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해당되는 글 34건

  1. 2009.04.22 살인마는 우리의 이웃사람이었다
  2. 2009.04.14 사소한 독서 습관이 안내한 특별한 작가 (1)
  3. 2009.04.09 경제 위기는 경제 현상일까, 삶의 현상일까?
  4. 2009.04.07 잠 못 드는 이들을 위하여
  5. 2009.03.27 5분의 경이와 한 권의 혁명적 지식
  6. 2009.03.24 초상화를 둘러싼 태어남과 죽음
  7. 2009.03.20 수 많은 '나'들의 우주와 나의 가능성
  8. 2009.03.17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예술 공격
  9. 2009.03.06 어쨌거나 슬픈 외국어
  10. 2009.03.05 말해져야 할 말은 다 말해졌다
2009. 4. 22. 09:29

살인마는 우리의 이웃사람이었다

[신간소개] 강풀 『이웃사람①~③』

강풀, 『이웃사람』(전 3권), 문학세계사, 2009, 값 각권 12,000 원.

▲ 강풀, 『이웃사람』(전 3권), 문학세계사, 2009, 값 각권 12,000 원.



                                                                 이주호 기자

내 이웃에 연쇄 살인범이 산다. 이웃의 피자 가게에서 패스트푸드를 사 먹고 이웃의 상가에서 가방을 사고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나간 이웃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때론 주차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기도 하는 내 이웃이 정해진 주기, 정해진 방식으로 게임을 하듯 살인을 한다. 연쇄 살인범의 주변 사람들이 뉴스에 등장해 살인범의 신변에 대한 증언을 하고, 설마 우리 옆집에 그런 사람이 살았을 줄 몰랐다고 끔찍해 하듯, 살인범은 내 주위에 있고 그래서 내 이웃이라 불린다.

국내 인터넷 만화에 관련한 모든 기록을 가지고 있는 강풀이 2008년 미디어 다음에서 연재했던 <이웃사람>(전 3권)이 출간됐다. 보통 사람들의 소박한 정 나눔을 작품 중심 정서로 두어 왔던 강풀이었던 까닭에 연재 당시부터 댓글을 통한 이런 저런 말들이 많았다지만, 완결에 가서는 어김없이 인간적 공감, 마음씀으로 마무리 된다.

비가 내리던 어느 밤, 수줍고 말없던 한 여고생이 실종되고 며칠 후 여행 트렁크 속에서 사채로 발견된다. 그리고 며칠 뒤 피해자와 같은 주택 단지에서 일하는 경비가 실종된다. 범인이 이웃에 있다는 단서는 주택 단지에 사는 사람들을 두렵게 하지만 이 단서를 통해 저마다의 의혹을 품은 이웃들은 각자 단서를 확보해 간다. 문제는 무고한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노파심과 혼자 살인범과 맞서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한 단지 내에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들의 삶은 개별적이다. 이들의 연대는 오로지 집값이나 개발에 따른 이익을 논의하는 경우로 한정되어 있다.

연이어 터지는 사건과 깊어가는 의혹, 이들은 자신의 용기와 맞대면하고자 하지만 불안 앞에선 여전히 혼자다. 살인범과 나의 1:1 싸움에서 승산은 없다. 하지만 1:다수의 싸움이라면? 살인범의 범행을 가운데 두고 사건의 중심부로 걸어들어 갈수록 사람들은 조금씩 내 이웃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절대적인 악과 선한 다수의 싸움이라는 대결구도는 잘 짜인 구성 덕에 예상할 수 있는 결말을 일부러 예상하지 않고 시종 긴장을 유지하게 하지만, 악에는 이유가 있을 수 없다는 작가의 인식은 어쩐지 석연치 않다. 이명박 역시 민주화 순행의 연결고리일 수 있다는, 살인범 역시 피해자일 수 있다는 식의 과감한 상대론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지만, 악에는 이유가 없다는 직접적인 표현은 아무래도 거슬린다. 이웃에 사는 살인범이라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가 뒤섞인 상황 설정을 절대적 악을 절대적 보복으로 갚는다는 결말로 이끄는 것은 너무 쉬운 선택이 아니었나 하는 아쉬움이다. 하지만 누가 언제 범죄자로 돌변할지 모르는 기막힌 현실을 누구라도 할 것 없는 마음씀씀이를 통해 이해해 가는 방식은 왜 강풀 만화가 매체를 달리하며 거듭 태어나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한다.

