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에 해당되는 글 15건

  1. 2009.03.11 해질녘의 허밍, 허밍
  2. 2009.02.24 한국 대표 작가들의 유럽 출간
  3. 2009.01.07 일어나 행진할 시간
  4. 2008.12.29 누가 먼저 내민 '혀'인가? (1)
  5. 2008.12.25 한국문학의 '취약한' 성장
  6. 2008.12.03 그렇습니다, 박민규입니다
  7. 2008.12.01 문학이 무엇인지 묻는 방식에 관하여
  8. 2008.11.21 변화하는 세계와 동유럽 문화
  9. 2008.10.24 정지된 시간 속의 책읽기
  10. 2008.10.14 [장르문학 산책]모험 증발한 시대에 꾸는, 위대한 백일몽 - 장르 판타지
2009.03.11 10:25

해질녘의 허밍, 허밍

고영민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공손한 손』(창작과 비평)

고영민 시인.

▲ 고영민 시인.




                                                       김상미 _ 시인

고영민 시인은 시인축구팀 ‘글발’의 미드필드다. ‘글발’은 축구를 좋아하는 시인들끼리 모여 만든 축구팀 이름이다. 그곳에서 처음 고영민 시인을 만났다. 우리는 그를 ‘숀펜’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그는 만만치가 않다. 3년 전에 그가 첫 시집 『악어』(실천문학사)를 출간했을 때, 우리는 모두 그가 시집 제목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 두 번째 시집 『공손한 손』(창작과비평)을 펴냈을 때도 우리는 모두 시집 제목이 그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는 만만치는 않지만 예의바르고 겸손한, 아주 인간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날, 따뜻한 한 끼 밥 앞에 공손히 두 손을 올려놓으며 냉혹한 도시생활의 “무거운 눈덩이를 털어”(「싸이프러스 사이로 난 눈길을 따라」)낼 줄 아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 어느 날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앉아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밥이 나오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밥뚜껑 위에 한결같이
  공손히
  손부터 올려놓았다

       - 「공손한 손」 전문

“밥” 앞에서 누구나가 느끼는 본능적인 공감대. 밥이 곧 삶이고, 삶이 곧 밥인데 누가 그 앞에서 공손해지지 않겠는가. “밥”은 그에게도 시의 입구이며 출구이다. 그리고  ‘고향집’으로 가는 시의 근원이다. 열두 남매의 막내로 자란 그에게 고향과 가족이란 세상의 중심인 동시에 자신의 중심이다. 

그는 충남 서산의 한 마을에서 태어나 중학교 1학년 때 서울로 전학해 왔다. 과수원과 양계장을 했던 부모님과 열두 남매의 어릴 때 농촌생활 경험은 그가 각박한 도시생활을 견디는 데 많은 힘이 되었다. 그 힘(향수)으로 그는 딸아이와 아내의 숨결을 지키고, 도시가 주는 환멸을 견디고, 열린 마음으로 밥과 생명과 자연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끈을 놓지 않는 시인이 되었다. 

이번 시집 『공손한 손』은 그러한 그를 있게 한 고향, 부모님, 형제들에게 시인으로서 바치는 연가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인지 시집을 읽는 내내 철벽같은 도시의 콘크리트 벽 틈에서도 피어난 노란 민들레꽃을 발견했을 때처럼 짠한 감동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다녔다. 환갑이 지난 큰형이 팔순의 어머니께 추석선물로 드린 「바바리맨 인형」 이야기나 농약이 바닥에 가라앉지 않도록 온종일 약통을 젓는 작업 중 일어난 「과수원」이야기는 시인의 건강하고 밝은 천성을 보는 듯 유쾌하고 즐거웠다. 

해질녘 저 밭은 무엇인가/ 해질녘 저 흐릿한 눈길은/ 해질녘 밭둑을 돌아 학교에서 돌아오는 거미 같은 저 애들은 무엇인가// 긴 수숫대/ 매양 슬픈 뜸부기 울음// 해질녘 통통통 경운기 짐칸에 실려가는/ 저 텅 빈 아낙들은 무엇인가/ 헛기침을 하며 걸어오는 저 굽은 불빛은 무엇인가/ 해질녘 주섬주섬 젖은 수저를 놓는/ 손/ 수레국화 옆에서 흙 묻은 발목을 문지르는 저 고단함은/ 해질녘 내 이름 석 자를 적어온/이 느닷없는 통곡은 무엇인가// 해질녘, 해질녘엔/ 세상 어떤 것도 대답이 없고/ 죽은 사람은 모두 나의 남편이고 아내이고/  해질녘엔 그저 멀리 들려오는/ 웃는 소리, 우는 소리// 허밍, 허밍   - 「허밍, 허밍」 전문     
 
처음 밀레의 그림 「만종」을 보았을 때의 느낌도 이랬을까? 해질녘의 풍경과 함께 오버랩 되어 오는 이 장엄하고 숙연한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모든 것을 다 감싸 안는 듯하면서도 하나하나의 깊이를 적막으로 생생히 드러내는 해질녘의 풍경. 마치 저녁 이미지들이 시인의 내면에 깃들어 있다가 하나하나 불려져 나오는 듯하지 않은가. 유난히 저녁 풍경이 많은 그의 시집을 읽으며 한 사람의 삶 속에 이렇듯 언어로 껴안을 수 있는 저녁 이미지들이 많다는 데에 놀랐다. 특히  “이 저녁엔 사랑도 사물이다./ 나는 비로소 울 준비가 되어 있다 천천히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늙은 나무를 보았느냐,/ 서 있는 그대로 온전히 한 그루의 저녁이다.”로 시작되는 아름다운 시 「저녁에 이야기하는 것들」에선 숱한 세월 변함없이 한 곳에 서 있는 나무를 통해 그의 비애의 깊이와 넓이를 보는 듯 마음이 싸하면서도 시가 주는 간곡한 심미적 불꽃에 잠시 넋을 놓았다. 

그는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에게도 시어를 잘 배려하여 그 속에서 울음(감동)을 건져낸다. 그의 시에서 비틀린 이미지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분열되거나 부정적인 의식을 만날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때로는 세밀하고 치열하게, 때로는 함축과 비약으로 그는 자신이 가진 기억을 사물에 넉넉히 등치시킴으로써 독창적인 시를 창조해낸다. 그리고 그 독창성은 웃음과 슬픔을 잘 버무린 세상의 모든 평범한 행복의 경이와 함께 하고 싶은 그의 꿈처럼 시 곳곳으로 스며들어가 다정하면서도 엄격하고 소탈한 애가(哀歌)로 태어난다.
 
