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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1.12 한독협, '독립영화 한류'의 중심이 되라 -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 - ③] 곽용수 독립영화제작배급사 인디스토리 대표
  2. 2008.11.05 상상 이상의 '센 영화'들을 기다린다 -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 -②]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2008. 11. 12. 20:25

한독협, '독립영화 한류'의 중심이 되라 -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 - ③] 곽용수 독립영화제작배급사 인디스토리 대표

인디스토리 곽용수 대표
▲ 인디스토리 곽용수 대표

한독협이 독립영화 정책을 만들고 환경을 개선하는 등 공적인 영역의 중심에 있다면 독립영화를 만들고, 알리고, 관객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배급의 중심에는 독립영화제작배급사 인디스토리가 있다. 인디스토리는 올해 시네마 달, 키노-아이가 생기기 이전까지 10년 동안 홀로 독립영화 배급의 길을 뚫고 닦아 왔다. 독립영화와 관객이 만나는 다리를 이어주는 인디스토리의 노력이 없었다면 그만큼 한국독립영화의 역사는 지체되었을 것이다.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 세 번째 주인공은 곽용수 인디스토리 대표다. “배우 신하균을 닮았다”는 말에 “미모의 기자와의 인터뷰라 즐거웠다”로 화답 하는 센스 만점의 곽용수 대표를 통해 한국독립영화, 한독협, 그리고 한독협의 동갑내기 친구 인디스토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소감 한마디 해달라.

10살 된 한독협, 지금까지 잘 버텨왔다. 어떻게 보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일들을 해왔다. 여러 사업과 정책들을 만들어 왔고, 독립영화인들이 모여서 함께 할 수 있는 일도 많이 만들었다. 이제 놓친 부분이 없나 되돌아 봐야 할 때인 것 같다. 인디스토리도 10주년인데 동갑내기로서 든든하다. 친구이자 동지로 앞으로의 10년도 잘 버텼으면 좋겠다.

어떻게 독립영화 일을 하게 됐나

문화학교서울에서 인디포럼을 진행하면서 독립영화인들을 만났다. 그게 1995, 6년 정도. 그러다가 배급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인디스토리를 구상했다. 독립영화의 경우 감독들은 많은데 기획, 배급 부분이 약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문화학교서울이 일정부분 소화한 측면이 있다. 단편영화, 청년영화도 상영했다.

그 때 한독협과 인연을 맺은 건가

1996년 김동원 감독 사건이 터졌을 때 각 단체들과 마찬가지로 문화학교서울도 대책위에 참가했다. 자연스럽게 독립영화인들의 모임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왔고, 협회가 꾸려졌다. 그 때 조영각 씨가 초대 사무국장이 됐고, 그렇게 문화학교서울과 한독협이 연결됐다.

독립영화인들은 초창기 한독협을 어떻게 인식했나.

욕심과 실망 두 가지다. 한독협이 응당 무슨 일을 해야 한다는 욕심과 조직의 위상이 생각과 다를 때 오는 실망감이다. 한독협은 회원들의 권익보호를 떠나 독립영화 환경에 대한 정책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독립영화 환경을 풍요롭게 하는데 주력했다. 그런 면에서 많은 독립영화인들이 한독협을 지지할 수밖에 없지만, 아쉬운 부분도 있을 거다.

독립영화 배급을 언제부터 구상했나

인디포럼을 진행하면서 배급에 대한 고민도 했었기 때문에 협회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논의가 이뤄졌다. 협회는 회원들의 권익을 위해서 모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독립영화 관련 사업들을 해야 한다. 독립영화 배급, 유통을 어떤 식으로 진행할지 고민했다. 또 한독협 안에서 할 지, 다른 단체나 회사에서 할지 고민을 했다.

그런 고민이 인디스토리를 만들었나

당시 기획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단체든 회사든 만들고자 한 달 정도 시장조사를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되지 않겠냐”라고 했고, 나머지 멤버들은 “독립영화 배급, 그거 되겠냐”라고 했다. 그러다 한 달 후에 내가 “이거 안 되겠다”하니 다른 사람들이 “안 되겠지만 그래도 해야 하지 않겠냐”라고 했다.(웃음) 반 비전, 반 책임을 갖고 시작했다.

젊었을 때 꿈이 뭐였나. 너무 멀리 온 거 아닌가.(웃음)

학교 다닐 때도 문화 쪽에 관심이 많았다. 일반 회사보다 문화 관련한 곳에서 일하고 싶었다. 노래를 했었는데 가수로는 돈 못 벌 것 같아 고민 하던 중 선배가 단편영화 찍는 모임을 갖자는 제안을 해서 문화학교서울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1993년부터 시네마테크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인디스토리는 문화학교서울에 있다가 따로 독립한 것인가?

그렇다. 인디스토리는 자체 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문화학교서울에 같이 있다가 법인화 시키면서 나온 것이다. 초창기 인디스토리를 꾸렸던 인력들은 문화학교서울 회원 안에서 다 뽑았다. 세 명 정도. 활동비도 얼마 안 되지만 문화학교서울에서 지원을 받았다. 인디스토리 같은 경우 회사 성격을 가지려고 노력 했었는데 아무래도 문화학교서울 안에서 인력을 뽑다보니 여전히 단체 성격 같은 것들이 남아 있었다. 회사에 가까운 구조를 만들려고 몇 년 후 자본금 협조를 받아 법인화 시키면서 문화학교서울에서 분리한 것이다.

