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에 해당되는 글 36건

  1. 2009.02.17 빅뱅을 지켜라! (26)
  2. 2009.02.12 누가, 얼마나 바보인가
  3. 2009.02.06 ‘날으는 스파게티 괴물’의 세상이 도래하다. (4)
  4. 2009.02.03 “보고는 근사한데 피부에 와 닿지가 않네. 하,하,하”
  5. 2009.02.02 누가 우리를 죽이고 있는가? (2)
  6. 2009.01.28 여기, 예술이 있다
  7. 2009.01.24 원치 않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8. 2009.01.20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9. 2009.01.13 우리모두가 미네르바다! (2)
  10. 2008.12.18 도둑과 히말라야 야크의 사랑
2009.02.17 08:24

빅뱅을 지켜라!

[편집자가 독자에게]누구를 위한 나라사랑 캠페인인가
                                                                                                                                     안태호 편집장
나라사랑 캠페인이 먼저일까요, 좋은 나라를 만드는 일이 먼저일까요. 저는 빅뱅 팬은 아니지만, 빅뱅이 나라사랑 찬가를 부르면 좀 우울할 것 같습니다.
▲ 나라사랑 캠페인이 먼저일까요, 좋은 나라를 만드는 일이 먼저일까요. 저는 빅뱅 팬은 아니지만, 빅뱅이 나라사랑 찬가를 부르면 좀 우울할 것 같습니다.

언젠가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아산 현충사를 두고 “충무공 기념관이 아니라 박정희 기념관 같은 곳이다”라는 발언을 해 곤욕을 치렀습니다. 이 말에 대해 민족의 성웅을 모독했다는 비판이 많았지만,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순신 영웅 만들기'에 유독 열을 올렸던 것은 비교적 많이 알려진 사실입니다. 충무공이 ‘박정희 대통령 만들기’의 도구로 쓰였던 것이 역사적 진실에 가깝다면, 현충사에 대해서 박정희 기념관이라고 표현한 것이 공직자로서 조금 도에 지나친 면이 있다손 쳐도 근본에서부터 엇나간 말은 아닌 셈이지요.

이순신 장군이 뜻하지 않게 독재자의 정당성을 위해 활용됐다지만, 그런 활용은 우리 시대에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당장 빅뱅이 ‘MB 찬가’를 부르게 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청와대는 올해 3·1절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0주년(4월13일)을 맞아 ‘나라사랑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전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언론에 의하면,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미래의 주역인 10∼20대 젊은이들의 애국심을 고취시켜 나라에 대한 의미를 자연스레 되새길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며 “나라사랑을 주제로 한 랩송을 만들어 전파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는군요. 청와대는 전문가에 의뢰해 일명 ‘힘내라! 대한민국’ 등의 랩송 등을 제작한 뒤 인기그룹 ‘빅뱅’을 비롯한 여러 유명 가수들이 돌아가면서 부르게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합니다.

한국처럼 대통령제가 강력한 나라에서 국가의 이미지는 대통령과 뗄레야 뗄 수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애국심 고취’ 노래는 ‘MB 예찬’과 그리 멀지 않을 듯합니다. 랩으로 만든다고 하니, 왠지 제가 군 시절 들었던 박진영의 ‘군진수칙’이 보여준 ‘아햏햏’함이 연상되기도 하는군요. 요즘에는 주로 유머게시판에서 떠돌아다니는 것 같긴 하지만.(그러고 보면 대선기간에 대운하예찬을 불렀던 이은하 씨도 생각이 납니다.)

백번 양보해 애국심마케팅이 국가운영 차원에서는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실제보다 부풀려진 마케팅을 해대면 ‘소비자’들이 배신감을 느낍니다. 제가 마케팅을 전공한 것은 아니지만, 마케팅은 기본적으로 상품의 핵심을 소비자들에게 전달하는 기술이지 없는 사실을 지어서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그런 왜곡과 과장을 거리낌없이 저지르는 건 마케팅이 아니라 사기에 가깝겠죠.

젊은 세대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행정력과 예산을 쏟아 붓기 전에, 당신들이 만들고 싶어 하는 나라가 어떤 곳인지 먼저 숙고해 봤으면 합니다. 그 나라는 최소한 당신들이 그렇게 맘을 얻고자 안달하는 젊은이들에게 좋은 나라입니까. 누구에게나 양질의 교육이 허락되고, 먹을 것을, 잠잘 곳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곳입니까. 일자리 하나를 얻기 위해 무한경쟁의 스트레스에 피를 말리지 않아도 되는 곳입니까. 쫓겨나지 않기 위해 골리앗에 올라가 악다구니를 쓰며 버둥거리지 않아도 되는 나라입니까.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나라사랑 캠페인이 먼저입니까, 좋은 나라 만들기가 먼저입니까. 애국심마케팅, 좋습니다. 그러나 애국심의 본령을 채울 내용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당신들의 나라가 1%만을 위한 파라다이스라면 애국심은 딱 그 1%에게만 기대하시는 게 좋습니다. 99%는 그에 적당한 방법으로 응해야 마땅합니다.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명백한 사기가 될 겁니다. 오히려 많은 이들이 대한민국에 사는 것이 이렇게 부끄러웠던 적이 없었다고 울음을 토하는 시절입니다. 썩은 곰팡이처럼 피어오르는 절망들을 힘없이 지켜보면서 나라를 사랑할 순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저는 빅뱅 팬은 아니지만, 빅뱅이 나라사랑 찬가를 부르면 좀 우울할 것 같습니다.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고, 저마다 누려야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아, 대한민국’의 가사가 새삼 가슴을 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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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2 10:07

누가, 얼마나 바보인가

[편집자가 독자에게]‘봉고차 모녀’와 삭제된 현실
                                                                                                                                     안태호 편집장
129 콜센터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
▲ 129 콜센터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

아지즈 네신을 아십니까? 풍자문학의 거장이자 실천적 지식이었던 그는 세상을 뜬 지금도 터키의 국민작가로 여전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저는 네신을 매우 좋아해서 “풍자는 세상을 웃음거리가 되는 것에서 구해준다”는 그의 격언을 항상 인용하곤 합니다.

오늘 소개하고 싶은 것은 국내에도 번역된 <생사불명 야샤르>라는 작품입니다. 주인공 야샤르는 아버지와 함께 동사무소를 갑니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주민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동사무소에서 놀라운 소식을 듣습니다. 야샤르가 아버지가 아직 꼬마였고 게다가 어머니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해에 벌어진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호적상에 기록되어 있었던 겁니다. 이 단순한 행정착오 때문에 야샤르의 인생은 완전히 배배꼬인 꽈배기마냥 뒤틀립니다. 야샤르의 아버지는 멀쩡히 살아있는 아이를 왜 죽은 사람 취급하느냐고 항의해보지만, 서류가 틀릴 수가 없다며 우겨대는 공무원들 앞에서 허탈하게 물러납니다.

결국 야샤르는 주민증이 없어서 학교도 못가고, 일자리도 얻지 못해 결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야샤르가 학교를 가기 위해 주민증을 발급받으려 할 때는 죽었다가, 세금을 내고 부채를 갚고 군대를 갈 때는 살아 있다가,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하고자 하니 다시 죽은 사람이 돼버린다는 겁니다.

야샤르가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관공서에서 요구하는 수많은 서류를 구비하려고 동분서주 뛰어다니는 장면도 압권입니다. 서류의 번호 하나가 누락되어 있다고 퇴짜를 맞은 야샤르는 번호를 받기 위해 다른 기관을 찾지만, 담당자는 자리를 비웠습니다. 담당자를 찾기 위해서 담당자가 만나러 간 다른 공무원을 찾지만 그 공무원은 또 다른 부서의 누군가와 만나고 있다고 하고 다른 부서의 누구는 커피를 마시러 나갔고 그 사람을 대체할 누구는 축구장엘 갔고 다시 그 사람을 대체할 누군가는 휴가를 갔고... 이 연쇄고리는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급기야, 관공서 내에서 자신처럼 번호 하나를 받기 위해 일년 이상 담당자를 찾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한 야샤르는 절망에 빠지게 되지요.

아지즈 네신의 관료제 풍자는 너무나 통렬해 읽는이를 요절복통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맘껏 웃을 수가 없습니다. 풍자가 남들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풍자의 칼끝이 우리 현실을 날카롭게 겨누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언론지상에는 ‘봉고차 모녀’를 도운 이명박 대통령의 미담이 훈훈하게 소개됐습니다. 인천에 사는 초등학생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생활고 때문에 매일 우는 엄마를 도와달라며 쓴 편지를 대통령이 공개하며 이들에게 직접 연락을 취했습니다. 정부의 지원뿐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 도움의 손길이 이어진 것은 물론입니다.

식당에서 일하던 어머니는 식당이 문을 닫아 직장을 잃었고, 세들어 사는 집에서는 2월까지 집을 비워달라던 이 모녀의 사정은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습니다. 궁금증이 생깁니다. 소득도 재산도 없는 이들은 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지정받지 못했던 걸까요. 이유는 단지 봉고차 한대였답니다. 이들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교회에서 장사나 해보라며 내준 낡은 봉고차 한대가 어머니 이름으로 되어 있어 지원대상자로 선별되지 못했다는 군요.

