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12 10:07

누가, 얼마나 바보인가

[편집자가 독자에게]‘봉고차 모녀’와 삭제된 현실
                                                                                                                                     안태호 편집장
129 콜센터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
▲ 129 콜센터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

아지즈 네신을 아십니까? 풍자문학의 거장이자 실천적 지식이었던 그는 세상을 뜬 지금도 터키의 국민작가로 여전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저는 네신을 매우 좋아해서 “풍자는 세상을 웃음거리가 되는 것에서 구해준다”는 그의 격언을 항상 인용하곤 합니다.

오늘 소개하고 싶은 것은 국내에도 번역된 <생사불명 야샤르>라는 작품입니다. 주인공 야샤르는 아버지와 함께 동사무소를 갑니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주민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동사무소에서 놀라운 소식을 듣습니다. 야샤르가 아버지가 아직 꼬마였고 게다가 어머니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해에 벌어진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호적상에 기록되어 있었던 겁니다. 이 단순한 행정착오 때문에 야샤르의 인생은 완전히 배배꼬인 꽈배기마냥 뒤틀립니다. 야샤르의 아버지는 멀쩡히 살아있는 아이를 왜 죽은 사람 취급하느냐고 항의해보지만, 서류가 틀릴 수가 없다며 우겨대는 공무원들 앞에서 허탈하게 물러납니다.

결국 야샤르는 주민증이 없어서 학교도 못가고, 일자리도 얻지 못해 결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야샤르가 학교를 가기 위해 주민증을 발급받으려 할 때는 죽었다가, 세금을 내고 부채를 갚고 군대를 갈 때는 살아 있다가,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하고자 하니 다시 죽은 사람이 돼버린다는 겁니다.

야샤르가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관공서에서 요구하는 수많은 서류를 구비하려고 동분서주 뛰어다니는 장면도 압권입니다. 서류의 번호 하나가 누락되어 있다고 퇴짜를 맞은 야샤르는 번호를 받기 위해 다른 기관을 찾지만, 담당자는 자리를 비웠습니다. 담당자를 찾기 위해서 담당자가 만나러 간 다른 공무원을 찾지만 그 공무원은 또 다른 부서의 누군가와 만나고 있다고 하고 다른 부서의 누구는 커피를 마시러 나갔고 그 사람을 대체할 누구는 축구장엘 갔고 다시 그 사람을 대체할 누군가는 휴가를 갔고... 이 연쇄고리는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급기야, 관공서 내에서 자신처럼 번호 하나를 받기 위해 일년 이상 담당자를 찾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한 야샤르는 절망에 빠지게 되지요.

아지즈 네신의 관료제 풍자는 너무나 통렬해 읽는이를 요절복통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맘껏 웃을 수가 없습니다. 풍자가 남들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풍자의 칼끝이 우리 현실을 날카롭게 겨누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언론지상에는 ‘봉고차 모녀’를 도운 이명박 대통령의 미담이 훈훈하게 소개됐습니다. 인천에 사는 초등학생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생활고 때문에 매일 우는 엄마를 도와달라며 쓴 편지를 대통령이 공개하며 이들에게 직접 연락을 취했습니다. 정부의 지원뿐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 도움의 손길이 이어진 것은 물론입니다.

식당에서 일하던 어머니는 식당이 문을 닫아 직장을 잃었고, 세들어 사는 집에서는 2월까지 집을 비워달라던 이 모녀의 사정은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습니다. 궁금증이 생깁니다. 소득도 재산도 없는 이들은 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지정받지 못했던 걸까요. 이유는 단지 봉고차 한대였답니다. 이들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교회에서 장사나 해보라며 내준 낡은 봉고차 한대가 어머니 이름으로 되어 있어 지원대상자로 선별되지 못했다는 군요.

동사무소에서 야샤르의 호적을 들여다본 직원이 눈 앞에 살아있는 야샤르를 보려하지 않았던 것처럼 해당 지역의 공무원에게는 이들 모녀의 생활상이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야샤르의 직원이 호적만을 근거로 대며 아이가 죽었다고 우긴 것처럼 이 모녀가 살고 있는 동네의 공무원 역시 낡은 봉고차만을 근거로 대며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될 수 없다고 우겼던 거지요.

물론, ‘봉고차 모녀’는 철저한 기획상품입니다. 대통령에게 가는 편지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분류를 해 처리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맘만 같아서는 대통령에게 편지쓰기 운동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지금 이 나라엔 백만 명 이상의 ‘봉고차 모녀’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런 사연도 저런 사정도, 우리의 억울함도, 이웃의 괴로움도 모두모두 알려주고 싶습니다. 대통령이 목도리 하나 걸어준다고 해서 겨울이 따뜻해지지는 않는 법입니다.

구체적인 현실을 삭제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은 위험합니다. 나아가 뚜렷한 사실들을 외면하는 것을 넘어 조작과 기만을 일삼는 이들은 두려운 존재들입니다. 위험하고 두려운 존재들에게 현실이 통째로 소거되는 것을 보고 싶은 이들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미 황량하고 메마른 구체적인 현실이 장밋빛 환상으로 대체된 저들의 매트릭스는 착착 완성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왕 아지즈 네신을 언급한 김에 그의 일화를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네신은 언젠가 "터키인의 60%는 바보다"라는 말을 해서 터키 전체를 뒤집어지게 만든 일이 있었습니다. 비난여론이 커지자 언론에서 네신에게 입장을 밝히라고 했더니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실은 그 때 터키 국민의 92퍼센트가 바보라고 말하려 했습니다."

 

Trackback 0 Commen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