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액션배우다'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12.04 관객은 냉정하다. 재밌어야 산다!
  2. 2008.10.29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 - ①]'한국독립영화의 아버지' 김동원 감독 (1)
2008. 12. 4. 11:14

관객은 냉정하다. 재밌어야 산다!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⑥] 정병길 감독

정병길 감독

▲ 정병길 감독

올해 한국 독립영화계에서 가장 주목 받은 작품을 꼽으라면 정병길 감독의 <우린 액션배우다>를 선택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비록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흥행 실적으로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독립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우린 액션배우다>는 독립영화계에 분명 의미 있는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영화 속 늘어난 트레이닝복 차림의 정병길 감독을 상상하며 나간 인터뷰 장소에는 생각지도 않게 트렌디한 모습의 감독이 서 있었다. ‘웃음’으로도 충분히 ‘메시지’를 줄 수 있다고 믿는 정 감독과의 유쾌한 인터뷰를 통해 정병길표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현재 충무로에서 새 영화 크랭크인을 기다리고 있는 정 감독은 상업영화든 독립영화든 구분 않고 계속 영화 작업을 할 생각. 양쪽을 아우르며 작품 활동을 하는 감독이 드문 한국 영화계에서 정 감독의 말은 앞으로 그의 행보를 주시하게 한다.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소감 한마디 해달라.

글쎄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다니,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웃음)

한독협을 안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아, 내가 뭐라 말해야할지 모르겠다는 거다. 2006년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에서 처음 한독협 사람들을 만나 알게 됐고, 10주년 기념식에도 참가해 같이 술도 마셨다. 그래도 뭐라 말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냥 대단한 거 같다.(웃음)

액션배우, 관객을 만나다

그럼 먼저 <우린 액션배우다> 얘기 먼저 하자. 개봉하고 기분이 어땠나.

시원했다. 시간이 없어서 개봉 날짜 맞추려고 마지막까지 고생했다. 개봉하고 모든 GV에 참석하긴 했지만 극장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진석이는 매일 극장가서 영화는 안보고 관객 얼마나 왔나 숫자 세고 왔다는데.(웃음) 근데 나는 영화 개봉하고 나서 인터뷰도 많고 일도 많아서 정신없었다.

언제부터 개봉 준비했나.

글쎄, 개봉 못할 확률이 컸었다. 배우들도 ‘그거 개봉할 수 있겠냐?’고 했다. 영화 찍을 때도 그냥 ‘얘가 또 뭐 하나보다’ 뭐 이런 반응이었다. 근데 전주국제영화제 CGV 장편영화 개봉지원작에 선정돼 개봉하니까 정말 신기해했다. 이지연, 이용희 프로듀서가 많이 도와줬다. 그분들 없었으면 개봉 못했을지도 모른다.

                       <우린 액션배우다>(2008)

감독으로서 극장에서 관객을 만나니 어떤 느낌이었나?

음, 광화문 씨네큐브가 CGV보다 관객 반응이 더 좋았다. 아무래도 씨네큐브는 이런 작은 영화를 좀 찾아서 오는 관객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CGV는 일반 관객이 더 많고.

씨네큐브 관객과 CGV 관객에 어떤 차이가 있었나?

씨네큐브 관객들이 더 예뻤다.(웃음) 개봉 첫 날 씨네큐브에서 GV할 때 20년 동안 연극배우 하셨다는 분이 있었는데 ‘영화 속 배우들이 힘들지만 계속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걸 보고 많이 반성했다’며 펑펑 울었다. 연극을 그만 둘까 고민하던 분이었다. 고맙기도 했는데,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서 그냥 서 있었는데 맹수진 누나(영화평론가)가 수습해줬다.(웃음)

<우린 액션배우다>가 1만 명 좀 넘게 들지 않았나. 독립영화계에서 기대가 컸는데 생각보다 관객이 많이 들지 않아서 아쉬울 것 같다. 난 개인적으로 십만 명 넘을 걸로 기대했었다.(웃음)

만이천 명 정도 들었다. 나보다는 주위 사람들이 더 아쉬워하는 것 같다. 첫 주 스타트가 좋았는데 중간에 교차 상영을 하고, 추석에 블록버스터가 쏟아져서 흥행이 주춤했다. 평일 첫 회, 마지막 회 상영을 하는데 누가 보러 올 수 있겠는가. 보려야 볼 수 없는 거지. 차라리 비수기에 좀 더 오래 틀었으면 더 좋았을 걸 그랬다.

생각보다 담담한 것 같다.(웃음)

아, 자다 일어난 지 얼마 안돼서 그런 거다.(웃음)

배우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저녁 6신데...(웃음) 영화를 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우린 액션배우다>에도 나왔는데 원래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근데 대학 입학에 실패하고 짜증이 나 방황도 하면서 그냥 놀았다. 할 일도 없고 해서 무작정 영화를 많이 봤다. 영화 보는 동안은 걱정을 잊을 수 있으니까 쉬지 않고 봤다. 영화보다 지쳐서 자고 일어나면 또 보고 이런 생활을 계속 반복했다.(웃음)

그때 지금의 ‘정병길 감독’의 모습을 상상했었나.

