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방'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04.13 박쥐에 대해 상상하기
  2. 2008.11.30 무한반복의 지옥에서, 비극적으로
  3. 2008.10.02 욕하기 위해 드라마를 본다 - [박서방의 주절주절]어느 욕 나오는 드라마와 주말을 보내고
2009.04.13 15:13

박쥐에 대해 상상하기

[박서방의 주절주절] 윤리적 박감독의 신작을 기대하며

개봉을 앞둔 박찬욱 감독의 신작 <박쥐>.

▲ 개봉을 앞둔 박찬욱 감독의 신작 <박쥐>.




                                                박서방 _ 인터넷만담가

살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옳고 그름이 얽힌 윤리적 선택을 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다. 뭐 대단한 선택의 순간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몇 해 전 겨울, 오전 10시15분 경 박서방은 늦은 출근 중이었다.(전날 과음했을 가능성이 90퍼센트 이상이다.) 바쁜 마음에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지하철 역 통로를 지나가는데 역한 냄새가 풍겼다. 돌아보니 통로 한 켠에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가 누워있었다. 노숙자로 볼 수도 있고 단순히 전날 술을 지나치게 마신 사람으로도 볼 수도 있는 어중간한 행색이었다. 그 사람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채 지나가는 이들에게 뭔가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기온은 영하였고 그 사람의 옷차림은 날씨에 비해 지나치게 얇았다.

인간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뭔가 도움을 줘야한다는 게 박서방의 윤리였다. 그러나 당장 떠오른 본능적인 감각은 '단지 저 앞에 냄새 풍기고 있는 저 물체를 치워버리고 싶다'는 혐오감과 사무실에 늦었다는 강박뿐이었다. 그렇게 그 이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않은 채 사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자기혐오에 가까운 감정에 시달렸다. 윤리적으로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어려운 사람을 방치했다는 것은 소극적 비윤리겠지만 박찬욱 감독은 <올드보이>를 통해 이렇게 전한 바 있다. “모래알이건, 바위덩어리건, 물에 가라앉기는 매한가지다.” 죄에는 본질적으로 경중이 없다는 섬뜩한 전언이다.

꼭 이 대사 때문이 아니더라도 박찬욱 감독은 박서방을 꾸준히 자극해온 예술가 중 한명이다. 박서방은 예술은 편안한 관조가 아닌 살 떨리고 불편한 전율의 체험이라는, 소위 아도르노 식 예술론을 비교적 신봉하는 편인데 그런 점에서 박찬욱 감독은 예술가라는 억지춘향격의 논리전개를 해보기도 한다. 그의 영화는 대단히 불편하면서도 흥미진진하다는 점에서 뛰어난 대중예술가임에 틀림없다.

예술이 뭐냐고 묻는다면 백 명이면 백 명이 다르게 답할지도 모르겠다. 박서방이 생각하는 예술은 삶의 문제를 미학적으로 구상화하는 노동이라고 본다. 박찬욱 감독은 특히 윤리적 문제에 대한 천착이 강하다.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다소 이런 테마를 벗어나긴 했지만 <복수는 나의 것>에서 <친절한 금자씨>에 이르는, 소위 ‘복수’ 3부작은 인간의 운명에서 주어진 숙명적 원죄와 거기서 비롯되는 죄의식, 죄의식으로부터 재생산하는 죄의 증식 과정을 강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가령 <친절한 금자씨>를 보라. 이금자는 모든 죄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백선생에게 복수함으로써 자신의 속죄를 완성하고자 하지만 죄를 씻기 위해 저지르는 그녀의 살육은 그녀의 영혼을 끝내 구원하지 못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원죄와 죄의식에 대한 천착이라는 점에서 박찬욱은 스콜세즈와 비견할만 하지만 훨씬 유희적이거나 장식적 디테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예전에 시인 황지우가 자신의 산문에서 역시 시인 장석주를 묘사했던 것을 인용해서 박찬욱은 대단한 댄디다.

박찬욱의 이런 댄디한, 장식적 취향들은 자칫 그의 영화를 감상하면서 느낄 수도 있을 감상자의 불편함을 완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장식적 요소가 극히 제한되어 있고, 그래서 어쩌면 그의 영화적 속살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났을지도 모를 <복수는 나의 것>이 일부 관객들에게 극단적 혐오의 감정을 던져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박서방은 이 영화가 영화도 아닌 쓰레기라고 극언을 퍼붓는 친구와 새벽까지 소주를 마시며 격론을 벌인 적이 있다.

