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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21 칠레, 두 개의 9.11
  2. 2008.10.15 세계의 눈이 된 라틴아메리카 미술가들 - ‘20세기 라틴아메리카 거장전’을 보고
2009.02.21 13:30

칠레, 두 개의 9.11

[남미액션투어 ①]칠레_산티아고
                                                                                      김강 _ 프로젝트 스페이스<LAB39> 디렉터
역사는 미국의 9.11과 함께 73년 칠레의 9.11을 아프게 기억한다. 폭격받고 있는 라 모네다궁.
▲ 역사는 미국의 9.11과 함께 73년 칠레의 9.11을 아프게 기억한다. 폭격받고 있는 라 모네다궁.

<남미액션투어_A.G.I.S 프로젝트>는 남미와 한국의 동시대성을 액션(Action), 장소성(Geography), 기록*정보(information)의 체험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네트워크 시스템(System)을 제안하고자 기획되었다.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국 예술가 7인은 2008년 10월 31일 ~ 12월 6일까지 약 37일 간 칠레, 아르헨티나, 우르과이, 브라질 등 남미 4개국을 방문했다. 워크샵, 예술이벤트, 만남, 대화, 기록,  이동 등이 포함된 본 프로젝트는 한국과 남미의 기획자 5인의 협업으로 진행되었다. 남미액션투어의 기억을 다시 잡아내 그 단편을 현재에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이는 본 프로젝트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10월 31일 저녁 7시 30분 서울을 출발한 비행기는 홍콩, 요하네스버그를 거쳐 브라질의 상파울로에 도착했다. 서울을 출발한지 2박 3일 약 27시간 만에 등을 바닥에 대고 누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다음날 새벽 5시에 일어나 칠레 산티아고 행 비행기를 타야 한다.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는 <제2회 국제 퍼포먼스 비엔날레-DEFORMS>이 처음으로 열리는 도시가 산티아고이기 때문이다.

11월 2일 오전 11시 35분 산티아고 공항에 도착했다. 2명의 젊은 예술가가 우리를 맞는다. 마중 나온 그들의 얼굴을 알지 못하기에 출국장을 빠져나오기 전에 살짝 긴장했던 것이 무색했다. 그도 그럴것이 7명의 예술가와 한명의 어린이, 한명의 할머니 총 9명의 동양인1>이 부대를 이룬 그룹은 그 공항 어디에도 우리밖에 없었다. 이는 남미를 이동하는 내내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받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모여 있는 우리 그 자체가 특별한 액션을 취하지 않아도 ‘표식’이 되는 사회. 그 사회에 우리가 이제 막 발을 들여 놓은 것이다.

공항을 나서자 눈이 부신 날(生)것의 산티아고 태양빛이 ‘남미’의 색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공항을 나서자 눈이 부신 날(生)것의 산티아고 태양빛이 ‘남미’의 색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서울은 늦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었으나, 우리와 정확하게 1분 1초도 안 틀리고 12시간 차이인 이곳은 늦봄에서 여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남미의 태양은 남미의 색을 만들어 내었듯이 북반구 한국의 태양은 한국의 색을 만들어 내었을 것이다. 얼핏 오방색이 떠올랐으나 그 오방색은 현재의 ‘우리’와는 너무 멀어보였다. 그러나 남미의 색은 도시 곳곳에서 현재형으로 현현되고 있었다. 2대의 승용차에 짐을 나누어 싣고, 우리는 구겨지고 포개져서 숙소로 이동했다. 2년 만에 다시 보는 산티아고는 그다지 변화된 풍경을 보여주지 않았다. 단지 한국산 자동차가 2년 전에 비해 도로를 많이 질주한다는 것 외에는... 2004년 4월 1일 발효된 한칠레 FTA의 구체적인 현장은 한국에서는 칠레 포도주로, 칠레에서는 한국의 자동차로 그 현실을 증명하고 있다.

