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3. 4. 08:35

발파라이소, 가난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산동네

[남미액션투어 ②]칠레_발파라이소
                                                                                              김강 _ 남미액션투어 기획자, LAB39 디렉터
발파라이소 전경. 44개의 언덕꼭대기까지 빼곡히 집들이 들어찼다.
▲ 발파라이소 전경. 44개의 언덕꼭대기까지 빼곡히 집들이 들어찼다.

산티아고에서 동쪽으로 120KM를 가면 칠레의 주요항구 도시인 발파라이소에 도착한다. 발파라이소와 산티아고 사이에는 황무지와 같은 산이 가로놓여 있다. 그 산에는 거대한 선인장들이 우뚝 솟아있다. 이 선인장을 보며 버스로 이동하다 보면 칠레의 북쪽은 사막이 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북으로는 사막, 남으로는 남극과 연결되어 있는 칠레. 그 중간 지점에 산티아고가 있고, 바다를 면한 곳에 항구도시 발파라이소가 있다.

발파라이소로 가는 버스는 우리나라 우등 고속버스와도 같은 느낌이다. 초로의 노인이 2리터가 넘는 코카콜라 피티병에 입을 대고 마시고 있는 머리 위로 헐리우드 드라마가 상영되고 있었다. 전 세계 도시 어디에서나 규격화된 삶의 모습이 진행된다. 버스 바깥으로 포도농장이 보인다. 어린이, 청년, 어른 모두가 자기 키 보다 조금 큰 포도나무 아래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들이 재배한 포도가 한국으로 온다.

11월 3일 12시. 2시간 남짓의 버스여행 후에 우리가 도착했을 때 발파라이소에는 약간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정정엽은 남미에 와서 멈춰버린 손목시계의 건전지를 발파라이소에서 바꾸었다. 발파라이소는 2년 전에 방문했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또한 1980년대에 제작된 미겔리틴의 영화속 풍경과도 다르지 않았고, 네루다가 1970년대에 작성하기 시작한 그의 자서전에서 묘사한 풍경과 비교해도 낯선 것이 없었다. 발파라이소는 미겔리틴, 네루다가 묘사한 그 시절 그대로 멈춰진 시계처럼 우리를 맞았다.  

발파라이소 산동네 풍경.
사진 출처 www.voyage-au-chili.com1

벼룩시장이 열린 2006년의 발파라이소. 구리광산의 나라답게 구리선을 조형화한 작품이 눈에 띈다. 

작은 선술집과도 같은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관광객들이 아닌 발파라이소 보통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이런 허름한 레스토랑이 적격이다. 주인장은 영어를 못하고, 우리는 스페인어를 알지 못한다. 벽에 스페인어로 쓰여진 메뉴를 보고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일행 중 2명이 채식주의자인 까닭에 요리 선택을 잘 해야만 한다. 온갖 종류의 바디랭귀지가 작렬하고, 몇 번의 웃음이 흐르는데 요리의 결정은 전적으로 주인장, 주방장의 몫이다. 우리는 그들의 눈빛만으로 소통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 레스토랑에 다른 손님이라도 있다면 그들의 요리를 보고 참고라도 할 텐데, 어두컴컴한 그곳엔 우리가 첫 손님이다. 일단 어디서도 실패할 확률이 없는 맥주를 먼저 시켰다. 까주엘라 드 아베(Cazuela de Ave) 아마도 이런 이름일 것이다. 국에 고기와 옥수수가 통째로 나오는, 약간은 니글거리는 국. 그래도 국물이 있으니 한국인인 우리에게는 반갑다.

칠레 요리는 스페인 정복 이후 전통요리와 유럽식 요리가 혼합되어 생겨난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음식을 시킬 때면 음료를 같이 주문해야 하고, 다 먹고 나면 디저트도 주문을 받는다. 물론, 음료와 디저트 모두 안 시키고 메인 요리만 먹어도 되지만, 대부분의 칠레인들은 콜라를 시키는 듯 했다. 우리는 언제나 맥주나 와인과 함께 식사를 했다.

초로의 주인아줌마는 카메라 장비가 한 짐인 우리에게 연신 조심하라며 손짓발짓으로 안전에 유의하라고 한다. 남미 어디를 가나 선한 눈빛을 가진 사람들에게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아랫동네에서 바라본 산동네 풍경

천국과 같은 계곡이라는 뜻을 지닌 ‘발파라이소’는 판자와 함석으로 지은 집이 44개의 구릉을 뒤덮고 있다. 우리식으로 달동네라 불릴 수 있는 이 구릉위의 동네들은 마치 바다에서 해일이 밀려왔다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머문 것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바다의 깊은 심연으로부터 솟아나와 뭍의 생활을 이어가는 듯한 발파라이소 사람들. 높게 솟은 언덕은 사람을 밀어 내지만, 사람들은 그 언덕의 벼랑에 매달려 말뚝을 박고 필사적으로 버틴다. 버팅김의 피곤함을 잊고 싶었던 것일까. 발파라이소 산동네의 색채는 눈부시게 아름답다. 

