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해당되는 글 46건

  1. 2009.04.10 오 나의 HOME SWEET HOME
  2. 2009.04.03 누가 농민은 국민이 아니라고 하는가?
  3. 2009.03.26 국내 신작 다큐 영화와의 반가운 만남
  4. 2009.03.18 똥파리, 벽두 해외 영화시장을 달구다
  5. 2009.03.18 풋풋한 어휘의 건강한 청춘영화
  6. 2009.03.11 스크린에 담은 베네수엘라의 열정과 매혹
  7. 2009.03.09 워낭소리, 초월적 우정의 기막힌 전도
  8. 2009.02.28 봄바다에 실려 온 음악 다큐멘터리
  9. 2009.02.26 ‘아시아 독립영화의 오늘’
  10. 2009.02.25 서울아트시네마를 지켜라!
2009.04.10 12:48

오 나의 HOME SWEET HOME

   [영화리뷰] 황수아 감독 《우리 집에 왜 왔니》
영화《우리 집에 왜 왔니》의 숨겨진 주인공은 ‘집’이다. 그런데 그 집은 현실에는 없고 이상으로, 혹은 과거로만 존재한다.
▲ 영화《우리 집에 왜 왔니》의 숨겨진 주인공은 ‘집’이다. 그런데 그 집은 현실에는 없고 이상으로, 혹은 과거로만 존재한다.


영화《장화 홍련》의 메인 공간인 집은 세 여자-수연과 수미 그리고 그녀들의 친엄마-의 아픔이 시리게 배인 곳이었다. 화려한 꽃무늬 벽지로 집을 단장할 때 그들이 꿈꿨던 것은 ‘즐거운 나의 집’ 혹은 ‘HOME SWEET HOME'과 같은 것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빠의 외도로 인해 집은 고통과 공포뿐인 공간으로 변해버렸다. 황정민 주연의 영화《검은 집》에서도 집은 사랑이 꽃피는 곳이 아니라 살인이 난무하는 곳이었다.

집이 고통과 공포의 공간이 된 것은 영화에서나 접할 수 있는 이야기인가? SBS의 고발프로그램 ‘긴급출동 SOS 24’의 출동 장소는 주로 ‘집’이다. 노모를 폭행하는 엘리트 아들, 조카에게 끼니대신 개밥그릇에 새우깡을 주는 고모, 노숙자를 데려다 노예처럼 부리는 어느 시골집. 이건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이다. ‘HOME SWEET HOME'은 어디로 갔는가. 그것이 있긴 했던 것일까. 혹시 그것 자체가 환상은 아니었을까. 일상의 가정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그래서 일상을 부정하게 만드는 꿈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꿈은 더 이상 희망이 되지 못한다. 노예인 채 20여년을 살았던 할아버지의 체념처럼.
 
그런데 여기, 지독한 현실을 뒤로하고 다시 그 환상을 꿈꾸는 영화가 등장했다. 임신한 아내를 잃은 후 자신의 삶마저 잃어버린 한 남자(병희-박희순 역)가 있다. 여섯 번의 자살여행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마지막으로 선택한 자살 장소를 찾아온 그는 그 곳에서 뜻밖의 상황과 마주한다. 웬 여자(수강-강혜정 역)가 자신의 자살을 방해한 것. 병희는 이 상황이 의아하기만 하다. 왜냐하면 자살 장소가 다름 아닌 그의 ‘집’이었기 때문이다. 무단가택침입자가 ‘다녀왔습니다’라는 귀여운 인사를 건네는 순간, 그와 그녀는 꿈꾸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스위트 홈'을.

이 영화의 숨겨진 주인공은 ‘집’이다. 그런데 그 집은 현실에는 없고 이상으로만 존재한다. 혹은 과거로만 존재한다. 영화에서 이수강은 일명 ‘미친년’으로 통한다. 강원도 속초에서 살던 그녀는 어릴 적부터 미친년으로 불렸다. 그녀는 왜 미친년으로 불렸는가? 그녀의 첫사랑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이런 데서 혼자 사니까 그렇지.” 버스에서 내리고도 산 중턱까지 걸어 올라가야하는 집에 살고 있는 그녀를 사람들은 미친년이라고 불렀다.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다. 산 중턱에 홀로 살면 ‘미친 사람’이 되는 것인가? 그런데 수강은 “아, 그렇구나”라고 받아들인다. 북적거리는 사회에 혼합되지 않는 자, 가족과 함께 살지 않는 자가 곧 미친 사람임을 알게 된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욕망하게 된다. 자신과 사회를 연결해줄 가족을, 그리고 그 가족과 함께 할 진정한 ‘집’을.

수강에게 집이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욕망의 대상이었다면, 병희에게 집은 눈부셨던 지난  날이다. 젊은 나이에 초고속 승진, 주식도 두 배로 뛰고, 아리따운 아내에 곧 태어날 아이까지 어느 것 하나 모자라는 것이 없었던 그의 삶은 재즈 음악이 흐르고 촛불이 켜진 사랑스런 집으로 대변된다. 그녀의 아내가 살해당하기 전까지만. 아내가 죽은 후 그는 집을 떠난다. 외도의 흔적, 돈을 구걸하는 처가 식구들. 밝은 햇살을 무색하게 만드는 그 공간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 그는 과감히 집을 떠났고, 집은 곧 폐가가 된다. 그리고 그 집이 다시 ‘HOME SWEET HOME’이 되는 순간은 찾아오지 않았다. 겨우 둘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수강이 집을 떠나게 되었기에. 병희의 집은 다시 햇빛으로부터 달아난다. 수강을 미친년으로 만들었던 그 숲 속 집처럼.

