 글을 거의 다 쓸 무렵, 마침 그 때 그들의 긴 만찬이 끝이 났다. 정명훈은 우릴 발견하자마자 다가왔다. 


합창단 해고해도 다음날 500명 모인다?

조금 전 비서에게 전한 문건을 손에 쥐고 흔들어 대며, “도대체 이게 뭐에요. 이게 뭐하자는 일이에요”. 나는 그의 말을 한국에서 일어난 사태의 경악스러움에 대한 표현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그건 완벽한 오해였다. 그는 도대체 왜 그깟 합창단 하나 없어진 일이 뭐가 대수라고 지금 여기까지 자길 찾아와서 우리가 이러고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 기자도 아니고, 에이전시도 아니고... 도대체 우리를 어떤 사람들로 분류할지를 모르는 듯 했다. 단 한 번도 누군가가 사회적 연대 따위를 요청해 온 일은 없는 사람처럼. 약간의 설명 끝에 대충 감 잡은 그는,
“이 합창단이 없어졌다고, 그 합창단을 살려야 되겠다고 지금 여기 와 있는 거에요?
그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이기에. 그 사람들을 꼭 구해야 되요? ”

“선생님이랑 함께 공연했고, 2004년 까르멘 공연하셨을 때, 프랑스에도 없는 최고의 합창단이라고 극찬하신 바 있는 합창단입니다. 그냥 합창단 하나가 아니라, 국립오페라단에 있는 한국에선 유일한 상설 오페라합창단이 없어진다는 사실이 안타까워서 그 상황을 전하고 선생님의 도움을 청하고자 온 것입니다. 이 합창단을 없애고, 더 좋은 사람들을 뽑겠다는 것도 아니고, 아예 상설합창단을 없애고, 앞으로 모든 공연을 건별로 대학생 단체 같은 곳과 계약해서 공연하기로 한답니다.”

오페라합창단이 간직하고 있는 그의 찬사는 지나가는 립서비스였는지 그는 자신의 그 합창단에 대한 칭찬을 기억초자 하지 못했다.
 
“뭐요? 언제 같이 공연했다구요? ”하고 되물었다.
“한국은 합창단 해체해도 다음날이면 노래 잘하는 사람 500명 금방 모입니다. 한국에서는 합창단 때문에는 아무 문제없어요. 그런데 대체 왜 해체했다는 겁니까, 이유가 뭐래요? ”

“그야 물론 경영효율, 예산절감이 이유죠. 표면적인 이유는 상설합창단을 둘 수 있는 규정이 없다는 거고.”  

“거봐요. 예산이 없다는 거 아니에요. 그 예산 당신들이 어디서 만들 거에요?
다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하는 건데. 당신들이 나서서 지금 뭐하는 거에요?”
“아니요. 오히려 오페라단 예산은 올해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돈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예산 집행의 우선순위를 잘못 두고 있는 게 문제죠.”

“이봐요. 내가 서울시향에 있는데 거기서 일 년에 5-6명씩 해고당해요.
여기만 해고당하는 사람들 있는 거 아니에요. 지금 온 나라가 다 그러구 있는데, 
합창단 하나 없어졌다고... 이 사람들이 여기까지 와서...그리고, 도대체 나더러 뭘 하라는 거에요, 그래서. 여기에 서명하라구?”

우린 오페라 바스티유에서 단원들이 서명한 서명지를 보여주며, “거의 모든 합창단원들이
서명했다. 한국에서 국회의원들이나 정부에서 오로지 프랑스에서 진행되는 서명운동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프랑스에서의 지원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 같다“고 말했다. 6페이지에 빼곡히 담긴 바스티유오페라단원들의 서명을 보면서도 그의 태도에는 티끌만한 변화도 없었다.

합창단원이나 오케스트라단원 정도는 간단하게 소모품
취급해버리는 그는 연대나 인권, 노동자의 권리 따위의 개념을
송두리째 결핍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사진 공공노조)

“그거 백날 해봐야. 아무 소용없어요. 내가 한국 가서 이거 알아 볼 꺼에요.
오페라 단장한테 물어보죠. 어떻게 된건지.”

