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1.07 11:18

일어나 행진할 시간

정익진 시집 『윗몸일으키기』
김상미 _ 시인


신작 시집 『윗몸일으키기』를 낸 정익진 시인.
▲ 신작 시집 『윗몸일으키기』를 낸 정익진 시인.

정익진 시인은 보따리 영어 선생님이다. 하지만 그를 만나면 영어보다는 체육을 더 잘하게 보인다. 운동선수 같은 외모 때문이다. 그는 영화와 음악, 술을 좋아한다. 다소 무뚝뚝, 말이 없는 외면과는 달리 내면은 매우 섬세하고 감각적이다. 그리고 그의 시를 보면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나이에 비해 시가 너무 젊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건 정익진 시인의 시에 대한 식을 줄 모르는 열정과 호기심 때문이리라.

이번에 나온 두 번째 시집 『윗몸일으키기』(북인)에도 젊고 싱싱한 시들이 많다. 첫 시집인 『구멍의 크기』(천년의 시작, 2003)가 거대한 세계 속을 둥둥 떠다니는 자신만의 방을 처연할 정도로 치열하게 지키고 견뎌대는 데 혼신을 다한 시집이라면, 두 번째 시집 『윗몸일으키기』는 그 방을 빠져나와 거리로, 광장으로, 헬스클럽으로, 사람들 속으로 자신을 자유롭게 풀어놓은 시집이라 할 수 있다. 첫 시집에 비해 문을 활짝 열어놓은 탓인지 잘 읽히고 소통은 물론 소화에도 껄끄러움이 없다. 
 
술 마시고, 운전하면서, 졸다가, 자다가, 계속 갔다/ 핸들을 붙잡은 채로…/ 한동안 캄캄한 동물들이 지나다니고…/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나는 결백한데, 어디야 여기가?/ 어딘 어디야, 참 좋은 병원이지/ 저것은 아코디언,/ 차가 아코디언 될 뻔했단 말이야/ 부러진 갈빗대에서도 아코디언 소리가 나는 거야/ …… '아르망'이라는 사람 알아?/ 수십 대의 차량을 압착기로 눌러/ 작품으로 만든 조각가야/ 어찌 될 뻔했니, 아무리 취했다지만/ 고속도로 중앙에 차를 세우고/ 잠자는 놈이 어디 있냐?/ …/ 영원히 아르망의 세계 속으로 갈 뻔했지만/…/ 뒤에서 트럭이 들이받는 순간,/ 벨트만 매지 않았더라도, 앞 유리 창 밖으로/ 내동댕이쳐졌을 것을,/…/ 아코디언 소리가 들려?/ 주름진 사이사이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그 끊어진 필름의 장면 장면들… (「죽을 뻔했다, 아르망」 중에서)

음주운전을 하다 죽을 뻔한 이야기를 시로 옮긴 재미있는 시이다. 자신이 타고 다니는 차 이름인 '아르망'과 누보레알리즘의 선두주자인 프랑스의 조각가 '아르망'을 대치시켜 시 전체를 한 편의 발랄한 블랙코미디로 만들어 놓고 있다. 게다가 부러진 갈빗대의 통증을 아코디언 소리로 묘사해 칙칙할 뻔한 시를 밝고 유머러스한 시로 만들어 놓았다. 시인의 오랜 내공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그 외에도 시집 곳곳에 운동이나 운동기구를 주체로 하거나 재료로 사용한 시들을 배치해 시집 전체를 경쾌하고 생동감 넘치는 현장으로 이끌고 있다. 그 중 시집 표제작인 「윗몸일으키기」를 보자. 윗몸일으키기는 복근 운동의 하나로 기초 체력을 가늠하는 데 널리 사용하는 운동이다. 어떤 운동보다도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운동이며 모든 움직임의 시초이기도 하다. 윗몸을 일으켜야만 인간은 직립할 수가 있고 움직일 수가 있다.