이처럼 감독이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건 이 영화는 이상적인 집(혹은 가족)을 상정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스윗 홈을 바람직하면서도 정상적인 집으로 상정하는 바람에 그 영역에 포함되지 못 한 사람들은 졸지에 외롭고 병든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때문에 수강과 병희는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다. 집 없는 그리고 혼자인 사람들을 비정상의 영역으로 구분시킨 것의 대표적 상징은 ‘노숙자’였다. 영화 속 노숙자들은 모두 마치 ‘미친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들은 모두 희화화되었고 비정상인처럼 보인다. 아마도 노숙자인 수강을 바라보는 내내 불편했다면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이제 도시의 주거공간은 온통 아파트가 잠식하고 있지만 아직도 사회에는 다양한 형태의 집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가족’을 만들고, 그들만의 ‘삶’을 창조한다. 어느 형태가 완벽하지도 않고 어느 형태가 정상인 것도 없다. 나름의 삶은 각각의 행복을 만들어나가며, 그 행복은 획일적인 잣대로 평가될 수 없다. 편부모가정은 모두 불행한가? 아이가 없는 부부는 불행한가? 부모를 일찍 잃은 아이들은 모두 불행한가?  그 기준이 핵가족의 신화이든, 혹은 김수현 드라마가 그려내는 한국형 대가족의 모습이든 어느 형태가 단일한 기준이 될 수는 없다. ‘HOME SWEET HOME’은 사회의 단일한 기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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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3 14:04

누가 농민은 국민이 아니라고 하는가?


다큐멘터리 영화 <농민가>

이주호 기자


어느 극장이 평일 오후 한 시에마저 성업이겠는가마는, 인디다큐페스티벌 마지막 날 들어선 인디스페이스 상영관에는 빨간 객석 드문드문 박혀 있는 검은 점들이 한 눈에도 몇인지 헤아려질 정도였다. <농민가>는 2007년 봄부터 2008년 봄까지 경남 사천시 농민회 회원들의 일과 일상을 담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시간도 시간이려니와 제목부터 강한 정치색을 드러내기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감독과 인터뷰를 한 인연이 없었다면 절대로 관람료 오천 원을 던질 마음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이 영화는 농민들이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일 년을 얼개로 그들은 왜 부채를 부채로 갚아가는 악순환을 거듭하면서도 논밭을 떠나지 않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농민회 회원 김윤진 씨는 전 해 방울토마토 농사를 망치고 새로 빚을 내어 딸기 하우스를 임대한다. 그는 이 일 년이 남은 생애 농사를 계속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가늠하는 기간이라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말대로 이듬해 그는 농사일을 접고 만다. 지역 내에서 손꼽힐 만큼의 결과를 냈지만, 임대료를 내고 부채, 비료 값, 인건비를 감당하기에 남은 이익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게다가 외적으로는 한미 FTA와 농업 종사자 수를 줄이겠다는 정부 정책이 압박해 들어오고 있다.

사천시 농민회원들은 틈나는 대로 상경하여 전국에서 모여든 농민들과 합세해 한미FTA반대 집회 대열에 선다. 감 농사를 짓는다는 정창건 씨의 말대로 과일이나 농작물이란 것은 대체재를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재배하는 작물이 수입이 안 된다고 해서 나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시야를 넓혀 감독은 말한다. 농민들의 시위를 보며 농민 아닌 사람들은 농민의 밥그릇 싸움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농민의 밥그릇과 도시민의 밥그릇은 한 밥상 위에 놓여 있다고. 중국산 농작물, 미국산 소고기, 식품 안전성에 관한 논란들은 내 먹을거리가 내 통제에서 벗어난 지역에서 생산될 때 발생하는 위험에 대해 누누이 경고해 왔다. 농민의 싸움은 내 먹을거리의 안전을 사수하기 위한 싸움이자 흙을 밟고 살아가야 하는 미약한 존재로서 땅을 지키기 위한 싸움인 것이다.

이 영화는 농민들의 투쟁을 담고 있으면서도 과격한 장면이 없다. 과하다 싶게 소주병이 자주 등장하여 음욕을 자극하는 자극성은 있지만, 관객을 격정적으로 만들 만한 장면에 이르면 감독은 여지없이 한적한 농촌 풍경으로 시야를 돌린다. 감독과의 대화 때마다 감정 조절과 정치적 중립성에 관한 질문이 빠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적 중립성에 관한 감독의 의지는 확고하다. 자신은 절대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배경 자체가 감독의 정치성을 빼고는 말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감정 조절의 본질은 감독에게 있지 않고 오히려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있다. 전국 농민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이들은 이른 아침 대절한 상경 버스에 오르지만 길을 막아선 경찰들 때문에 끝내 출발하지 못한다. 관객은 여기서 거친 몸싸움을 기대하지만 이들이 하는 항의는 길을 내어 달라고 소리를 지르거나 반대편 길에 주저앉아 맨몸으로 자동차 통행을 막는 게 고작이다. 당신들 때문에 국민들이 불편을 겪는다는 경찰 간부의 말에 “우리는 국민이 아니냐”, 농민도 국민이라며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마는 게 이들이 할 수 있는 전부다. 이들은 그저 자식들이 용돈 보내달라면 없는 돈 끌어내어 송금하고선 풍족하지 못한 돈에 미안해하는 부모들일 뿐이다. 많이 배우지도 못 했고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농사밖에 없는 무지렁이 농꾼들이다.

