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만화'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9.02.13 ‘가로’와 데즈카 오사무
  2. 2009.01.28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작가와 작품들
  3. 2008.12.30 북미권 대안만화의 흐름과 현재
  4. 2008.10.08 오늘, ‘대안만화(alternative comics)'를 말한다 - [대안만화를 말한다 - ⓛ]왜 대안만화인가 (2)
2009.02.13 16:48

‘가로’와 데즈카 오사무

작가의 개성을 존중하며 자유로운 창작을 발표하는 지면으로 일본 만화업계에 자극과 충격을 던져주었던 대안만화잡지[가로]. 표지는 시라토 산페이의 [카무이전]
▲ 작가의 개성을 존중하며 자유로운 창작을 발표하는 지면으로 일본 만화업계에 자극과 충격을 던져주었던 대안만화잡지[가로]. 표지는 시라토 산페이의 [카무이전]

일본의 출판만화업계는 세계적인 기준으로도 이례적일 정도로 방대한 규모와 역사를 지니고 있고, 그만큼 내부에 존재해 온 다양한 움직임과 계층적 양상을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일찍이 90년대부터 일본만화 최다 수입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실 한국에 일반적으로 퍼진 일본만화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소년점프를 비롯한 소년, 청년, 소녀 만화잡지의 작품으로 대표되는 주류 상업만화에 머무른다. (물론 최근 몇 년간 비주류 출판사의 작품이나, 설사 주류 상업지에 게재되었더라도 주류 색채에서 벗어난 작품이 두루 출간되면서 일본만화에 대한 이해와 정의의 폭을 한층 넓히고 있다.) 지나치게 울창하고 광대한 숲, 화려한 외피에 가려서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내부의 수많은 움직임과 역사를 간과하기 쉬운 일본만화의 메카니즘을 논할 때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 축이 있다. 바로 주류에서 벗어난, 혹은 주류와는 다른 시도를 하려고 했던 수많은 ‘대안’만화의 존재다. 지금의 일본만화는 다양한 대안만화와의 교류와 소통과 흡수로 이루어진 유기체인 것이다.

일본만화의 역사는 시초부터 치열한 정반합의 장이었다. 일본 근대만화의 출발점은 신문의 사회풍자 카툰이나 아동잡지의 짤막한 개그만화였으나,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비약적인 발전을 보인다. 바로 스토리만화의 등장으로,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은 현재까지도 일본 대중문화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였다. 1947년 출간된 데즈카의 [신 보물섬(新宝島)]은 약 200페이지 분량에 달하는 완결된 스토리의 만화로 전국적으로 추정 40만~80만권이 팔려나갔다. 문학으로 치자면 짤막한 기사나 수필만 존재하던 와중에 혜성처럼 중편 소설이 등장한 셈이다. 그리고 이 혁명적인 사건을 가능케 한 것은 만화란 신문이나 아동잡지의 한정된 지면만을 채우는 매체라는 생각을 가진 도쿄의 주류 출판사가 아니라, 저렴한 읽을거리를 조악한 종이와 인쇄술로 대량 찍어내고 있던 오사카의 아카혼(赤本) 출판사들이었다. 아카혼은 ‘붉은 책’을 의미하며 표지에 자주 사용된 붉은 계통의 색채, 주로 어린이용 읽을거리였다는 점과 가격의 저렴함으로 인한 저속하다는 인식 때문에 그렇게 불리었다. 대안적 지면으로써의 아카혼은 이후 극화(劇画)라는 또 다른 중대한 만화사적 움직임의 기반을 제공하게 된다.

만화의 상업성에 주목한 도쿄의 출판사들은 아동잡지에 만화 지면을 늘리거나 아예 만화전문 잡지를 창간하면서 데즈카를 비롯한 아카혼 만화가들을 중앙으로 끌어들인다. 가쿠도샤(学童社)의 [만화소년(漫画少年)], 코우분샤(光文社)의 [소년(少年)], 후에 100만부 신화의 [소년점프]로 통합되는 슈에이샤(集英社)의 [오모시로북(おもしろブック: 재미난 책)], 아키타 쇼텐(秋田書店)의 [모험왕(冒険王)] 등이 40년대 말부터 6.25전쟁 특수에 힘입은 경제성장을 이룬 50년대를 풍미한 아동잡지, 만화잡지들이었다. 이 시기에 데즈카는 [만화소년]에 <정글대제(ジャングル大帝)>와 <불새(火の鳥)>, [소년]에는 <철완 아톰(鉄腕アトム)> 등 인기작을 연재하며 그의 둥글고 귀여운 그림체와 SF, 서부극, 시대극, 동화 등 서구 장르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소재와 장대한 서사적 구조로 당시 만화의 주류를 대표하는 위치로 부상하며 만화계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타츠미 요시히로 [불쌍한 몽키]

시사만화와 아동용 개그만화가 주류였던 초기 만화계에, 지방 출신으로 오사카의 아카혼 출판사를 통해 대두한 데즈카가 도쿄의 주류출판사에 편입되면서 새로운 ‘주류=정(正)’이 되었다고 하면, 그에 대항하는 ‘반(反)’ 역시 아카혼에서 비롯된다. 바로 극화(劇画) 움직임이다. 대본소(貸本屋: 저렴한 금액을 지불하고 책을 열람, 대여할 수 있는 가게) 중심으로 유통된 아카혼 만화를 그리던 이 젊은 작가들은 데즈카 오사무의 아동만화가 대표하던 만화(漫画)라는 단어에 대항해 자신들의 작품을 ‘만화’가 아닌 ‘극화’라고 칭했다. 이는 ‘코믹스’가 지닌 유치한 아동용 매체라는 사회적 인식을 탈피하기 위해 ‘그래픽 노블’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북미 만화계의 경우와도 유사하다. 극화는 아동만화의 둥글고 단순화된 선과는 극렬히 대비되는 날선 그림체와 한층 사실적인 묘사, 강도 높은 성과 폭력의 표현 등 비주얼적인 측면에서부터 상극에 있었다. 내용적으로도 시대극, 범죄, 사회비판 등 성인지향의 주제로 아동만화와는 명백히 다른 연령대와 계층의 독자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1956년 출간된 <카게(影)>, 1957년 출간된 <마치(街)>는 다양한 극화를 게재한 극화 단편모음집으로 대본소를 중심으로 유통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아카혼과 극화가 남긴 만화사적 업적의 결정체는 1964년 나가이 카츠이치(長井勝一)가 창간한 월간 만화잡지 [가로(ガロ)]였다. [가로]는 애초에 인기 대본소 작가 시라토 산페이(白土 三平)의 장편 닌자만화 <카무이전(カムイ伝)>을 게재할 목적으로 창간되었으나, 대본소의 몰락에 따라 점차 활동 지면을 잃은 극화 작가들을 받아들이는 창구이자 개성적인 신인을 발굴하는 잡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닌자만화라는 오락적, 미학적 대중성을 갖춘 장르에 마르크스주의적 고찰과 비판의식을 가해 6-70년대 운동권 청년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만화를 진지한 평론의 대상으로 끌어올린 시라토 산페이, 경제성장기의 그늘에 가려진 이들의 일상화된 비참함을 충격적일만큼 담담하게 묘사한 타츠미 요시히로(辰巳ヨシヒロ), 기묘한 꿈과도 같은 의식의 풍경과 빈궁한 일상을 넘나드는 독특한 작품세계의 츠게 요시하루(つげ義春), 특유의 블랙유머와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요괴만화와 전쟁만화로 유명한 미즈키 시게루(水木しげる) 등이 초기 [가로]의 대표 작가들이었다.

주간 소년만화잡지 [소년 선데이(少年サンデー)], [소년 매거진(少年マガジン)]등의 주류 잡지가 극화를 편입하며 훨씬 더 많은 판매부수를 자랑했지만, 그럼에도 [가로]가 주류잡지에지지 않는 장점이 있었다면 바로 그 높은 자유도였다. 현재도 이어지는 주류 상업지 연재만화의 특징인 편집자와 작가의 공동제작에 가까운 밀착형 창작시스템이 [가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페이지 수의 제한도 없었고, 편집부의 간섭도 없었으며 독자인기투표를 괘념할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 허용되는 표현의 수위가 높았기에, 다른 잡지에서는 거부당한 만화가 [가로]의 지면을 통해 비로소 빛을 보는 경우도 있었다. [가로]는 1971년 <카무이전>의 연재 종료와 함께 판매부수가 급격히 떨어지고 80년대에는 원고료마저 지불할 수 없을 정도의 경영난에 시달리지만, 그럼에도 2002년까지 발행될 정도로 [가로]의 매력적인 지면에 게재되기를 원하는 작가는 많았다. 기성작가는 일반 상업지에서는 시도할 수 없는 실험의 장으로써, 신인은 권위 있는 등용문으로써 원고료 이외의 메리트를 추구했던 것이다. 현재도 일본에서는 비주류적 색채와 높은 작품성, 작가의 독자성이 돋보이는 만화를 ‘독립만화’나 ‘대안만화’라는 호칭보다는-실제 [가로] 게재 여부를 떠나서-‘가로계’라고 칭할 정도로 [가로]는 일본만화계에 있어 하나의 대명사적 존재가 되었다.

