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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09 워낭소리, 초월적 우정의 기막힌 전도
  2. 2009.02.13 워낭소리 성공 오히려 독 될까
  3. 2009.02.09 <워낭소리> 마음의 고향, 그것뿐이다. (7)
2009. 3. 9. 09:27

워낭소리, 초월적 우정의 기막힌 전도

소와 노인의 우정이 은폐하는 풍경들
                                                                                                                박우성 _ 영화 칼럼니스트
<워낭소리>의 초월적 우정은 현실적 비탄으로부터 눈을 감아버림으로써 비로소 성립된 게 아닐까?
▲ <워낭소리>의 초월적 우정은 현실적 비탄으로부터 눈을 감아버림으로써 비로소 성립된 게 아닐까?

나는 <워낭소리>의 감독이 영화를 둘러싼 예상치 못한 사태들을 두고 ‘무섭다’고 한 것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이것은 결코 복에 겨운 수사적 넋두리가 아니다. 무서운 속도로 찾아드는 관객들이 무섭고, 경북 봉화에 직접 찾아가 영화의 주인공에게 돈까지 건네며 사진 한 장 찍자고 해도 크게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하는 일부 관객의 뻔뻔함이 무섭고, 그것에 발맞추어 아예 그곳을 관광 상품으로 만들겠다는 지자체의 속물근성 역시 무섭다. 하지만 예측건대 가장 무서운 것은, 취임 후 처음으로 대통령이 직접 납시어 <워낭소리>를 봐버렸다는 게 아닐까? 그것은 결코 간단한 사안이 아니다. 독립영화의 발전을 위해서라고? 골계의 극치다. 반대로, 대통령이 그것을 봤다는 것은, 대통령이 봐도 크게 문제될 게 없다는, 대통령도 봤으니까 국민 여러분도 봐도 된다는 혹은 반드시 봐야만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다름 아니라 그것은 대통령이 만천하에 영화를 ‘허락’한 사태인 것이다.

최근 <워낭소리>를 둘러싼 논쟁이 화제다. 요컨대 영화가 작위적인 편집방법, 그러니까 소가 눈물 흘리는 이미지를 두 군데의 핵심 장면에 억지로 집어넣어 관객의 감동을 기만적으로 조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너무나 타당한 지적이다. 게다가 이는 단지 편집에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가령 자막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워낭소리>는 인물들의 말(음성)을 화면의 우측 하단의 자막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굳이 ‘번역’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것이 음성중심의 지역어(방언)를 문자중심의 국민국가언어(표준어)로 확대생산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막(표준어) 덕분에 우리는 너무나 편하게 영화에 빠져들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지나치게 그것에 의존하다보니 정작 사운드(특히 음성언어)나 이미지 자체를 등한시해버리는 기만이 발생한다. 더구나 ‘번역’의 전 과정에 새겨진 감독의 입김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런 식의 논쟁이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접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결국에 그것은 ‘다큐는 작위적(가짜 혹은 픽션)이어서는 안 된다’ 식의 계몽적 언명으로 수렴될 뿐이다. 정말이지 다큐영화는 ‘진짜’를 ‘진짜의 방법’으로만 다루어야 하는가? 아니, 애초에 그런 것들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감히 말하건대 나는, <워낭소리>가 배치한 작위적 장치보다, 영화를 그런 식의 ‘진짜(다큐)/가짜(극영화)’로 구분하려는 태도가, 훨씬 더 작위적이라 생각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가 설사 작위적인 장치에 기만당한다 하더라도 크게 기분 나빠할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점이다. 속아도 상관없다는 말이 아니다. 반대로 과연 몇 명의 관객이 정말이지 소(牛)가 바로 그 절묘한 순간에 ‘인간적인’ 눈물을 흘렸다고 있는 그대로 믿어버리겠는가? 그러기에는 작위적 장치의 도식이 너무나 거칠다. 그런데 분명 속지 않았음에도, 그러나 감동해버린다면?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속아버린다면? 주목해야 할 것은 단지 속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영화가 작위적으로 감동을 조장한다는 것을 분명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쉽게 감동해버리는 사태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워낭소리>만의 특출한 방식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보편적이다. 일테면 최근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드라마만 해도 그렇다. 그것은 과장이라는 것을 굳이 감추지 않고(아니 오히려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반대로 우리는 그것이 허위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주체적으로’ 휘둘려버린다. 하물며 광고의 경우는 또 어떠한가? 이런 점에서 나는 기만성이 뻔히 보이는 장치들이 아니라 반대로 결코 기만적으로 보이지 않는, 그리하여 영화를 보는 내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장치들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말장난 같지만 단순한 작위성이 아니라 작위적이지 않은 것들의 작위성, 기만적이지 않은 것들의 기만성 말이다. 

