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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13 악마의 터널_로타이 슈바거 석탄 광산
  2. 2009.02.21 칠레, 두 개의 9.11
2009.04.13 16:40

악마의 터널_로타이 슈바거 석탄 광산

[남미액션투어]④칠레 _ 콘셉시온
                                                                                                  김강 _ 프로젝트 스페이스 LAB39 디렉터
광부들은 지하갱도를 지옥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곳에는 악마의 터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갱도의 입구에는 1884년부터 1976년까지 영업했음을 알려주는 숫자가 쓰여 있다.
▲ 광부들은 지하갱도를 지옥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곳에는 악마의 터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갱도의 입구에는 1884년부터 1976년까지 영업했음을 알려주는 숫자가 쓰여 있다.

칠레 산티아고에서 서남방향으로 500KM를 가면, 콘셉시온(Concepción) 시에 도착하는 데, 로타이 슈바거 광산(이하 로타 광산)은 이 도시의 바닷가에 자리한다. 콘셉시온은 70년대의 학생운동이 발발했던 곳이자,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 선거에서 결정적인 지지를 획득했던 곳이다. 

『칠레의 모든 기록』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장소를 방문하여 촬영하고자 했던 2006년, 잠깐의 시간을 내어 김윤환, SP38과 이 도시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약 6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콘셉시온은 도시라기보다는 작은 읍내 같은 느낌을 풍겼다. 뜨거운 태양빛 아래 인적은 드문 마을. 이 마을의 작은 호텔에 여정을 풀고 SP38과 우리는 각자의 길로 헤어졌다. 읍내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물어물어 로타 광산 입구에 도착했다. 분홍색 와이셔츠를 입은 멋쟁이 신사가 내릴 곳을 상세히 설명해 주더니 우리와 같이 내린다. 잠깐 머뭇머뭇 하더니만 우리에게 자신이 로타 광산의 가이드를 해 주겠다고 한다. 감사! 언덕에 위치한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아래로 내려오는데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광산은 언덕과 바다 그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태백이나 사북 등 산속 광산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바닷가 탄광은 초현실적인 느낌이었다.

로타 광산이 있는 바닷가 마을 풍경


악마의 터널

로타 광산의 입구에는 <Chiflón del Diablo>라는 간판이 크게 쓰여 있다. 분홍 와이셔츠의 가이드는 ‘악마의 터널’이라는 뜻이라고 알려준다. 지하갱도를 이곳의 광부들은 지옥으로 여겼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라는 것이다. 이 광산은 1884년에 개발되어 1976년까지 탄광으로 기능했다. 현재는 박물관처럼 만들어서 석탄을 캐던 당시의 상황을 전달하고, 갱도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전문 가이드가 안내한다. 한 쪽 팔이 절단된 전직 광부 출신 가이드는 열심히 우리에게 이것저것 설명한다. 에스파뇰로... 그러면 분홍 와이셔츠의 아저씨는 우리에게 영어로 설명을 한다. 그러면 나와 김윤환은 한국말로 서로 이해한 영어를 해석하면서 이 광산을 탐색했다. 3개 국어가 동시에 탄광 안을 맴돌았다.   

로타 광산 입구

로타 광산은 바다 밑으로 400M가량 들어가서 석탄을 캐는 탄광이다. 체험이 가능한 갱도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전등이 달린 헬멧을 착용했다. 약간 경사진 계단을 걸어 갱도 입구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입구의 햇빛이 멀어지자 우리는 헬멧에 달린 전등의 불빛만 의지해야 했다. 서로의 헬멧 전등 불빛에 의지해 도시락을 먹고 있는 장면을 그린 황재형의 그림이 순간 떠올랐다. 머리가 닿을락말락한 갱도를 걸어서 지나가다 150M, 200M라는 간판을 보았다. 지상에서부터 내려온 지점의 표시이다. 더듬더듬 걸어가니 갑자기 수직 구멍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구멍에는 철제 사다리가 약 30M가량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이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바라만 봐도 아찔한 높이, 또한 사다리는 안전하게 고정되어 있는 거 같지 않았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저 아래로는 도저히 못 내려가겠다고 버텼다. 가이드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그러면 모든 일행은 내려갈 테니 나는 혼자서 아까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라고 한다. 헉~! 물론 이곳까지 온 길은 하나이다. 그냥 뒤를 돌아 걸어가면 입구에 도착하기야 하겠지만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갱도의 암흑은 고소공포증 따위는 순식간에 날려 버릴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가이드가 먼저 내려가고 내가 두 번째다. 아니나 다를까, 철재 사다리는 수직 터널에 잘 고정되어 있지 않아 사다리를 밟을 때 마다 덜커덩 거린다. 사다리를 내려가는 시간이 천금과도 같이 느껴지고, 이 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다녔을 광부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바다 밑 300M 이상 내려갔다.