타카노 후미코 [막대가 하나]

또한 [가로]는 작가의 개성을 존중하며 자유로운 창작을 발표하는 지면으로 일본 만화업계에 자극과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 영향으로 창간된 잡지가 1967년도의 [COM]이었다. 데즈카 오사무의 애니메이션 회사였던 무시 프로덕션에서 발행한 [COM]은 데즈카의 초장편작 <불새> 연재와 함께 후지코 후지오(藤子不二雄), 이시모리 쇼타로(石森章太郎, 아카츠카 후지오(赤塚不二夫), 마츠모토 레이지(松本零士) 등의 인기 작가들이 본업인 주류 상업지에서는 게재할 수 없는 실험적인 작품을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이자, 개성적인 신인을 발굴하는 등용문으로써 이미 창간부터 [가로]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 잡지였다. [COM] 역시 60년대 운동권 청년들의 지지를 받으며 [가로]와는 다른 도회적인 색채로 차별화되었다. [COM]을 통해 데뷔한 작가들 중에는 소년만화가 아다치 미츠루(あだち充), 공포만화가 히노 히데시(日野日出志), 소녀만화가 다케미야 케이코(竹宮惠子) 등 판이하게 다른 장르에서 대중적 인기와 독자적 작품성 구축에 성공한 대가들이 돋보이는 만큼 [COM]이 얼마나 다양한 색채의 작품을 포용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73년 무시 프로덕션이 도산하며 [COM]은 폐간되지만, 1976년 아사히 소노라마(朝日ソノラマ)에서 창간한 [망가소년(マンガ少年)]이 [COM]의 연재작 및 작가를 상당수 이어가게 된다. 당시의 추세에 따라 SF 장르와 애니메이션 기사를 다수 기재하던 이 잡지의 간판작품은 데즈카의 <불새>와 다케미야 케이코의 SF대작 <지구로⋯>였으며, 신인작가의 배출에도 노력을 기울여 <아타고올은 고양이의 숲(アタゴオルは猫の森)>의 마스무라 히로시(ますむらひろし), <메이지 침술명의 텐진(てんじんさん)>의 키무라 나오미(木村直巳), <몽환신사(夢幻紳士)>의 타카하시 요우스케(高橋葉介) 등이 [망가소년]을 통해 데뷔했다. 이 밖에 70년대 말 창간된 마이너 경향의 만화잡지로 [JUNE], [망가 기상천외(マンガ奇想天外)], [DUO], [Peke], [만금초(漫金超)] 등이 강렬한 개성을 가진 신인작가들이 활동한 대안적 만화잡지로 꼽혔다. 이 중에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잡지는 여성향 남성동성애 장르인 ‘야오이’의 상업적 성공에 힘입은 [JUNE]이 유일하다. 또한 1980년대 청년만화의 변천은 [영매거진(ヤングマガジン)], [빅코믹(ビッグコミック)], [만화 액션(漫画アクション)]등 청년잡지의 지면에 유럽만화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두 작가 - 오토모 가츠히로(大友 克洋)의 혁신적인 SF만화와 다니구치 지로(谷口 ジロー)의 대중적 상업코드는 없으나 잔잔한 일상을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의 게재를 가능하게 하였다.

현재는 1986년 창간한 고단샤(講談社)의 [애프터눈(アフタヌーン)], 1995년 창간한 엔터브레인(エンターブレイン)의 [코믹빔(コミックビーム)]이 ‘자유로운 지면과 신인작가 양성’이라는 대안만화잡지로서 [가로]ㆍ[COM]과 유사한 철학을 계승하는 잡지로 발행되고 있다.

타카하시 요우스케 [몽환신사]

70년대 말-80년대에 등장한 ‘뉴웨이브’ 만화는, 기존의 격식화된 상업지 일본만화와는 확연히 차별되는 작화와 구도로 장르간의 경계를 흐리고 만화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은 대안적 만화로써의 의미를 가진다. 오토모 가츠히로, 아즈마 히데오(吾妻 ひでお), 타카노 후미코(高野 文子), 이시카와 준(いしかわ じゅん), 마스무라 히로시, 타카하시 요우스케 등이 대표적인 뉴웨이브 작가로 일컬어지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앞서 나열한 대안만화잡지, 혹은 기존 상업만화로부터의 변화와 탈피를 꾀하던 청년잡지의 지면을 통해 데뷔, 활동했다는 점이다. 또한 다양한 그림체를 구사하며 독특한 공간감과 호흡으로 젊은 부부의 일상부터 가지절임 한 조각을 둘러싼 철학적 SF까지 다양한 차원을 그려내는 타카노 후미코, 거대한 고양이와 인간이 당연한 듯이 공존하는 대륙의 이야기만을 줄기차게 그려온 마스무라 히로시, 탐미적이면서 잔혹하고도 블랙유머가 번뜩이는 세계를 붓으로 그리는 타카하시 요우스케 등 상호간의 공통점은커녕 어떤 장르에 분류해야 할 지도 애매한 작가들이 뉴웨이브의 특징으로, 그만큼 실험적이면서 다양한 지면의 중요성이 역설되는 케이스다.

설사 실험적 목적으로 창간된 잡지가 아닌 상업지라도, 정체된 청년극화를 개선하기 위해 여타 서브컬처 및 새로운 작풍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게재한 청년잡지나,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데즈카 등의 아카혼 작가들을 도쿄로 불러들인 초기 만화잡지와 극화 스타일을 전격적으로 도입한 주간 소년잡지의 경우처럼 적극적으로 대안의 상업적 가능성을 모색하고 포용해온 것도 일본 주류 상업지의 특징이자 성공 요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본 출판업계의 거품이 빠지고 잡지 수가 줄어들면서 아예 인터넷 무료배포 형식으로 돌린 고단샤의 [모닝투(モーニング2)]나 온라인 배포를 전제로 한 공모전 [MiChao!] 등 대안적 지면의 현장도 격변하고 있지만, 일본의 대안잡지, 대안만화의 역사가 제시하는 교훈은 매체를 초월하는 진리가 있다. 우선 초기 만화잡지와 소년잡지는 스토리만화면 스토리만화, 극화면 극화 등 그 때 그 때의 유행과 대세를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새로운 트렌드를 적극 도입, 상업적 가치를 분석해 판매하는 것을 통해 성공한 경우로 주목할 만하다.

두 번째는 인기작품의 지속적 게재다. <카무이전>의 완결로 큰 타격을 입은 [가로]의 판매량에서 보다시피 ‘히트상품’의 부재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 수 있다. [COM]처럼 단순히 인기 작가진에서 머무르지 않고 잡지-혹은 출판사-를 경제적으로 지탱할 수 있는 인기 작품의 존재는 막중하다. 또한 [가로]가 경제적 난항에도 불구하고 30년이나 더 버틴 배경도 중요하다. 그 뒤에는 [가로]라는 잡지에 대한 일종의 신화와 존경심이 존재했고, 생계에는 직접적인 보탬이 되지 않아도 [가로]라는 지면에는 표현의 자유와 어느 수준 이상의 작품성이 보장되는 작품만이 게재될 자격이 있다는 합의된 권위가 인정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권위는 하루아침에 획득되는 것이 아니며, 창립자 나가이의 넓은 인맥과 친교활동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결정적으로 [가로]가 표현의 자유와 작품성이라는 작가와 독자에 대한 ‘신용’을 지켰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대안적 지면이든, 좀 더 상업적인 지면이든 절도 있으면서 확연한 ‘철학’을 정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작가가 그리고 싶은 것을 마음껏 그리게 하는 것’이든, ‘특정 연령대와 성별과 성향의 독자가 좋아할 만한 콘텐츠는 뭐든지 게재’하는 것이든 확고한 일관성과 철학만 있으면 대안만화를 자연스러운 대안으로 고려할 수 있는 유연함 역시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 본 기사는 우리만화연대에서 발간하는 <우리만화>에서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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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8 07:41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작가와 작품들