얘기가 옆으로 샜는데 최근 개봉을 앞둔 박 감독의 신작 <박쥐>를 상상하는 일이 매우 즐겁다. 제한적으로 알려진 정보를 통해 보자면 신의 사명을 다하려는 도중에 괴물(뱀파이어)이 돼버린 어떤 성직자가 자신의 친구의 아내와 금지된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라고 한다. 영혼의 순결을 향한 갈구와 운명처럼 다가온 죄악, 피해갈수 없는 죄의식, 살인과 금지된 사랑. 이 모두가 그야말로 전형적인 박찬욱적 테마가 아닌가. 게다가 뱀파이어를 다룬 이야기라니! 다소 과장을 섞어서 뱀파이어는 현대 대중문화가 창조해낸 가장 매력적인 괴물이 아닐까 싶다. 피를 매개로 남의 생명력을 훔쳐내는 이 괴물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동유럽 등지에서 전해내려 온 것이지만 이 괴물이 대중적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것은 소위 고딕호러 문학과 영화산업의 힘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뱀파이어의 이미지는 대부분 미국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창조해낸 벨라 루고시의 드라큐라와 영국 해머 스튜디오가 창조했던 크리스토퍼 리(<반지의 제왕>의 사루만!)의 이미지에서 기인한 것이다. 특히 박서방은 크리스토퍼 리의 드라큐라를 무서워한다. 브램 스토커의 원작 이미지와 외형상으로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근엄한 권력자의 모습과 피에 굶주린 광인의 양면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뱀파이어의 본질적 속성을 가장 잘 형상화한 캐릭터라 할 만 하다. 그런 점에서 코폴라의 <드라큐라>는 실망스런 영화였다. 사랑 때문에 신을 버리고 괴물이 되었다니! 강력한 흑마력으로 범선을 조종하며 짙은 안개가 내린 템즈강을 타고 런던을 ‘정복’하러 오는 스토커의 드라큐라 묘사를 본 사람에게는 이런 순정만화에나 나올 법한 드라큐라는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드라큐라는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현대 이전으로부터 온 침략자란 말이다.

물론 뱀파이어의 이미지는 드라큐라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점점 다양해져왔다. 카밀라나 뱀피라 같은 여성 뱀파이어들은 피의 향연 내면에 감춰진 짙은 섹슈얼리티를 전면으로 이끌어냈으며 특히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필두로 한 앤라이스의 ‘뱀파이어씨리즈’에서는 본질적으로 19세기의 흔적이 짙게 배어있던 뱀파이어 캐릭터를 20세기적으로 전환시켰다. 이성에 의한 야만의 극복이라는 테마가 사라지고 비이성적 존재의 영원성 안에 담긴 중음신의 허무감을 감각적으로 묘사해낸 것이다. 그래서 앤라이스의 소설은 뱀파이어물임에도 불구하고 호러보다는 탐미적 픽션에 가깝다.

그렇다면 과연 <박쥐>의 뱀파이어는 어떨까? 본래 성직자였으며 인간을 구원하려다 뱀파이어가 됐다는 정보로 봐서 신에 대한 소명과 육체적 변화에 따른 본능의 갈구의 대립은 반드시 등장할 것이다. 친구의 아내와 사랑에 빠진다는 줄거리나 박서방이 지난 5년간 등장했던 여배우 중 가장 섹시하다고 생각하는 김옥빈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섹슈얼리티의 요소 역시 반드시 등장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너무 뻔한 예상들이다. 그러나 박찬욱이 선수 중의 선수라고 믿는 입장에서 이 정도로는 너무 약하다. 그는 예상되는 질문과 답변 근처에 눈에 잘 안 띄는 더 무서운 질문을 던지는 특기를 보여왔다. <올드보이>의 이우진을 보라. 말 한마디로 자기 누나를 결국 죽게 만든 오대수를 감금하여 복수하려는 듯 보였지만 알고 보면 자기와 같은 동류로 만들어서 결국 심연에 깔린 자신의 죄의식을 극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박찬욱은 십수년 전 자신의 영화칼럼집에서 샘 패킨파의 피비린내 나는 영화 <가르시아>가 죄로서 죄를 씻으려는 속죄의 영화이며 ‘보기 드물게 순수한 형태의 예술영화’라고 찬탄한 적이 있다.(어쩌면 <친절한금자씨>는 <가르시아>에 대한 박찬욱식 변주다.) 박찬욱이 뱀파이어라는 매혹적인 소재를 가지고 예술을 했는지 오락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피를 매개로 한 지독한 윤리적 게임을 벌였기를 기대해 본다. 모래알만한 죄악이 바위덩어리 같은 징벌이 되서 되돌아오는 지독한 악순환. 그 안에서 자유로운 자는 싸이코패스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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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30 11:42