마치 자코메티의 조각상처럼 좁고 길게 생긴 나라, 칠레. 대서양을 면한 해안선 길이가 6,435Km에 이르는 칠레는 300년 이상 스페인 지배를 받다가 1810년 자치정부를 수립하고, 1812년 칠레 독립을 선포하였다. 300년 이상 스페인의 지배를 받아서 인지 칠레 인민들은 백인계가 약 95%를 이룬다. 칠레에 대한 한국의 다큐 등에서는 마푸체 족 등 인디오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사실상 칠레는 백인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인과 인디오의 혼혈을 일컫는 메스티조가 66%, 스페인계 25%, 기타 유럽계 4%, 마푸체 족 등 5%의 인디오로 인종이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흔히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을 인디언, 혹은 인디오로 부르는데, 이는 처음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들여놓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로 착각해서 그곳의 원주민들을 인디오(Indio:에스파냐어로 인도인이라는 뜻)로 지칭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인디오’들이 사실은 ‘인도인’이 아니라 ‘아메리카 원주민’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나서도, 그들을 ‘아메리카 인디오’, ‘인디오’ 로 부르는 것은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식민화하기 쉬운 대상, 즉 타자화하기 쉬운 대상으로 그들을 지칭하던 관습이 굳어져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의 통칭인 ‘인디오’는 제국의 역사와 함께 현재까지 존속한다.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는 동쪽으로는 안데스 산맥이 웅장하게 달리고, 도심에는 마포초(Rio Mapocho)강이 흐른다. 대도시의 강치고는 물살이 빠른 마포초 강은 피노체트의 군사 쿠테타 이후 몇 개월 동안 쿠테타 군인들의 야간 습격에 의해 살해된 소외된 계층 사람들의 처참한 시체가 둥둥 떠내려가던 강이었다. 마포초강은 이제 그 역사를 빠르게 잊고 싶은 듯 유속이 급하기만 하다. 

카사크로마 _ Drawing by 정정엽


젊은 예술가들의 아지트 _ 카사크로마


우리가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카사크로마(CASACROMA)라는 복합예술공간이다. 일주일동안 우리가 머무르게 될 카사크로마는 산티아고의 다장르 젊은 예술가들 9명이 공동으로 임대하여 작업실로도 사용하고, 전시, 콘서트 등의 예술이벤트등도 하는 일종의 복합 공간이다. 카사크로마는 2008년 <제2회 국제 퍼포먼스 비엔날레DEFORMS>를 준비하는 팀들이 우리에게 제공한 숙소이다. 행사 준비팀이 우리에게 호텔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뿌리치고,
조금은 불편할 듯도 한 이 공간을 선택했다. 우리가 낯선 지역의 삶의 모습을 잘 알기 위해서는 그곳을 ‘구경’하기보다는 짧은 시간이나마 그곳에서 ‘사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급히 공수해 온 것으로 보이는 매트리스와 침낭이 가지런하게 놓여있다. 국적,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 집에서 우리는 한시적인 공동체를 이루며 지낼 것이다. 다음날 태국 작가 바싼 씨티켓(Vasa Shittiket)이 이곳에 도착했다. 뜨거운 태양아래 포도주와 맥주, 바비큐로 시작된 환영 파티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한낮의 남미, 바비큐는 익어가고 비엔날레 참여 작가들이 파티를 위해 카사크로마로 모여든다.

도시와 몸 _ 국제퍼포먼스 비엔날레 2008

<국제퍼포먼스비엔날레 _ DEFORMS>는 2006년 처음으로 칠레에서 개최된 이래, 2008년에는 아르헨티나, 우르과이와 네트워크 행사로 기획되었다. 이 비엔날레는 20개국 200명의 예술가가 참여하는 국제 행사로써, ‘도시와 몸’이라는 주제로 전시회, 라이브 퍼포먼스, 워크샵, 컨퍼런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1월 4일 이 행사의 오프닝이 칠레 산티아고 도서관의 전시장에서 진행되었다. 이쯤에서 밝혀두어야 할 것이 있다. 우리 일행이 <남미액션투어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남미를 37일간이나 누빌 수 있었던 것은 공식적으로는 이 행사의 참여이다. 이 행사의 참여를 위해 국제교류재단, 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이 먼 나라에, 이 많은 숫자의 한국인이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이곳에 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즉 남미액션투어는 퍼포먼스비엔날레 행사참여를 위해 국가로부터 기초 경비를 지원받아 그 내용을 자체적으로 구성한 좀 복잡한 성격의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제2회 국제 퍼포먼스 비엔날레 포스터