이러한 감성적 울림은 감독의 정치성으로 내닫는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며 머리끈을 질끈 동여맨 사람의 정체는 무엇인가? 시위대는 누구이고 관객은 누구인가? 흙을 밟으며 생명을 길러내야할 이땅의 아버지, 어머니들을 청와대 앞 차가운 아스팔트로 모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 영화의 윤덕현 감독은 촬영을 위해 1년간 사천시에 세내어 살면서 함께 삽자루를 쥐고 술잔을 털었다고 한다. 그 노작의 결과 영화제와 지역 상영회를 전전하며 관객을 만나러 다니고 있다. 영화 속 농민들의 1년간 노고의 결과 역시 마찬가지다. 김윤진 씨는 농사를 그만두었고, 다른 사람들은 부채를 더 큰 부채로 돌려서 새 해 농사를 시작했다. 이 영화에는 <워낭소리>와 같은 목가적 풍경도 부성애의 자극도 없다. 그러나 농촌에 대한, 자연에 대한 환상이 제거된 농촌의 실상은 끼워 맞춰진 소의 눈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깊은 울림이 있다. 이 작품은 5월에 열리는 제6회 서울환경영화제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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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6 10:27

국내 신작 다큐 영화와의 반가운 만남

한독협, 인디다큐페스티벌 2009 개최

<인디다큐페스티벌이> 3월 26일부터 4월 1일까지 인디스페이스와 삼일로 창고극장, 명보아트홀에서 개최된다.

▲ <인디다큐페스티벌이> 3월 26일부터 4월 1일까지 인디스페이스와 삼일로 창고극장, 명보아트홀에서 개최된다.



                                                             이주호 기자

한국독립영화협회 주최 <인디다큐페스티벌 2009>가 “만나서 반갑습니다”라는 주제로 3월 26일부터 4월 1일까지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와 삼일로 창고극장, 명보아트홀에서 개최된다. 26일 7시 명보아트홀에서 개막하는 이번 영화제의 개막작으로는 <바보는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김경만, 2008), <잊지 않을 거야>(영, 2009), <철탑, 2008년 2월25일 박현상씨>(변해원, 2008) 등 단편 3편이 선정되었다.

이외 <워낭소리>의 고영재 PD가 제작을 맡아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장편 다큐멘터리 <농민가>(윤덕현, 2008)와 기지촌의 새 이름인 아메리칸 앨리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을 다룬 <아메리칸 앨리>(김동령, 2008)를 비롯한 국내 신작 다큐멘터리 35편과 해외작 7편이 상영된다.

부대행사로는 3월 27일 금요일 자정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6편의 영화를 연속 상영하는 심야상영회와 29일부터 31일까지 매일 저녁 8시 30분 창고극장에서 감독들과 대화할 수 있는 <다큐로 이야기하기> 등이 준비되어 있다.

1회 관람료는 5,000원이며 상영일정을 비롯한 영화제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인디다큐페스티벌 2009> 홈페이지(http://stunet.c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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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8 08:26

똥파리, 벽두 해외 영화시장을 달구다

영화 ‘똥파리’ 도빌아시아영화제 대상, 비평가상 수상
 이주호 기자
영화 <똥파리>의 감독 및 주연을 맡은 양익준과 여주인공 김꽃비.
▲ 영화 <똥파리>의 감독 및 주연을 맡은 양익준과 여주인공 김꽃비.

영화 <똥파리>가 3월 15일 폐막한 제11회 프랑스 도빌아시아영화제에서 대상과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지난 1월 네덜란드 로테르담국제영화제 최고상인 VPRO 타이거상 수상과 3월 14일 폐막한 제10회 스페인 라스팔마스국제영화제 남녀주연상에 이어 세 번째다.

올해 11회째를 맞은 도빌아시아영화제는 아시아 영화만을 모아 상영하는 영화제로, 용역 깡패 상훈이 가족과 세상에 관한 상처를 치유해 가는 과정을 그린 <똥파리>를 “폭력과 가족 문제 등 인간의 모든 문제”를 집약하고 있는 영화라 평가하며 대상으로 결정했다.

<똥파리>는 3월 6일부터 14일까지 스페인 라스팔마스 섬에서 열린 제10회 라스팔마스국제영화제의 경쟁 부문에서도 남녀 주연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이 영화제에서는 2004년 김기덕 감독이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으로 대상과 촬영상을 수상한 바 있다.

양익준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자 직접 남자 주인공을 맡아 연기한 <똥파리>는 4월 16일 국내 개봉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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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8 08:24

풋풋한 어휘의 건강한 청춘영화

인디포럼 월례상영 두 번째, <푸른강은 흘러라>
                                                                                                                                         안태호 기자
영화가 우울과 절망을 담아내는 매체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푸른강은 흘러라]는 삶의 건강성을 푸릇푸릇하게 담아내는 독특한 청춘영화의 입지를 보여준다.
▲ 영화가 우울과 절망을 담아내는 매체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푸른강은 흘러라]는 삶의 건강성을 푸릇푸릇하게 담아내는 독특한 청춘영화의 입지를 보여준다.

매달 이야기가 있는 상영회를 통해 관객과 작가들을 위한 논의를 제공하는 인디포럼 월례상영회의 두 번째 순서가 3월 24일(화) 오후 8시 강미자 감독의 <푸른강은 흘러라>로 진행된다. 이번 상영회의 주제는 “우리의 어휘는 당신들의 풍요보다 아름답다”. 연변의 소년 소녀들을 주제로 한 이 청춘영화에서 발화되는 어휘와 대화톤은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이곳의 관점에서 촌스러움으로 폄하되고 흔히 코미디의 소재로 사용되기 일쑤인 이들의 언어생활은 그 풋풋함으로 인해 오히려 지워져버리고 잊혀져버린 가치들을 환기시키는 힘을 보여준다. 

