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2. 18. 10:48

도둑과 히말라야 야크의 사랑

[노동효의 길 위에서]랑탕 히말라야 9(노동효 _ 자유기고가)
그날 만났던 노인 내외, 야크, 도둑의 대사를 떠올리며 나는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랑은 주는 것도 아니고 받는 것도 아니고 단지 하는 것이라고.
▲ 그날 만났던 노인 내외, 야크, 도둑의 대사를 떠올리며 나는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랑은 주는 것도 아니고 받는 것도 아니고 단지 하는 것이라고.

저요, 사랑에 대해서 잘은 몰라요. 근데 사랑하면요 그냥 사랑 아닙니까? 무슨 사랑, 어떤 사랑 그런 게 어디 있나요? 그냥 사랑하면 사랑하는 거죠. 도둑이라 잘은 몰라요. 가겠습니다.

- <아는 여자> 중

캉진 곰파(해발 3,730미터)에서 마지막 밤. 체코 리까지 1,200미터의 고도를 오르내린 후라 무척이나 고단했지만 잠이 오지는 않았다. 눈을 감아도, 잠은 오지 않는다. 잠을 자도 곧 잠이 깬다. 깨고 나면 폐쇄공포증에 걸린 것 마냥 갑갑해서 침낭 밖으로 팔다리를 내놓게 된다. 갑갑증도 잠시, 영하로 떨어진 실내는 무척 춥다. 침낭 속으로 다시 팔다리를 밀어 넣는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공기를 들이 마신다. 아무리 크게 심호흡을 해도 허파꽈리에서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교환이 순조롭지 않다. 수요와 공급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유년시절 친구들이 떠들고 노는 소리를 들으며 숙제를 해야 했을 때처럼, 숨이 막혀 미칠 것만 같다. (아마 그때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공부든, 일이든, 뭐든 억지로 하면 나타나는 발광증세) 그럴 땐 에라 모르겠다, 하고 뛰쳐나가버리면 되었지만 뛰쳐나가려니 히말라야의 겨울은 너무 춥다. 게다가 뛰쳐나간다 한들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가쁜 숨을 연달아 들이마신다. 후우, 후우, 후우, 후우....그러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잤고, 또 꿈을 꿨다. 이번엔 다른 친구들을 만났다. 여전히, 매일, 알 수 없는 만남의 연속이다.

햇살 쨍쨍한 아침이었다. 아래층에서 겔젠이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얼른 내려와서 아침 식사하고 길 떠나자고. 갈릭 스프로 요기를 하고 길을 나선다. 하산길이긴 하지만 랑탕 히말라야 트렉킹이 끝난 것은 아니다. 샤브로 뷰 포인트 롯지(해발1,680미터)까지 내려가서 툴로 샤브로 마을을 지나 고사인 쿤드(해발 4,360미터)까지 가는 긴 여정이 남아있다. 고사인 쿤드는 백두산 천지처럼 고산에 자리잡은 호수. 힌두의 전설에 따르면 시바 신이 삼지창을 꽂았던 곳이라고 하고 매년 여름이면 시바 신을 기리는 축제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성스러운 호수인 것이다. 오늘은 라마호텔(해발 2,410미터)까지만 내려가면 된다. 올라올 때는 이틀이 걸렸지만 내리막이니만큼 하루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행복 가득한 식당(Peaceful Restaurant)에서 호주에서 온 니키와 데니를 만났다. 또 만났네! 그러게 말이야! 랑탕 히말라야 트레킹의 첫날부터 시작된 그들과의 인연은 정말 질기고 질기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진다. 세상에서 가장 낡은 버스를 타고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길을 여행하는 동안 생사를 함께 했던 길동무들. 그들은 카트만두로 돌아간 뒤 안나푸르나가 보이는 포카라 호수로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니키가 입술을 활짝 벌리고 웃음을 터뜨리는 동안 레스토랑 주인 우낀 라마는 심각한 표정이다. 그는 영어를 할 줄 모른다. 그래도 우리들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무척 궁금한 모양이다. 그는 랑탕 히말라야에서 가장 심오한 표정을 지니고도 가장 우낀 라마. 아무리 진지한 표정을 짓고, 진지한 질문을 해도 천진난만한 눈빛과 말투 때문에 상대방을 웃게 만드는 인물. 우낀 라마가 만들어 준 맛있는 더히(네팔식 요구르트) 한 그릇씩 떠먹고 길을 나섰다. 굿 바이, 우낀 라마!