책꽂이에 책들이 꽂혀 있다/ 빽빽이 등을 보인 채 돌아서 있다/ 등뼈가 보인다// 등을 보여주는 것은/ 읽을거리가 있다/ 아버지가 그랬고/ 어머니가 그랬다/ 절교를 선언하고 뛰어가던/ 애인이,/ 한 시대와 역사가 그랬다// 등을 보이는 것은 지는 것이 아니다/ 잠깐 다른 곳을 보는 것이다/ 옷을 갈아입는 네가/ 부끄러울까봐/ 멋쩍게 돌아서주는 것이다  - 「책의 등」 전문

등은 많은 걸 내포하고 있다. “등을 보여주는 것은/ 읽을거리가 있다”고 말하는 그의 인색하지 않은 성숙이 참 좋다. “등을 보이는 것은 지는 것이 아니다/ 잠깐 다른 곳을 보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그의 부드럽고 넉넉한 사유의 선들이 참 좋다. 등은 그야말로 단순하고 소박하다. 그리고 크고 너그러워 한없이 기대고 싶게 한다. 어머니, 아버지의 등이 그렇고 형제와 친구의 등이 그렇다. 정직하고 거짓말 할 줄 모르는 그 등에 그는 자신이 살아온  모든 읽을거리를 지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音)”(「우륵」)인 “울음”을 탄금하기 위해 오늘도 시를 조율하고 숨을 골라 해 지는 가얏고 속으로 들어간다. “소리를 따라 온몸이 함께 울고, 서럽고 서러운 생각들이 울림통이 되어 몸을 진동”시키는 큰 시를 낳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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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4 07:50

한국 대표 작가들의 유럽 출간

한국문학번역원, 한국문학 대표작 유럽 각국어로 번역 출간

김선우 시인의 『도화 아래 잠들다』의 독일어판 표지.

▲ 김선우 시인의 『도화 아래 잠들다』의 독일어판 표지.



                                                이주호 기자

2008년 말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헝가리에서, 김훈의 『칼의 노래』가 독일 델타(DELTA) 출판사에서 출간된 데 이어 올해 1월에는 김선우 시인의 『도화 아래 잠들다』가 독일에서 출간되는 등 한국 대표 작가들의 작품이 유럽에서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이 네덜란드의 영향력 있는 출판사 아르베이데르스페르스(Arbeiderspers)에서 출간되기도 하였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영어, 독어, 불가리아어, 불어, 몽골어, 러시아에 이어 헝가리어로, 『칼의 노래』가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의 “세계 고전 시리즈”에 이어 독일어로 출판되는 등 한국의 문학 작품들이 한국문학번역원(원장 김주연)의 지원을 통해 세계 각국 언어로 번역, 출간되고 있다.

김선우 시인의 『도화 아래 잠들다』의 독일어판은 총 51편의 시를 담고 있으며, 독일어 한글 대역본 형태로 제작되어 독일 독자들도 행간의 의미와 숨고르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번역자 카이 로스(Kai Rohs)는 “『도화 아래 잠들다』야말로 여성성에 대한 독특한 시각을 잃지 않으면서 자연과 생명, 우주로 그 논의의 지평을 넓혀가면서도 불교라는 동양적 감성의 평형을 유지하는 탁월한 시집으로 김선우라는 한 개인을 뛰어넘어 한국적∙동양적 특성을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평하며, 독일 시장에서의 성공적 정착을 내다봤다.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은 이미 일본어, 영어, 프랑스어로 출간된 바 있으며 이번 네덜란드어판의 경우 아르베이데르스페르스 출판사의 전쟁문학시리즈 19번째 도서로 출간되어 파울로 코엘료, 폴 오스터, 오르한 파묵 등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한국문학번역원은 해외 출간에 이어 한국 문학과 해외 독자와의 만남을 기획하고 있다. 독일 라이프치히 국제도서전에서 개막일인 3월 12일에는 김훈의 『칼의 노래』, 3월 14일에는 김선우 시인의 신간인 『도화아래 잠들다』의 낭독회를 가질 예정이며, 4월 말 뉴욕에서 열리는 국제문학축제인 “펜 월드 보이시즈”(Pen World Voices)에는 황석영이 참가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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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7 11:18

일어나 행진할 시간

정익진 시집 『윗몸일으키기』
김상미 _ 시인


신작 시집 『윗몸일으키기』를 낸 정익진 시인.
▲ 신작 시집 『윗몸일으키기』를 낸 정익진 시인.

정익진 시인은 보따리 영어 선생님이다. 하지만 그를 만나면 영어보다는 체육을 더 잘하게 보인다. 운동선수 같은 외모 때문이다. 그는 영화와 음악, 술을 좋아한다. 다소 무뚝뚝, 말이 없는 외면과는 달리 내면은 매우 섬세하고 감각적이다. 그리고 그의 시를 보면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나이에 비해 시가 너무 젊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건 정익진 시인의 시에 대한 식을 줄 모르는 열정과 호기심 때문이리라.

이번에 나온 두 번째 시집 『윗몸일으키기』(북인)에도 젊고 싱싱한 시들이 많다. 첫 시집인 『구멍의 크기』(천년의 시작, 2003)가 거대한 세계 속을 둥둥 떠다니는 자신만의 방을 처연할 정도로 치열하게 지키고 견뎌대는 데 혼신을 다한 시집이라면, 두 번째 시집 『윗몸일으키기』는 그 방을 빠져나와 거리로, 광장으로, 헬스클럽으로, 사람들 속으로 자신을 자유롭게 풀어놓은 시집이라 할 수 있다. 첫 시집에 비해 문을 활짝 열어놓은 탓인지 잘 읽히고 소통은 물론 소화에도 껄끄러움이 없다. 
 
술 마시고, 운전하면서, 졸다가, 자다가, 계속 갔다/ 핸들을 붙잡은 채로…/ 한동안 캄캄한 동물들이 지나다니고…/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나는 결백한데, 어디야 여기가?/ 어딘 어디야, 참 좋은 병원이지/ 저것은 아코디언,/ 차가 아코디언 될 뻔했단 말이야/ 부러진 갈빗대에서도 아코디언 소리가 나는 거야/ …… '아르망'이라는 사람 알아?/ 수십 대의 차량을 압착기로 눌러/ 작품으로 만든 조각가야/ 어찌 될 뻔했니, 아무리 취했다지만/ 고속도로 중앙에 차를 세우고/ 잠자는 놈이 어디 있냐?/ …/ 영원히 아르망의 세계 속으로 갈 뻔했지만/…/ 뒤에서 트럭이 들이받는 순간,/ 벨트만 매지 않았더라도, 앞 유리 창 밖으로/ 내동댕이쳐졌을 것을,/…/ 아코디언 소리가 들려?/ 주름진 사이사이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그 끊어진 필름의 장면 장면들… (「죽을 뻔했다, 아르망」 중에서)