알다시피 <워낭소리>의 영어 제목은 'Old Partner'다. 물론 그것은 ‘워낭소리’의 명시적 의미, 즉 노인과 소의 우정을 지시한다. 처음부터 영화는 노인과 소의 우정, 그것도 몇 십 년이 넘는 우정을 그리겠노라 선언하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사소해보이지만 내가 볼 때 이것이야 말로 간단히 넘어가서는 안 될 문제다. 실제로 확인해 보니 <워낭소리>에 노인과 소의 우정 따위는 없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워낭소리>가 <워낭소리>일 수 있는 공리(公理)이며, 그렇기에 결코 무너져서는 안 될 경계이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선험적으로 그냥 그렇게 주어지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점이다. 역으로 영화 <워낭소리>는 공리(경계=우정)를 사수하기 위해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장치를 동원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앞서 인물들의 말이 대부분 심한 사투리로 발화되기 때문에 쉽게 알아들을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하여 감독은 자막을 사용한 것이지만, 그런데 개중에는 굳이 그런 식의 도움 없이도 누구나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발화가 있다. 예상했다시피 그것은 할아버지의 중얼거림, 즉 ‘아파’이다. 그런데 <워낭소리>에서 할아버지는 그냥 아픈 게 아니다. 물론 이것 역시 할아버지께서 실제로는 편찮으시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반대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제 할아버지의 건강과는 별도로 적절한 영화적 조율을 거쳐 철저히 구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파’의 중얼거림이 본격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하는 지점은 정확히 수의사의 발언이 있은 직후, 즉 소가 채 일 년도 살지 못할 거라는 진단이 나온 이후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볼 때 그것은 둘이 함께 죽어가고 있다는 운명론적 징후 혹은 설정된 것으로서의 ‘동병상련’이다. 쉽게 말해 영화에서 노인은 그냥 혼자서 아픈 게 아니라 소가 아프니까 아픈 거다. 소 역시 그냥 아픈 게 아니라 할아버지가 아프니까 아픈 거다. 요컨대 우리는 이런 식의 조율로 물 흐르듯 구성되는 상상적 동일화(=우정)의 광경을 뚜렷하게 목격한다.