인디스토리와 한독협은 어떤 관계를 유지했나

한독협 초창기 당면 과제가 조직의 틀을 잡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시기 배급, 유통에 관한 고민들은 우리가 담당했다. 이후 단체가 안정되고, 배급에 대한 활동을 시작하면서 서로 보충, 보완 하는 관계가 됐다. 인디스토리가 좀 더 상업적인 마인드로 일을 했다면 한독협은 공동체 상영운동이나 공공적 배급유통을 좀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같이 했던 사업 중에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안녕 사요나라>, <다섯은 너무 많아>를 공동배급 형태로 진행했다. 인디스토리는 극장을 맡고, 한독협은 공동체 상영을 맡았다. 그 외에도 라이브러리 사업, 인디스페이스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한독협, 지금까지 잘 버텨왔다. 친구이자 동지로 앞으로의 10년도 잘 버텼으면 좋겠다."


인디스토리의 히스토리

인디스토리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를 해보자. 당시 독립영화 배급 상황, 시장은 어땠나?

거의 없었다. 전주MBC나 <시네마천국>에서 한 달에 한 번 단편영화를 방영하는 게 다였다. 초창기에는 VOD를 통해서 단편, 독립영화를 소개하는 곳이 좀 있었다. 짧으니까 콘텐츠로써 매력이 있다고 생각을 해서 윈도우는 계속 생겼다. 근데 결국 이게 안 되니까 초기에 의욕을 가진 회사들이 문을 닫게 됐다.
 
인디스토리와 이런 환경의 변화도 긴밀한 관계가 있겠다

초기에는 VOD 시장이 재정적으로 도움을 줬다. VOD 산업이 무너지면서 어려워지기 시작할 때 방송쪽으로 채널이 생겼다. 특히 KBS <독립영화관> 때문에 재정적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었다. <독립영화관>이 없어질 때까지 인디스토리 수익의 60~70%를 담당했으니까. 안정적인 수익창출이 운신의 폭을 넓히는데도 도움을 줬다. 

60~70%의 수입이 날아갔는데 이후에는 어떻게 운영했나.(웃음)

글쎄, 나도 궁금하다.(웃음) 2006년 말 <독립영화관>이 없어지고 나서 겨울에 좀 힘들었다. 그때는 어느 정도 규모도 커졌기 때문에 안 쓰는데 한계가 있었다. 그랬는데 작년에 <살결> 등 장편영화를 배급하며 숨통이 트였다. 부가판권 시장이 워낙 무너져 힘들었는데 <살결>은 조건이 괜찮았다. 고마운 작품 중 하나다. 흥행은 안됐지만.(웃음)

처음엔 단편, 차차 장편을 배급하게 된 건가

처음 ‘독립영화전문배급사’라고 한 건 단편은 물론 장편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2000년에 <대학로에서 매춘하다가 토막살해 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를 배급하면서 자연스럽게 장편을 하게 됐고, 2002년도에 4편을 배급했다. 근데 2003년에는 한 편도 배급을 못했다. 배급할 장편 영화가 없었다. 그래서 수입 쪽에 눈을 돌리게 됐다.

2002년에 4편을 배급했는데 잘 됐나
 
영화 자체가 갖고 있는 힘의 문제였던 것 같다. <둘 하나 섹스>는 에로 코드가 있어 좀 더 돈을 많이 받을 수 있었고, <대학로에서 매춘하다가 토막살해 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는 장르영화라 DVD나 VHS판매가 가능했다. 큰 액수는 아니더라도 단편영화 시장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을 받았다. 장편 배급이 안정적으로 지속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다음해에는 작품이 없었다.

인디스토리는 언제 틀이 잡혔나

내 기억으로는 KBS <독립영화관> 생기고 1년 정도 지났을 즈음 같다. 2002년부터 좀 안정적인 구조가 됐다. 그러니까 영화 수입, 제작을 생각하게 된 거다.

독립영화 제작환경이 만만치 않은 것으로 아는데

영화하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제작 욕심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제작소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외부의 프로젝트, 프로듀서, 감독을 통해 제작을 하기 시작했다. <팔월의 일요일들>은 도움을 주는 형식이었고, 옴니버스 <눈부신 하루>는 자체 기획해 프로듀서 없이 감독들과 진행한 케이스다.

배급과 제작을 동시에 하면서 어떤 고민을 하게 되나

안정적인 독립영화 제작 시스템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배우 매니지먼트, 감독 매니지먼트 등의 사업들도 고민했다. 배우들이 훈련하고, 소위 뜬다고 하더라도 독립영화에 계속 출연할 수 있게. 그게 한국영화간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또 감독이나 제작자들이 좀 더 편하게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는 고민을 많이 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눈부신 하루>를 제작했는데 제작비가 너무 부족했다. 그러니 당연히 감독도 힘들게 영화를 찍었다. 그런데 그러고 나니 제작 시스템이나 노하우가 회사에 전혀 쌓이지가 않았다. 내부에 시스템은 물론 담당할 사람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내부에 제작 기획하고, 프로젝트 검토, 자체 기획 아이템 개발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영화는 많다, 하지만 아직 배고프다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독립영화가 많아졌다. 독립영화계에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하는가.