동사무소에서 야샤르의 호적을 들여다본 직원이 눈 앞에 살아있는 야샤르를 보려하지 않았던 것처럼 해당 지역의 공무원에게는 이들 모녀의 생활상이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야샤르의 직원이 호적만을 근거로 대며 아이가 죽었다고 우긴 것처럼 이 모녀가 살고 있는 동네의 공무원 역시 낡은 봉고차만을 근거로 대며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될 수 없다고 우겼던 거지요.

물론, ‘봉고차 모녀’는 철저한 기획상품입니다. 대통령에게 가는 편지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분류를 해 처리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맘만 같아서는 대통령에게 편지쓰기 운동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지금 이 나라엔 백만 명 이상의 ‘봉고차 모녀’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런 사연도 저런 사정도, 우리의 억울함도, 이웃의 괴로움도 모두모두 알려주고 싶습니다. 대통령이 목도리 하나 걸어준다고 해서 겨울이 따뜻해지지는 않는 법입니다.

구체적인 현실을 삭제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은 위험합니다. 나아가 뚜렷한 사실들을 외면하는 것을 넘어 조작과 기만을 일삼는 이들은 두려운 존재들입니다. 위험하고 두려운 존재들에게 현실이 통째로 소거되는 것을 보고 싶은 이들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미 황량하고 메마른 구체적인 현실이 장밋빛 환상으로 대체된 저들의 매트릭스는 착착 완성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왕 아지즈 네신을 언급한 김에 그의 일화를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네신은 언젠가 "터키인의 60%는 바보다"라는 말을 해서 터키 전체를 뒤집어지게 만든 일이 있었습니다. 비난여론이 커지자 언론에서 네신에게 입장을 밝히라고 했더니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실은 그 때 터키 국민의 92퍼센트가 바보라고 말하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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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6 09:42

‘날으는 스파게티 괴물’의 세상이 도래하다.

[박서방의 주절주절]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눈을 뜬다
                                                                                                                         박서방 _ 인터넷만담가

 ‘날으는 스파게티’에 대한 신앙은 한 시대를 풍자하고 야유했던 종교 패러디에서 출발했다. 한국에선 어떤 희한한 종교들이 탄생할지 사뭇 기대가 된다.
▲ ‘날으는 스파게티’에 대한 신앙은 한 시대를 풍자하고 야유했던 종교 패러디에서 출발했다. 한국에선 어떤 희한한 종교들이 탄생할지 사뭇 기대가 된다.

‘날으는 스파게티 괴물의 교회(Church of the Flying Spaghetti Monster)’를 아는가? 

“세상에 이런 일이?”란 말이 절로 터져 나오는 게 요즘 세상이지만 날으는 스파게티 괴물(Flying Spaghetti Monster, 이하 FSM)을 신으로 영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스파게티 괴물에 대한 그들의 경건한 신앙은 2005년도부터 시작되었다. 그 성도(?)들은 파스타파리안(Pastafarian)으로 칭하며, FSM이 우주를 창조하고 모든 동식물들을 지금 모습 그대로 창조하였다고 ‘굳게’ 믿는다.

그들의 교리에 의하면 천지창조의 과정은 이렇다. 우주는 최초에 천국의 맥주 화산에서 맥주를 너무 많이 마신 FSM이 4일에 걸쳐 창조했다. 첫날이 가장 힘들었는데, 산, 나무, 그리고 인간의 조상이 될 '난쟁이‘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3일 동안 나머지 우주를 창조하고 과학자들을 속일 목적으로 가짜 탄소 동위원소 분자들을 뿌렸다. 일을 마치고 과음을 한 탓에 남은 3일은 숙취에 시달리며 쉬고 말았는데, 이 때문에 금요일 또한 주말 휴일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FSM은 대략 박서방과 유사한 생활습관을 갖고 있는 듯하다. 박서방도 금요일 저녁부터 과음을 시작하여 토요일 새벽에 기절한 후 대략 월요일 아침에야 정신을 차린다. FSM의 심각한 음주 문제에도 불구하고 신도들은 그를 창조주로 모시며 기도나 중요한 말을 마치고 끝에 RAmen(라멘)이라는 말을 붙인다.

여기까지 읽고 있으면 정신병자의 헛소리거나 어린아이들이나 신기한 것을 즐기는 어른들을 위한 우화로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런데 실은 ‘날으는 스파게티’에 대한 신앙은 한 시대를 풍자하고 야유했던 종교 패러디에서 출발했다. 2005년 6월 오레건 주립대학의 물리학 석사 바비 헨더슨은, 캔자스 교육 위원회가 공립학교의 생물학 수업에서 이른바 지적설계론을 진화론과 동등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기가 막힌 주장을 듣고 반박할 방법을 생각했다. 도대체 이름도 낯선 지적설계론이 무엇이기에 젊은 과학도를 열받게 만들었던 것일까? 다름 아니라 지적설계론이란 기독교 교리에 기초한 창조론의 또 다른 변형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창조론을 창조과학이라고 하여 정규 교과과정에 집어넣기 위해 수십년간 난리를 쳤으나 번번히 법원에서 퇴짜를 맞자 마치 중립적 과학인양 위장하기 시작한 것이 지적설계론의 출발이었다. 1991년 필립 존슨의 책 <심판대에 선 다윈>이 출간된 이후 이 학설은 미국 기독교계와 보수파들 사이에 급속히 확산됐다. 이들은 포용력 넓게도(?) 과거 창조과학자(?)의 다소 꼴통스런 주장에서 벗어나 “‘지적인 존재’ 또는 ‘설계자’가 반드시 하나님이라는 것은 아니다”라던가 “지적설계론과 진화론은 상호보완적 관계다”라고 물타기를 하기도 했는데 그런 희석에도 불구하고 과학계와 진보 진영의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다. 왜냐고? 과학이 아닌데 과학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당연한 것 아닌가. 박서방이 지적설계론을 읽어본바 인상은 다음과 같다. 이건 일본 SF만화책에서 숱하게 나오는 내용이다! 기독교 보수 이데올로기에 편승해서 과학의 시늉을 하고 있을 뿐 한 시절 지나가면 완전히 잊혀질 내용에 불과하며 비슷한 예로 나치스가 주장했던 우생학을 꼽을 수 있겠다. 

여하간 이런 유사과학적 내용이 조지 부시의 재선을 틈타 교과 과정에 까지 들어왔으니 젊은 과학도 입장에서 얼마나 열받았겠는가. 그런 이유로 바비 헨더슨은 자신의 개인 웹사이트에, FSM의 교리를 올려놓고 캔자스 교육위원회에 공립학교의 생물학 수업에서 지적설계론이나 “증명 가능한 막대한 증거에 기반한 논리적 추측”(진화론)과 마찬가지로 FSM의 창조이론도 동등하게 가르쳐져야만 한다고 정식으로 요청하는데 이르렀다. 그는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법적 대응을 감행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이에 대해 캔서스 교육위원의 한 사람으로부터 '이는 신에 대한 중대한 모욕'이라는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인터넷 잡지인 <보잉 보잉>이 2005년 6월 이를 소개하며 그의 웹사이트는 폭넓은 관심을 받았고 같은 해 8월, <보잉 보잉>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의 아들이 아님을 증명하는 경험적 증거를 만드는 사람에게 주겠다”며 상금 250,000 달러를 걸었고, 다른 블로거들에 의해 상금은 1,000,000 달러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과학과 교육이 정치적 입장에 좌지우지 되었던 지난 수년간의 미국 사회의 황당무계한 분위기가 낳았던 희대의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비슷한 사건들이 바다 건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지도 1년이 되어간다. 교과서도 손쉽게 건드리는 위정자들은 ‘진실이란 우리가 얘기하는 그것’이라는 식으로 세상만사를 손쉽게 조작하려 한다. 그들 앞에서 법이나 규정 같은 골치 아픈 것들도 너무 쉬운 일인 것 같다. 인터넷 게시판에 자신의 의견을 올렸을 뿐인 네티즌을 포승줄 채워놓고 수사하던 경찰이 사람이 여섯 명이 죽어나가도 책임질 사람 없다고 버틸 수 있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이 정도의 세상이다보니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정도로는 이미 약해져버렸다. 어떤 희한한 종교들이 탄생할지 사뭇 기대가 된다. 

마지막으로 FSM의 귀한 교리 말씀 하나 전한다. 그들의 8계명 중 7번째 계명이다.
“웬만하면 내가 임하여 영지를 내린다고 떠들고 다니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웃을 사랑하랬다. 좀 알아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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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3 14:18

“보고는 근사한데 피부에 와 닿지가 않네. 하,하,하”

유인촌 문화부장관 만,애,캐 업계 좌담회 후기
                                                                                                  이동수 _ 만화가, (사)우리만화연대 회장
1월 29일 좌담회를 위해 남산애니메이션센터를 찾은 유인촌 장관이 김동화 한국만화가협회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사진 문화체육관광부)
▲ 1월 29일 좌담회를 위해 남산애니메이션센터를 찾은 유인촌 장관이 김동화 한국만화가협회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사진 문화체육관광부)

[만화산업 육성 및 콘텐츠 OSMU 활성화를 위한 업계 좌담회]가 지난 1월 29일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에서 있었다.  문화관광부의 수장인 유인촌 장관이 만화, 애니메이션, 캐릭터 산업 관련 주요사업을 설명하고 각 단체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그 자리에 대한 간단한 느낌을 정리 삼아 적어본다.
 