음주운전을 하다 죽을 뻔한 이야기를 시로 옮긴 재미있는 시이다. 자신이 타고 다니는 차 이름인 '아르망'과 누보레알리즘의 선두주자인 프랑스의 조각가 '아르망'을 대치시켜 시 전체를 한 편의 발랄한 블랙코미디로 만들어 놓고 있다. 게다가 부러진 갈빗대의 통증을 아코디언 소리로 묘사해 칙칙할 뻔한 시를 밝고 유머러스한 시로 만들어 놓았다. 시인의 오랜 내공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그 외에도 시집 곳곳에 운동이나 운동기구를 주체로 하거나 재료로 사용한 시들을 배치해 시집 전체를 경쾌하고 생동감 넘치는 현장으로 이끌고 있다. 그 중 시집 표제작인 「윗몸일으키기」를 보자. 윗몸일으키기는 복근 운동의 하나로 기초 체력을 가늠하는 데 널리 사용하는 운동이다. 어떤 운동보다도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운동이며 모든 움직임의 시초이기도 하다. 윗몸을 일으켜야만 인간은 직립할 수가 있고 움직일 수가 있다.

  쉰하나, 쉰둘…
  책 속의 문장들 몸을 일으켜 책이 펴지고
  씨앗들은 깨어나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오랜 시간 바닥에 누웠던 빛들이 일제히
  일어나 행진할 시간이다  
(「윗몸일으키기」 중에서)

시인에게 있어 윗몸일으키기 운동은 곧 펜을 잡는 일일 것이다. 펜을 잡아야만 언어 자체를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들 수가 있고, 언어에 살과 피를 공급할 수가 있다. 하여 시인은 수십, 수백 번 윗몸일으키기를 반복한다.

시인이 윗몸일으키기에 열중하는 것은 "일어나 행진할 시간"을 얻기 위해서이다. '책이 펴지고, 열매가 맺히고, 누웠던 빛들이 일제히 일어나' 시와 인간과 우주가 하나로 포용되는 상태! 재생을 통한 또 다른 생성. 일탈이나 도피가 아닌(그런 시들은 몇 줄로 세울 만큼 많다) 생성과 도약의 세계, 건강하고, 밝고, 생동감 넘치는 세계이다. 그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시인은 이제 「뜀틀체조」 앞으로 간다. 

목발과 함께 걸어간다./ 천천히 한 발, 한 발 다가가며/ 한쪽 목발은 강물에/ 나머지 목발은 바다로 던져버리고/ 절뚝거리며 걸어간다. 점점 걸음 빨라지며/ 빨라지며, 신고 있던 낡은 신발이/ 맨발로 바뀐다. 완벽한/ 걸음걸이로 걸어간다. 뛴다./ 뛰어간다. 저 멀리 뜀틀이 보인다./ 계속 뛴다./ 뛴다. 뛰어, 전속력으로…// (중략) // 뛰어가서, 도약…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하략) // 불안정한 착지,/ 그 뼈아픔이 나는 좋다.  (「뜀틀체조」 중에서)

한 편의 다큐(인간 승리) 같은 이 시는 '목발'에서 시작하여 '불안정한 착지'로 끝나지만, 시인은 힘차게 말한다. "그 뼈아픔이 나는 좋다."고. 얼마나 경쾌한 마무리인가. 안정한 착지가 이루어질 때까지 매번 반복되고 시도될 수밖에 없는 일(시쓰기)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불안정한 착지,/ 그 뼈아픔이 나는 좋다."라고 말할 수 있는 힘! 그러한 힘이 「그러한 광장」을 만들어내고, 「따분한 저격수」를 아파하고, 「Z와의 인터뷰」를 견뎌내고, 「포만의 세계」에 일침을 가하고, 「빨간 아령을 든 여자」를 사랑하고, 「모닝커피」를 홀짝이면서도, 자신의 유골단지를 싸고, 언제나 따뜻한 돌멩이(인간의 교유)를 찾아, 「지구본」을 돌리고,  언제나 똑같은  「무인카메라」 앞에서, 신나게 「사과를 깎으며」, 「팬터마임」을 즐길 수 있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그의 시들이 남다른 감동으로 다가오는 건 그가 빼어난 감각능력자이기보다 끝없이 노력하는 언어탐구자이기 때문이리라. 거기다 초현실적 명랑성이라 이름 붙여도 좋을 시인의 따뜻한 인간애가 시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리라.

굶주린 피아노가/ 늪 위에서 울부짖는다.// 노을이 선명할 무렵,/ 나는 야자수를/ 타고 오르고 피아노 안에서는/ 물고기의 지느러미로/ 배를 저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피아노의 침묵은 잉카제국의/ 돌무덤을 닮았고/ 피아노 속 연못과/ 피아노 속 짐승들이 나를/ 흥분케 한다. 가져가라,/ 여기에 뼈들이 쌓여 있다.// 피아노의 흰 뼈와 검은 뼈들은/ 부드러운 손가락들을 견딜 수가 없다.   (「피아노」전문)
 
시각과 청각이 한데 어우러져 아주 환상적인 이미지(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그의 아름다운 시 「피아노」. 마치 깊은 바다 속에서 건져 올린 피아노를 빛 속에서 바라보는 듯한, 아니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를 보는 듯한, 이미지 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시. 이쯤 되면 다음 번 시집엔 감각과 사유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다 잡은, 멋진 요리상을 보여주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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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9 10:17

누가 먼저 내민 '혀'인가?

[컬처뉴스가 뽑은 2008년 10대 뉴스]⑧블로그 소설연재와 ‘혀’를 둘러싼 논쟁
이주호 기자
누구의 '혀'인가, 주이란의 『혀』(글의꿈, 2008) 와 조경란의 『혀』(문학동네, 2007)
▲ 누구의 '혀'인가, 주이란의 『혀』(글의꿈, 2008) 와 조경란의 『혀』(문학동네, 2007)