연변의 작가인 량춘식과 김남현의 중단편 소설을 각색해 만들어진 영화는 연변 청춘군상들의 아기자기한 모습들을 포착해 낸다. 어떤 면에서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천진함이나 계몽적인 면모가 우스꽝스럽거나 답답해보일 수 있겠지만, 영화가 우울과 절망을 담아내는 매체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푸른강은 흘러라>는 삶의 건강성을 푸릇푸릇하게 담아내는 독특한 청춘영화의 입지를 보여준다.

진행은 양해훈 감독이 맡았으며 영화를 연출한 강미자 감독과 <달려라 아비>의 김애란 작가가 대담에 나선다. 상영관은 인디스페이스. 티켓 5,000원. 문의 02-720-6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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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1 10:23

스크린에 담은 베네수엘라의 열정과 매혹

베네수엘라 영화제 17일부터 서울아트시네마
                                                                                                              김나라 기자

주한 베네수엘라 대사관과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가 공동 주최하는 ‘열정과 매혹: 베네수엘라 영화제’가 3월 17일(월)부터 22일(토) 서울 종로구 낙원동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 주한 베네수엘라 대사관과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가 공동 주최하는 ‘열정과 매혹: 베네수엘라 영화제’가 3월 17일(월)부터 22일(토) 서울 종로구 낙원동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주한 베네수엘라 대사관과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가 공동 주최하는 ‘열정과 매혹: 베네수엘라 영화제’가 3월 17일(월)부터 22일(토) 서울 종로구 낙원동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영화제의 개막작은 카를로스 우고 크리스텐센 감독의 1949년 작품 <이사벨호는 오늘 오후 도착했다>이며 이 외에 <담배 피우는 물고기>(로만 찰바우드, 1977), <게Ⅱ>(로만 찰바우드, 1984), <이피헤니아>(이반 페오, 1987), <도쿄 파라과이포아>(레오나르도 엔리케스, 1996), <경찰관의 여자 마쿠>(솔베이그 호헤스테인, 2006) 등 베네수엘라를 소재로 한 영화 총 6편이 선보일 예정이다.

<이사벨호는 오늘 오후 도착했다>는 유부남인 선장 세군도와 항구의 여인 에스페란사의 사랑을 담은 영화다. 또 <담배 피우는 물고기>와 <게Ⅱ>는 베네수엘라의 국민감독인 로만 찰바우드의 영화로 두 편 모두 베네수엘라의 고전이라 불릴 만큼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삼각관계에 빠진 젊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이피헤니아>와 국경을 초월한 사랑이야기 <도쿄 파라과이포아>, 그리고 베네수엘라 최대 관객 동원 기록을 가진 <경찰관의 여자 마쿠>도 관객들을 만난다.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는 "베네수엘라의 영화인들은 척박한 환경에도 특유의 근성과 열정으로 꾸준히 수작들을 만들어오고 있다"며 "강렬하고 매혹적인 베네수엘라 영화를 통해 그곳 사람들의 집념과 열정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자세한 상영 일정은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홈페이지를 참조. 문의: 02-741-9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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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9 09:27

워낭소리, 초월적 우정의 기막힌 전도

소와 노인의 우정이 은폐하는 풍경들
                                                                                                                박우성 _ 영화 칼럼니스트
<워낭소리>의 초월적 우정은 현실적 비탄으로부터 눈을 감아버림으로써 비로소 성립된 게 아닐까?
▲ <워낭소리>의 초월적 우정은 현실적 비탄으로부터 눈을 감아버림으로써 비로소 성립된 게 아닐까?

나는 <워낭소리>의 감독이 영화를 둘러싼 예상치 못한 사태들을 두고 ‘무섭다’고 한 것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이것은 결코 복에 겨운 수사적 넋두리가 아니다. 무서운 속도로 찾아드는 관객들이 무섭고, 경북 봉화에 직접 찾아가 영화의 주인공에게 돈까지 건네며 사진 한 장 찍자고 해도 크게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하는 일부 관객의 뻔뻔함이 무섭고, 그것에 발맞추어 아예 그곳을 관광 상품으로 만들겠다는 지자체의 속물근성 역시 무섭다. 하지만 예측건대 가장 무서운 것은, 취임 후 처음으로 대통령이 직접 납시어 <워낭소리>를 봐버렸다는 게 아닐까? 그것은 결코 간단한 사안이 아니다. 독립영화의 발전을 위해서라고? 골계의 극치다. 반대로, 대통령이 그것을 봤다는 것은, 대통령이 봐도 크게 문제될 게 없다는, 대통령도 봤으니까 국민 여러분도 봐도 된다는 혹은 반드시 봐야만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다름 아니라 그것은 대통령이 만천하에 영화를 ‘허락’한 사태인 것이다.

