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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22 야생마 이상훈, 이제는 뜨거운 기타리스트
  2. 2009.03.05 시베리안허스키, 우리가 느낀 밴드란 이런 것이다
  3. 2009.02.17 서울 가려 했으면 진작에 갔다 (7)
2009.04.22 09:34

야생마 이상훈, 이제는 뜨거운 기타리스트

▲ "특별한 꿈은 없다. 그냥 지금처럼 하는 것이 꿈이라면 꿈이다. 앨범을 내고, 공연을 하고…."

몇 해 전, 야구계를 주름 잡았던 LG트윈스의 Closer, 야생마 이상훈이 홀연 은퇴를 했다. 하지만 이걸로 놀라기엔 아직 이르다는 듯 곧이어 그가 야구공 대신 기타를 잡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리고 밴드 ‘What’이 결성은 놀람의 결정타였다.

나와 함께 A-frica에서 함께 활동하였던 베이시스트 장민규가 What의 멤버가 되었고, 어렸을 때부터 존경해 마지않던 시나위 출신의 드러머 신동현이 What의 안방마님으로 들어앉았다. What은 결성부터가 이슈였다. 내가 A-firca에서 활동했을 때, 이상훈이 우리밴드의 세컨 기타로 참여한 적이 있다. 지난 2007년, A-firca가 LA Guns의 내한공연의 오프닝 공연을 했을 때도 이상훈은 A-frica에서 기타를 연주했다. 그때 느꼈던 것이 ‘이제는 야구인 이상훈이 아닌, 음악인 이상훈이 되었구나.’였다.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Closer 47시절만큼이나 뜨거웠다. 프로야구선수 출신 이상훈, 시나위 출신 신동현 이라는 수식어는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이미 그들은 오직 “What”이라는 이름으로 그들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했다. 꼬리표처럼 달고 다녔던 지난 수식어들을 떨쳐버린 “What”과 그 중심에 서있는 뮤지션 이상훈을 만나기 위해 홍대에 위치한 연습실을 찾았다.


요즘 밴드활동에 미용실 사업에, 거기다가 이상훈의 <네버 엔딩 스토리>라는 인터뷰까지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너무 바쁘게 사는 거 아닌가?

(이상훈 / 기타&보컬 / 기타) 요즘은 멤버들과 함께 곡 작업에 매진중이다. 대신 공연을 많이 줄였다. 얼마 전에 부산에서 공연을 하고 왔는데, 그것은 그 전부터 잡혀있던 거라 어쩔 수 없었다. 지금 같은 경우는 일부러 공연을 잡아서 하고 있지는 않다. 주말마다 정기적으로 했던 클럽공연도 줄였다.

야구선수 이상훈의 밴드가 아닌, 록 밴드 What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한다. 간단히 소개를 해 달라.

(이상훈) 뭐 그냥 록 밴드다.(웃음) 다른 밴드들처럼 공연을 하고 앨범을 내고 좋아하는 음악을 하는 록밴드이다. 앨범은 EP 1장과 정규앨범 1집, 2집 이렇게 총 3장을 발매했다.

이상훈은 야구 현역시절부터 수많은 인터뷰를 했는데, 하지만 이번 인터뷰에서는 뮤지션 이상훈에 대해 많이 알고 싶다. 처음에 어떻게 기타를 치기 시작했는가?

(이상훈) 내가 고려대학교 재학시절 힘든 시기가 있었다. 그때 팀에서 이탈을 해서 방황을 했는데 공사현장의 일용직 노동도 해봤고, 나이트클럽에서도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거기에서 나와 함께 먹고 자고 하는 웨이터가 한 명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아이가 기타를 연주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훌륭한 연주는 아니었는데, 당시에는 ‘와~ 이게 뭐지?’ 하는 충격을 받았다. 그때부터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야구만이 이상훈의 전부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원래 음악에 관심이 있었는가?

(이상훈) 물론이다. 그전에도 음악을 굉장히 좋아했었다. 하지만 악기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그러다가 기타연주에 대한 관심이 생기면서 그때부터 혼자 책을 보며 기타연습을 하기도 하고, 이리저리 정식으로 배우러 다니기도 했다. 밴드를 하게 되면서 다른 팀들의 연주를 보기도 하고, 좋아하는 기타리스트들의 연주도 보면서 많이 배웠다.

존경하는 기타리스트가 있는가?

(이상훈) 존경하는 것은 아닌데 좋아하는 기타리스트들은 많다. 슬래쉬(건스 앤 로지즈), 잭 와일드(오지 오스번 밴드), 덕 앨드리치(배드 문 라이징)를 좋아한다. 지미 헨드릭스도 좋아하지만 슬래쉬, 잭 와일드가 더 와 닿는다.

What은 어떻게 결성되었는가?

(이상훈) 드러머 신동현이 야구를 무척 좋아해서 그전부터 나와 알고 지내고 있었다. 사실 그때부터 What이라는 밴드를 했었다. 2002년에 시즌 끝나고 팬 미팅할 때도 동현이와 함께 밴드를 했었다.

그런데 언론에는 What의 존재가 2004년도 즈음 공개가 되었는데.

(이상훈) 2004년에는 우리가 단지 앨범을 발매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앨범을 홍보하려고 언론에 알린 것은 아닌데, 기자들이 알아서 기사화시켰다.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홍보를 안 한다는 걸. (웃음) 우리는 라이브가 홍보다.

초창기 What의 음악적 기반은 어떻게 잡았는가?