영화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어도 감히 감독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못했다. 처음에는 스탭으로 일을 하려고 했다. 미술을 했으니까 콘티 작업을 하면서 미술감독의 꿈을 가졌다. 그래서 충무로에 이력서를 냈는데 군대도 안 갔다 오고, 운전도 못한다고 해서 안됐다. 그런데 군대 다녀오니까 나이가 많다고 퇴짜 맞았다. 그 때는 운전면허도 있었는데. 그래서 내가 만들자 해서 무작정 만들었다.

그때 만든 작품이 뭔가.

액션스쿨에 있을 때 <칼날 위에 서다>는 극영화를 만들었다. 원래 액션스쿨에는 배우가 되려고 들어갔다. 그때 극단에서 연기도 하고 있었고. <칼날 위에 서다>를 만들고 나서 연출에 마음이 생겼다. 군대에서 이런 일도 있었다. 같이 보초를 선 후임병에게 ‘나 사회 나가서 뭐하면 좋을까’ 물었더니, ‘배우는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더라. 왜냐고 물었더니, ‘정 병장님이 배우하면 극장에 온 연인들이 나가면서 욕할 거’라는 거다. 여자 관객이 ‘남자 배우가 정이 안 가’라고 할 거라고.(웃음)

용감하면서도 속 깊은 충고다.(웃음) 연출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없었나.

그땐 아무것도 몰라서 용감했다. 내가 하는 게 ‘무조건 맞다’고 밀고 나갔으니까. 딱히 조언을 구할 곳도 없었다.

점점 흥미진진해진다. 두 번째 작품은 어떤 작품인가.

<가난해서 죄송합니다>는 단편영화다. 이건 충무로 스텝들과 함께 만든 극영화다. 영화제에서 상은 탔지만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충무로 스탭들을 믿고 작업하는 과정에서 많이 따라가서 충무로 색깔이 많이 묻어나는 영화였다. 시간이 워낙에 없었기도 했다. 영화를 연출하는 게 아니라 거의 드라마 찍듯 만들었다. 

그 다음에 찍은 다큐멘터리 <락큰롤에 있어 중요한 것 세가지>(이하 <락큰롤>)가 2006년 서독제 관객상을 받았다.

원래 극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우연히 다큐멘터리를 찍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그래서 ‘왜 나한테 찍으라고 하냐. 난 다큐멘터리 찍는 사람도 아닌데’라고 했더니, ‘넌 돈 안줘도 될 것 같다’고 답하더라.(웃음) 그래서 돈 안 받고 하고 싶은 대로 찍었다. 이 작품으로 서독제에서 상을 받으면서 한독협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게 됐다. 그 전에 <칼날 위에 서다>도 출품했었는데 떨어졌다.

극영화랑 달랐을 텐데 촬영에 어려운 점은 없었나.

우선 시간이 없었다. 일본 유명 록 밴드 기타울프를 4박 5일간 따라 다니며 찍었는데, 그 후에 일본으로 휙 돌아가니까. 철저하게 계산을 해서 재밌게 만들려고 했다. 다큐멘터리이긴 하지만 실제 따라다니면서 보았던 모습들과 픽션을 연결시켜서 만들었다. 편집 기간은 한 1주일 걸렸다.

4박 5일 촬영에, 1주일 편집에 그런 작품이 나온 게 신기하다. 혹시 편집 잘한다는 말 듣지 않나?(웃음)

가끔 듣는다.(웃음) 처음엔 안 될 것 같은 것도 머리 속으로 구상을 하고 여러 번 시도하면 아귀가 맞아 떨어질 때가 있다. 집에 가면 벽에 하나의 아이디어 붙여 놓고 계속 이어서 꼬리에 꼬리를 붙여서 말도 안 되는 거 같지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다. 나는 영화 보는 걸 좋아하다가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에 항상 영화 보는 사람 입장에서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내가 지루한 영화를 못 본다. 그리고 관객은 더 냉정하다.

 <락큰롤에 있어 중요한 것 세가지>(2006)

즐겁다, 고로 영화를 만든다.

평소 어떤 영화를 즐겨보나.

<터미네이터>, <매트릭스>, <킹콩> 같이 뭔가 쉬지 않고 나오면서도 메시지도 있는 그런 영화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다큐멘터리도 그런 느낌으로 찍으려고 했다. 일반적으로 다큐멘터리하면 좀 지루하다는 생각이 있다. 인물을 세워놓고, 고정된 프레임으로 찍으니까 그런 것이다. 난 같은 얘길 해도 컷을 많이 나눠서 편집하면서 재밌게 만들고 싶었다. 

같은 다큐멘터리지만 <락큰롤>과 <우린 액션배우다>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찍을 때 마음가짐이 달랐다. <락큰롤>은 하고 싶은 대로 찍었다. 욕먹어도 괜찮으니까 즉흥적이라도 재밌게만 찍자는 마음이었다. 그에 반해 <우린 액션배우다>는 철저하게 계산하고 만들었다. 제작 기간도 <우린 액션배우다>는 1년 6개월이 걸렸다.