물론 그것만이 아니다. 사실 <워낭소리>의 초반부는 다소 불편하다. 다 죽어가는 소가 노인이 탄 달구지를 너무나 힘겹게 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인과 소의 우정이 깨지고 마는가? 아니다. 상황은 오히려 정반대다. 구축을 위한 일시적 탈구축이었다고나 할까? 그것과 병행하여 이어지는 장면들에서 이제는 소의 힘겨움만큼이나 힘겹게 소의 먹잇감을 구하는 노인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둘의 관계는 철저히 쌍방향적이다. 더구나 클로즈업된 할아버지의 앙상한 다리 옆의 또 정확히 그만큼 앙상한 소의 체구를 확인하시라. 아니, 영화가 영사되는 동안 지속적으로 우리의 귀를 자극하는 워낭소리 자체가 둘의 커뮤니케이션(=우정)을 끊임없이 구성하는 음성적 기표이다. 물론 노인과 소 사이를 질투하는 할머니만큼은 조금 다르게 해석할 수 있겠다. 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닌 것이, 할머니가 소가 죽어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말하는 이유는, 소가 빨리 죽어버렸으면 하는 게 아니라, 죽음이야 말로 소와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구시대적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게끔 하는 유일한 해방구이기 때문이다. 물론 소의 입장에서 죽음이라는 사태는 가혹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과 할머니의 진심은 별개다. 더구나 할머니는 몇 차례나 영감이 죽으면 따라 죽겠다고 선언하지 않는가. 말하자면 표면적으로는 엇갈리는 듯한 삼각관계가 실은 단단히 묶여 있는 상상적 동일화이자 우정의 공동체인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공동체는 해질녘 역광으로 잡힌 노인과 소의 초월적 미장센으로 기어이 완결된다.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 말하는데, 나는 지금 실제 경북 봉화의 할아버님과 이미 세상을 떠난 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더구나 앞서도 강조했듯 둘의 관계가 그다지 특별할 게 없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결코 아니다. 분명 할아버님과 소는 감히 몇 마디 말 따위로 표현할 수 없는 각고의 인연을 형성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내가 여기서 거론할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할아버님과 노인의 실제 관계가 영화가 그려내는 식의 운명론적 우정과는 결코 동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설사 할아버님과 소의 우정이 존재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카메라에 포착되는 한, 그리하여 편집과정을 거치고 다양한 영화적 기법 속에 재현되어버린 이상, 작위성의 침입을 막을 길은 없다. 말하자면 그 각고의 인연은 영화라는 매개체를 거치면서 보다 일관되게, 보다 가지런하게, 보다 균질적으로 계량화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워낭소리>는 실제의 그것보다 휠씬 더 딱딱하고 견고하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주의사항 하나! 방금 말한 실제 현실과 영화적 재현 사이의 관계를 혼동해버리면 위험하다는 점이다. 그것을 혼동하는 순간 경북 봉화의 할아버님과 할머님은 돈을 주고 사진을 찍어도 크게 문제될 게 없는 객체 혹은 관광 상품의 도구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영화의 상상적 균질화가 너무나 부드럽게 형성되는 탓에, 그것을 능동적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2월 15일 대학로 동숭아트센터에서 <워낭소리>를 관람했다.

그것과 더불어 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구성하는 상상적 경계가 자연스럽다 못해 지나치다는 것, 그리하여 그 경계에 포함되지 않는 것들이 부정되거나 골계의 대상으로 결락되어버린다는 점이다. ‘경계 안(선)/경계 밖(악)’의 단순한 이분법을 논하자는 게 아니다. 문제는 경계의 안쪽(공동체=우정)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자폐성이다. 물론 이것 역시 상대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워낭소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어쩌면 몇몇 예외적 상황을 뺀 대부분의 영화는 나름대로의 경계 쌓기에 충실하다. 급기야 프레임 속에 담는다는 것 자체가 안(볼 수 있는 것)과 밖(볼 수 없는 것)의 경계설정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워낭소리>의 경계를 단지 그것이 지나치다 하여 무작정 비판할 수만은 없다. 그런데 경계를 설정한다는 것과 그것이 유발하는 배제와 누락의 사태는 전혀 다른 문제가 아닐까? 비유컨대 아무리 도시재개발이 필요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억울한 추방자가 생겨서는 안 되는 것처럼, 영화가 설정한 자명성으로부터 추방되어 부정되거나 희화화되는 존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따라 상황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더구나 그것이 함부로 부정되거나 희화화되어서는 안 되는 그 무엇이라고 할 때 사태는 심각하다.