 
탱크와 폭격기를 기억하는 라 모네다 궁(La Moneda)

다음날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라 모네다’ 궁으로 향했다. 옆으로 누운 직사각형의 형태를 지닌 라모네다궁의 1층 정원과 지하 문화센터(Centro Cultural Palacio de la Moneda)는 일반인들에게 자유롭게 개방되어 있다. 문화센터에는 남미의 전통 문화 전시실, 현대미술전시실과 영화관 등이 있다. 커다란 로비에서는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개최된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영정이 설치된 참배단이 눈에 띄었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를 기리는 참배단. 아마도 우리가 방문했을 때가
이들을 기념하는 무슨 날이었던가 싶다. 2006년에 왔을때는 보지 못했다.

대통령 궁 지하의 문화센터 로비에 작품이 설치된 모습

지금은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이곳은 1973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가 쿠테타 군에 의해 죽음을 맞은 곳이다. 세계 최초로 민주선거를 통해 집권한 사회주의 정당 인민연합의 대통령 아옌데. 토지개혁 및 구리광산의 국유화 등 분배위주의 사회주의 개혁정책은 미국을 등에 업은 자본가들과 우파정치인들, 정치군인들의 쿠데타에 의해 좌절되었다. 피노체트(Augusto Pinochet)를 필두로 한 쿠데타 군은 1973년 9월 11일 대통령 궁을 탱크로 둘러싸고 공군 폭격기는 폭격을 시작했다. 산티아고 시내 한복판, 대통령 궁의 폭격을 시작으로 칠레에서의 살육은 시작되었다. 피노체트는 라모네다 궁을 접수한 지 일주일 만에 약 3만 여명을 학살하였으며, 사회주의자들, 동조자들, 진보 진영 인사들과 정치적 반대자들을 체육관에 몰아넣고 집단 처형한다. 지난 73년부터 89년 까지 약 17년간의 군사통치기간 중 사망자 3천여명, 실종 1천여명, 고문 불구자 10만명, 국외 추방자들이 100만 여명에 이르렀다.


두 개의 9.11

우리는 2001년의 미국의 9.11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칠레 군부와 손잡고 민중의 대표자를 살해했던 73년의 9.11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나 역시도 2006년 칠레에 가기 전까지는 그 사실에 대해서 무지했었다. 칠레로 가기 위한 준비과정에서 칠레의 역사와 마주할 수 있었다.

나와 김윤환은 28년의 시간차가 있는 두 개의 9.11과 역사인식의 문제를 몸으로 말하고 싶었다. 쓰여진 역사는 승리한 사람들의 역사일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는 시와 노래로 쓰여진다. 2006년 비엔날레 기간 내내 참여 작가나 칠레 친구들에게 면봉으로 귀를 파고, 우리에게 달라고 했다. 모두들 영문을 몰라 했지만 재밌는 게 벌어지나 보다 하면서 적극적으로 귀를 파고, 그 면봉을 우리에게 모아 주었다. 한 무더기 모아진 면봉은 칠레국립현대미술관 로비에서 두 개의 9.11로 상징화되었다. 50호짜리 캔버스에 굵은 9.11과 얇은 9.11이 부착되는 동안, 민중의 자유를 노래했다는 이유로 손목이 잘려 죽은 칠레 가수 빅토르 하라(Victor Lidio Jara Martinez)의 노래가 작은 소리로 흘러나왔다. 그 노래가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해, 바닥, 땅, 기둥, 벽, 관객들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댔다. 두 개의 9.11이 다 만들어 지고 나자, 나와 김윤환은 <민중은 죽지 않는다. 사라지지도 않는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미술관을 나와 거리로 나갔다. 함께 거리로 나온 관중들은 산티아고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2006년 칠레 국립 미술관에서의 벌인 두 개의 911 퍼포먼스 

두 개의 911. 미술과의 바닥, 관객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댄다. 남미의 소리를 듣기 위해. 

현재 라모네다 궁 앞에는 아옌데의 동상이 서있다. 폭격이 시작되기 전 망명을 받아주겠다던 미국과 피노체트의 제안을 뿌리치고 끝까지 총을 들고 궁에서 싸웠던 아옌데. 1973년 9월 11일 쿠테타 군에게 궁이 포위당한 상태에서 칠레인들에게 라디오 생방송으로 전한 그의 생애 마지막 연설 중의 일부가 그 동상에 새겨져 있다.