최근 <워낭소리>를 둘러싼 논쟁이 화제다. 요컨대 영화가 작위적인 편집방법, 그러니까 소가 눈물 흘리는 이미지를 두 군데의 핵심 장면에 억지로 집어넣어 관객의 감동을 기만적으로 조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너무나 타당한 지적이다. 게다가 이는 단지 편집에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가령 자막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워낭소리>는 인물들의 말(음성)을 화면의 우측 하단의 자막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굳이 ‘번역’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것이 음성중심의 지역어(방언)를 문자중심의 국민국가언어(표준어)로 확대생산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막(표준어) 덕분에 우리는 너무나 편하게 영화에 빠져들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지나치게 그것에 의존하다보니 정작 사운드(특히 음성언어)나 이미지 자체를 등한시해버리는 기만이 발생한다. 더구나 ‘번역’의 전 과정에 새겨진 감독의 입김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런 식의 논쟁이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접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결국에 그것은 ‘다큐는 작위적(가짜 혹은 픽션)이어서는 안 된다’ 식의 계몽적 언명으로 수렴될 뿐이다. 정말이지 다큐영화는 ‘진짜’를 ‘진짜의 방법’으로만 다루어야 하는가? 아니, 애초에 그런 것들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감히 말하건대 나는, <워낭소리>가 배치한 작위적 장치보다, 영화를 그런 식의 ‘진짜(다큐)/가짜(극영화)’로 구분하려는 태도가, 훨씬 더 작위적이라 생각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가 설사 작위적인 장치에 기만당한다 하더라도 크게 기분 나빠할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점이다. 속아도 상관없다는 말이 아니다. 반대로 과연 몇 명의 관객이 정말이지 소(牛)가 바로 그 절묘한 순간에 ‘인간적인’ 눈물을 흘렸다고 있는 그대로 믿어버리겠는가? 그러기에는 작위적 장치의 도식이 너무나 거칠다. 그런데 분명 속지 않았음에도, 그러나 감동해버린다면?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속아버린다면? 주목해야 할 것은 단지 속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영화가 작위적으로 감동을 조장한다는 것을 분명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쉽게 감동해버리는 사태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워낭소리>만의 특출한 방식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보편적이다. 일테면 최근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드라마만 해도 그렇다. 그것은 과장이라는 것을 굳이 감추지 않고(아니 오히려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반대로 우리는 그것이 허위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주체적으로’ 휘둘려버린다. 하물며 광고의 경우는 또 어떠한가? 이런 점에서 나는 기만성이 뻔히 보이는 장치들이 아니라 반대로 결코 기만적으로 보이지 않는, 그리하여 영화를 보는 내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장치들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말장난 같지만 단순한 작위성이 아니라 작위적이지 않은 것들의 작위성, 기만적이지 않은 것들의 기만성 말이다. 

알다시피 <워낭소리>의 영어 제목은 'Old Partner'다. 물론 그것은 ‘워낭소리’의 명시적 의미, 즉 노인과 소의 우정을 지시한다. 처음부터 영화는 노인과 소의 우정, 그것도 몇 십 년이 넘는 우정을 그리겠노라 선언하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사소해보이지만 내가 볼 때 이것이야 말로 간단히 넘어가서는 안 될 문제다. 실제로 확인해 보니 <워낭소리>에 노인과 소의 우정 따위는 없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워낭소리>가 <워낭소리>일 수 있는 공리(公理)이며, 그렇기에 결코 무너져서는 안 될 경계이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선험적으로 그냥 그렇게 주어지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점이다. 역으로 영화 <워낭소리>는 공리(경계=우정)를 사수하기 위해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장치를 동원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앞서 인물들의 말이 대부분 심한 사투리로 발화되기 때문에 쉽게 알아들을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하여 감독은 자막을 사용한 것이지만, 그런데 개중에는 굳이 그런 식의 도움 없이도 누구나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발화가 있다. 예상했다시피 그것은 할아버지의 중얼거림, 즉 ‘아파’이다. 그런데 <워낭소리>에서 할아버지는 그냥 아픈 게 아니다. 물론 이것 역시 할아버지께서 실제로는 편찮으시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반대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제 할아버지의 건강과는 별도로 적절한 영화적 조율을 거쳐 철저히 구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파’의 중얼거림이 본격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하는 지점은 정확히 수의사의 발언이 있은 직후, 즉 소가 채 일 년도 살지 못할 거라는 진단이 나온 이후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볼 때 그것은 둘이 함께 죽어가고 있다는 운명론적 징후 혹은 설정된 것으로서의 ‘동병상련’이다. 쉽게 말해 영화에서 노인은 그냥 혼자서 아픈 게 아니라 소가 아프니까 아픈 거다. 소 역시 그냥 아픈 게 아니라 할아버지가 아프니까 아픈 거다. 요컨대 우리는 이런 식의 조율로 물 흐르듯 구성되는 상상적 동일화(=우정)의 광경을 뚜렷하게 목격한다.

