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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1.05 다시, 전위와 실천, 행동의 아방가르디즘을 위하여!
[2008 장르결산-④]시각예술 김종길 _ 미술평론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대대적인 공습을 감행했다는 기사를 읽으며, 비장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1979년에 창립한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광자협)’와 ‘현실과발언(현발)’이 그 시원이 된 한국 민족민중미술은 탈식민주의 논쟁의 가장 극명한 예술적 사례로 볼 수 있다.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으로 광범위한 저항 미술운동이 된 ‘민족민중미술’은 이후 프로파간다propaganda의 성격이 짙은 반정부․반미 운동을 통해 서구적 미술사 편승에 열을 올렸던 한국 현대미술사에 새로운 물꼬를 텄다. 빌 애쉬크로프트Bill Ashcroft는 탈식민주의에 대해 “이주, 노예, 억압, 저항, 재현, 차이, 인종, 성, 장소와 제국주의가 영향을 끼친 역사․철학․언어학 같은 담론에 대한 반응, 그리고 이런 내용을 담은 말하기, 쓰기 등의 다양한 경험 내용을 토론하는 것”이라 말한 바 있는데, 반정부․반미 운동을 넘어서서 1990년대와 2000년 이후의 미술적 상상을 현실화해 온 민족민중미술의 후예들은 애쉬크로프트가 언급한 주제어를 예술행동의 실천방식으로 새겨 넣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미약하고 일부에 한정되는 일이다. 최근의 공공미술과 현장미술이 과연 탈식민주의 논의를 갖게 하거나 혹은 1980년대의 민족민중미술의 씨알을 포태하고 있는지에 대해선 재론이 필요하다. 이제 예술이 아니라 현장이, 민중이 스스로의 예술적 힘을 쏟아내고 있거니와 저항의 기제로서 미술은 그 현장적 에너지를 급격히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우리가 미술을 논하기 위해선 미술 본래의 속성이랄 수 있는 전위와 실천, 행동의 ‘아방가르디즘Avantgardism’을 함의하고 있을 때이다. 아! 2008년, 올해는 광자협과 현발이 탄생한지 30년이 된 해가 아닌가! 그리고 2009년, 내년이면 30주년이 된다. 30년의 회억을 재생하는 것은 차지하고, 아방가르디즘이 상실된 현 단계 미술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바로 이것이 문제다. 나는 다시, 현발이 촛불을 피우며 창립을 도모했던 그 겨울로 돌아가 다시, 새로운 모멘텀momentum의 기운을 피워 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체적 통일과 민중해방, 이주, 노예, 억압, 저항, 재현, 차이, 인종, 성, 장소의 담론은 지속되어야 하며, 그것은 현재형의 미술로서 끊임없이 발아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 이어 실용정부에서 조차 우리는 희망을 찾을 수 없고, 뿐만 아니라 이 정부는 대 의회전쟁을 선포하는 따위의 노골적 반민주 선언을 통해 자발적 식민화를 걷기 위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고 있지 않은가! 2008년은 시장주도의 미술가치 생산이 얼마나 위험하며 부질없는 것인지, 그 실상이 만천하에 노출된 해이다. 2000년 이후 미술계는 참혹할 만큼 비평부재의 상황이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옥션이 키운 ‘자본 가치 환원성’의 ‘분식작품’들은 고공행진을 달렸다. 무엇이, 누가 그들을 이토록 위험한 벼랑 끝으로 내몰았을까. 그런데 이 벼랑 끝 위험성의 진실이란 것이 너무도 허약하고 부실해서 과연 비평적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필자 스스로 자괴감을 갖게 한다. 우선 분식작품을 양산해 내도록 부추긴 시장의 자본욕망을 꼬집지 않을 수 없다. 수십, 수백억원대의 기금 조성과 작품 사재기가 미술시장을 요동치게 했고, 많은 새내기 작가들이 이 욕망의 환타지에 중독되었다. 박수근 위작 논란이 불거진 이유는 단 하나다. 돈이 돈을 먹어야 가치가 커지는 자본의 속성 때문이다. 박수근이란 신화조차도 이 블랙홀에선 빠져 나올 수 없다. 자본이 먹어치운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박수근의 뼈가 아니라 탐욕의 찌꺼기다. 2008년은 이 찌꺼기들이 벼랑 끝에서 깃대 없이 흩날리고 있다. 