<우린 액션배우다>는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

스턴트맨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싶었다. 기존에 스턴트맨을 다룬 다큐멘터리는 그들을 불쌍하게 그리는데 초점을 맞췄던 것 같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고 밝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일반 사람들은 다치면서 돈 번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지만 그들은 몸값에 대한 정당한 대우를 받고 일 하는 프로들이다. 액션배우라는 꿈을 안고 상경한 20대의 성장 드라마를 찍고 싶었다.

근데 그 형식이 왜 다큐멘터리인가. 극영화로 찍을 수도 있었지 않나.

일단 다큐멘터리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내가 생각한 드라마의 가장 알맞은 주인공이었다. 그들은 꿈을 갖고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서른이라는 나이가 되면서 세상과 타협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한다. 어디가도 돈이 필요하니까 꿈도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지루하게 찍고 싶지 않았다. 웃음으로도 충분히 그들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내가 좋아하는 <터미네이터>가 그랬던 거처럼.(웃음)

<우린 액션배우다>에서 자동차 사고 장면에서 처음에는 진짜인 줄 알고 굉장히 놀랐다. 관객들 사이에서 이 장면이 많이 얘기되기도 했다.

나도 놀랐다(웃음) 알고 있었는데도, 진짜 다쳤나 싶어 깜짝 놀라서 카메라를 껐다. 처음에 스턴트맨 다큐멘터리를 찍는다고 했을 때 주변 반응이 안 좋았다. 예전에도 스턴트맨 다큐멘터리가 있었고, 뻔하다는 반응이었다. 스턴트맨들 막 다치고, 불쌍하게 그리면서 감동을 끌어 붙이는 휴머니즘, 난 그게 싫었다. 그래서 논픽션에 픽션도 섞어서 그들의 직업을 자연스레 설명하고 싶었다.

어떻게?

자동차 사고가 나고 나서 차에 치인 배우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 또 운전을 하던 배우도 ‘전에도 이거 했었는데, 안 다쳤어요’라고 말한다. 관객들은 깜짝 놀라고,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만 스턴트맨들에게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게 이들의 일이니까. 이들은 차에 부딪혀서 아프고, 괴로운 ‘찌질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삶과 꿈을 이루는 이들이다.

난 왜 이렇게 영화를 안 본 거야!

감독의 그런 의도는 충분히 성공한 거 같다. 시종일관 유쾌하면서도, 액션배우들의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화제를 바꿔서, 한독협은 언제 처음 알게 됐나.

군대 가기 전이니까, 2000년도쯤이다. 그때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는 영화인들을 알게 됐고, 가끔 술자리나 이런데 가서 영화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다. 그럼 ‘한독협이라는 곳이 있는데, 자기는 거기 회원이고, 미디어 센터에서 장비를 싸게 빌려준다’는 얘기들을 했다. 그렇게 한독협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한독협에 대한 첫인상은 어땠나.

‘아, 나도 여기 회원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회원이 되는 게 어려운 건 줄 알았다. 작품도 몇 개 만들고 상도 받아야 하는 줄 알았다.(웃음) 그러다 2006년 서독제에 <락큰롤>로 상 받았는데 회원 가입하라고 해서 가입했다.

회원이 되고 나서 달라진 점이 있나.

달라진 점이라기보다는 좀 신기했다. 가입하고 나서 극영화 분과 사람들과 회의도 하고 영화에 대해 같이 이야기도 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혼자 영화 만들었으니까 그런 게 없었다. 또 인디포럼 상임작가 하면서 독립영화인들과 자주 만나게 되니까 친해지고, 워크숍 하면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뭘 가르치기도 했다. 근데 초반에 열심히 나가다가 이제는 영화 작업이 바빠서 많이 못 나간다. 아, 근데 다큐멘터리 분과 회의는 한 번도 안 들어갔다.

"잘 만든 오락영화 하고 싶다. 얼마 전 <다크나이트>를 봤는데 소름끼쳤다. 재밌지 않나.
 메시지가 약한 것도 아니고"


한독협 사람들 만나면 주로 어떤 얘기를 하나.

이런 얘기를 많이 했다. “너 뭐하냐” 그러면, “저 시나리오 써요” 이 얘기만.(웃음)

같이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 긍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 같다. 시야가 넓어졌다거나 배운 것이 있다면.

한독협 사람들과 만나면서 ‘내가 영화에 대해 참 모르는 게 많구나, 이렇게 모르는 게 많은데 어떻게 영화를 만들지’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는 내가 영화를 많이 본 줄 알았는데 말 하다 보면 모르는 영화도 많다. 그런 갈증이 생기면서 영화에 대한 생각이 넓어지는 거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하기 좋은 기본 조건을 갖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림하면서 미장센에 대한 안목을 갖추고, 편집은 감으로 잘 하고(웃음)

그림을 했던 게 영화 작업에 큰 플러스 요인이 되었다. 그림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안했을 것 같다. 그림을 했기 때문에 막연한 자신감도 있었다. ‘한 번 해 보면 될 것 같은데’ 이런 자신감. 편집은 혼자 책보고 공부했다. 워낙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혼자서 책보고 프로그램 배우는데 되게 오래 걸렸다.(웃음) 내 친구는 옆에서 책 한 번 보고 ‘이거 이렇게 하는 거 아냐’면서 바로 했다. 사실 내가 공부를 정말 못했다. 시험지를 보고,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에 대한 감이 생긴 게 중학교 때였으니까.(웃음)

중요한건 기술적인 것보다 오히려 감인 것 같다.