그의 말이 맞다. 그가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서명을 (할리도 없겠지만) 한다한들 아무 의미도 없다. 이제 그의 본심을 알았으니, 우린 더 기대하는 것이 없다. 그리고 그가 사건의 정황을 묻게 될, 해고 당사자 오페라 단장한테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는 너무나 뻔했다. 그는 그들의 세계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터이다.


미국에 구걸하던 사람들이, 이젠 미국쇠고기를 안 먹겠다고?

늦은 밤이니 빨리 투숙할 것을 종용하는 그의 아내인 듯한 여자 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어했다. 우리가 초반에 자기소개를 했음에도, 그는 다시 한 번 남의 일을 위해 한밤중에 그에게 달려온 우리를 외계인 보듯 하며 왜 남의 일에 나서서 이러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우리는 운동을(militant)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국 오페라의 발전을 위해, 예술가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으며 함께 일하는 세상을 위해서 연대하고 있다고 말하자, 그제서야, 그는 우리의 정체를 알아차렸다는 듯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그 100만명이나 촛불 들고 거리에 서서 미국 쇠고기 안 먹는다고 시위하는 그런 사람들이란 말이죠? 40년 전에는 미국에서 뭐 안 갖다주나 하면서 손 벌리고 있더니, 이제 와서는 미국산 쇠고기 안 먹겠다고 촛불 들고 서 있는 그 사람들. 그게 옳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게 말이나 되는... 알았어요. 알았어.”

촛불을 든 시민들을 천민으로 묘사한 한나라당 주성영의원의 망언이 언뜻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그의 말투와 어휘는 한나라당 의원들에게서 익히 접해오던 그것과 닮아있었다. 

“그렇게 불쌍한 사람들 돕고 싶으면 저기 아프리카나 가서 도와줘요. 여기서 그러지 말고.”
이 대목에선 우린 둘 다 경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저 사람이,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온 위대한 예술가 정명훈인지. 바로 조금 전 우리의 영혼을 황홀하게 감싸주던 음악을 선사하던 그 지휘자가 맞는지. 잠시 멍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과 같은 예술가들을 거리의 불쌍한 걸인 취급하는 저 인간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내 눈빛에는 어쩔 수 없이 그에 대한 무한한 경멸이 담길 수밖에 없었다.   
그 눈빛을 읽었는지, 정명훈은 제대로 역정이 났다.

“도대체 제 정신을 좀 차리세요. 공부 좀 하란 말이야. 세상이 그런 게 아니야. 이 계집애들이 말야. 한밤중에 찾아와서.”

비속어까지 서슴지 않는 그를 향해, 나는 그에게 제대로 적합한 말인 “정신차리라”는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당신이나 정신 차리세요!” 

그는 거의 우리를 때릴 듯이 씩씩거리며
“불쌍한 사람들 돕고 싶으면 아프리카에나 가라구”. 다시 한 번 아프리카를 들먹이며 코 앞까지 다가와서 소리 질렀고, “기도하라구. 기도” 하는 말을 끝으로 올라갔다.

그의 마지막 말.
“기도하라”.
그에게도 이명박이 서울을 봉헌했던, 그래서 그를 도왔던 하느님이 있었나보다.

나와 성악하는 학생은 분노와 충격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걸었다. 그녀는 울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그 예술가가 저토록 상상할 수 없는 사상의 오물을 잔뜩 머리에 품고 있다는 그 사실을 우린 소화하기 힘들었다. 예술 전체에 대해, 인생 전체에 대해 거대한 사기를 당한 듯한 기분이었다.

문득 호텔로 오기 전, 샤틀레 극장 주변 까페에서 만난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말이 생각났다. 우린 거기서 만난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한국에서의 사태를 설명했고, 그들은 모두 경악하였으며, 적극적으로 서명운동을 전개해줄 것을 약속했다. 우리가 혹시 정명훈에게 당신들이 동참을 호소할 순 없느냐는 제안에는 단호히 불가를 표명했다. 정명훈은 정치적 사안에는 늘 거리를 둔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곁들이는 말이, “당신들 지금처럼 파업하면 한국에선 감옥에 가”. 라고 정명훈이 라디오 프랑스 단원들에게 말했다는 거다.

