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3.24 09:20

21세기 유목민을 위한 작은 집

[전시리뷰]안규철 전 (3.11 - 4.26, 공간화랑)
                                                                                                  이선영 _ 미술평론가

안규철의 작품 속 공간은 규준화 된 길을 벗어나거나 길을 잃음으로서 되찾아진 시간, 그 속에서 새로운 창조, 또는 매개의 조건이 개시됨을 알려주는 듯하다.

▲ 안규철의 작품 속 공간은 규준화 된 길을 벗어나거나 길을 잃음으로서 되찾아진 시간, 그 속에서 새로운 창조, 또는 매개의 조건이 개시됨을 알려주는 듯하다.

‘2.6 평방미터의 집’이라는 부제로 열린 안규철 전은 개인이 홀로 칩거하고 이동하기에 적합한 크기와 형태를 지닌 집에 대한 아이디어들과 모형, 그리고 실제의 집에 근접한 입체물이 전시되어 있다. 이 전시에서 가장 큰 작품으로, 목재 합판 등으로 만들어진 1인용 집은 햇빛을 받아들이는 널찍한 천정 창과 열리면 바닥으로 연장되는 벽으로 되어 있고, 침대와 책걸상이 구비되어 있다. 자투리 공간에 책들이 꽂힌 미니 책꽂이 겸 침구 수납대가 설치되어 있어 작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설계한 흔적이 보인다. 이 작은 집은 자족적이면서도  개방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집이 밖으로 펼쳐져 있을 때 햇빛과 별빛과 바람을 끌어들일 수 있지만, 문과 벽을 닫으면 박스 형태가 된다. 박스는 이 집이 완전 밀폐될 수 있다는 것과 이동가능성을 예시한다. 자동차에서 전형적이듯이, 밀폐와 이동은 서로를 충족시키기 위한 조건이 된다.

안규철의 작은 집은 머무름과 떠남이 이항적으로 대립하지 않는다.

최소한의 구조 속에서도 많이 할애된 기능은 독서와 수면을 위한 공간이다. 독서나 수면은 이동 가능한 이 집처럼 내면이나 무의식으로의 여행을 상징하는 것이어서, 작가의 일관된 관심이 드러난다. 이 집에는 밤에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전등 외에 콘센트가 필요한 도구는 없다. 홀로 있음을 무력화시키는 기계들은 비치되어 있지 않다. 이 집은 거주할 수는 있지만, 캠핑카나 컨테이너 같은 실제 집의 축소판이기 보다는, 생산과 소비 활동으로 번잡한 속세와 거리를 둔 특화된 집에 가깝다. 단출하지만 낭만적인 분위기도 나는 그것들은 마치 시인이나 수도사의 방과 같은 느낌을 준다. 물질적 풍요에 헛배 부른 현대인은 시간의 가난뱅이인 만큼이나 공간의 가난뱅이다. 이미 현대생활의 많은 부분이 비좁은 방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고시원, 쪽방, 구루마, 망루, 천막, 자동차 등등. 대부분이 이 장소를 벗어나기 위해 머물러야 하는 억압적인 공간이다. 그러나 비좁은 것과 작은 것은 다르다. 이동 가능한 안규철의 작은 집은 머무름과 떠남이 이항적으로 대립하지 않는다.

안규철이 고안한 집들은 매우 환상적이면서도 그것이 실제로도 쓰일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이어서, 작가는 이미 자세한 시방서를 가지고 있을 듯싶다.

스케치는 실제 주거공간보다 자유롭게 작가의 발상을 펼쳐낸 것으로, 접고 펼칠 수 있는 집, 바퀴달린 집 등 1인용 포터블 하우스에 대한 다양한 아이디어와 매뉴얼로 구성된다. 작은 모형들은 접히는 지붕, 상자형태의 공간, 계단으로 연결된 3층 구조물 등으로, 실제로 3차원 상에서 구현될 수 있는 축소 모델들이다. 기하학적 입방체와 사람다리의 연결된 모형은 달팽이나 거북이, 소라 같은 동물들에서와 같은 몸-거주 복합체를 떠오르게 한다. 안규철이 고안한 집들은 매우 환상적이면서도 그것이 실제로도 쓰일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이어서, 작가는 이미 자세한 시방서를 가지고 있을 듯싶다. 전시장에 구현된 3채의 집은 많은 아이디어 중에서 일부가 구현된 것에 불과하다. 다각형으로 이루어진 또 다른 집들은 기능적이기 보다는 상징적이다. 그것은 아기자기한 내부구조나 시설이 아니라, 한사람이 은거할 수 있는 집약된 형태를 강조한다.

다각형으로 이루어진 또 다른 집들은 상징적이다. 
한사람이 은거할 수 있는 집약된 형태를 강조한다.

야외에 서 있는 다각형 원뿔형 집은 공격과 방어와
연관된 보다 긴장된 형태를 구축한다.

한 구멍을 하나씩 차지하도록 되어 있는 그것은 차이가 있을 뿐, 지배적 사회가 그러하듯 차이가 위계로 변화하지 않는다. 개별적으로 고립된 그것들이 미시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전체주의적인 힘에 무력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 크기의, 다각형으로 조립된 둥근 주거지 내부는 푹신하고, 개방된 윗부분은 우산이 뚜껑이다. 안에서 발을 구르면 굴러서 이동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야외에 서 있는 다각형 원뿔형 집은 공격과 방어와 연관된 보다 긴장된 형태를 구축한다. 구조물은 단순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다양한 상황과 표정이 있다. 일인용 이동 주거지는 이중적이다. 인생이 그렇듯이, 홀로 있다고 편안한 것만은 아니다. 떠날 수 있다고 자유로운 것만은 아니다. ‘2.6 평방미터의 집’은 고립과 유폐가 아니라 타자와 더 행복하게 만나기 위해 자신을 추스르고 가다듬는 최소한의 방어막이 된다. 때로 그것은 풍경을 바라보는 시점과 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이중의 기능을 수행한다.  

