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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0.23 그냥 좀 살게 내버려 두면 안되나요?-[박서방의 주절주절]3편의 영화와 함께 잡생각이 뭉게뭉게
  2. 2008.10.17 우리 편 아니면 다 좌파냐? - 국정감사가 매카시즘의 경연장인가
  3. 2008.10.10 나의 쌈지 레지던스 체험기 - 어떻게 공간에 생명과 개성을 꽃피울 것인가
  4. 2008.10.07 더 이상 ‘대학문화’를 팔지 마시길 - [기자의 눈]대학로문화축제 유감
  5. 2008.10.03 나와 시민방송 RTV - 시민방송에 대한 지원 중단을 우려하며
  6. 2008.10.02 욕하기 위해 드라마를 본다 - [박서방의 주절주절]어느 욕 나오는 드라마와 주말을 보내고
2008.10.23 11:52

그냥 좀 살게 내버려 두면 안되나요?-[박서방의 주절주절]3편의 영화와 함께 잡생각이 뭉게뭉게

                           ▲ 사는 게 왜 이리 힘들어야 하는가. 그냥 살게 좀 내버려두면 안되나

“아무리 짐승 같은 놈이라도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

영화 ‘올드보이’의 시작과 함께 나온 배우 오광록의 일성이었다. 투신자살을 하기 위해 올라간 건물 옥상에서 주인공 최민식과 마주친 그는 특유의 어눌한 목소리로 뜬금없이 호소한다. 생각해보면 별거 아닌 얘기인데 뇌리에 오래 남는다. 따지고 보면 인간이라는 유기체가 존재하는 첫째 목적은 바로 생존과 종족번식 아니던가? 종교나 이데올로기적 신념으로 삶의 목표를 규정하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결국 살아남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결국 살아있어야 뭐든 할 수 있지 않냔 말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의무이며 권리이고 그 자체가 목적이다.


최근 1, 2주 간격으로 3편의 전혀 다른 영화를 봤다. 한 편은 음악영화인 ‘고고70’이고 다른 한 편은 사회드라마인 ‘자유로운 세계’, 또 하나는 뭐라 규정짓기 힘든 기묘한 희비극인 ‘미쓰 홍당무’였다. 결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여지기 힘든 영화들이었지만 뜬금없게도 영화들을 보면서 박서방의 머리 속에는 ‘올드보이’의 저 대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고고70’을 보면서는 “좀 퇴폐적으로 보여도 맘껏 놀 권리는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 ‘자유로운 세계’에서는 “싱글맘이더라도 행복할 권리가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 떠올랐다. 가장 최근에 본 ‘미쓰 홍당무’가 전해주는 전언도 별 거 아니었다. “얼굴 좀 빨개져도 (남자를, 혹은 애정과 관심을) 욕망할 권리는 있는 게 아닌가요?”


물론 이 영화들이 이런 단순한 전언만 남겨주는 영화들은 아니다. 본래 문학이건 영화건 뭐건 간에 잘 만든 예술 작품들에는 몇 가지의 전언들이 자리 잡고 있기 마련인데 박서방의 눈에 띈 게 이것들이었을 따름이다. 요는 개인의 권리를 관철시키는 문제가 보였단 것이다. 누구에게나 살 권리가 있듯이 누구에게나 행복, 자유로울, 무언가를 욕구할 권리가 천부적으로 있다고 믿고 살아왔는데 살아보니 그게 아니더란 말이다. 지구 상의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다양한 권리를 요구하는 게 당연한 듯 살아가는데 또 반대편의 어떤 이들은 생존의 권리마저 위협 받으며 사는 게 현실이다. 자유롭게 놀 권리는 커녕 정당하게 노동할 권리도 박탈당한 이들도 심심찮게 마주친다.(‘자유로운 세계’는 주로 그런 이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런 오래된 불공평에 대한 문제제기는 수천년을 이어왔다. 보수언론 찌라시들이 원수처럼 여기고 있는 소위 ‘좌파’들도 결국 이런 불공평에 문제 제기를 해온 역사적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런데 최근 이 영화들에서도 다시 확인하게 되지만 개인의 사소하지만 다양한 권리를 관철하는 것도 쉽지 않다. 소위 민주주의의 이상은 개인의 권리를 무한대로 보장할 듯 폼을 잡지만 그것이 국가의 시스템으로 들어오는 순간 무지막지하게 딱딱한 제약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단지 ‘소울’ 음악을 하며 ‘달리고’ 싶었던 젊은이들에게 퇴폐니, 산업발전의 해악이니 하며 시비를 걸며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고고70’)이 단지 1970년대, 소위 ‘한국적 민주주의’의 시대만의 일이 아니다. 불과 몇 해 전 모 밴드가 공중파 방송에서 노출 사고를 일으켰을 때가 생각난다. 물론 공중파 방송에서 바지를 내렸던 그들은 누가 봐도 처벌대상이겠지만 그걸 빌미삼아 퇴폐 공연을 하는 클럽 밴드들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하라고 엄명하셨던 서울시장님이 지금 대통령 아닌가? 당시만 해도 아직 기운이 남아돌아서 가끔 라이브클럽을 출입하던 박서방은 시장님의 지엄한 명을 접하며 과연 ‘퇴폐공연’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는 고민에 빠지기도 했었다. 뭐 이것은 다소 극단적인 경우지만 대부분 국가들은 개인의 욕구와 권리를 보장하는 척 하며 사실 시스템의 관리 아래 통제하려 한다.


