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0.13 11:00

중독성 있는 책읽기

성석제 신작 『지금 행복해』
성석제, 『지금 행복해』, 창비, 2008.
▲ 성석제, 『지금 행복해』, 창비, 2008.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게 만드는 상황도 상황이지만, 상황을 만들어가는 하나하나의 문장이 주는 재미는 성석제가 쓴 어느 책이든 한 권만 집어 들면 계속해서 다음 책을 찾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가 낸 책을 다 읽기 전에는 다른 작가의 책은 그야말로 ‘안 웃겨서’ 못 읽는 중독증상까지 보이게 만들었다. 『궁전의 새』에 부록처럼 실린 작가가 쓴 작가 연보는 성석제 소설의 번외편이어서 이 재미난 이야기들이 작가의 실제 삶과도 크게 다르진 않을 거라는 인간적 친근감까지 갖게 만들었었다.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에서부터였던가, 성석제 소설에 재미가 없어졌다. 2006년 작 『참말로 좋은날』은 급기야 한물 간 코미디언이나 쇠락해 가는 격투기 선수를 연상하게 했다. 노련함은 남아 있어, 무대 혹은 링에서 버텨 낼 운영 능력은 있으되, 기대했던 재미는 전혀 주지 못했다. 폭발적인 힘도, 보는 이를 감동하게 만드는 열정도, 하릴없이 세월 탓만 하게 했다. 입담과 문장이 건재하니 힘 안들이고도 몇 편의 이야기를 이끌어갈 수 있으되, 문장만으로 마음이 흡족해질 수 있다면 광고카피 모음집도 좋은 소설책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성석제의 새 책 『지금 행복해』는 그가 쓰는 새로운 단편은 그 전에 출간된 단편집 어디에다 끼워 넣어도 이질감 없이 끼어들 거라는 재미없음에의 확신을 굳어지게 했다. 여행을 주제로 한 초반 세 편은 사실 웃기지도 않고, 웃음을 위해 몰고 가는 상황은 민망하기만 하다. 소재와 상황 설정이 비슷해 습작기의 실험 같기도 하고, 내용이 어떻게 전개되리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니 평론가들이 아직도 물고 늘어지는 입담이라는 특기도 크게 어필되지 않는다.

소설의 본질이 그런 것일지 모른다. 자투리 시간을 메우기 위해 일회성 재미만 줬으면 됐지 그 이상은 철학이나 종교 서적에서나 바라야 하는 건지 모른다. 근래 성석제 소설은 소설가 스스로 소설에 대한 한계 규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소설에 대한 기대를 끝내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가 감각적인 형상화 이면에 삶의 내밀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역사와 미약한 개인이 대비되며 돈키호테 같은 인간이 역사에 뛰어들어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하면서도 끝내 역사의 일부가 되어 가는 『인간의 힘』은 성석제가 줄 수 있는 웃음과 문장의 재미, 게다가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까지 안겨주었다. 재주 없는 이가 세월을 업고 대가라는 이름을 얻어 선문답이나 해가는 게 보통인 상황에서 대중적 재미와 깨달음을 동시에 줄 수 있는 사람의 선두는 단연 성석제이다.

하지만 여행 소재의 세 편을 지나면, 『인간의 힘』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른 면에서 성석제 소설 중독을 고수하게 만든다. 표제작 「지금 행복해」는 성석제라는 이름을 떼고 보면 신인 작가의 수작처럼 보일 만큼 그간 성석제의 감성, 문체와 거리가 있다. 전개가 빠른 거야 누누이 있어 왔던 일이고, 문장이 전처럼 물고 늘어지되 한결 간결한 느낌이다. 이런 간결함은 「톡」에서 크게 부각되는데, 이 소설은 인터넷 링크에 따라 맥락 없이 이동하는 이야기들이 끝내 어디선가 물고 물리며 하나의 하이퍼텍스트 소설을 만들어 낸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이 단편은 다른 단어를 클릭하면 전에 보던 화면과 단절된 이야기가 새로 시작되듯 난데없이 시작했다 끊기기를 반복하며, 이대로 계속해도 좋고 그만해도 좋은 모호한 감성을 전달한다.

「내가 그린 히말라야시다 그림」은 내용상 반대되는 맥락에서 『인간의 힘』과 연결된다. 다들 바보로 여기는 인간이 자신만 아는 신념을 갖고 역사를 향해 돌진한 게 『인간의 힘』이었다면, 이 작품은 다들 천재로 아는 인간이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면서 예술 세계를 계속해 나가는 소설이다. 결국 두 작품 다 인간이 살아가는 힘이 무언가, 그 사람은 왜 그렇게 사는 것인가에 대한 결코 작지 않은 단서라 할 수 있다.

드라마도 아니고, 독자가 작가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가 더 잘 알다시피 중독된 사람은 더 큰 강도를 원한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이 사실이길 바라며 오늘도 서점을 헤매는 성석제 중독자들에게 아찔한 글 한편 남겨 주길 바란다. 『지금 행복해』는 분명 이전 소설집보다 강한 중독성이 있었지만, 역시나 중독자의 바람은 끝이 없다. 더 강력한 중독성으로 무장한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본다.

 

 

편집 : [이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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