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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09 비약은 없다, 조금씩 꾸준히 발전하자
  2. 2008.10.29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 - ①]'한국독립영화의 아버지' 김동원 감독 (1)
2009.01.09 12:24

비약은 없다, 조금씩 꾸준히 발전하자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⑩] 임창재 한독협 이사장 
                                                                                                 컬처뉴스 김나라, 필름온 안효원 기자
임창재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
▲ 임창재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

한국독립영화협회 창립 10주년 특집으로 준비했던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 마지막 인터뷰는 한국 독립영화 1세대이자 한독협 이사장으로 재임 중인 임창재 감독과 함께했다. 마지막 인터뷰는 그동안 아홉명의 독립영화인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며 이야기 했던 독립영화계의 현안과 독립영화인들의 고민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한독협의 이사장으로서 또 동시에 한 사람의 창작자로서 임창재 감독의 의견을 들어 볼 수 있는 유의미한 시간이었다.

한국독립영화협회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소감 한마디 해 달라.

일단 시간이 빨리 갔다. 돌이켜 보면 그동안 많은 일을 한 것 같다. 한편으로는 변화가 있었지만 많은 변화는 아닌 것 같다는 양면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으로 들린다.

이건 협회의 일원이 아닌 한국 사회의 창작자 입장에서 말하는 건데, 우리는 창작을 통해 자기 존재를 인식하고 성찰하며 산다. 그 원칙에서 비춰볼 때 작품을 더 치열하게 만들지 못한 것 같다. 물론 양적으로 따지는 게 능사는 아니지만, 중간에 사라지는 감독들을 볼 때 더 할 수 있었는데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사라지는 감독들 또한 창작하고 싶은 열망이 없어서 작업을 그만둔 것은 아닐 텐데.

지난 10년의 정권이 독립영화 환경에 영향을 주긴 했다. 그런데 그런 외적인 요인과 무관하게 내적으로 계속 만들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그런 부분을 쌓는 데 있어 더 강화할 수 있었는데 못했다는 말이다.

가치와 미학에 영화란 옷을 입히다.

언제 창작자의 길을 걷게 됐나.

1994년 동숭아트센터에서 열린 실험영화제에서 <오그>(ORG)라는 영화를 상영했다. 그 영화제는 내가 몸담고 있었던 실험영화연구소에서 주관했었는데, 국내 작품이 전무한 상태라 좀 부족하더라도 내가 만들게 됐다. 생각보다 관객이 많이 왔다. 당시 실험영화가 낯선 개념의 영화였는데도 매체에서도 관심을 보여 힘이 됐던 기억이 난다.

처음부터 실험영화에 뜻이 있었나.

그때는 그런 생각을 별로 안했다. 군대 제대한 후인 1990년대 초반은 우울하고 패배적인 사회 상황이었다. 제대하고 노동자문화운동연합에 속해 있는, 거의 해체 위기에 있는 영화모임에서 공부를 했다. 시네마테크에서 외국 영화를 빌려와 보고 토론하고 그렇게 1년간 했다. 그러다 서서히 창작, 제작에 대한 논의를 했었다.

당시 어떤 일들이 있었나.

권병순 감독님이 영화 미학의 기초가 되는 실험영화 공부를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연구소도 만들었고, 노동자문화운동연합의 영화분과가 서울영상집단으로 독립했다. 당시 충무로를 경험한 선배들이 있었는데 충무로에서 수순을 밟는 것이 결코 최선의 코스는 아니라는 걸 알았다. 또 1980년대에 대학에서 인문사회를 공부하면서 영화 쪽에 관심을 가졌던 선배들이 1990년대에 영화를 만들면서 7,80년대의 관행들에 균열을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독립영화를 선택한 이유인가.

그때 충무로 방식이 합리적이진 않다는 판단을 했다. 그렇다고 충무로를 반대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 안으로부터 출발해 만들어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또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렸는데, 그 연장선에서 내가 하고 싶은 개인 창작, 즉 역설, 가치, 미학을 그림이 아닌 영화란 옷을 입혀 만들고 싶었다. 그림이나 영화, 모두 비주얼이 중요한 언어라는 공통점도 있고.

2002년 충무로에서 <하얀방>을 연출했다.

그쪽에서 의뢰가 왔다. 사실 고민을 많이 했다. 당시 협회의 운영위원이었고, 한독협 원년 멤버인데 상업영화를 하면서 협회에 누가 되지 않을까 선배들과 많은 고민을 나눴다. 근데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도 있었고 독립영화가 상업영화와 적대관계는 아니니까 개인적으로 좋은 경험일수도 있겠다 싶었다. 독립영화건, 상업영화건 영화가 최종적으로 가야할 지점은 관객, 대중이기 때문에 다르지는 않을 거라고 봤다.