Trackback 0 Comment 0
2009. 4. 14. 09:06

사소한 독서 습관이 안내한 특별한 작가

레이먼드 카버,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
                                                                                                                                       이주호 기자
레이먼드 카버,『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문학동네, 2008, 값 9,500원),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개정판)』(집사재, 2009, 값 11,000원)
▲ 레이먼드 카버,『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문학동네, 2008, 값 9,500원),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개정판)』(집사재, 2009, 값 11,000원)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포석으로 깔아 놓고 남은 칸들을 채워가듯 다른 책을 섞어 가는 게 10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는 내 나름의 독서 방식이다. 내게 책이란 하루키가 지은 책들과 하루키 이외의 작가가 지은 책으로 구분되어 있다. 점에서 점에 이르는 선은 하루키가 소설이나 에세이에서 언급했던 작가, 작품들로 채워 넣는다. 스콧 피츠제럴드, 트루먼 카포티, 토니 모리슨 등의 현대 미국작가에서 다자이 오사무, 나쓰메 소세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등의 근대 일본작가, 칸트, 헤겔의 철학서까지 작가의 실제 경험치가 작가가 형상화하는 소설의 모든 소재를 포괄할 수 없으므로 작가의 독서경험을 따라 가는 것이야말로 한 소설가의 작품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 구절은 이 책에서, 이런 생각은 이 사람에게서 영향을 받았구나 하는 식으로 이해의 폭을 넓혀가다 보면 읽을수록 이야기가 풍성해진다. <무서운 영화> 유의 짜깁기 패러디 영화를 볼 때 각 장면, 장면이 어떤 영화에서 빌려온 것인지를 알면 한층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레이먼드 카버는 1939년 미국 태생의 작가로 작가로서 원숙기에 접어들 시기인 49세에 생을 마치기까지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대성당』,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 등의 단편집과 다수의 에세이, 시집을 출간했다. 종종 하루키의 에세이에서 레이먼드 카버의 이름을 보긴 했지만 그의 소설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하루키의 근작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문학사상사, 2009)를 읽은 직후다. 이 책의 제목은 레이먼드 카버 단편집의 원제인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에서 따 왔다. 이 책은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문학동네, 2008)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개정판)』(집사재, 2009)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출간되어 있다. 이 제목은 한석규, 김지수가 출연했던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이란 영화의 제목과도 비슷해 사랑에 관한 마음 따뜻한 에세이를 기대하게 만들기도 했다.

영화 이야기부터 하자면, 이 영화는 사랑에 관한 낭만적이지 않은 묘사 때문에 <8월의 크리스마스>와 같은 가슴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기대한 관객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며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사랑에 관한 이 영화의 시선은 레이먼드 카버가 세계를 묘사하는 방식과 많은 부분 겹친다. 재혼하거나 이혼하고 각자 살아가는 부부, 서로에 무관심하거나 바람난 부부 등 그가 설정한 가정의 모습은 한 결 같이, 평탄하다는 뭉뚱그린 범주에 포함시킬 수 없다. 그것이 미국 사회의 보편적 가정 모습을 그린 것이라 하더라도 미국 사회의 보편이 결혼관에 대한 여타 문화의 보편마저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므로 가족관계의 한 극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대개의 주인공은 직업이 불안정하다. 혹 부부 관계가 원만하고 직업이 안정되어 있는 경우 알코올 의존성이 강하거나 가족 중 하나가 처한 경제적, 신체적 결함을 일정 부분 책임져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문제없는 사람은 없다는, 그보다 협소하게는, 누구든 자기만의 문제를 하나씩 갖고 있기 마련이라는 보편적 인간관을 레이먼드 카버는 소설적이라 할 만한 상황 설정 하나 없이 사실적으로 묘사해 간다. 극적 상황이 거의 배제되어 있기에 사실적 묘사는 오히려 극단의 불행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박봉과 대출이자, 쪼들리는 생활비, 원만하지 못한 남녀관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일관되게 유지되는 불행한 일상들은 작가가 지나치게 세상을 냉소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한다. 현실이란 다 어쩔 수 없는 거라는 철저한 비관주의가 책 읽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살면서 삶의 별다른 질적 변화는 기대하지 말라는 듯 숨 막히는 일상 속으로 속도감 있게 걸어들어 간다. 머뭇거림 없이, 감정 낭비 없이 이야기 속 인물들은 분노인지 체념인지 모를 표정을 하고 하루하루를 버텨간다. 발버둥 쳐 봤자 일상은 달라질 게 없다. 주인공들의 유일한 희망은 그들의 가계부나 장래 계획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획기적인 구원의 손길을 만나는 것이다. 획기적인 만큼 구원의 손길은 전적으로 우연에 기대야만 한다.

우연한 구원이라니, 카버는 불행 말고는 보여주는 게 없는 듯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읽는 사람들은 기어이 구원을 보고 만다. 작중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읽는 이 역시 냉소와 불안 속에서 근근이 하루를 버텨가지만 그렇다고 삶을 구원시킬 수 있는 희망마저 놓고 사는 건 아니다. 어떤 극적인 사건이 벌어져 작중 인물들이 구원돼야 한다는 일종의 의지를 품게 됨으로써 나를 내 삶 속에서 구해내고 싶어진다. 누가 품은 희망이 누구에게 투영되었는지를 따질 필요도 없이 인물과 독자의 공동 운명체는 보잘 것 없는 삶 속에서 사소하나마 도움이 되는 일들을 생각해 본다. 친구 집을 방문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기도 한다. 누군가의 전화, 달콤한 사탕 한 알, 공복의 우유 한 잔. 사소한 구원이 이어지면서 삶은 지속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소한 한 가지를 잃을 때 삶은 전체적으로 규형을 잃는 건지도 모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대로 카버는 다른 누구와 대체될 수 없는 작가다. 작풍이나 세계관, 냉소와 구원의 줄타기, 카버의 단명이 아쉬운 대목이다. 이제 레이먼드 카버는 하루키와 하루키 아닌 작가와는 별개로 레이먼드 카버의 영역으로 둬야 할 것 같다. 사소한 독서 습관 하나로 특별한 작가를 만날 수 있었다면 이건 분명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Trackback 2 Comment 1
  1. Favicon of https://motherstory.tistory.com BlogIcon 연필 한다스 2009.07.03 01:4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놀랍네요. 하루키만으로 그 많은 인물들이 나올 수있다는게.

2009. 4. 9. 10:40

경제 위기는 경제 현상일까, 삶의 현상일까?

[신간소개] 『IMF 위기』

은수미, 『IMF 위기』, 책세상, 2009, 값 8,500.

▲ 은수미, 『IMF 위기』, 책세상, 2009, 값 8,500.