그동안 어떻게 저 고매한 예술가가 이명박과 손발이 맞아 수년간 파트너쉽을 이룰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한 방에 해결되었다. 


정명훈 씨, 고맙습니다

 
그는 세상에 태어나서 도대체 어떤 책들을 읽었을까? 그는 연대나 인권, 노동자의 권리 따위의 개념을 송두리째 결핍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합창단원이나 오케스트라단원 정도는 그저 자신의 위대한 예술을 위한 사소한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듯한 발언. 다 갖다 버려도 다음날 얼마든지 손쉽게 충전할 수 있는 건전지라도 되는 듯. 그 사고의 경박함은 이명박, 유인촌, 이소영과 그가 한 치의 차이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물론 우리가 늦은 시간까지 그를 기다린 결례를 범하긴 했다. 그러나 조용히 옆의 로비에서 기다렸고, 그가 우리를 마주친 시간이 1시였던건, 그들의 긴 만찬이 끝난 시간이 1시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짧은 시간에 자료를 읽어야 할 그가 한국어로 된 자료를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는 초반에 “한국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약속도 안 잡고 무례하게 무조건 사람을 기다리고 끼어든다”면서 우리를 한참 나무랐다. 언짢았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잠시 3분 정도 우리의 설명을 듣고, 알겠다고 하면서 읽어보겠다고 하며 서명지를 들고 객실로 올라갔어도, 우린 그의 수면을 단지 3분 정도 지체시킬 뿐이다. 긴 얘기를 한 건 그였고, 우린 그가 쏟아내는, 사상의 오물 종합선물세트 같은 공포극을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우린 너무 빨리 넘어갔고, 그것의 연출가가 같은 사람이란 사실에서 정신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은 엄청난 혼란을 느꼈다.

촛불 발언부터 계집애 발언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자신의
가면을 벗어준 정명훈이 차라리 고맙다.
(사진 공공노조)

1994년 바스티유 오페라에서 부당하게 해고당했을 때, 그는 노조의 지원을 받아 함께 싸웠고 그래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현재 지휘하는 서울시립합창단에는 노조가 없다. 그가 취임하면서 “음악하는 사람들이 무슨 노조냐” 면서 노조에 대해 못을 박았기에 단원들은 감히 노조를 만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무노조 경영 삼성과 비슷하다.

그가 현재 지휘하는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에도 그가 지휘했던 바스티유 오페라에도 강력한 노조가 있다. 한국에서 가진 제왕적 권력이 거기에선 당연히 없는 탓이다. 2007년, 오페라 바스티유는 열흘이 넘는 강도 높은 파업을 하기도 했다. 무려 4만9천명에 달하는 고객들에 대한 환불사태가 있었다. 이곳의 예술가들이 지금의 안정적인 대우를 받으며 -합창단 연봉은 한화로 약 8천5백만원 내외, 오케스트라 단원은 1억원 내외이며 은퇴까지 맘 편히 일할 수 있는 정규직이다 - 세계 최고 수준의 음악을 안정적으로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은 예술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창작기반을 위협하는 경영자의 어떤 요구에도 당당히 맞설 수 있는 강력한 연대와 투쟁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정당히 대우하는 이 사회의 예술노동자에 대한 존중이 수반되었던 까닭이다.
 