직접 해보니 어땠나.

돌이켜보면 준비를 더 철저히 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충무로는 역할이 분화되어 있고 시스템화 되어 있다. 그게 장점이고 단점인데 단점을 장점으로 만들기엔 시야도 좁고 경험도 부족했다. 스탭 개개인은 오랫동안 작업을 해 온 사람들이라 능력 있는 분들이다. 근데 그분들의 노하우를 작품에 녹여 내는 방향으로 했어야 하는데 시원하게 못한 것 같다. 어떤 순간에는 더 과감하게 결정하고 고집도 부렸어야 했다.

다시 한 번 충무로에서 작업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나.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이 제작비이다. 제작비를 쓸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면 감독의 입장을 넘어 프로듀서적인 마인드도 같이 갖고 해야 할 것 같다. 더 나아가 관객, 대중을 한 축에 놓고 사고를 해야 한다. 과연 이 많은 제작비를 갖고 관객들을 상대할 때 그 정도 가치를 담고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나 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럴 가능성이 있고 내가 준비가 되어 있다면 할 것이다.

독립영화, 결코 주저앉지 않는다!

이후에도 꾸준히 독립영화를 만들어 왔다. 독립영화의 매력이 뭔가.

독립영화를 통해서 크든 작든 꾸준히 성과를 쌓아가는 게 가치 있는 작업 아닌가. 지금 충무로가 어렵다고 하지만 독립영화는 절대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있다. 그 속에서도 창작의지를 잃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하는 게 창작자의 본분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로 10년이 넘게 작업을 했는데 작업 환경의 변화가 있나.

물론 있다. 양적인 변화도 있고, 독립영화라는 개념도 생겼다. 그 전에는 작은영화, 상업영화, 단편영화라는 말만 있었다. 지금은 독립영화라는 개념과 지향성을 갖고 작업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그 과정에는 한독협의 설립이 독립영화 진영에서의 가장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때 충무로 방식이 합리적이진 않다는 판단을 했다. 그렇다고 충무로를 반대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 안으로부터 출발해 만들어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독협 10년 동안 가장 인상적인 사건이나 경험이 있다면.

한독협이 생긴 이후에는 그렇게 큰 사건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 전부터 있던 인디포럼이 한독협이 출범하는데 가장 큰 모티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인디포럼은 독립영화인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고 역할 분담해서 만드는 영화제였기 때문에 그 자체가 모임이었다. 인디포럼이 협회가 만들어지는 돌다리 역할을 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 이후에는 독립영화에 대한 개념과 신념이 생기면서 창작자들이 수적으로도 늘어나고, 사적으로도 교류를 하게 됐다.

작년에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창작자와 협회의 이사장을 병행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협회의 결정은 개인의 결정이라기보다 집단의 결정이기 때문에 내가 이사장이라는 직책이 있어도 협회의 한 구성원일 뿐이다. 이 때문에 외부에서 보면 좀 힘이 없어 보이는 이사장일 수 있다.(웃음) 실제적으로 긍정적인 자극을 주는 것 같다. 부담되지는 않는다.

기획 인터뷰를 하면서 한국 독립영화계가 ‘변화의 시기’에 도달했다고 한 사람들이 많았다. 한독협 10주년을 맞은 2008년 독립영화의 상황은 어떤가.
 
결국은 독립영화인들이 자생력을 키우는 시기였던 것 같다. 자생력은 다른 일을 하지 않더라도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 나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근데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아직 미진한 게 많다. 인디스토리가 10년 됐고, 독립영화 전용관도 1년 됐고, 미디액트도 4, 5년 됐다. 또 지금 독립영화 배급사가 더 생기는 판이다. 이렇게 과거에 비해 성과를 내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시작일 뿐이고, 이제 또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총체적인 의미에서 영화를 만들고 배급되고 상영되고 평가 받는 소통 과정의 순환이 커져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미약한 부분이 있다.

소통 과정 순환의 최소한의 기틀은 마련했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최소한의 지원이 필요한데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바뀌면서 기존의 방향과 달라졌다는 인식이 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영화를 너무 산업적인 측면에서 사고하는데서 오는 문제다. 독립영화 진영에서 봤을 때, 영화를 산업으로만 볼 때에 독립영화가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 있다. 영진위의 지원금이라는 게 결국은 세금이고 관객들이 낸 입장료에서 모아진 기금, 즉 대중이 만들어준 재원이라는 거다. 그런 재원을, 나쁘게 이야기 하면, 일회성, 소비적인 부분에만 ‘올인’하면 사실 그건 다양성, 공공성을 해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건 독립영화인의 이익뿐만 아니라 관객의 입장에서 봤을 때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다.