실제 연주 음악을 CD에 디지털 변화시킬 때는 원음에서 거의 손상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용량이 커서 저장성이 떨어진다. MP3 파일은 CD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용량으로 거의 같은 음질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물론 CD가 가지고 있는 음역대에서 무려 30%나 제거된 압축 방식으로 제작되었기에 이것을 저질의 음악으로 치부하는 사람들도 여전하지만 저질음악이라는 공세와 인간의 청력으로는 절대 이 둘을 구분할 수 없다는 수세의 승부가 갈리길 기다릴 것도 없이 음반 시장은 이미 MP3쪽으로 기울었다. 거기에는 CD를 사건 MP3를 다운받건 음악 감상만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음악처럼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책에서 역시 이 비슷한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e-book 리더기가 책 시장 한 귀퉁이에서 승산 없는 싸움을 지속해오는 동안 인터넷에서는 블로그 소설 연재가 출판의 새로운 형태로 자리 잡아 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대열에 합류한 사람들이 박범신, 황석영, 공지영 등 굳이 인터넷이 아니라도 일정 판매고를 보장할 수 있는 작가들이었다. 블로그 연재 후 종이 책으로 출간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수순으로 여겨지는 마당에 이것이 정말로 새로운 출판 형태인지는 아직 판단하기 이른 것 같다. 다만 연재 블로그가 대형 포털이나 대규모 인터넷 서점의 홈페이지에서 이루어지는 데다 현재로선 유명 작가들에 한정되어 있다 보니, 대자본 - 유명작가 - 출판이 연계된 새로운 독과점 형태는 아닌지 염려스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연재 형식보다 작품 내용에 관한 이야기가 우선이라는 건 두말 할 나위 없는 일이다. 조회 수를 염두에 두지 않고 블로그 연재가 기획되었을 리 없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인터넷으로 글을 읽는 것이 익숙한 세대의 감성에 호소할 수 있는 글이란 것이 종래의 종이 출판과 어떻게 다른지, 항간의 우려대로 질적인 차이는 없는지 따져볼 일이다.

최고급 플레이어와 스피커 시설을 갖춘 실험실에서 청음이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음악 애호가들을 대상으로 CD 음악과 128kbps, 256kbps 음질의 MP3 음악을 구분하게 하는 실험이 있었다. 기술적인 면에서 CD와 MP3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MP3에서 손실된 부분은 사람의 귀로 구분할 수 없는 음역대다. CD음악을 고수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음향심리학이란 면도 고려하여 과연 이 둘은 명확히 구분될 수 있었을까? 128kbps의 저음질은 참가자 모두 쉽게 구분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256kbps 이상의 음질에서는 CD 음질과 거의 구분하지 못했다.

주이란과 조경란의 혀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새로 생긴 싸움 방식 그대로 힘 있는 측에선 외면과 침묵으로 일관했고 힘없는 측에선 없는 힘마저 다하다 기력이 쇠하고 말았다. 요리, 혀, 악마적 탐닉이라는 소재가 어지간해선 상상할 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한 발상이라 할 수는 없다. 과거 소설이 누가 더 가난했는가, 누구의 시대적 상처가 더 깊은가를 두고 내기를 벌여 왔다면 지금의 소설들은 누가 더 기괴한가, 누구의 소재가 더 기발한가의 경쟁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주이란, 조경란의 상상력은 문학의 소재를 한때 팔리는 영역으로 제한하는 문단 출판인, 혹은 출판 문학인들이 깔아 놓은 배경에서 생겨난 부산물일 뿐이다.

주이란은 등단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에 한국 문단 내에서는 소설가 아닌 소설가이다. 반면 조경란은 신인문학상의 등용문을 거친 데다 유수의 문학상들이 차마 빗겨가지 못한 유명 소설가다. 이 둘의 지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주이란은 공모 참가자이고 조경란은 공모 심사위원이라는 사실이다. 이 둘이 소설책을 발간했다. 소재의 차이가 없다. 발상이야 그렇다 치고 전개에 있어서도 차이가 나지 않는다. 누가 CD고 누가 그것을 복제한 MP3인지 육안으로는 도저히 구분이 가질 않는다.

혀를 둘러싼 공방에 평론가들이 뛰어 들었다. 이슈랄 게 없는 문학계에 모처럼만에 생긴 이슈인데 경사는 아닌 모양이었던지, 극히 발언하는 사람도 적었거니와 그나만 언급된 평들을 보더라도 누가 원본이고 누가 복제본인지는 고사하고 도대체 누가 문학적으로 뛰어나다는 건지조차 의견이 분분했다.

그렇다, 일정 수준에 이른 글은 구분해 내기가 어렵다. CD와 MP3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은 기술적 진보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소설의 경우는 문학성의 기준이란 것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부끄러운 고백에 지나지 않는다. 문학평론가의 현실적 존재 이유인 옥석 고르기가 여기서 발휘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결론은 어떤가, 읽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회사에 소속된 변호사가 자신의 법적 지식을 회사 운영에 유리하게 끌어다 붙이는 것 마냥 진단, 제안, 옥석 고르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단지 자신이 그간 갈고 닦은 참고 문헌 목록을 뽐내고 있다는 것이 비평의 현실이다.

실험에 참가했던 도도한 CD 청음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MP3음악이라도 좋은 환경에서 듣는다면 무척이나 근사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영옥의 『스타일』을 읽는 장소와 마음가짐이 이청준의 『신화의 시대』를 읽을 때와 같을 수 있을까? 읽기가 껄끄러우면 정서적 울림이 크고 MP3와 같이 싸고 듣기 편하면 정서적 울림이 적다는 기계적 구분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낼 수 있느냐는 말이다.

이문열이 대중적으로 어필한 『시인』 뒤에는 삶에 대한 그의 고민이 종교적으로 드러난 『사람의 아들』이 있었고, 예술적 형상화의 문제로 표현된 「들소」가 있었고, 정치 계급적 모순으로 드러난 『미로의 날들』이 있었다. 작년과 올해 서점가에서 이름 떠날 날이 없었던 황석영이 『바리데기』, 『개밥바라기 별』만으로 유명해진 게 아니었다. 그러면 정이현, 서유미가 『달콤한 나의 도시』, 『쿨하게 한 걸음』의 기층에 무엇을 깔아 놓았을까? 쇼핑과 쿨한 연애 말고 또 무엇을 보여주었을까?

블로그에 소설을 연재하든 계간지에 연재하든 그것으로 문학성의 기준을 삼을 수는 없다. 저음질로 들어야 돋보이는 음악이 있듯이, 음악과 시각적 효과, 때로 하이퍼텍스트 형식까지 더불어 활용하는 인터넷 연재라야 제 맛을 알 수 있는 소설도 있을 것이다. 한 작가 안에서도 『하악하악』식의 표출과 『벽오금학도』식의 표출이 공존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2008년 출간된 어떤 책이 독자를 지하철이 아닌 서재로 끌어들였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은 다분히 작가 개인의 문제에서 출발하지만, MP3 파일로 제작된 음악을 아이팟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듯, 현재 문학이라는 것도 문단과 출판이 긴밀하게 결합된 출판 시장에서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미진한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게재될 <장르 결산 특집-출판계>의 내용을 빌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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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5 12:37

한국문학의 '취약한' 성장

[2008 장르결산 - ①]문학
고봉준 _ 문학평론가

2008년 한국문학은 칙릿(chick-lit)과 성장소설의 강세가 두드러졌다. 백영옥의 <스타일>, 황석영의 <개밥바라기 별>
▲ 2008년 한국문학은 칙릿(chick-lit)과 성장소설의 강세가 두드러졌다. 백영옥의 <스타일>, 황석영의 <개밥바라기 별>

칙릿(chick-lit)과 성장소설의 강세, 2008년 한국문학을 이 두 가지로 요약하는 데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도시 여성들의 소비와 연애를 중심 소재로 삼는 칙릿(chick-lit)의 대중적 확산은 소설 시장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백영옥, 정이현, 서유미의 소설로 대표되는 칙릿 소설의 상업적 성공은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욕망이 재편되었음을 보여준다. 20-30대 여성독자들의 심리와 욕망을 날카롭게 포착했다는 점에서 칙릿은 장르문학과 함께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거기에 대한 평단의 본격적인 평가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소설시장의 활로가 장편 위주로 흘러가고 있고, 제도와 시장, 매체의 욕망이 장편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칙릿의 확산은 당분간 지속될 듯하다. 