1. 만화 백주년에 열린 관계부처 장관과의 면담

올해는 우리 만화가 백주년이 되는 해이다.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지만 우리나라 근대만화의 역사는 이도영 화백이 1909년 6월 2일 창간한 대한민보에 그린 만평을 그 시초로 친다.

만화창작단체들은 이 행사가 무엇보다 만화창작단체들이 주축이 되어 ‘만화가들이 객체화되지 않고 주체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사업’이 되게 하고자 했다. 이 같은 지향을 이전 행사들과 차별화 할 수 있는 가장 큰 지점으로 삼고자 했으나, 예산이 부족하고 사람이 부족하다 보니 여전히 미흡한 실정이다. 이후 만화관련 단체들도 참여하고 지원기관들도 함께하고 있으나 사람과 예산 문제는 특히 아쉽기만 하다.

그런 현실에서 문화관광부의 수장인 유인촌 장관이 업계 및 단체장들과 간담회를 갖는 자리는 목마른 상황에 단비같은 일이다. 물론 그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어떤 내용들을 가지고 진행할 것인지 충분히 전달받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한편으론 정치적인 입장의 문제야 별개로 하더라도, 사실 이 좌담회가 관료적인 ‘요식행위’로 끝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 또한 없지 않았다. 그렇기에 부족한 정보와 우려 속에서 만남의 자리를 어떻게 실질적이고 핵심적으로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해야 할지 궁리를 거듭했다.

2. 결론은 ‘현장경험’의 중요성

“보고는 근사한데 피부에 와 닿지가 않네. 하,하,하”

이 말은 문화부 담당 국장의 사업현황 보고를 마치자마자 유인촌 장관이 한 말이다. 농반진반으로 던진 이 말에서 문화현장의 경험이 그대로 묻어났다. 사실 ‘문화산업을 발전시키겠다’는 것을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늘 구체성에서 드러난다. 어떤 것을 발전이라고 하는지, 어떻게 발전시키겠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이야기를 면밀하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만화문화산업정책과 관련해서 이런 측면의 아쉬움이 현장에 늘 있었기에 유 장관의 그 말 한마디는 그런 입장의 현장 목소리를 적절히 대변해주는 것이었다. 이후 각 단체들과 업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유장관은 적절히 동의하고 호응했고 때론 더 목소리를 높여가며 현장의 입장을 옹호했다.

글쓴이를 비롯한 만화단체에서는 문화가 살고 그것이 산업적으로 활용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문화마인드가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과 문화 현장의 자생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하는 지원정책이 미흡함을 지적했다. 특히 계약관계의 왜곡과 그로 인해 창작자의 1차 저작권이 제대로 보호되지 못하는 문제와 현장단체들의 직접적인 사업들에 대해서도 적절한 지원책들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또 최근의 주요현안으로 만화백주년에 대한 지원과 함께 온라인만화의 무료보기 문화가 불러오는 문제에 대한 대안마련이 시급함이 강조됐다. 포털에서 만화를 무료로 보는 시스템이 만화연재 자체만으로는 만화가들이 적절한 수입을 얻지 못하고 결국 만화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는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캐릭터와 애니메이션의 단체와 업계에서도 또한 문화산업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회계기준으로 인해 판권담보제도가 무의미해지고 있는 문제의 개선을 요구하고 무소불위한 미디어업체가 우리 문화산업의 혈맥을 완전차단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강력한 정책집행을 요청했다.

유인촌 장관은 현장의 중요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정책방향도 그러한 쪽으로 끌고 가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그런 발언을 자주 했다. 펀드와 관련해서도 국고와 민간자본이 결합됨으로써 오히려 이익을 추구하는 시장논리에 국고(공공성)이 묶여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현실을 인지하고 있고 이에 대한 보완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방송사 문제는 컨텐츠업계의 어려움에 동감하고 그럼에도 길게 보면 컨텐츠의 가치향상에 대해 희망적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미래에 문화산업의 핵심은 컨텐츠임을 거듭 강조했다. 이와 관련한 정책방향이 어떻게 나타날 지 지켜볼 일이다.

만화의 온라인 문제는 저작권문제와 연결해서 최근의 온라인 관련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부분은 조금 방향이 엇나갔다. 작가와 독자간의 문제라기보다 작가와 포털 혹은 출판사간의 문제가 우선 적절하게 해결될 필요가 있다는 요구였는데 아마도 최근의 관련법개정에 대한 정당성을 무리하게 연결하려는 마음이 앞선 듯 했다.

슬쩍슬쩍 흘린 온라인 관련법과 미디어법에 대한 견해의 차이만 뺀다면 군더더기 없는 좌담회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논쟁을 할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볍게 넘어갔으나, 신문기사들이 그쪽으로 제목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면 왠지 카메라 앞의 노련함에 밀린 느낌이다.

예정 시간을 훨씬 넘긴 후에 화기애애하게 마무리가 된 자리를 일어서며 든 느낌은  몸으로-문화적으로 현장의 경험을 체화한 장관이라 역시 다르다는 것이었다. 최소한 만화문화정책에 대해 이 자리에서 보여준 유장관의 현장감은 현장의 우려를 떨쳐버리기에 충분했다. 얼핏 지난 정부에서부터 이어진 현장출신 장관들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의를 마치고 난 후 만화가 선배들의 웃음소리 속에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고 맴도는 것은 좌담회에서 한 선배가 했던 말이었다.

“지원한다고 좋은 만화가 나올 것 같은가? 그건 아니라고 본다. (진짜)문제는 만화가들의 근성, 의식이 부족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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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2 14:03

누가 우리를 죽이고 있는가?

[편집자가 독자에게]히틀러, 헬렌 켈러, 그리고 강호순
                                                                                                                                     안태호 편집장
히틀러의 작품. 이 그림에서 '아리안족의 우수성'과 독재자의 멘탈리티를 찾아볼 수 있을까?
▲ 히틀러의 작품. 이 그림에서 '아리안족의 우수성'과 독재자의 멘탈리티를 찾아볼 수 있을까?

히틀러가 화가지망생이었단 사실은 꽤나 많이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는 1907년과 1908년 거푸 빈 미술 아카데미 입시에 도전하지만 두 번 다 낙방하고 맙니다. 지나간 역사를 되돌릴 순 없지만, 성공한 예술가 히틀러를 생각해 보는 건 자연스런 일입니다. 만약 그가 미술대학에 무사히 들어가 화가의 길을 걸었다면 홀로코스트의 악몽이 인류를 덮쳐왔을까요?

흔히들 역사에 가정은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역사가 현재를 구성하는 불가결한 요소라는 인정을 넘어 역사를 통해 무언가를 배우고자 한다면, 여러 가지 가정들은 단지 픽션의 소재로만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상의 숱한 실패나 성공들이 가능했던 이유와 조건들을 분석하고 현재에 그것들을 응용해 보기 위해서는 다양한 가정들이 오히려 필수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히틀러는 입시에 실패한 첫해에 아카데미 학장을 찾아가 자신이 합격하지 못한 이유를 따졌다고 합니다. 당시 학장은 그에게 회화보다는 건축이 더 적성에 맞을 것 같다는 충고를 해주지만 당시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하려면 고등학교 졸업장이 필수였다는군요. 16세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입시를 위해 집을 뛰쳐나온 히틀러에게는 무망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입시 실패 후에도 계속 빈에 남아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그가 그렸던 그림들을 봅니다. 하나같이 대량학살의 그림자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평화로운 정경들입니다. 결과론적으로 히틀러가 그린 그림들을 두고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려 했다’거나 ‘독재자의 맹아를 확인할 수 있는 멘탈리티가 숨어있다’고 이야기할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제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앞서의 가정을 끝까지 밀고 나가보면, 어쩌면 우리는 20세기 교과서에서 독재자 히틀러가 아닌 예술가 히틀러를 공부하게 되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네, 맞습니다. 교육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사실, 히틀러를 ‘교육의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한 역사의 희생자’로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따를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헬렌 켈러는 어떨까요. 헬렌 켈러에 대해 여러분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눈 멀고 귀 먹고 벙어리인 삼중고의 소녀가 설리반 선생이라는 헌신적인 멘토를 만나 자신의 절망을 딛고 일어난 인간승리 드라마’ 정도 아닐까요?