                                                              이주호 기자

비타 악티바(vita activa)는 실천하는 삶이란 뜻의 라틴어다. 책세상의 비타 악티바 개념사 는 저자의 완전한 입장을 내세워 정치적, 사회적 개념을 설명하는 시리즈이다. 개념이란 역사 속 개별 인간의 삶에서 불거져 나오는 것이기에 역사적 과정을 되짚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선 개념을 제대로 이해시킬 수 없다. 이 과정에서 생활인으로서의 저자가 가진 입장이 반영되는 것은 당연하다.

폭력의 개념을 폭력이 인간에게 받아들여지는 방식을 통해 설명했던 전 권 『폭력』(공진성, 2009)처럼 『IMF 위기』는 1997년 IMF 구제 금융에서 2008년 경제 위기에 이르기까지 세계 경제 속의 한국 경제의 위치와 변천 과정을 돌아봄으로써 IMF의 개념과 경제 위기의 개념을 설명해 간다.

시리즈의 특성과 맞물려 이 책은 경제 현상을 도표, 통계, 경제용어와 법칙에 의존해 객관성을 가장하지 않고 사회학자가 자신의 입장에서 경제 문제를 파악해 들어간다는 특징을 갖는다. 경제, 경제 정책이란 정치적 선택에 다름 아니라는 정치학자 더글러스 러미스의 말처럼 저자가 가진 이력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경제 현상에 대해 독자에게 더욱 적실한 설명을 해 줄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저자는 1997년 경제 위기의 내외적 요인을 분석하며 IMF가 과연 나라간 경제 활동을 보조하는 기능 단체에 불과한 것인지 묻는다. 그럼으로써 IMF 관리 체제 기간 동안 한국 경제 구조의 변화 추이를 살피고 이후 10년간의 경과 속에서 천천히 고개를 내밀던 “IMF보다 독한 경제 위기”가 온다는 위기설이 급기야 2008년 현실이 된 이유를 설명한다.

실천으로서의 개념이 정의로서의 개념보다 현실성 있어 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대안에 대한 고민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대안이라고 해서 통장 잔고를 늘리는 실질적인 대안은 아니다. 하지만 놀음판에서 베팅하듯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전망을 남발하며 사람들을 돈 앞에 붙들려 앉혀 놓기보다 어떤 삶의 방식을 취해야 할 것인지 이야기하는 저자의 서술 방식이 더 현실적으로 보인다. 현실은 사는 모습에 있지 삶의 예측에 있지 않으니까 말이다.

지금의 경제 위기라는 증상은 한국 사회의 어떤 병든 부분을 드러내고 있으며 치료는 어떻게 해야 할까? 희망은 있을까? 대안은 있을까? 저자는 경제 위기는 사람의 위기라고 말한다. 따라서 경제 위기 극복을 통해 사람을 치료할 수도 있지만 사람을 치료함으로써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Trackback 0 Comment 0
2009. 4. 7. 12:17

잠 못 드는 이들을 위하여

[신간소개]  이주호 기자

디트마르 비트리히, 김세나 역, 구테나흐트, 달콤한 잠으로의 여행』, 좋은책만들기, 2009.

▲ 디트마르 비트리히, 김세나 역, 구테나흐트, 달콤한 잠으로의 여행』, 좋은책만들기, 2009.




구테나흐트, 달콤한 잠으로의 여행』

식이요법, 민간요법, 약물치료로도 쉽게 잠들지 못하는 이들에게 최후의 처방이 나왔으니 목가적 평온함을 담은 독일 문학선집이다. 밤에 휴식을 취하는 데 독일 문학을 추천하고 싶다는 투르게네프의 말처럼 독일 문학은 느긋한 서술방식과 자연묘사로 예민한 신경을 풀어주고 호흡을 안정시켜 주면서 사고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 준다고 한다. 괴테에서 릴케에 이르기까지 목가의 장인이라 불리는 독일 대표 작가들의 작품 중에서 많은 연인들을 영원히 잠들게 한 베르테르 유의 소설을 제외한 숲, 바다, 소도시 등의 잔잔한 분위기의 서정성 짙은 작품 스물여섯 편이 실려 있다.

디트마르 비트리히, 김세나 역, 좋은책만들기, 값 11,000원.


『유럽 도서관에서 길을 묻다』

압도적 사교육을 부추기는 흐지부지한 공교육의 대안으로 책 읽기를 이야기해 온 전국학교도서관담당교사 서울모임 교사들이 12박 14일간 독일,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의 도서관과 서점을 방문하며 도서관과 책이 어떻게 일상과 문화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한국의 도서관 문화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밝힌다. 2008년 월간 <우리교육>에서 연재된 유럽 도서관 탐방기를 다듬어 출간한 이 책은 도서관에서 스스로 공부하는 즐거움을 알아가는 학생들의 모습과 전문화되어 있으면서도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는 도서관 시스템을 통해 ‘모두를 위한 교육’이 어떤 것인지 찾아간다.

전국학교도서관담당교사 모임, 우리교육, 값 13,000원.


『도시건축의 새로운 상상력』

획일적 외양에 다양한 내부 공간을 가진 유럽의 도시와 다양한 크기, 형태의 외양에 획일적 내부공간을 지니고 있는 한국의 도시를 비교할 때 어떤 도시를 더 좋은 도시, 멋진 도시라고 할 수 있을까? 피맛골처럼 정리되지 않은 골목길과 혼란스런 간판은 다 획일적으로 정리되어야 하는 걸까? 저자는 서울의 모습이 전통 건축, 서양 건축, 도시 계획의 눈으로 보면 혼돈 자체이지만 이러한 혼돈은 가능성과 역동성의 반증이라 말한다. 공간의 모습은 당대의 일상적 모습과 세계관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한국 건축과 도시 문제를 드러냄으로써 한국적 도시 건축의 방향을 그려본다.

