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11 11:28

만화란 장난인가 - 1950년대: 漫畵史(만화사) 연구의 출발


1955년 『아리랑』 10월호에 발표한 「우리나라 漫畵의 發達史」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만화사의 주요한 사건들을 정리하고 있다.
▲ 1955년 『아리랑』 10월호에 발표한 「우리나라 漫畵의 發達史」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만화사의 주요한 사건들을 정리하고 있다.

김성환은 ‘고바우’ 캐릭터를 통해 우리에게 친숙한 만화가다. 그는 1949년, 『연합신문』에 ‘멍텅구리’라는 작품을 통해 만화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전쟁 중에도 『만화신보』, 『육군화보』 등의 잡지에 작품을 연재하는 한편, 단행본으로 「도토리 용사」 등을 발표하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전쟁이 끝난 직후 『학원』에 발표한 『꺼꾸리군 장다리군』은 상당한 인기를 모았고 후에 영화(1)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1955년에는 자신의 대표적인 캐릭터 ‘고바우’를 『동아일보』에 선보이기 시작했다.(2) 이후 1950년대를 지나며 만화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김성환이 비평가로서의 면목도 보여주었다는 사실은 크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에는 『아리랑』, 『여원』, 『청춘』, 『만화춘추』등이 대표적인 대중잡지라 할 수 있었는데, 김성환은 이들 잡지에 자주 만화와 관련된 글을 발표했다. 그 중에 특히 1955년 『아리랑』 10월호에 발표한 「우리나라 漫畵(만화)의 發達史(발달사)」와 1957년 7월 『동아일보』에 발표한 「만화란 장난인가」라는 글이 주목을 끈다.


1) 우리나라 漫畵(만화)의 發達史(발달사)

이 글이 실렸던 『아리랑』은 1953년에 창간된 본격 대중잡지다. 특히, ‘만화신인공모전’을 개최하여 만화와 상당한 인연을 맺은 잡지인데, 김천정, 오룡 등이 이곳을 통해 등장하게 된다. 또한, 이정문, 윤승운 등 소위 ‘명랑만화 세대’의 대표적인 작가들도 활발히 활동했던 공간이기도 하다.(3) 그렇기 때문에 만화평론이 실린다 할지라도 별스러워 보일 것이 없는 지면이었고, 오히려 만화평론을 통해 당시 대중잡지의 폭넓은 기획력을 마주할 수 있었다.


김성환이 정리한 우리나라의 만화발전 양상은 시기별로 크게 일제시대, 해방공간, 한국전쟁 시기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로 정리되어 있다. 그는 일제시대에는 “언론계에 대한 탄압이 심했으므로 출판물이 극소수였기 때문”에 만화가가 활발히 활동할 공간이 제한적이었음을 지적하면서 특별히 『신동아』 『별건곤』 『야담』 등 당대 대표적인 매체를 통해 작품을 발표했던 김규택, 노심선, 김규선 등의 작가를 소개한다. 해방이후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5년 동안 부침을 계속한 매체와 이를 통해 데뷔한 작가들의 활약상은 다음과 같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얼마 후 김소운 씨가 만화행진이란 타이틀로 월간만화잡지 형식의 타블로이드 OO판을 발행케 되었으니 이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의 순만화지가 되었으나 불행히도 2호를 발행하고 나서 폐간을 당하고 말았다. 서울신문사에선 주간서울이 발간되어 여기에 시사만화와 연재만화 서 참판을 그린 임동은 씨도 잊을 수 없는 분이다. 소학생지엔 김의환 씨가 또한 활약을 하였고 이때에 창간된 연합신문엔 필자가 연재만화를 실었다. 만화행진의 뒤를 이어 김용환 씨가 발간케 된 만화뉴스엔 신동헌 씨가 새로운 화풍을 보여주어 인기가 있었고 비판신문에 이병주 씨가 시사만화를 연재한 것도 잊혀지지 않는다.(중략) 소년, 진달래, 어린이나라 같은 어린이 잡지에도 만화가 많이 게재되었다. 김용환 씨가 발행하고 김의환, 신동헌 제씨와 필자가 관계한 만화뉴스는 그 후 3만 5천부란 주간지 최고의 발매부수를 유지하게끔 발전하였으나 사건이 있어 분열이 되고 김용환 씨가 만화신문을 새로이 창간하고 만화뉴스에 임동은 씨가 주동이 되어 나왔으나 얼마 되지 아니하여 6.25 사변이 일어나 일시 암흑기에 들어가게 되었었다.”