놀라지 마십시오. 헬렌 켈러는 투철한 신념을 가진 사회주의자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그녀는 1909년부터 미국 사회당 당원이었고, 당내에서도 혁명적 좌파 노선을 걸었다는군요. 당의 온건노선에 불만을 품고 전투적인 산별노조를 지원하기도 했으며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는 반전운동의 가장 인기 있는 연사이기도 했습니다.(헬렌 켈러의 ‘연설’에 대해 어리둥절하게 생각할 이들이 있겠지만, 실제로 그녀는 영어를 안정적으로 구사하는 것을 넘어 외국어를 4개까지 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상의 내용은 <혁명을 꿈꾼 시대>의 헬렌 켈러 편을 참조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 읽었던 헬렌 켈러의 전기를 기억하지만 그녀가 성장해 어른이 된 이후의 삶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나라의 반쪽짜리 교육이 반쪽짜리 위인만을 강요해 왔던 셈이죠. 다시 한 번 가정법을 사용해 봅시다. 헬렌 켈러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극단적인 현실에서도 교육을 통해 위인전의 단골메뉴가 된 그녀지만, 한국에서라면 평생을 어둠과 절망 속에서 보내지 않았을까요?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냉대와 편견, 차별은 둘째 치더라도 일단 그 정도의 중증 장애인이라면 제대로 된 교육을 받는 것부터가 어려웠을 공산이 큽니다. 더군다나 사회주의자로 노동현장을 누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강호순이라는 희대의 범죄자에 대한 수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 지인은 이번 사태로 인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균열’이 오지 않을까 걱정하더군요. 세상사가 워낙 흉흉하다 보니 개별 신체에 엄습해오는 공포와 불신, 불안과 두려움을 넘어서 인간관계 자체가 붕괴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지는 요즘입니다. 당장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느니, CCTV를 더 많이 설치하고 경찰력을 더 늘려야 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떠돕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자체로 논란의 여지가 있기도 하지만, 즉자적인 반응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근본원인에 대해서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유전적으로 1%의 인간은 사이코패스로 태어난다'는 이야기는 저를 섬뜩하게 만듭니다. 이건 유태인을 가스실에 밀어 넣으며 ‘아리안족의 유전적 우수성’을 강조했던 히틀러의 입장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 걸까요. 나치는 유대민족에 대한 증오와 전쟁을 통해 당시 사회의 다른 모순들을 덮어버렸지만, 사이코패스라는 이름의 희생양으로 사회가 가진 치부가 가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6명의 무고한 인명을 앗아가고도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는 국가권력과 연쇄살인범이라는 괴물을 키워낸 사회시스템이야말로 사이코패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시대는 괴물을 낳기에 충분한 악덕들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돈을 위해 사람을 불태워죽일 수 있는 사회, 권력을 향해 온갖 거짓과 비리가 독버섯처럼 피어나는 사회, 어린 시절부터 승자독식의 경쟁시스템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는 사회, 욕망의 무한질주를 위해서는 어떠한 가치도 무너뜨릴 수 있는 사회.

교육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럴 만큼 자신 있게 주장할 만한 근거들을 이론적으로나 데이터 상으로나 가지고 있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교육이 변화의 가능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효과적인 기제인 것만큼은 틀림없습니다. 물론, 근대적 교육이 가지고 있는 인간훈육 과정이라는 맹점에 대한 성찰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시스템 유지를 위해 기계 부속을 생산하듯 인간을 만들어 내는 교육과정 자체에 대한 고민은 중지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단서조항과 유보사항들을 늘어놓는다 해도 교육이 갖는 중요성이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강호순의 범죄는 다른 반사회적 성향의 범죄자들과 다르다는 분석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으며 성실한 젊은이였으므로 오직 쾌락만을 위한 살인이었다는 이야기들입니다. 이런 분석들은 마치 그가 다른 원인 없이 자생적 살인마가 되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그가 만약 가정이나 학교에서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교육을 받았더라면,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있었더라면, 그래도 그는 연쇄살인범이 됐을까요?

사회가 길러낸 괴물이라는 점에서 강호순의 엽기행각도 다른 범죄자들과 근본적인 차이를 지니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많은 범죄자들의 경우, 불우한 성장환경에서 기인한 반사회적인 성향이 범죄의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왜, 우리사회가 사회안전망을 더 촘촘하게 구축해야 하는지. 어째서 공교육의 파탄을 막아야 하는지. 이들이 사례로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를 죽이고 있는 것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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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8 18:09

여기, 예술이 있다

[편집자가 독자에게]이윤엽과 송경동의 경우

오늘 예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짚어내고 지켜내는 이들은 누구인가. 이윤엽, '여기 사람이 있다'.

▲ 오늘 예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짚어내고 지켜내는 이들은 누구인가. 이윤엽, '여기 사람이 있다'.



                                                안태호 편집장

고향 다녀오는 길에 보니, 평소 왕래하던 길가에 어느 새 아파트 단지 공사가 한창입니다. 도로 옆 공터였던 곳에 시멘트를 부어넣은 철골구조물이 불쑥불쑥 솟아올라 있더군요. 안 그래도 주변이 고층아파트로 숲을 이루고 있는 지경인데 조금의 빈틈이라도 보이면 건물을 우겨넣고 보는 건설현장의 풍경을 보니 꽉 막힌 도로만큼이나 갑갑한 심정이 들었습니다. 딴은, 개발업자들 입장에서 보자면 노는 땅이 아깝기도 할테지요. 그곳에 건물을 지으면 단위면적에서 낼 수 있는 수익이 비약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들에게 빈 땅을 그대로 두는 것은 범죄에 가까운 방치행위일지도 모릅니다.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고 했던가요? 그렇다면 아파트로 대표되는 개발은 욕망을 먹고 자라는 나무라고 할 만합니다. 개발로 인해 생기는 이익이 몇몇 ‘가진 자’들에게 집중되는 현 상황에서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는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일입니다. 하여, 사람들은 개발이익이 공정하게 분배될 수 있는 시스템을 요구합니다. 물론 그 이전에 '개발' 자체에  대한 성찰이 먼저겠지만, 개발을 통해 소수가 독점적인 이익을 그러쥘 수 없다면 지금과 같은 막개발에 올인하는 일은 애당초 있지도 않았을 겁니다.

용산참사에 대해 민심은 절절 끓고 각계의 움직임도 분주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섯이나 되는 목숨을 앗아가는 참담한 일이 벌어졌음에도 정부여당은 이치에 닿지 않는 흰소리만 늘어놓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합니다.

설 연휴를 앞둔 23일 용산참사 현장에서는 문화예술인들의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각계의 목소리에 입장 하나를 더하는 것을 넘어서 예술인들은 자신의 작업을 통해 치열함의 일단을 보여줬습니다. '여기, 사람이 있다 '와 '너희가 누구인지 그 때 알았다'를 봅니다. 전자는 걸개그림으로 제작된 미술가 이윤엽의 판화작품이고 후자는 시인 송경동의 추모시입니다. 이 두 작품이 함께 실린 현수막이 참사현장 빌딩에 걸렸습니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싸움에 함께하며 인간다운 삶을 꿈꾸던 그들을 생각합니다. 대추리 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하며 땅을 일굴 권리를 옹호하던 그들을 생각합니다. 한국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충격과 상처를 남길 한미FTA에 반대하며 이윤보다 인간을 외치던, 티벳의 독립을 지지하며 억울하게 억압당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던 그들을 생각합니다. 이들은 그림값이 수 천 만원을 호가하거나 베스트셀러를 낸 유명예술가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술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불평등과 부조리와 모순과 추문을 고발하는 증언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두 예술가는 자신들만 특화시켜 이야기하는 것을 불편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많은 예술가들이, 활동가들이 자신들과 언제나 함께하고 있었다고 말이지요. 네, 맞는 말입니다. 현장예술의 이름을 사회적 갈등이 첨예한 곳에만 한정짓는 것 또한 단견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묻고 확인하고 싶어집니다. 오늘 예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짚어내고 지켜내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너희가 누구인지 그 때 알았다 _ 송경동

국민의 밥상에 독이 든 고기를 올리겠다고 했을 때
천년 강물의 가슴을 파헤치고 이윤을 위해 자연을 죽이겠다고 했을 때
교육의 전당을 시장으로 만들어 아이들을 죽음 같은 경쟁으로 내몰겠다고 했을 때
뉴타운을 지어 가난한 자들을 몰아내겠다고 했을 때

가녀린 촛불 하나하나를 곤봉과 방패로 짓이겨 갈 때
100만 촛불의 간절한 생명의 소리를 콘테이너산성으로 막고 귀막을 때
인터넷에 마저 재갈을 물리겠다고 압수수색해 올 때

96일 굶은 기륭 김소연이 오른 철탑 망루를 뒤흔들고 경찰차로 들이박을 때
죽어보라고 용역 구사대를 앞세워 이죽거릴 때
미포조선 100m 굴뚝농성장에 불기를 끊고 음식물을 끓을 때
용기 있으면 죽어보라고 사주할 때

바른 언론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곧은 교사들의 목을 단칼에 치고
교과서에 새겨진 참민주주의의 목을 조를 때

890만 비정규직 2년짜리 노예목숨도 부족해
4년짜리 노예, 영원한 비정규목숨들을 양산해
자본에겐 횡재를 민중에겐 살아도 죽은 목숨을 선사하겠다고 했을 때
가진 자들만을 위해 모든 법률을 개악하겠다고 했을 때
항복하지 않으면 어떤 인도적 지원도 할 수 없다고 북의 동포들에게 엄포를 놓을 때
팔레스타인 학살 규탄 유엔인권위 결의안에 기권표를 던질 때

알았다. 너희는 소수라는 것을
만인을 위한 정부가 아니라는 것을
만인을 죽음으로 내몰 잔인한 살인 정부라는 것을
폭력으로 밖에 자신을 유지할 수 없는 더럽고 추악한 파쇼 정부라는 것을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농민빈민서민의 위기로 돌리려는
극악한 정부라는 것을