무한반복의 지옥에서, 비극적으로

[박서방의 주절주절] ‘다른 대화’가 필요해

감금이란 물리적인 상태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카드명세서도 감금이고 대출이자도 감금이다. 의무교육도, 병역의무도, 결혼제도도 모두가 감금이다.

▲ 감금이란 물리적인 상태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카드명세서도 감금이고 대출이자도 감금이다. 의무교육도, 병역의무도, 결혼제도도 모두가 감금이다.

날이 추워지니 몇 년 동안 안 보던 사람들을 보는 일이 조금씩 늘어난다. 대개 학교 동창들이거나 어릴 적 친구들, 혹은 전에 다니던 회사 동료들이다. 우리들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러 간다. 아주 드문 경우지만 차를 마시는 경우도 있다. 마주 앉으면 서로의 근황을 묻고 답한다. 상대방의 건강과 가족의 안녕을 묻고 답하는 것에는 채 30분도 걸리지 않는다. 그때부터가 문제다. 어디서 얘기가 풀려 들어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틈엔가 우리는 부동산과 주식, 펀드 이야기를 하고 자연스럽게 정치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진다. 얘기해봐야 서로 가슴만 답답할 따름이지만 이 수순은 피할 길이 없다.

박서방은 여기서 지옥의 징그러운 한 단면을 본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다시 돌아오고 마는 반복. 소설가 장정일이 자신의 작품 『보트하우스』에서 “반복은 지옥이다”라는 전언을 던졌을 때만 해도 그 진의를 파악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요즘 그것이 정확하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철들고 나서 깨달은 일상의 가장 끔직한 현상은 지독한 고통이나 절망감이 아니라 그것이 피할 도리 없이 쳇바퀴 돌 듯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즐겨 읽어온 만화 중에 후쿠모토 노부유키라는 독한 분이 그린 『도박묵시록 카이지』라는 독한 작품이 있다.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회낙오자 주인공이 불법 도박 세계에 빠져 겪게 되는 모험담(?)을 그린 이 만화는 작자의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지독하리만치 차가운 냉소로 유명한 작품이다. 그 작품에서도 가장 섬뜩한 것은 주인공 카이지를 둘러싼 환경의 폐쇄성과 무한반복이다. 카이지가 도박과 부채의 개미지옥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김없이 새로운 지옥이 열린다.

솔직히 철없던 때는 이 만화에서 그려진 세상이 나와는 상관없는 가상의 공간이라고 여겼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믿음과 사랑, 우정 같은 인간적 감정들에 대한 강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신뢰를 뒷받침할 근거들도 주변에 많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어느 순간 박서방의 주변이 카이지의 세계와 비슷하게 변해 있었다. 카이지 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탈출하지 못한 채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로부터 시작된 미국발 금융위기가 바다 건너 박서방의 일상에 침윤해 들어오는 지난 1년간을 돌아보면 이 세계는 정녕 ‘노웨이아웃’이다.