랑탕 마을에 도착해서 샹그릴라 호텔에 들렀다. 무사히 돌아온 우리 일행을 티베트 유민 가족들은 환대해주었다. 티베트 민요를 불러주던 큰 누이는 카트만두로 떠난 후였고, 둘째와 어린 소년도 방학이 끝나 오후에 아래 마을로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티베트 소녀, 치링은 내게 메일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서로의 메일주소를 주고 받았다. 치링이 어디서 어떻게 인터넷 메일을 보낼 수 있을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나는 바다를 본 적이 없는 소년에게 바다를 선물해주고 싶었지만, 푸르스름한 지폐 한 장을 건네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사탕 사 먹지 말고 연필이나 공책 사야 해. 어릴 적 삼촌이 집에 찾아오면 부모님 몰래 살짝 용돈을 주시곤 했다. 물론 나는 연필이나 공책 대신 딱지나 구슬을 사곤 했다. 깃대에 걸린 룽다와 타르쵸가 바람에 나부낀다. 랑탕 마을은 바람의 마을로 기억될 것이다. 굿 바이, 치링! 

설산과 계곡과 돌과 흙과 강이 어우러진 길은 다시 걸어도 아름답다.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깊고 가파른 협곡이긴 하지만 랑탕 강은 수천 만년이 흐르는 동안 너른 들을 만들어 냈다. 그 한 가운데 길을 걷는 기분은 마치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길 위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힌두교에 따르면 세상은 환영, 즉 마야의 세계. 걷고 또 걷는 동안 마치 나라는 아바타가 랑탕 히말라야라는 프로그램 속의 길들을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대체 이 야릇한 느낌은 대체 뭐란 말인가? 아무리 걸어도 ‘또 다른 나’가 ‘걷고 있는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이한 느낌이 떠나지 않는다. 분명 걷고 있는 것도 나고, 그런 나를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는 것도 나다. 어떻게 이 두 개의 나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무엇인가 깨어질 듯, 깨어질 듯 하면서도, 쨍 하고 깨어지지 않는다. 딱 0.1mm만 더 몰입하면 뭔가가 잡힐 것만 같은데...

쨍.

만다라가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티베트 노인에게서 300루피를 주고 샀던 만다라. 랑탕 마을로 올라가던 도중 만다라에 키스를 '쪽' 하고 세상의 첫 소리 '옴'이 양각된 마니석(경전을 적어 놓은 돌탑)의 돌 틈 사이에 만다라를 밀어 넣었었지. 지금 그때 두고 온 만다라의 옆면이 은화처럼 그 틈에서 빛나고 있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는 영원으로 통하는 틈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현재이다.’라고 했던가. 라마 호텔과 랑탕 마을 사이에는 만다라로 통하는 틈이 있는데, 그것은 마지막 마니석에 있다. 마지막 마니석, 위에서 둘째, 왼쪽에서 둘째 돌 틈 사이. (이것은 당신과 나의 보물찾기다. 당신이 랑탕 히말라야를 가게 된다면, 그래서 내가 남기고 온 만다라를 찾게 된다면 - 가져도 좋다.) 랑탕 히말라야에 터 잡고 살던 사람들이 쌓기 시작한 마니석. 여행자를 안내하고, 원주민들의 소망을 들어주며 지금껏 남아 있듯이 내가 남겨둔 만다라도 마니석이 풍화작용에 의해 저절로 무너지기 까지는 그대로 남아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아프리카 마냥 다국적 기업들에 의한 개발 바람이 불어 닥쳐 오래 전에 만들어진 모든 것들이 부수고, 반듯하고, 날카롭고, 정교한 새 것들이 들어서지 않는 한은 말이다. 굿 바이, 만다라!
 

트렉킹 중에 만난 노부부는 천천히 산을 오르다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면 나란히 앉아 맥주 한 잔을 마시고, 해가 저물면 롯지에 앉아 주변 경치를 감상하며 하루를 보내며 랑탕 히말라야 트렉킹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호호 할아버지, 할머니 내외를 만난 것은 고라타벨라(해발 2,992미터)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다시 길을 나선 지 반시간 즈음 지나지 않아서였다. 랑탕 히말라야에서 만난 여행자들의 연령대는 대부분 20~30대 젊은이들이었다. 물론 중년의 커플도 만난 적도 있다. 그러나 그 호호 할아버지, 할머니 내외는 랑탕 히말라야에서 보기 드문 캐릭터였다. 롯지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의 수염은 산타클로오즈 마냥 희고 텁수룩했고, 할머니의 눈가엔 웃음 주름살이 한 가득 자리잡고 있었다. 곱게 늙으셨구나. 안녕하세요? 나의 가벼운 인사에 따뜻한 미소를 짓는 호호 할아버지, 할머니 내외. 마치 <가을날의 동화 An Autumn's Tale, 1987) >에 등장하던 노인 내외가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실연의 상처로 제니퍼가 바닷가 벤치에 앉아 울먹이고 있을 때, 옆 벤치에서 지켜보던 할아버지가 말없이 꽃 한 송이를 꺾어 건네주던 장면. 그리고 벤치에 앉은 할머니에게 돌아가 두 분이 함께 돌아보며 미소 짓던 씬. 나는 두 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노인 내외는 독일에서 오신 부부였고, 은퇴를 했고, 함께 여행을 다닌다고 했다. 젊은 사람도 쉽다고는 할 수 없는 히말라야 트렉킹이다. 천천히 산을 오르다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면 나란히 앉아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산을 오르다 해가 저물면 롯지에 앉아 주변 경치를 감상하며 하루를 보내고, 그렇게 서로 의지하며 랑탕 히말라야 트렉킹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서로 주고 받는 눈빛은 갓 연애를 시작한 연인들의 눈빛처럼 이글이글 타오르지는 않았지만 화롯불 마냥 따뜻했다. 나는 두 노인의 그런 미소가 참 좋았다. 두 분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은데요, 괜찮을까요? 할머니가 소녀처럼 꺄르르 웃었다. 찰칵. 그들은 나에게 고맙다고 답례를 했다. 호호 할아버지 할머니 내외와 헤어져 내려오는 동안 문득 배창호 감독의 <러브 스토리>가 떠올랐다.