김성홍, 현암사, 값 18,000원.


『고민하는 힘』

도쿄의 서점가를 배회하던 중 일본인 동행에게서 책을 한 권 선물 받은 적이 있다. 재일교포 2세이자 도쿄 대학 교수 강상중의 책이었는데, 이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가 어떻게 한국 사람이 이 사람을 모를 수가 있냐고 그 자리에서 면박을 당했다. 정치한 학문적 업적과 소신 있는 사회적 발언으로 일본 사회 비판적 지식인으로 자리 잡은 강상중이 고민하는 삶의 가치에 대해 말한다. 그는 나쓰메 소세끼와 막스 베버의 삶과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비교해 지금의 시대가 가진 특성을 밝히며 두 시대에 불거진 급격한 사회적 변화와 인간 소외가 인간을 행복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현실적 조건을 떠나 돈이나 일, 사랑 등에 대해 자기계발서 식의 이상적 대안을 제안하지 않는다. 현실 조건을 토대로 이 속에서 고민하며 살아가는 방법과 고민의 가치를 말해준다.

강상중, 이경덕 역, 사계절, 값 9,500원.

 

Trackback 0 Comment 0
2009. 3. 27. 09:33

5분의 경이와 한 권의 혁명적 지식

[신간소개] 『지식ⓔ season 4』

EBS 지식채널 e, 『지식ⓔ season 4』, 북하우스, 값 12,800원.

▲ EBS 지식채널 e, 『지식ⓔ season 4』, 북하우스, 값 12,800원.



                                                                     이주호 기자

지식과 검색 정보가 같은 값으로 통용되는 시절이다 보니 지식에는 가치 판단을 들이댈 수 없을 것 같기도 하지만, 가치와 남모른 척 돌아선 지식이란 것이 과연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검색 지식, 교과 지식이 마치 가치 판단을 유보한 듯 전달되고 그럼으로써 지식은 실용성에 극진히 봉사하거나 실생활과 유리되어 독립적인 자료의 형태로 고착되는 듯하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지혜나 깨달음의 아래 단계에서 용도인 한편 몰라도 큰 불편은 없는 정보라는 이중적 위치에서 요즘 세상 지식이란 건 대개 '유산소 운동을 하더라도 근육 운동을 병행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근육운동은 건강에 해롭다, 치즈를 곁들여야 포도주의 제맛을 즐길 수 있다/치즈와 포도주는 영양학상 함께 먹으면 안 된다', 이런 모양새를 하고 있다.

이런 모양새를 지켜보다 보면 지식과 지혜를 분리하여 지식을 자기 내면과 관련 없는 바깥 정보로 취급하는 자기계발 지침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무리가 아닌 듯싶다. 이런 까닭에 상식에 맞서 지식을 혁명적 진실이라 말하기 위해선 의당 긴 설명을 달아야 할 것 같다. 하지만 EBS에서 방영하는 5분 분량의 다큐멘터리 <지식채널ⓔ>의 강렬함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혁명적 지식과의 만남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지식ⓔ』는 <지식채널ⓔ>의 지식을 확장시킨 책이다. 말없는 5분의 경이와 책 한권에 담긴 혁명적 진실. 두 지식 매체를 연결시키려면 이 정도의 표현이 적당하지 않을까? 이 책은 수와 통계, 인용으로만 지식을 전달한다. 몇 가지 인용을 차례대로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 지식체계가 만들어지는지 이 책을 통해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1996년
국내 유통시장 개방 이후
대형할인점
10배 이상 급증

2001년 이후
소규모 슈퍼, 구멍가게
1만1,400여 곳 폐업
……
소주 한두 병 사려고 대형할인점까지 갈 수도 없고 거기서 왕창 살 물건도 돈도 없지, 뭐. 조금 비싸지만 구멍가게는 외상도 되고…

가난한 사람이 더 비싸게 살 수밖에 없는 세상”
                                                                                  「구멍 없는 구멍가게」 일부

실제 다큐프로그램에서는 사람의 목소리가 없이 음악과 화면 자막만으로 5분이 채워진다. 내용을 살려 줄 수 있는 음악을 배경으로 글자 자체가 하나의 이미지로 등장하는 까닭에 글자 이미지와 이미지로서의 내용은 책보다 강렬하다. 이미지가 이성보다는 감성 전달에 적합한 이유로 사회진화론적 시각을 자본 시장에 들이대며 구멍가게가 대형할인점에 맞서는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체념인지 반박인지 모를 말들에 어떻게 대꾸할지 대비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위 인용구가 활자화되어 신명조든 궁서든 글자 모양이란 것이 단지 가독성을 위해서만 존재하게 될 때는 어떤 것이 지식인지 입씨름을 각오해야만 한다.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서, 과연 지식이 검색 정보와 같은 값으로 매겨질 수 있고, 따라서 가치가 개입되지 않은 지식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보고한 2008년 12월 27일부터 23일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 시 사망한 팔레스타인 주민 1,366명, 부상자 5,380명. 같은 기간 이스라엘 측의 발표 병사 10명, 민간인 3명 사망. 이명박 정부, 4대강 살리기를 비롯한 녹색 뉴딜을 발표하며 95만 6,420명의 고용창출 효과 기대. 반면 친환경 녹색에너지 분야에 단 8%, 80%는 토목 공사의 예산이라는 발표되지 않은 수치. 더불어 이명박 정부 들어 장애아 무상보육 지원금 50억 삭감, 건강보험 가입자 지원비 568억 삭감, 학자금 대출 신용보증기금 지원 1천 억 삭감이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수치.