마치 근대문학의 출발을 주도했던 1920,30년대 동인지의 역사를 마주하는 것과 같이 만화계에도 매체를 중심으로 다양한 작가들이 동맹을 맺어왔음 보여준다. 연도에 대한 구분이 없이 시간적인 흐름에 따라서 주로 기억에 의존해 정리한 것으로 보이지만, 일제시기부터 당대까지 우리 만화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의의를 지닌다 하겠다.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만화뉴스의 발행부수가 3만 5천부였다는 데이터를 제시하고 있는 점인데, 최근 잡지 및 출판시장과 대비해보더라도 일반 단행본이 아닌 정기간행물의 발행부수로서 결코 만만치 않은 부수임을 알게 되고, 이는 곧바로 당시 만화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케 해준다.


한편, 한국전쟁은 다른 분야의 경우에서처럼 만화계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김성환은 이 시기에 “임동은 씨는 작고하였고 신동헌 씨는 시골에 내려가 버렸고 이병주 씨는 일선으로 나가버렸다.”고 지적하면서 전쟁 시기 작가들의 신변에 일어난 변화를 전한다. 전쟁 후에는 신진작가들이 합류하면서 바야흐로 만화전성기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밝히면서 차후에는 외국으로도 진출하는 작가가 등장하고 내용적으로도 보다 다양한 작품들이 발표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글을 마무리 짓고 있다.

1978년에 열화당에서 발간한 『고바우와 함께 산 半生: 漫畵家의 自傳的 人生論』에는 당시까지 김성환이 발표한 주요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일제시대부터 1956년 당시까지 우리나라 만화역사를 정리한 이 글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우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만화사의 사건들을 정리하면서 매 시기 작가, 매체, 작품 등에 관한 구체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한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리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연대는 등장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작가라는 신분을 통해서 경험한 사실들을 기초로 하여 기억에 의존해 정리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비록 구체적인 연도가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일제시대부터 진행되어 온 우리 만화의 역사를 최초로 정리한 글이라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글에서는 우리나라 만화의 역사를 ‘20여년’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이도영의 작품이 『대한민보』에 실렸던 1909년대를 우리 만화의 출발로 삼은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일간지에 만화가 발표되면서 대중적으로 확산된 1930년대를 출발점으로 삼았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2) 漫畵(만화)란 장난인가

김성환은 시사만화가로서 사회적 문제에 대해 직설적인 언어보다 풍자와 해학을 통한 은유적인 표현을 통해 독자들에게 많은 웃음과 감동 그리고 통쾌함을 선사해왔다. 이와 더불어
비평가로서는 만화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견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부분도 있어서 그의 남다른 식견을 엿볼 수 있다. 1957년 『동아일보』 7월 5일자에 발표한 「漫畵(만화)란 장난인가」는 만화에 대한 사전적 정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 글은 의문문을 통해 글쓴이의 의지가 더욱 강력히 전달되도록 제목이 붙여졌다. 그만큼 짧은 분량이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그의 문제제기는 우리말 사전에 실렸던 만화의 ‘의미’에 대한 부분이다. 당시 사전에는 ‘漫畵(만화)란 名詞(명사)로서 그 뜻은 아무 생각 없이 붓이 돌아가는 대로 그린 그림, 장난으로 그린 그림, 漫筆畵(만필화)’라고 실려 있다고 전하면서 이에 대해 “실로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탄식한다. 반면 일본에서는 ‘하나의 새로운 表現樣式(표현양식)을 갖춘 給畵(급화)’로 기술되어 있음을 설명하고 ‘아무 생각 없이 붓이 돌아가는 대로 그린 그림’이라는 무책임한 해설에 대해 그는 “유독 우리말 사전에만 ‘아무 생각 없이 막 그린 그림’으로 씌어져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강하게 반문하고 있다.