독립영화 진영에 지원하는 것이 문화다양성 증진에 도움이 된다는 건가.

독립영화인들이 상대적으로 다양성이나 공공성을 더 생각하기 때문에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자생력을 가져야 한다. 지원에만 의지하면 좋은 창작태도는 아니다. 근데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업의 논리로만 영화를 풀어가야 한다고 하면 궁극적으로 가장 손해 보는 것은 관객이다. 독립영화인을 위해서라기보다 장기적으로 미래 한국 관객을 위해 그렇게 정책이 집행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진위, 정신 차려라!
 
서울독립영화제 기간에 한독협에서 성명을 발표한 것은 의외였다.

우리도 좀 껄끄럽기도 했다. 근데 워낙에 중요한 사안이기도 하고, 좀 더 강조하기 위해서 그랬다. 인식을 공유하고 문제점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영화제를 통해서 알려야 했다기 보다, 그 시점에 알려야 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성명서의 주안점은 무엇인가.

제일 중요한 것은 작년, 올해 논의됐던 복합상영관 건립 문제다. 예산까지 확보 됐었던 사업인데 그걸 성실하게 이행하지 못한 게 가장 큰 문제다. ‘아시아무빙이미지센터’(이하 이미지센터)로 확대된 건데, 청사진이 있더라도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응 전략이 없었다. 실질적으로 그걸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전략전술이 필요한데 그게 미진했고 결과적으로 추진할 역량이 안됐다고 생각한다. 강한섭 위원장의 리더십과 추진에 대한 신념이 부재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나 생각해서 그 쪽에 포커스를 맞춰 성명서를 냈다.

이미지센터는 복합상영관과 방향이 전혀 다르지 않나.

이미지센터는 국내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보다는 아시아를 포괄하는, 어떻게 보면 전시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없어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그걸 실현시킬 장기적인 비전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게 아닌가 생각한다. 거기에 복합상영관 문제가 묻혀서 이중적인 고통을 받아 찌그러진 것 같다.

그럼 복합상영관 건립은 폐기된 건가. 이미지센터는 문화다양성을 위한 공간은 아닌 것 같다.

공간보다는 활동이 더 중요한 거다. 어쨌든 복합상영관이 그런 기능을 할 수 있는 매개체인데, 그게 지금 불투명한 상태가 되니 답답한 거다. 또 3기 영진위에서 추진했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 같다. 그러니까 굉장히 화가 난다.

강한섭 위원장이 4기 영진위를 맡으면서 영화인들과 대화를 안 한 것 같다. 성명서의 내용도 그렇고.

외부적으로는 언제든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런 것 없이 많은 일이 진행됐다. 그래서 배신감 같은 걸 느낄 수밖에 없기도 했다.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식에서 강한섭 위원장이 “영진위의 사업은 독립영화가 거의 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땠나.

그게 아니라는 건 영진위 예산이나 정책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좀 다른 얘기지만 독립영화 진영도 영진위만 바라보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든다. 넓게 보면 스스로 굴러갈 수 있는 독립영화의 체계, 시스템을 만드는 게 더 큰 문제다. 영진위는 그 중 하나의 촉매제로 바라봐야 하는 거지 거기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물론 같이 힘을 모을 부분이 있지만 그건 부분이지 전체가 될 수는 없다.

한독협, 브레인을 찾습니다!

전체의 틀을 갖추기 위해서는 정책 연구가 시급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10주년 기념 사업만 해도 과거를 돌아보는 부분은 좋았지만, 앞으로의 10년을 위한 정책에 관한 부분은 미진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새로운 10년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

정책 개발에 대한 필요성은 느끼고 있다.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고 어떻게 목표를 도달할 것인가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것들을 연구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게 정책이라면 당연히 한독협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회의에서 그런 논의가 나오고 모임도 만들어지고 있다. 근데 우리가 대부분 창작자들의 마인드를 갖고 있어 그걸 전담 해서 하기가 어렵다. 자발적으로 뜻이 모아져야 되는데 조직적으로 너무 강제 한다고 해서 결과물이 금방 나오지는 않지 않나. 필요성은 있지만 요구만큼 시원하게 나올 정도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 같다.

어떤 식으로 풀어갈 예정인가.