하여, 필자는 최소한의 잣대-전위와 실천, 행동의 아방가르디즘Avantgardism-로 2008년의 유의미한 전시와 작품들을 리뷰해 보고자 한다. 지난해에도 언급했듯이 다분히 주관적 판단에 의해 전시/작품들을 선정하였다. 그러나 이 전시/작품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미술사적으로 혹은 미학적으로 따듯한 비평적 평가를 받게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고길천은 4.3미술제 10주년 자료집을 노암 촘스키에게 보낸 바 있다. 촘스키는 이 책을 받은 후 이메일을 통해 제주 방문을 희망했으며, 기회가 되면 꼭 오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촘스키는 자신의 저서에서 1940년대 후반 한국에서 발생한 미군정의 만행을 밝히 바 있다. “미군이 2차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5년에 한국에 상륙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지방 정부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항일운동이 있었고, 그들은 북한과 남한 전역에 지방정부, 인민위원회 등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남한에 진주하자, 그 모든 것을 해체하고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미국은 친일파 한국인을 행정 요원으로 이용했고, 사실 일본 경찰 제도를 그대로 복구하여 이미 있던 민간 제도들을 모두 파괴했습니다. 그것은 남한에게 심각한 갈등을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심한 충돌이 4~5년 동안 계속되어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 노암 촘스키, 『민중이 권력에 저항하는 방식에 관하여-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시대의 창, 2005), 99쪽. 올해는 제주 4.3 60주년임에도 우린 그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기억뿐만 아니라 그 실체의 흔적들이, 그 아픔의 삶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아직 그들이 우리와 함께 이 시대를 호흡할 수 있었기에 ‘4.3미술’은 가능했는지 모른다. 2007년, 역사는 다시 어둡고 음습한 곳에 버려진 주검을 발굴했다. 제주 정뜨르 공항의 개토開土는 4.3을 살림의 역사로 쓰게 하는 전환의 방향타가 될 것임에 분명하다. 4.3미술제 15주년을 맞아 예술가들이 찾아야 할 예술언어도 거기에 있어야 할 것이다. 세대는 새로운 세대로 흘러야 하고, 그 기억은 새로운 언어로 쓰는 투쟁이 될 필요가 있다. 오늘 우리가 4.3에서 얻는 깨달음은 슬픔이 아니라 한 발 앞으로 내딛는 진보여야 한다. 4.3미술은 우리 민족이 겪는 ‘기억투쟁’의 한 사례라 할 것이다. 4.3의 빛은 반세기 가까이 군부독재 아래서 환하게 타오르지 못한 채 어둠에 갇혀 있었다. 오히려 살아남은 자들조차 연좌제에 걸려 독배를 마셔야 했다. 4.3을 기억하고, 이를 예술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운동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탐미협의 15년 활동은 그래서 ‘산 역사의 생명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제주라는 삶의 현장에서 역사를 회복시키고자 한 일련의 움직임을 뜻한다. 탐미협의 4.3미술은 4.3항쟁을 통해 그들 자신을 스스로 인식하고 또한 그들 자신이 그들 스스로를 해방하는 진정한 자기회복, 창조적 주체회복운동이다. 4.3미술은 누구보다 먼저 거기에 참여하는 이들의 자기해방, 자기회복운동인 셈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맥점이라 할 수 있다. 4.3은 그동안 죽은 역사의 죽임운동이었다. 어느 누구도 입 밖에 낼 수 없는 금기의 언어이자 상처였다. 현기영이 북촌리 학살사건을 소재로 쓴 「순이삼촌」을 통해 4.3을 알렸지만, 그 후 보안사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던 것은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저항이었던 것이다. 그는 「순이삼촌」에서 “그 죄악은 30년 동안 여태 단 한 번도 고발 되어본 적이 없었다”고 적지 않았던가!