여전히 독립영화에 관한 관객들의 선입관이 있다. 많은 작품들이 만들어지면서 오히려 관객들이 ‘독립영화는 이렇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부정적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작품이 많아진 만큼 일 년에 한두 편, <송환> <우리학교> 같은 영화들이 터져주면 독립영화에 대한 선입관들이 없어지고 관객 커뮤니티를 만들어 나가는데 도움이 될 거다. 그런 면에서 올해는 좀 아쉽다. <우리는 액션배우다>가 계기가 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안 터졌다. 현재 경기 침체와 더불어 영화 관람 자체의 침체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작품 수에 비해 상영공간은 부족하지 않나

인디스페이스뿐만 아니라 다른 공간들이 많이 생겨서 많은 작품을 소화해 낼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한다. 사실 인디스페이스가 소화해내는 영화가 그 중에 반 정도 될 거라 생각한다. 한 개관이 갖고 있는 한계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서울에서만이 아니라 지역 예술영화 네트워크 중심으로 일정 정도 소화해 낼 수 있는 공간들이 생겨야한다.

인디스페이스가 다양한 취향의 영화들을 다 소화해 낼 수는 없다는 말인가

그렇진 않다. 다만 그걸 여유 있게 소화해 내기 어려운 구조라는 거다. 우리 영화 중에도 인디스페이스가 없었으면 개봉하기 힘든 영화가 있다. 작품성과 상관없이 대중성이 떨어지는 영화들이다. 폭발적인 반응은 아니지만 계속 상영을 함으로써 다른 영화들도 가능성이 생기는 거라 본다. 그런 역할은 CGV, 무비꼴라쥬, 시네큐브 등 다른 극장에서는 사실 쉽지 않다.

그런 가운데 시네마 달, 키노-아이 등 독립영화배급사들이 등장했다.

좋은 일이다. 우리가 10년 버틴 것처럼 잘 버텼으면 좋겠다. 두 배급사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굳이 경쟁이라고 한다면 선의의 경쟁이 될 것 같다. 또 두 배급사는 우리와 차별화된 부분이 있다. 시네마 달 같은 경우는 공동체 상영, 다큐멘터리를 집중적으로 관리 할 거고, 키노-아이는 인디스토리가 소화할 수 없는 영역을 소화할 거다.

인디스토리가 소화할 수 없는 영역이라면?

사실 인디스토리 배급라인은 거의 다 차 있는 상태라 우리가 소화할 수 없는 작품들이 많다. 인디스토리만 있었을 때 사장됐을 수 있는 영화들이 개봉될 수 있다는 거다. 고마운 일이다. 배급에 대해 같이 고민 하면서 배급 시장을 넓혀 가면 좋겠다.

올해 몇 편의 영화를 배급했나. 또 향후 배급 일정은.

9, 10편정도 개봉했다. 거의 한 달에 한편 정도 개봉했으니까. 내년 7, 8월까지는 배급 라인업이 다 찼다. 1, 2, 3월에는 다큐멘터리 세 편 <워낭소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할매꽃>이 연달아 개봉할 예정이다. 극영화는 <처음 만난 사람들>, <반두비> 그리고 MBC와 함께 만드는 작품이 개봉할 거다. 또 가족의 달에 개봉할 외화도 하나 있다.

많은 작품을 배급하지만 여전히 ‘관객과의 만남’이 최대 과제인 것 같다. 복안이 있나.

복안은 없다.(웃음) 쉽지 않다. 규모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건 상업영화도 마찬가지다. 가령 마케팅 예산을 많이 써도 소용없는 경우도 있고, 더 적게 썼는데 반응이 좋은 경우도 있다. 또 이 영화가 저 영화보다 나은 것 같은데 극장의 차이로 인해 흥행의 차이가 나면 안타깝기도 하다. 인디스페이스에서 개봉지원을 받고 포스터 비용 정도만 든 영화가 마이너스를 기록한 영화도 있다. 포스터 비용조차도 못 건진 거다.

좀 슬프다. 그럼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

목표와 문제의식이 뚜렷하기 때문에 계속 노력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 커뮤니티를 활성화하고 충성도 높은, 적극적인 관객들을 많이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홍보마케팅이나 배급의 전략에 관한 문제들은 실타래 풀듯 풀기는 어려운 것 같다. 하지만 공동체 상영운동 등 네트워크를 활용한 배급 상황은 이전보다 좀 나아질 것으로 본다.

곽용수 대표가 꿈꾸는 인디스토리는.

‘인디스토리 가면 모든 독립영화, 단편영화를 다 볼 수 있어’라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싶다. 또 큰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기획이나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다. 그런 욕심만 있다. 아쉽게도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런 새로운 시도가 아니라면 부가판권시장이 좋았을 때처럼 제대로 된 윈도우들이 생겨 방송에서도 안정적으로 독립영화를 틀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웃음)

"인디스토리가 배급했던 영화들의 면면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영화제를 만들고 싶었다"


인디스토리의 쌩얼을 공개한다!

얼마 전 ‘오! 인디풀영화제’가 시작됐다.