가장 강력한 지원을 기대했던 정명훈을 통해 전원해고 사태를 가능하게 했던 문화 통치자들의 사고의 핵심을 오히려 들을 수 있었다. 문득, 그가 정직하고 양심있는 예술가였더라면, 지금까지 한국에서 일어난 그 수많은 문화예술계에서의 사건에서 그 어떤 입장표명도 하지않고 지내올 순 없었을 것임을 상기시킬 수 있었다

정명훈은 아름다운 소리를 이끌어내지만 그 소리의 구체적인 주체는 연주자들과 합창단들이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한 예술가로 대우하지 않고, 소모품 정도로 간주하는 그는 더 이상 존경을 바칠 수 있는 예술가가 아니다. 그는 권력자의 그늘 아래 안거하면서, 그가 나눠주는 달콤한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며, 세상의 어두운 구석에 대해서는 외면하는 우리시대가 만든 신화의 슬픈 이면이었다. 우리가 쇼크를 받는 수고를 감수했을지언정, 그럴싸하게 포장된 무관심을 드러내기보다, 촛불 발언부터 계집애 발언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자신의 가면을 벗어준 정명훈이 차라리 고맙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줄 막강한 권력자의 마술지팡이 같은 것은 없다. 그 어떤 친절한 권력도 우리에게 보다 나은 삶을 선물해 주진 않는다. 예술노동자들 스스로가 보다 넓은 연대의 틀에서 그것을 쟁취하려고 나서지 않는 한. 연대의 정신으로 적극적으로 서명에 동참했던 모든 프랑스 예술가들이 정명훈의 발언을 접하였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몹시 궁금하다.

정명훈이 일하는 라디오프랑스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그가 아프리카 아이들과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이 보인다. 유네세프 친선대사로 있으면서 그는 여기저기서 불우한 아이들을 위한 음악회를 가지기도 했다. 불우한 아이들을 위한 콘서트를 여는 자비를 베풀 수 있을지언정, 수십명의 예술가들이 일 할 수 있는 터전을 빼앗기고 거리에 나앉아도 채워 넣을 예술가들이 얼마든지 있으니 아무상관 없다는, 구세계의 모순에 온전히 빠져있는 자기중심의 거룩한 예술가. 어마어마한 질문 하나가 남는다. 정녕 예술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단 말인가.

Trackback 3 Comment 1
  1. Favicon of https://zskmc.tistory.com BlogIcon 사랑과 평화 2009.03.26 12:4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정명훈이 지난번 야당이 국회투쟁할 때 헛소리하는 것 할때 웃기는 넘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였군,,,,헌심한 놈같이라고...저런 놈이 무슨 예술을 한다고....예술은 약자와의 연대속에 싹트는 것을 모르는군...베에토벤이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를 때 영웅표지를 찢을 것을 모르나 보군....저런 놈이 베토벤을 연주하면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군....

2008. 11. 6. 09:00

디자인올림픽에 유쾌하게 딴지 걸기 - 서울디자인올림픽 평가토론회, ‘삶을 파괴하는 디자인은 폭력이다’

10월 30일 파이낸스 빌딩 앞에서 진행된 디자인올림픽 평가토론회.
▲ 10월 30일 파이낸스 빌딩 앞에서 진행된 디자인올림픽 평가토론회.

이른바 몸부림, 혹은 꿈틀거림이었다. 차가워진 늦가을 저녁의 서울거리는 그만큼 걸음걸이를 재촉하는 힘이 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그들의 걸음이 우리 때문에 지체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하자 했다. 문화연대와 진보신당 서울시당이 30일 서울의 거리에 깔아 놓았던 거리공연과 토론회는 '차이'와 '다른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서울시는 지난 10월 10일부터 30일까지 서울잠실주경기장에서 '서울디자인올림픽'을 진행했다. 수많은 언론들은 이 행사가 성공적이었다고 입 모아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그동안 서울시가 보여주었던 포크레인 대신 다양한 '사인sign'이 등장했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개발주의가 도사리고 있었다.