그건 맞는 것 같다. 스타 크래프트도 배우는 건 쉽지만 잘하는 게 어렵지 않나.(웃음) 그런 개념인 것 같다. 프로그램을 익히면 편집은 되게 단순한 거다.

정 감독, 충무로 입성 준비 완료!

현재 진행 중인 작업이 있다고 들었다.

<청년폭도맹진가>란 영화다. <우린 액션배우다> 찍다가 제작비가 떨어져서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상금 1천 5백만 원이 걸린 시나리오 공모전 공고를 보고 쓴 작품이다. 당시 마감이 15일인가 20일 정도 남았었는데 머릿속에 구상하고 있던 걸 막 썼다. 될 거라는 생각보다 ‘이걸 핑계로 시나리오 완성하자’는 생각에 쓰게 됐다. 당선이 되면 좋고, 안 돼도 시나리오 하나 완성한 거니까.(웃음)

공모전에 당선된 건가.

아는 영화사 대표님이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사업지원 공모에 이 시나리오를 내겠다고 해서 ‘내세요. 근데 안될거에요’라고 했는데 영진위 공모와 공모전 둘 다 됐다. 그래서 영진위가 4억, 공모전 쪽에서는 상금이랑 지원금까지 4억 4천 5백만 원의 지원을 받아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근데 공모전 쪽에서는 영화화 될지 안 될지는 모르고 일단 시나리오는 팔리는 거라고 해서 그걸 포기하고 영진위를 택했다. 나는 연출을 하고 싶으니까 당연히 돈 몇 천만 원 때문에 시나리오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시나리오 작업 하는 분들에게는 분개할 얘기다.(웃음)

이 시나리오는 충무로 영화 입봉할 생각으로 생각해 뒀던 거다. 단숨에 쓰긴 했지만 오래 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거다. 시나리오 자체가 상업적 코드가 있고, 많은 예산이 들지 않으면서도 시나리오에 힘이 있다. 그래서 하석진, 이문식, 이정진, 이영훈 등 좋은 배우들이 흔쾌히 승낙했다. 그런 게 잘 맞아 떨어진 거다. 

대략적인 영화 내용을 듣고 싶다.

고등학교 때 잘나가던 양아치들이 서른이 되어서는 양아치 생활을 할 수 없으니까 할 일 없이 백수 생활을 하는데 어느 날 우연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그런데 그 사건이 생각지도 못한 일로 연결되고,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는다는 내용이다. 처음에는 미친 듯이 웃다가 보고나면 약간 무섭다는 생각도 드는 그런 영화다. 곧 크랭크인 한다.

주변에서 다큐멘터리에 재능이 있다고 이야기 하지 않나. <우린 액션배우다>는 올해 가장 주목받은 다큐멘터리 중 하나다. 인정받는 장기를 제쳐두고, 극영화에 뛰어든 이유는 뭔가.

잘 만든 오락영화 하고 싶다. 얼마 전 <다크나이트>를 봤는데 소름끼쳤다. 재밌지 않나. 메시지가 약한 것도 아니고. 그걸 다큐멘터리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에일리언>도 오락영화지만 가볍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오락영화를 찍고 싶었다. ‘터미네이터’ 같은 게 실제로 있으면 다큐멘터리로 찍는 게 더 좋겠지만.(웃음) 내가 하고 싶은 영화를 만들기에 다큐멘터리는 한계가 있다.

충무로 입봉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영화 작업이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인가.

(침묵) 글쎄.(웃음) 가장 애정이 가는 영화는 <칼날 위에 서다>이다. 가장 못 만들었지만 그냥 좋다. 사실 시간이 지나서 내 영화를 다시 보면 화가 많이 난다. 이런 걸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줬나 싶다. 얼마 전에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우린 액션배우다>를 상영했는데, 내 영화인데도 지루했다.(웃음) 내 영화를 싫어한다거나 후회한다는 게 아니다. 시간이 흐르고 보면 창피해서 다시 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다.

"작게 할 영화가 있고, 큰 사이즈로 할 영화가 있다. 상업영화하다가도 독립영화를 해
보고 싶을 때가 있을 것 같다. 자연스럽게 왔다갔다 하면서 영화 작업을 계속 할 거다"


영화 만들 때 언제가 제일 좋은가.

현장이 제일 좋다. 현장이 힘들 때는 빨리 편집하고 싶고, 편집하고 있을 때는 다시 현장으로 가고 싶다.(웃음) 일이 잘 안 풀릴 때가 있지만, 싸워도 현장에서 싸우는 게 좋다.