쉽게 잊어버리지만 <워낭소리>에는 단지 한 마리의 소만 등장하는 게 아니다. 정확히 말해 세 마리의 소, 즉, 늙은 소, 늙은 소를 대체하기 위해 들여온 젊은 소, 그리고 젊은 소가 낳은 송아지가 있다. 그런데 혹시 젊은 소가 지나치게 탐욕적으로 보이지는 않던가? 가령 늙은 소의 여물을 힘으로 빼앗는 모습, 자기가 낳은 송아지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모습, 늙은 소가 힘겹게 달구지를 끌 때 마구간에서 여물만 씹던 모습들 말이다. 물론 이런 식의 반복은 정서적 대비를 환기하고 그 둘의 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예증한다. 그러니까 젊은 소는, 늙은 소를 대체하기 위해 거기 있었던 거지만, 그러나 처음부터 그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물론 젊은 소가 어디까지나 외부에서 온 침입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무슨 이유로 철저히 외부적인가? 그런데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하다. 바로 이 속에 노인과 소를 30년 동안 묶어 왔던 우정의 역사성 혹은 기원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바로 이 지점에서 상상적 동일화로 구축된 공동체(=우정)가 실은 배제해서는 안 될 것들을 누락시킴으로써 성립된 가공물이었음이 드러난다.

젊은 소가 외부적 침입자로 머물러야만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달구지를 끌기에는 젊은 소가 지나치게 방정맞다는 점. 그러니까 젊은 소가 노인에게 ‘일소’로서의 역량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 실제로 노인은 그것을 ‘일소’로 교화시키기 위해 무단히 애를 쓴다. 하지만 봤다시피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그렇다면 반대로 늙은 소의 경우는 어떠한가? 늙은 소가 30년 전에 공동체로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스럽게도’ 달구지를 충분히 끌고도 남을 ‘일소’로서의 역량을 보여줬기 때문은 아닐까? 이런 사항을 가정한다고 했을 때, 그렇다면 둘이 관계를 형성하는 결정적 계기는 다름 아니라, ‘동물에 대한 인간의 착취’ 혹은 ‘타자(자연)에 대한 주체의 사유화(인간)’였던 게 아닐까? 이것이야 말로 ‘일소’가 되지 못한 젊은 소가 멀리 팔려가면서 우리에게 던진 공동체(=우정)의 기원이다. 착취당할 조건이 성립되지 않거나 폭력의 행사에 반항하면 공동체로부터 어김없이 추방당한다는!

나는 지금 <워낭소리>가 은폐시킨 폭력성을 문제 삼고 있다. 균질적이고 초월적인 우정을 구축하기 위해 폭력을 은폐해버리는 사태 말이다. 그런데 한 발 더 나아가 비판해야 할 것은 그것을 위해서라면 폭력성 따위 정도는 은폐되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비윤리적 발상 바로 그것이다. 할머니의 잔소리에 짜증이 난 노인이 늙은 소를 마구 때리는 장면이 떠오른다. 동시에 소가 아니었으면 9남매를 못 키웠을 거라는 소리도 들린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전혀 작위적인 것으로 아니면 불편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소의 희생적 사랑이 아름다운 경북 봉화의 풍경과 어울려 숭고의 수준으로 승화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인간중심의 은유가 아닐까? 그리하여 오히려 그것은 9남매를 키우기 위해 소가 30년 동안이나 착취당했다는 뜻이 아닐까? 계속해서 클로즈업되는 할아버지의 불편한 발을 30년 동안 대신했을 뿐이라고? 그런데 왜 말 못하는 소가 구타당하면서까지 그런 책무를 떠맡아야만 하는가? 아니, 그 문제는 둘째로 치고, 그것을 두고 과연 <워낭소리>처럼 ‘Old Partner'라 지칭해버려도 되는 것인가? 이것이야 말로 너무나 작위적이고 기만적이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덧붙여, 여전히 노인은 아프다. 그리하여 오늘도 다 쓰러져 가는 늙은 소에게 고집스레 달구지를 맡기고 병원으로 향한다. 그런데 그 때, 우연치고는 너무나 기막힌 장면이 연출된다. 우시장(牛市場)으로 보이는 곳을 달구지가 지나갈 무렵 그 너머로 소고기의 수입을 반대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그런데 이 순간,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전도가 발생한다. 있는 그대로 따지자면 이 장면이야 말로 가장 슬퍼야 한다. 죽음의 그림자가 덧씌워진 운명론적 우정과 절대자본주의의 물결에 떠밀려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축산농가의 슬픈 표정이 오버랩될 거라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 극장을 가득 채운 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성숙하지 못한 관객을 문제시 하자는 게 아니다. 반대로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영화가 배열해 놓은 친절한 규칙들에 몰입했다는 사실 뿐이다. 그러니까 축산농가의 현실적 비탄 역시 어디까지나 운명적 절대경계 너머에 있을 뿐이고, 초월적 우정에 비해 그것은 오히려 속된 것으로까지 보이는 사태가 발생한다. 과연 그러하다면 <워낭소리>의 초월적 우정은 원래 그렇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현실적 비탄으로부터 눈을 감아버림으로써 나아가 그것을 추방시킴으로써 비로소 성립된 게 아닐까? 경계 너머의 풍경은 추방되거나 무시되거나 희화화되어도 문제될 게 없다는 인식은, 탈역사의 풍경이라는 기막힌 전도를 낳고 만다. 끝으로 이 장면을 보면서 누가 제일 흐뭇했을까? 그리하여 장관의 권유에 따라 대통령까지도 직접 납시어 <워낭소리>의 관람을 ‘허락’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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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고향,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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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13. 09:43