최근 도서서평지 월간 북새통이 황석영의 소설 『개밥바라기 별』을 올해의 책 1위로 선정했다. 이 순위가 곧 한국문학의 바로미터는 아니지만, 미국 발 금융위기 속에서도 한국문학이 완만한 성장세를 유지한 데에는 성장소설, 특히 황석영의 힘이 컸다. ‘문화’의 생산과 소비가 경제상황에 민감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때문에 몇몇 작가들의 상업적인 성공은 상대적으로 커 보인다. 그러나 문학을 양적인 성장만으로 평가하는 것만큼 불합리한 일 또한 없다. 문학에 ‘성장’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면, 그것은 몇몇 기록들이 보여주는 양적인 풍요만으로 해명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성장소설의 강세는 좀 더 신중하게 평가될 필요가 있다. 장애인과 이주노동자, 다문화가족 같은 한국사회의 당면문제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김려령의 성장소설 『완득이』와 황석영의 자전적 성장소설 『개밥바라기별』은 대표적인 성장소설이지만 그 느낌은 사뭇 다르다. 성장소설은 한국소설의 가장 오래된 형태이고, 그런 만큼 가장 대중적인 형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향수가 짙게 느껴지는 황석영의 소설과 2000년대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김려령의 소설에서 ‘성장’의 형식은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한국소설의 대중적 성공에 중견작가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는 사실 또한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현상의 한 가운데에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과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 등이 있다. 공지영, 김훈, 조경란의 소설 역시 해를 넘기면서 꾸준한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매체와 평단의 시선이 온통 신진 작가들에게 집중된 가운데에도 독자들의 관심은 여전히 중견작가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평단과 독자 사이의 거리는 비단 최근의 문제만은 아니며, 또한 심각하게 논의되어야 할 문학적인 물음도 아니다. 그렇지만 지난 몇 년, 한국문학의 담론을 이끌어왔던 동력이 젊은 작가들의 상상력에서 나왔다는 것을 감안하면 중견작가들의 대중적 성공에는 모종의 평가가 뒤따라야 할 듯하다. 젊은 작가들의 새로운 감수성이 독자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부분, 그리고 소설의 상업적인 성공이 몇몇 출판사와 작가에게 집중되어 발생한 점이 못내 아쉽다. 

소설의 생산과 소비를 ‘인터넷’이 매개하는 현상의 등장은 표면적으로는 고무적인 일이다. 지난해에는 포털사이트 ‘네이버’가 박범신의 『촐라체』와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을 연재하여 네티즌들의 이목을 끌었고, 올해에는 공지영과 이기호가 포털사이트 ‘다음’에 각각 장편 『도가니』와 『사과는 잘해요』의 연재를 시작했다. 인터넷 포털과 출판사의 공동기획으로 시작된 장편 연재는 현재 인터넷 서점으로 확산되고 있는데, 현재 인터넷 교보문고는 정이현의 『너는 모른다』를, 인터넷 서점 YES24는 블로그 형식으로 백영옥의 『다이어트의 여왕』과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연재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지면의 확장(?)이 소설 생산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며, 소설의 성격변화를 초래한 것도 아니다. 인터넷이라는 특성상 쌍방향적인 소통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러한 시도는 단발성 기획, 즉 출판기획의 다변화만을 보여주는 데 그치고 있는 듯하다. 다만 문예지 중심의 지면이 웹으로 옮겨오면서 장편소설이 활성화되고, 집필과정이 실시간으로 노출된다는 것이 달라진 점일 따름이다.  

시에 있어서는 미래파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젊은 시인들의 두 번째 시집이 단연 화제였다. 김경주의 『기담』, 진은영의 『우리는 매일매일』, 장석원의 『태양의 연대기』, 정재학의 『광대 소녀의 거꾸로 도는 지구』, 이민하의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강정의 『키스』 등은 형식적인 실험과 파괴를 통해서 새로운 세대의 시적 감수성을 보여주었다. 이들의 시는 전통 서정의 형식적 안정성보다는 음악과 연극 같은 타 장르와의 이접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에서 새로운 실험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김근의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문태준의 『그늘의 발견』, 장철문의 『무릎위의 자작나무』는 서정시의 안정적인 문법을 유지하되 사물과 세계에 대한 한층 성숙한 시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심보선의 첫 시집 『슬픔이 없는 십 오초』와 황성희의 『앨리스네 집』은 늦게 도착한 후일담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젊은 세대의 새로운 감수성과 전통 서정시의 안정감 사이에서 독자적인 세계를 모색하는 바, 가독성과 실험성을 모두 갖춘 시집들이다. 구로노동자문학회 출신인 김사이의 『반성하다 그만둔 날』은 노동시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성과를 남겼다. 

이 외에도 조경란의 『혀』를 둘러싸고 진행된 표절공방, 소설가 이청준, 박경리, 홍성원의 작고는 2008년 한국문학을 기억함에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사건들이다. 연말을 맞이하여 많은 매체들이 문학계의 일 년을 회고하는 기사와 특집들을 쏟아내고 있고, 그 기사들 속에서 한국문학은 여전히 성장세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렇지만 몇몇 작가와 출판사에 집중된 ‘성장’이란 다른 측면에서 보면 한국문학의 취약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는지 조심스럽게 자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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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3 14:55

그렇습니다, 박민규입니다

소설가 박민규, YES24 블로그에 소설 연재

소설가 박민규가 12월 1일부터 YES24 블로그에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 소설가 박민규가 12월 1일부터 YES24 블로그에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안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눈의 무게로 일그러진 눈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그녀가 갑자기 속삭였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 분명 그녀를 좋아해 / 라는 목소리가 희미한 환청처럼 마음속에서 울려퍼졌다.”