독립영화, 생각대로 인디펜던트!

지금 충무로로 간다. 다시 독립영화를 만들 생각인가.

둘 다 할 생각이다. 작게 할 영화가 있고, 큰 사이즈로 할 영화가 있다. 상업영화하다가도 독립영화를 해 보고 싶을 때가 있을 것 같다. 자연스럽게 왔다갔다 하면서 영화 작업을 계속 할 거다. 지금도 촬영을 마친 단편영화가 한 편 있다. <청년폭도맹진가> 끝나면 편집해서 완성할 예정이다.

한독협이나 독립영화인들을 어떻게 보는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분들이 아닐까 싶다. 독립영화는 연출자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으니까. 난 독립영화인이란 인식은 없는 거 같다. 한독협과 인연을 맺은 것도 3,4년 정도밖에 안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기 방식대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엔 공감한다.

한독협에 바라는 점은.

자주 그리고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으면 좋겠다. 한독협 10주년 체육대회랑 야유회가 있었는데 비와 와서 취소됐다. 체육대회 하면 족구도 하고, 계주 선수로 나가려고 했는데.(웃음) 지금까지 잘 해왔으니까 지금처럼 잘 했으면 좋겠다. 나도 한독협이 있어서 영화를 만드는데 많은 힘이 됐던 건 사실이다. 특히 고마웠던 건 <락큰롤>이라는 영화가 한독협이 없었으면 그 영화를 볼 수 있는 장소도 없었을 거다. 한독협에서 대안 상영을 많이 해서, 비록 단편영화지만 많은 지역을 돌면서 관객들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물질적으로 큰 도움은 안됐지만 나한테는 값진 시간들이었다.(웃음)

 

                                                                       컬처뉴스 김나라 기자, 필름온 안효원 기자 


Trackback 0 Comment 0
2008. 10. 29. 15:35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 - ①]'한국독립영화의 아버지' 김동원 감독

10월 23일 푸른영상 사무실에서 김동원 감독을 만났다.
▲ 10월 23일 푸른영상 사무실에서 김동원 감독을 만났다.

한국독립영화협회(한독협)가 10주년을 맞았다. 한때 생소하기만 했던 ‘독립영화’라는 존재의 정체성 확립과 자리매김의 역사는 한독협의 10년 역사와 나란히 놓여져 있다. 영화인들이 자본과 검열로부터 ‘독립’해 진정한 의미의 ‘표현의 자유’를 누리기까지 한독협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줬다. 컬처뉴스는 한독협 탄생 10년을 맞아 독립영화계의 10년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시대 한독협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해 보고자 감독, 배우, 활동가, 제작자 등 독립영화인들 10명의 인터뷰를 기획했다. 이번 기획은 한독협 사무국과 팀블로그 필름온이 함께해 이루어졌다.

첫번째 인터뷰 대상자는 '한국독립영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송환>의 김동원 감독이다. 여러모로 한국 독립영화계의 상징적인 인물인 김동원 감독은 한독협의 초기 모습과 현재의 지점을 역사적인 맥락에 위치시켜 새롭게 보게해 준다. 그가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에 입문하고 활동하게 된 계기들 역시 놓치기 아까운 역사의 기록이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 바란다. / 편집자.

독립영화, 무에서 유를 만들다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소감 한 마디 해 달라.

김동원 감독: ‘벌써 10년인가’하는 생각이 든다. 내 나이 또래는 세월이 빨리 가니까.(웃음) 한편으론 독립영화 활동한지 오래됐는데 10년밖에 안됐나 싶기도 하고. 내가 초대 이사장을 하면서 한독협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현재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조영각 사무국장하고 어린 사무원은 그 때 월급 20만원씩 받고 시작했다.

독립영화계에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예상했던 것인가. 

이런 날이 올지 몰랐다. 지금은 미디어 센터, 독립영화전용관, 독립영화 제작지원제도 등이 생겼다. 이런 건 외국사례로 말로만 듣던 것들인데, 일반 영화계에서 질투할 만하다.(웃음) 막 없던 게 생기고 점점 늘어나니까, 있던 게 없어진 사람들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독립영화계만 편애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근데 지원금 총액으로 보면 굉장히 작다. 

그만큼 독립영화계가 가시적인 변화를 일으켰다는 반증이 아닌가 한다.  

무엇보다 10년 전만해도 독립영화라는 말을 할 때 약간 켕기는 게 있었다. 그때 독립영화하면 반정부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당시 영화진흥공사(현 영진위)에 독립영화라는 말이나, 독립영화 지원은 없었다. 또 영진위 1기 위원회 생기고도 몇 년간은 없었고, 그 이후에 생겼다. 독립영화라는 단어를 공식화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 강한섭 위원장이 다시 뺀다고 한다. ‘작은 영화’ 이런 식으로 바꾼다고.