너희에겐 그 무엇도 맡겨서는 안된다는 것을
뼈저린 고통을 당해봐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닌 너희라는 것을
보라. 미천한 자본과 폭력의 개들아
진실은 다시 모두가 잠든 새벽녘
가난한 삶의 현장에서 성난 불꽃으로 일어나
우리 모두의 나약한 가슴을 태우고
비겁과 나태를 밀어내고
양심과 도덕의 횃불에 다시 불을 당긴다
헐벗은 겨울 벌판을 정화하는 들불처럼
쥐새끼들을 몰아내고 병든 균들을 태워 없애고
노동자 민중이 주인되는
새로운 시대의 봄을 부른다

더 이상 오를 곳도
더 이상 내려 갈 곳도
더 이상 물러 설 곳도 없어
하늘로 하늘로 오르는 계단을 쌓듯 망루를 쌓아갔던 열사들이여
그러니 일어서라
일어서서 이 차디찬 새벽을 그 뜨거운 몸으로 증거하라
우리가 그대들이 되어
더 이상 물러 설 곳도
더 이상 안주할 곳도
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는
이명박 신자유주의 폭력 살인
반민중정권 퇴진을 위한 투쟁에 결연히 나서도록
살아서 비굴한 목숨이 아니라
열사들의 영전에 자랑스런 이름들이 될 수 있도록
열사들이여 그 뜨거운 분노
그 뜨거운 함성, 그 뜨거운 소망을 내려놓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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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4 13:33

원치 않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기자의 눈]‘기본소득제도’는 사회적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박휘진 기자
지난 20일 '용산 참사'현장. 사람들이 절대적 빈곤으로 내몰리는 지금, 사회적 대안이 절실히 필요하다.
▲ 지난 20일 '용산 참사'현장. 사람들이 절대적 빈곤으로 내몰리는 지금, 사회적 대안이 절실히 필요하다.

매주 일요일 직장인들은 내일을 두려워한다. 왜? 출근해야 하니까. 매달 직장인들은 단 하루만을 바라보고 산다. 어떤 날? 월급날. 어째서 그들에게는 일하는 것이 즐겁지 않은 것일까? 이유는 명백하다. 원치 않는 노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금에 매인 노동은 즐겁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가치를 실현시키지도 않는다. 오히려 인간을 소외시키며, 삶을 피곤하게 만든다. 이러한 노동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꿈같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기본소득제도’가 그 길을 열어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대중에게는 아직은 낯선 이야기인 ‘기본소득제도’가 한국사회에서도 논의되기 시작했다. 기본소득제도의 주창자 중 한명인 앙드레 고르의 책 『에콜로지카』가 지난 겨울 국내에 소개되었고, 박홍규 교수가 민주법학에 관련 글을 실은 바 있다. 1월 22일에는 제 3회 사회대안포럼에서 ‘기본소득제도의 사회대안적 가능성’에 대한 심포지엄을 통해 한국사회에서의 적용가능성을 타진하는 시간을 가졌다. 

기본소득은 ‘심사와 노동요구 없이 모두에게 개별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지급되는 소득’으로 사각지대 제로의 보편복지제도이다. 기본소득제도 프로젝트를 통해 형성된 한국의 기본소득 지급액은 39세 이하 연 400만원, 41세 이상 54세 이하 600만원, 55세 이상 64세 이상 800만원, 65세 이상 900만원이다. 그런데 이게 정말 실현가능한 일인가? 

사회대안포럼 심포지엄 발제문에 따르면 “2006년부터 기본소득제도를 도입한 나미비아의 오미티라 지역에서는 60세 미만 거주자들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 후로 과거에 만연했던 식량구걸행위를 완전히 소멸시켰으며 지역민의 존엄성뿐만 아니라 책임감도 크게 향상시킨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나미비아뿐 아니라 독일을 비롯한 유럽, 남아프리카공화국, 브라질, 멕시코, 일본 등이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 Basic Income Earth Network)에 참여”하고 있다.

기본소득은 무조건적으로 사회의 모든 성원에게 지급된다. 이는 “인간을 억압적인 노동으로부터 해방하여 능력에 따라 보다 자유롭게 노동을 선택하게끔 경제적 토대를 제공함으로써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대신에 노동시간을 감축하고 자유시간의 길이와 질을 향상시키는 탈노동중심주의”(연방노동공동체 기본소득 그룹)를 실현시키기 위함이다. 때문에 기본소득제도가 실현되면 사람들은 임금을 위해서 노동하는 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임금을 위해 노동하는 것은 얼마나 소모적인가. 그것은 삶의 에너지를 발산하게 하는 일이라기보다 컴퓨터 앞에, 기계 앞에 에너지를 내다버리는 일이다.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카프카 소설『변신』의 주인공처럼 ‘벌레’가 되는 일이다.

발제문에서는 이와 더불어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각자 원하는 노동을 하게 되어 시간당 노동생산성이 비약적으로 향상될 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소득이 기본소득수령액만큼 증가한다. 더구나 무상의료․무상교육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지출요인이 감소하여 잔업동기가 약해져 일자리를 나누게 되어 비자발적 실업을 축소시킬 여지가 커진다”, “사회성원 대부분의 실질소득이 크게 증가할 것이다”, “전업주부도 독자적인 소득과 경제권을 향유하게 되어 가정 내 남녀평등에 기인할 수 있다”, “GNP 통계에 계산되지 않더라도 사회적 노동들이 풍부해 질 것이고,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의 활동이 확실히 증가할 것이다” 등 기본소득제도의 효과를 부연 설명했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돈’일 수밖에 없다.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는 기본소득제도일지라도 지급되어야 할 총액수가 대체 어느 정도이며, 그것이 어떻게 조달가능한지에 대한 전사회적 논의와 합의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심포지엄에서 제안한 재원조달은 주로 ‘세제 개편’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기본 원칙은 ‘모든 소득에 대해서 과세한다.’, ‘불로소득에 대해서는 30%의 세율로 일률적으로 원천과세하고 종합소득에 합산시켜 다시 과세한 다음 기납입분은 공제한다’, ‘불로소득에 대한 세율은 조세제도가 정착되면 점차 늘리고 소득세율은 낮춰 간다’ 등이다. 발표자는 “이와 같이 부과하면 연 과세대상 소득이 1억원에 달하는 사람의 경우조차 가족이 2인 이상일 경우 기본소득으로 인해 실질소득이 늘어난다”며 “국민의 90%정도가 이득을 보기 때문에 조세 저항을 거의 유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다”고 덧붙였다.

곽노완 교수와 강남훈 교수는 “복지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세금을 더 낼 수밖에 없다”면서 “세금을 내라고 하면 무조건 국민들이 반대부터 하고 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국민을 바보로 보는 일”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국민들이 세금을 내는 것에 불만이 있는 것은 내가 낸 세금이 어디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며, 동시에 연말에 멀쩡한 도로를 뜯고 바르는 데 내 돈이 쓰이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금을 내야하는 정당성을 합의로 도출해내는 일은 힘든 과정이 되겠지만, 한 고비 넘기면 또다시 찾아오는 경제 위기들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이라면 우리 선택의 폭은 넓지가 않다.

기본소득제도가 사회적 대안으로 실행되어 절대적 빈곤으로부터 구성원들을 보호할 수 있다면 사회는 어떻게 달라질까. 적어도 거리로 내몰리는 노숙인들은 없지 않을까. 지난 20일처럼, 쫓겨 올라간 ‘골리앗’에서 화염에 휩싸인 채 세상을 떠나야만 하는 철거민도 없지 않을까. 기본소득제도를 위한 세제 개편이 이뤄진다면 땅값, 집값 등 지대를 통한 불로소득에 대한 광적인 열광도 사그라질 테니 말이다. 노점이라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철거민들에게 내려진 최종결정이 1600명의 경찰병력과 특공대 투입뿐인 사회는 절망 그 자체다. 원하지 않는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절대 빈곤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사회적 대안이 너무나 절실하다. 기본소득제도에 대한 논의는 대안을 향한 새로운 출발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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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0 17:15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편집자가 독자에게]자본에 휘둘리는 미술이 안타깝다
안태호 편집장

예술이 추문과 연계되어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회는 불행하다. 삼성그룹이 비자금으로 구입했다고 알려진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 예술이 추문과 연계되어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회는 불행하다. 삼성그룹이 비자금으로 구입했다고 알려진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지금은 고인이 된 박이소 작가가 박모라는 이름으로 번역한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라는 책의 도입부 서술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것은 고래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인류 역사의 걸작들을 도판으로 하나하나 보여주면서 아래에 짤막한 코멘트를 첨부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요. 페이지 당 하나의 사진과 한 줄의 코멘트가 들어가는 도입부는 20여 페이지나 계속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코멘트의 내용은 한결같습니다. "이것은 미술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일반인들이 미술이라기보다는 선사시대의 유물이라고 생각할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부터 우리가 꿈에서라도 미술이 아닐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한 미켈란젤로의 작품들까지 포함됩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앞에 두고 미술이 아니었다고 하니 처음 책을 읽을 당시에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습니다.