인디스토리 10주년을 어떻게 할까 작년부터 많은 고민을 했다. 욕심 같아서는 인디스토리가 배급했던 모든 영화를 다 틀어주고 싶었다.(웃음) 그게 힘들다면 어떻게 객관적으로 작품들을 보여줄까 고민했다. 어차피 인디스토리는 배급회사니까 우리가 배급했던 영화들의 면면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영화제를 만들고 싶었다.

주요 섹션을 소개해 달라.

먼저 ‘오! 인디풀영화제’ 안에 ‘존 카사베츠 영화제’가 들어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기획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따로 홍보하고 있지만 프로그램 중 하나라고 보면 된다. 존 카사베츠는 독립영화의 정신이다. 또 이 감독의 작품이 최근 한국영화, 독립영화든 충무로영화든, 제작시스템과 연관해 시사하는 부분이 있다. 톡 건드려주고 싶었다.

인디스토리가 배급했던 영화들이 참가하는 섹션은.

일단 장편, 단편으로 나뉜다. ‘보다 깊이’라는 섹션에서는 전문가들이 추천한 3편의 장편과 10편의 단편영화가 상영된다. ‘보다 멀리’ 섹션은 해외에서 상영되고, 호응이 좋았던 장편, 단편영화를 상영한다. ‘보다 자유롭게’ 섹션은 네티즌들과 함께하는 섹션이다. 네티즌이 선정한 작품들로 꾸며질 예정이다. 그리고 인디스토리가 제작한 장편 3편과, 수입한 작품 3편을 상영한다. 총 상영 횟수가 100회 정도 된다. 사고 없이 잘 끝냈으면 좋겠다.(웃음)

그 외 인디스토리 10주년을 기념하는 게 있나.

영화제 외에 인디스토리를 알릴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10년의 성과를 책으로 만들어 보고자, 배급현황과 지난 십년의 그래프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또 정식으로 발매는 안됐지만 당대별로 의미 있는 독립영화, 단편영화들을 뽑아서 기념 DVD로 제작하고 있다.


독립영화의 한류, 한독협과 인디스토리가!

독립영화인으로서 현재 고민하는 지점은 무엇인가.

인디스토리의 고민이기도 한데, 결국은 운영이익이다. 독립영화 같은 경우는 정책들과 연관된 부분이 많다. 정책들은 아무래도 정권이 바뀌면서 달라지는 부분이 있을 것 같다. 그런 부분에서 보이게, 보이지 않게 기존과는 달라질 것이고, 그게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변화가 재정적인 부분에도 부담되는 측면이 있을 것 같아서 좀 걱정이다.

4기 영진위에 대한 언급인 거 같다.

가령 독립영화전용관을 옮기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가정해 보자. 근데 기존의 복합상영관 사업이 지지부진하게 추진되면 어려움에 봉착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기존에는 비교적 수월하게 영화제작배급을 했다면 이제는 정책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계속 부딪혀야 하고 싸워야 할 것 같다. 경제가 어렵기도 하고, 여러 정황 상 독립영화인들이 자신들의 본질, 원칙들을 다시 다지는 힘든 5년이나 10년이 될 것 같다. 그게 또 다른 전환점이 될 것도 같다. 

한독협에 대한 제언을 해달라.

한독협이 워낙 하는 일들이 많다 보니 조직 관리나 사업에 대해 놓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한독협은 재정적으로 안정된 곳은 아니기 때문에 좀 더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것 같다. 또 이건 인디스토리의 과제이기도 한데, 네트워크를 구성해 해외 독립영화계와 많은 교류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특히 아시아 쪽 독립영화인들과 교류가 활발해져 다양한 연대를 만드는데 한독협이 중심이 됐으면 좋겠다.



                              * 2008-11-11 오후 2:47:22  컬처뉴스 김나라 기자, 필름온 안효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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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1. 5. 18:29

상상 이상의 '센 영화'들을 기다린다 -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 -②]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한독협 10주년 인터뷰의 두 번째 주자는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이다. 그 역시 한독협의 역사와 자신의 인생이 구분가지 않는 10년을 살아왔다. 특히, 서울독립영화제와 인디포럼에 깊숙이 관여해 오면서 독립영화의 지형을 세세히 관찰한 그의 시선은 날카로우면서도 독립영화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묻어난다. ‘독립영화 무한도전’을 연상케 하는 한독협 초기의 좌충우돌 시기부터 어엿한 정책의 주체로 목소리를 내게 된 시기를 지나 독립영화전용관을 가지게 된 지금까지. 때로는 활동가로, 때로는 제작자로 종횡무진 독립영화계를 누벼온 그를 통해 한독협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봤다.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소감 한 마디 해달라.

좀 짠한 마음이 들었다. 10주년 기념식 때 풍물놀이도 하고, 처음 사무실 오픈 할 때 동영상도 봤다. 감회가 새로웠다. 옛날에 고생했던 생각도 들고. 이렇게 커졌구나... 아무도 이렇게 커질 거라고 생각 안했던 것 같은데. 의지도 있고 열심히 한 것 같다. 예전에는 독립영화를 인정하지 않았고, 운동권 영화라고 치부했는데 이제 정부에서 지원도 한다. 한독협이 이제 정책 파트너가 됐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뿐만 아니라 문화관광체육부(이하 문화부)도 그렇다.

한독협 창단멤버다. 어떻게 한독협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나. 