  쉰하나, 쉰둘…
  책 속의 문장들 몸을 일으켜 책이 펴지고
  씨앗들은 깨어나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오랜 시간 바닥에 누웠던 빛들이 일제히
  일어나 행진할 시간이다  
(「윗몸일으키기」 중에서)

시인에게 있어 윗몸일으키기 운동은 곧 펜을 잡는 일일 것이다. 펜을 잡아야만 언어 자체를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들 수가 있고, 언어에 살과 피를 공급할 수가 있다. 하여 시인은 수십, 수백 번 윗몸일으키기를 반복한다.

시인이 윗몸일으키기에 열중하는 것은 "일어나 행진할 시간"을 얻기 위해서이다. '책이 펴지고, 열매가 맺히고, 누웠던 빛들이 일제히 일어나' 시와 인간과 우주가 하나로 포용되는 상태! 재생을 통한 또 다른 생성. 일탈이나 도피가 아닌(그런 시들은 몇 줄로 세울 만큼 많다) 생성과 도약의 세계, 건강하고, 밝고, 생동감 넘치는 세계이다. 그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시인은 이제 「뜀틀체조」 앞으로 간다. 

목발과 함께 걸어간다./ 천천히 한 발, 한 발 다가가며/ 한쪽 목발은 강물에/ 나머지 목발은 바다로 던져버리고/ 절뚝거리며 걸어간다. 점점 걸음 빨라지며/ 빨라지며, 신고 있던 낡은 신발이/ 맨발로 바뀐다. 완벽한/ 걸음걸이로 걸어간다. 뛴다./ 뛰어간다. 저 멀리 뜀틀이 보인다./ 계속 뛴다./ 뛴다. 뛰어, 전속력으로…// (중략) // 뛰어가서, 도약…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하략) // 불안정한 착지,/ 그 뼈아픔이 나는 좋다.  (「뜀틀체조」 중에서)

한 편의 다큐(인간 승리) 같은 이 시는 '목발'에서 시작하여 '불안정한 착지'로 끝나지만, 시인은 힘차게 말한다. "그 뼈아픔이 나는 좋다."고. 얼마나 경쾌한 마무리인가. 안정한 착지가 이루어질 때까지 매번 반복되고 시도될 수밖에 없는 일(시쓰기)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불안정한 착지,/ 그 뼈아픔이 나는 좋다."라고 말할 수 있는 힘! 그러한 힘이 「그러한 광장」을 만들어내고, 「따분한 저격수」를 아파하고, 「Z와의 인터뷰」를 견뎌내고, 「포만의 세계」에 일침을 가하고, 「빨간 아령을 든 여자」를 사랑하고, 「모닝커피」를 홀짝이면서도, 자신의 유골단지를 싸고, 언제나 따뜻한 돌멩이(인간의 교유)를 찾아, 「지구본」을 돌리고,  언제나 똑같은  「무인카메라」 앞에서, 신나게 「사과를 깎으며」, 「팬터마임」을 즐길 수 있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그의 시들이 남다른 감동으로 다가오는 건 그가 빼어난 감각능력자이기보다 끝없이 노력하는 언어탐구자이기 때문이리라. 거기다 초현실적 명랑성이라 이름 붙여도 좋을 시인의 따뜻한 인간애가 시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리라.

굶주린 피아노가/ 늪 위에서 울부짖는다.// 노을이 선명할 무렵,/ 나는 야자수를/ 타고 오르고 피아노 안에서는/ 물고기의 지느러미로/ 배를 저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피아노의 침묵은 잉카제국의/ 돌무덤을 닮았고/ 피아노 속 연못과/ 피아노 속 짐승들이 나를/ 흥분케 한다. 가져가라,/ 여기에 뼈들이 쌓여 있다.// 피아노의 흰 뼈와 검은 뼈들은/ 부드러운 손가락들을 견딜 수가 없다.   (「피아노」전문)
 
시각과 청각이 한데 어우러져 아주 환상적인 이미지(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그의 아름다운 시 「피아노」. 마치 깊은 바다 속에서 건져 올린 피아노를 빛 속에서 바라보는 듯한, 아니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를 보는 듯한, 이미지 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시. 이쯤 되면 다음 번 시집엔 감각과 사유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다 잡은, 멋진 요리상을 보여주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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