[대안만화를 말하다-③]세계의 대안만화(유럽) 
                                                                                                                       한상정 _ 만화연구가
다비드 베의 <간질의 승천>
▲ 다비드 베의 <간질의 승천>
유럽만화의 중심지는 벨기에-프랑스를 잇는 불어권 만화이다. 물론 그 이외의 국가에서 자국의 만화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불어권 만화처럼 전체 출판의 7%정도를 차지하는 국가는 없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불어권 만화나 미국권의 코믹스, 극동 아시아의 망가등을 프랑스 출판시장을 통해 소개받고 있다. 대안만화 역시 그 사정이 틀리지 않기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1968년의 사회적 격변기는 1959년에 창간되어 초유의 인기를 누렸던 잡지인 필로트 Pilote 독자들의 성장과도 궤를 같이 한다. 바로 이 독자들이 존재했기에 하라-키리Hara-Kiri(1968), 샤를리 엡도Charlie Hebdo(1968), 샤를리 망슈엘Charlie Mensuel(1969)같은 신랄한 풍자잡지들이 창간될 수 있었다. 특히 이 샤를리 망슈엘은 미국과 영국, 이탈리아와 아르헨티나의 작가들이 함께 참여해서 자유로운 표현과 다양한 실험을 행한 지면이기도 하다.

이들에 힘입어 1973년에서 1978년 사이, 수많은 만화전문지가 창간되었다. 70년대의 만화들이 프랑스 만화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 수준 높은 잡지들의 융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에코 데 사반느L'Echo des Savannes (1974)라는 관습성을 배척하는 잡지, 메탈 위를랑Métal Hurlant(1975)이라는 공상과학, 락의 세계를 주로 다룬 잡지, 그리고 플루이드 글라시알Fluide Glacial (1975)과 같은 풍자적 성격을 지닌 잡지가 그 대표작들이다. 이 시기의 만화는 성인층을 독자군으로 정착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970년대 말에 오면 미국의 언더그라운드 만화가 많이 소개되면서 프랑스의 만화에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바로 이 무렵부터 우리가 오늘날 앨범album이라고 부르는, 46~48페이지에 올 컬러, 하드커버라는 프랑스 만화책의 형식이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마잔 사트라피 <페르세폴리스>

1980년대 초반기 만화시장은 상당히 커져 있었지만, 하반기에 이르면서 전반적인 침체에 들어간다. 대부분의 잡지들은 폐간되었고, 만화는 잡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앨범으로 독자들에게 소개되기 시작했다. 출판사들은 흡수와 통합을 계속했고, 다르고Dargaud, 뒤피Dupuis, 글레나Glénat, 위마노사이드 아소시에Humanoïdes Associés, 롱바르드Lombard 출판사에 이어 델쿠르Delcourt, 솔레이으Soleil 등의 출판사가 서서히 자신의 자리를 굳히기 시작했다. 이 무렵 이들의 관심은 오로지 상업적인 성공이었고, 만화는 그 자리에서 고착되고 있었다.

1990년 루이스 트롱다임Lewis Trondheim, 장-크리스토프 므뉘Jean- Christophe Menu, 스타니스라스Stanislas, 마트 콩튀르Matt Konture, 킬로퍼Killoffer, 다비드 베 David B, 그리고 모카이트Mokeït는 기존의 모든 출판사에서 자신들의 작품출판이 거절당하자 함께 ‘아소시아시옹’이라는 출판사를 차린다. 이 출판사는 상업적인 구조라기보다는 일종의 조합association인데, 전자와의 차이는 조합의 경우 수익이 나면 그 부분을 다시 만화책을 만드는 데 재투자하게끔 되어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 멤버가 구성되었는지를 알고 싶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70년대로 건너뛰어야 한다. 1974년 에티엔느 로비알Etienne Robial은 플로랑스 세스탁Florence Cestac과 더불어 ‘퓌트로폴리스Futropolis’라는 출판사를 차린다. 이 출판사는 세가Segar의 「뽀빠이」나 조르쥬 헤리만George Herriman의 「크레이지 캣 Krazy Kat」의 출간을 시작으로 미국의 30~40년대 작품들의 재판, 그리고 재능 있는 신진 작가들(므뉘, 장-클로드 괴팅Jean-Claude Götting, 스타니스라스, 필립 프티-룰레Philippe Petit-Roulet, 에드몽 보도앙Edmond Baudoin 등)의 작품을 출간했다. 이 출판사가 출간한 서적들은 내용적으로도 형식적으로도(특히, 로비얄은 표지의 편집에 상당한 신경을 썼다고 한다), ‘예술로서의 만화’라는 개념을 세우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87년부터 재정적 어려움으로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의 경제적 도움을 받았고, 동일한 이유로 1989년부터 준비해서 1990년에 출간된 라보Labo라는 잡지는 창간호로 막을 내려야 했다. 결국 이 출판사는 1994년 최종적으로 갈리마르로 넘어가게 되는데, 이전의 보석 같은 재고들을 헐값으로 팔아 치우지 않는 조건을 걸었다고 한다. 이 조건은 꽤 오랫동안 지켜지다가, 2004년부터 갈리마르가 솔레이으 출판사와 함께 이 ’퓌트로폴리스‘라는 이름을 ‘공동 컬렉션’의 이름으로 사용하면서 파기되었다. 새로운 작품들을 출판해야 하므로 더 이상 과거의 재고를 쌓아두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비록 이 새로운 컬렉션에서 상당히 높은 퀄리티를 자랑하는 작품들이 나오고 있다고는 해도, 예술로서의 만화라는 이미지를 도용하면서 막상 그러한 가치가 있는 작품들을 보관하지 않고 팔아넘겼다는 비난은 상당히 강경하게 제기되기도 했다.

엠마뉴엘 지베르 <알랑의 전쟁>



여하간, 바로 이 라보 창간호가 아소시아시옹 창립자들의 대부분이 만나는 기회를 제공했다. 원고를 실으면서 마음이 맞은 작가들은, 라보가 중단되고 더 이상 자신들의 작품을 발표할 지면을 구할 수 없자 이러한 대안을 마련하고 행동에 옮겼던 것이다. 이들은 출발부터 자신의 색채를 명확히 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기존의 ‘앨범’과는 다른 형태의 만화책을 제작했다. 제작비용의 문제도 있겠지만 일단 이들은 컬러를 자제하고 흑백의 그래피즘을 선택했다. 텍스트는 대소문자를 함께 사용하여 쓰고, 하드커버를 사용하지 않으며, 페이지의 양 역시 제한하지 않았다. 또한 내용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들은 새로운 테마를 만화책 안으로 끌어들였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자서전이다.

물론 이 출판사는 다른 상업 출판사보다 훨씬 소규모이다. 하지만 이 출판사에선 작가들의 원고료가 동일하다. 즉, 유명하다고 인세를 더 받지도 않고, 처녀작을 낸다고 해서 덜 받지도 않는다. 이들은 또한 ‘만화’라는 표현양식의 유일무이함을 주장하며, ‘작가’로서의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이 출판사는 결코 자신의 책들을 무료로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도 유명하다. 새 책이 출간되고 나면 주로 언론의 담당자들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방식은 프랑스에서도 정착이 되어 있는데, 아소시아시옹은 그 일을 하지 않는다. 단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 자신을 작가로, 만화책을 작품으로 생각하는 한 당연하게 보이기도 한다. 단지 알아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직접적으로 요구받아도 ‘사서 보라’고 조언한다.

1992년, 출판사는 드디어, 라보의 정신을 이었다고 평가받는 라팡Lapin이라는 만화 잡지를 출간했다. 이 잡지의 이름은 트롱다임의 대표적인 주인공, 라피노Lapinot를 본따서 므뉘가 만든 인물인 라포Lapot를 기념하기 위해 붙인 것이다. 2002년까지, 92페이지에서 140페이지 분량으로 한 해에 2~3권씩 정기적으로 출간되다가, 이 해 겨울부터 폐간은 아니지만 부정기적인 형태로 바뀌었다. 이 잡지에서 독자들에게 선보인 다양한 작가들의 다양한 만화는 이후 동일한 출판사에서 만화책으로 만들어졌다. 라팡은 아소시아시옹이 다루는 만화들이 어떤 것인지 일거에 파악하게끔 했고, 젊은 작가들을 주변에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다.