- 배창호 감독의 <러브 스토리> 본 적 있니?
- 아니.
- 두 분을 뵙고 나니 <러브 스토리>가 떠올라. 배창호 감독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감독 자신과 아내가 직접 연기를 한 영화지. 마흔을 넘긴 영화감독과 노처녀가 연애를 하고, 갈등을 겪다가 결국 결혼을 하는, 흔하다면 흔하다고도 할 수 있는 줄거리지만 참 진솔하고 따뜻했어. 영화가 끝나갈 무렵 산행을 갔다 내려오던 길에 술 좋아하는 남편이 막걸리를 마시는 장면이 나와. 해가 저물고, 재촉하는 아내의 목소리에 사내가 일어서고,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황혼이 물들어 오는 길을 걸어가는데, 어느새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노인이 되어 있더군.
- 그런 영화가 있었구나.
- 나중에 기회가 되면 봐, <러브 스토리> 이전 영화들도 좋지만 <러브 스토리> 이후 만든 영화들도 좋아. <정>도 그렇고, <길>도 그렇고, 영화가 참 따뜻해.  

한참 숨을 고르던 외다리 야크가 간신히 계단을 짚고 올라섰다. 곁에서 지켜보던 야크는 그제서야
다리를 옮기며 뒤를 따랐다. 사라지는 두 마리 야크를 보고 있던 나도, P도 눈시울이 뜨뜻해져 있었다.


배창호 감독 영화의 대사와 장면들을 P에게 들려주며 좁은 산길을 내려오다가 야크 떼를 만났다. 숲 속에서 빠져 나온 몇 마리의 야크가 우리 곁을 지나가고, 한 마리 야크가 돌계단 앞에서 숨을 고르며 서 있었다. 다리 하나가 없었다. 줄 지어 오던 다른 야크들이 다리 하나 없는 야크를 앞질러 갔다. 그때였다. 무리 중 한 마리 야크가 다리 없는 야크 뒤에 멈춰 섰다. 다리 없는 야크가 숨을 헐떡이며 한 발을 계단 위로 넘기려다가 실패하고, 그래서 헐떡이고 다시 다리를 계단 위로 올리려다가 실패하는 모습을 묵묵히 뒤에서 쳐다볼 뿐이었다. 다른 모든 야크들이 다리 없는 야크를 앞질러 사라질 때까지 그 한 마리의 야크만이 지켜보며 서 있었다. 네가 먼저 가기 전에는 너를 두고 떠나지는 않겠다는 듯 기다리고 선 야크의 안타까운 마음이 전해져 왔다. 힘겨워하는 야크와 묵묵히 지키고 선 야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그만 울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한참 숨을 고르던 외다리 야크가 간신히 계단을 짚고 올라섰다. 곁에서 지켜보던 야크는 그제서야 다리를 옮기며 뒤를 따랐다. 사라지는 두 마리 야크를 보고 있던 나도, P도 눈시울이 뜨뜻해져 있었다.         

장진 감독의 <아는 여자>에 등장하는 도둑의 말이 눌러도, 눌러도 솟아오르는 부표처럼 떠오른 것은 라마 호텔에 도착하고 나서였다. <아는 여자> 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말하는 다양한 사랑에 대한 생각들이 구종별로 다양하게 관객을 향해 날아든다. 기다리는 사랑에게 볼넷으로 걸어가건, 몸에 맞아 걸어가건, 그냥 가면 된다는 <야구코치의 사랑론>부터 사랑하면 죽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형사의 사랑론>, 그리고 사랑이 뭐 대수냐 이름 묻고, 좋아하는 음식, 취미, 혈액형 그렇게 묻고 대답하다 보면 그 사람 사랑하는 것이란 <은행강도의 사랑론>까지. 그러나 가장 인상 깊은 건 도둑이 남기고 간 대사였다. 그날 만났던 노인 내외, 야크, 도둑의 대사를 떠올리며 나는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람들은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도 하고, 기브 앤 테이크 라고도 하지만, 사랑은 주는 것도 아니고 받는 것도 아니고 단지 하는 것이라고.

Give 도 아니고 Take도 아니고 단지 Do 라고…Do, Do, Do!

 


Trackback 0 Commen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