이 난감한 사태를 책은 ‘미술은 근대의 발명품’, 이라는 말로 갈무리를 하지요. 우리가 아는 미술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나타난 경향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미술관에 전시되고 박물관에 보존되고 수집가들이 구매하고 대중매체 내에서 복제되는 제도로서의 미술”이라는 이야깁니다. 파인아트체계가 확립된 것이 18세기 후반이니 그 전까지 만들어진 물건들은 미술이 아니었다는 게 정확한 인식이겠지요. 물론, 지금은 제도 내에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안착한 누구나 다 인정하는 미술작품입니다.

책을 소개할 목적도 예술사 강의를 할 요량도 아닙니다. 다만, 최근 미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이 좀 한심하게 느껴져 꺼낸 말입니다.

현직 국세청장이 뇌물죄로 수감 중인 전군표 전 국세청장에게 최욱경의 ‘학동마을’을 건넸다는 주장이 나와 미술동네가 또 뒤숭숭한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그림로비 파문을 계기로 한상률 청장이 사의를 표했으니 이제는 둘 모두 전직 청장이군요). 작년에는 삼성그룹이 불법으로 조성한 비자금을 가지고 고가의 미술작품을 사들였다는 주장과 함께 박수근의 ‘빨래터’ 위작논란이 미술계를 어지럽게 만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예술이 정치적 스캔들과 연계되어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회는 불행합니다. 물론, 미술이 축재나 청탁의 도구로 사용된 것이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닌 듯합니다. 정확한 학문적 근거나 사료들을 확인해보지는 못했지만 조선시대를 다룬 소설이나, 서양의 경우에도 수백 년 전 사회를 다룬 이야기들에서 미술품이 청탁의 용도로 사용된 내용들이 가끔 나오니 말입니다. 미술작품은 희소한 가치로 인해 높은 가격을 형성합니다. 취향의 문제가 개입하면 가치재로서의 예술품의 격조는 더욱 높아지고 이를 소유한 이들의 품위까지 보증하는 효과를 갖습니다. 양도세가 붙지 않아 실제 추적도 용이하지 않으니 뭔가를 요청하는 이나, 이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인 셈입니다. 부정축재나 뇌물이나 양자 모두, 국가가 예술 진흥을 위해 예술작품에 대한 세금을 면해주는 것을 교묘히 활용하고 있는 거라고 봐야겠지요. 위작 문제 역시 철저하게 욕망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가짜를 만들어서라도 돈을 벌어야겠다는 저열한 욕망이 예술이라는 외피를 뒤집어쓰고 자행되는 셈이지요.

이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예술이 돈이 된다는 사실에 비애를 느끼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떤 작품이 더 비싼가, 중국미술이 한참 인기라던데, 팝아트를 사두면 수익률이 좋다던데, 이 작품은 틀림없이 오른다, 등속의 말들은 예술의 본래의 가치가 무엇인지 곱씹어보게 만듭니다. 이 경향이 심화되자 미술이 자본을 파트너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미술을 기획하고 예술 자체를 왜곡하는 경향이 생겨났습니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한국의 미술시장은 세계미술시장의 급등세에 힘입어 상당한 호황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2008년 초까지만 해도 한동안은 더 지속될 것 같았던 ‘좋은 시절’은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에서부터 시작된 세계경제의 추락에 발맞춰 기세가 확 꺾여버렸죠. 그 동안 돈 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화랑들이 기획작가를 양성하고, 위작스캔들이 튀어나오는 등 온갖 종류의 추문이 난무했습니다. 언젠가 한 선배가 지역의 미술대학에 강의를 다닌 경험을 이야기해 준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학생들이 설치나 다른 작업은 도외시한 채 ‘모조리 페인팅만 하더라’며 헛헛한 웃음을 짓더군요. 한창 미술시장이 달아올랐을 시점인 2007년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는 학생들의 작품이라도 조금 팔릴만한 구석이 보인다 싶으면 화랑들이 입도선매하다시피 하는 경향마저 있었다니 이 학생들이 순수하게 ‘오버’한 것만은 아닌 셈이죠.

‘행복한 눈물’이나 ‘빨래터’ 위작논란 같은 경우도 미술이 자본과 적극 결탁하는 사회에서 예술작품과 일차원적인 욕망이 결합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남을 거라 생각합니다. 예술작품이 교회와 패트런의 손을 벗어나 독립하던 순간부터 어쩌면 이런 운명은 예정되어 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돈과 관계없는 고고한 예술은 어쩌면 현실과 관계 맺는 것을 거부하는 치기어린 포즈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살아생전 단 두 점의 그림만을 팔았지만 죽어서는 예술가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고흐는 자신의 그림을 팔지 못해 늘 절망에 휩싸여 있었죠. 자본에 휘둘리는 미술만이 판치는 요즘의 상황이 더욱 답답해지는 까닭이 이 풀리지 않는 모순 속에 숨어있는 걸까요.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위작들은 젖혀둔다 쳐도, 최욱경의 ‘학동마을’이나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은 미술일까요. 물론 이 작품들 역시 당연히 제도의 순환 안쪽에 있는 어엿한 미술입니다. 게다가 자타가 인정하는 ‘걸작’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추잡한 욕망 역시 제도의 한 축이라 생각해야 할까요. 작품의 본질을 떠나 범죄에 활용되는 그 순간만큼은 제도에서 이탈해 있는 게 아닐까요. 미술이라는 게 절대적 제도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설령 그렇다 해도 그 작품들의 가치가 일방적으로 훼손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그 순간만큼은 미술이라고 부르고 싶어지지 않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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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3 11:22

우리모두가 미네르바다!

[편집자가 독자에게]인터넷 글쓰기, 위험에 빠지다
안태호 편집장

꼭 지금 정부를 빌란에, 미네르바를 히어로에 빗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기엔 현 정부가 벌이는 일이 조금도 환상적으로 보이질 않거든요.
▲ 꼭 지금 정부를 빌란에, 미네르바를 히어로에 빗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기엔 현 정부가 벌이는 일이 조금도 환상적으로 보이질 않거든요.

주말을 미네르바 관련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보냈습니다. 결국 많은 이들의 바램과 탄원과 한숨을 뒤로 한 채 그는 구속되어 버렸더군요. 눈이 벌개지도록 미네르바 관련 기사와 게시판 글을 따라잡으며 참으로 비통한 심정이 들었습니다.

혹시 <저스티스>라는 미국의 그래픽 노블을 아시는지요? 이 만화에서 세계의 위기를 구하는 것은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을 비롯한 전통적인 슈퍼히어로들이 아니라 루터, 리들러, 포이즌 아이비, 브레이니악 등 이름도 생소한 슈퍼빌란(악당)들입니다. 이들은 걷지 못하게 된 이들을 걷게 해주고 사막에 오아시스를 만듭니다. 누가 봐도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세상의 기아와 빈곤을 해결하는 데 인류 최고의 악당들이 솔선해서 나서는 상황에 다들 어안이 벙벙한 사이, 슈퍼히어로들은 하나 둘씩 빌란들에게 납치를 당하고 세계의 진짜 위기가 찾아옵니다. 결국, 악당은 악당이었던 거죠.

꼭 지금 정부를 빌란에, 미네르바를 히어로에 빗대서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기엔 현 정부가 벌이는 일이 조금도 환상적으로 보이질 않거든요. 물론, 그들이 달콤하게 내뱉는 말들이 많은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감미로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현재의 원인은 대개 과거에 있는 법이지요.

어쨌든 미네르바의 체포와 구속은 몇 가지 쟁점, 혹은 생각할 지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먼저 언론의 보도행태는 이번에도 여지없이 사방에서 강타를 당했습니다. 학벌과 직업(30대 백수)에 대한 과장된 표현들은 한국사회가 아직도 간판에 대해 얼마나 완고한 문턱과 고집을 유지하고 있는지 확인시켜 줍니다. 진중권 씨가 참 재밌는 말을 했는데요, "언론에서 추측하던 그런 프로필을 가진 사람이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쓴다는 것이 외려 비현실적"이라는 겁니다. 언젠가 박노자 씨가 고려대의 ‘이명박 라운지’를 보면서 “'삼성관'들을 쉽게 유치할 수 있는 서울 소재 '명문대'보다 오히려 학벌주의 구조에서 계속 불이익을 받는 지방대학들에서 저항의 흐름이 점차 강해질 것 같다.”고 이야기한 말이 씁쓸하게 떠올랐습니다.

그 와중에 참으로 한심해 보였던 것이 마치 미네르바를 연쇄살인범 다루듯이 하는 보도들이었습니다. 주변인과 가족을 무차별적으로 인터뷰하고 거주지를 공개하는 등 개인의 신상 노출에 대한 우려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더군요. 물론, 언론 문제를 언급하면서 신동아를 빼놓으면 그야말로 섭섭하지요. 신동아는 지난 12월 미네르바의 절필선언 이후 최초로 미네르바와 단독 인터뷰를 성사시켜 화제가 됐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검찰에 체포된 미네르바는 신동아와 인터뷰를 한 적이 없다고 밝혔네요. 신동아는 미네르바를 사칭한 이에게 '낚인' 걸까요, 아니면 특종의 압박으로 인해 '작문'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은 걸까요. 신동아 측의 솔직하고도 빠른 해명을 기대해 봅니다.

