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0.14 14:51

[장르문학 산책]모험 증발한 시대에 꾸는, 위대한 백일몽 - 장르 판타지

판타지가 보여준 압도적인 대중성은 기성세대의 문화에 대한 반문화이며 엘리트주의적 고급문화에 대한 불신과 저항의 표현이기도 하다.
▲ 판타지가 보여준 압도적인 대중성은 기성세대의 문화에 대한 반문화이며 엘리트주의적 고급문화에 대한 불신과 저항의 표현이기도 하다.

판타지(Fantasy)는 ‘환상’이 아니다. 판타지는 더 이상 새로운 비평적 의제도, 독자들의 관심사도 아니다. 그것은 이제 ‘현실’ 혹은 ‘일상’이다. 문학 · 드라마 · 영화 · 광고 · 게임 등 다양한 형태로 그것은 이미 우리의 일상 속으로 깊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신화 · 종교설화 · 동화 · 고딕소설 · 전위적 실험 등의 형태로 존재하던 판타지를 장르문학으로 호출한 자는 톨킨(J. R. R. Tolkien)이 아니라 바로 권태와 첨단 테크놀로지들이다. <반지의 제왕> · <해리포터> · <나니아 연대기>처럼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 영화들 그리고 <리니지> · <월드 오드 워크래프트>같은 MMORPG의 전세계적 열풍이 보여주고 있듯, 합리주의와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신화적이고 주술적인 것들의 귀환이 더욱 촉진되는 역설이 발생”하곤 한다. 현대의 마술인 기술이 고도화한 현대 사회에서 이것은 대단히 자연스런 현상이다.

판타지는 이렇듯, 자연적 · 물리학적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것을 가능하게 하는 현대마술인 기술로 인해 삽시간에 현실화되고 대중화될 수 있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목격하는 초자연적이고 비현실적인 환상이 현실로 존재하는 첨단기술과 과학의 산물이었다는 점에서 판타지의 귀환과 유행은 일종의 역설이다.

판타지가 역설의 장르라는 두 번째 증거는 그것이 유통되고 소비되는 양태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판타지를 즐기거나 읽는 중심축이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젊은 세대들인데, 판타지 게임과 영화의 매력에 흠뻑 매료된 이들이 그 연장선상에서 원작이 되는 문학텍스트들을 찾아 읽는 전도된 수용의 패턴이 나타나고 있다. 소설에서 영화로 또 게임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멀티미디어가 구축(驅逐)한 문학 독자들이 그 멀티미디어로 인해 다시 문학으로 귀환하는 이 어리둥절한 반가움,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역설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판타지에서 읽고 또 보고 싶은 것은 세 번째의 역설이다.

어의(語義)대로 판타지는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초자연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장르문학의 일종이다. 환상으로서 판타지는 문학과 예술에 내재되어 있는 속성 혹은 구성요소―즉 신화 · 전설 · 민담 · 전기소설 · 초현실주의 계열의 작품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문화사와 문학사 속에 편재해 있었다. 그러한 판타지가 장르판타지로 자리매김하게 된 데에는 우선 톨킨의 책임(?)이 크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언어학과 신화학을 가르치던 그의『반지의 제왕』3부작과 『호빗』(1937) ·『실마릴리온』이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수많은 에피고넨 텍스트들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MMORPG(다중 사용자 온라인 역할 놀이 게임)의 기원이 된 TRPG(테이블 역할 놀이 게임)의 원천 소스이기도 했고, 또 국내 장르 판타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미즈노 료(水野 良)의 『로도스도(島) 전기(戰記)』(1988)의 교과서이며 원본이 바로 그의 판타지 시리즈들이었다. 때마침 모뎀을 바탕으로 한 케텔 · 하이텔 · 천리안 등의 PC통신 사업체들이 상업적인 서비스를 시작하던 시기이기도 해서 장르판타지는 삽시간에 청(소)년 문화로 자리를 잡았고, 아마추어 작가들을 양산해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가 장르 판타지에서 발생하기를 기대하는 세 번째의 역설의 근거는 여기에 있다. 즉 판타지가 아버지의 세계를 극복함으로써 새로운 문명사적 전환을 이루었던 젊은 아들들의 문화라는 점이고, 이들로 하여 모험이 증발하고 권태롭기만 한 현실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과 바깥을 즐기고 사유하도록 하는 상상력의 훈련장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새로운 문명 혹은 문화가 아버지의 문화를 부정한 사생아들에 의해 이룩되었다는 문화인류학적 명제와 근대소설이론의 설명은 좋은 예이다.

전공투(全共鬪)의 몰락과 함께 찾아온 좌절과 절망을 <기동전사 건담> 같은 애니메이션과 판타지게임을 통해서 해소하고자 했던 일본의 좌파 청년들이 결국엔 현실과 장벽을 쌓고 인공의 낙원 속으로 도피해 버리는 오타쿠(お宅)로 침몰해 버리는 심각한 부작용도 없지 않았지만, 이들에 의해 새로운 상상과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지지 않았던가. 비록 판타지가 자본과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의 도피욕망에 의해 추동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보여준 압도적인 대중성은 다른 한편에서 기성세대의 문화에 대한 반문화이며 엘리트주의적 고급문화에 대한 불신과 저항의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장르판타지의 가치와 의미는 여기에 있다. 우리의 문화사적 과제란 바로 이런 젊은이들의 갈증과 열망과 저항을 현실변혁의 새로운 동력으로 흡수하여 양육할 수 있는 위대한 백일몽, 요컨대 이를 진정하고 새로운 진보의 세기를 열어가려는 꿈과 의지로 발전시키는 일이다.

혹시 아는가, 부모를 잃고 이모네 집 다락방에 얹혀사는 구박덩어리 고아소년이 볼드모트의 사악한 기도에 맞서 마법의 세계를 지켜내는 영웅으로 거듭 난 것처럼 또 연약하고 평범한 호빗이 세계를 구원하는 영웅이 되어 귀환했던 것처럼 판타지 소설을 읽고 온라인 게임에 열중하는 이웃집 게으름뱅이 게이머가 새로운 진보의 세기를 밝히는 촛불이 될지…. 실제로 현대의 장르판타지는 김영도의『드래곤라자』나 김민영의『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후일『팔란티어』로 개칭됨) 등에서 이미 가능성을 입증해 보였고, 길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의 걸작 영화「판의 미로(Pan's Labyrinth)」에서는 새로운 예술적 지평과 정치적 상상력에 도달하기도 했으니, 이 같은 기대가 결코 근거 없는 헛된 백일몽(phantasy)은 아닐 것이다. 이제 우리를 열광시킬 세 번째의 역설인 진짜배기 위대한 ‘판타지’를 언젠가는 기어코, 만나고야 말 것이다.

 



* 2008-09-10 오후 5:18:43  조성면 _ 문학평론가
Trackback 0 Commen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