조국의 노동자들, 나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을 믿습니다.
반역자들이 승리하려는 이 암울하고 참담한 순간에서 결국은 또 다른 사람들은 떨치고 일어날 것입니다. 전진하십시오. 머지 않아 넓은 대로들이 다시 뚫리고 자유인들이 더 나은 사회의 건설을 위해 그 대로 위를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2>

겨우 찾은 자유와 정의가 물거품이 되어가는 순간에 누군가가 이 아픈 기억을 이겨내고 우리가 꿈꿨던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아옌데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다. 

라모네다 궁 뒤편에 자리한 아옌데 동상. 동상 뒤편에 그의 마지막 연설이 새겨져 있다.

연설하는 생전의 아옌데.


어른들도 ‘만들기’ 하는 산티아고 도서관

퍼포먼스 행사의 오프닝은 산티아고 시립 도서관에서 열렸다. 산티아고 중앙역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도서관은 국립현대미술관(MAC)과 대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현대식 건물의 도서관은 일반적 도서관의 기능 이외에도, 현대 미술전시장 및 어린이 도서관 등이 함께 있다. 카페가 위치한 지하층의 열린 광장에서는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와 같은 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한 반 전체가 도서관으로 견학 및 소풍을 온 것 같았다. 나는 곱단이를 데리고 어린이 도서관에 들어가 보았다. 마치 책이 있는 놀이터와 같은 인상이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는 ‘만들기’ 어린이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었다. 나는 우리도 참여할 수 있는 지 문의를 했고, 진행요원들이 흔쾌히 재료들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런데, 재료를 2벌 주는 것이었다. 나와 곱단이가 각각 자신의 ‘만들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미 만들기를 하고 있는 어른들은 아이들 곁에서 자신의 ‘작품’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어른들은 아이의 작업을 도와주는 보조자가 아니라 자신의 창조성을 발현하는 ‘창작자’가 된다. 즉 아이는 아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자신의 창조성을 끄집어 내어 무언가를 만들면서 그 창조적 작업의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다. 나는 이 프로그램에 곱단이와 할머니를 참여시키고, 비엔날레오프닝 준비를 했다. 산티아고 도서관의 어린이 프로그램은 참여한 곱단이와 우리 엄마에게도 특별한 경험이겠지만, 비엔날레 일을 해야 하는 나에게도 유익한 프로그램이 되었다.

도서관내의 어린이 프로그램. 어른들도 아이들을 돕기 보다 자신의 ‘만들기’를 하느라고 분주하다.

칠레 어린이와 어른들사이에서 만들기를 하고 있는 필자의 딸 곱단이. 말도 안통하는 곳에서
약간 어벙해 했지만, ‘만들기’ 수업은 언어 소통 없이도 얼마든지 소통 가능!


붉은 포도주와 쪽!쪽!쪽! 

빅토 휴고 브라보(Victor Hugo Bravo)가 큐레이팅한 남미 작가들의 미술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전시장에서 오프닝 퍼포먼스가 열렸다. 오프닝 파티는 정정엽 작가의 아는 분이 협찬한 포도주로 시작되었다. 붉은 포도주 한잔씩 받아든 작가 관객등 약 500여명은 약간의 들뜬 감정으로 비엔날레의 첫시작을 지켜보았다. 비엔날레 오프닝 이후 매일 저녁 7시부터 11시까지 산티아고의 곳곳에서 퍼포먼스가 벌어졌다. 한국 작가들은 라모네다 궁 뒤편에 위치한 신문사 <Diario de Nacion> 의 내부 공간과 라모네다 궁 뒤쪽 마당에서 퍼포먼스를 하였다.