“이들은 세상의 금기와 경직된 상식을 부정하고, 사고의 자유를 갈망한다. 이러한 정신은 길들여지지 않는 작가들의 신념과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다. 대중적 인기와 물질 가치의 예술관에 함몰된 현대미술의 강력한 울타리를 넘어서는, 신념의 강조는 일견 공허하고 비현실적인 순진한 외침일지 모른다. 그러나 표피적이며, 유한한 가치에의 경도는 작가 스스로 예술의 원초적인 야성을 포기하고 영원한 자유를 폐기해 버리는 행동이자, 일시적 욕망의 분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세속적 분류와 가치를 뛰어넘는 상상과 실천은 살아있는 작가의 존재를 증명하는 힘이다. 이번 전시의 참여 작가들은 물질화된 세상의 가치와 유혹에 타협하지 않고, 작가로서의 존재감을 날것의 신선함으로 보여준다. 이들은 ‘나는 작가다!’라고 당당히 선언하며, 예술의 소통 기능을 회복하고, 부조리하고 나른한 세상과 일상을 깨우기 위해 야수와 같이 달려들 것이다.” 국공립미술관의 전시에 대해 비평계와 미술 언론의 평가는 대부분 ‘평가절하’의 인식을 먼저 깔고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아니, 사실상 대부분의 전시에 대해 본격 리뷰를 거의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옳다. 국민의 세금으로 기획하는 전시에 뭐 그리 할 말이 있겠냐는 게 선험적 비평인식일지 모르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따지고 봐야 할 전시들 많다. <나는 작가다>는 시장의 평가가 낳은 작가들이 아니라 미술의 본성을 가진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했단 점에서 높이 평가 받아야 할 전시다. 뿐만 아니라 전시구성과 연출면에서도 놀라운 집중력을 과시한 작가들의 작품은 전시의 임팩트를 극대화하고 있다. 이 전시는 또한 큐레이팅의 저력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주요한 사례로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모호하고 결속력 없는 개념어들에 끼워 맞춘 수많은 전시들과 달리 이 전시는 작가분석과 개념어의 설정, 논리적 전개, 선명한 메시지의 타전 등 다양한 면에서 빼어났다.
전화를 걸었다. 태풍 ‘나리’에 뿌리 뽑혀 죽은 소나무를 깎아 ‘구름솟대’, ‘전복솟대’, ‘소라솟대’ 몇 구 해안에 세웠단다. 그런데 평소완 달리 기운이 없다. 껄껄! 웃음도 생략이다. 자꾸 캐물으니, 작업 도중 2미터 높이에서 떨어져 갈비뼈에 금이 갔단다. 지인들 걱정 할까봐 쉬쉬한다. 제작비를 걱정하는 내게 “장산곶매 몇 장 팔아야지 뭐”한다. 선생이 가난한 이유를 알겠다. 반면, 선생이야말로 진정한 부자이며, 영혼 맑은 예술가라는 사실 또한 알겠다. 금간 갈비뼈 내색 않고 세운 솟대가 서귀포 강정마을의 평화를 수호하는 상징이 되길 간절히 염원하며 전화를 끊자마자 거짓말처럼, 뜬금없이, 멀쩡한 내 갈비뼈가 욱신거린다. 결린다. 현장미술가 최병수는 사람(person)과 인간(human being, Homo sapience)의 이중성격에서 오는 파탄적인 행태들을 즉각적으로 고민하면서 실천적 미의식을 표출해 왔다. 그래서 그는 한국 현대미술계에서 거의 유일한 행동주의 미술가이자 도로시 스탕 수녀와 같은 자기희생의 나눔을 실천하는 실천가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행동한다. 세계의 분노가 모여드는 곳이 어느 곳이든 달려가 미술이라는 형식이 가질 수 있는 명쾌하고 파워 풀 한 이미지의 칼날을 던진다. 그 호소력 넘치는 작품들은 ‘파괴를 일삼는 암적인 존재를 제거하는 역할’을 하지만, 아이들에게, 시인에게, 전 세계 민중에게는 저항과 투쟁의 동질적 가치로 사랑을 받았다. 문제의 핵심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가독성, 그리고 빼어난 상징과 은유를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오만이 보여주는 죽음을 향한 저주의 증거들 사이에서 그의 작품은 향기로운 꽃과 다름없다. 브라질에서(1992년. 리우환경회의에 <쓰레기들>전시), 미국에서(1995년. 뉴욕 유엔본부에 <9680>전시), 터키에서(1996년. 이스탄불 세계주거회의에서 <투명한 야만>제작 전시), 일본에서(1997년. 교토 제3차 세계 환경회의에 <펭귄이 녹고 있다>전시), 임진각에서(1998년. <장산곶매>전시), 아르헨티나에서(1998년. 브에노스 아이레스 COP4 참가 <지구반지> <문병의 끝>전시), 무주에서(1999. 어린이 환경캠프에 <꿩 먹고 알 먹으면 멸종이다>전시), 헤이그에서(2000년. 헤이그 COP6 참가 <펭귄이 녹고 있다>제작 설치), 그리고 새만금에서, 북한산에서, 뉴질랜드에서 보여준 환경미술의 행동을 기억해 보라!