글쎄, 그건 내가 한다고 되는 건 아닌 것 같다.(웃음) 한독협이라는 조직의 틀을 떠나 전문성을 갖추고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인력과 결합하는 게 필요하다. 비전과 능력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열려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함께할 수 있을 거라 본다.

"독립영화 했다고 계속 독립영화 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 없는 문제다. 중요한 것은 독립, 비독립을
떠나서 창작 자체가 고통스럽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방금 외부 인력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기획 인터뷰에서 한독협 내부 인력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었다. 영화를 만드는 스탭은 물론 활동가들 또한 일은 많고, 생활이 보장 안 된다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노동에 대한 대가가 합리적으로 나오면 일하기가 더 수월할 거다. 근데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이번에 좀 도와주면 다음 작품 할 때에 도와줄게”라는 식으로 노동력을 담보로 노동력을 빌려 온다. 100% 신용사회다.(웃음) 어쨌든 물질적인 부분을 많이 강화할 필요는 있다. 그걸 감수하면서 일하려는 사람이 적은 건 당연한 거고, 한 개인이 여러 가지 역할을 해야 하는 게 독립영화의 현실을 반영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협회가 전체적으로 조금씩 나아진다면 개인도 같이 나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한독협 초기에 비해 내부 구성원들 사이의 결속력이 좀 약화되었다는 지적이 있었다.

협회 초기에 인원이 적었을 때는 만드는 것 자체가 중요했지만, 협회가 커지면서 개인이 생각하는 협회의 가치, 목표가 넓어지기 때문에 협회 내부에서도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더 많이 발생하는 것 같다. 그런 부분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대화를 통해서 조절을 할 수 있는 정도는 됐다고 본다. 그걸 더 수용할 수 있는 폭넓은 조직이 되는 게 중요하다. 논의할 수 없다고 하는 건 우리 역할을 방기하는 거다. 이견까지도 대화하고 토론해서 합의를 도출해 낼 수 있는 구조와 열린 마인드를 가지도록 노력하고 있다.

창작의 고통을 마주하라! 그게 창작자다.

독립영화, 독립영화인이란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하는 젊은 독립영화인들이 많은 것 같다. 선배 독립영화인으로서 조언을 해 준다면.

예술은 추상적인 통로고, 창작자는 생각이나 의지를 그 통로를 통해 삶을 실현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일반적인 현실 속의 사람들과는 삶의 과정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자기가 체념하는 것도 생기고, 동시에 어떤 부분은 더 노력해야 한다는 자각을 하게 되는 데 그런 자각을 계속 하는 게 중요하다. 먼 관점에서 볼 때 독립이다 아니다 하는 경계 자체가 무너지길 바란다. 독립, 비독립은 자본의 성격 갖고 결정되는데 그런 경계를 넘어서 사고할 수 있으면 좋겠다.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는 건가.

독립영화 했다고 계속 독립영화 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 없는 문제다. 중요한 것은 독립, 비독립을 떠나서 창작 자체가 고통스럽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그 고통은 피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이외에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가까이 두고 살면 위안이 된다. 개인적으로는 고전음악을 접하면서 위안을 받기도 하고, 영감을 얻기도 한다. 영화는 종합예술이니까 음악, 문학 등 훌륭한 예술가들을 마음속에 두면 큰 힘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만날 독립영화 관객들과 한독협 회원들에게 한마디 해 달라.

독립영화에 조금이라도 관심과 애정을 갖고 보는 관객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근데 창작자와 관객의 거리가 쉽게 좁혀지지 않는 부분에서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럴수록 만드는 입장에서는 고민이 더 많아 진다. 예술성과 대중성의 괴리가 더 커질수록 창작자의 고민도 더 깊어지는 거다. 그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는 게 자본주의 사회 창작자들의 위치가 아닌가 싶다. 관객들이 독립영화를 통해서 삶에 힘과 자극을 받았다면 거기에 대해서 표현을 해주면 좋겠다. 창작자들에게는 큰 힘이다.

한독협의 새로운 10년을 위한 제언을 해 달라.

이제 첫 길을 건넜다. 뒤돌아보면 많은 일을 했고, 주변을 보면 한독협에 기대하는 사람들도 많이 늘었다. 전망을 계속 유지한다면 지금보다는 나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지금 그런 걱정을 한 단계는 아니지만, 스스로 조절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커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어쨌든 경계해야 할 것은 경계하고, 힘을 많이 쏟아야 할 데는 힘을 쏟아야 한다. 비약적인 발전이라는 것은 사실 바람일 뿐이지 비약하는 것은 없다. 이후 10년이 지나서 뒤돌아보더라도 조금씩 변해왔구나 하고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좀 더 프로페셔널하게.(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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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9 15:35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 - ①]'한국독립영화의 아버지' 김동원 감독

10월 23일 푸른영상 사무실에서 김동원 감독을 만났다.
▲ 10월 23일 푸른영상 사무실에서 김동원 감독을 만났다.