이렇게 책과 잡지를 출간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어떻게 서점으로 유통시킬 것인가? 프랑스의 경우, 만화책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은 크게 세 군데로 나눠진다. 하나는 만화책 전문 서점, 둘째는 일반 거대 서점, 세 번째는 대형 슈퍼마켓이다. 상업 출판사들은 유통사를 통해 이 세 군데 모두에 자신의 책들을 유통시킨다. 2006년엔 총 225개의 만화 출판사가 활동을 했는데, 이 중 상위 17개의 출판사가 전체 출판물의 70%를 출간했다. 즉 나머지 30%의 출간은 108개의 소규모 출판사에서 행해진다는 것이다. 출판에서의 과대한 집중 현상이 존재한다면 유통은 에디티스Editis와 아세트Hachette 두 회사가 거의 차지하고 있다. 이들이 내거는 조건을 아소시아시옹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아소시아시옹이 선택한 방식은 이후 프랑스 만화계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이들은 다른 두 가지 성격의 판매 장소는 과감히 포기하고, 만화 전문서점에만 서적을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만화 전문 서점에로의 유통이라는 역할을 맡은 것은 팬클럽이다. 아소시아시옹은 2년 만에 200명의 회원을 모았으며, 2000년이 이르렀을 때는 회원 수는 거의 1,000명에 이르게 된다.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서점에 책임지고 배달하는 대신 이사회에 참여하거나 또는 이 출판사의 서적을 할인가에 구입할 수 있는 혜택을 받는다. 또한 독자들과의 친밀도를 높이기 위해 ‘자치적 만화회(1994~1997)’라는 이름의 매달 정기모임을 파리시내의 한 카페에서 열면서,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을 전시, 판매, 또는 강연이나 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이후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드는 탓에 아소시아시옹의 이런 행사는 폐지되었다.

루이스 트롱다임 <근접하게> 



결국, 1999년에 이르면 아소시아시옹과 락캄Rackham 출판사의 사장인 라티노 임파라트Latino Imparat는 함께 기존의 유통시스템과는 무관한 ‘독립출판사들의 계산대Le Comptoir des Indépendant’라는 유통사를 세웠다. 오늘날 대부분의 소규모 대안만화 출판사들은 이를 통해 자신의 서적들을 만화 전문 서점만이 아니라 거대서점에까지 유통시킨다. 결국, 아소시아시옹의 작가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생산’과 ‘유통’이라는 양 대 구조를 탄생시킨 것이다.

아소시아시옹이 야심차게 내놓은 작품들과 활발한 활동은 무언가 새로운 만화를 갈구하던 젊은이들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1994년 앙굴렘의 순수미술학교 출신의 몇 작가들은 ‘이고 껌 익스Ego comme X’라는 출판사를 차리고, 동일명의 잡지를 내기 시작했다. 작가들 중 로익 네후Loïc Néhou가 편집장을 맡고 있으며, 자비에 뮈사Xavier Mussat, 파브리스 노Fabrice Neaud, 프레데릭 포앙슬레Frédéric Poincelet, 프레데렉 보알레Frédéric Boilet등의 작가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현재까지 60권 가량의 작품을 보유하고 있는 이 출판사의 작품 중 가장 커다란 이슈를 불러일으킨 작품은 파브리스 노의 「저널Journal」이다. 자서전적인 이야기로, 작가의 만화와 예술에 대한 사색, 성적 기호와 그에 의한 자신의 경험과 감정들에 대한 내밀한 이야기들을 드러냄으로써 많은 독자들을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있다. 2002년 앙굴렘 페스티벌에서 ‘감동상’을 받은 4권 이후 아직까지 독자들을 기다리게 하고 있다. 동명의 잡지인 이고 껌 익스는 2003년까지 9호까지 나온 이후 일단 중단된 상태이다.

비록 잡지는 내고 있지 않고, 또 작가들이 모여서 만든 출판사도 아니지만, 대안만화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다른 출판사가 있다. 바로 1991년 장-루이 고티 Jean-Louis Gauthey가 세운 ‘코르넬리우스Cornélius‘이다. 빌렘Willem과 크럼Crumb 같은 중요한 작가의 작품들을 출판하는 것에서 시작, 이어서 트롱다임, 다비드 베, 블러치Blutch와 같은 만화작가들의 작품을 출간했다. 이 책들은 높은 수준의 표지 디자인과 편집상태, 그리고 높은 안목의 작품 선정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크럼 이후 미국과 일본의 다른 대안만화를 출간하기도 했다. 특히, 이 출판사에서 번역출간한 시게루 미즈키Shigeru Mizuki의 「농농바NonNonBâ」는 2007년 앙굴렘에서 최고의 작품상을 받기도 했다.

아소시아시옹을 필두로 한 이 출판사들의 활동은 다양한 대안만화 출판사들을 이끌어 내었고, 이로써 불어권 만화는 튼튼한 재생산구조를 갖춘 셈이다. 아킬오스Akileos, 아트라빌Atrabile, 라 보와트 아 뷜La Boîte à Bulles, 라 카페티에르La Cafetière, 샤레트Charrette, 클레어 드 륀Clair de lune, 라 코메디 일뤼스트레La Comédie illustrée, 르 시클리스트Le Cycliste, 드로조필Drozophile, 에르코Erko, FLBLB, FRMK, 그라푸니아지Grafouniages, 그로앙지Groinge, 이페엠IPM , 조커Joker, 집 아방튀르JYB Aventures, 루Loup, 메갈리트Mégalithes, 모스키토Mosquito, 프티 타 프티Petit à petit, PLG, 락캄Rakam, 레 르캥 막토Les Requins Marteaux, 시 피에 수 테르Six pieds sous terre, 타르타뮈도Tartamudo, 테르 느와르 Terre Noire, 텔로마Theloma 등이 그 대표적인 이름이다.

<아소시아시옹> 창간 멤버의 캐릭터 

이 계승자들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레 르캥 막토’이다. 왜냐하면 이 출판사는 1996년부터 페라이Feraille라는 잡지를 내고 있으며, 게다가 기존의 소규모 출판사와는 틀리게, 컬러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20호까지는 3개월마다 한 권씩 48페이지로 출간되다가 2003년 21호부터는 훨씬 더 늘어난 분량으로 페라이 일뤼스트레 Feraille Illustré로 이름을 바꾸고 부정기적으로 출간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출판과 잡지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는 전시기획도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총체적인 문화기획팀처럼 움직이고 있다.

이제 이러한 대안만화출판사와 작가들의 활동이 20여년에 달해가면서, 이들은 내외적으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2007년 한 해에 발간된 만화책의 종수는 총 4,313권이다. 한 달에 약 360권씩 쏟아져 나오는 책들은 각 서점마다 배치불가능의 문제를 일으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출간된 만화책들은 독자들에게 소개되기 쉽지 않으며, 상대적으로 재정력이 약간 대안만화출판사의 서적들을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내적으로는, 이제 어제의 대안만화의 작가들이 오늘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작가가 되었다는 점이다. 아소시아시옹의 설립과 발전에 기여하던 대부분의 작가들은 탈퇴를 선언하거나 더 이상 이 출판사에서 책을 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처럼 내외적으로 부딪히는 문제들에 대해 대안만화 진영의 작가들이 어떤 식으로 해결해나갈 것인가라는 부분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 본 기사는 우리만화연대에서 발간하는 <우리만화>에서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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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0 13:50

북미권 대안만화의 흐름과 현재

[대안만화를 말하다-②]세계의 대안만화(북미)
                                                                                                                      김낙호 _ 만화연구가
세계에서 가장 주류만화의 특정 장르에 대한 편중이 심했던 바 있는 북미권의 대안만화의 경험은 대안 장르를 통해서 만화문화의 질적 성장을 꿈꾸는 이들에게 가장 확실한 참조사례가 되어줄 법 하다.
▲ 세계에서 가장 주류만화의 특정 장르에 대한 편중이 심했던 바 있는 북미권의 대안만화의 경험은 대안 장르를 통해서 만화문화의 질적 성장을 꿈꾸는 이들에게 가장 확실한 참조사례가 되어줄 법 하다.

