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0.02 15:37

‘한국형 좀비물’의 새로운 탄생 - 이경석 「좀비의 시간」

이경석, 「좀비의 시간」
▲ 이경석, 「좀비의 시간」

표지는 잊어라. 이경석의 「좀비의 시간」 표지에는 이마에 총구를 정조준 당한 한 사내가 분노의 포효를 지르고 있다. 책장을 넘기면 좀비와 사투를 벌이는 피비린내나는 액션활극이 펼쳐질 것만 같은 분위기다. 실제로 표지를 넘겨 그림을 보면 ‘속았다’, 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는 머리끝까지 쭈뼛 소름이 돋는 공포도, 박진감 넘치는 전투씬도, 비정하고 냉혹한 스토리 전개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기가 어찌됐든 이경석의 작품을 손에 든 당신은 운이 좋다. 지금껏 다른 만화에서 느끼지 못한 새로운 재미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잡았기 때문이다. 이경석의 작품을 처음 대하는 이들은 살짝 당혹감을 느낄지 모른다. 일본만화의 사실적인 화풍에 익숙한 이들에겐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거나 뒤뚱거리는 듯한 그림이 낯설게 느껴질 법도 하다.

최초의 낯설음을 경과하면 오히려 이경석의 그림은 모든 컷에서 피식피식 웃음을 유발하는 놀라운 위력을 발휘한다. 사실, 그의 그림체는 익숙해지면 매우 정감어린 것을 넘어 모종의 중독성까지 함유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의심마저 든다. 삐뚤빼뚤한 글씨체와 얼핏 당혹스런 상황연결들이 빚어내는 즐거움은 이경석 만화를 독보적인 경지에 올려놓았다.

주인공 준수는 오랜만에 떠난 가족여행에서 좀비에 물린 후, 친구를 만나고 연인과 사랑을 나누고 가족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정부는 대대적인 좀비소탕 작전에 나서고 준수는 형사반장인 아버지와 극적으로 대치하게 된다. 「좀비의 시간」에서 목이 떨어져나가거나 손과 발이 따로 놀고 피가 튀는 잔인한 장면들이 사용되긴 하지만 이 작품의 좀비는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온 다른 좀비물과는 사뭇 다르다. 좀비로 변하기 전까지 일상생활을 영위하며 자신의 존재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는 모습은 이제껏 나온 좀비물에서 만날 수 없던 장면이다.

“좀비에 물린 순간 난 이미 죽어가고 있다. 물리기 전 나의 삶은 대학 갓 졸업한 백수에 소심하고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꽃이 피고 지는지 관심없고...동네 꼬마들 전혀 관심 없고...그러나 지금 좀비한테 물려 죽어간다고 생각하니 떨어진 꽃잎만 봐도 눈물이 난다”

옮겨놓고 보니 왠지 건조해졌지만, 작가의 연출은 독자의 얼굴에서 미소를 떠나지 않게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존재의 조건이 극단적으로 변환되면서 나타나는 정체성의 재정립과 주변인들과의 관계에 대한 성찰은 작품을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주제라 할 만하다.

비주류 인생들에 대한 작가의 지지 역시 같은 맥락에서 배치된다. 주요 인물들은 하나같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 청년백수로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던 준수, 싱글맘으로 아이를 키우는 은행원 희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판매원 아르바이트를 하는 왕눈이, 젊은 시절 조직에 몸을 담았지만 지금은 손을 씻고 귀농의 삶을 살고 있는 코뿔소 등 변두리인생들은 하나같이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들을 한 자락씩 간직하고 있다.

“웃긴 얘기지만, 좀비에 물리고 나서 더 행복한 사람이 된 것 같아요”라는 준수의 고백은 그래서 낯설지 않다. 준수에게 좀비에 물린다는 것은 삶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일이었던 것이다.

언젠가 이경석은 자신이 연재하는 만화잡지 <팝툰> 표지에 마그리트의 <겨울비>와 이중섭의 <황소>를 응용해 소들이 하늘에서 끊임없이 떨어지고 마그리트의 중절모 신사(물론 얼굴은 전원교향곡의 이장집 큰아들이었다)와 이중섭의 소가 눈물짓고 있는 장면을 그려넣은 적이 있다. 당시 쇠고기 정국과 맞물려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이었다.

「좀비의 시간」에서도 그의 현실비판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비리가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르자 일부러 좀비사태를 극단으로 몰고가는 경찰청장과, 단지 좀비에 물렸을 뿐인 이들을 좀비강제수용소를 만들어 범죄자 취급하는 장면들은 군사독재시절의 어두웠던 과거를 떠오르게 한다. 물론, 이 ‘과거’는 불행하게도 현재형이다. 광화문 사거리에 모여든 좀비를 군인과 경찰이 총으로 무차별 진압하는 장면은 불과 몇 달 전 촛불정국에서 경찰의 살수차가 무자비하게 시민들을 날려버렸던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좀비의 시간」은 한겨레 매거진 ‘esc’에 연재됐던 작품을 묶어낸 것이다. 이경석은 「속주패왕전」「오!해피산타」등의 작품을 펴냈으며 만화잡지 <팝툰> 에 ‘전원교향곡’과 <고래가 그랬어>에 ‘을식이는 재수 없어’라는 작품을 연재중이다. 출판 씨네21, 값 8,000원.



* 2008-09-30 오후 4:36:33  컬처뉴스 안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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