사다리를 내려오니 300M라는 간판이 보인다. 우리가 땅 아래로 300M 이상 내려왔고, 이 곳은 바다 밑이라고 한다. 약간 경사진 갱도를 따라 내려가자니 이제는 머리위로 바람이 조금씩 느껴진다. 바다 밑에서 불어오는 바람. 이 바람은 탄광이 활황이었을 때는 광부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 바다 밑 천연가스가 바람을 통해 갱도로 유입되다가 순식간에 불이 붙기도 했다는 것이다. 천연가스+석탄, 왜 이곳을 ‘악마의 터널’이라고 하는 지 실감했다. 갱도의 중간 중간에는 이런 바람을 막기 위해 나무문이 설치되어 있다. 석탄을 실은 차가 이동하고 나면 이 문을 닫아서 천연가스가 갱도 전체로 퍼지지 않도록 차단하는 역할을 하는 문이라고 한다. 문 옆에 붙어 서서 문을 열고 닫고 하는 일은 모두 어린이들의 몫. 어른 한 사람이 채 허리를 펴기도 힘든 갱도에서 적당히 몸집이 작은 어린이들이 날렵하게 이 일을 잘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의 옆에는 쇠사슬이 매달려 있다. 문 관리 어린이가 달아나지 않도록 발에 쇠사슬을 채웠다고 전한다. 암흑천지의 갱도 안에서 희미한 전등에 의지한 10살이 채 안 된 어린이가 하루 종일 발에 쇠사슬을 달고 문을 여닫았다. 이 어린이들 중 대부분은 시력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어른들만의 장소라고 생각했던 탄광에서 어린이의 흔적을 느끼게 되다니... 지각적 현실과 감각적 현실의 차이를 실감했다.
 
갱도에서 수직으로 올라가는 낡은 철재 엘리베이터를 타고 순식간에 태양 아래로 올라왔다. 낡은 엘리베이터는 당시 사용하던 것 그대로라고 한다.

또 하나의 작은 악마의 터널. 덜컹거리던 철제 사다리. 이곳을 통과해야 밖을 나가는 길이 있다.

천연 가스를 막아 주던 나무문에 쓰인 숫자. 이 문을 어린이들이 열고 닫았다.


광부들의 삶 재현

주변을 둘러보니 당시 광부들이 살았던 집을 복원한 건물이 눈에 띈다. 판자로 만들어진 2층집. 그곳에 위치한 가게에 들어가니 현대의 것이라는 느낌이 안드는 물건들이 놓여져 있다. 이 곳은 Marcelo Ferrari 감독이 2003년에 제작한 <Sub Terra>의 영화제작을 위하여 만든 세트다. 영화 제작이 끝나고도 세트를 유지하여, 방문객들이나 학생단체관람객에게 역사를 알리는 곳으로 기능한다고 한다. 이곳에서 판매하는 엽서를 보니 아까 타고 올라왔던 엘리베이터 앞에 8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이가 같이 찍힌 사진이 있다. 그 어린이가 아마도 갱도 안에서 나무문을 여닫았을 것이다. 그 아이는 시력을 잃었을 지 어떨지..... 그 아이는 쇠사슬을 풀고 탈출하고자 했을지 어떨지.... 그 아이의 평생의 삶이 이 탄광과 함께 했을지.... 그 아이는 어른으로 성장했을지 어떨지.... 막막한 감정이 들었다. 

Sub Terra 영화촬영을 위해 지어진 당시의 집들.


시를 존경하는 광부들 

<악마의 터널>이라는 별명이 붙은 로타 광산은 전통적으로 빈곤 때문에 소요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땅속에서 캐는 물질만 다를 뿐이지 당시 사기업에 의해 개발된 탄광이나 초석 광산들은 광부들의 열악한 노동현실과 빈곤 문제들을 언제나 야기한다. 네루다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아옌데 대통령 후보의 지지연설을 하러 로타 광산의 노동자들을 만났던 일화를 평생 잊을 수 없는 의식이었다고 기억한다. 당시 약 1만여 명의 광부가 참석한 로타 광장 집회에는 후텁지근한 정오의 대기와 뜨거운 햇빛을 피하기 위해 광부들은 검은 모자와 헬멧을 착용하고 있었다. 연단에 올라선 네루다에게는 광부들의 검은 모자와 헬멧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자가 네루다의 이름과 그의 시「스탈린그라드에 바치는 새로운 찬가」를 소개하자 그 많은 광부들이 조용히 모자를 벗었다. 시를 낭독하겠다고 하니 모자를 벗었던 광부들의 모습을 네루다는 이렇게 묘사한다.