물론 그것만이 아니다. 사실 <워낭소리>의 초반부는 다소 불편하다. 다 죽어가는 소가 노인이 탄 달구지를 너무나 힘겹게 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인과 소의 우정이 깨지고 마는가? 아니다. 상황은 오히려 정반대다. 구축을 위한 일시적 탈구축이었다고나 할까? 그것과 병행하여 이어지는 장면들에서 이제는 소의 힘겨움만큼이나 힘겹게 소의 먹잇감을 구하는 노인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둘의 관계는 철저히 쌍방향적이다. 더구나 클로즈업된 할아버지의 앙상한 다리 옆의 또 정확히 그만큼 앙상한 소의 체구를 확인하시라. 아니, 영화가 영사되는 동안 지속적으로 우리의 귀를 자극하는 워낭소리 자체가 둘의 커뮤니케이션(=우정)을 끊임없이 구성하는 음성적 기표이다. 물론 노인과 소 사이를 질투하는 할머니만큼은 조금 다르게 해석할 수 있겠다. 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닌 것이, 할머니가 소가 죽어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말하는 이유는, 소가 빨리 죽어버렸으면 하는 게 아니라, 죽음이야 말로 소와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구시대적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게끔 하는 유일한 해방구이기 때문이다. 물론 소의 입장에서 죽음이라는 사태는 가혹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과 할머니의 진심은 별개다. 더구나 할머니는 몇 차례나 영감이 죽으면 따라 죽겠다고 선언하지 않는가. 말하자면 표면적으로는 엇갈리는 듯한 삼각관계가 실은 단단히 묶여 있는 상상적 동일화이자 우정의 공동체인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공동체는 해질녘 역광으로 잡힌 노인과 소의 초월적 미장센으로 기어이 완결된다.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 말하는데, 나는 지금 실제 경북 봉화의 할아버님과 이미 세상을 떠난 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더구나 앞서도 강조했듯 둘의 관계가 그다지 특별할 게 없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결코 아니다. 분명 할아버님과 소는 감히 몇 마디 말 따위로 표현할 수 없는 각고의 인연을 형성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내가 여기서 거론할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할아버님과 노인의 실제 관계가 영화가 그려내는 식의 운명론적 우정과는 결코 동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설사 할아버님과 소의 우정이 존재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카메라에 포착되는 한, 그리하여 편집과정을 거치고 다양한 영화적 기법 속에 재현되어버린 이상, 작위성의 침입을 막을 길은 없다. 말하자면 그 각고의 인연은 영화라는 매개체를 거치면서 보다 일관되게, 보다 가지런하게, 보다 균질적으로 계량화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워낭소리>는 실제의 그것보다 휠씬 더 딱딱하고 견고하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주의사항 하나! 방금 말한 실제 현실과 영화적 재현 사이의 관계를 혼동해버리면 위험하다는 점이다. 그것을 혼동하는 순간 경북 봉화의 할아버님과 할머님은 돈을 주고 사진을 찍어도 크게 문제될 게 없는 객체 혹은 관광 상품의 도구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영화의 상상적 균질화가 너무나 부드럽게 형성되는 탓에, 그것을 능동적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2월 15일 대학로 동숭아트센터에서 <워낭소리>를 관람했다.

그것과 더불어 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구성하는 상상적 경계가 자연스럽다 못해 지나치다는 것, 그리하여 그 경계에 포함되지 않는 것들이 부정되거나 골계의 대상으로 결락되어버린다는 점이다. ‘경계 안(선)/경계 밖(악)’의 단순한 이분법을 논하자는 게 아니다. 문제는 경계의 안쪽(공동체=우정)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자폐성이다. 물론 이것 역시 상대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워낭소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어쩌면 몇몇 예외적 상황을 뺀 대부분의 영화는 나름대로의 경계 쌓기에 충실하다. 급기야 프레임 속에 담는다는 것 자체가 안(볼 수 있는 것)과 밖(볼 수 없는 것)의 경계설정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워낭소리>의 경계를 단지 그것이 지나치다 하여 무작정 비판할 수만은 없다. 그런데 경계를 설정한다는 것과 그것이 유발하는 배제와 누락의 사태는 전혀 다른 문제가 아닐까? 비유컨대 아무리 도시재개발이 필요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억울한 추방자가 생겨서는 안 되는 것처럼, 영화가 설정한 자명성으로부터 추방되어 부정되거나 희화화되는 존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따라 상황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더구나 그것이 함부로 부정되거나 희화화되어서는 안 되는 그 무엇이라고 할 때 사태는 심각하다.

쉽게 잊어버리지만 <워낭소리>에는 단지 한 마리의 소만 등장하는 게 아니다. 정확히 말해 세 마리의 소, 즉, 늙은 소, 늙은 소를 대체하기 위해 들여온 젊은 소, 그리고 젊은 소가 낳은 송아지가 있다. 그런데 혹시 젊은 소가 지나치게 탐욕적으로 보이지는 않던가? 가령 늙은 소의 여물을 힘으로 빼앗는 모습, 자기가 낳은 송아지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모습, 늙은 소가 힘겹게 달구지를 끌 때 마구간에서 여물만 씹던 모습들 말이다. 물론 이런 식의 반복은 정서적 대비를 환기하고 그 둘의 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예증한다. 그러니까 젊은 소는, 늙은 소를 대체하기 위해 거기 있었던 거지만, 그러나 처음부터 그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물론 젊은 소가 어디까지나 외부에서 온 침입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무슨 이유로 철저히 외부적인가? 그런데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하다. 바로 이 속에 노인과 소를 30년 동안 묶어 왔던 우정의 역사성 혹은 기원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바로 이 지점에서 상상적 동일화로 구축된 공동체(=우정)가 실은 배제해서는 안 될 것들을 누락시킴으로써 성립된 가공물이었음이 드러난다.

젊은 소가 외부적 침입자로 머물러야만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달구지를 끌기에는 젊은 소가 지나치게 방정맞다는 점. 그러니까 젊은 소가 노인에게 ‘일소’로서의 역량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 실제로 노인은 그것을 ‘일소’로 교화시키기 위해 무단히 애를 쓴다. 하지만 봤다시피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그렇다면 반대로 늙은 소의 경우는 어떠한가? 늙은 소가 30년 전에 공동체로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스럽게도’ 달구지를 충분히 끌고도 남을 ‘일소’로서의 역량을 보여줬기 때문은 아닐까? 이런 사항을 가정한다고 했을 때, 그렇다면 둘이 관계를 형성하는 결정적 계기는 다름 아니라, ‘동물에 대한 인간의 착취’ 혹은 ‘타자(자연)에 대한 주체의 사유화(인간)’였던 게 아닐까? 이것이야 말로 ‘일소’가 되지 못한 젊은 소가 멀리 팔려가면서 우리에게 던진 공동체(=우정)의 기원이다. 착취당할 조건이 성립되지 않거나 폭력의 행사에 반항하면 공동체로부터 어김없이 추방당한다는!