워낭소리 성공 오히려 독 될까

 - 독립영화 감독모임, '독립영화 환경, 열악해지고 있다'
                                                                                                                                         박휘진 기자
2009년 눈부신 성과를 기록하고 있는 한국의 독립영화들, 그러나 아직 현실은 냉혹하다.
▲ 2009년 눈부신 성과를 기록하고 있는 한국의 독립영화들, 그러나 아직 현실은 냉혹하다.

<워낭소리>가 독립영화 최초로 30만 명 관객을 기록하고, <똥파리>는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타이거상 수상, 최근 개봉한 <낮술>은 매진사례를 기록하는 등 2009년 현재 한국의 독립영화는 생생하게 팔딱거리고 있다. 그럼에도 ‘독립영화의 현실을 걱정하는 감독모임’은 2월 11일 광화문 미디액트에서 ‘독립영화가 살아야, 한국영화가 산다’며 긴급 기자 간담회를 열었다. 독립영화계는 지금 성공을 자축하는 축배를 들 수가 없는 것이다.

워낭소리 제작자이자 한국독립영화협회 사무총장인 고영재 PD는 “워낭소리가 잘 돼서 너무 좋지만 마냥 좋지만은 않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그는 “워낭소리를 비롯한 많은 독립영화들이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는 것과 무관하게 독립영화 환경은 더욱 열악해지고 있다. 여전히 극장을 확보하지 못 해 개봉조차 할 수 없는 영화가 너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진흥위원회(이하영진위)에서는 독립영화 지원 정책을 축소시키거나 폐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현실이 워낭소리와 여타 독립영화들의 성과에 가려져서는 안 된다”며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2008년 영상물등급위원회 선정 올해의 좋은 영상물 대상을 수상한 <동백 아가씨>는 영화 제작부터 관객을 만나기까지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동백 아가씨>의 박정숙 감독은 “영진위의 제작 지원이 천에서 천오백만 원 정도인데, 나는 이 영화를 찍는데 3년이 걸렸다. 지원금으로는 영화 제작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각종 아르바이트와 병행하고 빚을 질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제작이 끝난 후에도 배급에 대한 생각을 할 수가 없는 게 그간 진 빚을 갚으려면 다시 아르바이트에 전념해야 한다. 그런 후에야 배급을 생각할 수 있다.”며 독립영화의 팍팍한 현실을 언급했다.