“잔잔한 바다에서 해일이 일어난 듯 1만여 개의 모자가 일제히 파도를 일으키더니, 무언의 존경을 담은 검은색 포말을 일으키며 아래로 사라져갔다.”(1)

시를 낭송하며 그 어느 때보다 전쟁과 해방을 강조했다는 네루다. 네루다는 로타 광산 이외에도 초석 기업이 개발한 초석 광산에서의 일화도 소개한다. 영국인, 독일인을 비롯하여 각국의 침탈자들은 초석 광산을 독점하고 회사 이름을 지명으로 사용했다. 문자 그대로 그들의 왕국인 것이다. 광산 지역마다 독자적인 화폐를 사용했던 그곳은 특별 허가증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지역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모든 종류의 집회를 금지했고, 정당활동이나 언론의 취재도 허용되지 않았다. 네루다는 어느 날 오후, 마리아 엘레나 초석 광산의 기계창에서 노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거대한 작업장의 바닥은 항상 물, 기름, 산(酸)이 고여 있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네루다는 웅덩이 위에 높이 널빤지를 밟고 다녔다. “이 널빤지 하나 놓으려고 파업을 열다섯 번 하고, 8년동안 줄기차게 회사와 씨름했습니다. 결국 일곱 명이 목숨을 잃었답니다.” 죽은 노동자들이란 회사 경비원들이 끌고 나간 파업 지도자들이다.(2) 이렇듯 당시의 현실은 작은 것 하나라도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비오비오 강. 광부들은 ‘석탄의 행진’으로 이강을 건넜다.

침탈자들의 왕국과도 같은 곳일지라도 로타 광산의 노동자들은 투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1958년 ‘석탄의 행진’이라고 알려진 운동이 로타 광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시꺼먼 탄가루를 뒤집어 쓴 수천 명의 광부들이 빽빽이 모여 소리 없이 비오 비오 강 다리를 건넜을 때 콘셉시온 시는 온갖 깃발과 플래카드, 그리고 투쟁의 결의로 물결쳤고, 정부는 심각한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세브히오 브라보’라는 칠레 감독에 의해 <민중의 깃발(Banderas del pueblo)>이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되었다. 콘셉시온 시에 모인 군중들 사이에 아옌데가 있었는데, 아옌데의 선거 참모였던 미겔리틴 감독은 이때 아옌데가 모든 민중의 확고하고 결정적인 지지를 획득한 것으로 생각한다. 나중에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후 그가 처음으로 방문했던 곳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광부들과 대화하기 위해 찾아간 ‘로타 광장’이었다.(3) 아옌데는 이 광산을 국유화하였는데, 이는 그가 대통령이 된 후 처음으로 시행했던 시책 중 하나이다.(4)

아옌데가 연설했던 로타 광장

광장 한켠에 아옌데 기념물이 서있다.


로타 광산 그리고 사북

우리나라의 경우 1993년 대부분의 태백, 사북의 탄광이 폐광되기 전까지 강원도 일대는 70 여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검은 노다지’의 지역이었다. 그러나 칠레와 마찬가지로 광부의 삶은 석탄 산업의 활황과 상관없이 열악한 것이었다. 석탄을 캐는 막장은 30~40도의 고온과 높은 지압, 습도, 공기순환의 불량 속에 석탄가루를 마시며 일을 해야 하는 지옥과 같은 곳이었다. 게다가 산업재해의 빈발과 진폐증 때문에 광부들은 언제나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이 같은 목숨을 건 노동의 대가로 주어진 임금은 월평균 15만 5천원의 저임금으로 최저생계비에 크게 못 미치고 있었다. 이러한 열악한 현실은 1980년의 유혈폭동으로 이어졌다. 1980년 국내 최대의 민영 탄광인 강원도 동원탄좌 사북영업소에서는 어용노조와 임금 소폭 인상에 항의해 광부들에 의해 유혈 폭동이 일어났다. 광부 및 그의 가족 약 6,000여명이 참여한 이 투쟁은 회사들이 광부들의 요구를 묵살한 채 경찰을 개입시켜 경찰과 충돌하면서 유혈사태를 빚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관 1명이 숨지고 160여명의 경찰과 민간인이 부상을 당했다. 사태가 진정 된 후 당시 계엄사령부는 관련 인물 31명을 구속하고, 50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등 총 81명을 군법회의에 송치하였다. 이 사태는 경직된 노사관계와 광부들의 누적된 불만, 값싼 노동력 등이 빚어낸 참사로서, 이 사건 이후 전국 각지에서 노사분규가 잇따라 일어나는 등 1980년대 노사문제를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 사북 투쟁을 계기로 노동자들의 투쟁은 새로운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5) 

칠레의 탄광에서 우리나라의 광부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다. 국가를 초월하여 막대한 이익이 생산되는 광산 및 탄광은 대부분 사적 소유이고 이러한 곳에서 노동자들은 단지 ‘일회용 사람’들일 뿐이다. 따라서 광부들이 자신들의  삶과 노동의 조건을 인간화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건 투쟁의 과정이 뒤따라야 하는 곳이었다. 사북사태에 대한 내용이 MBC드라마 ‘에덴의 동쪽’에서 약간 그려졌다고는 하나 어느 정도 사실적으로 그렸을 지는 보지 못해 알 수가 없지만 공중파의 한계도 드러내고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폐허가 된 공터의 벽에서 프리다 칼로가 쳐다보고 있었다.