한국독립영화협회(한독협)가 10주년을 맞았다. 한때 생소하기만 했던 ‘독립영화’라는 존재의 정체성 확립과 자리매김의 역사는 한독협의 10년 역사와 나란히 놓여져 있다. 영화인들이 자본과 검열로부터 ‘독립’해 진정한 의미의 ‘표현의 자유’를 누리기까지 한독협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줬다. 컬처뉴스는 한독협 탄생 10년을 맞아 독립영화계의 10년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시대 한독협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해 보고자 감독, 배우, 활동가, 제작자 등 독립영화인들 10명의 인터뷰를 기획했다. 이번 기획은 한독협 사무국과 팀블로그 필름온이 함께해 이루어졌다.

첫번째 인터뷰 대상자는 '한국독립영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송환>의 김동원 감독이다. 여러모로 한국 독립영화계의 상징적인 인물인 김동원 감독은 한독협의 초기 모습과 현재의 지점을 역사적인 맥락에 위치시켜 새롭게 보게해 준다. 그가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에 입문하고 활동하게 된 계기들 역시 놓치기 아까운 역사의 기록이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 바란다. / 편집자.

독립영화, 무에서 유를 만들다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소감 한 마디 해 달라.

김동원 감독: ‘벌써 10년인가’하는 생각이 든다. 내 나이 또래는 세월이 빨리 가니까.(웃음) 한편으론 독립영화 활동한지 오래됐는데 10년밖에 안됐나 싶기도 하고. 내가 초대 이사장을 하면서 한독협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현재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조영각 사무국장하고 어린 사무원은 그 때 월급 20만원씩 받고 시작했다.

독립영화계에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예상했던 것인가. 

이런 날이 올지 몰랐다. 지금은 미디어 센터, 독립영화전용관, 독립영화 제작지원제도 등이 생겼다. 이런 건 외국사례로 말로만 듣던 것들인데, 일반 영화계에서 질투할 만하다.(웃음) 막 없던 게 생기고 점점 늘어나니까, 있던 게 없어진 사람들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독립영화계만 편애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근데 지원금 총액으로 보면 굉장히 작다. 

그만큼 독립영화계가 가시적인 변화를 일으켰다는 반증이 아닌가 한다.  

무엇보다 10년 전만해도 독립영화라는 말을 할 때 약간 켕기는 게 있었다. 그때 독립영화하면 반정부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당시 영화진흥공사(현 영진위)에 독립영화라는 말이나, 독립영화 지원은 없었다. 또 영진위 1기 위원회 생기고도 몇 년간은 없었고, 그 이후에 생겼다. 독립영화라는 단어를 공식화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 강한섭 위원장이 다시 뺀다고 한다. ‘작은 영화’ 이런 식으로 바꾼다고.

작은 영화라... 김동원 감독이 다큐멘터리를 시작한 게 20년이 지났는데, 독립영화란 말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난 원래 상업영화 지망생이었고, 독립영화란 말도 없었다. 1980년대 얄라성이나 장산곶매 등에서 영화를 만들고, 미국식 개념의 이름을 붙여준 거다. 사실 미국식 개념과는 많이 다른데,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사실 나는 독립영화를 하려고 한 건 아니다. 상업영화 조감독을 했는데 이게 나랑 안 맞더라. 당시 전두환 정권 때 이런저런 일이 많았는데 방송에서는 누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때 내가 결혼식 비디오를 찍은 아르바이트를 했을 땐데, 사회의 모습을 찍어서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날라리, 가장 감동적인 올림픽을 만나다

원래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나. 김동원 감독의 젊은 시절이 궁금하다.

날라리였다. 데모도 안했고.(웃음) 1970년대에 학교를 다녔는데 당시엔 운동권이란 개념도 없었다. 언더그라운드에는 좀 있었는데 그때는 몰랐다. 난 연극 많이 하고, 놀기 좋아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 때 무의식적으로 뭔가 답답함을 느꼈다. 고등학교 때는 ‘왜 우리학교는 데모 안하지? 데모하면 휴교하는데’하면서 데모가 나길 원하기도 했다. 출처가 불분명한 유인물 만들어서 뿌리기도 했다. 휴교 때문에. 그런 걸 보면 약간 반골 기질이 있었나 보다. 그런 게 정리가 안 되다가 상계동 가서 정리가 됐다. 사회과학 책도 한두 권 읽어봤지만 전혀 안 와 닿았는데, 상계동 가서 구조적 모순이라는 걸 느끼게 됐다.