문화연대와 진보신당 서울시당은 이번 서울디자인올림픽을 통해, 서울시 디자인정책의 이면에 존재하는 개발의 폭력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를 위해 이런 저런 사업들을 진행하였는데, '아름다운 노점' 사진전도 이런 흐름에 놓여있다. 우리가 말하는 거리는 보행자들의 통행로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토론회 장소가 되기고 하고 무엇보다 사회적 약자인 노점상들이 생계의 밑천을 만들어가는 일터이기도 하다. 이렇듯 거리는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서울시는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노점상 대신 화단을 선택했다. 서울시민들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노점의 맨얼굴을 보여줌으로써 노점은 그렇게 쉽게 사라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이 연장선에 놓인 또 하나의 행사가 10월 30일 청계광장 옆 파이낸스빌딩 앞에서 열린 작은 토론회다. '서울디자인올림픽 평가토론회'가 그것인데, '삶을 파괴하는 디자인은 폭력이다'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다. 저녁 6시 30분쯤 보사노바 가수인 소히와 뉴포크 가수인 무중력소년이 토론회 사전행사로 노래를 불렀다. 가수 소히가 말한 것처럼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우리와는 다르게 '부유해' 보였다. 도심에서 진행되는 이 낯선 행사가 낯섬 이상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분명히 있었다. 저녁 7시부터 진행된 평가토론회는 진보신당 정책위원 김현우, 빈곤사회연대 활동가인 조승화, 문화연대 임정희 선생이 토론자로 나섰다. 그리고 이미 제시된 공통질문 5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서울디자인올림픽'을 위한 5가지 질문

우선 5개의 공통질문을 살펴보면 첫번째 '도대체 디자인이 무엇이며, 그것이 왜 중요한가(혹은 사소한가)', 두번째 '디자인에 있어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세번째 '디자인올림픽에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무엇이었나', 네번째 '디자인올림픽은 과연 할 만한 사업이었나', 다섯번째 '계속되는 디자인올림픽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였다.

워낙 형식 자체가 없었던 탓에 각각의 질문들과 답들이 서로 넘나들었다. 우선 김현우 정책위원은 디자인올림픽에서 불러온 '디자인'의 모습에 주목했다. 실제로 '서울디자인올림픽'에 참가하여 볼 수 있었던 디자인이란 것이 결국은 '포장지'에 다름아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은 '돈벌이'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런 디자인이란 결국 서울시가 아니라 기업에서 해도 그만인 디자인이었을 뿐이었다는 거다. 그러면서 디자인정책이 조금이라도 공공성을 가지려면 3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쾌적성, 보편성, 시민참여가 그것인데, 이런 기준은 서울시의 디자인정책을 평가하는 주요한 잣대로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빈곤사회연대 조승화 활동가는 디자인을 그간의 서울시 정책이 보여준 흐름에 놓고자 했다. 서울시가 디자인거리조성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보여준 노점상 철거과정에서의 폭력성, 뉴타운 난개발에서 볼 수 있는 획일성 등을 지적하면서, 서울시가 말하는 디자인이라는 것은 알맹이가 없는 정치적인 수사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사실상 디자인의 공공성이라는 것이 별도로 존재할 수 있는가에 의심을 보였다. 한마디로 디자인만의 자율적인 공간이 없다는 의혹이었다.

반면 임정희 선생의 진단은 달랐다. 임정희 선생은 우선 디자인이라는 개념의 이중성을 강조했다. 애초 16세기부터 등장한 디자인 개념은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의 의미가 강했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인은 상당히 공학적인 개념, 혹은 정돈잡힌(질서있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개념은 서울시에서 활용하는 '디자인'의 용례와 많이 닮아 있다. 하지만 임정희 선생이 강조한 것은 디자인의 최근 흐름이었다. 그것은 '사인sign'을 붙였다 뗐다(de-) 하는 행위처럼 사회적 의미화의 과정으로서 디자인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디자인이란 애초부터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등 사회적 관계에서 벗어난 개념이 아닌 셈이다. 연장선상에서 임정희 선생에게 디자인의 공공성이란, 원래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그대로 놔주는 것일 수 있겠다.

디자인올림픽 행사장 전경. 서울시는 188만명의 시민이 행사장을 찾았다고 밝혔다.