주류 만화의 전망이 불투명할수록, 혹은 너무나 주류 만화가 주류화되어 새로운 발전의 돌파구가 보이지 않을 때, 사람들은 종종 다른 종류의 만화에 대한 관심과 희망을 건다. 그것은 작가주의 만화, 언더만화, 인디만화 등 다양한 명칭을 거치곤 하는데, 새로운 다른 시도가 하나의 선택권이 되어주기를 바란다는 측면에서 거칠게 ‘대안만화’로 일컬어진다. 이렇게 볼 때, 세계에서 가장 주류만화의 특정 장르에 대한 편중이 심했던 바 있는 북미권의 대안만화의 경험은 대안 장르를 통해서 만화문화의 질적 성장을 꿈꾸는 이들에게 가장 확실한 참조사례가 되어줄 법 하다. 그런 의미에서, 본 글에서는 간단하게나마 북미권 대안만화의 지형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 현실에 곧바로 일대일대입을 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쓸 만한 함의 몇 가지 정도는 건져낼 수 있으리라.


대안의 의미를 주류에서 찾다

대중문화에서 대안이란 기본적으로 주류에 대한 반정립이기 때문에, 모든 대안에 관한 이야기는 주류가 무엇인지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우선 담아내는 정서의 측면에서의 주류를 이야기하는 것도 가능하다. 담아내는 이야기가 주류적 감성, 즉 사회가 해당 매체에서 기대하는 보편적 방향성과 수위를 충족시켜주는지에 대한 것이다. 혹은 산업적 의미에서의 주류, 즉 주류적 생산양식을 꼽을 수 있다. 만화의 경우라면 특정한 방식의 생산 및 유통 방식과 그에 따른 작품 표현이 그것이다. 미국 대형 만화출판사들의 올컬러 40페이지 중철 제본 ‘코믹북 이슈’ 방식을 통해서 섬세한 장편 일상물을 히트시키는 것은 무척 어렵다. 농축된 스토리 전개, 코드화된 전개와 화려한 시각적 임팩트에 최적화되어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물론 어떤 요소들은 항상 그랬던 것이 아니다). 또한 이를 위해 만들어져 있는 기능별 세부 분화에 의한 작품 제작 방식, 즉 스토리작가, 밑그림 데생, 펜선, 채색, 식자 작업 등이 모두 팀제로 분화되어 있고 출판사가 그들을 각각 고용하여 관리하는 협업 시스템은 사적인 탐구보다는 코드화된 보편적 오락성을 추구하도록 만든다 - 제작비용이 늘어남도 물론이다. 만약 작가 개인의 사적 성찰을 중시하고, 오락성을 희생하더라도 깊이를 탐구하며, 코믹북 이슈의 방식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연출을 구사하고 싶다면 그 주류에 속할 수 없다.


미국 언더그라운드 코믹스

로버트 크럼이 1968년에 만든<잽 코믹스>

북미권 대안만화의 시초는 정서적 측면의 주류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즉 주류 보수 기독교적 도덕성의 문화에 대한 대안이었던 셈이다. 5-60년대 기성세대의 불안감, 기득권층의 정치적 및 문화적 이해관계 등은 호황으로 인한 분방함을 도덕적 혼란과 타락, 나아가 사회에 대한 배반으로 규정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이런 억압적 분위기 속에서 모든 종류의 “청소년에게 부정적일 수 있는” 표현들을 제거해야만 받을 수 있는 코믹스 코드에 의한 허가제가 강요되었다. 이 코드에는 배급력을 지닌 사실상 모든 출판사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미국만화는 그대로 박제된 건전함에 갇혀 버렸다. 이렇게 미국에서 만화는 가장 건전하고 유치한 저연령층 매체가 되어갔다.

하지만 변화는 젊은 세대의 주류문화에 대한 반항, 반문화가 한층 가속도를 지니며 성장하던 60년대 후반에 나타났다. 점점 혁신적인 시끄러움과 분방함을 자랑하게 된 락앤롤, 동서양의 신비주의를 미묘하게 흡수한 히피문화, 마약과 자유 섹스 등 반문화의 분방한 실험정신은 부모 세대의 경악 속에 점점 세력을 키워나갔다. 만화는 이런 상황에서 다시 각광을 받게 되었는데, 매체 본연의 자유로운 표현력과 넓은 친화력이 한 쪽이라면, 도덕적 박제의 대표 상징에 대한 우상파괴 욕구가 다른 쪽이었다. 즉 반문화의 핵심 정서를 만화를 통해서 효과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면서, 주류 만화의 방식으로는 그런 내용을 도저히 만들 수가 없기 때문에 한층 ‘지하’로 들어간 생산 및 유통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언더그라운드 코믹스의 시대가 도래했다.

작가들은 성적 금기의 타파, 마약 복용 상태에서 생겨나는 왜곡된 감각, 기성 도덕과 정부 시스템에 대한 끝없는 조롱, 낙천성과 자기 모멸감의 공존 등을 본격적으로 실험했다. 언더그라운드 코믹스 작품들은 주로 소형 인쇄소에서 만들어져서, 담배 가게를 중심으로(물론 이런 가게에서는 마리화나도 같이 취급했다) 유통되었다. 창작을 분업화하기에는 지나치게 영세한 규모 등 제한된 제작조건 덕분에 당시 미국에서는 그다지 보편적이지 않았던 잡지형 모음집으로 만들어졌는데, 덕분에 여러 다양한 작가들이 데뷔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주었다.

이런 잡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잽 코믹스(Zap Comix)는 로버트 크럼Crumb이 1968년에 처음 제작했다. 표지에 코믹스코드 심의필 마크 대신 “정당한 경고: 성인 지성인들만 보시오”라고 적혀 있는 이 잡지의 대형 히트는 언더그라운드 코믹스의 입지와 기반을 일거에 확대시킨 바 있다. 히피적 낙천성을 묘사한 “계속 트럭질 하시오”(Keep on Truckin') 시리즈는 당대 반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로 수도 없이 인용당하고, 크럼 특유의 신경질적 독백과 적나라한 성적 열등감, 사회에 대한 폭넓은 불평은 그를 이 분야의 대가로 만들어주었다. 클레이 윌슨, 로버트 윌리엄스, 스페인 로드리게즈, 빌 그리피스, 릭 그리핀 등 여러 스타 작가들 역시 잽을 통해 세상과 만났다. 현재까지도 잽은 공식적으로 폐간한 적이 없어서, 2005년에 통산 15호가 출시되기도 했다. 이 잡지는 물론 기성의 도덕을 깔보기 위해서 각종 부도덕한 내용을 다루어 악명을 쌓았는데, 결국 여러 지역에서 판매금지를 당했다(그래도 계속 어디선가는 구할 수 있었기에, 언더그라운드라는 용어를 더욱 빛내주었다). 이후 잽의 전례를 따라 이런 방식의 잡지들이 계속 나왔는데, 퍼니 애니멀즈(Funny Animals)의 편집자였던 테리 즈위고프는 훗날 크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서 95년도에 선댄스를 포함 각종 영화제를 휩쓸기도 했다.

<잽 코믹스>에 실린 <Keep on Truckin'> 시리즈의 한 장면

언더그라운드 코믹스와 락음악의 교류 역시 활발했다. 인기 싸이키델릭 및 블루스 락 음악가들이 유명 언더만화가에게 앨범 표지를 의뢰했는데, 크럼이 그린 Big Brother and the Holding Company(재니스 조플린이 보컬을 맡았던 밴드)의 Cheap Thrills 앨범 표지는 이 분야의 전설급으로 남아있다. 또한 미국에서 펑크 락 운동을 주도한 잡지 펑크 매거진 역시 편집자 홀스트롬과 언더그라운드 만화가들의 교류를 통해서 탄생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듯 미국에서 언더그라운드 코믹스는 박제된 도덕성의 상징인 주류만화를 뒤집어 반문화의 중심으로 만화를 세워낸 큰 공이 있지만, 전위를 부르짖는 성향 덕분에 미학적 측면의 장인적 완성도라든지 세련된 오락성 등의 요소들은 상대적으로 등한시된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음악의 경우 반항의 락 장르들이 대형 상업적 성공 속에서 제도권에 편입되는 과정을 겪었지만, 미국의 언더그라운드 만화는 정상 유통으로 가기 위해서는 내용적으로나 생산의 영세성에서나 장애물이 너무 컸다. 이런 와중에 70년대 중반부터 마약 용품의 거래가 불법화되어 기존의 유통망도 무너졌다. 언더그라운드 코믹스의 흐름은 사실상 70년대로 사실상 끝났으며(비록 로버트 크럼은 80년대에는 위어도Weirdo라는 잡지를 통해서 계속 자신의 성향을 이어나갔지만), 80년대부터 미국의 대안만화는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독립’ 만화의 시대

언더그라운드 코믹스의 시대가 저물기는 했지만, 80년대에도 북미권 만화계의 청소년 친화적인 대형 출판사 위주의 슈퍼히어로 장르의 굳건한 주류 점유는 변하지 않았다. 따라서 대안 만화에 대한 필요성은 여전했는데, 6-70년대의 통일된 반문화 정서보다는 좀 더 다양한 관심사의 만화가 화두에 올랐다. 점차 인기가 쇠락하면서도 제작 및 유통 시스템의 경직성은 변할 줄 몰랐던 주류 만화 산업에 대한 반발, 그리고 만화의 예술적 성취를 좀 더 진지한 수준으로 올려놓고 싶었던 순수한 작가적 열망 등의 요소들이 동시에 제기되었다. 이런 시대에 대안만화가 저항하고자 한 주류는 자본의 경직성으로부터의 독립이었고, 이것은 기존 대기업 위주의 독점적 유통망을 이용하지 않는 소규모 ‘독립’ 출판사 운동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 성향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어서, 북미권에서 흔히 대안만화라고 부를 때는 이들을 지칭하곤 한다.