그녀는 못 생겼다. 못 생긴 여자가 주인공인 소설이 또 있었던가 알 수 없지만, 못 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에 관한 소설이 없었던 건 확실하다. 미모가 힘이라는 세사의 기준이 소설에 반영된 까닭인 걸까? 하지만 제 눈에만 예쁜 여자들에 죽고 못 사는 남자들이 주위에 숱하게 눈에 띄지 않던가. 그렇다면 예쁜 여자를 만나 사랑하는 일의 현실적 제약이 너무도 높아 끝내 눈높이에 주문을 걸고 살다보니 이야기 속에서만큼은 못 다한 바람을 이어가고 싶었기 때문일까? 그렇더라도 못 생긴 여자가 사랑 받는 영화는 늘 저렇게 현실성 없는 영화가 어디 있냐며 비난을 받아 오지 않았나. 저런 이야기들 때문에 여자들이 허황된 꿈만 꾼다는 식의 염려와 함께.

못 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12월 1일부터 인터넷 서점 YES24 블로그에서 연재되는 박민규의 소설이다. 현재까지 진행된 내용으로 보면 못 생긴 여자가 사랑을 받는 이야기라기보다는 못 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다. 그런 까닭에 남자가 잘 생겼는지 못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작가의 말 등의 정황을 참작하건대, 이 소설에서 요지는 못 생긴 여자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한 단계 깊어진 자성으로 시작되었다지만, 현실을 담아내기에 여전히 소설이란 형식은 힘에 부쳐 보인다.

매주 쏟아져 나오는 책의 양을 보면 출판계가 불황이라는 말도 지금은 전시 중이라는 빅브라더의 선전 방송처럼 들린다. 그렇기에 소설의 블로그 연재가 종이 책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새로운 시도인지, 종이 책으로 나왔을 때의 시장성을 타진하기 위한 수단인지, 혹은 이미 종이 책을 염두에 두고 출간되었을 때 광고 효과를 높이기 위해선지 판단하기 어렵다.

박범신, 황석영, 정이현, 공지영, 이기호로 이어지는 블로그 연재에 박민규가 참여한 것은 당연한 수순처럼 보인다. 어쩌면 박민규야말로 이 대열의 선두에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은하영웅에서 추억의 야구 팀, 대륙간 이동 오리배, 인류의 운명을 건 탁구시합, 비교적 근작에서 보인 수천 년을 살아온 절세무공의 최후 등의 소재를 일별해 봐도 그렇지만 글자 크기와 행간을 달리하며, 때로는 직접 그린 삽화를 싣는 등 그가 보여 준 소설적 실험들은 초창기 성석제가 보여준 이야기 실험 못지않았다.

여기에 재미있다, 기대된다는 상투적 댓글부터 글자체와 크기를 바꿔라, 배경음악은 누구의 것이냐는 등 이야기와 상관없는 댓글까지 한 페이지에 있으니, 작품에 대한 반응 형식이 바뀐 상황을 작가가 어떻게 끌고 갈지도 사뭇 기대된다. 게다가 평소 다방면에 걸친 관심을 가져온 작가가 그 소재들을 굳이 이야기화하지 않아도 되는 인터넷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지도 궁금하다.

외모에서 사랑이 시작되는 세상의 시시함에 대한 이야기가 단순히 세상은 이토록 시시하다는 토로에서 끝나지 않고 변화된 형식과 어울려 사랑에 빠지는 새로운 국면을 창조해냈으면 하고 바라본다. 이 소설은 12월 1일부터 매주 오전 10시에 업데이트된다.

 
                                                                                                         
                                                                                                           이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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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1 17:59

문학이 무엇인지 묻는 방식에 관하여

계간 『창작과비평』, 『문학동네』 2008년 겨울호


계간 『문학동네』 겨울호(통권 57호).
▲ 계간 『문학동네』 겨울호(통권 57호).

문학개론서들 안에서 ‘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전개과정이 어떻든 대개 시란 무엇인가, 소설이란 무엇인가의 물음으로 집약된다. 질문을 던지거나 이러한 질문에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이 문학 관련 종사자들뿐이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안에는, 삶의 다른 분야와의 관계 속에서 문학이란 것이 어떤 위치에 있느냐 하는 그 외부적 모습에 관한 물음도 분명 들어 있다.

『창작과 비평』 겨울호와 『문학동네』 겨울호에서는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답을 찾아가고 있다. 『창작과 비평』은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고 『문학동네』는 「이것은 문학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과의 대담을 싣고 있다.

백낙청은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에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관념적인 논의로 흐르지 않으려면 개별 작품에 대한 개별 독자의 반응을 토대로 그 물음을 진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글은 기존 문학평론의 전개 방식대로 질문을 던지고 구체적인 작품을 토대로 대답해 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와 달리 김종철은 삶의 근원적 문제를 생각하는 것을 문학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는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는 톨스토이가 자신의 작품마저 부정한 사례를 들면서 “풀뿌리 민중의 삶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얻은 부르주아 시대의 예술작품이라면 아무리 그것이 뛰어난 것이라 하더라도 구체적인 민중생활에 관련해서는 그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느냐 …… 이런 식으로 근원적인 질문을 하지 않고는” 작가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선 이 두 글은 형식에서 차이가 있다. 「이것은 문학이 아니다」는 활자화되어 있긴 하지만 좌담을 정리한 것이므로 그 본래적 모습은 ‘말’이다.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은 두말 할 것 없이 ‘글’이다. 형식의 차이가 내용의 차이를 규정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이 두 글은 내용면에서도 비교가 된다.

백낙청은 소설이 어떻게 씌어야 하는가를 해명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답해간다. 반면 김종철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해명함으로써 인간의 삶 안에서 문학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힌다. 백낙청이 글-자성을 밀착시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하고 있다면 김종철은 말-몸이 밀착시켜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현실 문제에 있어서도 이 두 글은 다른 자세를 취한다. 백낙청은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것이 세계체제의 변혁 안에서 “현존 자본주의 세계질서에 대한 적응과 그 극복의 이중과제”를 수행하는 것이라며 과제를 제시한다. 반면 김종철은 “근대적응과 극복이라는 이중과제의 동시적 수행 … 그렇게 말할 때 통일운동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고 물으며 녹색평론이 처음 시작한 북한에 쌀 보내기 운동과 녹색평론 독자모임이 각 지역에서 자립적 공동체를 구성하여 공생의 삶을 추구하는 것 역시 중요한 통일운동이라고 말한다.

문학이 무엇인가의 물음은 일차적으로 문학에 대한 관심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이 물음은 문학 작품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하지만 끊임없이 주린 배를 채워야만 하는 인간적 숙명 안에서 문학이란 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는 방식은 문학보다 생활에 관심을 더 두고 있다. 백낙청의 방식대로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시작하여 세상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갈 것인가, 김종철의 방식대로 삶의 근원적인 물음을 통해 이야기를 재생시킬 것인가. 두 방식이 결국 같은 해답에 도달하리라는 낙관적 전망만 보장된다면, 자명한 것은 치열하게 질문에 답해가는 과정에 몸을 던지는 게 아닐까.