수는 정직하다? 어느 면에서는 그렇다. 지식으로서의 수, 통계가 누구를 위해 봉사하느냐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정직하다. 『지식ⓔ』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정직한 수, 통계, 지식을 나열한다. 프로그램의 회가 거듭되고 책이 한 권, 두 권 쌓여 가면서 이 안의 지식들이 누구를 위한 지식인지 점점 분명해져 간다. 물론 책을 만드는 이들은 지식이 누구를 위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광우병 소고기 관련 프로그램에 명예훼손 혐의를 붙여 검찰이 MBC PD수첩 제작진을 체포하고 나섰다. 법적 지식이 누구를 위해 쓰이느냐에 대한 물음도 물음이지만 『지식ⓔ』3권에 실렸던, 광우병을 내용으로 한 「17년 후」를 제작한 PD가 프로그램에서 하차해야 했던 사건이 떠오른다. 이명박을 비롯해 미제쇠고기를 먹지 못해 안달 난 이들이 가진 지식과 PD수첩이나 「17년 후」를 제작한 이들의 지식을 비교해 볼 때 드디어 지식의 정체가 윤곽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렇다, 가치가 개입되지 않은 지식은 없다. 지식은 혁명이다.

Trackback 0 Comment 0
2009. 3. 24. 09:16

초상화를 둘러싼 태어남과 죽음

[신간소개] 『스페흐트와 아들』

빌렘 얀 오텐, 유동익 역, 『스페흐트와 아들』, 문학동네, 2009.

▲ 빌렘 얀 오텐, 유동익 역, 『스페흐트와 아들』, 문학동네, 2009.



                                                             이주호 기자

정원에는 모닥불이 지펴졌고 초상화가는 그가 지난 몇 달 동안 작업을 하기 위해 모아 두었던 자료들을 불 속에 던지고 있다. 사진, 비디오테이프, 물감. 그림을 그리기 위한 도구들이 불꽃의 크기를 키우는 사이 이제 남은 것은 한 흑인 소년의 나체가 그려진 캔버스뿐이다. ‘나’는 캔버스다. 캔버스인 ‘나’는 인간의 아픔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알았다면 이제 곧 닥칠 고통을 생각하며 두려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단지 이제 내가 사라진다는 사실만을 생각하고 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며 감탄하길 바랐다. 하지만 끝내 사람들 시선을 받지 못하고 나는 재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누가, 왜 나의 운명이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둔 것일까?

초상화가 펠릭스 빈센트는, 네덜란드에서 손꼽히는 거부이자 미술 수집가인 스페흐트에게 자신의 죽은 아들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빈센트는 죽은 사람을 그려본 경험이 없다. 그는 살이 있는 사람만을 그려왔고, 그것은 초상화가로서 그의 원칙이기도 했다. 그는 <피에타>를 그림으로써 자신의 창조적 그림 세계를 펼치고 싶다는 욕망을 기억하고 그 제안에 응한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사실 거액의 수수료다. 이 돈만 있으면 초상화 일을 끝낼 수도 있고 지금의 작업실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 수도 있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을 그리기 위해 죽은 이의 생전 눈빛을 기억하려 애쓴다. 그러다 자신의 기억 속 한 소년의 눈빛과 마주하게 된다. 그 소년의 눈빛을 닮은 나는 싱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내가 싱어가 되는 것은 언제까지고 세상에 비밀로 부쳐져야 한다.

이 소설의 시점은 캔버스다. 캔버스는 화실 한 편에 고정되어 서 있다. 따라서 캔버스가 전달해 줄 수 있는 이야기는 화실 안이나 화실에서 듣거나 볼 수 있는 거리의 일들로 한정된다. 화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캔버스 위에 그려지고 독자는 캔버스 위에 그려진 사건을 읽는다. 캔버스가 화가의 의도를 가감할 수 없다는 한에서 ‘나’는 객관적인 전달자다. 하지만 캔버스 위에는 딱 그 크기만큼의 사건만이 그려질 수 있다. 캔버스는 이야기를 전달함과 동시에 사건의 전말을 다 알 수 없도록 제약한다.

객관적이면서도 인간 세상을 이해할 수 없는 캔버스의 자의적인 사건 전달로 이야기는 대체 어디로 진행될지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의뢰인과 그의 아들, 초상화가, 그의 아내와 아들, 기억 속 소년을 한 화폭 위에 올려놓는다. 여러 겹 덧칠해진 물감이 캔버스 위에서 시간을 두고 녹아들며 서서히 형태를 만들어가듯, 이 소설 역시 각각의 인물들과 얽힌 오해들이 한 장의 초상화 위에 서서히 합쳐지며 놀라운 그림을 만들어 낸다.

빌렘 얀 오텐, 유동익 역, 문학동네, 값 12,000원.

Trackback 0 Comment 0
2009. 3. 20. 09:24

수 많은 '나'들의 우주와 나의 가능성

[신간소개] 『영두의 우연한 현실』 외

이현, 『영두의 우연한 현실』, 사계절, 2009.

▲ 이현, 『영두의 우연한 현실』, 사계절, 2009.



                                                     이주호 기자

『영두의 우연한 현실』
“너와 나의 현실이란 것도 그래. 우린 그게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맞춰 보려고, 혹은 거기서 벗어나 보려고 아득바득……웃기는 일이야.”