그렇다면 개인들은 여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영화 속 밴드 ‘데블스’처럼 달리며 연소되는 것은 멋들어지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오래 닳아빠진 박서방은 잘 안다. 그렇다면 미쓰 홍당무의 충고(“원래 세상은 공평하지 않아. 그래서 우리같은 사람들은 더 열심히 살아야 해.”)를 들어야만 하는 걸까? 그러다가 남의 것마저 짓밟으며 결국 스스로의 영혼마저 더럽히고 마는 것은 아닐까?(‘자유로운 세계’) 사는 게 왜 이리 힘들어야 하는가. 그냥 살게 좀 내버려두면 안되나.

 

 

* 2008-10-22 오후 12:11:08 박서방_인터넷 만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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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7 10:07

우리 편 아니면 다 좌파냐? - 국정감사가 매카시즘의 경연장인가

한선교 한나라당 의원. 문광위 국정감사에서 지난 정부가 '좌파 단체'에 편중지원을 했다고 공격에 나섰다.(사진 한선교 의원 홈페이지)
▲ 한선교 한나라당 의원. 문광위 국정감사에서 지난 정부가 '좌파 단체'에 편중지원을 했다고 공격에 나섰다.(사진 한선교 의원 홈페이지)

최근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발표가 있은 후, 국내 인터넷 포탈 게시판에서는 네티즌 간의 뜨거운 공방이 이어졌다. 그 까닭은 크루그먼 교수가 올 봄, 촛불 집회를 옹호하는 칼럼을 썼다는 주장에 대한 진위 여부 때문이었다. 그 논란의 소재가 되었던 글은 6월 13일에 뉴욕타임스에 실렸던 ‘악(惡)우병’(Bad Cow Disease)이다. 뉴욕타임스의 고정 기고자인 크루그먼 교수는 광우병을 패러디한 제목의 이 글에서 최근의 미국 무역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특히 그는 이전에도 그랬듯이 안으로만 굽는 부시 정부의 자국 산업 관리의 문제점을 공격했는데 특히 식품안전에 대한 관리 부실로 미국 무역정책의 신뢰성이 훼손됐다고 지적했다. 이런 논리 전개 속에서 그는 ‘한국의 촛불집회가 대규모로 확산되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라는 듯한 뉘앙스의 글을 적고 있다. 

물론 그가 이 글에서 주로 다루고 싶어하는 것은 바다 건너 대한민국 땅에서 벌어진 촛불 정국이 아니라 자신의 모국인 미국을 물질주의와 정치적 부패로 물들게 하고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는 보수주의의 득세와 기업 입장에 편중된 정부 운영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촛불집회와 반미여론이 강화되고 있는 근본 원인을 미국 정부의 문제점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일부에서 주장하듯 촛불집회를 옹호하는 글이라고 단정짓기는 힘들겠지만 최소한 촛불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글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이런 싸늘한 농담들도 들린다. “노벨경제학상도 좌빨(좌파적 색체의 진보진영을 비아냥거리는 우파적 네티즌의 표현)이냐?”