'서울디자인올림픽'! 오세훈 서울시장만 있더라

질문은 그대로 잠실 주경기장에서 진행된 실제 '서울디자인올림픽'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우선 서울디자인올림픽에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묻는 질문에 대해, 오세훈 서울시장과 개발주의와 상업디자인, 껍데기뿐인 환경디자인은 있었지만 참여하는 서울시민과 노숙인 등 사회적 약자, 그리고 사회적 관계를 의미하는 '진짜' 디자인은 없었다고 진단했다.

그도 그걸 것이, 이번 서울디자인올림픽이 진행된 잠실주경기장은 'SH공사', '토지공사' 등 핀트가 잘 맞지 않는 공공기관의 부스들과 각종 기업에서 마련한 상품 안내부스가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도시갤러리 사업에 따라 지원되던 일부 예술활동들이 일부 소환되어 펼쳐졌다. 그리고 시민들이 좋아했던 수많은 설치물들은 일반적인 놀이동산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냉정한 평가도 이어졌다.

이런 현상은 실제로 서울시가 지난 29일 발표했던 서울디자인올림픽 입장객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잘 드러난다. 44%의 입장객들이 이번 행사를 '나들이'삼아 찾았다고 답했다. 물론 나들이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서울시민의 디자인감수성을 높이고자 80억원에 가까운 예산을 들여 벌인 행사치고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결과임에는 틀림없었다. 특히 같은 설문조사에 따르면 '어떤 경로를 통해 행사에 참가하게 되었나'라는 질문에 최대응답은 23% 가까이가 답한 '학교내 홍보' 때문이었다.

서울시는 188만명의 서울시민이 행사에 참여했다고 자랑했다. 하지만 이번 행사의 목적이 '서울시민의 동원'이었다면 80억에 달하는 예산으로 다른 행사를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평가토론회에 참여한 토론자들이 이번 디자인올림픽을 평가하는 방식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전부 아니다'는 식은 아니었다고 본다. 대부분의 토론자들이 공통질문 네번째인 '디자인올림픽이 과연 할 만한 사업이었나'라는 질문에 부정적인 답을 하면서도 '만약~'이라는 말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현우 진보신당 정책위원은 디자인올림픽이 서울시민들의 참여를 보장하고 상업화될 수 없는 서울시의 공적 공간을 풍요롭게 하는 방안을 서로 모색하는 자리라면 디자인올림픽과 같은 자리는 있어도 좋지만, 사실상 이번 디자인올림픽에선 이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안하는 것이 나았다는 평가다. 조승화 빈곤사회연대 활동가의 지적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서울시의 디자인 정책이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명확하고 지금까지 배제되어 있던 사회적 약자들을 다시 서울시민의 이름으로 불러올 수 있다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입장에 명확히 선을 그은 것은 디자인을 관계의 망으로 본 문화연대 임정희 선생이다. 임정희 선생은 디자인이라는 것이 일정기간에 특정한 장소에 모여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입장을 표했다. 이미 올림픽이라는 말이나 디자인 공모전 등이 진행된 데서 볼 수 있듯이 디자인이라는 행위를 제한된 행사로 한정짓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원래의 뜻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결국 '우리'의 자리를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번 서울디자인올림픽은 올해 시범사업을 기점으로 2010년까지 매년 열릴 행사다. 애당초 2010년에 서울이 세계디자인수도로 선정된 데에 따른 부대행사로 기획된 터였다. 문제는 여전히 '왜 이 사업이 필요한가'라는 합의 없이 내년도 사업이 확정되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자화자찬식의 성과보고서가 또 나올 수도 있겠다. 하지만 토론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바와 같이 '서울을 서울이게 만드는 것'에 대한 고민 없이 불꽃놀이와 '무한도전'만으로 서울시민의 동원을 넘어선 참여를 이루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해서 내년에도 서울디자인올림픽에 대한 대응을 해야 한다는 데는 의견합의를 보았다. 다만 그 방식에 있어서 올해보다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하자는 반성이 있었다. 임정희 선생의 지적대로 서울시가 '자기만의 리그'를 하듯이 우리 역시 '우리만의 리그'를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반성을 바탕으로 이런 저런 고민들이 지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서울시의 디자인정책은 바로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시 안에서, 밖에서 다양한 흐름들을 조직해내면서 즐거운 일들을 만들 것이다.