기하학적 입방체와 몸은 직접 접속하기도 한다.
몸은 세계의 상징적 중심으로서가 아니라,
세상의 다양한 것들과 연결할 수 있기를 요구한다.

창틀에 놓인 작은 구조물에 나타난 것처럼, 기하학적 입방체와 몸은 직접 접속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에서 몸은 세계의 상징적 중심으로서가 아니라, 세상의 다양한 것들과 연결할 수 있기를 요구한다. 건축적 형식으로 구축된 공간 역시 추상적이거나 중성적이지 않다. 공간은 건조해 보이지만 거주자의 욕망과 꿈이 스며있다. 무엇보다도 개인은 홀로일 수밖에 없는 실존적 상황이, 그리고 한곳에 정주하지 못하는 사회적 현실이 드러나 있다. 그곳의 거주민인 유목민은 주어진 경계 안에 온전히 속해야 하는 동질화된 압력으로부터 도피하면서도, 그 경계의 부당함을 침해하는 위반을 꿈꾼다. 자크 아탈리는 [미로]와 [21세기 사전]에서 극단적인 전체주의적 폭력이 활개를 칠 21세기는 각 개인이 고독 속에 들어 앉아 유목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 예견한 바 있다. 사막화된 세계를 횡단해야 하는 유목인들에게는 직선과 속도로 설정되는 뚜렷한 목적지가 없다. 이들에게 세계는 미로이며, 이를 통과하기 위해 진리 대신에 지혜가, 이성 대신에 계시가 필요하다.

안규철은 2004년 로댕 갤러리에서 발표한 대작 [49개의 문이 있는 방]에서 미로의 이미지가 선명한 작품을 선보인바 있다. 차원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커다란 가방처럼, 이 작은 집들은 미로로서의 세계와 역사를 통과하기 위한 유목 도구일수도 있다. 자크 아탈리에 의하면 유목민은 자기 집을 가지고 어디든지 이동할 수 있으며, 주요 오아시스와 연결되어 있다. 그는 뿌리의 개념이 점차 희박해지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시민이나 소비자 혹은 노동자가 되듯이 앞으로는 유목민이 될 것이라고 한다. 유목은 오늘날 소비적 관광, 종교적 순례, 경제적 이주 등 다양한 양태를 띈다. 그러나 예술가에게 유목은 이주, 망명, 여행 같은 실제적인 이동이라기보다는, 로지 브라이도티가 [유목적 주체]에서 언급하듯, 고착성에 대한 모든 관념, 욕망, 향수를 폐기해 버리는 종류의 주체를 형상화한다. 이점에서 그들은 진짜 유목민처럼 소수자에 속한다. 그들은 경계 안에 속하기 위해 대기 중인 아웃사이더가 아니라, ‘다음번에 펼쳐질 사막을 가로지르기 전에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브라이도티)이다.

그의 집이 가지는 가동성은 축적을 위한 전유나 착취가 아니라, 이질적 타자와의
상징적 교환을 극대화하는 상호 주체성의 감각을 고양한다.

안규철의 포터블 하우스는 이러한 비판적 지식인 및 예술가로서의 유목민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유목민은 정주민이 구축해 놓은 경계를 위반하고 침해하곤 한다. 자크 아탈리는 유목민이 사납다는 전설과는 반대로 그들만큼 평화를 사랑하는 존재도 없다고 본다. 그는 땅을 지키려고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떠날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칠 뿐이다. 유목민은 현대의 도시로 상징되는 바의 거대한 축적의 공간을 벗어나 타자들과 방랑의 장소를 공유한다. ‘2.6 평방미터의 집’은 최소한의 물리적 공간을 점유하면서도 개방과 연대에 인색하지 않다. 그의 집이 가지는 가동성은 현대 자본주의 문명을 이끌어 왔던 동기인 축적을 위한 전유나 착취가 아니라, 연결망 즉 이질적 타자와의 상징적 교환을 극대화하는 상호 주체성의 감각을 고양한다. 그의 작품은 21세기가 좋은 의미든 아니든 유목의 시대이기 때문에 공감이 가는 것만은 아니다. 종이나 나무판 따위로 구현된 그 작품은 번쩍거리는 미래주의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그의 작품 속에서 유목하는 인간의 필수품은 인터넷이나 휴대폰이 아니라, ‘오래된 미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독서는 가상적인 유목 생활을 상징한다. 책은 다른 정보기기와는 달리, 모든 것을 즉시 앞에 갖다 놓을 수 있다는 환상을 고무하는 진리를 향한 직선 도로가 아니라, 미로와 같은 우회로와 불투명성을 가진다. 미로는 ‘광명으로 향함과 동시에 의식 깊숙이 숨겨져 있는 지역을 향해 다가가는 방법’(아탈리)이다. 아탈리는 미로에서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공간 속에 널리 퍼져 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지혜는 이제 시간을 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채우고 경험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살펴보는데 있다. 미로들은 물리적으로나 구체적으로나 공간으로 변형된 시간이며, 이 한정된 공간 안에 무수한 길을 만드는 것이다. 안규철의 작품 속 공간은 여유 있게 보내는 누군가의 시간이 새겨져 있다. 그의 집들은 규준화 된 길을 벗어나거나 길을 잃음으로서 되찾아진 시간, 그 속에서 새로운 창조, 또는 매개의 조건이 개시됨을 알려주는 듯하다. 
(전시문의 3670-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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