1981년, 자연미술가협회 ‘야투’(野投)의 전신인 야외현장미술연구회의 창립 서문을 보면, 자연과의 신선한 접촉을 통해 야외미술을 연구하는 모임이라 밝히면서 자연에 대한 강한 사랑을 바탕으로 그의(자연의) 순리적 변화, 무한한 넓이와 두께, 그 가운데의 모든 생명력을 예찬한다고 적고 있다. 이 글의 곳곳에는 그와 같은 ‘예찬’의 어휘들이 생생하다. 가령, “들에 핀 야생초와 같은 생명력”, “풀 한 포기의 떨림에서부터 여치의 울음, 개구리의 합창, 새, 물고기, 나뭇결에 스치는 바람소리, 밤하늘의 별빛, 봄의 꽃”, “스치는 바람결에 떨림의 춤을 추었던 초목”, “돌 항아리에 밤이슬을 받아 부어 흘려 놓은 듯 한 금강물” 등은 시어에 다름 아니다. 임동식이 쓴 이 글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1981년 7월 하순, 호박잎이 커질 무렵, 그 위에 떨어지는 밤 소나기를 들으며 구 공주여고 교실-작업장에서 쓰다” 그의 회화는 옹근 그때의 정신을 지키면서, 자연과 인간의 일여一如를 완성하려 한다. 그와 그의 몸, 회화는 그래서 이 사회에 대한 통 큰 저항이며, 메시지다. 카페와 에로스, 지하철, 그리고 <2006서울타워>를 거쳐 이제 그가 도달한 곳은 아시아다. 20세기 동북아시아는 혁명과 침략, 식민, 그리고 전쟁의 나날이었다. 비슷한 중세를 겪었음에도 20세기 동북아시아는 전제주의와 사회주의, 자본주의의 길을 실험했다. 아시아는 본래 그리스인들이 그들 나라의 동쪽에 있는 나라들을 가리킬 때 사용한 ‘아수(masu)’라는 아시리아어에서 유래하며, 북쪽 시베리아 첼류스킨곶(串)에서 남쪽 싱가포르 피아이곶까지, 그리고 서쪽 터키의 바바곶에서 북동쪽 시베리아의 데즈네프곶까지 걸쳐있는 이 땅은 수 천 년 동안 문화혼합의 통섭을 이어왔다. 이제 이흥덕이 주목하는 것은 이 아시아의 풍경이고, 그 첫 번째는 동북아시아 삼국의 현실이다. <2006서울타워>의 형식이 지속되고 있는 이 풍경의 내장은 전통, 역사, 혁명, 그리고 지금 여기의 현실이다.
석고, 돌, 침목, 콜타르에 이르기까지 그가 주목한 조각적 재질들은 하나같이 대지의 시간이 잉태한 단단한 뼈들이다. 그는 그 안에서 퇴적된 인간의 몸을 발굴하기 위해 도끼와 전기톱, 그라인더를 동원해 왔다. 마치 우주의 숨결이 신목으로 자라 거대한 신화를 형성하듯 그는 육신에 깃든 에고(ego)의 신화를 채굴하려 했던 것이다. (당신이) 때때로 그에게서 도끼를 든 무당의 환영을 보았다면 틀림없이 정현이란 조각가의 실체에 매우 근접해 있다고 난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그는 불의 씨알로 들어간 듯 보인다. 어쩌면 이것은 사유의 수순이 아닐까 하는데, 최근에 주로 사용한 침목이나 콜타르는 그 자체로 불을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우리 존재를 불과 마찬가지로 어떤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긴장 속에서 항상 생동하고 있어서 올라가고 내려가며 빛나거나 어두워지는 것으로 파악했다. 또한 그는 불의 솟구침을 포착하고 불에 참여하면서 존재 자체가 불처럼 용솟음친다고 말했다. 정현은 철근을 불로 녹여서 솟구침의 현상들을 조형화하고 있다. 이번 전시 작품들은 머리 없이 대지에서 곧장 솟아올랐다. 머리가 몸의 상징어이듯이 몸은 대지의 상징어이니 이제 그 뿌리는 대지로 돌아가고, 잘 자란 철근의 싹들이 영글고 있다 할 것이다. 정현 작품의 리얼리티는 이처럼 존재의 실존을 끝없이 파헤친 자리에서 피어올린 불의 몸이며, 불의 뼈라 할 터이다. “불은 부동의 것이 아니다. 불은 잠잘 때도 살아 움직인다. 꿈꾸는 사람에게 불의 이미지는 강렬함을 전달하는 하나의 학파와도 같은 것”이라고 바슐라르가 얘기했을 때 정현의 불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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