작은 영화라... 김동원 감독이 다큐멘터리를 시작한 게 20년이 지났는데, 독립영화란 말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난 원래 상업영화 지망생이었고, 독립영화란 말도 없었다. 1980년대 얄라성이나 장산곶매 등에서 영화를 만들고, 미국식 개념의 이름을 붙여준 거다. 사실 미국식 개념과는 많이 다른데,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사실 나는 독립영화를 하려고 한 건 아니다. 상업영화 조감독을 했는데 이게 나랑 안 맞더라. 당시 전두환 정권 때 이런저런 일이 많았는데 방송에서는 누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때 내가 결혼식 비디오를 찍은 아르바이트를 했을 땐데, 사회의 모습을 찍어서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날라리, 가장 감동적인 올림픽을 만나다

원래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나. 김동원 감독의 젊은 시절이 궁금하다.

날라리였다. 데모도 안했고.(웃음) 1970년대에 학교를 다녔는데 당시엔 운동권이란 개념도 없었다. 언더그라운드에는 좀 있었는데 그때는 몰랐다. 난 연극 많이 하고, 놀기 좋아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 때 무의식적으로 뭔가 답답함을 느꼈다. 고등학교 때는 ‘왜 우리학교는 데모 안하지? 데모하면 휴교하는데’하면서 데모가 나길 원하기도 했다. 출처가 불분명한 유인물 만들어서 뿌리기도 했다. 휴교 때문에. 그런 걸 보면 약간 반골 기질이 있었나 보다. 그런 게 정리가 안 되다가 상계동 가서 정리가 됐다. 사회과학 책도 한두 권 읽어봤지만 전혀 안 와 닿았는데, 상계동 가서 구조적 모순이라는 걸 느끼게 됐다.

상계동에 어떻게 들어간 건가.

상계동 철거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내가 아는 신부님이 거기 들어가 계셨는데 강제철거 당하는 장면을 증거자료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하셨다. 하루만 와서 촬영해달라고 부탁을 하셨다. 그게 내 팔자를 바꿀 줄을 몰랐다.

처음 <상계동 올림픽>을 촬영할 때 ‘다큐멘터리는 이런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었나.

처음에는 관심도 없었고, 또 당시 우리나라에는 필름으로 만든 다큐멘터리도 거의 없었다. 대학 영화과에서도 단편영화제를 했지만 다큐멘터리는 없었다. 서울영화집단에서 8미리 필름으로 십 분짜리 다큐멘터리를 1985, 6년인가에 만든 게 전부였다. 그저 머릿속에는 TV에서 본, ‘추적 60분’유의 다큐멘터리만 있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그런 관성들을 떨쳐버리기 힘들었다. 그런데 외국 나가서 여러 다큐멘터리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보니까 ‘아 다큐멘터리가 할 만한 거구나’ 싶었다. 상계동 시절에는 전혀 몰랐는데, 가서 보니까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작품들이 있었다. 그 때 ‘다큐멘터리의 영역이 이렇게 넓구나’ 했다.

그 이후에 다큐멘터리의 매력을 느낀 건가? 어떤 매력을 느껴서 다큐멘터리를 계속하게 된 건가.

조연출을 한 4년 정도 했는데, 현장이 지겨웠다. 촬영할 때도 긴장감을 못 느꼈다. 그런데 상계동에서 철거 현장을 찍을 때, 특히 위험한 상황에서 철거 깡패들이 위협해도 전혀 무섭지가 않은 거다. 카메라가 알아서 막 돌아다니는 신들린 경험을 했는데, 그게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다. 촬영하는 게 이런 거구나. 또 철거, 투쟁 현장 모습들이 외부에 알려지기 힘든 상황에 <상계동 올림픽>을 발표했는데, 엉성하게 만들었지만 대학가에서 상영되고 그러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 때 다큐멘터리의 굉장한 힘을 느꼈다.

그래도 뭔가 손에 잡히지 않을 시절,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았을 거 같다.

<상계동 올림픽> 하면서 사회가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촬영할게 많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외국영화 직배 관련해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는데 정지영 감독이 나에게 ‘다큐멘터리를 해라. 극영화 하는 사람은 많지 않냐. 넌 잘할 것 같고, 너라도 해야 한다’라고 하더라.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닌 것 같고, 싫지도 않고, 또 극영화가 잘 안 풀리고 해서 다큐멘터리의 길을 걷게 됐다. 그렇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 길을 걷게 됐다.

총 제작기간만 12년이 걸린 <송환>은 비전향 장기수를 다룬 다큐멘터리로, 2004년 선댄스영화제 '표현의 자유상'을 시상하기도 했다.

투사? 난 그런 사람 아니다

1990년대에 <송환> 촬영하랴, <명성 그 6일의 기억> 발표하랴 정신없었을 거 같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부터 장기수들이 출소하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경험한 사람이니까 저분들의 증언은 기록할 필요가 있다 생각해 촬영을 시작했다. 사실 그걸 어떻게 쓸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에 장기수들의 삶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어머니들이 함께 벌인 석방운동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몇 편 나왔다. 그 때까지만 해도 <송환>에 대한 생각도 없었고, 그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다. 사실 내가 오며가며 찍은 거지 찍어야겠다 해서 찍은 게 별로 없었다.(웃음)

 그럼 <송환>은 어떻게 나오게 된 건가.