문제는 이런 농담이 단지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게 현실이란 점이다. 최근의 집권층과 보수 진영을 보면 자기들과 반대되는 입장을 지닌 모든 집단을 좌파로 모는 이념 공세를 시도하고 있다. 올해 국정감사에서도 이런 태도는 여지없이, 아니 과도하게 드러났다. 한선교 한나라당 의원은 문광위 국정감사에서 지난 정부가 좌파 단체에 편중지원을 했다고 공격에 나섰다. 그가 좌파 단체로 규정한 단체들은 민예총, 작가회의, 문화연대, 우리만화연대, 한글문화연대 등이다. 그런데 그가 쉽게 이념적 색깔로 엮기도 힘든 이들 단체를 좌파단체로 규정한 주요한 근거는 촛불집회 참여 여부라고 한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대한민국 시민의 삼분지 일은 참여한 촛불 집회가 언제부터 좌빨(?)들의 집회로 규정되었나? 이 발언이 나오자 한글문화연대의 정재환 부대표는 바로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한글문화연대는 좌파가 아닌 한글사랑파’라며 불쾌감을 표하기도 했다.(관련기사 바로가기)

아마도 한 의원의 사고체계 안에서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 주제에 정부 일에 반대하는 꼴은 못 보겠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듯 하다. 그런데 바로 이런 단체에서 일하는 입장에서 이 점만은 분명히 알려주고 싶다. 이들 단체가 정부(혹은 준정부 기구)로부터 받는 돈의 성격이 무슨 명절 떡값이나 용돈이 아니라는 점을 말이다. 단체마다 조금 사정은 다르겠지만 소위 지원금의 성격은 단체가 사회적으로 하고 있는 활동에 대한 ‘사업’지원금이며 때문에 정부의 지원 여부는 사업들의 사회적 효용성에 의해 결정되어 왔다. 따라서 이런 사업들에 어떤 이념적 지향의 정치적 성격이 들어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는 ‘촛불단체를 주도한’(이런 표현도 어처구니 없지만) 작가회의를 문예진흥기금 등 정부지원금을 가장 많이 받은 단체로 지목했는데 지난 5년간 작가회의가 정부지원금을 받아서 사용한 내역 중에 소위 좌파적 활동에 연관된 것은 단 한번도 없었다.

물론 이들 단체가 벌였던 활동 중에 정부의 입장에 반대되는 활동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은 정치 사상의 자유가 인정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존립하는 민간단체로서 너무 당연한 것 아닌가? 애써 기억을 지우려 할지 모르겠지만 이들 보수세력이 친노 좌파 단체로 애써 규정해 보려는 민예총, 작가회의, 문화연대 등은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심심치 않게 정부의 입장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이곤 했다. 대표적으로 노무현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줄기차게 반대하며 매주 집회를 열었다. 그러니 “노무현 정부의 민간단체지원은 코드지원으로 정부의 성향과 맞는 단체에 집중 지원하여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려고 했다”는 한선교 의원의 주장은 전형적으로 ‘질러보고 책임 안지는’ 대한민국 국정감사용 발언이다.

단지 이 뿐만 아니다. 시민방송(RTV)을 둘러싼 논란도 마찬가지며 소위 좌편향 교과서 논란도 마찬가지다. 역시 한선교 의원 등 한나라당 의원들과 동아일보는 시민방송이 한미FTA를 반대하는 내용의 방송을 집중 방영했다는 점을 문제 삼고 있다. 그런데 시민방송이라면 정부 입장에서 불편한 내용을 가감없이 다루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정상적인 민주국가라면 당연히 정권의 입장과 다른 주장을 하는 이들에 대한 관용과 배려를 기본으로 삼는다. 역사학계에서 특히 강한 반발을 사고 있는 교과서 논란은 더욱 한심하다. 학문적 토론꺼리를 정치적으로 좌지우지하겠다니 말이다. 지금이 분서갱유하는 진시황시절인가? 

번잡하게 썼지만 사실 이런 태도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우리 빼고는 다 좌파’라고 할 수 있다. 이건 너무 오래 전에 유행했던 것 아닌가? 1970년대에는 정부에 반대하면 간첩으로 모는 게 유행이었고 1980년대에는 ‘좌경용공’이나 ‘주사파’로 몰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좌파다. 표현이 많이 세련되어지는 했다. 그런데 태도는 여전히 촌스럽다.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이들은 무조건 빨갱이로 몰아 학살하던 1950년대 반공청년단 냄새를 지울 수가 없다. 이런 게 뉴라이트이고 실용주의라면 벌써 글러먹었다. 최소한 세월이 흐른 만큼이라도 변해야 할 게 아닌가.