나는 지금 <워낭소리>가 은폐시킨 폭력성을 문제 삼고 있다. 균질적이고 초월적인 우정을 구축하기 위해 폭력을 은폐해버리는 사태 말이다. 그런데 한 발 더 나아가 비판해야 할 것은 그것을 위해서라면 폭력성 따위 정도는 은폐되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비윤리적 발상 바로 그것이다. 할머니의 잔소리에 짜증이 난 노인이 늙은 소를 마구 때리는 장면이 떠오른다. 동시에 소가 아니었으면 9남매를 못 키웠을 거라는 소리도 들린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전혀 작위적인 것으로 아니면 불편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소의 희생적 사랑이 아름다운 경북 봉화의 풍경과 어울려 숭고의 수준으로 승화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인간중심의 은유가 아닐까? 그리하여 오히려 그것은 9남매를 키우기 위해 소가 30년 동안이나 착취당했다는 뜻이 아닐까? 계속해서 클로즈업되는 할아버지의 불편한 발을 30년 동안 대신했을 뿐이라고? 그런데 왜 말 못하는 소가 구타당하면서까지 그런 책무를 떠맡아야만 하는가? 아니, 그 문제는 둘째로 치고, 그것을 두고 과연 <워낭소리>처럼 ‘Old Partner'라 지칭해버려도 되는 것인가? 이것이야 말로 너무나 작위적이고 기만적이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덧붙여, 여전히 노인은 아프다. 그리하여 오늘도 다 쓰러져 가는 늙은 소에게 고집스레 달구지를 맡기고 병원으로 향한다. 그런데 그 때, 우연치고는 너무나 기막힌 장면이 연출된다. 우시장(牛市場)으로 보이는 곳을 달구지가 지나갈 무렵 그 너머로 소고기의 수입을 반대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그런데 이 순간,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전도가 발생한다. 있는 그대로 따지자면 이 장면이야 말로 가장 슬퍼야 한다. 죽음의 그림자가 덧씌워진 운명론적 우정과 절대자본주의의 물결에 떠밀려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축산농가의 슬픈 표정이 오버랩될 거라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 극장을 가득 채운 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성숙하지 못한 관객을 문제시 하자는 게 아니다. 반대로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영화가 배열해 놓은 친절한 규칙들에 몰입했다는 사실 뿐이다. 그러니까 축산농가의 현실적 비탄 역시 어디까지나 운명적 절대경계 너머에 있을 뿐이고, 초월적 우정에 비해 그것은 오히려 속된 것으로까지 보이는 사태가 발생한다. 과연 그러하다면 <워낭소리>의 초월적 우정은 원래 그렇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현실적 비탄으로부터 눈을 감아버림으로써 나아가 그것을 추방시킴으로써 비로소 성립된 게 아닐까? 경계 너머의 풍경은 추방되거나 무시되거나 희화화되어도 문제될 게 없다는 인식은, 탈역사의 풍경이라는 기막힌 전도를 낳고 만다. 끝으로 이 장면을 보면서 누가 제일 흐뭇했을까? 그리하여 장관의 권유에 따라 대통령까지도 직접 납시어 <워낭소리>의 관람을 ‘허락’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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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고향,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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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8 09:44

봄바다에 실려 온 음악 다큐멘터리

시네마테크 부산, ‘봄날의 뮤직 카페’ 영화제 개최
                                                                                                                                        김나라 기자
국내에서 22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던 독립음악영화의 화제작 <원스> 역시 관객들의 뜨거운 요청으로 재상영 된다
▲ 국내에서 22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던 독립음악영화의 화제작 <원스> 역시 관객들의 뜨거운 요청으로 재상영 된다

시네마테크 부산은 3월 3일(화)부터 19일(목)까지 음악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4편과 극영화 1편을 묶어 ‘봄날의 뮤직 카페’ 영화제를 개최한다.

상영될 작품은 <존 레논 컨피덴셜>, <샤인 어 라이트>, <로큰롤 인생>, <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카페>, <원스> 등 5편이다.

<존 레논 컨피덴셜>과 <샤인 어 라이트>는 세계적인 음악 거장들을 다큐멘터리로 담아냈다. <존 레논 컨피덴셜>은 포스트 비틀즈 시기 존 레논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담았으며 <샤인 어 라이트>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전설적인 락 밴드 롤링 스톤즈의 ‘비거 뱅 투어’ 중 뉴욕의 비콘 극장에서 열렸던 콘서트를 생생하게 담아낸 영화다. 이 작품은 2008년 베를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로큰롤 인생>은 평균 나이 81세의 할머니, 할아버지로 구성된 ‘마음은 청춘’이란 뜻의 코러스 밴드 ‘영앳하트(Young@Heart)를 그린 작품이며, <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카페>는 지난 해 ‘아듀 2008 영화제’ 당시 좌석점유율 50%에 이르는 사랑을 받았던 영화로 영화를 보지 못한 관객들의 요청으로 재상영 된다. 또 국내에서 22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던 독립음악영화의 화제작 <원스> 역시 관객들의 뜨거운 요청으로 재상영 된다.