문화학교서울이라는 단체에 있었다. 외국에서 비디오를 공수해 자막을 넣어 상영하고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또 영화공부, 제작, 강좌를 했다. 외국영화만 틀다보니까 한국영화를 발견해야하지 않나 하는 목적의식이 생겨 1996년에 ‘인디포럼’이라는 영화제를 열었다. 그런데 그때 인디포럼을 같이하던 김동원 감독이 잡혀갔다. 당시 푸른영상을 중심으로 영화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그때 무슨 얘기를 나누었나.

제일 중요한 것이 표현의 자유였다. 당시 김동원 감독이 불법비디오유포죄로 들어갔다. 그때 독립영화인들을 아우르는 단체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원래는 곽용수 씨가 가야하는 자리였는데 대신 갔다가 한독협 준비팀이 되었다. 당시 오정우, 이한숙, 이주영 등이 모여 정강, 회비 등에 대한 논의를 했다. 그때 워낙 쟁쟁한 감독들과 제작단체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무국장이 된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사무국장이 되었다. 결국 문화학교서울은 그만두고 한독협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게 됐다. 

원래 시네마 키드였나.
 
중고등학교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다. 근데 그때는 영화학과 경쟁률이 높아서 영화과 가기가 힘들었다. 배우들만 가는 줄 알았으니까. 그냥 영화보기 좋아하고, 영화에 대한 글을 쓰기를 좋아했다. 그때 집이 용인이었는데 혼자 영화를 찾아 서울로 자주 왔다. 그러다 문화학교서울을 알게 되었다. 회원 가입하러 갔다가 운영위원회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해서 위원회로 활동하게 되었다.

문화학교서울을 할 당시에 ‘독립영화’라는 인식을 명확히 갖고 있었나.

그건 나중 일이다. 1993년에 문화학교서울에 들어가, 1994, 5년에 가장 열심히 활동했다. 갓 대학졸업한 사람들이 모여 비전에 대해 고민했다. 처음에는 외국영화만 틀고 외국의 예술영화만 보다 왜 한국영화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많은 이들이 할리우드키드라고 하지만 나는 충무로키드였다. 김기영 감독 영화를 찾아보는 등 한국영화를 많이 봤다. 자연스레 충무로에 비판적인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영화를 보면서 토론하고 대안적인 방향에 대해서 고민했다.

고민에 대한 답이 나오던가.

당시 선댄스영화제가 생긴지 5, 6년 지나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던 때였다. 스티븐 소더버그, 쿠엔틴 타란티노 등 새로운 감독이 주목받았다. 근데 한국에는 왜 그런 사람들이 없을까 고민을 하다가 우리도 독립영화의 역사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푸른영상, 노동자뉴스제작단(이하 노뉴단) 등이 그 예다. 그래서 1995년 독립영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류승완, 송영숙 감독 등의 작품을 상영하고, 작가와의 대화를 진행했다. 문화학교서울에 모인 사람들이 대부분 20대 중후반이었다. 추상적인 비전을 갖고 있었지만 영화평론, 제작 등 자기 관심 분야로 자기 일을 찾아 갔다.


한독협 초창기? 무한도전이 따로 없다.

새로운 단체가 생기면서 어려움도 많았겠다. 한독협 초기의 난제는 무엇이었나.

기본적으로 돈이 없었다. 문화학교서울에서 40만원 받았는데, 그때는 그게 작은 돈은 아니었다, 한독협은 그 절반이었다. 새 직장으로 옮겼는데 돈이 반으로 준 거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했다.(웃음) 한독협 인건비로 쓸 수 있는 돈이 한달에 50만원정도였는데 사무차장에게 “니가 25만원 받고 나는 20만원 받겠다”했다. 근데 사무차장이 “사무국장이 20만원 받는데 내가 어떻게 25만원 받냐”면서 자기 월급 5만원을 줄였다. 바보같이 한 사람 월급을 올렸으면 됐을 텐데.(웃음) 다른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했다. 근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었다. 워낙 없어서 여기저기 손 벌리기도 편했다.(웃음)

손을 벌리는 건 벌리는 건데,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돈이 필요하지 않았나.

그때는 지금처럼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도 없었고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지원받는 시스템이 없었다. 아는 사람을 통해 기획안 들고 찾아가서 만나보고 사업을 확장하는데 노력했다. 근데 그게 될지 안 될지 모르니까 계획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그럼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거 아닌가. 완전 무한도전이다.

나는 한독협을 만드는 입장에서 어떤 모습을 그리고 있었지만 회원들은 그런 상이 없었다. 회원들이 가입은 했지만 협회가 뭔지 잘 몰랐던 거다. 협회가 무엇을 위해 있고, 왜 회비를 내야 하는지 설득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초기에는 한독협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독립영화인들을 직접 만나 하나하나 직접 설명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런데도 회원이니까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단체의 목적과 방향을 인식시키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협회 설립 초기 1, 2년 동안 그게 가장 어려웠다.

그렇다면 한독협이 처음 그리고 있던 상이 무엇인가.

그게 한마디로 얘기하기 어렵다.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위해 있다”고 해도 자기가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고, “제작 지원 정책을 만들고자 한다”고 해도 그건 남의 일이었다. 이런 건 사람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 근데 독립영화 감독들이 자기 영화 만들기에도 바쁘고. 먹고 살기도 바쁜데 자신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쉽지 않았다. 쉽게 말해 자기 일이 아니었던 거다. 그때 내가 주로 했던 말이 “혼자서 잘되는 것은 없다. 너 영화 잘 만들어봐라. 몇 년 가나.”(웃음)라고 했다.