                                                                                                        이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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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1 12:01

변화하는 세계와 동유럽 문화

작가회의가 2007년 '아시아-아프리카 문학페스티벌'과 공동으로 주최한 행사 모습
▲ 작가회의가 2007년 '아시아-아프리카 문학페스티벌'과 공동으로 주최한 행사 모습

한국작가회의는 12월 2일부터 7일까지 동유럽작가 3명을 초청하여 ‘세계작가와의 대화’를 개최한다. ‘세계작가와의 대화’는 1997년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 초청 강연을 시작으로 2007년 아시아-아프리카 문학축전 조직위원회와 공동으로 개최한 문학행사에 이르기까지 외국의 저명한 문인들을 초청하여 한국문학의 시야를 한층 넓히는 동시에 한국문학을 해외에 소개하는 역할을 해 왔다.

이번 행사는 ‘변화하는 세계를 문학은 어떻게 보는가 - 21C 세계 변화와 동유럽문화’를 주제로 한국 독자들에게 다소 낯선 우크라이나 소설가 안드레이 쿠르코프, 폴란드의 문학평론가 요안나 올레흐, 러시아 소설가 블라디미르 소로낀을 초청하여 심포지엄과 문학공연을 갖는다.

저널리스트, 영화 촬영기사, 시나리오 작가, 소설가, 수필가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안드레이 쿠르코프는 1991년 소설 「켄가락으로 날 데려가지 말아주오」를 시작으로 14편의 소설책을 발간하였으며, 세계 32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한국에도 그의 작품『펭귄의 우울』(솔, 2006)이 출간되어 있다.

폴란드에서 가장 권위 있는 어린이 문학상인 코르넬 마쿠쉰스키 상을 수상하며 작가로도 명성을 쌓고 있는 요안나 올레흐는 작가활동과 문학 비평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소로낀은 현재 러시아 문단에서 가장 논쟁적인 작가로 평가 받는다.

12월 3일 오후 1시 서울대 신양정보관에서 열릴 심포지엄에서는 ‘21C와 동유럽 문화’라는 주제로 초청 작가들의 발제와 한국 소설가 정찬, 이나미가 참여한 토론이 이어진다. 12월 5일 오후 7시 다원예술매개공간에서 열릴 ‘동유럽 문학의 밤’ 문학공연에서는 세 작가가 모국어로 자신들의 작품을 낭송하는 시간과 함께 한국 전통음악 공연과 테너 임정현 씨의 노래가 준비되어 있다.

관심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행사에 참여할 수 있으며 참가비는 무료이다. 행사 관련 자세한 문의 사항은 한국작가회의(02-313-1486)로 하면 된다.




이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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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4 10:18

정지된 시간 속의 책읽기

[신간소개]르 클레지오, 『오로라의 집』
2008-10-22 오후 4:41:26    이주호 기자

르 클레지오, 조남선 역, 『오로라의 집』, 뿔, 2008.
▲ 르 클레지오, 조남선 역, 『오로라의 집』, 뿔, 2008.

의례히 노벨상을 수상하면 책도 많이 팔리겠거니 생각해 왔지만, 르 클레지오의 수상 소식을 접하며 올해는 예외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의 장편소설『조서』는 책 읽기의 쓴 맛을 톡톡히 보게 하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난해한 기법이 난해한 채로 드러나기에 내가 지금 무얼 읽고 있는 건가 혼란스럽고 그의 지적 수준은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경지였으며, 번역가가 문장을 충분히 이해했다면 이런 억지스런 문장은 나오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게 하는 소설이었다.

노벨상을 달고 다시 발매된 르 클레지오의 소설들 중에서 『오로라의 집』을 택한 것은 단연코 힘든 독서 과정 때문이었다. 이 책은 131쪽에 불과하고, 페이지 당 글자 수도 많지 않다. 단편소설 두 개를 단행본으로 엮은, 대 놓고 장삿속을 드러내지 않고서야 이토록 뻔뻔하게 만들기도 어려운 책이다. 그러나 책의 분량과 독서 시간은 비례하지 않는다. 르 클레지오의 소설은 출판사에서 흔전만전 시상하는 문학상 수상작 속의 시간과 같을 수 없다. 르 클레지오의 소설 속 시간은 너무도 천천히 흐르고 때로는 아예 멈춰 버린다.

“오늘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 단번에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을 전부 지워버렸고, 예전의 느낌과 현재의 느낌이 만나지 못하도록 하는 어떤 공백, 훼손, 갈 곳 잃은 답답한 거북함과 고통스런 느낌만을 남겨 놓았다.”

이 문장은 개발로 인해 변해가는 옛 동네를 묘사한 문장이지만, 외부 세계에 대한 묘사가 없다. 수사도 없고 감성을 자극하는 단어도 없다. 하지만 이 문장은 분명 외부 세계를 적합하게 묘사하고 있고, 동시에 추억에 대한 감수성을 자극한다. 이런 문장들이 연결되며 책 전체를 끌어간다. 사건은 진행되지만 독서는 정지된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독서가 행위가 아니라 상태가 되면 문장의 시각적인 깊이에 깜빡 정신을 놓기도 하지만, 어느 때부터는 책읽기가 힘겨워진다.

오로라의 집은 주인공 에스테브가 기억하는 첫 번째 집이자 처음으로 본 신비로운 집이다. 그 집은 놀이터이자 공포를 자극하는 장소이자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 다른 차원으로 데려다 줄 문과 같은 곳이다. 그러나 에스테브는 어느 순간 자신의 전부일 것만 같았던 그 집에 아무런 흥미를 갖지 못한다. 그것은 점진적인 변화가 아니라 한 순간의 각성이었다.

“내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모두들 알 것이다. 평범한 대화의 주제, 텅 빈 공허한 주제”

자신이 성장했다고 느끼는 순간 에스테브는 자신 안에서 사라진 반쪽을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사라진 것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에 오로라의 집으로 향하는 언덕을 오른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단순한 상실과 향수의 이야기가 아니다. 공간과 의식은 너무도 긴밀하게 맞닿아 있어서 ‘인간성 회복’ 유의 교훈적 가치로 마무리될 수 없다. 회복은 불가능하다. 현실의 겉모습이 바뀌는데 오로라의 집만 예전 그 모습일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이미 성장했고 반쪽을 잃었으며, 떠나간 반쪽은 기억도 함께 가져가 버렸다.