한편 ‘봄날의 뮤직 카페’ 상영작 5편 외에 3월 5일(목) 저녁 7시 30분에 열리는 독립영화 정기상영회에서 이탈리아의 음악 독립영화 <피아노, 솔로>가 무료로 상영된다. <피아노, 솔로>는 이탈리아의 천재적인 재즈 피아니스트 루카 플로레스의 삶과 사랑을 그린 영화다.

관람료는 일반 5천원, 회원 3천 5백원. 시네마테크 부산 홈페이지를 통해 예매할 수 있다. 문의: 051-742-5378(시네마테크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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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6 09:18

‘아시아 독립영화의 오늘’

아시아영화펀드 쇼케이스, 13일부터 인디스페이스에서
                                                                                                                                         김나라 기자

올 해 두 번째로 열리는 아시아영화펀드 쇼케이스 ‘아시아 독립영화의 오늘’이 오는 3월 13(금)일부터 18(수)일까지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에서 개최된다
▲ 올 해 두 번째로 열리는 아시아영화펀드 쇼케이스 ‘아시아 독립영화의 오늘’이 오는 3월 13(금)일부터 18(수)일까지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에서 개최된다

<워낭소리>가 15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독립영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어느 때 보다 높은 요즘, 국내외 관객과 평단이 열광한 아시아 각국의 독립영화를 미리 만나볼 기회가 온다. 올 해 두 번째로 열리는 아시아영화펀드(Asia Cinema Fund, 이하 ACF) 쇼케이스 ‘아시아 독립영화의 오늘’이 오는 3월 13(금)일부터 18(수)일까지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에서 개최된다. ACF 쇼케이스에서는 아시아 독립영화의 제작 활성화와 안정적 제작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펀드의 지원을 받아 완성된 작품 14편이 상영된다.

상영될 작품은 <똥파리>(양익준), <허수아비들의 땅>(노경태), <약탈자들>(손영성),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마리오), <샘터분식-그들도 우리처럼>(태준식), <농민가>(윤덕현), <태백 잉걸의 땅>(김영조) 등 국내 작품 7편과 <노인의 바다>(라제쉬 쉐라), <리버 피플>(허 지엔쥰), <멘탈>(소다 카즈히로), <개종자>(파누 아리), <유토피아>(왕 이런), <공성계>(지단), <우공이산>(조안나 바스케스 아롱) 등 중국, 태국, 인도, 일본 등의 아시아 각국의 독립영화 7편이다.

이번 상영작들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작품들이다. 특히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는 2009년 로카르노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타이거상을 수상했으며 이어 프랑스 도빌영화제, 스위스 프리브룩영화제에서 초청 상영되어 주목 받았다. 또 <허수아비들의 땅>은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베를린영화제, 홍콩국제영화제 등에 초청 상영되어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이 두 작품은 오는 4월 국내 개봉할 예정이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피프메세나상, 2008년 두바이국제영화제 경쟁부문 다큐멘터리 1등상을 수상한 소다 카즈히로 감독의 <멘탈> 역시 올해 6월 일본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번 행사를 공동 주최하는 부산국제영화제와 한국독립영화협회는 “‘아시아 독립영화의 오늘’은 아시아 독립영화의 현재를 가늠하고 아시아 독립영화의 희망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고 전했다.

ACF 쇼케이스는 서울에서 열린 후 4월 21(화)일부터 26(일)일까지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개최된다. 문의: 02-778-0366(인디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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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5 12:26

서울아트시네마를 지켜라!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긴급토론회 개최

2월 28일(토) 오후 2시부터 '시네마테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주제로 긴급토론회가 열린다

▲ 2월 28일(토) 오후 2시부터 '시네마테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주제로 긴급토론회가 열린다



                                                               김나라 기자

2009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폐막 약 1주일을 앞두고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당초 예정되었던 두 번째 포럼이 긴급토론회 ‘시네마테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로 대체되어 2월 28일(토) 오후 2시부터 낙원동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2월 초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는 시네마테크 전용관 위탁사업을 공모제로 변경한다는 통보를 해 왔다.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이하 한시협)는 이를 위기국면으로 인식, 대응 방향을 모색코자 긴급토론회 개최를 결정한 것이다.

시네마테크 전용관인 ‘서울아트시네마’는 순수하게 민간이 주도하여 설립되고 운영되어 온 민간 기관이다. 다만 영진위는 위탁사업의 형식을 빌려 운영비의 30%를 지원해 왔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위탁이 아닌 공모제로 전환하여 사업운영주체를 자신들이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계약 갱신을 한 달 앞 둔 시점에서 말이다.

서울아트시네마와 한시협은 영진위의 이 같은 결정을 받아 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7년째  운영되어 온 국내 유일의 시네마테크 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는 그 동안 고전 및 예술 영화 상영을 통해 한국 영화문화 성숙에 이바지 해 왔다. 그런데 사업에 대한 정당한 평가나 절차 없이 공모제로 변경한다는 일방적인 통보는 부당하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공모제 전환에 반대하는 일부 관객들은 자발적으로 공모제 반대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서울아트시네마의 로비 한쪽에 지난 21일(토) 부스를 차리고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들른 관객들을 대상으로 서명을 받고 있으며 홍보물도 자체 제작하여 배포하고 있다.

토론회에는 김영진(영화평론가), 오승욱(영화감독), 정윤철(영화감독),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김홍록(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사무국장) 등이 참여할 예정이며 참석을 원하는 이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문의: 02-741-9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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