어허, 그건 일종의 저주 같은데.(웃음)

아니다. 서울단편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 받는 사람들에게 “상 받았다고 혼자 잘 되는 거 절대 없다. 잘 나갈 때 회원가입하고 회비도 내고 해야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아무리 영화 만들면 뭐 하냐 틀면 잡혀가는데”라고 얘기했다. 절대 “도와주세요”라고 하지 않았다. 이게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이었으니까. 근데 논리적으로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위해 일하고, 제작 지원 정책이나 이런 독립영화발전을 위해서 일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게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자기들에게 실질적인 이익이 없으니까. 이걸 설득하는 게 한독협 사무국의 일이다. 지금 한독협은 어떻게 하면 감독들이 가려운 부분을 긁어줄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

 "2001년까지 한독협 사무국장과 서독제 사무국장을 같이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유령단체? 한국영화계의 비타민!

한독협 활동이 본 궤도에 올라간 시기는 언제인가.

2000년 이후인 것 같다. 의외로 빨리 자리를 잡았다. 영진위가 1999년에 생기고 더 투명해졌다. 예전에는 알음알음 대종상에 몇 억 주고, 그들 세미나에 2천만원씩 지원해주고 했는데 위원회로 바뀌면서 단체지원사업이 생기고, 독립영화제작지원제도(1998)도 생겼다. 처음에는 ‘소형단편영화제작지원’이었다. 처음엔 정액으로 300만원씩 줬는데 우리가 “100만원짜리 영화도 있고 1000만원짜리 영화도 있는데 똑같이 주면 어떡하나 차등지원해라”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명칭도 독립영화제작지원으로 바꾸고 다큐멘터리도 지원해 달라”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파트너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영화인회의가 1999년도에 생기고. 문화연대도 생겼다.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영진위가 구성되면서 우리끼리 성명서만 내는 게 아니라 정책적으로 이야기하게 된 거다. 정책적인 관점에서 파트너로 인정받았다. 당시 사단법인으로 바뀌는 것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1999년). 협회가 생기면서 독립영화인들이 김동원, 변영주 등 개별 창작자들이 아니라, 영화, 진보적인 문화 안에서 시민권을 획득한 것 같다. 영화제, 책 출간, 토론회 외에도 스크린쿼터 운동에 대해 제일 앞장서게 됐다. 독립영화계가 영화판에 활력을 불어넣게 된 거다. 물론 힘 있고 협상하고 했던 사람은 충무로에 있던 사람들이지만 동을 트는 역할은 우리 독립영화계가 했다. 표현의 자유 영역에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유효적절한 시기에 한독협이 생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고 해서 한독협의 발자취가 순조롭지만은 않은 것 같은데.

유령단체로 취급받고 명예훼손 소송에 걸릴 뻔한 사건이 있었다. 영진위 위원을 구성할 때 한독협에서 ‘영진위 위원이 되면 안 되는 인물 5인’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이건 한국 영화 문화 전반에 대한 차원에서였다. 그런데 김지미 영화인협회 이사장이 “문성근, 명계남이 한독협이라는 유령단체를 시켜서 괴문서를 뿌렸다”고 해 신문에 나오고 그랬다. 우린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으니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립영화인들이 위원회에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보다는, 위원회 구성이 잘 되고 투명하게 운영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그런 사건으로 사람들이 한독협의 존재에 대해 알기도 했다.

한독협이 많은 사건을 겪었다.(웃음) 이제 한독협과 서울독립영화제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내가 한독협 사무국장으로 있을 때 영진위가 꾸려지면서 ‘영화제를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냐’는 제안이 있었다. 그때 이효인 선생님이 집행위원장을 하고, 내가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 사무국장으로 갔는데 둘 밖에 없었다.(웃음) 보도자료는 영진위에서 돌리고, 후원도 영진위에서 따고 했다. 그러다가 2001년부터는 한독협이 서독제를 위탁받아서 진행했다. 2001년까지 한독협 사무국장과 서독제 사무국장을 같이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상반기 인디포럼, 한독협 사무국장하면서 하반기 영화제 사무국장을 했다. 미친 듯이 일만 한 거지. 너무 지쳐서 2001년쯤 한독협을 정리했다. 인디포럼도 그만두고. 한독협 사무국장만 4년, 인디포럼 진행을 6년 했다.

몸이 닳고 닳아 다른 일을 생각했을 법도 한데.

쉬면서 개인적인 일도 찾아보고 돈도 좀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체력과 정신력이 고갈된 상태였다. 근데 갑자기 이효인 집행위원장이 그만두고 내가 서독제 집행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결국 한독협 그만두자마자 영화제로 잡혀 와서 다시 일하게 됐다. 영화제 중심으로 일이 집중됐다. 2002년 서독제로 이름 바꾸면서 체제정비하고 스탭도 뽑고 하면서 지금은 영화제 중심으로 일하고 있다. 

한국 독립영화계의 가장 큰 영화제의 집행위원장, 멋지지 않은가.