한편, 글의 말미에서는 다음과 같이 대표적인 해외만화의 사례를 들어 ‘만화’에 대한 적절한 사전적 정의를 촉구한다.


“아무 생각 없이 막 落書(낙서)를 하듯이 장난삼아 그린 그림으로서 英國 漫畵家(영국 만화가) ‘데임’은 六千萬 名(육천만 명)의 讀者(독자)를 가졌고, 美國(미국)의 ‘디즈니’는 그것으로 映畵(영화)를 만들어 아카데미賞(상)을 十八(십팔) 회나 받았고 佛蘭西 漫畵家(불란서 만화가) ‘에고․앨’은 장난삼아 그린 그림으로 一九五二年度 國際平和賞(1952년도 국제평화상)을 받았단 말인가? 우리나라에선 漫畵(만화)의 歷史(역사)도 짧고 認識(인식)도 不足(부족)한 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모호하고 無責任(무책임)한 說明文(설명문)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묻고 싶다. 이후의 사전 刊行(간행)에 있어선 이런 專門分野(전문분야)에 걸친 用語(용어)에 對(대)해서도 좀 더 誠意(성의)를 베풀어주었으면 하고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역사적 측면에 관한 연구의 출발이 그 기원(起源)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인식해본다면 어원을 따져 만화의 의미를 재고시키는 김성환의 이와 같은 문제제기는 만화사 연구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화가로서 ‘김성환’이라는 이름은 해방 이후 현재까지, 아니 앞으로도 우리나라 만화계를 대표할 만큼 큰 무게감을 지닌다.(4) 그것은 지난 45년 동안 연재된 ‘고바우’의 시간들이 부여하는 부피만으로도 충분할 뿐만 아니라 창작자로서 보여준 다양한 활동(5)들이 그 밀도를 더한다. 하지만, 만화가로서의 무게감이 너무 크다는 이유로 인해 비평가로서의 활동이 평가절하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김성환은 1950년대를 지나 1960,7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만화와 관련된 글을 발표한다. 1968년에 발표한 「만화예술론」이나 1970년에 발표한 「空間派 漫畵家(공간파 만화가) 스타인버그」, 1977년에 발표한 「만화주인공 이야기」 등이 지속적인 비평 활동의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6)


1930년대 최영수가 유럽만화의 역사와 개별 작품의 사회적 의미를 통해 만화비평의 출발을 보였다면, 그로부터 20여년의 시간이 흐른 1950년대에 김성환은 비로소 우리나라 만화사를 정리하는 단계를 밟게 된다. 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단순한 사건의 정리 차원을 넘어 우리 만화의 역사가 연대(年代)를 이루게 되었음을 인식케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


(1) 석래명 감독에 의해 1977년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2)‘고바우’가 등장하는 4단만화는 이후 1980년에 『조선일보』, 다시 1992년에는 『문화일보』로 지면을 옮겨서 2000년도까지 45년간 연재되었다.

(3)『한국의 잡지 출판』(2003, 늘푸른소나무) p263 재정리.

(4)『르네상스 김승옥』에서 한영주는 소설가 김승옥이 만화가로 활동한 면면들을 정리한 바 있는데, 여기서 김승옥과 김성환의 절친한 관계를 설명하며 1950,60년대 당시 김성환의 위치에 대해 “김성환은 당시 서른이 채 안 되는 젊은 나이에 이미 시사만화계의 일인자로 군림하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5) 김성환은 만화가단체(현대만화가협회)의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했으며, 시사만화 특유의 반골정신이 빛나는 작품을 통해 사회적 문제에 대한 발언도 지속적으로 해왔다.

(6) 김성환의 발표한 비평들은 『고바우와 함께 산 半生(반생): 漫畵家(만화가)의 自傳的 人生論(자전적 인생론)』(열화당, 1978)이라는 제목이 붙여져 단행본으로 발행된  바 있다.

 

 
                                                        2008-11-07 오후 7:09:08   김성훈 _ 만화평론가

 

[관련기사]
"그것 참! 만화는 안 낼 터이요"
한국만화비평의 출발선
'오노레 도미에' 알아봤던 시대의 선각자
'불량만화' 담론의 역사적 기원
Trackback 0 Commen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