이번에 밝혀진 참으로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경제전망에 대해 정부가 하나하나 간섭했다는 사실입니다. 외신에는 한 경제전문가의 인터뷰가 실렸습니다. 이 전문가는 “몇 달 전 내가 한 지역신문에 외환보유고에 대한 걱정을 표현하자 한국은행 고위관리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언론이 부정적인 견해를 계속해서 보도하면 내가 잠재적 위기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실이라면, 참으로 황망한 일입니다. 청와대 대변인은 국민일보에 전화를 하고(관련기사 : 땡전뉴스 원하는 정부) 문화부 대변인은 컬처뉴스에 전화를 하더니(관련기사 : 유인촌 장관님, 억울합니다), 언론사에 전화를 해 논조에 일일이 시비를 거느라 정부 관계자들은 참, 피곤한 일년을 보냈을 것 같습니다.

한국은행 관계자가 한 경제전문가에게 경고한 내용은 ‘자기실현적 예언’이라는 건데요, 이는 미네르바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많은 논란이 됐던 겁니다. 미네르바가 부정적 예측을 하면 그 부정적 예측에 맞춰 경제주체들이 움직이게 되어 실제로 그것은 예언이라기보다는 지침처럼 사용된다는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정부에서 올 한해 경기전망이 어렵다고 하면 기업이 신규투자를 꺼리거나 가계가 지출을 줄이는 일이 모두 비슷한 일에 해당될 수 있지요. 그런데 검찰에 따르자면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를 '짜집기'한 수준에 불과한 일개 네티즌의 글이 한국경제를 좌지우지할만한 자기실현적 예언이라고 생각하는 건 매우 황당한 인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가 3천’ 발언이나 ‘747 공약’들은 가히 '자기파괴적 예언'이라 해야 할까요. 네티즌 한명이 세계 13위의 경제규모를 가진 나라의 국가신인도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검찰과 법원의 말에 여러 네티즌들이 " 자! 여러분들 ! 이제 여러분들은 좀 더 분발하면 미국 경제도 뒤집어엎을 수 있습니다! 화이팅!!!"이라는 조롱어린 댓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구속된 미네르바가 그 미네르바가 아닐 거라며 음모론을 펼치기도 합니다. 글쎄요, 음모론이라는 게 결코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하는 집단적 행위인 까닭에 ‘가짜 미네르바’ 논란도 제법 오래 지속될 것 같습니다만,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이번 사건의 가장 기본적인 사실이면서 핵심이 되는 문제는 ‘인터넷에 쓴 글’로 인해 긴급체포가 되고 구속영장이 발부됐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에 비하면 신동아의 ‘작문’도 그저 그런 이야깃거리 이상이 아닙니다. 요건은 딱 두 가지입니다. 정부 정책에 비판적일 것, 그리고 영향력이 있을 것. 미네르바가 이야기했던 ‘달러매수 금지’가 어느 정도 ‘실체’가 있던 사실이라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정부에 비판적이면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보유한 개인이나 단체는 이제부터 ‘허위사실 유포’의 올무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지도 모릅니다. 아니, ‘비판적’이라거나 ‘영향력’이라는 어휘 자체가 자의적 판단이 가능하다고 보면 인터넷에 글을 쓰는 모든 이들이 미네르바와 같은 운명을 맞게 될 가능성이 그의 구속과 함께 열렸다고 보는 게 맞겠지요.

이미 다음에서는 ‘미네르바 닉네임 갖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감수성 밝은 네티즌들이 자신들에게 닥쳐온 위기에 대해 그만큼 절박감을 느낀다는 표현일 것입니다. 이미 저들은 루비콘 강을 훌쩍 건넜습니다. 우리 모두가 미네르바인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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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8 10:48

도둑과 히말라야 야크의 사랑

[노동효의 길 위에서]랑탕 히말라야 9(노동효 _ 자유기고가)
그날 만났던 노인 내외, 야크, 도둑의 대사를 떠올리며 나는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랑은 주는 것도 아니고 받는 것도 아니고 단지 하는 것이라고.
▲ 그날 만났던 노인 내외, 야크, 도둑의 대사를 떠올리며 나는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랑은 주는 것도 아니고 받는 것도 아니고 단지 하는 것이라고.

저요, 사랑에 대해서 잘은 몰라요. 근데 사랑하면요 그냥 사랑 아닙니까? 무슨 사랑, 어떤 사랑 그런 게 어디 있나요? 그냥 사랑하면 사랑하는 거죠. 도둑이라 잘은 몰라요. 가겠습니다.

- <아는 여자> 중

캉진 곰파(해발 3,730미터)에서 마지막 밤. 체코 리까지 1,200미터의 고도를 오르내린 후라 무척이나 고단했지만 잠이 오지는 않았다. 눈을 감아도, 잠은 오지 않는다. 잠을 자도 곧 잠이 깬다. 깨고 나면 폐쇄공포증에 걸린 것 마냥 갑갑해서 침낭 밖으로 팔다리를 내놓게 된다. 갑갑증도 잠시, 영하로 떨어진 실내는 무척 춥다. 침낭 속으로 다시 팔다리를 밀어 넣는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공기를 들이 마신다. 아무리 크게 심호흡을 해도 허파꽈리에서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교환이 순조롭지 않다. 수요와 공급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유년시절 친구들이 떠들고 노는 소리를 들으며 숙제를 해야 했을 때처럼, 숨이 막혀 미칠 것만 같다. (아마 그때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공부든, 일이든, 뭐든 억지로 하면 나타나는 발광증세) 그럴 땐 에라 모르겠다, 하고 뛰쳐나가버리면 되었지만 뛰쳐나가려니 히말라야의 겨울은 너무 춥다. 게다가 뛰쳐나간다 한들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가쁜 숨을 연달아 들이마신다. 후우, 후우, 후우, 후우....그러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잤고, 또 꿈을 꿨다. 이번엔 다른 친구들을 만났다. 여전히, 매일, 알 수 없는 만남의 연속이다.

햇살 쨍쨍한 아침이었다. 아래층에서 겔젠이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얼른 내려와서 아침 식사하고 길 떠나자고. 갈릭 스프로 요기를 하고 길을 나선다. 하산길이긴 하지만 랑탕 히말라야 트렉킹이 끝난 것은 아니다. 샤브로 뷰 포인트 롯지(해발1,680미터)까지 내려가서 툴로 샤브로 마을을 지나 고사인 쿤드(해발 4,360미터)까지 가는 긴 여정이 남아있다. 고사인 쿤드는 백두산 천지처럼 고산에 자리잡은 호수. 힌두의 전설에 따르면 시바 신이 삼지창을 꽂았던 곳이라고 하고 매년 여름이면 시바 신을 기리는 축제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성스러운 호수인 것이다. 오늘은 라마호텔(해발 2,410미터)까지만 내려가면 된다. 올라올 때는 이틀이 걸렸지만 내리막이니만큼 하루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행복 가득한 식당(Peaceful Restaurant)에서 호주에서 온 니키와 데니를 만났다. 또 만났네! 그러게 말이야! 랑탕 히말라야 트레킹의 첫날부터 시작된 그들과의 인연은 정말 질기고 질기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진다. 세상에서 가장 낡은 버스를 타고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길을 여행하는 동안 생사를 함께 했던 길동무들. 그들은 카트만두로 돌아간 뒤 안나푸르나가 보이는 포카라 호수로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니키가 입술을 활짝 벌리고 웃음을 터뜨리는 동안 레스토랑 주인 우낀 라마는 심각한 표정이다. 그는 영어를 할 줄 모른다. 그래도 우리들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무척 궁금한 모양이다. 그는 랑탕 히말라야에서 가장 심오한 표정을 지니고도 가장 우낀 라마. 아무리 진지한 표정을 짓고, 진지한 질문을 해도 천진난만한 눈빛과 말투 때문에 상대방을 웃게 만드는 인물. 우낀 라마가 만들어 준 맛있는 더히(네팔식 요구르트) 한 그릇씩 떠먹고 길을 나섰다. 굿 바이, 우낀 라마!

랑탕 마을에 도착해서 샹그릴라 호텔에 들렀다. 무사히 돌아온 우리 일행을 티베트 유민 가족들은 환대해주었다. 티베트 민요를 불러주던 큰 누이는 카트만두로 떠난 후였고, 둘째와 어린 소년도 방학이 끝나 오후에 아래 마을로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티베트 소녀, 치링은 내게 메일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서로의 메일주소를 주고 받았다. 치링이 어디서 어떻게 인터넷 메일을 보낼 수 있을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나는 바다를 본 적이 없는 소년에게 바다를 선물해주고 싶었지만, 푸르스름한 지폐 한 장을 건네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사탕 사 먹지 말고 연필이나 공책 사야 해. 어릴 적 삼촌이 집에 찾아오면 부모님 몰래 살짝 용돈을 주시곤 했다. 물론 나는 연필이나 공책 대신 딱지나 구슬을 사곤 했다. 깃대에 걸린 룽다와 타르쵸가 바람에 나부낀다. 랑탕 마을은 바람의 마을로 기억될 것이다. 굿 바이, 치링! 