그러니 앞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각종 송년모임도 전혀 기다려지지 않는다. 어떤 시추에이션으로 전개될지 뻔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초반 30분 정도의 즐거운 회합 이후 얼마 안 있어 누군가의 시작으로 답 없는 ‘경제 얘기’가 시작될 것이 뻔하다. 누군가는 지금은 뭘 사야 될 시기라는 근거 없는 낙관론을 펼칠 것이며 또 누군가는 언제 무엇을 사야한다는 그 보다는 조금 근거 있어 보임직한 예측을 내놓을 것이다. 그러면 또 누군가는 재테크고 나발이고 당장의 힘듦을 토로할 것이며 결국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고 헤어질 것이다. 정치 얘기도 어떻게 진행 될 것인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게 1년을 마무리할 생각을 하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생각해보니 수년전 크게 인기를 모았던 영화 <매트릭스>가 대중들에게 주었던 카타르시스 역시 무한 반복되는 세계에서의 탈출이 아니었나 싶다. 결국 감금이란 물리적인 상태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카드명세서도 감금이고 대출이자도 감금이다. 넓게 보자면 의무교육도 감금이고 병역의무도, 결혼제도도 감금이다. 모든 공화국에는 기본적으로 감금의 질서가 있으며 그로 인해 사회가 유지된다. 다만 최근 박서방이 살고 있는 공화국에서 감금이 개인에게 보다 폭력적인 것은 잠시 심호흡을 할 작은 돌파구마저 막고 있다는 것에 있다. 개인들의 사적 관계마저도 철창 안에서 한 치도 못 벗어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 비극적인 것이다.

2008년을 보내며 친구들과 다른 대화를 할 수 있을까? 박서방은 한번 해볼까 한다. 맛이나 냄새나 향기 같은 원천적 감각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다. 혹은 인생이나 사랑의 의미 같은 사춘기 시절의 소재를 가지고도 얘기해보고 싶다. 미친놈처럼 보이겠지만 그러지 않으면 진짜 미칠 것 같다. 이제 빈정거리지 않으면서도 좀 웃기는 얘기를 해보고 싶은 겨울이다.

 


박서방 _ 인터넷 만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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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2 15:40

욕하기 위해 드라마를 본다 - [박서방의 주절주절]어느 욕 나오는 드라마와 주말을 보내고

욕 나오는 드라마 시청률의 진정한 힘은 욕 그 자체에 있다. 드라마 '조강지처클럽'(사진 SBS홈페이지)
▲ 욕 나오는 드라마 시청률의 진정한 힘은 욕 그 자체에 있다. 드라마 '조강지처클럽'(사진 SBS홈페이지)

이제는 새삼스런 일이지만 욕 먹는 드라마일수록 시청률이 좋다. ‘미드’나 ‘일드’의 경우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국산 드라마에서 만큼은 이것이 점점 자명한 진리가 되고 있는 듯 하다. 물론 시청률과 작품에 대한 평가가 모두 뛰어난 명품 드라마도 간혹 있긴 하다. 그러나 그런 드라마들이 연간 몇 편이나 되겠는가. 대세는 어처구니 없게도 욕 먹는 드라마다.

아무래도 욕 먹는 드라마 하면 ‘인어아가씨인지 ’붕어아가씨‘인지로 일세를 풍미한 임 모 작가의 작품을 꼽을 수 있겠다. 그러나 박서방의 경우 이런 주옥같은 작품들이 방영될 무렵 거의 드라마와 담쌓고 살았기 때문에 그 명성만 접했지 실체를 확인한 바가 없다. 그런 전설적 드라마들을 못 본 것은 천추의 한으로 남지만 어쩌겠는가. 최근에서야 가정적 남자가 되면서 저녁 시간 TV앞에 앉아 빨래를 개며 드라마 보는 시간이 많아졌으니 말이다. 여하간 최근 주말 저녁 마다 보는, 공전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화제작이며 역시 욕 먹는 드라마의 하나인 ‘조강지처클럽’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이 드라마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나화신(오현경)-한원수(안내상), 한복수(김혜선)-이기적(오대규)라는 두 중견 커플이 겪는 부부생활 파탄담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를 이혼 전문 드라마인 ‘사랑과 전쟁’의 주말 확대 버전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두 커플을 중심으로 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남녀들의 불륜과 이혼, 로맨스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사실 벌어지는 상황들이 대부분 정상적이지 않다. 당초 시작부터 그랬다. ‘한원수’는 자신의 아내 ‘나화신’을 학대하다가 이혼도 안한 상태에서 기혼녀인 ‘모지란’과 자신의 집에서 동거에 들어간다. 의사인 ‘이기적’은 학력이나 직업에서 자기보다 못한 ‘한복수’와의 부부생활에 불만을 느끼다가 첫사랑인 ‘정나미’와 바람을 핀다. 한원수와 한복수의 아버지인 ‘한심한’은 본처 ‘안양순’을 버리고 ‘복분자’와 살고 있다. 당초부터 바람 가득한 설정으로 시작한 이 드라마는 이후 꼬리에 꼬리를 무는 뒤엉킨 관계를 보여주며 당초 50회 방영 계획을 훌쩍 뛰어넘어 100회를 이미 넘긴 상태다. 그나마 그런 충격적 설정들을 상쇄시켜주는 것은 중견 배우들의 노련한 연기력과 뒤틀렸지만 때때로 통쾌한 유머 감각 덕분이다. 