밤 거리에 붙은 프리다 칼로 

로타 광산을 나와 분홍색 와이셔츠를 입은 친절한 아저씨와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나니 오후 해질녘이다. 로타 광장으로 나와 커피를 한잔 마시면서 그 광장에서 연설했던 아옌데를 떠올려 보았다. 그 광장에는 아옌데의 기념비가 뜨거운 햇살과 텁텁한 바닷바람의 대기위에 서있다. 헤어졌던 SP38과 숙소에서 만나 비오비오(Bio Bio) 강가로 나섰다. ‘석탄의 행진’이 이 비오비오 강을 건넜다고 한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강가에는 초라한 집들이 무성하다. 강가를 걸어 숙소로 돌아오는 길. 거대한 벽화가 우리의 시선을 잡는다. 여러 사람이 하나의 테마를 가지고 좌우로 그 스토리를 연결하며 그린 듯한 벽화. 사회 비판적인 시선이 담긴 이러한 벽화는 칠레의 어디를 가나 무수히 볼 수 있다. 퇴락한 도시의 부서진 담장 한 켠에 프리다 칼로의 초상이 전시되어 있다. 이름 모를 예술가가 실크 스크린으로 제작하여 붙여 놓은 작품. 그에게는 이 도시 전체가 자신의 전시장일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작품을 보여 주고 싶었을 누군가를 생각하며 그 프리다 칼로를 조심스레 떼어냈다. 한국으로 가지고 와 집에다 걸어 두었다.

 

로타 광산이 있는 바닷가 마을 풍경

악마의 터널이란 글자가 보인다.

판자로 지은 광산의 입구는 박물관으로 되어 당시의 노동환경을 엿볼수 있도록 되어있다.

박물관에 걸려있는 광부들의 생활상.

우리를 친절히 안내해 준 분홍 와이셔츠의 아저씨. 머리에 헬멧을 쓰고 우리는 갱도로 내려갔다.

갱도 위아래의 연락을 담당하던 당시의 전화.

광산 벽에 그려진 벽화

당시 광부들의 삶을 알 수 있게 재현되어 있다.

광부들의 생활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2층에는 침실이 있는데 여러 가족이 함께 살았으며, 침대 하나에 여러 명이 번갈아 잤다.
그냥 나무바닥에 담요하나만 깔고 자기도 했다고 한다.

로타 광산에서 캔 석탄으로 만든 기념품들. 희한하게도 손에 석탄이 뭍어나지 않는다.
이런 가공 방법은 비밀이라고 한다.

로타 광장에 위치한 벽화

칠레의 어디를 가나 아옌데를 기념하는 기념물과 벽화를 볼수 있다.

밤거리에서 마주친 벽화

벽화의 부분들

벽화의 부분들

벽화의 부분들

벽화의 부분들

좀더 가까이 본 프리다 칼로.
지금은 내 방 침대 맡에 부착되어 있다.

20세기 초반의 광부들 모습.
엘리베이터 안 좌측에 어린이가 보인다.

로타 지역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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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박병규 옮김, 민음사. 2008, pp.380-381
2> 같은 책, p.259 참고
3>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칠레의 모든 기록』조구호 옮김. 간디서원, 1989, pp. 106~107
4> 그러나 피노체트가 처음으로 시행한 것은 국유화된 광산을 다시 사유화한 것이다. 피노체트는 광산, 공동묘비, 기차, 항만을 비롯하여 쓰레기장까지 거의 모든 것을 사유화, 민영화하였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칠레의 모든 기록』조구호 옮김. 간디서원, 1989, pp. 106~107 참조.
5> 유성재, 「사북사태」 국가 기록원, 200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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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1 13:30

칠레, 두 개의 9.11

[남미액션투어 ①]칠레_산티아고
                                                                                      김강 _ 프로젝트 스페이스<LAB39> 디렉터
역사는 미국의 9.11과 함께 73년 칠레의 9.11을 아프게 기억한다. 폭격받고 있는 라 모네다궁.
▲ 역사는 미국의 9.11과 함께 73년 칠레의 9.11을 아프게 기억한다. 폭격받고 있는 라 모네다궁.