상계동에 어떻게 들어간 건가.

상계동 철거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내가 아는 신부님이 거기 들어가 계셨는데 강제철거 당하는 장면을 증거자료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하셨다. 하루만 와서 촬영해달라고 부탁을 하셨다. 그게 내 팔자를 바꿀 줄을 몰랐다.

처음 <상계동 올림픽>을 촬영할 때 ‘다큐멘터리는 이런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었나.

처음에는 관심도 없었고, 또 당시 우리나라에는 필름으로 만든 다큐멘터리도 거의 없었다. 대학 영화과에서도 단편영화제를 했지만 다큐멘터리는 없었다. 서울영화집단에서 8미리 필름으로 십 분짜리 다큐멘터리를 1985, 6년인가에 만든 게 전부였다. 그저 머릿속에는 TV에서 본, ‘추적 60분’유의 다큐멘터리만 있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그런 관성들을 떨쳐버리기 힘들었다. 그런데 외국 나가서 여러 다큐멘터리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보니까 ‘아 다큐멘터리가 할 만한 거구나’ 싶었다. 상계동 시절에는 전혀 몰랐는데, 가서 보니까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작품들이 있었다. 그 때 ‘다큐멘터리의 영역이 이렇게 넓구나’ 했다.

그 이후에 다큐멘터리의 매력을 느낀 건가? 어떤 매력을 느껴서 다큐멘터리를 계속하게 된 건가.

조연출을 한 4년 정도 했는데, 현장이 지겨웠다. 촬영할 때도 긴장감을 못 느꼈다. 그런데 상계동에서 철거 현장을 찍을 때, 특히 위험한 상황에서 철거 깡패들이 위협해도 전혀 무섭지가 않은 거다. 카메라가 알아서 막 돌아다니는 신들린 경험을 했는데, 그게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다. 촬영하는 게 이런 거구나. 또 철거, 투쟁 현장 모습들이 외부에 알려지기 힘든 상황에 <상계동 올림픽>을 발표했는데, 엉성하게 만들었지만 대학가에서 상영되고 그러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 때 다큐멘터리의 굉장한 힘을 느꼈다.

그래도 뭔가 손에 잡히지 않을 시절,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았을 거 같다.

<상계동 올림픽> 하면서 사회가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촬영할게 많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외국영화 직배 관련해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는데 정지영 감독이 나에게 ‘다큐멘터리를 해라. 극영화 하는 사람은 많지 않냐. 넌 잘할 것 같고, 너라도 해야 한다’라고 하더라.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닌 것 같고, 싫지도 않고, 또 극영화가 잘 안 풀리고 해서 다큐멘터리의 길을 걷게 됐다. 그렇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 길을 걷게 됐다.

총 제작기간만 12년이 걸린 <송환>은 비전향 장기수를 다룬 다큐멘터리로, 2004년 선댄스영화제 '표현의 자유상'을 시상하기도 했다.

투사? 난 그런 사람 아니다

1990년대에 <송환> 촬영하랴, <명성 그 6일의 기억> 발표하랴 정신없었을 거 같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부터 장기수들이 출소하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경험한 사람이니까 저분들의 증언은 기록할 필요가 있다 생각해 촬영을 시작했다. 사실 그걸 어떻게 쓸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에 장기수들의 삶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어머니들이 함께 벌인 석방운동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몇 편 나왔다. 그 때까지만 해도 <송환>에 대한 생각도 없었고, 그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다. 사실 내가 오며가며 찍은 거지 찍어야겠다 해서 찍은 게 별로 없었다.(웃음)

 그럼 <송환>은 어떻게 나오게 된 건가.

1999년 초부터 송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그들의 송환을 돕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사회적으로 이슈화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남북정상회담하면서 송환이 급물살을 타면서 엄청 급해졌다. 그 다음 6월부터 9월까지는 정신없이 찍었다. 그 전에는 판판히 놀다가.(웃음)
 
1990년대 들어오면서 한국 다큐멘터리의 파이가 커졌다. 주로 어떤 사람들이 촬영했고 어떤 관심을 가졌나.

지금도 우리나라 다큐멘터리는 액티비즘, 즉 투쟁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1980년대에는 당연히 그래야한다고 생각했고. 서울영상집단, 노동자뉴스제작단(이하 노뉴단) 등의 집단은 일종의 운동으로 한 거다. 노뉴단은 노동운동, 서울영상집단이나 민족문제연구소, 민족영화연구소 등은 그 외 사회문제를 다뤘다. 한국의 다큐멘터리는 태생단계의 특수성 때문에 액티비즘이 강하다.