초여름의 초목이 신선한 공원의 곳곳에서 칠레의 젊은이들은 쪽!쪽!쪽! 하기에 바쁘다. 남미 사람들이라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태국작가 바싼은 비판적 시각이다. 유교사상이 내면에 깔려있는 동양에서 온 우리에게 이런 풍경은 낯뜨거운 것이라서 그런가 싶었는데, 바싼은 칠레의 젊은이들이 육체적 행위의 자유를 영위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의 성취로 착각할수도 있기 때문에 비판한다고 말한다. 일견 그 비판이 타당해 보였지만, 대로변에서 키스하는 남녀의 모습이 부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50세가 훌쩍 넘은 바싼의 질투심은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칠레는 한국과의 거리만큼이나 인종도, 문화도 많이 먼 듯이 느껴졌다. 그러나 식민지와 독재의 경험, 폭압과 그에 대한 저항의 시간들은 우리와 닮아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전세계를 뒤덮고 있는 현재 메트로폴리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유니폼화 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요즘 한국도 거리에서 쪽!쪽!쪽! 하는 커플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그들이 부디 오픈된 공간에서의 사랑의 행위만을 자유로 느끼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정면에서 바라본 대통령 궁. 많지 않은 경찰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고, 잔디와 낮은 분수가 있다.

산티아고의 제일 큰 대로인 오이긴스 거리 한 복판에 위치한 라모네다 대통령궁. 1973년
쿠데타군에 의한 폭격을 목격했을 칠레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옌데는 이 궁안에서
마지막 연설을 하고 죽음을 맞는다.

면봉으로 귀를 파고 있는 관객(싱가폴 예술가 LEE WEN)

두 개의 911 조형 작업을 마치고, 비엔날레 기획자에게 전달했다. 남은 면봉을 다시 입에 물고
우리는 거리로 나섰다. <민중은 죽지 않는다. 사라지지도 않는다> 

제2회 퍼포먼스 비엔날레 오프닝 장면 이날 이후 이 행사는 18일 간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산티아고 지하철역의 대부분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벽화의 내용은 주로 남미의 역사와
현재의 모습들이다. 벽화의 형식도 페인팅에서 설치까지, 고전적인 방식에서 현대적인
방식까지 다양하다. 

지하철 역내 벽화들 상당한 수준의 벽화들을 일상적인 공간에서 만날 수 있다.

쪽 쪽 쪽 정정엽의 드로잉

남미의 햇살이 그대로 느껴지는 산티아고의 주택가 풍경

까사크로라마 젊은 작가들과 함께
산티아고 시내의 빅토르 하라 공연장. 그의 노래와 죽음을 기억하는 칠레인들은 피노체트가
물러나고 난 후 그를 기리는 공연장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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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1> 본 프로젝트는 김강, 김윤환, 정정엽, 이호석, 손민아, 박지원, 백미라가 예술가로 참여했다. 김강, 김윤환의 자녀 김하(곱단이)와 김하의 할머니가 손녀를 돌보기 위해 함께 남미길에 올랐다.

2> 동상에 새겨진 원문은 < 전진하십시오. 머지 않아 넓은 대로들이 다시 뚫리고 자유인들이 더 나은 사회의 건설을 위해 그 대로 위를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 Mucho Mas temprano que tarde, de nuevo se abriran las grandes alamedas por donde pase el hombre libre para construir una sociedad mejor.>만 새겨져 있다. 스페인어 번역을 위해 마드리드에 사는 장경애씨에게 부탁을 드렸더니 장경애씨는 아옌데의 연설문의 한 문단을 번역해서 보내주었다. 앞의 문장을 모른 상태에서 뒷 문장 하나만을 가지고는 아옌데의 마음을 알기 어려울 것이기에 문단 전체를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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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5 17:36

세계의 눈이 된 라틴아메리카 미술가들 - ‘20세기 라틴아메리카 거장전’을 보고

페르난도 보테로(콜롬비아), 시인,캔버스에 유채, 1968, 114.6x96.5cm
▲ 페르난도 보테로(콜롬비아), 시인,캔버스에 유채, 1968, 114.6x96.5cm

초현실주의 운동의 주창자 앙드레 브르통이 멕시코에 왔을 때의 이야기다. 브르통은 자신이 펼치는 초현실주의 운동의 잠재적 동지들(프리다 깔로에서 레온 트로츠키까지)을 만나러 멕시코에 왔다가 어느 술집에서 왁자지껄 잔치를 벌이고 있는 한 무리의 멕시코 농민들을 목격했다.
 