내년 서울디자인올림픽의 주제는 'I Design'으로 확정되었다. 우리는 그 대문자 'I'에서 촘촘한 'i'들의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우리들의 팍팍하면서도 즐거운 숙제다.




* 2008-11-04 오후 4:03:08   김상철 _ 진보신당 서울시당 정책기획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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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0. 6. 19:45

때 이른 자서전, 심상정의 다음 행보를 기대하며 - 심상정, 『당당한 아름다움』

심상정, 『당당한 아름다움』, 레디앙, 2008.
▲ 심상정, 『당당한 아름다움』, 레디앙, 2008.

자전소설이란 이름으로 픽션이 논픽션으로 둔갑해 팔리던 시절이 있었다. 소설의 시대에 실화란 다소 구질구질해 보였을 법도 하고 신뢰가 안 갔을 수도 있다. 당신은 그렇게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그게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게 뭐냐, 당신의 성공담을 일면식도 없는 내가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나. 그런데 재밌게도 이게 소설이 되면 묘하게 따뜻한 이야기가 되고, ‘이게 작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거래’라는 입소문이 붙어 ‘감동 실화소설’로 격상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근래 들어 소설이라는 이복동생일랑 제 놀던 물에서 맘껏 놀게 두고 온전한 자전들이 출판되고 있다. 납득될 만한 단서가 있어야만 하는 소설식 개연성과는 반대로 현실이란 건 사실 온갖 우연이 남발되는 장소가 아닌가. 드라마보다 드라마 같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우연은 삶의 오묘함에 감탄하게 만든다. 세상이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 너머 영적인 섭리에 의해 이루어지는지도 모른다는 경외심마저 갖게 만든다.

소설이 주는 감동이 단순한 재미에 불과하다고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시고기』 속의 아버지가, 전신마비 아들을 실은 휠체어를 밀고 보스톤 마라톤을 완주하는 호이트 부자에 관한 실화만큼 감동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실화를 읽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거기, 성공이든 실패든 나 역시 예외는 아닐 거라는 실감에 있을 것이다.

책 속의 인물이 이건희가 아니라 심상정이라면 더욱 그렇지 않을까. 그 삶의 뒤에는 소설보다 더 소설적인 이야기가 숨어 있을 거라는 기대가 들 수밖에 없다. 자서전이나 평전도 근본적으로 책인 까닭에, 이렇게 살았더니 돈이 제 발로 찾아오더라는 따분한 자기자랑, 사실은 애비 유산 자랑 따위와는 본질적으로 기대치가 다를 수밖에 없다.

『당당한 아름다움』은 심상정이 쓴 심상정 이야기다. 따라서 평전은 아니다. 그러면 자서전인가? 의당 그래야만 하는데, 이 책은 자서전도 아니다. 이 책은 의정활동보고서 혹은 전직 국회의원의 낙선사례다. 지난 4년간 국회의원 심상정은 이렇게나 노력했고 그 결과 이처럼 대단한 실적을 쌓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선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유권자여 이 보고서를 읽고 4년 후에 올바른 판단하시길. 심상정이라는 아이템으로 이 정도의 책밖에 되지 못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출판 기획자의 역량과 감각 탓이다. 인간 심상정을 볼 수 있었던 큰 기회였는데 아쉽게 됐다.

자서전의 형식을 빌린 평전인데다, 구성 방식 또한 심상정이란 인물보다는 박정희에게나 어울릴 신화화 일변도다. 평전 속 간디는 지독한 싸움꾼이고 그의 갈등은 인도의 역사와 인류의 정신사를 뒤바꿀 갈림길이지만, 자서전 속 간디는 지독히 무능한 인간이고 그의 갈등은 책을 접어 던져 버리고 싶을 만큼 읽는 이를 짜증나게 만든다. 그런데 이 인물이 마하트마-위대한 영혼이란 칭송을 받게 되고 실제로도 위대해져 가되, 위대한 동시에 바보스럽다. 평전 속 밥 딜런은 시대의 대변자고 뒤틀린 시대를 또 한 번 비트는 재주 있는 시인이지만, 자서전 속 밥 딜런은 시대의 대변자이고 싶지도 않고 대변한 적도 없으며 신문을 보다가 이상한 사건이 있으면 가사를 쓰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면 그들은 정말로 사람들의 평과는 무관한 사람이냐, 절대로 그렇지 않다.