제작 및 배급의 어려움은 비단 박정숙 감독만의 문제는 아니다. 간담회에 참여한 <워낭소리>의 이충렬 감독,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의 안해룡 감독,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 <할매꽃>의 문정현 감독 모두 비슷한 경험을 지녔다. 게다가 영진위가 몇 년째 예산을 6억원으로 고정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2009년에는 ‘다양성 영화 개봉지원사업’을 폐지하여 앞으로 독립영화가 관객을 만나는 길은 더더욱 요원해질 전망이다.

안해룡 감독은 “워낭소리가 히트해서 이제 개봉지원 안 해도 되겠다는 말들을 하는데 이게 바로 현실 왜곡 아니겠느냐”며 이처럼 계속 지원을 없애려고만 하면 독립영화를 지속할 수 있는 인력이 더 이상 유지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양익준 감독은 “내 영화가 다양성영화 개봉지원에 지원을 못 하게 된 첫 작품이다. 아버지께 영화 개봉하려고 돈 좀 더 빌려달라 했더니(양감독은 이미 영화 제작을 위해 아버지께 9000만원을 빌린 상태다) 나도 대출받아야 된다고 하셨다”며 “직접 닥치니까 지원이 끊어지는 게 정말 무시무시한 일이더라. 제발 지원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문정현 감독은 “지원 사업도 끝나고, 독립영화에서 이제 ‘독립’은 빼버리겠다고 하고, 정말 이 판이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기분이다”라며 다양한 문화를 양성, 지원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언급했다.

독립영화는 예술영화이고 실험영화인 동시에 상업영화이기도 하다. 독립영화를 단순히 비상업영화의 범주로 넣겠다는 것은 ‘너희는 돈이 안 되는 것’이라는 표식을 다는 것과 마찬가지고, 독립영화에는 더 이상의 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고영재 PD에 따르면 향후 독립영화에 대한 지원은 대부분 공모전으로 이뤄질 예정이다. 독립영화지원은 끊고, 모든 지원을 공모전 식으로 진행한다면 실질적인 독립영화 지원은 앞으로 더더욱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CJ나 싸이더스 같은 대기업들도 모두 공모전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승자독식의 자본의 세계가 독립영화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있다. 간담회를 마치며 고영재 PD는 “독립영화를 제발 영수증 처리되는 금액이 아닌 실제 콘텐츠의 가치로 인정해 달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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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9. 11:08

<워낭소리> 마음의 고향, 그것뿐이다.

[강성률 _ 영화평론가, 광운대 교수] 


영화 <워낭소리>는 이제는 사라진 과거의 모습에 카메라 초점을 맞추어 외국인과 한국의 도시인이 보고 싶은 한국의 이미지를 그려냄으로써 정서적 감흥을 일으킨다.
▲ 영화 <워낭소리>는 이제는 사라진 과거의 모습에 카메라 초점을 맞추어 외국인과 한국의 도시인이 보고 싶은 한국의 이미지를 그려냄으로써 정서적 감흥을 일으킨다.