세상에서 가장 초현실주의적인 국가

 
술집에서 농부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친형제들처럼 소리 높여 웃고 떠들고 건배를 외치며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금세 세상에 둘도 없는 철천지 원수들처럼 서로 치고 박고 드잡이질을 벌였고 그 와중에 한 치가 맥없이 축 늘어져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한 친구가 죽게 되자 농부들은 언제 다투기라도 했냐는 듯이 동작을 멈추고 상부상조의 품앗이 정신을 발휘해 숨이 멎은 동료의 사지를 사이좋게 나눠들고 술집 밖으로 일제히 나가더니 세상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장례식을 마치고 가장 빠른 속도로 삶의 원기를 회복한 사람들이라도 된 양 선술집으로 다시 돌아와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시끌벅적한 파티를 계속 이어갔다.
 
그 일에 깊은 인상을 받은 브르통은 훗날 자신이 기초한 초현실주의 이론의 민족적 기반을 발견했다고 소리쳤다. “멕시코는 세상에서 가장 초현실주의적인 국가다”
 

프리다 칼로, 코요아칸의 프리다, ca.1927, 종이에 수채화, 16x21cm




브르통, 프리다, 마르께스
 
한편 브르통이 잠재적 동지라고 굳게 믿었던 화가 프리다 깔로가 ‘초현실주의자’라는 이름을 거부했을 때 그는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브르통이 ‘세상에서 빠른 장례식’과 같은 사건들에 아주 익숙한 프리다에게 동지애를 과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프리다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당신 그림도 그 장례식만큼이나 초현실적이야”
 
나는 초현실주의 이론가 브르통과 초현실주의적 삶을 영위하고 있는 멕시코농민들 사이의 국적과 계급을 뛰어넘는 ‘초현실주의적 연대’에 대한 이야기를 멕시코에 체류하고 있을 때 어느 멕시코 시인에게서 들었다.
 
환상도 삶의 명백한 일부라는 것을 알려준 초현실주의 운동 이후에 태어난 우리가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허구인지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다만 여기서 프리다 깔로가 왜 초현실주의자라는 브르통의 견해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는 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두 관점의 차이는 사실은 술집의 멕시코 농민과 이방인의 거리, ,멕시코 화가와 유럽 평론가의 거리 즉 라틴아메리카와 유럽의 거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라틴아메리카는 늘 외부의 눈에 의해 규정되고 정의되었다. 그것이 가르시아 마르께스가 걸작 [백년의 고독]에서 다루고자 했던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이라는 테마였다. 남의 눈으로 자기를 들여다보기 때문에 더욱 자유롭지 못하고 더욱 고독하게 되는 것이라고 마르께스는 주장했다.

프리다는 보이지 않는 자신의 고통과 환상을 보이게 만들었다. 유럽의 호사가들은 그 그림을 초현실주의적이라며 환호했다. 프리다가 자신의 고통과 환상이 초현실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과연 수용할 수 있었을까. 마르께스는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삶을 실제로 지배하거나 지배하려드는 비가시적인 것들을 소설 속에 등장시켰다. 외부인들은 그를 마술적 리얼리스트라 부르며 환장했다. 마르께스 자신이 중남미 민중의 실상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들이 이방인의 눈에는 환상적이고 마술적이라니. 그래서 마르께스는 한사코 마술적인 것은 자신의 소설이 아니라 중남미의 현실 그 자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프란시스코 나르바에스, 원주민 여인, ca.1937, 캔버스에 유채, 53.4x43.7cm



라틴아메리카의 눈
 
덕수궁 미술관의 ‘20세기 라틴아메리카 거장전’에 갔다가 ‘브르통과 멕시코 농부’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린 것은 유럽산 이념으로 중남미 현실을 들여다보는 것만큼이나 유럽산 미학으로 라틴아메리카 예술을 규정하는 것이 함정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기위해서였다. 게다가 20세기 내내 라틴아메리카 예술가들은 그런 시각에 맞서 싸워왔기 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 예술가들이 자신의 눈을 찾아야 한다고 자각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이베리아 반도의 식민주의자들이 대륙을 정복하고 통치하던 300여 년 동안 이 대륙의 예술가들은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눈을 갖고 있었다. 19세기 벽두 이 대륙에 독립전쟁의 불길이 타올라 새로운 지배계급(식민지에서 태어난 유럽인의 후손들)이 탄생했지만 그들은 당시 선진국으로 이름 높았던 프랑스와 영국의 눈을 선망했다.
 