<남미액션투어_A.G.I.S 프로젝트>는 남미와 한국의 동시대성을 액션(Action), 장소성(Geography), 기록*정보(information)의 체험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네트워크 시스템(System)을 제안하고자 기획되었다.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국 예술가 7인은 2008년 10월 31일 ~ 12월 6일까지 약 37일 간 칠레, 아르헨티나, 우르과이, 브라질 등 남미 4개국을 방문했다. 워크샵, 예술이벤트, 만남, 대화, 기록,  이동 등이 포함된 본 프로젝트는 한국과 남미의 기획자 5인의 협업으로 진행되었다. 남미액션투어의 기억을 다시 잡아내 그 단편을 현재에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이는 본 프로젝트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10월 31일 저녁 7시 30분 서울을 출발한 비행기는 홍콩, 요하네스버그를 거쳐 브라질의 상파울로에 도착했다. 서울을 출발한지 2박 3일 약 27시간 만에 등을 바닥에 대고 누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다음날 새벽 5시에 일어나 칠레 산티아고 행 비행기를 타야 한다.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는 <제2회 국제 퍼포먼스 비엔날레-DEFORMS>이 처음으로 열리는 도시가 산티아고이기 때문이다.

11월 2일 오전 11시 35분 산티아고 공항에 도착했다. 2명의 젊은 예술가가 우리를 맞는다. 마중 나온 그들의 얼굴을 알지 못하기에 출국장을 빠져나오기 전에 살짝 긴장했던 것이 무색했다. 그도 그럴것이 7명의 예술가와 한명의 어린이, 한명의 할머니 총 9명의 동양인1>이 부대를 이룬 그룹은 그 공항 어디에도 우리밖에 없었다. 이는 남미를 이동하는 내내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받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모여 있는 우리 그 자체가 특별한 액션을 취하지 않아도 ‘표식’이 되는 사회. 그 사회에 우리가 이제 막 발을 들여 놓은 것이다.

공항을 나서자 눈이 부신 날(生)것의 산티아고 태양빛이 ‘남미’의 색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공항을 나서자 눈이 부신 날(生)것의 산티아고 태양빛이 ‘남미’의 색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서울은 늦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었으나, 우리와 정확하게 1분 1초도 안 틀리고 12시간 차이인 이곳은 늦봄에서 여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남미의 태양은 남미의 색을 만들어 내었듯이 북반구 한국의 태양은 한국의 색을 만들어 내었을 것이다. 얼핏 오방색이 떠올랐으나 그 오방색은 현재의 ‘우리’와는 너무 멀어보였다. 그러나 남미의 색은 도시 곳곳에서 현재형으로 현현되고 있었다. 2대의 승용차에 짐을 나누어 싣고, 우리는 구겨지고 포개져서 숙소로 이동했다. 2년 만에 다시 보는 산티아고는 그다지 변화된 풍경을 보여주지 않았다. 단지 한국산 자동차가 2년 전에 비해 도로를 많이 질주한다는 것 외에는... 2004년 4월 1일 발효된 한칠레 FTA의 구체적인 현장은 한국에서는 칠레 포도주로, 칠레에서는 한국의 자동차로 그 현실을 증명하고 있다.

마치 자코메티의 조각상처럼 좁고 길게 생긴 나라, 칠레. 대서양을 면한 해안선 길이가 6,435Km에 이르는 칠레는 300년 이상 스페인 지배를 받다가 1810년 자치정부를 수립하고, 1812년 칠레 독립을 선포하였다. 300년 이상 스페인의 지배를 받아서 인지 칠레 인민들은 백인계가 약 95%를 이룬다. 칠레에 대한 한국의 다큐 등에서는 마푸체 족 등 인디오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사실상 칠레는 백인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인과 인디오의 혼혈을 일컫는 메스티조가 66%, 스페인계 25%, 기타 유럽계 4%, 마푸체 족 등 5%의 인디오로 인종이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흔히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을 인디언, 혹은 인디오로 부르는데, 이는 처음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들여놓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로 착각해서 그곳의 원주민들을 인디오(Indio:에스파냐어로 인도인이라는 뜻)로 지칭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인디오’들이 사실은 ‘인도인’이 아니라 ‘아메리카 원주민’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나서도, 그들을 ‘아메리카 인디오’, ‘인디오’ 로 부르는 것은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식민화하기 쉬운 대상, 즉 타자화하기 쉬운 대상으로 그들을 지칭하던 관습이 굳어져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의 통칭인 ‘인디오’는 제국의 역사와 함께 현재까지 존속한다.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는 동쪽으로는 안데스 산맥이 웅장하게 달리고, 도심에는 마포초(Rio Mapocho)강이 흐른다. 대도시의 강치고는 물살이 빠른 마포초 강은 피노체트의 군사 쿠테타 이후 몇 개월 동안 쿠테타 군인들의 야간 습격에 의해 살해된 소외된 계층 사람들의 처참한 시체가 둥둥 떠내려가던 강이었다. 마포초강은 이제 그 역사를 빠르게 잊고 싶은 듯 유속이 급하기만 하다. 