영화제가 일년 내내 인건비를 주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이효인 선생님이 계실 때는 3달 인건비 받고 6개월 일했다. 나도 4, 5달 밖에 인건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보릿고개를 많이 넘었다.(웃음) 1월부터 4월, 5월까지는 정말 추웠다. 후원받으러 다니고, 영진위에 ‘이게 말이 되나. 좀 올려야 하는 거 아니냐’ 얘기하기도 했다. 뭐, 별로 오르진 않았다.(웃음) 그러면서 사업들을 구상했다. 순회상영, DVD 제작, 온라인 상영 등 다양한 사업을 구상했다.  그러면서 스탭들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게 했다. 근데 웃긴 게 영화제 끝나고 나면 나만 남았다. 사무국장도 새로 구해야 했다. 누구한테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으니까. 다행히 지금은 상근 시스템을 어느 정도 마련했다.

그놈의 지긋지긋한 보릿고개는 어떻게 넘겼나.(웃음)

글을 많이 썼다. EBS시네마천국 작가를 했는데, 한 달에 한 번 써도 작가 인건비가 한독협 사무국장 인건비보다 많았다.  대학 학보부터 교지까지 청탁 오는 건 다 썼다. 매일 통장 들고 다니면서 입금됐는지 확인 하는 게 취미였다.(웃음) 


독립영화, 두 마리 토끼를 잡아라!

서독제 집행위원장 하면서 한국의 독립영화는 지겹게 봤겠다.(웃음) 그러면서 한국 독립영화의 흐름과 경향을 봤을 거 같다. 

인디포럼을 할 때만 해도 침잠하는 영화들이 많았다. 당시 대부분이 사회, 문화운동, 학생운동 하던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우울하고 암울한 루저들의 이야기가 많았다. 재밌는 영화는 찾아보기 어려웠으니까. 이때는 사회적인 인식과 그것을 높은 영화적인 완성도를 성취한 영화가 좋은 영화였다. 이런 경향이 1990년대 후반까지 갔다.

뉴 밀레니엄이 오면서 독립영화의 경향도 바뀌었나.

2000년대가 오면서 디지털로 찍은 재기발랄한 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세대가 다른 젊은 친구들이 어설프게 SF를 한다거나 류승완 감독처럼 액션을 찍는다거나 하는 경향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 주류도 아니었고, 좋은 평가를 받기도 어려운 시기였다. 하지만 ‘독립영화는 이래야지’하는 고정관념이 깨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한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인가.

음, 그러한 경향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반면에 지금은 너무 장르영화나 드라마에 치우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근래 영화들은 사회이면을 다루거나 인물을 다룰 때 드라마는 강해졌지만 인물의 개성이나, 영화적인 표현들이 많이 약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 장편영화들이 많이 등장했다.

2004년 이후로 장편영화가 많이 나오고, 개봉도 할 수 있었다. 단편중심에서 장편으로 옮겨갔다. 인디스페이스에서 개봉을 할 수 있는 것도 큰 역할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봉 할 수 있는 영화들은 제한적이었다. 이제는 4, 5억들인 저예산 영화보다 독립영화가 완성도 면에서 뒤지지 않는다.

최근 장편 독립영화들의 경향은 어떤가.

기복이 있다. 예전에는 사회적 문제의식은 있었는데 영화적인 퀄리티가 떨어졌고, 요즘에는 영화적인 퀄리티는 높지만 사회 이면을 바라보는 안목들이 옅어져 아쉬운 영화들이 많다. 이주노동자, 장애인 등 신문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들, 잔혹한 현실의 이야기를 다루기만 하는 건 의미가 없다. 영화적 성찰이나 사회를 바라보는 깊이 있는 시선이 필요한데 10년이 지나면서 바뀐 것 같다. 영화 편수도 많아졌고, 어떻게 보면 영화가 쉬운 매체가 됐다. 예전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다. 지금 시대에 다룰 수 있는 얘기들이 어떻게 영화적 깊이와 사회적 안목과 결합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세다, 그래서 흥미롭다.

이번 서독제에는 사회적인 안목과 영화적인 완성도가 결합된 작품들이 보이나.

매년 눈에 띄는 작품들이 보이지만 성이 안 찬다. 이런 얘기하면 감독들이 섭섭해 하겠지만, 나는 제작자고 좋은 영화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분명 그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작품들이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욕심을 부리고 싶다.

2008년 서독제 슬로건 '상상의 휘모리'는 최근 독립영화들이 너무 자기 일상의 이야기,
주변의 이야기를 그리는 것에 함몰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거기서 벗어나
'센 영화'
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지은 것이다.


2008년 서독제 <상상의 휘모리>에 대해서 말해 달라.

결국 문제는 상상력이 아닌가. 사회를 비판하든 연애 이야기를 하든, 창작자가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문제다. 휘모리는 좀 더 세게 해야 한다는 의미다. 최근 좀 센 영화들이 없는 것 같다. 사회의 치부를 까발린다거나, 배우 몸이라도 벗긴다거나 하는(웃음). 너무 자기 일상의 이야기, 주변의 이야기를 그리는 것에 함몰된 것이 아닌가 싶다. 거기서 벗어나 ‘센 영화’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에 지은 것이다. 실제로 올해 예심을 하면서 기대보다 그런 영화가 많았다. 세고, 끝까지 가는 영화들.