이 대륙의 예술가들이 스스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고유한 눈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1910년 멕시코에서 전직이 사탕수수 농부와 산적이었던 두 명의 사령관들이 농민과 노동자를 무장시켜 혁명을 성공시키면서였다. 멕시코 혁명은 라틴아메리카 예술가들에게 사회혁명에 대한 강렬한 연대의식을 불러일으켰고 혁명의 미학적 성취였던 벽화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디에고 리베라, 피놀레 파는 여인, 1924, 캔버스에 납화, 81.5 x 60.5 cm

 

‘20세기 라틴아메리카 거장전’에 초대된 작품들의 생산연대는 1920~1970년대로서 멕시코 혁명이 고양시킨 민족의식(라틴아메리카적 정체성)이 도처에서 발흥하던 격정의 시대였으며 경제적으론 지금도 그 시절을 흉내 낼 수조차 없을 속도로 성장하던 시대이기도 했다. 예술가들도 뭇 선언들을 쏟아내어 그룹을 결성하고 기념비적인 작품을 생산해내던 시대였다.
 

벽화운동의 메아리
 
지난 2002년, 그러니까 21세기 초에 나는 멕시코 동남부의 한 원주민 마을에서 약 100년 전에 발흥한 벽화운동의 유산을 보았다.
 
지금은 뉴욕 월가에서 묵직한 굉음을 내고 신자유주의란 놈이 비실비실 쓰러지고 있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그 놈은 유령처럼 라틴아메리카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때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은 원주민들에게서 토지를 빼앗고 공동체를 파괴하면 더 이상 멕시코에 살 수 없으니 미국에서 살 수 밖에 없을 것을 예언하며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사빠띠스따들의 예언은 너무도 적중한 나머지 사빠띠스따 게릴라 출신 원주민조차도 먹고 살기 위해 무기를 놓고 리오 그란데 강을 건너 미국을 향하게 만들었지만.
 
내가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의 사령부 마을에 방문했을 때였다. 원주민들이 손수 나무로 엮어 만든 강당 외벽에서 스키마스크를 쓴 채 기관총을 어깨에 메고 오버헤드킥을 하는 게릴라 전사의 벽화를 보았다. 그 벽화 아래엔 “축구로 해방을 향하여!”라는 자못 선동적인 구호가 적혀 있었다. 신자유주의가 마야족 원주민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아 가긴 했지만 축구공과 벽화는 끝내 빼앗지 못한 것이 확실했다.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죽음과 부활, ca.1943, 메조나이트에 템페라, 96.8x122cm



라틴아메리카인처럼
 
2000년부터 6년 6개월 동안 멕시코시티에 체류하면서 라틴아메리카 10개국을 방문했지만 ‘20세기 라틴아메리카 거장전’에 전시된 작품 가운데 4분의 1도 현지에서 직접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는 페루의 오일장에서 ‘옥수수 가루(삐놀레)를 파는 아낙’을 보았고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5월 1일 행진’을 진압하는 경찰들을 목도했으며 베네수엘라에선 차베스라 불리는 ‘선동정치가’가 연설하는 광경도 지켜보았다. 멕시코의 한 원주민 마을의 장례식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읊조리는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지금도 콜롬비아에 가면 ‘죽은 아이’를 들고 일어서는 대신에 아이들을 그저 넙죽 넙죽 받아먹기만 하는 대지의 신 빠차마마를 볼 수 있다.
 
주말에 멕시코시티 광장에 나가면 ‘산 안또니오 데 오리엔떼 풍경’의 스타일을 완전히 베낀 멕시코 무명화가들의 작품을 수없이 감상할 수 있으며 볼리비아의 고산 도시에서는 ‘원주민 여인’들이 코카 잎을 씹으며 아기를 들쳐 업듯이 짐을 들쳐 업고 하염없이 걷는 풍경과 만날 수 있다. 원주민과 흑인이 다수 거주하는 마을에 가면 으레 보게 될 민예품의 다채로운 무늬들이 열대지역의 ‘쾌적한 여름’ 아래 펼쳐져 있다.
 