심상정의 자전에 대한 기대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정책을 입안하고 현 시대의 문제를 나열하고 다음 선거를 대비하는 내용을 원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대단해요, 하는 사회 각계 인사의 칭송을 바란 게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 종잇장들이 이재오의 의정활동보고서라든가 정동영의 낙선사례라면 예사롭게 지나치거나 예사롭지 않게 집어 던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사롭지 않다. 단지 심상정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렇다. 그녀는 권위가 있기는커녕 세상의 온갖 권위와 맞서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대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권위를 주고 자신을 그 권위를 지키는 파수꾼이라 자처하게 만든다.

대선 참패 후 민주노동당은 대선 패배의 책임 추궁과 당 혁신을 위해 비상대책위를 구성하고 그녀를 위원장으로 추대한다. 선거가 목전인 때에, 지금쯤이면 지역구로 내려가 유권자를 만나야 할 때에 그녀에게 달가운 일일 수 없다. 그녀는 먼저 당을 수습하기로 한다. 그러나 끝내 분당. 아무런 성과 없이 지역구로 내려 온 그녀에게 다시 아버지의 부고라는 시련이 다가온다. 당선하는 거 보실 때까지 살아 주십사 약속했었다. 당선하고 찾아오라 말씀하시던 아버지였다. 심상정이라는 이름에 기대를 걸고 찾아 든 자원봉사자들이 그녀의 빈자리를 메운다. 점차 줄어드는 격차, 필요한 건 시간이다.

선호도, 이미지, 그런 건 애시 당초 상대가 안 됐다. ‘빨갱이 데모꾼’들이 모인 당이라 하더라도 심상정이란 이름만은 믿을 수 있지 않나. 하지만 그녀의 당선에 가장 큰 걸림돌은 애석하게도 유권자다. 그들이 원하는 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안정된 잠자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 공전의 아파트값 폭등으로 몇 해 전 이웃 마을 사람들이 한 몫 챙겨 갈 때 생겨난 복통을 치료하는 일이다. 그녀의 공약엔 애석하게도 뉴타운이 빠져 있다. 사람들이 찾고 있는 것은 뉴타운 세 글자다.

그녀는 졌다. 루쉰이 입을 빌려 그녀는 다음을 기약한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녀의 확성기가 되는 날을 기다리며 그녀는 지금 지역공동체로 내려가 있다.

이 얼마나 눈시울 찍어 내려야 하는 이야기인가. 그렇더라도 이 책은 지루한 부분이 많다. 안 읽어도 그만인 서론, 비슷한 본론, 판박이 결론으로 이어지는 ‘내가 아는 심상정’과 같은 콘텐츠는 이 책을 이도저도 아닌 것으로 만든다. ‘이것은 모두가 지지해 주신 국민 여러분의 성원’ 투의 문장이 난립하면서 당원 홍보지를 읽고 있었나 착각하게도 만든다. 하지만 읽어야 한다. 스포츠채널에서 두고두고 방영하는 ‘감동의 그 순간’이 〈우생순〉의 감동을 능가하듯, 심상정에게 걸어볼 수 있는 희망은 이 책을 능가하는 까닭이다.




* 2008-10-02 오후 7:01:48  컬처뉴스 이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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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uoy.tistory.com BlogIcon buoy.kr 2008.10.07 00:4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재미있습니다 ^^ 추천 한 표 던지고 갑니다.

  2. Favicon of https://culturenews.tistory.com BlogIcon 컬처뉴스 2008.10.08 16:04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종종 들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