설산과 계곡과 돌과 흙과 강이 어우러진 길은 다시 걸어도 아름답다.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깊고 가파른 협곡이긴 하지만 랑탕 강은 수천 만년이 흐르는 동안 너른 들을 만들어 냈다. 그 한 가운데 길을 걷는 기분은 마치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길 위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힌두교에 따르면 세상은 환영, 즉 마야의 세계. 걷고 또 걷는 동안 마치 나라는 아바타가 랑탕 히말라야라는 프로그램 속의 길들을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대체 이 야릇한 느낌은 대체 뭐란 말인가? 아무리 걸어도 ‘또 다른 나’가 ‘걷고 있는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이한 느낌이 떠나지 않는다. 분명 걷고 있는 것도 나고, 그런 나를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는 것도 나다. 어떻게 이 두 개의 나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무엇인가 깨어질 듯, 깨어질 듯 하면서도, 쨍 하고 깨어지지 않는다. 딱 0.1mm만 더 몰입하면 뭔가가 잡힐 것만 같은데...

쨍.

만다라가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티베트 노인에게서 300루피를 주고 샀던 만다라. 랑탕 마을로 올라가던 도중 만다라에 키스를 '쪽' 하고 세상의 첫 소리 '옴'이 양각된 마니석(경전을 적어 놓은 돌탑)의 돌 틈 사이에 만다라를 밀어 넣었었지. 지금 그때 두고 온 만다라의 옆면이 은화처럼 그 틈에서 빛나고 있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는 영원으로 통하는 틈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현재이다.’라고 했던가. 라마 호텔과 랑탕 마을 사이에는 만다라로 통하는 틈이 있는데, 그것은 마지막 마니석에 있다. 마지막 마니석, 위에서 둘째, 왼쪽에서 둘째 돌 틈 사이. (이것은 당신과 나의 보물찾기다. 당신이 랑탕 히말라야를 가게 된다면, 그래서 내가 남기고 온 만다라를 찾게 된다면 - 가져도 좋다.) 랑탕 히말라야에 터 잡고 살던 사람들이 쌓기 시작한 마니석. 여행자를 안내하고, 원주민들의 소망을 들어주며 지금껏 남아 있듯이 내가 남겨둔 만다라도 마니석이 풍화작용에 의해 저절로 무너지기 까지는 그대로 남아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아프리카 마냥 다국적 기업들에 의한 개발 바람이 불어 닥쳐 오래 전에 만들어진 모든 것들이 부수고, 반듯하고, 날카롭고, 정교한 새 것들이 들어서지 않는 한은 말이다. 굿 바이, 만다라!
 

트렉킹 중에 만난 노부부는 천천히 산을 오르다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면 나란히 앉아 맥주 한 잔을 마시고, 해가 저물면 롯지에 앉아 주변 경치를 감상하며 하루를 보내며 랑탕 히말라야 트렉킹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호호 할아버지, 할머니 내외를 만난 것은 고라타벨라(해발 2,992미터)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다시 길을 나선 지 반시간 즈음 지나지 않아서였다. 랑탕 히말라야에서 만난 여행자들의 연령대는 대부분 20~30대 젊은이들이었다. 물론 중년의 커플도 만난 적도 있다. 그러나 그 호호 할아버지, 할머니 내외는 랑탕 히말라야에서 보기 드문 캐릭터였다. 롯지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의 수염은 산타클로오즈 마냥 희고 텁수룩했고, 할머니의 눈가엔 웃음 주름살이 한 가득 자리잡고 있었다. 곱게 늙으셨구나. 안녕하세요? 나의 가벼운 인사에 따뜻한 미소를 짓는 호호 할아버지, 할머니 내외. 마치 <가을날의 동화 An Autumn's Tale, 1987) >에 등장하던 노인 내외가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실연의 상처로 제니퍼가 바닷가 벤치에 앉아 울먹이고 있을 때, 옆 벤치에서 지켜보던 할아버지가 말없이 꽃 한 송이를 꺾어 건네주던 장면. 그리고 벤치에 앉은 할머니에게 돌아가 두 분이 함께 돌아보며 미소 짓던 씬. 나는 두 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노인 내외는 독일에서 오신 부부였고, 은퇴를 했고, 함께 여행을 다닌다고 했다. 젊은 사람도 쉽다고는 할 수 없는 히말라야 트렉킹이다. 천천히 산을 오르다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면 나란히 앉아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산을 오르다 해가 저물면 롯지에 앉아 주변 경치를 감상하며 하루를 보내고, 그렇게 서로 의지하며 랑탕 히말라야 트렉킹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서로 주고 받는 눈빛은 갓 연애를 시작한 연인들의 눈빛처럼 이글이글 타오르지는 않았지만 화롯불 마냥 따뜻했다. 나는 두 노인의 그런 미소가 참 좋았다. 두 분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은데요, 괜찮을까요? 할머니가 소녀처럼 꺄르르 웃었다. 찰칵. 그들은 나에게 고맙다고 답례를 했다. 호호 할아버지 할머니 내외와 헤어져 내려오는 동안 문득 배창호 감독의 <러브 스토리>가 떠올랐다.

- 배창호 감독의 <러브 스토리> 본 적 있니?
- 아니.
- 두 분을 뵙고 나니 <러브 스토리>가 떠올라. 배창호 감독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감독 자신과 아내가 직접 연기를 한 영화지. 마흔을 넘긴 영화감독과 노처녀가 연애를 하고, 갈등을 겪다가 결국 결혼을 하는, 흔하다면 흔하다고도 할 수 있는 줄거리지만 참 진솔하고 따뜻했어. 영화가 끝나갈 무렵 산행을 갔다 내려오던 길에 술 좋아하는 남편이 막걸리를 마시는 장면이 나와. 해가 저물고, 재촉하는 아내의 목소리에 사내가 일어서고,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황혼이 물들어 오는 길을 걸어가는데, 어느새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노인이 되어 있더군.
- 그런 영화가 있었구나.
- 나중에 기회가 되면 봐, <러브 스토리> 이전 영화들도 좋지만 <러브 스토리> 이후 만든 영화들도 좋아. <정>도 그렇고, <길>도 그렇고, 영화가 참 따뜻해.  

한참 숨을 고르던 외다리 야크가 간신히 계단을 짚고 올라섰다. 곁에서 지켜보던 야크는 그제서야
다리를 옮기며 뒤를 따랐다. 사라지는 두 마리 야크를 보고 있던 나도, P도 눈시울이 뜨뜻해져 있었다.


배창호 감독 영화의 대사와 장면들을 P에게 들려주며 좁은 산길을 내려오다가 야크 떼를 만났다. 숲 속에서 빠져 나온 몇 마리의 야크가 우리 곁을 지나가고, 한 마리 야크가 돌계단 앞에서 숨을 고르며 서 있었다. 다리 하나가 없었다. 줄 지어 오던 다른 야크들이 다리 하나 없는 야크를 앞질러 갔다. 그때였다. 무리 중 한 마리 야크가 다리 없는 야크 뒤에 멈춰 섰다. 다리 없는 야크가 숨을 헐떡이며 한 발을 계단 위로 넘기려다가 실패하고, 그래서 헐떡이고 다시 다리를 계단 위로 올리려다가 실패하는 모습을 묵묵히 뒤에서 쳐다볼 뿐이었다. 다른 모든 야크들이 다리 없는 야크를 앞질러 사라질 때까지 그 한 마리의 야크만이 지켜보며 서 있었다. 네가 먼저 가기 전에는 너를 두고 떠나지는 않겠다는 듯 기다리고 선 야크의 안타까운 마음이 전해져 왔다. 힘겨워하는 야크와 묵묵히 지키고 선 야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그만 울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한참 숨을 고르던 외다리 야크가 간신히 계단을 짚고 올라섰다. 곁에서 지켜보던 야크는 그제서야 다리를 옮기며 뒤를 따랐다. 사라지는 두 마리 야크를 보고 있던 나도, P도 눈시울이 뜨뜻해져 있었다.         

장진 감독의 <아는 여자>에 등장하는 도둑의 말이 눌러도, 눌러도 솟아오르는 부표처럼 떠오른 것은 라마 호텔에 도착하고 나서였다. <아는 여자> 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말하는 다양한 사랑에 대한 생각들이 구종별로 다양하게 관객을 향해 날아든다. 기다리는 사랑에게 볼넷으로 걸어가건, 몸에 맞아 걸어가건, 그냥 가면 된다는 <야구코치의 사랑론>부터 사랑하면 죽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형사의 사랑론>, 그리고 사랑이 뭐 대수냐 이름 묻고, 좋아하는 음식, 취미, 혈액형 그렇게 묻고 대답하다 보면 그 사람 사랑하는 것이란 <은행강도의 사랑론>까지. 그러나 가장 인상 깊은 건 도둑이 남기고 간 대사였다. 그날 만났던 노인 내외, 야크, 도둑의 대사를 떠올리며 나는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람들은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도 하고, 기브 앤 테이크 라고도 하지만, 사랑은 주는 것도 아니고 받는 것도 아니고 단지 하는 것이라고.

Give 도 아니고 Take도 아니고 단지 Do 라고…Do, Do, 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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