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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3 15:13

박쥐에 대해 상상하기

[박서방의 주절주절] 윤리적 박감독의 신작을 기대하며

개봉을 앞둔 박찬욱 감독의 신작 <박쥐>.

▲ 개봉을 앞둔 박찬욱 감독의 신작 <박쥐>.




                                                박서방 _ 인터넷만담가

살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옳고 그름이 얽힌 윤리적 선택을 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다. 뭐 대단한 선택의 순간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몇 해 전 겨울, 오전 10시15분 경 박서방은 늦은 출근 중이었다.(전날 과음했을 가능성이 90퍼센트 이상이다.) 바쁜 마음에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지하철 역 통로를 지나가는데 역한 냄새가 풍겼다. 돌아보니 통로 한 켠에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가 누워있었다. 노숙자로 볼 수도 있고 단순히 전날 술을 지나치게 마신 사람으로도 볼 수도 있는 어중간한 행색이었다. 그 사람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채 지나가는 이들에게 뭔가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기온은 영하였고 그 사람의 옷차림은 날씨에 비해 지나치게 얇았다.

인간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뭔가 도움을 줘야한다는 게 박서방의 윤리였다. 그러나 당장 떠오른 본능적인 감각은 '단지 저 앞에 냄새 풍기고 있는 저 물체를 치워버리고 싶다'는 혐오감과 사무실에 늦었다는 강박뿐이었다. 그렇게 그 이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않은 채 사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자기혐오에 가까운 감정에 시달렸다. 윤리적으로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어려운 사람을 방치했다는 것은 소극적 비윤리겠지만 박찬욱 감독은 <올드보이>를 통해 이렇게 전한 바 있다. “모래알이건, 바위덩어리건, 물에 가라앉기는 매한가지다.” 죄에는 본질적으로 경중이 없다는 섬뜩한 전언이다.

꼭 이 대사 때문이 아니더라도 박찬욱 감독은 박서방을 꾸준히 자극해온 예술가 중 한명이다. 박서방은 예술은 편안한 관조가 아닌 살 떨리고 불편한 전율의 체험이라는, 소위 아도르노 식 예술론을 비교적 신봉하는 편인데 그런 점에서 박찬욱 감독은 예술가라는 억지춘향격의 논리전개를 해보기도 한다. 그의 영화는 대단히 불편하면서도 흥미진진하다는 점에서 뛰어난 대중예술가임에 틀림없다.

예술이 뭐냐고 묻는다면 백 명이면 백 명이 다르게 답할지도 모르겠다. 박서방이 생각하는 예술은 삶의 문제를 미학적으로 구상화하는 노동이라고 본다. 박찬욱 감독은 특히 윤리적 문제에 대한 천착이 강하다.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다소 이런 테마를 벗어나긴 했지만 <복수는 나의 것>에서 <친절한 금자씨>에 이르는, 소위 ‘복수’ 3부작은 인간의 운명에서 주어진 숙명적 원죄와 거기서 비롯되는 죄의식, 죄의식으로부터 재생산하는 죄의 증식 과정을 강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가령 <친절한 금자씨>를 보라. 이금자는 모든 죄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백선생에게 복수함으로써 자신의 속죄를 완성하고자 하지만 죄를 씻기 위해 저지르는 그녀의 살육은 그녀의 영혼을 끝내 구원하지 못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원죄와 죄의식에 대한 천착이라는 점에서 박찬욱은 스콜세즈와 비견할만 하지만 훨씬 유희적이거나 장식적 디테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예전에 시인 황지우가 자신의 산문에서 역시 시인 장석주를 묘사했던 것을 인용해서 박찬욱은 대단한 댄디다.

박찬욱의 이런 댄디한, 장식적 취향들은 자칫 그의 영화를 감상하면서 느낄 수도 있을 감상자의 불편함을 완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장식적 요소가 극히 제한되어 있고, 그래서 어쩌면 그의 영화적 속살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났을지도 모를 <복수는 나의 것>이 일부 관객들에게 극단적 혐오의 감정을 던져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박서방은 이 영화가 영화도 아닌 쓰레기라고 극언을 퍼붓는 친구와 새벽까지 소주를 마시며 격론을 벌인 적이 있다.