1991년 8월 23일 새벽에 태어난 영두는 열악한 가정환경에서도 모범생으로 살아가고 있는 고3 학생이다. 같은 날 같은 시각 태어나 어느 순간 다른 선택과 다른 조건으로 인해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또 하나의 영두는 싸움꾼이다. 절대적이고 오직 하나뿐이라 여겼던 ‘나’와  또 다른 ‘나’가 마주치는 순간, 두 명의 영두는 자신의 모습은 어쩌면 그저 하나의 가능성일 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태일문학상으로 등단한 후 『짜장면 불어요!』로 창비 좋은어린이책 창작부문 대상을 받은 소설가 이현의 첫 청소년 문학 소설집으로 표제작 「영두의 우연한 현실」외 5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이현, 사계절, 값 9,000원.


『바보 별님』
2001년 타개한 동화작가 고(故) 정채봉 선생이 1993년 5월 1일부터 8월 7일까지 소년한국일보에 <저 산 너머>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김수환 추기경 이야기를 책으로 묶었다. 책 출간은 자신의 사후에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김수환 추기경의 뜻에 따라 정채봉 선생이 정리해 놓았던 글을 김 추기경의 선종 직후 『바보 별님』이라는 제목을 달아 출간했다. 1부는 초등학교 5학년 시점까지를 소설의 형식으로 다루고 있고 2부에서는 신학교 시절부터 1993년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일들을 구술한 김수환 추기경의 말을 정리해 놓았다.

정채봉, 솔, 값9,500원.


『식민지 이후를 사유하다』
해방을 맞은 지 60년이 지나도록 한국은 왜 아직 식민지 주민의 내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이 책은 탈식민화와 재식민화의 경계에 자리하는 한국인의 모습을 국가, 교육 제도, 문화 산업, 문학과 예술 생산, 대안적인 해방의 기획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분석하고 있다.

1부에서는 정치적 소수자의 자기 해방의 기획이 세계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도시 마케팅, 문화 산업 등의 새로운 마케팅 논리 속에서 재식민화 되는 문제를 다루며, 2부에서는 역사 기술, 문학, 텔레비전 드라마 등을 통해 친일 협력에 관한 담론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으며, 이효석 문학을 통해 심미주의와 파시즘에 대한 협력이라는 이율배반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고찰한다. 마지막으로 3부에서는 식민 지배의 경험이 문화 산업, 문학, 교육제도를 통해 재생산되는 방식과 거기에서 나타나는 특정한 주체의 이야기를 다룬다.

권명아, 책세상, 값 22,000원.

 

Trackback 0 Comment 0
2009. 3. 17. 09:15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예술 공격

[신간소개]<뱅크시, 월 앤 피스>

“이 세계의 거대한 범죄는 규율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규율을 따르는 것에 있다. 명령에 따라 폭탄을 투하하고 마을주민을 학살하는 사람이 곧 거대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 “이 세계의 거대한 범죄는 규율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규율을 따르는 것에 있다. 명령에 따라 폭탄을 투하하고 마을주민을 학살하는 사람이 곧 거대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안태호 기자

6,180,998 유로의 경매낙찰 총액, 경매횟수 102회, 최고 낙찰가 1,166,540 유로. 안드레아 거스키, 안젤름 키퍼, 신디 셔먼, 길버트와 조지, 줄리앙 슈나벨 등 기라성 같은 거장들을 제치고 22위 랭크. 미술시장 분석 전문회사 아트프라이스가 1945년 이후 출생한 작가들을 대상으로 2007년 7월부터 2008년 6월까지의 판매기록을 분석한 차트에서 이 같은 기록을 보유한 작가는 누구일까.

문제가 너무 어려운가? 조금 더 쉬운 힌트. 대영박물관과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자연사 박물관 등에서 이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몰래 가지고 들어가 전시중인 작품들 사이에 태연자약하게 걸어놓는 방식으로 ‘도둑전시’를 했다. 재밌는 것은 그의 작품이 발견되자마자 떼어내고 폐기처분한 전시장이 있는가하면 대영박물관 같은 경우 원시인이 쇼핑카트를 끌고 있는 그의 작품을 영구소장하기로 결정했다는 거다.

그래피티 작업을 주로 하는 그를 누구도 본 적이 없다. 유일하게 그를 인터뷰한 한 언론에 의해 이름과 1974년생 고등학교 중퇴자라는 일부 경력만이 밝혀졌을 따름이다. 그는 ‘얼굴 없는 작가’, ‘아트 테러리스트’, ‘그래피티의 살아있는 전설’ 등으로 불린다.

국내에서도 이 작가의 작품은 블로그와 각종 사이트를 통해 수없이 퍼날라지고 복제되었다. 복면을 한 채 꽃다발을 던지는 시위대의 모습, 총을 들고 헬맷까지 착용한 경직된 경찰의 얼굴자리에 들어가 있는 스마일 마크, 아나키스트의 상징을 그리고 있는 영국 왕실 근위병의 모습, 폭탄을 사랑스럽게 끌어안고 있는 소녀의 초상, 열렬한 키스를 나누고 있는 정복차림의 경찰 동성애 커플 등 통념을 뒤집고 상식의 허를 찌르는 그의 작품은 많은 이들을 열광케 했다.

이제 아시겠는가? 그의 이름은 뱅크시. 영국출신의 그래피티 아티스트인 그는 이미 위의 수치에서 확인했듯 더 이상 뜨내기나 얼치기 예술가가 아니다. 주류예술계에서도 몇 손 가락 안에 꼽히는 중요한 작가가 되어버린 뱅크시의 작품과 그의 짧은 글들을 소개한 책이 나왔다. <뱅크시, 월 앤 피스>는 우연한 계기로 출간되었다. 영화감독 임진평이 뱅크시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던 중 국내에 출시된 책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출판관계자에게 뱅크시를 소개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 수많은 미술인들을 제쳐두고 영화감독을 통해 출간되었다는 게 아리송하긴 하지만, 아무튼 덕분에 우리는 뱅크시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게 됐다.