* 2008-10-15 오후 2:43:26  염신규 _ 민예총 정책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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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0 08:06

나의 쌈지 레지던스 체험기 - 어떻게 공간에 생명과 개성을 꽃피울 것인가

10년동안 운영되어 온 쌈지스페이스가 문을 닫는다(사진제공 쌈지스페이스)
▲ 10년동안 운영되어 온 쌈지스페이스가 문을 닫는다(사진제공 쌈지스페이스)

민간 최고의 작가지원시스템을 자랑하던 쌈지스페이스가 돌연 문을 닫는다고 한다. 요즘 한창 창작공간 담론이 일고 있고, 정부와 지자체도 적극적인 정책을 내놓고 있어 앞으로 잘 나갈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말이다. 왜? 튀려고? 역시 쌈지는 뭔가 다르다는 인식을 각인시키려고? 남들이 투자할 때 빠지고 남들이 빠질 때 새로운 투자를 감행하는가.

쌈지는 10주년 기념행사를 알리는 보도 자료를 통해 그동안 비즈니스와 아트를 결합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청년미술에 대한 후원, 대안공간 네트워킹 등 미술계 발전에 기여해왔음을 밝혔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미술환경이 대폭 변화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변화를 위한 방향전환을 모색해야 될 때’라고 했다. 지난 10년 동안 대안공간들이 담당해왔던 일들을 이제는 정부가 나서서 대안기관들을 운영하는 마당에 경쟁의 구도로 가기보다는 그동안의 성과를 이양하는 쪽으로 선택한 것 같다. 바통을 넘겨주고 또 새로운 10년을 내다보는 새로운 프로젝트로 이른바 ‘쌈지 농부프로젝트’를 추진한다고 한다.

철지난 이야기하나 해야겠다. 2004년 당시 나는 쌈지스튜디오를 사용하는 소위 입주 작가였다. 입주하자마자 나는 동료작가들과 오아시스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술계의 핫이슈로 떠올랐다. 오아시스 프로젝트는 한국사회에서 공간은 권력이며 그것은 예술계에서도 마찬가지임을 드러내고자 했다. 많은 예술가들이 고작 몇 평 작업실이 없어 여기저기를 전전하고 있는데도 정부와 예술권력이 조성한 예술인회관은 방치돼 썩어문드러지고 있는 현실을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퍼포먼스를 준비했던 아지트가 쌈지스튜디오의 레지던스 공간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그곳에서 은밀한 공모를 했을 뿐 만 아니라 토론, 작업 등 예술인회관 스쾃을 위한 다양한 준비를 했다. 겉으로는 예총에 선전포고를 날리는 등 기세등등했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걱정했었다. 혹시 이러다 작업실에서 쫓겨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쌈지레지던스에 참여한 작가들의 회의모습(사진제공 쌈지스페이스).

입주할 당시에는 그룹이 아닌 개인작가 자격으로 들어와서는 그룹을 만들어 작업실을 마치 단체를 위한 공간인 것처럼 전용하기 시작했다. 14평 작업실에는 일상적으로 수 십 명이 들락거렸고, 기자들까지 곳곳을 휘젓고 다녀 막바지에는 촬영세트장을 방불케 했다. 더욱이 예총이나 문광부와 같은 큰 조직과 전쟁을 벌이는 야전사령부처럼 사용했으니 공간을 내준 건물주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미 6월경에는 예술인회관 내부답사 등의 이유로 예총이 관할경찰서에 고소했고, 나는 경찰서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아야했다. 거의 범법자(?)가 되어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그때 쌈지 측에서 프로젝트의 불법성을 근거로 나가라고 했다면 나는 별다른 저항 없이 나갈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쌈지측은 내게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다. 어쩌다 간혹 마주치게 되면 프로젝트가 잘 진행되는지 묻거나 언론에 자주 나오더라 했다. 그게 다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고마운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당시 어쩌면 쌈지가 외부의 압력을 받았을지도 모르고, 설사 그렇지 않다 손치더라도 스스로를 자기 검열하는 예술판의 풍토를 생각했을 때, 쌈지스튜디오가 보여준 작가에 대한 태도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최근 지방정부들이 아트팩토리나 창작스튜디오 조성에 나서면서 해결해야 할 큰 과제들이 생긴 것 같다. 창작공간사업의 성공을 위해서는 공간의 조성과 운영프로그램을 잘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제는 그동안 하드웨어적 시설조성만 해본 공무원조직이 해결하기에는 벅찰 것이다. 어쩌면 업무논리로 보면 운영을 위한 프로그램마저도 결과로서의 ‘물량’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벽화가 몇 개, 프로젝트가 몇 개씩으로 말이다.

