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2. 2. 16:05

‘잊혀질 모든 순간에 대한 기억’

김종관 감독 단편컬렉션 《연인들》12월 4일 개봉

단편 작품 11편을 옴니버스로 구성한《연인들》은 김종관 감독의 작품 세계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 단편 작품 11편을 옴니버스로 구성한《연인들》은 김종관 감독의 작품 세계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중학교 때 나는 학교 건물 5층에서도 운동장에 모여 있는 천여 명의 아이들 중 단 한 명만은 한눈에 정확히 짚어낼 수 있었다. 아니, 그 중에 반이 남자였으니까 오백여 명의 똑같은 교복을 입은 남자 아이들 중 단 한 명은. 그즈음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했는데도 말이다. 방송부원이었기 때문에 조례나 국민체조 같은 시간에 행진곡을 틀거나 마이크 볼륨을 조절하는 일 따위로 운동장에 나가지 않아도 됐다. 그렇게 나는 학교 가장 높은 곳에서 그 아이를 내려다보는 특권을 가질 수 있었다. 행여라도 길에서 마주치면 몇 십 미터 앞에서부터 귀까지 빨개져 도망가기 바빴지만, 그곳에서는 창틀에 턱을 괴고 마음껏 훔쳐볼 수 있었다. 교장선생님 말씀에 지루해 하는 모습도, 친구들과 장난치는 것도.

김종관 감독의 단편컬렉션 《연인들》에는 그런 풋풋한 설렘이 있다. 숨 막힐 듯, 현기증 나는 두근거림. 통제가 안 되는 손발과 나중에 생각하면 너무 부끄럽고 창피한 실수들. 김종관 감독은 그런 감정들이 만들어내는 긴장감까지도 섬세하게 카메라에 담아낸다. 과연 ‘독보적인 감성지기’라는 수식어가 괜한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폴라로이드 작동법>에는 좋아하는 사람 앞에 선 여자의 흔들리는 눈동자, 눈도 못 마주치는 수줍음, 너무 떨린 나머지 하는 말실수 등 감정의 미세한 떨림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공간을 감싸는 따뜻한 빛을 통해 순수하고 풋풋한 사랑의 감정을 예쁘게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연인들》에는 설렘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마음, 사랑이 끝난 후 잊혀짐에 대한 두려움을 담은 이야기도 있다. <모놀로그#1>의 여자는 사랑이 끝난 후의 허전함, 파도처럼 계속해서 밀려오는 서글픔, 화도 났다 외롭기도 했다 미련도 생겼다가 하는 이별 후의 감정을 체념한 듯, 무심하게 뱉어낸다. 칼바람이 불어오는 겨울 바닷가 쪼그려 앉은 여자의 작고 둥근 등이 한없이 추워 보인다.

처음 소개되는 김종관 감독의 최신작 3편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한형모 감독의 1956년 작 《자유부인》을 모티브로 한 <메모리즈>의 자막에서는 김종관 감독의 영화관을 읽을 수 있다. “모든 것은 사라질 것이다. 지나는 것을 잡을 수 있는 것은 기억밖에 없다. 영화는 잊혀질 모든 것들에 대한 기억이다” 사라질 ‘순간의 아름다움’을 담아내기에 단편영화는 더욱 적절한 방법처럼 느껴진다.

또 《연인들》의 마지막에 상영되는 최신작 <올 가을의 트렌트>에는 감독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소와 공간들이 담겨 있다. 영화 속 깜짝 출연으로 감독의 팬들에게는 더욱 보는 즐거움을 줄 것 같다.

《연인들》은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의 2008년 열두 번째 개봉지원작으로, 한 감독의 단편 작품을 묶어 개봉하는 첫 번째 시도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한국에서 단편영화의 배급 경로라 하면 영화제를 통해 일회적으로 소개되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극장에서 보기 힘든 단편 작품 11편을 옴니버스로 구성한《연인들》은 김종관 감독의 작품 세계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12월을 겨냥해 쏟아지는 수많은 사랑 이야기와는 조금 다른, 첫사랑의 설렘을 마음속에서 꺼내 보고 싶은 관객은 중앙시네마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를 찾아보길 바란다. 12월 4일부터. 문의: 02-778-0366(인디스페이스), http://cafe.naver.com/indiespace

 

                                                                                                        김나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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