어떤 작가들은 문자 그대로 대형 출판사로부터 독립했다. 북미권의 일반적인 주류 대형 출판사들은 창작자 권리에 무척 인색했는데, 분업화된 공정 속에 자신들이 대부분의 저작권 수익을 가져가고 또한 작품의 방향 역시 전권을 행사해왔다. 하지만 자신에게 사업 수완이 있다고 판단한 데이브 심은 77년에 직접 출판사를 설립, ‘세레부스’ 시리즈로 주류 시장에서 대형 히트를 기록했다. 이런 방식은 제프 스미스의 ‘본’ 등으로도 이어졌는데, 에피소드식 슈퍼히어로물 일변도에서 소외받았으나 사실은 여전히 수요층이 확실했던 선 굵은 장편 판타지 모험물이 많았다. 장르적 오락성의 감성, 나아가 상업적 성공까지도 분명히 주류적이었으나, 장르의 선택과 출판 방식은 독립출판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80년대 독립만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만화잡지 <RAW>

80년대 독립만화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잡지로는 ‘로’RAW와 ‘헤비메탈’을 꼽을 수 있다. 로는 언더그라운드 코믹스와 80년대식 인디만화의 교량 역할을 한 작가 아트 스피글먼과 프랑스 출신 부인 프랑소와 몰리가 만든 잡지로, 만화의 표현적 가능성을 최대한 탐구하여 만화의 예술적 잠재력을 마음껏 실험했다. 나아가 자끄 따르디 등 섬세한 예술적 표현력을 지닌 유럽 만화들을 실어냄으로써, 전위성을 조악함이 아닌 품격으로 승격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들은 뉴욕의 출판 및 예술계에 영향력을 확대해나갔고, 잡지에 연재했던 스피글먼의 ‘쥐’가 만화로서는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함으로써 입지를 확실히 했다. 현재까지도 스피글먼은 표현력이 좋은 인디만화 성향 작가들을 발굴하고 주류 미디어와 연결시켜주는 강력한 다리가 되어주고 있다. 이에 비해 ‘헤비메탈’은 장인적 필력을 바탕으로 성인 지향 오락성을 강조하는 성향을 이끌어주었다. SF만화가 뫼비우스가 만든 프랑스 잡지 ‘메탈위를랑’의 미국 번안판인데, 에로틱함과 판타지 SF의 결합을 핵심 정서로 하며 그 분야 프랑스 대가들의 단편들을 본격적으로 미국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언더그라운드 코믹스의 때로는 조잡한 방향으로 나타난 분방함과 대비되는 정제된 스타일과 세계구축, 하지만 돋보이는 하위문화 애호 기질은 새로운 세대의 대안만화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러한 시도들이 늘어나고 성공사례가 발생하자, 보다 여러 작가들이 과감한 시도를 했다. 주류와 인디의 대형 성공작들에 힘입어 80년대 말 이래로 만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한층 올라가고, 기술 발달에 따라서 인쇄 비용 역시 상대적으로 내려가자 작가 자신만의 만화잡지를 내는 시도가 이어졌다. 일부는 독립만화를 전문으로 하는 출판사와 의기투합하기도 했고, 다른 이들은 독립만화의 출판을 장려하는 후원단체인 크세릭Xeric 재단의 지원금을 통해서 출판을 하기도 했다. 이것은 작가가 여러 자신의 단편과 습작, 때로는 장편 연재물을 모아서 직접 코믹북 이슈 형식으로 묶어서 지역 만화 전문점에 배급하는 방식이다. 현재 미국 대안만화계의 가장 대표적인 스타들이 이런 식으로 작업을 시작했는데, ‘고스트월드’, ‘데이빗 보링’ 등 시니컬한 잡담으로 미국 현대사회의 불안을 그려낸 댄 클로우즈의 작품들이 바로 그의 개인 잡지 에이트볼Eightball 을 통해서 연재되었던 것들이다. ‘지미코리건’에서 아이콘화된 그림체와 복합적 흐름의 문법으로 미국만화계 최고의 카드로 평가받곤 했던 크리스 웨어 역시 애크미 노벨티 라이브러리Acme Novelty Library라는 1인 출판물로 활동하고 있다. 웨어의 경우 코믹북 이슈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매번 새로운 크기와 제본방식을 실험하는 재기까지 발휘한다. 소심한 아시아계 루저를 그리는 에이드리언 토미네의 옵틱 너브Optic Nerve, 미묘하게 건조한 성장담을 즐겨 그리는 캐나다 작가 체스터 브라운의 여미 퍼Yummy Fur 등도 이 부류에 포함된다.

작가주의 성향 독립만화 작가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며 고품격 출판물로 만들어주는 전문 출판사들 역시 대두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곳으로는 70년대 말에 설립된 판타그래픽스Fantagraphics와 91년에 설립된 캐나다의 드론앤쿼털리Drawn and Quarterly가 가장 먼저 꼽히곤 한다. 이들은 언더/인디 만화운동에 깊숙이 개입된 작가와 편집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고, 비평 혹은 만화 연재 잡지와 단행본을 같이 제작해왔다. 판타그래픽스는 멕시코 출신 헤르난데즈 형제의 러브앤로켓Love and Rockets 시리즈를 발굴한 것은 물론, 앞서 언급한 크리스 웨어와 댄 클로우즈의 개인잡지들도 출판하고 있다. 이에 비해 드론앤쿼털리는 캐나다를 위시해서 유럽권 만화의 영향을 더 강하게 받은 작품군을 더 많이 보유하고 있다. 캐나다 3인방 세쓰, 체스터 브라운, 조 매트를 위시해서 ‘베를린’ 시리즈의 제이슨 루츠, 페미니즘적 성향의 언더그라운드 코믹스 성향이 강한 줄리 두셰 등이 포함된다. 물론 이런 출판사들은 경제적 어려움에 자주 처하곤 하지만, 고전카툰의 재발간 등 여러 수익사업을 통해서 근근히 버티고 있다. 이외에도 2000년대에는 대형 출판사들이 만화 전문 자회사를 설립하는 경우들이 늘어나서, 퍼스트세컨드First Second 등의 출판사들이 새로 뛰어들기도 했다. 이들은 더 이상 엄밀한 의미에서 ‘독립’ 만화로 보기는 힘들지만, 그 계열 작품들의 성향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다.