지금까지 웹에서 만날 수 있던 그의 작품들을 보는 것이 산발적이라는 아쉬움이 있었다면 <뱅크시, 월 앤 피스>는 그 갈증을 조금은 풀어준다. 원숭이, 경찰, 쥐, 소, 아트, 거리의 조각상 등 소재에 따라 분류된 책은 뱅크시의 작품을 조금 더 체계적이고 집약적으로 접근해 분석의 여지를 마련해 준다. 주로 해프닝식으로만 알려졌던 미술관 도둑전시에 대한 그의 입장들과, 그래피티에 대한 태도, 자본주의와 소비문화에 대한 날카로운 패러디 등 그의 촌평들은 짧고 거칠지만 뱅크시의 작품들이 가진 특성들을 잘 보여준다.

그의 작업들을 보고 있노라면, 시스템에 대한 저항을 조직하며 시스템에 함몰되지 않고 시스템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나도 모르게 고심하게 된다. 특히 팔레스타인을 격리하고 있는 벽에 진행한 그의 작업들과 일화는 그가 예술가인 동시에 명민한 활동가의 속성 역시 가지고 있음을 훌륭히 보여준다.

그의 말을 하나만 인용해 보자.

“이 세계의 거대한 범죄는 규율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규율을 따르는 것에 있다. 명령에 따라 폭탄을 투하하고 마을주민을 학살하는 사람이 곧 거대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마치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보여준 악의 평범성에 대한 고찰을 보는 것만 같다.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그의 공격은 가차없으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으며 언제나 핵심을 찌른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지금부터다. 해설을 쓴 이태호 교수는 “그의 작품이 자본주의 시장에서 고가로 매매되기 시작한 이후, 과연 그가 어떤 행보를 보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그를 주목할 것이다”라고 글 말미에 밝히고 있다. 첫머리에 쓴 것처럼 그는 이제 세계에서 손꼽히는 고가의 잘 팔리는 작가가 됐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데미안 허스트와 뱅크시를 동급에 놓기도 한다. 물론, 작가로서의 자기 연출이라는 측면에서 둘은 닮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역시 뱅크시가 제도화된 반항을 넘어 예술이 세계를 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는 기대가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는다고 해서 이태호 교수가 던진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책을 손에 든 이들이 동일한 문제의식을 갖고 뱅크시의 앞날을 주목하게 될 것이란 사실이다.

<뱅크시, 월 앤 피스>, 위즈덤하우스. 값 13,500원

Trackback 0 Comment 0
2009. 3. 6. 11:56

어쨌거나 슬픈 외국어

[신간소개]『영어를 잘하면 우리는 행복해질까』

문강형준, 『영어를 잘하면 우리는 행복해질까』, 뜨인돌, 값 9,500원.

▲ 문강형준, 『영어를 잘하면 우리는 행복해질까』, 뜨인돌, 값 9,500원.




                                                                  이주호 기자

역사를 전공한 70대 노교수가 영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7세의 미국 아이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느껴야 하는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를 우리는 상식적인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내국인만을 대상으로 상품을 파는 기업의 입사 조건이 영어 점수라면, 입사 후 외국인을 만난 적도 없고 영어를 쓸 일도 없는 영업사원이 승진을 위해 퇴근 후 영어회화 학원에 다녀야 하는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를 과연 경쟁력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의 영어 열풍의 이면에 무엇이 있었을까? 『영어를 잘하면 우리는 행복해질까』의 저자는 언어의 죽음이라는 개념에서 이 열풍의 진앙을 파악해 들어간다. 언어는 최후 사용자의 죽음이나 급격한 환경 변화 등 자연적으로 사라지기도 하지만 식민지 한국이나 남미, 아프리카의 예에서 보듯 지배국의 강제력에 의해 사라지기도 한다. 현대에 있어선 경제구조의 변화가 언어의 죽음의 직접적 원인이 되고 있다. 예컨대 국가가 수렵, 채집 부족의 터전을 체벌하여 농지를 조성하고 농사짓는 사람들을 유입시킨다면 이 부족은 생존을 위해 농부가 되어야 하고 이로써 그들은 농사짓는 이들의 언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가깝게는 인터넷 용어나 항공 용어가 그렇다.

영어가 세계어로 군림하게 된 것은 영미 제국의 팽창 정책에 이은 미국식 경제 구조의 강제적 이입 때문이다. 힘이란 것이 한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과, 미국 내에 일고 있는 미국의 쇠퇴 예상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인다면 세계어란 것도 언제 변할지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언어가 가진 권력 관계가 국내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한 달에 80만 원을 호가하는 국제중 대비 학원에 다닐 수 있는 초등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 한 한기 480여 만 원에 이르는 등록금을 낼 수 있는 중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으로 구분되는 사회에서 영어 실력으로 경쟁력을 가늠하겠다면 경쟁이란 건 해보나 마나 아닌가. 이럴 때 영어는 학식도 학문도 아닌 권력 관계를 공고히 하는 수단에 불과하게 된다.