1999년 초부터 송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그들의 송환을 돕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사회적으로 이슈화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남북정상회담하면서 송환이 급물살을 타면서 엄청 급해졌다. 그 다음 6월부터 9월까지는 정신없이 찍었다. 그 전에는 판판히 놀다가.(웃음)
 
1990년대 들어오면서 한국 다큐멘터리의 파이가 커졌다. 주로 어떤 사람들이 촬영했고 어떤 관심을 가졌나.

지금도 우리나라 다큐멘터리는 액티비즘, 즉 투쟁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1980년대에는 당연히 그래야한다고 생각했고. 서울영상집단, 노동자뉴스제작단(이하 노뉴단) 등의 집단은 일종의 운동으로 한 거다. 노뉴단은 노동운동, 서울영상집단이나 민족문제연구소, 민족영화연구소 등은 그 외 사회문제를 다뤘다. 한국의 다큐멘터리는 태생단계의 특수성 때문에 액티비즘이 강하다.

김동원 감독은 어느 편에 속했나.

난 아무데도 속해있지 않았다. 굳이 얘기하면 빈민운동 쪽인데, 빈민지역 청년들과 활동을 하면서도 작업은 혼자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내가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정체성은 없었다. 영화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는 현장의 기록이고, 일상이었다. 빈민운동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했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느 순간에 찾았나.

나는 아직도 감독이라는 말을 안 좋아한다. 난 다큐멘터리에서 감독이 너무 앞서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무리 감독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해도 감독이라고 부르고, 또 ‘그럼 뭐라고 부르냐’고 하니까 이젠 그냥 ‘맘대로 부르라’고 한다.(웃음) 감독이라는 말이 옛날보다는 많이 거슬리지는 않는다. 옛날에는 엄정한 사실성, 객관성 이런 것들이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래야 하는 줄로 알았는데 요즘에는 다큐멘터리도 연출을 해도 괜찮다는 게 일반적이니까. 내가 아무리 연출을 안 하려고 해도 할 수밖에 없다.

작업을 하면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경우도 많이 있었겠다.

글쎄, 잡혀갔던 거?(웃음) 푸른영상 하면서 몇 번 잡혀갔다. 1993부터 2년 터울로. 그 때만해도 영화법이 손질되기 전이고, 장기수들을 찍는다는 게 시찰 대상이었다. 안기부 직원한테 매일 안부전화를 받았으니. 그쪽에서 조작간첩 사건들과 엮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잘 안됐다. 1996년에는 심의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음란비디오 단속법을 걸고 넘어졌다. 참, 음란비디오라니. 그 외에도 청소년 보호법, 국가 보안법 등 다양하게 조사받았다. 다행이 변호사를 잘 만나서 기각시켰다. 

투쟁의 역사다.(웃음)

투쟁은 무슨.(웃음) 난 투쟁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냥 내가 그걸로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잘못한 것도 없으니 당당한 거다. 심의를 받으려면 10분에 얼마 돈을 내야 하는데 내가 골이 비었나.(웃음) 여하튼 몇 번 들어갔다 나오면서 이미지가 그렇게 됐는데, 내가 용감해서 싸운 건 아니다. 그냥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 때문에 그런 거 같다.

김동원 감독은 2004년 선댄스영화제 표현의 자유상(<송환>) 등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한국 다큐멘터리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이면의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면서 주변의 따가운 시선도 받을 거 같다.

글쎄. ‘왜 이렇게 구질구질한 얘기만 하냐’는 사람은 있지만 따갑지는 않다. 당연히 알려야 할 이야기고. 지금은 방송에서 그런 얘기를 많이 하지만, 그때만 해도 전혀 안했는데 당연히 나라도 해야지 그랬다.


한독협. 힘든 시작, 지금은 괜찮아 무엇이든!

한독협이 세워지기 전, 독립영화인들은 어디를 구심점으로 모였나.

1991년에 독립영화협의회라는 단체가 세워졌다. 내가 의장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거기는 구속이 너무 많았다. 그 때만 해도 운동한다는 기분으로 작업을 했고, 모여 봤자 운동하는 독립영화인들만 모이는 거 같고. 1990년대 중반 넘어가고, 독립영화계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다양한 독립영화인들과 함께 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립영화가 뭐냐’ 하는 정체성 논란도 있었고, 일련의 산통 끝에 한독협이 생겼다.

한독협이 생기고 어려움은 없었나.

내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웃음) 앞서 얘기한대로 한독협의 정체성 찾기가 가장 힘들었다. 한독협 초기에 독립영화협의회나 민예총 영화분과 등과 관계 설정하는 게 어려웠다. 1996년부터 한독협 설립 논의를 시작했으니까.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이 협회를 만든다는 거에 의구심 어린 시선도 있었고. 하여튼 초기에 발동 거는 게 좀 어려웠는데 발동 걸고 나서는 최근까지는 잘 굴러왔다고 생각한다.