김동원 감독은 어느 편에 속했나.

난 아무데도 속해있지 않았다. 굳이 얘기하면 빈민운동 쪽인데, 빈민지역 청년들과 활동을 하면서도 작업은 혼자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내가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정체성은 없었다. 영화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는 현장의 기록이고, 일상이었다. 빈민운동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했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느 순간에 찾았나.

나는 아직도 감독이라는 말을 안 좋아한다. 난 다큐멘터리에서 감독이 너무 앞서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무리 감독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해도 감독이라고 부르고, 또 ‘그럼 뭐라고 부르냐’고 하니까 이젠 그냥 ‘맘대로 부르라’고 한다.(웃음) 감독이라는 말이 옛날보다는 많이 거슬리지는 않는다. 옛날에는 엄정한 사실성, 객관성 이런 것들이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래야 하는 줄로 알았는데 요즘에는 다큐멘터리도 연출을 해도 괜찮다는 게 일반적이니까. 내가 아무리 연출을 안 하려고 해도 할 수밖에 없다.

작업을 하면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경우도 많이 있었겠다.

글쎄, 잡혀갔던 거?(웃음) 푸른영상 하면서 몇 번 잡혀갔다. 1993부터 2년 터울로. 그 때만해도 영화법이 손질되기 전이고, 장기수들을 찍는다는 게 시찰 대상이었다. 안기부 직원한테 매일 안부전화를 받았으니. 그쪽에서 조작간첩 사건들과 엮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잘 안됐다. 1996년에는 심의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음란비디오 단속법을 걸고 넘어졌다. 참, 음란비디오라니. 그 외에도 청소년 보호법, 국가 보안법 등 다양하게 조사받았다. 다행이 변호사를 잘 만나서 기각시켰다. 

투쟁의 역사다.(웃음)

투쟁은 무슨.(웃음) 난 투쟁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냥 내가 그걸로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잘못한 것도 없으니 당당한 거다. 심의를 받으려면 10분에 얼마 돈을 내야 하는데 내가 골이 비었나.(웃음) 여하튼 몇 번 들어갔다 나오면서 이미지가 그렇게 됐는데, 내가 용감해서 싸운 건 아니다. 그냥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 때문에 그런 거 같다.

김동원 감독은 2004년 선댄스영화제 표현의 자유상(<송환>) 등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한국 다큐멘터리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이면의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면서 주변의 따가운 시선도 받을 거 같다.

글쎄. ‘왜 이렇게 구질구질한 얘기만 하냐’는 사람은 있지만 따갑지는 않다. 당연히 알려야 할 이야기고. 지금은 방송에서 그런 얘기를 많이 하지만, 그때만 해도 전혀 안했는데 당연히 나라도 해야지 그랬다.


한독협. 힘든 시작, 지금은 괜찮아 무엇이든!

한독협이 세워지기 전, 독립영화인들은 어디를 구심점으로 모였나.

1991년에 독립영화협의회라는 단체가 세워졌다. 내가 의장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거기는 구속이 너무 많았다. 그 때만 해도 운동한다는 기분으로 작업을 했고, 모여 봤자 운동하는 독립영화인들만 모이는 거 같고. 1990년대 중반 넘어가고, 독립영화계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다양한 독립영화인들과 함께 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립영화가 뭐냐’ 하는 정체성 논란도 있었고, 일련의 산통 끝에 한독협이 생겼다.

한독협이 생기고 어려움은 없었나.

내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웃음) 앞서 얘기한대로 한독협의 정체성 찾기가 가장 힘들었다. 한독협 초기에 독립영화협의회나 민예총 영화분과 등과 관계 설정하는 게 어려웠다. 1996년부터 한독협 설립 논의를 시작했으니까.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이 협회를 만든다는 거에 의구심 어린 시선도 있었고. 하여튼 초기에 발동 거는 게 좀 어려웠는데 발동 걸고 나서는 최근까지는 잘 굴러왔다고 생각한다.

영진위 3기 위원이었다. 어떻게 하게 됐나.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가면 회의만 많고, 그렇다고 독립영화에 관한 회의만 하는 것도 아니고. 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는데 가서 목소리를 내야 하니까, 가야 된다고 하니까 갔다. 별 재미는 없었다.(웃음)

어떤 목소리를 내고 싶었나.