 

'비행'이라는 소재로 그린 단편을 모아서 출판하는 <플라이트>


북미권 대안만화의 오늘

오늘날 북미권 대안만화는 사실 90년대라는 부풀은 희망의 성장기에 비하면 많이 차분해진 상태다. 하지만 전망은 나쁘지 않다. 시장성에 대한 성장 전망은 과도한 기대를 접었지만, 반면에 정제된 그래픽노블의 형태로 만들어낼 경우 만화 전문점이 아닌 서점 중심으로 유통을 시키는 것이 더 용이해진 상황이다. 또한 우수작에 대한 사회적 시선 역시 훨씬 나아졌으며 독립출판 만화들의 박람회인 Small Press Expo (SPX) 역시 매해 성공적으로 열리고 있다. 나아가 웹을 통해서 한층 새로운 대안 만화 창작 및 유통의 길이 열렸고, 새로운 세대의 젊은 작가들이 그 덕분에 데뷔했다. 만화적 연출과 세밀한 코미디로 섬세한 성장물을 만들어내는 ‘다르면서 같은’의 데릭 커크 킴이 대표적이다. 이 부류의 작가들 가운데 상당수는, 파스텔풍 환타지를 그리는 카즈 키부이시가 주도하며 비행이라는 소재로 그린 단편을 모아서 출판하는 ‘플라이트’ 모음집 시리즈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웹을 통해 등단했다는 것 말고도, 일본만화의 영향권 하에서 성장했다든지 성장물 코드의 섬세한 심리묘사에 능하다든지 하는 여러 공통점을 지녔다. 이들은 주류적인 본격 장르오락물이 아니라 작가 개인의 성향에 집중한다는 측면에서 독립만화로서의 대안만화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에서 바라보는 북미권 대안만화

북미권의 대안만화 환경은 한국과는 무척 역사가 다르다. 비록 모양새 자체로 놓고 보자면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언더그라운드만화 운동이라든지 독립만화 논의들이 적지 않지만, 주류의 응집력 자체가 미국의 경우처럼 강력하지도 않았고 대안만화 씬의 자가발전 동력 역시 탄탄한 반문화나 전위미술계의 기반을 지니고 있던 그들에 비해서 크게 열악했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까지 일정 지분을 유지하고 또 계속 성장을 노리는 한국의 작가주의 성향 만화출판에 있어서는 미국의 대안만화가 상황에 대처하며 성장한 방식이 몇 가지 지점에서 참조사례가 될 법하다.

첫째는 작가/작품의 ‘스타’화다. 미국의 대안만화계는 주류문화와 적잖이 교류하면서 아트 스피글먼, 댄 클로우즈 등 대안만화의 대표주자들을 주류 문화에서 일종의 고급 취향으로 자리매김시켜서, 부족한 상업성 대신 문화적 품격으로 가치를 만들어냈다. 둘째는 여하튼 계속 작업하곤 하는 긴 호흡의 문화다. 상업적 성공이 오지 않은 동안은 다른 직업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다. 그럴 때 만화를 접느냐 아니면 조금씩 오래 계속 하면서 버티느냐는 큰 차이다. 크럼의 잽이나 위어도는 월간지와는 거리가 멀지만, 아무리 드문드문 내더라도 결국 계속 내면서 전설이 되어 있다. 이런 면에서 비교해보면, 한국의 대안만화 씬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은 작가들의 재능이 아니라 전략과 생존의지인 셈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한국에 소개되고 있는 북미권 만화들은 최근 붐을 이룬 슈퍼히어로 만화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런 대안만화의 영역에 속한 것들이다. 대안으로서의 의미보다, 그저 좋은 만화로서 들어온다는 의미다. 대안이라는 맥락도, 좋은 작품이라는 본질을 위한 구실일 뿐이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결국 지향해야 할 지점일 듯 하다.

 

* 본 기사는 우리만화연대에서 발간하는 <우리만화>에서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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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호 
만화연구가. 앙굴렘 한국만화 특별전 외 다수의 만화전시 큐레이터, 만화비평웹진 <두고보자> 창간 편집장, <계간만화>등 여러 지면의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이외에도 국제학술행사 기획, 대학 출강, 만화관련서 집필과 번역으로 만화지평을 확대시키기 위해서 동분서주 중이다. 온라인 상에서는 capcold라는 퍽 차가운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블로그
http://capcold.net


 

[관련기사]
오늘, ‘대안만화(alternative comics)'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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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8 09:15

오늘, ‘대안만화(alternative comics)'를 말한다 - [대안만화를 말한다 - ⓛ]왜 대안만화인가

대안만화는 언더그라운드만화, 독립만화 등을 포괄하는 폭넓은 개념이다. 로버트 크럼의 자화상.
▲ 대안만화는 언더그라운드만화, 독립만화 등을 포괄하는 폭넓은 개념이다. 로버트 크럼의 자화상.

'대안만화'는 만화에 꽤나 익숙한 독자들에게도 낯선 개념이다. 그러나 만화문화의 발전을 고민하는 이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기도 하다. ‘원소스멀티유즈’가 대세로 이야기되는 시대, 상품에 포섭되지 않는 만화문화를 만들기 위한 논의의 첫머리에 대안만화가 있다. 컬처뉴스는 우리만화연대의 도움으로 대안만화의 개념과 국내외 현황, 향후 방향과 과제에 대해 총 6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 / 편집자

글 싣는 순서

① 왜 대안만화인가
② 대안만화란 무엇인가
③ 외국의 대안만화
④ 한국의 대안만화
⑤ 한국 대안만화의 방향과 과제
⑥ 마무리 대담


‘대안만화’라고 하면 반응은 대부분 두 가지이다. 하나는 왠지 칙칙하다는 느낌 때문에 고개를 돌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더 가까이 들이대는 반짝이는 눈빛이다. 두 가지 반응 모두 나쁘지 않으며 그 어느 쪽의 반응도 그 자체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체계적으로 정리를 해서 생각한 결과이건, 또는 막연한 선입관과 느낌의 결과이건 간에 이러한 반응은 약 세 가지 종류의 자문에 대한 답변이다.

첫 번째로, 왜 지금인가? 즉, 지금 이러한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럴만한가 아닌가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대안만화란 것이 이러한 상황판단에 비추어보건대 필요한 어떤 것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한 결론이다. 마지막으로, 이미 제기된 문제의식의 밑바탕에 흐르는 것으로, 여타의 다른 논의주제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를 선택할만한 필요성과 중요성이 무엇일까라는 의심이다. 이 선택 속에 어떤 다른 정치적인, 또는 개인적인 목적은 없는가라는 것이 그런 류의 의심이 될 수 있겠다.


왜 대안만화인가

의심만으로 팽배한 의심을 적극 환영한다. 정말 무서운 것은, 이 의심의 기조가 냉소와 비웃음일 경우이다. 저자의 이름만 가리면 결코 누가 썼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이것과 저것 사이에 구분점이 없는, 읽을 땐 그럭저럭 넘어가지만 덮으면 그대로 잊혀지는 모래성 같은 만화들의 홍수 속에서 글이나 작품이 지녀야 할 진지성, 그 힘에 대한 자성은 사라지고 있다. 논평과 비평이 문학처럼 다루어졌던 시기는 희미한 자취만 남기고 있으며, 거창한 환경주의는 아니더라도 있으나마나 하다면 차라리 펜을 들지 않겠다는 결심마저도 조롱되는 시대가 아닌가. 무얼 끄적거리건 ‘산업’이라는 논리 앞에 탈색되어 버린다는, 작품과 비평이 사라진 자리에 장사꾼의 깃발만이 날린다는, 아니 오히려 그 깃발이 문예를 광장에서 쫓아냈다는 이런 비아냥과 냉소, 패배주의는 그닥 생소한 것이 아니다.

읽을 만한 국산 창작물의 축소, 책을 구입하기 위해 총총히 뛰어가던 가쁜 발걸음도 추억이 되어버리고, 그에 대한 가슴 뛰는 열정도 흩어지고, 비평도 글쓰기도 무용지물이라는 비관, 그 속에 있는 냉소, 비웃음, 그것이 정말 문제가 아닌가? 그리고 이 패배주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필자의 마음에서도 꿈틀댄다. 돈이 최상위가치가 되고 있는 이곳에서, 문화에 대한 가치절하는 우리를 상처 입힌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잘했지만, 남은 못했기에? 천만의 말씀. 남도 못하지만, 나도 만만치 않게 못했다는 자성이 필요하다. 이런 총체적인 문예와 문화 자체에 대한 가치하락 - 문화산업이라는 기치 하에서만 겨우 살아나는 - 에의 책임은 모두의 어깨위에 나눠 지어야할 무거운 짐이다.

아트 스피겔만의 자화상


어디나 편재하는 냉소적인 비웃음에 맞서, 그곳에 대안만화를 자리 잡게 하는 건 어떨까?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절망할 때 비로소 튀어나오는 희망처럼, 막막하고 기나긴 밤의 끝 무렵에야 서서히 드러나는 희미한 여명처럼, 그렇게 대안만화를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 앞서 대안만화가 무엇인지부터 생각해보자. 그의 일반적 정의는 무엇이며, 언더그라운드 만화(underground comix), 독립만화(independent comics) 등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가 위에서 이야기했던 맥락과 맞닿아 있는 것인가?