그러나 공간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프로세스를 가진 사용자의 능동적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이다. 따라서  공간의 조성과 운영에서 ‘어떻게 공간에 생명과 개성을 불어넣을 것인가’를 주된 고민꺼리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예술가들의 자율적 공간운영을 최대한으로 보장하면서도 공공적 기능을 상실하지 않는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 2008-10-09 오후 12:28:09  김윤환 _ 미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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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7 17:41

더 이상 ‘대학문화’를 팔지 마시길 - [기자의 눈]대학로문화축제 유감

대학로문화축제가 열린 대학로 일대.
▲ 대학로문화축제가 열린 대학로 일대.

10월 5일, 제7회 대학로문화축제를 찾았다. 이번 대학로문화축제는 ‘거리대학’이란 주제로  10월 3일부터 3일간 진행되었다. ‘남녀노소 누구나 대학인이 되어 대학문화를 누려보자’는 취지로 열린 ‘거리대학’은 대학로 일대에서 열렸고, 대학로 4차선 도로는 축제에 참여한 각 대학 동아리 및 여러 단체들의 부스로 채워졌다.

축제를 찾은 일요일 오후 무렵 중앙무대는 매회 대학로문화축제의 주요 이벤트인 거리결혼식 준비가 한참이었고, 무대를 기점으로 길게 뻗은 부스들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대학로 일대야 언제나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기에 이 많은 인파가 축제를 미리 알고 온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축제와 마주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 온 이유야 어찌되었건 간에 사람들은 거리에 마련된 부스 이곳저곳을 살펴보느라 분주해 보였다.

그러나 그 대학로 도로를 채운 부스들은 ‘거리대학’이라는 축제 타이틀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각 부스들은 뭔가를 판매하는데 여념이 없어보였다. 애초에 가판대들이 가득한 대학로일진대 굳이 도로를 점거해가면서 이런 행사를 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 싶을 정도였다. ‘대학문화’에 대한 일말의 고민조차 없는 부실할 행사기획이 빚어낸 씁쓸한 풍경이었다.

‘고대앞 OO버거’와 ‘이대앞 생크림와플’ 부스 앞의 끊이지 않는 줄을 보고 있자니, ‘고대앞 OO버거’를 먹고 ‘이대앞 생크림와플’을 손에 쥐고 걷는 것이 대학문화인가라는 한숨이 나왔다. 대학의 수많은 동아리들 중에 굳이 ‘부자학동아리’가 커다란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 이유는 무엇일까. 홍대 놀이터에서 자신의 창작물들을 자유롭게 판매하던 프리마켓은 이들 ‘대학문화’의 틈바구니에서 그저 액세서리 판매점을 넘어서기 힘들어보였다.

사실 ‘학문을 정진하는 곳’이라는 이상적인 대학의 모습을 간직한 대학문화를 지금의 대학에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이는 단지 구성원 개개인의 판단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대학은 돈 내고 학점 따는 곳이거나 목숨 걸고 ‘스펙’을 높이는 곳, 연애와 결혼에서 유리한 조건을 갖추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대학로문화축제의 메인이벤트가 거리결혼식인 것이나 부자학 동아리가 축제 홍보처만큼 넓은 부스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현재 대학과 대학문화의 좌표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이제 대학에서 인기 있는 동아리는 사회과학동아리, 학술동아리가 아닌 부자학 동아리이고, 펀드동아리이고, 영어회화동아리인 것이다. 그야말로 실용이 대세인 시대에 걸맞는 풍토라고 해야 할까.