결국 소통의 편의, 국제 경쟁력 강화라는 표현은 미국식 경제 구조를 모방하기 위한 술책에 불과했던 것이다. 세계에는 미국식 영어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필리핀, 싱가포르, 자메이카, 인도 등 영어를 공용어로 삼고 있는 나라는 영미 말고도 많다. 그러나 한국인이 생각하는 영어는 미국식 생활방식을 빼고선 말할 수 없기에 밥 말리 식으로 더듬거리는 영어를 영어로 생각하는 한국인은 드물다. 소통과 경쟁력이 영어 교육의 목표라면 백인 미국의 영어를 추종하는 게 아니라 한국식 영어를 정착시켜야 하는 것 아닐까?

한국어로도 회의 진행이나 토론에 능숙한 사람을 만나 보기 어려운 현실에 영어를 사용함으로써 논의의 질을 높일 수 있을까? 『슬픈 외국어』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본어로 노래를 못 하던 사람이 영어로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잘 부르게 될 수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나 못 부르는 노래라도 영어로 불러야 먹고 살 수 있는 사회인 것은 분명하다. 영어가 수단이 아니라 물신이 되어 버린 사회에서 영어를 한다는 것은 결국 누구를 위한 일일까? 저자는 영어에 제자리를 찾아 주자고 말한다. 그 첫 단계는 사회적 문제제기다. 강화도조약을 Kang-hwa island treaty라고 가르치려 한다면 교육 당국에 교육 효과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궁극에는 이미 권력의 도구가 되어 버린 영어를 학문과 문화 소통을 위한 언어로 되돌려 놓자는 것이다.

 

Trackback 0 Comment 0
2009. 3. 5. 12:49

말해져야 할 말은 다 말해졌다

[신간소개] 숭산대선사의 가르침『부처를 쏴라』외

현각 엮음, 양언서 역, 『부처를 쏴라』, 김영사, 2009.

▲ 현각 엮음, 양언서 역, 『부처를 쏴라』, 김영사, 2009.




                                            이주호 기자

『부처를 쏴라』

도올 김용옥의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에는 숭산 스님에 관한 일화가 하나 실려 있다. 하버드에 체류하던 시절 그는 한국의 고승이 강연을 하니 함께 가보자는 외국인 학생의 권유에 못이기는 척, 그래 얼마나 잘하나 보자 하는 심정으로 강연에 참석한다. 어눌한 발음과 몇 안 되는 단어로 더듬거리며 강연을 이어가던 숭산 스님에게 한 여학생이 질문을 한다. “what is love?” 그러자 스님은 그 학생에게 다시 똑같이 묻는다. 학생이 대답을 않자 스님이 입을 연다. “You ask me. And I ask you. This is love” 도올은 강연이 끝나고 스님을 찾아가 큰 절을 올린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모두의 마음을 꿰뚫는 스님의 말씀을 통해 그는 말씀의 진정한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부처를 쏴라』는 2004년 화계사에서 입적하신 숭산 스님의 가르침을, 스님의 말씀을 듣고 출가를 결심한 예일대 출신 코쟁이 스님 현각이 정리해 엮은 책이다. 무의식 중에 짓는 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은 어디서 시작됩니까,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사람들은 질문을 쏟아낸다. 건초 더미 사이에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다 굶어죽는 염소마냥 제한된 일상을 살면서도 때때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에게 스님은 말씀하신다. 세상을 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아무 것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오직 할 뿐!

현각 엮음, 양언서 역, 김영사, 값 15,000원.


『행복은 어디에나 있어』

여기 또 말씀 하나. 오스트리아 판 어린왕자인 마음별에서 온 꼬마천사가 현대인들을 찾아다니며 행복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대단한 말은 아니다. 예수, 석가라고 해서 대단한 말을 하고 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숭산 스님도 ‘오직 할 뿐’이라는 말씀을 전해주셨지만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사람에겐 “매사에 최선을 다 하렴” 하는 말 이상으로는 안 들릴 것이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건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말은 이미 다 들어 왔다. 친구가 없어서 슬퍼하는 소녀, 용기가 없는 소년, 학생들에게 성공을 위한 조건만을 가르치는 교사, 마음이 어두운 사람들에게 찾아 온 꼬마천사는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는 방법을 알려준다. 부록으로 수첩을 끼워준다. 얇은 책이 민망해서 그런 것 같다.

쿠르트 회르텐후버 글, 코니 볼프 그림, 꽃삽, 값 7,900원.


『큐브릭』
스탠리 큐브릭 감독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지 절단과 조립이 자유로운 큐브릭 인형에서 제목을 따와 불안정한 시기, 불안정한 세상과 싸워야 하는 10대들의 세계를 그린 강도하의 만화다. 『위대한 캣츠비』의 작가 강도하가 미디어다음에서 연재하던 만화를 종이 책에 맞게 새롭게 편집하여 출간했다. 학교 제도에서 낙오한 네 명의 10대 아이들이 서울을 무대로 어른들의 세계와 싸워가는 성장기, 전 3권 완간되었다.

강도하, 애니북스, 값 1권 12,000원, 2.3권 13,000원.


『몽중인』

사진작가 이홍석이 아프리카, 남미, 인도, 한국 등을 발로 밟아 가며 사진에 담은 사진 에세이집이다. 누구라도 키스를 하고 싶어진다는 산티아고에서 이제 막 키스를 하려는 남녀, 체스 판 위에 턱을 괴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 중년 남성, 결코 연출되거나 인위적 상황은 사진에 담지 않았다는 작가의 고집스런 기다림은 사진의 표면을 뚫고 들어가 낯선 땅 낯선 사람들의 삶의 속살을 조곤조곤 속삭여 주는 듯하다.

이홍석, 바우하우스, 값 13,000원.

 

Trackback 0 Commen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