“발파라이소 항구는 안데스 산맥에서 빠져나온 지맥과 바다 사이의 투쟁이다. 그러나 이 싸움의 승리자는 인간이었다. 풍요로운 바다와 언덕이 만나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이런 도시 특유의 통일성도 형성되었다. 군대 막사와 같은 통일성이 아니라 약동하는 봄철의 다채로운 색깔과 시끄러운 소리로 이루어진 통일성이다. 집은 갖가지 색깔이 되었다. 보라색과 노란색, 심홍색과 코발트색, 초록색과 자주색으로 어우러졌다. 이리하여 발파라이소는 진정한 항구가 되고, 육지에 좌초했으나 멀쩡한 선박이 되고, 바람에 깃발을 펄럭이는 배가 되었다. 이 깃발의 도시에 대양의 바람이 찾아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1)

색색깔의 컨테이너가 정박중인 발파라이소 항구

언덕 꼭대기를 집들이 넘어간다.

‘라 세바스티나’ 라는 이름이 붙은 발파라이소 산동네 집에 살았던 파블로 네루다는 이 동네를 이렇게 표현했다. 갖가지 색깔이 깃발처럼 나부끼는 산동네의 색채는 이호석작가를 자극했다. ‘아마도 이 색들은 어떤 기획자의 기획 아래 색을 분배한 것이 틀림없는 거 같아. 혹시 그 기획자 알고 있니?’ 그러나 약동하는 봄과도 같고, 시끄러운 소리들이 만들어낸 통일성의 발파라이소의 색채는 누군가의 기획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발파라이소의 좁은 골목과 하늘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계단과 누추한 담장에 칠해진 색채들은 그저 그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덜 팍팍하게 만들어 보고자 하는 개인 기획들의 집합일 것이다. 물론 이호석 작가가 진정으로 발파라이소를 ‘기획자’의 의도로 해석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마치 ‘기획자’가 있었던 것처럼 통일성과 배색을 보여주는 발파라이소의 삶의 현장에 대한 경외감이었을 것이다. 가난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동네 발파라이소.(2) 드러내고 싶지 않아도 드러날 수 밖에 없는 빈곤의 현실은 산꼭대기로 이어지는 좁은 계단들에서도 만발한다. 가파른 계단참에서 잠시 남미의 햇살이 쉬어간다.

작은 골목에 있는 집들은 계단들로 서로 이어져 있다.
계단은 끝간데를 모르고 넓어졌다, 좁아졌다, 서로
포개지고, 나뉘어 지면서 산꼭대기로 이어진다. 

발파라이소의 색채가 삶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발화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이호석 작가의 말대로 ‘기획자’에 의한 벽화거리도 있다. 현재 네루다 박물관으로 쓰이는 ‘라 세바스티나’ 를 지나 언덕 아래로 내려가면 <열린 하늘 아래 미술관 Museo a cielo abierto>이 있다. 산동네의 벽화거리는 1969년 가톨릭 대학(Instituto de Arte de la Uiversidad Catolica)미대 학생들이 콘셉시옹(Concepcion) 지역에 벽화를 그리면서 시작된 벽화운동에 영향을 받았다. 1990년대에 네메시오 안톤(Nemesio Antunes)과 마리오 토랄(Mario Toral) 같은 작가들이 발파라이소 산동네의 벨라비스타(Bellavista) 지역의 벽화를 그렸다.

라세바스티나. 네루다 박물관 입구.

산동네 가파른 골목 어귀에 걸린 ‘열린 하늘 아래 미술관’ 의 간판

미술가들이 발파라이소에 벽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도시 재건운동이 시민들에 의해 발의되었기 때문이다. 발파라이소는 마젤란 해협에서 가까운 관계로 일찍부터 유럽 사람들이 많이 정착해서 살던 곳이었다. 스페인 뿐 아니라, 영국, 독일 등지에서도 발파라이소로 몰려와 자신의 나라 방식으로 건물을 짓고 생활했다. 그러나 파나마 운하가 완공된 후 발파라이소의 중요성이 축소되고, 돈과 힘이 있는 사람들은 산티아고와 같은 대도시로 이주하자 발파라이소는 거의 버려진 도시처럼 여겨졌다. 황폐화된 도시를 다시 살려보자는 시민중심의 재건운동은 발파라이소의 벽화거리, 열린 미술관을 만들었다.