얘기가 옆으로 샜는데 최근 개봉을 앞둔 박 감독의 신작 <박쥐>를 상상하는 일이 매우 즐겁다. 제한적으로 알려진 정보를 통해 보자면 신의 사명을 다하려는 도중에 괴물(뱀파이어)이 돼버린 어떤 성직자가 자신의 친구의 아내와 금지된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라고 한다. 영혼의 순결을 향한 갈구와 운명처럼 다가온 죄악, 피해갈수 없는 죄의식, 살인과 금지된 사랑. 이 모두가 그야말로 전형적인 박찬욱적 테마가 아닌가. 게다가 뱀파이어를 다룬 이야기라니! 다소 과장을 섞어서 뱀파이어는 현대 대중문화가 창조해낸 가장 매력적인 괴물이 아닐까 싶다. 피를 매개로 남의 생명력을 훔쳐내는 이 괴물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동유럽 등지에서 전해내려 온 것이지만 이 괴물이 대중적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것은 소위 고딕호러 문학과 영화산업의 힘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뱀파이어의 이미지는 대부분 미국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창조해낸 벨라 루고시의 드라큐라와 영국 해머 스튜디오가 창조했던 크리스토퍼 리(<반지의 제왕>의 사루만!)의 이미지에서 기인한 것이다. 특히 박서방은 크리스토퍼 리의 드라큐라를 무서워한다. 브램 스토커의 원작 이미지와 외형상으로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근엄한 권력자의 모습과 피에 굶주린 광인의 양면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뱀파이어의 본질적 속성을 가장 잘 형상화한 캐릭터라 할 만 하다. 그런 점에서 코폴라의 <드라큐라>는 실망스런 영화였다. 사랑 때문에 신을 버리고 괴물이 되었다니! 강력한 흑마력으로 범선을 조종하며 짙은 안개가 내린 템즈강을 타고 런던을 ‘정복’하러 오는 스토커의 드라큐라 묘사를 본 사람에게는 이런 순정만화에나 나올 법한 드라큐라는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드라큐라는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현대 이전으로부터 온 침략자란 말이다.

물론 뱀파이어의 이미지는 드라큐라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점점 다양해져왔다. 카밀라나 뱀피라 같은 여성 뱀파이어들은 피의 향연 내면에 감춰진 짙은 섹슈얼리티를 전면으로 이끌어냈으며 특히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필두로 한 앤라이스의 ‘뱀파이어씨리즈’에서는 본질적으로 19세기의 흔적이 짙게 배어있던 뱀파이어 캐릭터를 20세기적으로 전환시켰다. 이성에 의한 야만의 극복이라는 테마가 사라지고 비이성적 존재의 영원성 안에 담긴 중음신의 허무감을 감각적으로 묘사해낸 것이다. 그래서 앤라이스의 소설은 뱀파이어물임에도 불구하고 호러보다는 탐미적 픽션에 가깝다.

그렇다면 과연 <박쥐>의 뱀파이어는 어떨까? 본래 성직자였으며 인간을 구원하려다 뱀파이어가 됐다는 정보로 봐서 신에 대한 소명과 육체적 변화에 따른 본능의 갈구의 대립은 반드시 등장할 것이다. 친구의 아내와 사랑에 빠진다는 줄거리나 박서방이 지난 5년간 등장했던 여배우 중 가장 섹시하다고 생각하는 김옥빈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섹슈얼리티의 요소 역시 반드시 등장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너무 뻔한 예상들이다. 그러나 박찬욱이 선수 중의 선수라고 믿는 입장에서 이 정도로는 너무 약하다. 그는 예상되는 질문과 답변 근처에 눈에 잘 안 띄는 더 무서운 질문을 던지는 특기를 보여왔다. <올드보이>의 이우진을 보라. 말 한마디로 자기 누나를 결국 죽게 만든 오대수를 감금하여 복수하려는 듯 보였지만 알고 보면 자기와 같은 동류로 만들어서 결국 심연에 깔린 자신의 죄의식을 극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박찬욱은 십수년 전 자신의 영화칼럼집에서 샘 패킨파의 피비린내 나는 영화 <가르시아>가 죄로서 죄를 씻으려는 속죄의 영화이며 ‘보기 드물게 순수한 형태의 예술영화’라고 찬탄한 적이 있다.(어쩌면 <친절한금자씨>는 <가르시아>에 대한 박찬욱식 변주다.) 박찬욱이 뱀파이어라는 매혹적인 소재를 가지고 예술을 했는지 오락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피를 매개로 한 지독한 윤리적 게임을 벌였기를 기대해 본다. 모래알만한 죄악이 바위덩어리 같은 징벌이 되서 되돌아오는 지독한 악순환. 그 안에서 자유로운 자는 싸이코패스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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