<워낭소리>가 독립영화사상 최초로 관객 10만 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이번 주말은 예매율 1위라는 기염을 토하면서 조만간 2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독립영화사상 최초로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사실, 조만간 20만 명을 돌파할 것이라는 예상 그 자체도 놀랍지만, 요즘처럼 한국영화가 위기를 맞고 있는 시기에, 웬만한 상업영화도 흥행에 참패하고 마는데 독립영화가 이런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워낭소리>가 이처럼 큰 흥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가?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관객들이 편하게 볼 수 있는 소재적 차원에서 먼저 접근해야 할 것 같다. 30년이나 인생의 동반자였던 할아버지와 소의 관계를 통해 인생이라는 성찰의 문제를 이끌어내고,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화면에 담아냄으로서 팍팍한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준다. 소외된 듯한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잔잔한 재미를 느끼기도 하고, 소의 죽음을 대하면서 막막한 슬픔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인생과 삶, 자연 등에 대해 편안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워낭소리>의 영화적 완성도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다큐를 보면서 내가 놀란 것은 감독의 연출력이었다. 이 영화에는 감독의 내레이션이 없다. 주인공인 할아버지도 말씀이 거의 없으시다. 그렇다고 소가 말을 하겠는가? 단지 할아버지에 대한 불평을 늘여놓으시는 할머니의 독백만이 영화 속에 살아있을 뿐이다. 결국 이 영화는 소와 할아버지의 관계를 별다른 설명 없이 화면만으로 이끌고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거나 불명확하지도 않다. 이런 솜씨는 아무나 가진 게 아니다 장담컨대 이충렬 감독은 탄탄한 영화적 실력을 지니고 있는 감독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나서 그리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영화 속에 내장되어 있는 정서적 울림에 깊이 동감했으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 영화를 보자마자 어느 정도 흥행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간단한다. 지금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부분을 적절하게 건드리게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적절하게’ 건드린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소를 지극히 사랑하는 할아버지와 소에 대한 이야기이다. 40살이나 된 소는 죽을 나이이고 할아버지는 노년에 접어들었다. 둘 다 인생의 황혼기인 것이다. 그런 할아버지는 아직도 쇠죽을 끓여 소에게 먹이고, 소 달구지를 타고 읍내에 나가고, 소꼴을 베기 위해 농약을 치지 않는다. 논이나 밭에서 일을 할 때도 소의 도움을 받는다.

이런 풍경은 지금 현재 농촌의 풍경이 아니라 몇 십 년 전 과거의 농촌의 모습이다. 요즘 농촌에서는 기계화되어 이런 일소를 기르지 않는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일소를 구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굳이, 이제는 사라진 풍경을 영화 속에, 그것도 사계절의 순환 속에 녹여낸다. 때문에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은 참으로 편안하게 이 영화를 보게 된다. 왜냐고? 머리 아프게 만드는 현실적 문제가 이 영화에는 빠져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라진 마음속의 풍경이 영화 속에 녹아있기 때문에, 관객들은 부모님 세대나 할아버지 세대를 생각하면서 편안히 영화 속에 빠져들게 된다.

이 영화가 해외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외국인들이 보고 싶은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이 영화에 그려진 것과 비슷한 것이다. 마치 <북극의 나누크>를 만들었던 로버트 플래허티나, 과거의 중국을 빨간 색의 풍광 속에 담아냈던 초기의 장이머우와 마찬가지라고 할까. 이제는 사라진 과거의 모습에 카메라 초점을 맞추어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정서적 감흥을 일으키는 방법말이다. 이런 방법을 통해 관객들의 호기심도 채워주고, 새로운 구경거리도 제공한다. <워낭소리>는 외국인이, 그리고 한국의 도시인들이 보고 싶은 한국의 이미지를 적절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는 농촌의 현실에 대한 묘사가 없다. 미국 소 수입을 반대하는 집회장 앞으로 할아버지와 소가 지나갈 때 현실을 환기하기보다는 웃음이 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할아버지의 모습, 포근한 마음속 고향의 느낌에 심정적으로 동조하지 않을 수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관객들이 쉽게 영화 속에 빠져들도록 감독은 극영화의 편집 체계를 사용하고, 사계절의 순환 속에 사건을 재배치했다.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온 가족이 모두 앉아 편하게 볼 수 있는, 프라임 시간대의 TV 다큐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토록 평안한 다큐라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를 보면서 고영재 PD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프로듀서한 <우리 학교>, <농민가>, <워낭소리> 사이의 관계가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기본적으로는 인간의 문제에 집중적으로 다가갔지만, <우리 학교>는 조총련의 현실적 문제에, <농민가>는 한미 FTA와 몰락하는 농민의 현실적 문제에 깊이 다가간 반면 <워낭소리>는 현실적 고민이 거의 증발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소재로 두 편의 영화를 프로듀싱했지만, 정치적으로는 거의 정반대적인 입장을 담고 있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워낭소리>와 <농민가>를 같은 사람이 프로듀싱했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점점 더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그래서 독립영화인들이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2>를 만들자고 의견을 모으고 있는 지금, 한독협 사무총장이 프로듀싱한, 매우 비정치적인 성향의 영화와 쉽게 매치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랜만에 독립 다큐가 워낙 큰 흥행을 하니 별 생각이 다 든다. 쩝!