카사크로마 _ Drawing by 정정엽


젊은 예술가들의 아지트 _ 카사크로마


우리가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카사크로마(CASACROMA)라는 복합예술공간이다. 일주일동안 우리가 머무르게 될 카사크로마는 산티아고의 다장르 젊은 예술가들 9명이 공동으로 임대하여 작업실로도 사용하고, 전시, 콘서트 등의 예술이벤트등도 하는 일종의 복합 공간이다. 카사크로마는 2008년 <제2회 국제 퍼포먼스 비엔날레DEFORMS>를 준비하는 팀들이 우리에게 제공한 숙소이다. 행사 준비팀이 우리에게 호텔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뿌리치고,
조금은 불편할 듯도 한 이 공간을 선택했다. 우리가 낯선 지역의 삶의 모습을 잘 알기 위해서는 그곳을 ‘구경’하기보다는 짧은 시간이나마 그곳에서 ‘사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급히 공수해 온 것으로 보이는 매트리스와 침낭이 가지런하게 놓여있다. 국적,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 집에서 우리는 한시적인 공동체를 이루며 지낼 것이다. 다음날 태국 작가 바싼 씨티켓(Vasa Shittiket)이 이곳에 도착했다. 뜨거운 태양아래 포도주와 맥주, 바비큐로 시작된 환영 파티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한낮의 남미, 바비큐는 익어가고 비엔날레 참여 작가들이 파티를 위해 카사크로마로 모여든다.

도시와 몸 _ 국제퍼포먼스 비엔날레 2008

<국제퍼포먼스비엔날레 _ DEFORMS>는 2006년 처음으로 칠레에서 개최된 이래, 2008년에는 아르헨티나, 우르과이와 네트워크 행사로 기획되었다. 이 비엔날레는 20개국 200명의 예술가가 참여하는 국제 행사로써, ‘도시와 몸’이라는 주제로 전시회, 라이브 퍼포먼스, 워크샵, 컨퍼런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1월 4일 이 행사의 오프닝이 칠레 산티아고 도서관의 전시장에서 진행되었다. 이쯤에서 밝혀두어야 할 것이 있다. 우리 일행이 <남미액션투어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남미를 37일간이나 누빌 수 있었던 것은 공식적으로는 이 행사의 참여이다. 이 행사의 참여를 위해 국제교류재단, 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이 먼 나라에, 이 많은 숫자의 한국인이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이곳에 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즉 남미액션투어는 퍼포먼스비엔날레 행사참여를 위해 국가로부터 기초 경비를 지원받아 그 내용을 자체적으로 구성한 좀 복잡한 성격의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제2회 국제 퍼포먼스 비엔날레 포스터


 
탱크와 폭격기를 기억하는 라 모네다 궁(La Moneda)

다음날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라 모네다’ 궁으로 향했다. 옆으로 누운 직사각형의 형태를 지닌 라모네다궁의 1층 정원과 지하 문화센터(Centro Cultural Palacio de la Moneda)는 일반인들에게 자유롭게 개방되어 있다. 문화센터에는 남미의 전통 문화 전시실, 현대미술전시실과 영화관 등이 있다. 커다란 로비에서는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개최된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영정이 설치된 참배단이 눈에 띄었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를 기리는 참배단. 아마도 우리가 방문했을 때가
이들을 기념하는 무슨 날이었던가 싶다. 2006년에 왔을때는 보지 못했다.

대통령 궁 지하의 문화센터 로비에 작품이 설치된 모습

지금은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이곳은 1973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가 쿠테타 군에 의해 죽음을 맞은 곳이다. 세계 최초로 민주선거를 통해 집권한 사회주의 정당 인민연합의 대통령 아옌데. 토지개혁 및 구리광산의 국유화 등 분배위주의 사회주의 개혁정책은 미국을 등에 업은 자본가들과 우파정치인들, 정치군인들의 쿠데타에 의해 좌절되었다. 피노체트(Augusto Pinochet)를 필두로 한 쿠데타 군은 1973년 9월 11일 대통령 궁을 탱크로 둘러싸고 공군 폭격기는 폭격을 시작했다. 산티아고 시내 한복판, 대통령 궁의 폭격을 시작으로 칠레에서의 살육은 시작되었다. 피노체트는 라모네다 궁을 접수한 지 일주일 만에 약 3만 여명을 학살하였으며, 사회주의자들, 동조자들, 진보 진영 인사들과 정치적 반대자들을 체육관에 몰아넣고 집단 처형한다. 지난 73년부터 89년 까지 약 17년간의 군사통치기간 중 사망자 3천여명, 실종 1천여명, 고문 불구자 10만명, 국외 추방자들이 100만 여명에 이르렀다.