내게 있어 르 클레지오는 이 정도 두께가 적당하다는 것을 절감하며 책을 덮는다. 하지만  전해진 감성의 깊이는 몇 권의 책을 읽은 것 같다. 이래저래 한국과의 인연이 깊어 수상 소감에서도 한국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던데, 이 책을 인연으로 르 클레지오와의 인연이 깊어지는 독자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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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4 14:51

[장르문학 산책]모험 증발한 시대에 꾸는, 위대한 백일몽 - 장르 판타지

판타지가 보여준 압도적인 대중성은 기성세대의 문화에 대한 반문화이며 엘리트주의적 고급문화에 대한 불신과 저항의 표현이기도 하다.
▲ 판타지가 보여준 압도적인 대중성은 기성세대의 문화에 대한 반문화이며 엘리트주의적 고급문화에 대한 불신과 저항의 표현이기도 하다.

판타지(Fantasy)는 ‘환상’이 아니다. 판타지는 더 이상 새로운 비평적 의제도, 독자들의 관심사도 아니다. 그것은 이제 ‘현실’ 혹은 ‘일상’이다. 문학 · 드라마 · 영화 · 광고 · 게임 등 다양한 형태로 그것은 이미 우리의 일상 속으로 깊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신화 · 종교설화 · 동화 · 고딕소설 · 전위적 실험 등의 형태로 존재하던 판타지를 장르문학으로 호출한 자는 톨킨(J. R. R. Tolkien)이 아니라 바로 권태와 첨단 테크놀로지들이다. <반지의 제왕> · <해리포터> · <나니아 연대기>처럼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 영화들 그리고 <리니지> · <월드 오드 워크래프트>같은 MMORPG의 전세계적 열풍이 보여주고 있듯, 합리주의와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신화적이고 주술적인 것들의 귀환이 더욱 촉진되는 역설이 발생”하곤 한다. 현대의 마술인 기술이 고도화한 현대 사회에서 이것은 대단히 자연스런 현상이다.

판타지는 이렇듯, 자연적 · 물리학적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것을 가능하게 하는 현대마술인 기술로 인해 삽시간에 현실화되고 대중화될 수 있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목격하는 초자연적이고 비현실적인 환상이 현실로 존재하는 첨단기술과 과학의 산물이었다는 점에서 판타지의 귀환과 유행은 일종의 역설이다.

판타지가 역설의 장르라는 두 번째 증거는 그것이 유통되고 소비되는 양태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판타지를 즐기거나 읽는 중심축이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젊은 세대들인데, 판타지 게임과 영화의 매력에 흠뻑 매료된 이들이 그 연장선상에서 원작이 되는 문학텍스트들을 찾아 읽는 전도된 수용의 패턴이 나타나고 있다. 소설에서 영화로 또 게임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멀티미디어가 구축(驅逐)한 문학 독자들이 그 멀티미디어로 인해 다시 문학으로 귀환하는 이 어리둥절한 반가움,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역설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판타지에서 읽고 또 보고 싶은 것은 세 번째의 역설이다.

어의(語義)대로 판타지는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초자연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장르문학의 일종이다. 환상으로서 판타지는 문학과 예술에 내재되어 있는 속성 혹은 구성요소―즉 신화 · 전설 · 민담 · 전기소설 · 초현실주의 계열의 작품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문화사와 문학사 속에 편재해 있었다. 그러한 판타지가 장르판타지로 자리매김하게 된 데에는 우선 톨킨의 책임(?)이 크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언어학과 신화학을 가르치던 그의『반지의 제왕』3부작과 『호빗』(1937) ·『실마릴리온』이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수많은 에피고넨 텍스트들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MMORPG(다중 사용자 온라인 역할 놀이 게임)의 기원이 된 TRPG(테이블 역할 놀이 게임)의 원천 소스이기도 했고, 또 국내 장르 판타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미즈노 료(水野 良)의 『로도스도(島) 전기(戰記)』(1988)의 교과서이며 원본이 바로 그의 판타지 시리즈들이었다. 때마침 모뎀을 바탕으로 한 케텔 · 하이텔 · 천리안 등의 PC통신 사업체들이 상업적인 서비스를 시작하던 시기이기도 해서 장르판타지는 삽시간에 청(소)년 문화로 자리를 잡았고, 아마추어 작가들을 양산해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가 장르 판타지에서 발생하기를 기대하는 세 번째의 역설의 근거는 여기에 있다. 즉 판타지가 아버지의 세계를 극복함으로써 새로운 문명사적 전환을 이루었던 젊은 아들들의 문화라는 점이고, 이들로 하여 모험이 증발하고 권태롭기만 한 현실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과 바깥을 즐기고 사유하도록 하는 상상력의 훈련장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새로운 문명 혹은 문화가 아버지의 문화를 부정한 사생아들에 의해 이룩되었다는 문화인류학적 명제와 근대소설이론의 설명은 좋은 예이다.

전공투(全共鬪)의 몰락과 함께 찾아온 좌절과 절망을 <기동전사 건담> 같은 애니메이션과 판타지게임을 통해서 해소하고자 했던 일본의 좌파 청년들이 결국엔 현실과 장벽을 쌓고 인공의 낙원 속으로 도피해 버리는 오타쿠(お宅)로 침몰해 버리는 심각한 부작용도 없지 않았지만, 이들에 의해 새로운 상상과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지지 않았던가. 비록 판타지가 자본과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의 도피욕망에 의해 추동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보여준 압도적인 대중성은 다른 한편에서 기성세대의 문화에 대한 반문화이며 엘리트주의적 고급문화에 대한 불신과 저항의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장르판타지의 가치와 의미는 여기에 있다. 우리의 문화사적 과제란 바로 이런 젊은이들의 갈증과 열망과 저항을 현실변혁의 새로운 동력으로 흡수하여 양육할 수 있는 위대한 백일몽, 요컨대 이를 진정하고 새로운 진보의 세기를 열어가려는 꿈과 의지로 발전시키는 일이다.

혹시 아는가, 부모를 잃고 이모네 집 다락방에 얹혀사는 구박덩어리 고아소년이 볼드모트의 사악한 기도에 맞서 마법의 세계를 지켜내는 영웅으로 거듭 난 것처럼 또 연약하고 평범한 호빗이 세계를 구원하는 영웅이 되어 귀환했던 것처럼 판타지 소설을 읽고 온라인 게임에 열중하는 이웃집 게으름뱅이 게이머가 새로운 진보의 세기를 밝히는 촛불이 될지…. 실제로 현대의 장르판타지는 김영도의『드래곤라자』나 김민영의『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후일『팔란티어』로 개칭됨) 등에서 이미 가능성을 입증해 보였고, 길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의 걸작 영화「판의 미로(Pan's Labyrinth)」에서는 새로운 예술적 지평과 정치적 상상력에 도달하기도 했으니, 이 같은 기대가 결코 근거 없는 헛된 백일몽(phantasy)은 아닐 것이다. 이제 우리를 열광시킬 세 번째의 역설인 진짜배기 위대한 ‘판타지’를 언젠가는 기어코, 만나고야 말 것이다.

 



* 2008-09-10 오후 5:18:43  조성면 _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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