대학 내에는 미니스톱, KFC같은 편의점, 심지어는 다국적 기업이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대학 주변의 상권은 술집과 고기집들이 휘어잡고 있다. 그나마 이마저도 점차 프랜차이즈화되어가고 있는 추세다. 대학 내에는 대기업과 기업 총수들의 이름을 딴 건물들이 속속 들어선다. 대학의 비판정신 운운하는 말들은 계면쩍음에 입밖으로 꺼내기도 망설여진다. 이런 대학의 현실에 대해 조금의 성찰지점도 보여주지 못한 채 대학문화라는 이름을 내걸고 장사를 하는 이들에 대해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 걸까. 젊음의 낭만과 패기를 가장한 채 정체성 모호한 축제를 위해 소비되는 학생들에게는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상황은 여러가지로 간단치가 않다. 대학의 무기력을 변호할 수도, 정글의 법칙으로 대학을 옥죄는 자본주의 사회를 일방적으로 탓할 수도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하게 드는 생각은 더 이상 대학과 대학문화를 팔아 이득을 보는 이들이 없었으면 한다는 것 뿐이다.





* 2008-10-06 오전 11:35:15  컬처뉴스 박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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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3 00:12

나와 시민방송 RTV - 시민방송에 대한 지원 중단을 우려하며

이주노동자 방송의 <이주노동자 세상>은 시민방송의 지원으로 제작된다.
▲ 이주노동자 방송의 <이주노동자 세상>은 시민방송의 지원으로 제작된다.

저 마붑 알엄은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1999년에 들어와서 3D업종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일하면서 피부색이 다른 이주노동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차별적인 시선을 많이 느끼게 되고, 이런 소외감이 공동체 활동 등 여러 가지 활동들을 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공동체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돕고 사는 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가령 누가 다치면 조금씩 돈을 모아 병원비를 대주거나, 빌려주거나 하는 식으로 서로 돕습니다.

공동체 활동을 열심히 하던 와중에, 체불임금의 문제, 노동 환경의 문제 등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주노동자의 노동 문제는 이주노동자 스스로가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여러 다른 나라에서 온 이주노동자들과 연대하여 시민단체들과 만나 소통하고, 길거리에서는 시민들과 만나 이주노동자 상황과 제도적인 문제 등에 대해 알리고 토론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활동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문, 라디오, TV등 언론 매체와 만나게 되는 기회도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류미디어들은 이주노동자를 그저 불쌍한 존재들로 그리거나 여전히 ‘이방인’으로서 이질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습니다. 가령, 10년  안 한국에서 일하면서 한 번도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그저 딱하다, 안됐다 식으로 개인적인 불행으로 바라보면서, 정작 그들이 가족과 10년 이상 생이별하여 살아야하는 현실과 제도적인 모순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때론 이주노동자를 희화화해서 “사장님 나빠요”의 ‘블랑카’ 같은 어눌한 인간으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가 마침 2004년 시민방송 RTV를 알게 되고 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모인 사람들, 저를 포함해서 방글라데시, 네팔, 버마인 4명이  시민방송을 통해 정규적으로 이주노동자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하고, 처음 힘들게 ‘이주노동자 세상’이라는 프로를 전파에 띄웠을 때의 감동은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주노동자도 시민으로서 방송에 참여할 수 있다,’ ‘이주노동자도 스스로의 목소리로 자기 얘기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고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거의 처음으로 이주노동자가 방송활동에 주체로서 직접 참여할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이 사회에 알리고, 여러 나라에서 온 서로 다른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다국어로 뉴스를 진행하면서 언론매체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이주노동자들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를 열었습니다. ‘이주노동자 세상’과 ‘다국어 뉴스’는 지금도 이주노동자와 한국 사회의 중요한 매개체가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민방송은 저희에게 아주 소중합니다. 소외되고 열악한 환경에 놓인 우리와 같은 소수자가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송입니다. MBC나 KBS에서는 절대 내보내주지 않을 우리들의 소중한 이야기들, 시민방송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또 서로 고립된 섬처럼 존재하던 우리 이주노동자들 간의 소통도 시민방송을 통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시민방송의 프로그램들을 시작하면서 국내에서 해외에서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그들의 사연을 들려주고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주노동자들은 매체에 목말라 하고 있고, 시민방송이 어느 정도 그 갈증을 채워주고 있습니다.

