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1. 30. 11:42

무한반복의 지옥에서, 비극적으로

[박서방의 주절주절] ‘다른 대화’가 필요해

감금이란 물리적인 상태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카드명세서도 감금이고 대출이자도 감금이다. 의무교육도, 병역의무도, 결혼제도도 모두가 감금이다.

▲ 감금이란 물리적인 상태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카드명세서도 감금이고 대출이자도 감금이다. 의무교육도, 병역의무도, 결혼제도도 모두가 감금이다.

날이 추워지니 몇 년 동안 안 보던 사람들을 보는 일이 조금씩 늘어난다. 대개 학교 동창들이거나 어릴 적 친구들, 혹은 전에 다니던 회사 동료들이다. 우리들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러 간다. 아주 드문 경우지만 차를 마시는 경우도 있다. 마주 앉으면 서로의 근황을 묻고 답한다. 상대방의 건강과 가족의 안녕을 묻고 답하는 것에는 채 30분도 걸리지 않는다. 그때부터가 문제다. 어디서 얘기가 풀려 들어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틈엔가 우리는 부동산과 주식, 펀드 이야기를 하고 자연스럽게 정치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진다. 얘기해봐야 서로 가슴만 답답할 따름이지만 이 수순은 피할 길이 없다.

박서방은 여기서 지옥의 징그러운 한 단면을 본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다시 돌아오고 마는 반복. 소설가 장정일이 자신의 작품 『보트하우스』에서 “반복은 지옥이다”라는 전언을 던졌을 때만 해도 그 진의를 파악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요즘 그것이 정확하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철들고 나서 깨달은 일상의 가장 끔직한 현상은 지독한 고통이나 절망감이 아니라 그것이 피할 도리 없이 쳇바퀴 돌 듯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즐겨 읽어온 만화 중에 후쿠모토 노부유키라는 독한 분이 그린 『도박묵시록 카이지』라는 독한 작품이 있다.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회낙오자 주인공이 불법 도박 세계에 빠져 겪게 되는 모험담(?)을 그린 이 만화는 작자의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지독하리만치 차가운 냉소로 유명한 작품이다. 그 작품에서도 가장 섬뜩한 것은 주인공 카이지를 둘러싼 환경의 폐쇄성과 무한반복이다. 카이지가 도박과 부채의 개미지옥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김없이 새로운 지옥이 열린다.

솔직히 철없던 때는 이 만화에서 그려진 세상이 나와는 상관없는 가상의 공간이라고 여겼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믿음과 사랑, 우정 같은 인간적 감정들에 대한 강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신뢰를 뒷받침할 근거들도 주변에 많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어느 순간 박서방의 주변이 카이지의 세계와 비슷하게 변해 있었다. 카이지 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탈출하지 못한 채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로부터 시작된 미국발 금융위기가 바다 건너 박서방의 일상에 침윤해 들어오는 지난 1년간을 돌아보면 이 세계는 정녕 ‘노웨이아웃’이다.

그러니 앞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각종 송년모임도 전혀 기다려지지 않는다. 어떤 시추에이션으로 전개될지 뻔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초반 30분 정도의 즐거운 회합 이후 얼마 안 있어 누군가의 시작으로 답 없는 ‘경제 얘기’가 시작될 것이 뻔하다. 누군가는 지금은 뭘 사야 될 시기라는 근거 없는 낙관론을 펼칠 것이며 또 누군가는 언제 무엇을 사야한다는 그 보다는 조금 근거 있어 보임직한 예측을 내놓을 것이다. 그러면 또 누군가는 재테크고 나발이고 당장의 힘듦을 토로할 것이며 결국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고 헤어질 것이다. 정치 얘기도 어떻게 진행 될 것인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게 1년을 마무리할 생각을 하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생각해보니 수년전 크게 인기를 모았던 영화 <매트릭스>가 대중들에게 주었던 카타르시스 역시 무한 반복되는 세계에서의 탈출이 아니었나 싶다. 결국 감금이란 물리적인 상태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카드명세서도 감금이고 대출이자도 감금이다. 넓게 보자면 의무교육도 감금이고 병역의무도, 결혼제도도 감금이다. 모든 공화국에는 기본적으로 감금의 질서가 있으며 그로 인해 사회가 유지된다. 다만 최근 박서방이 살고 있는 공화국에서 감금이 개인에게 보다 폭력적인 것은 잠시 심호흡을 할 작은 돌파구마저 막고 있다는 것에 있다. 개인들의 사적 관계마저도 철창 안에서 한 치도 못 벗어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 비극적인 것이다.

2008년을 보내며 친구들과 다른 대화를 할 수 있을까? 박서방은 한번 해볼까 한다. 맛이나 냄새나 향기 같은 원천적 감각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다. 혹은 인생이나 사랑의 의미 같은 사춘기 시절의 소재를 가지고도 얘기해보고 싶다. 미친놈처럼 보이겠지만 그러지 않으면 진짜 미칠 것 같다. 이제 빈정거리지 않으면서도 좀 웃기는 얘기를 해보고 싶은 겨울이다.

 


박서방 _ 인터넷 만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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