대안만화는 무엇인가

‘언더그라운드 만화’는 미국에서 1960년대 중반, 즉 1967년부터 1975년까지 많은 유행을 불러일으켰던, 만화가가 스스로 생산, 출간했던 만화들을 지칭했던 용어이다. 1960년대 초반에서 중반까지 미국의 히피 반문화운동은 베트남전(1953-1975) 반대운동, 민권운동,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신봉, 여성-동성애자 해방운동과 맞물린 것으로서 언더그라운드 만화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다. 주류만화라고 볼 수 있는 슈퍼 히어로물과는 전혀 무관한 이 개별 출판된 책들은 히피숍이라는 유통망을 통해 대중들에게 팔려 나갔고, 표지는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컬러 채색했고, 내용물은 흑백 인쇄였다. 주독자층은 성인이고, 1950년대의 만화검열에 대한 복수를 하듯이, 모든 금기된 주제들, 특히 섹스, 폭력, 마약 등의 주제를 거리낌 없이 다루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는 히피들의 수도라고 불릴만했는데, 이곳으로 로버트 크럼(Robert Crumb)이 이사를 오고 <잽(Zap)>이라는 작품을 1968년에 출간하면서 만화가들에게 충격을 준다. 이 작품은 곧이어 만화가들이 연재하는 잡지로 성격이 바뀌면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 외에도 길버트 셀튼(Gilbert Shelton), 클레이 윌슨(S. Clay Wilson), 스페인 로드리게즈(Spain Rodriguez) 등이 이 시기 언더그라운드 만화의 대표적인 작가들이다.  

근 이십여 년을 끌었던 베트남 전쟁이 종결되면서 히피운동이 서서히 잦아들자 그에 따라 언더그라운드 만화도 서서히 잦아든다. 하지만 이 흐름은 그대로 끝나지 않았고, 1980년대에 제 2의 도약을 기다리게 된다. 이는 60~70년대 언더그라운드 만화의 영향 하에 성장한 대표적인 작가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80년 아트 스피겔만(Art Spegelman)이 자신의 부인인 프랑소와즈 몰리(Françoise Mouly)와 더불어 <라우(RAW)>라는 예술적인 만화를 지향하는 잡지를 내놓았고, 여전히 영향력이 살아있었던 이전의 주요 멤버중의 하나인 로버트 크럼이 앞장서서 내놓은 <Weirdo(와이어두, 1981)>도 마찬가지이다. 이 만화들을 사람들은 “포스트-언더그라운드(post-underground)," "독립만화(independent comics)" "작은 프레스(small press)",  "뉴 웨이브(new wave)," 또는 ‘예술 코믹스(art comics)” 등의 다양한 용어로 부른다. 유럽의 경우는, 대표적으로 프랑스에서 1990년대부터 아소시아시옹(Association)이라는 작가 연합체이자 출판사가 만들어지면서 기존의 주류 만화와는 다른, 흑백의 만화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윌 아이스너의 자화상


이 다양한 이름들 중에서도 가장 많이 쓰이는 명칭이 ‘대안만화’이다. 왜 그럴까? 아마도 다른 용어들에 비해 이 용어가 훨씬 더 광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언더그라운드’라는 표현은, 마치 여기에 속하는 작품의 향유자는 항상 소수로만 머물러야 한다는 인상을 줄 뿐만 아니라, 만화라는 표현으로서의 완성이나 매체에 대한 고민보다는 시선의 독특성과 비판의식, 아마추어리즘과 연관되어 있다는 이미지를 준다. ‘인디펜던트’가 추구하는 독자성과 독립성이라는 의미 역시 나쁘지 않지만, 기존의 시장체계와 완전히 별도라는 의미까지 확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팔리고 읽히기 위해 책을 만드는 이상, 시장의 규칙과 논리로부터 완벽한 독립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80년대의 대안만화는 기존의 만화에 대한 비판의식을 지니고 작업을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류만화의 완성도를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대안만화라는 용어는 상당히 광범위한 대상을 지시하는데 가장 어울리는 용어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자세야 말로, 즉 기존에 존재하던 다양한 관습들에 대해 반기를 드는 자세야 말로, 모든 표현매체의 작가들이 시도해보는 일반적인 예술가라는 이미지와 하등 다른 것이 없다. 만화가로서, 시나리오작가로서, 또는 비평가로서 어디에 설 것인가? 라는 선택의 문제이다.
 어느 입장에 서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특정 양식과 형태, 내용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아주 포괄적인 입장이며,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상관없이, 오로지 각 작품, 각 만화마다 대안만화일 수 있고, 또는 아닐 수 있는, 한편으로 넓고, 다른 한편으로 좁기 그지없는, 그런 규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답답한 현실, ‘돌파구’로서의 대안만화

2008년, 우아하게 말하면 ‘만화의 장(champ)’, 약간 더 시장적인 언어로 말하자면 ‘만화판’의 현황에 대해 말해보자. 크게 만화문화(생산과 소비양태), 교육(대학과 기타 교육 프로그램), 정책(각급 기관과 단체)과 산업으로 나눠서 생각해보자. 오늘날 우리가 주로 만나는 만화는 학습만화, 인터넷만화, 신문만화이다. 학습만화는 대한민국 어머니들의 교육열에 따라가는 것이고, 다양한 출판사와 어린이 독자를 만화소비의 주인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만화 소비양식은 여전히 무료가 우세하다. 문화적 산물의 무료화에서 유료화라는 개념적 전환은 좋은 작품을 만날 가능성을 늘려줄 수 있다. 불법스캔 업로드 규제가 강해지면 불법유통은 약간씩 사라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창작만화 판매량에 있어 높은 변화를 야기하고 있지는 못하다. 만화대여점을 통해 만화를 빌리거나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만화를 구입하는 양은 조금 늘었을지도 모른다. 
 

잡지 '라우(RAW)'의 표지그림


그러나 아직 갈 길은 멀다. 교육과 정책 분야는 골격이 먼저 탄생하고 그 속에 피와 살을 돌려야 하는 우리의 구조적 발상상, 여전히 이도 부족하고 저도 부족하다는 아우성에 파묻혀 있다. 대학은 커리큘럼이 부족하다며 대안을 모색하고, 정책을 내어야 할 곳은 인력과 자금 부족에 허덕이고 있다. 총체적인 담론의 부재이다. 잡다한 신변잡기나 부서이동의 문제를 제외하고, 정치적인 이슈에 대한 만화가들의 참가를 제외하고, 우리에게 만화, 그 자체에 대한 어떤 논의들이 진행되고 있는가? 어떤 비판의 끝날을 자기 스스로에게 향하며 비판 속에 성숙해지겠다는 당당한 자세를 갖추고 있는가? 누구도 다른 누구를 전문적으로 폄하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대안’만화는 커녕, 만화 자체에 대한 어떤 논의도 부재하다.       

‘기존 만화에 대한 비판’이라는 그럴듯한 문구는 사실 그다지 커다란 제한점을 부여하지는 못한다. 기존의 만화를 자신의 작품보다 선행하는 작품으로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여기서 비판이라는 측면은 ‘좋은 작품’을 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즉 이미 완성되고 알려진 것들을 그대로 따라하지 않고,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내딛어 보는 것, 그것이 ‘좋은’ 만화라고 했을 때, 그와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미학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에 대한 논의들과 틀릴 바가 없다. 어찌 본다면, 지금의 현황이 어떠하고, 그러한 현실 인식하에서 어떤 작품들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 그리고 그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는 모든 과정이 대안만화에 대한 논의가 아닐까?

 이는 너무 광범위하며, 너무나 광범위한 범위는 무용지물이라는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제기될 수 있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우선은 다양한 문제제기들, 다양한 색채의 논의들이 필요할 때가 아닌가 고집부려 본다. 논의와 담론 자체의 부재야 말로, 오늘날 대안만화를 이야기해야 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이기 때문이다. 어떤 담론도 적극적으로 제기되지 않는 분위기에서, 우리는 대안만화를, 달리 말하자면 어떻게 좋은 만화를 만들 수 있을지 이야기해보자는 것이다. 

 

* 본 기사는 우리만화연대(www.urimana.co.kr)에서 발간하는 <우리만화>에서 제공했습니다.






* 2008-09-02 오후 5:34:48  한상정 _ 만화평론가, 우리만화연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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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axslayer.tistory.com BlogIcon Libertas 2008.10.08 09:3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한마디로 만화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뜻이군요.

  2. Favicon of https://culturenews.tistory.com BlogIcon 컬처뉴스 2008.10.08 12:1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말 자체가 새롭지 않지만, 좋은 만화들의 운신폭을 넓힌다는 의미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앞으로 연재될 글에도 관심가져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