최근 몇몇 보수 신문들이 편향된 시각으로 시민방송을 좌파니 뭐니 하며 매도하고, 정부가 재정 지원을 줄이거나 중단할 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운 소식들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오히려 지원을 늘려 더 많은 시민들과 소수자들이 방송에 직접 참여하여 퍼블릭 액세스의 진정한 가치를 실현해야 하는 마당에, 힘든 환경에서 방송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힘을 뺏는 이런 얘기를 들으면 정말 기가 찰 지경입니다.

제 나라 방글라데시에서는 방송매체가 오직 정부만을 대변하는 스피커로 인식되고 있을 정도로 방송의 독립성이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국에 와서 방송매체가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가운데에 시민방송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외국에서 온 사람의 시각에서 보면 시민방송은 방송의 다원화에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한국의 미디어 환경을 건강하게 만드는 자양분입니다.

힘든 3D업종에서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인 우리가 야근에 밤잠까지 설치며 주말에도 쉬지 않고 나와서 방송을 만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나 인간은 자기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다. 누가 자기를 돌아봐주길 바라며 소통하고 싶어 하고 소외받지 않는 인간다운 삶을 꿈꿉니다. 시민방송은 이런 소외받은 사람들을 위한 방송입니다. 소수자, 시민들이 이 사회 속에서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창문입니다. 시민방송이 사라지면 그나마 열려있던 공간마저 닫혀버리고 말 것입니다.

앞으로 시민방송이 우리와 같은 소수자의 방송을 든든히 받쳐주는 버팀목이자 견인차의 역할을 계속 할 수 있도록 아낌없는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2008-10-01 오전 11:06:38  마붑 알엄 _ 미디어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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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2 15:40

욕하기 위해 드라마를 본다 - [박서방의 주절주절]어느 욕 나오는 드라마와 주말을 보내고

욕 나오는 드라마 시청률의 진정한 힘은 욕 그 자체에 있다. 드라마 '조강지처클럽'(사진 SBS홈페이지)
▲ 욕 나오는 드라마 시청률의 진정한 힘은 욕 그 자체에 있다. 드라마 '조강지처클럽'(사진 SBS홈페이지)

이제는 새삼스런 일이지만 욕 먹는 드라마일수록 시청률이 좋다. ‘미드’나 ‘일드’의 경우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국산 드라마에서 만큼은 이것이 점점 자명한 진리가 되고 있는 듯 하다. 물론 시청률과 작품에 대한 평가가 모두 뛰어난 명품 드라마도 간혹 있긴 하다. 그러나 그런 드라마들이 연간 몇 편이나 되겠는가. 대세는 어처구니 없게도 욕 먹는 드라마다.

아무래도 욕 먹는 드라마 하면 ‘인어아가씨인지 ’붕어아가씨‘인지로 일세를 풍미한 임 모 작가의 작품을 꼽을 수 있겠다. 그러나 박서방의 경우 이런 주옥같은 작품들이 방영될 무렵 거의 드라마와 담쌓고 살았기 때문에 그 명성만 접했지 실체를 확인한 바가 없다. 그런 전설적 드라마들을 못 본 것은 천추의 한으로 남지만 어쩌겠는가. 최근에서야 가정적 남자가 되면서 저녁 시간 TV앞에 앉아 빨래를 개며 드라마 보는 시간이 많아졌으니 말이다. 여하간 최근 주말 저녁 마다 보는, 공전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화제작이며 역시 욕 먹는 드라마의 하나인 ‘조강지처클럽’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이 드라마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나화신(오현경)-한원수(안내상), 한복수(김혜선)-이기적(오대규)라는 두 중견 커플이 겪는 부부생활 파탄담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를 이혼 전문 드라마인 ‘사랑과 전쟁’의 주말 확대 버전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두 커플을 중심으로 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남녀들의 불륜과 이혼, 로맨스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사실 벌어지는 상황들이 대부분 정상적이지 않다. 당초 시작부터 그랬다. ‘한원수’는 자신의 아내 ‘나화신’을 학대하다가 이혼도 안한 상태에서 기혼녀인 ‘모지란’과 자신의 집에서 동거에 들어간다. 의사인 ‘이기적’은 학력이나 직업에서 자기보다 못한 ‘한복수’와의 부부생활에 불만을 느끼다가 첫사랑인 ‘정나미’와 바람을 핀다. 한원수와 한복수의 아버지인 ‘한심한’은 본처 ‘안양순’을 버리고 ‘복분자’와 살고 있다. 당초부터 바람 가득한 설정으로 시작한 이 드라마는 이후 꼬리에 꼬리를 무는 뒤엉킨 관계를 보여주며 당초 50회 방영 계획을 훌쩍 뛰어넘어 100회를 이미 넘긴 상태다. 그나마 그런 충격적 설정들을 상쇄시켜주는 것은 중견 배우들의 노련한 연기력과 뒤틀렸지만 때때로 통쾌한 유머 감각 덕분이다. 