목표가 너무 분명했다. 독립영화전용관 만드는 거. 10년 동안 만들자는 말만 있었지, 만들지 못했다. 더 이상 늦출 수 없었다. 난 다른 건 못해도 전용관 하나 만큼은 만들겠다는 각오로 들어갔다. 다른 영진위 위원들이 너무 적나라하게 의도를 내비치는 거 아니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런 독립영화인들의 노력 끝에 인디스페이스가 생겼다. 근데 인디스페이스가 위치한 중앙시네마 재건축 때문에 몇 년 안에 장소를 옮겨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럼 다른 곳을 찾아봐야겠지. 3기 영진위 때 미디어센터, 시네마테크, 독립영화전용관을 다 포괄하는 500억 규모의 복합상영관을 짓기로 서울시와 결정했다. 그런데 강한섭 위원장이 무슨 아시아센터를 건립한다고 한다. 지금 어떻게 진행 중인지 모르겠다.

규모를 500억에서 1,000억으로 늘린다고 들었다. 그런데 규모가 커지고, 새로운 사업계획을 만들면 그 만큼 그 과정이 늦춰지는 거 아닌가. 현재 미디어센터 미디액트나 서울아트시네마, 독립영화전용관 모두 공간 확보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아무래도 그런 측면이 있다. 음, 어떻게 보면 위기를 겪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어려움을 겪어보면 전화위복의 기회를 맞을 수 있다. 이건 좋은 극장이 생긴다는 측면이 아니라 독립영화인들에게 뭔가 좋은 공부가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하는 말이다.


다른 얼굴, 하지만 우린 가족이다

한독협 홈페이지를 보면 초기에는 게시판에 서로 안부도 묻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영화도 보고, 얘기도 하고, 술도 먹으면서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한독협 10주년을 맞이한 2008년. 지금 가장 큰 고민이 무엇인가.

글쎄. 내가 고민한다고 되나?(웃음) 이제 독립영화가 나름대로 사회적인 위상을 이제 갖게 됐다. 그런데 대안영화로서의 자기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영화가 잘 안 나오고 있다. ‘지금쯤 나올 때가 됐는데’하는 기대가 있는데 잘 그게 쉽지 않다. 예를 들어서 <은하해방전선>등 몇몇 작품은 기대를 많이 했고, 영화도 좋았음에도 불구라고 잘 안됐다. 영화는 관객과 함께 완성된다. 과연 이걸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보게 할 수 있을까. 영화가 안 좋은 게 아닌데, 왜 안볼까. 이런 고민들을 한다. 답 없는 고민.

최근에 등장하는 후배들의 작품들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나.

다큐멘터리만 보자면,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본 <워낭소리>란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좋았다. 나와 스타일은 다르지만 반가운 작품이다. <우린 액션배우다> <우리학교> 등 1년에 한 편씩은 문제작들이 나온다. 한편으론 기쁘고, 한편으로는 ‘아 이런 게 일 년에 열편은 나와야 하는데’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인 코드가 약해지고 있지만 그게 그렇게 아쉽지는 않다. 오히려 열심히 만들고, 진정성이 보이는 다큐멘터리가 1년에 3-4편만 나오면 좋겠다. 인디다큐페스티벌에 70여 편의 작품이 응모됐다고 한다. 아르헨티나만 해도 다큐멘터리 영화제 하면 700여 편이 응모된다고 하는데, 우린 고작 70여 편이다.

요즘 진행하고 있는 작업이 있나.

촛불 문화제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하고 있다. 올해는 촛불이 가장 활활 타지 않았나. 찍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간 건 아닌데, 나가다 보니 찍을 게 보이더라. 뭐 큰 건 아니지만 해야 할 거 같은 마음이 들어서 촛불 문화제에 대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독협의 또 다른 10년을 위한 제언을 해 달라.

제언이라. 아쉬운 건 한독협 홈페이지를 보면 초기에는 게시판에 서로 안부도 묻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물론 욕도 하고.(웃음) 뭔가 공동체적인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커져서 그런지 그렇지 못하다. 사실 이건 사업을 하는 게 아니다. 사업도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하는데.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끼리 식구라는 생각을 하면 좋겠다. 도움도 주고받고, 영화도 봐주고. 이런 커뮤니티가 활성화 되어야 하는데 그런 계기를 못 만들어 주는 거 같다. 여러 영화제가 그런 역할을 했는데 요즘엔 형식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영화도 보고, 얘기도 하고, 술도 먹으면서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 2008-10-28 오전 11:35:02  컬처뉴스 김나라 기자, 필름온 안효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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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beforesunset.tistory.com BlogIcon 은-유 2008.10.30 08:1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감독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요... 좋은 기사 잘 봤어요.. ^^ 독립영화 10년 축하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