두 개의 9.11

우리는 2001년의 미국의 9.11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칠레 군부와 손잡고 민중의 대표자를 살해했던 73년의 9.11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나 역시도 2006년 칠레에 가기 전까지는 그 사실에 대해서 무지했었다. 칠레로 가기 위한 준비과정에서 칠레의 역사와 마주할 수 있었다.

나와 김윤환은 28년의 시간차가 있는 두 개의 9.11과 역사인식의 문제를 몸으로 말하고 싶었다. 쓰여진 역사는 승리한 사람들의 역사일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는 시와 노래로 쓰여진다. 2006년 비엔날레 기간 내내 참여 작가나 칠레 친구들에게 면봉으로 귀를 파고, 우리에게 달라고 했다. 모두들 영문을 몰라 했지만 재밌는 게 벌어지나 보다 하면서 적극적으로 귀를 파고, 그 면봉을 우리에게 모아 주었다. 한 무더기 모아진 면봉은 칠레국립현대미술관 로비에서 두 개의 9.11로 상징화되었다. 50호짜리 캔버스에 굵은 9.11과 얇은 9.11이 부착되는 동안, 민중의 자유를 노래했다는 이유로 손목이 잘려 죽은 칠레 가수 빅토르 하라(Victor Lidio Jara Martinez)의 노래가 작은 소리로 흘러나왔다. 그 노래가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해, 바닥, 땅, 기둥, 벽, 관객들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댔다. 두 개의 9.11이 다 만들어 지고 나자, 나와 김윤환은 <민중은 죽지 않는다. 사라지지도 않는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미술관을 나와 거리로 나갔다. 함께 거리로 나온 관중들은 산티아고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2006년 칠레 국립 미술관에서의 벌인 두 개의 911 퍼포먼스 

두 개의 911. 미술과의 바닥, 관객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댄다. 남미의 소리를 듣기 위해. 

현재 라모네다 궁 앞에는 아옌데의 동상이 서있다. 폭격이 시작되기 전 망명을 받아주겠다던 미국과 피노체트의 제안을 뿌리치고 끝까지 총을 들고 궁에서 싸웠던 아옌데. 1973년 9월 11일 쿠테타 군에게 궁이 포위당한 상태에서 칠레인들에게 라디오 생방송으로 전한 그의 생애 마지막 연설 중의 일부가 그 동상에 새겨져 있다.

조국의 노동자들, 나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을 믿습니다.
반역자들이 승리하려는 이 암울하고 참담한 순간에서 결국은 또 다른 사람들은 떨치고 일어날 것입니다. 전진하십시오. 머지 않아 넓은 대로들이 다시 뚫리고 자유인들이 더 나은 사회의 건설을 위해 그 대로 위를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2>

겨우 찾은 자유와 정의가 물거품이 되어가는 순간에 누군가가 이 아픈 기억을 이겨내고 우리가 꿈꿨던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아옌데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다. 

라모네다 궁 뒤편에 자리한 아옌데 동상. 동상 뒤편에 그의 마지막 연설이 새겨져 있다.

연설하는 생전의 아옌데.


어른들도 ‘만들기’ 하는 산티아고 도서관

퍼포먼스 행사의 오프닝은 산티아고 시립 도서관에서 열렸다. 산티아고 중앙역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도서관은 국립현대미술관(MAC)과 대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현대식 건물의 도서관은 일반적 도서관의 기능 이외에도, 현대 미술전시장 및 어린이 도서관 등이 함께 있다. 카페가 위치한 지하층의 열린 광장에서는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와 같은 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한 반 전체가 도서관으로 견학 및 소풍을 온 것 같았다. 나는 곱단이를 데리고 어린이 도서관에 들어가 보았다. 마치 책이 있는 놀이터와 같은 인상이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는 ‘만들기’ 어린이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었다. 나는 우리도 참여할 수 있는 지 문의를 했고, 진행요원들이 흔쾌히 재료들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런데, 재료를 2벌 주는 것이었다. 나와 곱단이가 각각 자신의 ‘만들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미 만들기를 하고 있는 어른들은 아이들 곁에서 자신의 ‘작품’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어른들은 아이의 작업을 도와주는 보조자가 아니라 자신의 창조성을 발현하는 ‘창작자’가 된다. 즉 아이는 아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자신의 창조성을 끄집어 내어 무언가를 만들면서 그 창조적 작업의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다. 나는 이 프로그램에 곱단이와 할머니를 참여시키고, 비엔날레오프닝 준비를 했다. 산티아고 도서관의 어린이 프로그램은 참여한 곱단이와 우리 엄마에게도 특별한 경험이겠지만, 비엔날레 일을 해야 하는 나에게도 유익한 프로그램이 되었다.

도서관내의 어린이 프로그램. 어른들도 아이들을 돕기 보다 자신의 ‘만들기’를 하느라고 분주하다.