센 영화? 이번 서독제가 기대가 된다.(웃음)

우리가 슬로건을 이렇게 지어서 그런가, 우연히 맞아 떨어졌다.(웃음) 장편부문에서 ‘아니 이런 영화가 있었단 말야’하는 영화들이 있다. 문제는 관객들이 이걸 어떻게 볼까 하는 것이다. 걱정 반 기대 반이다. 특히 장편영화들이 볼만한 영화들이 많다. 기대가 된다.

주목할만한 작품은?

그건 내가 얘기하면 안 된다.(웃음) 보도자료 보고, 영화 보고 기사 써 달라.

전체적 영화제 출품작들의 경향?

장편부문에서는 어떤 상황의 끝을 보여주는 것들이 많다. <고갈>, <사랑을 찾습니다>, <낙타는 말했다> 등은 어떤 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을 그냥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끝까지 쭉 가는 영화다. 상상 이상의 힘이 있다. 파워풀한 영화들을 좋아하는 편인데 그런 영화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다큐멘터리 같은 경우는 편수가 조금 줄었는데, 올해 볼 수 있는 최고의 작품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단편영화는 어떤가.

단편영화 같은 경우도 새로운 경향들이 발견되고 있다. 일상을 다루는 것에서 벗어나서 인물들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끌어내는 영화들이 많다. 이전 영화들이랑 조금 다른, 드라마 구성에만 머물러 있지 않은 그런 영화들이 많다. 우리 영화제에서 다 수용은 못했지만 최근 영화들을 보면 한국 문제만을 다루지 않고, 외국에서 찍은 영화도 있고, 외국 사람이 실제로 등장하는 영화들이 있다. 이전의 영화들처럼 이주노동자들이 주인공으로 나와서 그들의 문제를 보여주는 선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글로벌한 문제들이 독립영화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흥미로운 건 이런 현상이 다큐멘터리, 극영화, 단편 등에 고르게 나타나고 있다는 거다.

주요 섹션이 궁금하다.

항상 그랬듯 본선 경쟁이 있는데 작년과 편수가 똑같이 51편이다. 단편 40, 장편 11편. 올해는 촛불 영상을 별도로 공모했다. 익히 예상할 수 있는 것들부터 예상하지 못한 문제들 까지 촛불집회 현장에서 볼 수 있었던 다양한 논쟁들을 다룬 영화들이 출품됐다. 6ㆍ10항쟁 이후 20년이 됐는데, 6ㆍ10항쟁과 2008 촛불정국을 연결시키는 영화들이 많았다. 실험적인 작품, 학생 작품들도 있고, 칼라TV 같은 미디어 운동 단체도 있다. 최근 미디어 활동, 독립영화진영이 촛불과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에 대한 포럼도 기획하고 있다.

매년 해외 섹션이 흥미롭다. 올해의 해외 섹션은?
 
올해는 ‘상상의 휘모리’인만큼, 평범하게 않게 ‘성인영화 특별전’을 준비했다. 이른바 ‘섹스와 영화’.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센 영화들을 골랐다. 프로그래머들이 추천하고 감독들이 직접 소개할 거다. 이들이 영화소개하고 토크도 진행한다. 과연 ‘한국에 포르노그라피가 가능한지’, ‘섹스와 영화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한 포럼이 있을 예정이다. 성적인 부분을 건드리는데 있어서 관음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제를 통해서 인간 관계의 문제, 권력의 문제 등을 도발할 수 있는 좋은 주제라고 생각한다. 최근 그런 영화들이 너무 없어서 이런 영화들이 왜 중요한지 짚어보는 포럼도 필요할 것 같다.


하던 일이나 잘해! 이 친구야!

오호, 관객의 한 명으로 완전 기대된다.(웃음) 정신 차리고, 중요한 질문하겠다. 현재 독립영화인으로서 고민하는 지점은 무엇일까.

‘언제 그만둘까?’(웃음) ‘어떻게 더 재밌게 살까’가 고민이다. 집행위원장만 7년째하고 있는데, 개인적인 고민이 크다. 흐흐, 농담이다. 독립영화계에 영화들이 많이 나오고는 있는데 시장에 파란을 일으킬 수 있는 작품은 많지 않다. 관객 1, 2만 명이 아니라 2, 30만 명 들어서 ‘이런 영화들도 되는구나’하는 것을 관객들, 영화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영화제 하나가 잘 되고, 영화 한 편이 잘 되서 판이 좋아질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런 영화들이 많아져서 지원받지 않아도 다음 영화들이 제작될 수 있는 그런 환경이 되면 좋겠다. 그런 영화들이 나올만한데 왜 안나오나. 이런 고민들이 있다.

한독협 10년에 관한 제언 한 마디 해 달라.

어려운 얘기다. 현재 같이 일하고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측면도 있고. 그동안 사업이 많았다. 인디스페이스도 있고, 내부 사업도 있고. 그런 사업들이 아직 안착되지 못한 면이 있는 것 같다. 한독협 조직도 그렇고. 월급 줄 때마다 돈 없는 문제도 있고. 십년 됐으면 이제 이런 문제들은 극복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기존 사업은 어떻게 안정화 시킬지, 한 편의 영화가 나왔을 때 어떻게 대우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정책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음, 하던 일이나 잘해라(웃음)


 

*2008-11-04 오후 3:28:57    컬처뉴스 김나라 기자, 필름온 안효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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