Trackback 2 Comment 7
  1. Favicon of https://noopy.tistory.com BlogIcon 누피 2009.02.09 13:3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색다른 영화평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2. 까막새 2009.02.09 15:08 address edit & del reply

    엘비라마디간이후 가장 화면의 구성이 좋은 영화로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이 롱테이크를 했다는 제작진의 고충이 얻어낸 덤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큐가 나름내로 현실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풀어가야한다는 글쓴님의 의견이 옳을 수도 있겠으나 현실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정치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작년인가 EBS에서 보여준 일본인 제작의 한 몽골소녀의 성장과 죽음에 대한 다큐를 보면 지극히 개인적인 성장사이지만 그 속에 몽골이 처한 현실적 문제가 다 드러남을 느꼈습니다. 워낭소리를 목가적인 관점에서 볼 수도 있겠고 그래서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우리 농촌의 문제가 그대로 드러남을 느끼면서 오히려 힘들었습니다.

  3. 매력녀 2009.02.09 15:14 address edit & del reply

    위에 댓글 단 닉네임 "영화"님! 영화를 보는 관점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하시면서 조잡한 글 내리라고 하는 것은 어떤 논리입니까? 영화에 대한 다른 시각을 제공해 줬다는 면에서 유익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만은.

    • ㅇㅋ 그럼 2009.02.10 13:29 address edit & del

      ㅇㅋ 그럼 나도 당신글 아주 불편하니까 내리라고 말할수 있는거지
      사람들이 웃었다. 그게 어때서?
      내가 볼때도 저장면에서는 다 웃었다..
      보는 내내 불편해서 자리를 박차고 싶었다?
      도대체 무엇이 당신을 그리 불편하게 만들었는지가 심히 궁금하네
      저렇게 올곧게 우직하게 한길만을 가는 두 삶앞에 부끄러워서
      도망가고 싶었다면 이해를 할 수 있겠다만..

  4. 현실 2009.02.09 16:39 address edit & del reply

    그럼 저 할아버지는 가상이란 말인가?

    가상 워낭소리 인가?

    없는걸 지어냈나?

    처음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 소를 가지고 기획한건데

    그분들한테는 현실이 평론가한테는 가상이 되는건가?

    할아버지가 fta반대하는 시위현장을 지나가면 안되는건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할아버지 모습이라니 할아버지 살아계신데?

    워낭소리는 옛향수를 생각나는것 위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데

    몇십년전 농촌풍경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는게 대단한거 아닌가?

    할아버지 할머니 소 의 삶을 찍은 다큐는 나오면 안되는건가?

    이 듣보잡 영화평론가가 원하는것처럼 fta에 껴들어서 시위하고

    기계로 농사를 짓는 화면이 나와야만 다큐인가?

  5. Favicon of https://geniefromthebottle.tistory.com BlogIcon 지니프롬더바를 2009.02.10 06:3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영화를 보고싶은 맘이 굴뚝같은데, 볼 방법이 없네요. 예고편이라던가 사람들의 감상을 보면, 한국인들이 지금 가장 열망하는 감동에 대한 코드가 맞아 떨어졌겠구나 하는 생각은 듭니다. 가끔 비현실적인 사건들이 현실을 돌아보게 하기도 하지요. 뭐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영화도 안본 주제에 공상해 봅니다. 님의 리뷰 잘 읽었습니다.

  6. 닭소리 2009.02.10 19:13 address edit & del reply

    너무들 하시네요. 아무리 글이 맘에 안들어도 평론가에 대해 인신공격성 발언을 하는 것은 비매너입니다. 논리적으로 자기 입장을 적으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