칠레 어린이와 어른들사이에서 만들기를 하고 있는 필자의 딸 곱단이. 말도 안통하는 곳에서
약간 어벙해 했지만, ‘만들기’ 수업은 언어 소통 없이도 얼마든지 소통 가능!


붉은 포도주와 쪽!쪽!쪽! 

빅토 휴고 브라보(Victor Hugo Bravo)가 큐레이팅한 남미 작가들의 미술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전시장에서 오프닝 퍼포먼스가 열렸다. 오프닝 파티는 정정엽 작가의 아는 분이 협찬한 포도주로 시작되었다. 붉은 포도주 한잔씩 받아든 작가 관객등 약 500여명은 약간의 들뜬 감정으로 비엔날레의 첫시작을 지켜보았다. 비엔날레 오프닝 이후 매일 저녁 7시부터 11시까지 산티아고의 곳곳에서 퍼포먼스가 벌어졌다. 한국 작가들은 라모네다 궁 뒤편에 위치한 신문사 <Diario de Nacion> 의 내부 공간과 라모네다 궁 뒤쪽 마당에서 퍼포먼스를 하였다.

초여름의 초목이 신선한 공원의 곳곳에서 칠레의 젊은이들은 쪽!쪽!쪽! 하기에 바쁘다. 남미 사람들이라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태국작가 바싼은 비판적 시각이다. 유교사상이 내면에 깔려있는 동양에서 온 우리에게 이런 풍경은 낯뜨거운 것이라서 그런가 싶었는데, 바싼은 칠레의 젊은이들이 육체적 행위의 자유를 영위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의 성취로 착각할수도 있기 때문에 비판한다고 말한다. 일견 그 비판이 타당해 보였지만, 대로변에서 키스하는 남녀의 모습이 부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50세가 훌쩍 넘은 바싼의 질투심은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칠레는 한국과의 거리만큼이나 인종도, 문화도 많이 먼 듯이 느껴졌다. 그러나 식민지와 독재의 경험, 폭압과 그에 대한 저항의 시간들은 우리와 닮아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전세계를 뒤덮고 있는 현재 메트로폴리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유니폼화 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요즘 한국도 거리에서 쪽!쪽!쪽! 하는 커플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그들이 부디 오픈된 공간에서의 사랑의 행위만을 자유로 느끼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정면에서 바라본 대통령 궁. 많지 않은 경찰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고, 잔디와 낮은 분수가 있다.

산티아고의 제일 큰 대로인 오이긴스 거리 한 복판에 위치한 라모네다 대통령궁. 1973년
쿠데타군에 의한 폭격을 목격했을 칠레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옌데는 이 궁안에서
마지막 연설을 하고 죽음을 맞는다.

면봉으로 귀를 파고 있는 관객(싱가폴 예술가 LEE WEN)

두 개의 911 조형 작업을 마치고, 비엔날레 기획자에게 전달했다. 남은 면봉을 다시 입에 물고
우리는 거리로 나섰다. <민중은 죽지 않는다. 사라지지도 않는다> 

제2회 퍼포먼스 비엔날레 오프닝 장면 이날 이후 이 행사는 18일 간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산티아고 지하철역의 대부분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벽화의 내용은 주로 남미의 역사와
현재의 모습들이다. 벽화의 형식도 페인팅에서 설치까지, 고전적인 방식에서 현대적인
방식까지 다양하다. 

지하철 역내 벽화들 상당한 수준의 벽화들을 일상적인 공간에서 만날 수 있다.

쪽 쪽 쪽 정정엽의 드로잉

남미의 햇살이 그대로 느껴지는 산티아고의 주택가 풍경

까사크로라마 젊은 작가들과 함께
산티아고 시내의 빅토르 하라 공연장. 그의 노래와 죽음을 기억하는 칠레인들은 피노체트가
물러나고 난 후 그를 기리는 공연장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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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1> 본 프로젝트는 김강, 김윤환, 정정엽, 이호석, 손민아, 박지원, 백미라가 예술가로 참여했다. 김강, 김윤환의 자녀 김하(곱단이)와 김하의 할머니가 손녀를 돌보기 위해 함께 남미길에 올랐다.

2> 동상에 새겨진 원문은 < 전진하십시오. 머지 않아 넓은 대로들이 다시 뚫리고 자유인들이 더 나은 사회의 건설을 위해 그 대로 위를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 Mucho Mas temprano que tarde, de nuevo se abriran las grandes alamedas por donde pase el hombre libre para construir una sociedad mejor.>만 새겨져 있다. 스페인어 번역을 위해 마드리드에 사는 장경애씨에게 부탁을 드렸더니 장경애씨는 아옌데의 연설문의 한 문단을 번역해서 보내주었다. 앞의 문장을 모른 상태에서 뒷 문장 하나만을 가지고는 아옌데의 마음을 알기 어려울 것이기에 문단 전체를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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