혹시 이 드라마가 이미 지반부터 흔들리고 있는 결혼 제도의 해체를 보여주고 있다고 착각될 수도 있겠지만 거기까지는 나가지 않는다. 간혹 그런 파격적인 대사나 설정이 나오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결혼 이데올로기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일시적 일탈과 회귀는 사실 대부분 성공적인 대중문화상품의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그보다 이 드라마 앞에 시청자들을 묶어두는 가장 힘 중 하나는 핑퐁게임 덕분이다. 주말 2회 씩 방영되는 이 드라마의 진행은 마치 매회 공수가 교대되는 야구 시합 같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박서방이 처음부터 ‘조강지처 클럽’을 봤던 것은 아니다. 당연히 드라마의 앞부분을 전혀 보지 못했음에도 드라마 시청에 전혀 지장이 없다. 야구 시합에서 초반 경기를 못보고 6, 7회부터 보더라도 동점이거나 박빙의 승부일때 흥미가 넘치는 것과 비슷하다. 매주 진행되는 남녀들간의(혹은 남남 간의, 여여 간의) 공방은 봉황대기 결승처럼 시청자들을 묶어놓는다.

그러나 이 욕 나오는 드라마 시청률의 진정한 힘은 욕 그 자체에 있다. 재미난 것은 이 드라마의 시청률이 높아질수록 욕하는 이들은 더욱 많아지고 욕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드라마 시청률이 높아만 간다는 점이다. 어쩌면 욕하는 이들일수록 이 드라마를 더 열심히 보는 이들일 것이다. 드라마를 욕하고, 황당하고 엽기적인 설정을 욕하고, 등장하는 캐릭터를 욕하면서 더욱 드라마에 몰입해간다.(특히 이 드라마가 취하고 있는 비현실적이고 만화적인 작명법은 대중들의 몰입도를 더욱 높이고 있다.) 재미는 있는데 욕이 나온다. 욕이 나온다는 것은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난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에는 특히 욕 나오는 이들이 많다. 얼마 전에 박서방은 여자친구와 각자 이 드라마에서 가장 욕나오는 캐릭터 다섯명을 꼽으며 놀기도 했다.(공히 1위는 한원수였다.) 꽤 많은 이들은 욕을 하기 위해 드라마를 본다. 주말에 드라마를 보며 화를 가득 내며 가정생활에 대한 불만을 풀어버리는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특히 부정적인 캐릭터들이 남성, 특히 가장인 것은 드라마의 주 소비층이 여성, 특히 기혼여성들인 탓이 크다. 이 드라마는 남편들에게 ‘화난’ 부인들의 좋은 속풀이 장소인 것이다.

박서방은 욕 나오는 드라마를 옹호하고 싶지도 않지만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욕 나오게 만드는 세상인데 욕 나오는 드라마가 득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최근 바다 건너에서 들려오는 금융대란은 이 세계가 얼마나 허약한 합리성으로 유지되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거기 9시 뉴스에 나오는 우리 공화국 위정자들을 보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난 우리 대통령이 경제의 ‘달인’이라고 본다. 아마 16년간 경제활동을 했을 것이다.) 이러 판국이니 황당한 설정 좀 나오면 어떤가.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는 더 황당한데 말이다. 어차피 대중문화 상품에서 심미적 상징성이나 숭고미를 바라는 건 아니지 않는가. 오히려 더 뒤틀린 아이러니, 혹은 황당한 드라마를 보고 싶다. 그나마 ‘조강지처 클럽’은 안전장치가 너무 많이 붙은 작품이었다. 그보다 반발짝 더 진화된, 진짜 욕 나오는 엽기를 보고 싶은 게 솔직한 요즘 심정이다.




* 2008-09-30 오후 5:59:48  박서방 _ 인터넷만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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