혹시 이 드라마가 이미 지반부터 흔들리고 있는 결혼 제도의 해체를 보여주고 있다고 착각될 수도 있겠지만 거기까지는 나가지 않는다. 간혹 그런 파격적인 대사나 설정이 나오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결혼 이데올로기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일시적 일탈과 회귀는 사실 대부분 성공적인 대중문화상품의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그보다 이 드라마 앞에 시청자들을 묶어두는 가장 힘 중 하나는 핑퐁게임 덕분이다. 주말 2회 씩 방영되는 이 드라마의 진행은 마치 매회 공수가 교대되는 야구 시합 같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박서방이 처음부터 ‘조강지처 클럽’을 봤던 것은 아니다. 당연히 드라마의 앞부분을 전혀 보지 못했음에도 드라마 시청에 전혀 지장이 없다. 야구 시합에서 초반 경기를 못보고 6, 7회부터 보더라도 동점이거나 박빙의 승부일때 흥미가 넘치는 것과 비슷하다. 매주 진행되는 남녀들간의(혹은 남남 간의, 여여 간의) 공방은 봉황대기 결승처럼 시청자들을 묶어놓는다.

그러나 이 욕 나오는 드라마 시청률의 진정한 힘은 욕 그 자체에 있다. 재미난 것은 이 드라마의 시청률이 높아질수록 욕하는 이들은 더욱 많아지고 욕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드라마 시청률이 높아만 간다는 점이다. 어쩌면 욕하는 이들일수록 이 드라마를 더 열심히 보는 이들일 것이다. 드라마를 욕하고, 황당하고 엽기적인 설정을 욕하고, 등장하는 캐릭터를 욕하면서 더욱 드라마에 몰입해간다.(특히 이 드라마가 취하고 있는 비현실적이고 만화적인 작명법은 대중들의 몰입도를 더욱 높이고 있다.) 재미는 있는데 욕이 나온다. 욕이 나온다는 것은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난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에는 특히 욕 나오는 이들이 많다. 얼마 전에 박서방은 여자친구와 각자 이 드라마에서 가장 욕나오는 캐릭터 다섯명을 꼽으며 놀기도 했다.(공히 1위는 한원수였다.) 꽤 많은 이들은 욕을 하기 위해 드라마를 본다. 주말에 드라마를 보며 화를 가득 내며 가정생활에 대한 불만을 풀어버리는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특히 부정적인 캐릭터들이 남성, 특히 가장인 것은 드라마의 주 소비층이 여성, 특히 기혼여성들인 탓이 크다. 이 드라마는 남편들에게 ‘화난’ 부인들의 좋은 속풀이 장소인 것이다.

박서방은 욕 나오는 드라마를 옹호하고 싶지도 않지만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욕 나오게 만드는 세상인데 욕 나오는 드라마가 득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최근 바다 건너에서 들려오는 금융대란은 이 세계가 얼마나 허약한 합리성으로 유지되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거기 9시 뉴스에 나오는 우리 공화국 위정자들을 보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난 우리 대통령이 경제의 ‘달인’이라고 본다. 아마 16년간 경제활동을 했을 것이다.) 이러 판국이니 황당한 설정 좀 나오면 어떤가.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는 더 황당한데 말이다. 어차피 대중문화 상품에서 심미적 상징성이나 숭고미를 바라는 건 아니지 않는가. 오히려 더 뒤틀린 아이러니, 혹은 황당한 드라마를 보고 싶다. 그나마 ‘조강지처 클럽’은 안전장치가 너무 많이 붙은 작품이었다. 그보다 반발짝 더 진화된, 진짜 욕 나오는 엽기를 보고 싶은 게 솔직한 요즘 심정이다.




* 2008-09-30 오후 5:59:48  박서방 _ 인터넷만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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