이 골목길이 미술관이다. 좌우의 작은 골목들에도 그림이 빼곡하다.

단 하나의 집 색깔 하나만으로도 강렬하다.

발파라이소는 색채를 품고 있기도 하지만, 긴 역사를 품고 현재까지 운행되는 아센쏘르(Ascensores 야외엘리베이터)가 있어서 더욱 풍치가 아름답다. 100여년이 흐르는 동안에도 위 아래 두 개의 도르래로 운행되는 16개의 아센소르는 산동네 사람들의 고단한 다리를 잠시나마 쉬게 해 주었다.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만들어져 바닥 사이로 레일이 보이기도 하고, 63.5°의 가파른 경사면을 150미터 이상 올라가기도 하지만, 아센소르는 산동네 꼭대기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가장 유용한 통행수단이다. 그러나 최근 관광객들이 점증하자 발파라이소 시는 아센소르의 요금을 인상하였다. 이에 격분한 산동네 주민들은 관광객들에게 아센소르를 타지 말 것과 요금인상에 항의하는 행동에 동참하라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윗동네와 아랫동네를 가장 빠르게 연결시켜 주는 아센쏘르.
발파라이소는 아센쏘르와 함께 독특한 풍치를 지닌 도시가 되었다.

이러한 아센쏘르가 발파라이소에 16개 이상이 있다. 그 중 몇기는 너무 낙후되어 운행을 못하기도 한다.

다종한 유럽 스타일의 집들, 색채가 깃발로 나부끼는 산동네, 대서양으로 열린 바다, 벽화거리미술관, 44개의 언덕, 16개의 아센쏘르가 조화를 이루는 발파라이소는 2003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네루다가 사랑했던 도시이기도 하고, 칠레 현대사의 상징적인 두 인물 아옌데와 피노체트가 태어난 도시이기도 하다. 아옌데 사망 이후 그의 시신이 묻혔다고 추정되는 도시 역시 발파라이소다.

내다 걸린 빨래들 오른쪽 뒤편 위쪽으로 작게 벽화가 보인다.

발파라이소 산동네 마을에서는 여기저기 햇살아래 빨래를 널어놓은 집들이 많다.

발파라이소의 집들

발파라이소의 집들

발파라이소의 집들

네루다가 생전에 살았던 집에서 내려다 본 풍경

벽화들

벽화들

하늘로 이어지는 산동네 골목

벽화들

벽화들

벽화들

산동네에서 타일로 조형물을 만드는 젊은 작가를 만났다. 한국에서 온 예술가들이라고 하니
상당히 반가워 하는 눈빛이었다.

자신의 동네 풍경을 그려 넣은 벽화들

자신의 동네 풍경을 그려 넣은 벽화들

드럼통 미끌럼틀. 드럼통 몇 개를 이어서 예쁘게 색칠한 후에 미끄럼틀로 만들었다. 낡아서
페인
트칠이 좀 벗겨지긴 했지만 동네 꼬마들에 대한 마음을 읽기에는 하나도 낡지 않았다.


다시 발파라이소의 벽화 몇 개들

다시 발파라이소의 벽화 몇 개들

흑백사진 시절의 발파라이소.
사진 출처 www.ciudaddevalparaiso.cl2

아랫동네와 윗동네를 분주하게 오가고, 가파른 언덕을 곡예하듯이 질주하는 버스.



** 발파라이소의 벽화들을 더 많이 보고 싶은 분들은 아래의 링크를 따라가서 지도위에 표시된 번호를 누르면 사진과 설명(스페인어)를 볼 수 있다. 
http://www.ucv.cl/site/pags/museo/index.html#

** 아래 링크에서는 칠레의 다양한 벽화들을 볼 수 있다.
http://www.pbase.com/nvuillemin/murales&page=3

** 발파라이소 시청 홈피를 들어가도 발파라이소의 멋진 풍경들을 많이 볼 수 있다.
 
http://www.ciudaddevalparaiso.cl/inicio/intro.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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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1>『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박병규역, 민음사, 2008년. p. 98

2> 네루다. 산동네에서는 가난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린다. 산동네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으며, 무엇을 못 먹고 무엇을 못 입는지, 세상이 다 안다. 집집마다 내걸린 빨래 와 끊임없이 늘어나는 맨발의 아이들은 벌집 같은 판자촌에서도 사랑은 식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같은 책 p.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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