영진위 3기 위원이었다. 어떻게 하게 됐나.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가면 회의만 많고, 그렇다고 독립영화에 관한 회의만 하는 것도 아니고. 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는데 가서 목소리를 내야 하니까, 가야 된다고 하니까 갔다. 별 재미는 없었다.(웃음)

어떤 목소리를 내고 싶었나.

목표가 너무 분명했다. 독립영화전용관 만드는 거. 10년 동안 만들자는 말만 있었지, 만들지 못했다. 더 이상 늦출 수 없었다. 난 다른 건 못해도 전용관 하나 만큼은 만들겠다는 각오로 들어갔다. 다른 영진위 위원들이 너무 적나라하게 의도를 내비치는 거 아니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런 독립영화인들의 노력 끝에 인디스페이스가 생겼다. 근데 인디스페이스가 위치한 중앙시네마 재건축 때문에 몇 년 안에 장소를 옮겨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럼 다른 곳을 찾아봐야겠지. 3기 영진위 때 미디어센터, 시네마테크, 독립영화전용관을 다 포괄하는 500억 규모의 복합상영관을 짓기로 서울시와 결정했다. 그런데 강한섭 위원장이 무슨 아시아센터를 건립한다고 한다. 지금 어떻게 진행 중인지 모르겠다.

규모를 500억에서 1,000억으로 늘린다고 들었다. 그런데 규모가 커지고, 새로운 사업계획을 만들면 그 만큼 그 과정이 늦춰지는 거 아닌가. 현재 미디어센터 미디액트나 서울아트시네마, 독립영화전용관 모두 공간 확보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아무래도 그런 측면이 있다. 음, 어떻게 보면 위기를 겪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어려움을 겪어보면 전화위복의 기회를 맞을 수 있다. 이건 좋은 극장이 생긴다는 측면이 아니라 독립영화인들에게 뭔가 좋은 공부가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하는 말이다.


다른 얼굴, 하지만 우린 가족이다

한독협 홈페이지를 보면 초기에는 게시판에 서로 안부도 묻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영화도 보고, 얘기도 하고, 술도 먹으면서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한독협 10주년을 맞이한 2008년. 지금 가장 큰 고민이 무엇인가.

글쎄. 내가 고민한다고 되나?(웃음) 이제 독립영화가 나름대로 사회적인 위상을 이제 갖게 됐다. 그런데 대안영화로서의 자기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영화가 잘 안 나오고 있다. ‘지금쯤 나올 때가 됐는데’하는 기대가 있는데 잘 그게 쉽지 않다. 예를 들어서 <은하해방전선>등 몇몇 작품은 기대를 많이 했고, 영화도 좋았음에도 불구라고 잘 안됐다. 영화는 관객과 함께 완성된다. 과연 이걸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보게 할 수 있을까. 영화가 안 좋은 게 아닌데, 왜 안볼까. 이런 고민들을 한다. 답 없는 고민.

최근에 등장하는 후배들의 작품들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나.

다큐멘터리만 보자면,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본 <워낭소리>란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좋았다. 나와 스타일은 다르지만 반가운 작품이다. <우린 액션배우다> <우리학교> 등 1년에 한 편씩은 문제작들이 나온다. 한편으론 기쁘고, 한편으로는 ‘아 이런 게 일 년에 열편은 나와야 하는데’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인 코드가 약해지고 있지만 그게 그렇게 아쉽지는 않다. 오히려 열심히 만들고, 진정성이 보이는 다큐멘터리가 1년에 3-4편만 나오면 좋겠다. 인디다큐페스티벌에 70여 편의 작품이 응모됐다고 한다. 아르헨티나만 해도 다큐멘터리 영화제 하면 700여 편이 응모된다고 하는데, 우린 고작 70여 편이다.

요즘 진행하고 있는 작업이 있나.

촛불 문화제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하고 있다. 올해는 촛불이 가장 활활 타지 않았나. 찍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간 건 아닌데, 나가다 보니 찍을 게 보이더라. 뭐 큰 건 아니지만 해야 할 거 같은 마음이 들어서 촛불 문화제에 대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독협의 또 다른 10년을 위한 제언을 해 달라.

제언이라. 아쉬운 건 한독협 홈페이지를 보면 초기에는 게시판에 서로 안부도 묻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물론 욕도 하고.(웃음) 뭔가 공동체적인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커져서 그런지 그렇지 못하다. 사실 이건 사업을 하는 게 아니다. 사업도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하는데.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끼리 식구라는 생각을 하면 좋겠다. 도움도 주고받고, 영화도 봐주고. 이런 커뮤니티가 활성화 되어야 하는데 그런 계기를 못 만들어 주는 거 같다. 여러 영화제가 그런 역할을 했는데 요즘엔 형식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영화도 보고, 얘기도 하고, 술도 먹으면서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 2008-10-28 오전 11:35:02  컬처뉴스 김나라 기자, 필름온 안효원 기자

 

 


Trackback 0 Comment 1
  1. Favicon of https://beforesunset.tistory.com BlogIcon 은-유 2008.10.30 08:1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감독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요... 좋은 기사 잘 봤어요.. ^^ 독립영화 10년 축하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