‘초현실주의자’ 마리아 이스끼에르도의 ‘아담과 이브’를 멕시코 인들이 보았다면 자신의 집에 있을 민예품 ‘생명의 나무’를 떠올렸을 것이며, ‘구성주의자’ 호아낀 또레스 가르시아의 ‘구조’를 페루사람들이 봤다면 자신의 선조들 잉카인들이 쿠스코에 세운 건물의 아랫도리 구조가 생각난다고 말했을 것이다.

덕수궁에서 나는 마치 라틴아메리카 사람이라도 된 양 그림들을 감상하며 그 그림들에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들이 무엇인지 상상하는 즐거움에 흠뻑 빠졌다. 한국에 수년간 체류한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한 브라질 사람이 상파울루에서 열리는 ‘한국의 거장전’이라는 전시회에 들러 한국인이라도 된 것처럼 반가워하듯이.

물론 캔버스에 붓을 대기보다는 칼을 대는 것을 더욱 즐겨했던 ‘공간주의자’ 루시오 폰따나는 ‘캔버스’ 공간을 탐구하느라 너무 분주한 나머지 자신이 이탈리아에 있는지 아르헨티나에 있는지 별로 개의치 않았고 나조차 그의 작품이 어디에서 제작되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호아킨 토르레스-가르시아, 구조, 1935, 판지에 유채, 52.8x43cm
 

 
루시오와 백남준
 
루시오와 관련해서는 한 지인의 인상평을 소개하고 싶다. 그는 덕수궁 전시회를 둘러본 뒤 라틴아메리카 현대 작가들의 경우는 서양 미술의 아류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혹은 멕시코시티에서 ‘아시아 거장전’이 열리고 그곳에 백남준의 작품이 몇 점 초대되어 전시되었다고 상상해보자. 그 전시회를 관람한 라틴아메리카 사람 하나가 백남준의 작품을 감상한 뒤에 아시아의 현대 비디오 아트는 서양 예술의 아류라고 혹평한다면?
 
루시오가 이탈리아인(유럽인)일 때 그는 서양미술의 선두주자가 되고 세계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작가가 되지만 루시오가 아르헨티나 사람(라틴아메리카인)일 때 그는 서양예술의 아류가 된다. 백남준이 미국인일 때 그는 현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가 되어 세계미술사에 획기적인 족적을 남긴 이가 되지만 백남준이 한국인일 때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라틴아메리카 사람에겐 한갓 서양 미술의 아류로 둔갑하듯이.
 
여기서 우리는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문제로 돌아가 보자. 나는 라틴아메리카 예술가들이 자기의 고유한 눈(그것이 세상을 보는 눈이든 캔버스를 보는 눈이든)을 갖기 위해 노력했다고 지적했다. 이제 거기에 한 가지 사실을 더 추가해야겠다. 중남미 예술가들의 눈을 통해 대륙 바깥의 많은 이들이 라틴아메리카를 들여다보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들 스스로를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점을 말해야겠다.
 
멕시코 벽화운동이 한국 민중미술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중남미 예술가들의 눈은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세계와 자기 자신을 보는 눈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래서 이들은 라틴아메리카의 거장이면서 한국인들이 존경하는 예술가들이기도 하다. 즉 진정한 세계적인 거장들이라 할 만하다. 디에고 리베라, 프리다 깔로, 루피노 따마요, 위프레도 람, 페르난도 보떼로, 루시오 폰따나.......

 


박정훈 - 1972년 출생. 2000년 5월에서 2007년 8월까지 멕시코시티에 머물며 한국에서 유일한 라틴아메리카 전문 르포 기자로 활동하면서 라틴아메리카 10개국을 방문하고 《한겨레21》,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한국판), 〈오마이뉴스〉, 〈프레시안〉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 기고하였다.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이 멕시코시티를 방문했을 때 세 명의 원주민 사령관을 특종 인터뷰했으며, 브라질의 룰라 정부의 탄생 소식을 상파울루 현지에서 타전하였고,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정치적 우여곡절을 겪을 때마다 카라카스 현지를 방문해 취재하였다. 옮긴 책으로 《마르코스》, 《게릴라의 전설을 넘어》(책임번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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