(이상훈) 우리가 초도를 잡을 때, 외국의 어떤 밴드를 모델로 잡고 시작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런 음악을 많이 듣기는 하지만, 우리가 한다고 해서 그런 음악이 나오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냥 우리에게 어울리는 음악, 할 수 있는 음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What의 앨범 3장에는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음악도 있다. 하지만 앨범을 내면서 점점 더 ‘우리화’되어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로 가득 채워져 가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좀 민감한 질문이 될 수도 있겠다. 이상훈도 물론 기타는 20대 초반부터 잡았지만, 나머지 멤버들은 평생 음악만을 하던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로 드러머 신동현은 Zero-G, 시나위 등에서 활동할 때부터 나에게 영웅과 같았던 뮤지션이다. 이렇게 국내에서 내로라는 최고의 뮤지션들과 음악을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지는 않는가?

(이상훈) 부담이라기보다는 그들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을 해봤다. 내가 30대 중반이 되어서 평생 음악만 하던 동현이에게 ‘나와 같이 밴드를 하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동현이에게 ‘내가 너하고 밴드를 같이 해도 되냐?’라고 조심스럽게 물었었다. 그때 동현이가 ‘음악, 뭐 같이 하면 되지’라고 대답을 했고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신동현의 입장도 많이 고려했었다. 평생 음악만 하던 신동현이 야구선수 이상훈과 음악을 한다고 하면 동현이 주변사람들이 색안경을 끼고 보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What이라는 밴드가 존재하고 있는 자체가 그러한 편견을 지워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추구하는 음악적 욕심이 있어서 시작을 한 것 이었나? 하드록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만든 것인가?

(이상훈) 아니다. 하드록이든, 팝메탈, 심지어 데스메탈까지 어떻게든 갖다 붙이면 장르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드록이라고 규정짓지는 않고 싶다. 물론 그렇게 불러주면 어쩔 수 없지만, 우리는 단지 밴드 What이 할 수 있는 음악을 하는 것이다. 누군가 물으면 그냥 ‘밴드 What이 하는 음악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대중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대에 서있는 뮤지션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만들면 대중들이 좋아하겠다.’라는 생각은 그 다음에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이러다보면 우리를 좋아하는 팬들이 생기고, 반면에 싫어하는 사람도 생기는 것이다.

곡 작업을 할 때는 누가 주도적으로 하는가? 작곡에 참여를 하기도 하는가?

(이상훈) 저작권 등록할 때 이름 올리는 것은 수익 때문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다. (웃음) 사실 저작권이라는 규제가 없으면 그냥 What의 이름으로 올리고 싶다. 곡 작업을 할 때도 특별히 작곡이라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냥 기타를 치다가 좋은 리프가 나오면 멤버들끼리 모여서 거기에다 살을 붙이고, 그 다음 MR을 제작한다.

멜로디 라인은 본인이 직접 만드는가?

(이상훈) 내가 보컬이다 보니 MR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그냥 들으면서 흥얼거린다. 그러면서 가사를 적는다. 그리고 일단 녹음을 하는데 입에 달라붙는 가사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 아닌 경우에는 녹음 도중이라도 가사를 바꿔버린다. 그러다보면 완성이 된다. (웃음) 완벽하게 틀을 잡아놓고 녹음하지는 않는다. 물론 80%정도는 기반을 잡아놓지만, 마지막 보컬녹음을 할 때는 변수가 많이 생긴다. 그래서 조금씩 수정을 하면서 곡을 완성시킨다.

삶에 있어 음악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가? 미용 사업에 야구인으로서, 그리고 뮤지션으로서. 음악을 단순히 취미라고 생각한다면 다른 멤버들에게 미안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상훈) 어떤 사람이든지 여길 가면 이것을 열심히 해야 하고, 저길 가면 저것을 열심히 해야 한다. 이것을 하는데 저걸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뮤지션으로 불리고 싶다, 사업가로 불리고 싶다, 프로야구선수로 불리고 싶다’ 이런 것이 없다. 물론 사람들은 나를 뮤지션으로도 얘기를 안 하고, 사업가로 부르지 않는다. 사람들은 아직도 나를 ‘이상훈, 저 사람 야구선수였잖아. LG트윈스. 왼손잡이’라 부른다. 언제까지 그렇게 부를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인식이 그러한데 난들 어떡하겠는가. 단지 사업을 할 때는 비즈니스를 열심히 하는 것이고, 기타를 치거나 무대 위에 있을 때는 뮤지션의 마인드로 살고 싶다.

결성 당시부터 매스컴으로부터의 관심을 받았다. 야구선수라는 꼬리표가 음악을 하는데 불편하지는 않았는가? 공연장을 찾아온 팬이 What의 음악보다 LG트윈스의 팬이었다고 말하면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상훈)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다. (웃음) 그 사람이 그렇게 부르는데 내가 어떡하겠는가. 날더러 야구선수라고 하는데 그 앞에서 ‘나는 지금 뮤지션이다.’라고 하는 것도 웃기지 않는가? 오히려 나에 대한 기억을 가져준다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반대로 지금의 나를 보며 ‘뮤지션이 다 되었다’, ‘사업가가 다 됐네.’ 이렇게 불러주는 사람도 있다.

아프리카의 정현규는 이상훈을 일컬어 화려한 테크니션은 아니지만, 뜨거운 플레이를 하는 기타리스트라고 했다. 본인은 스스로 어떤 기타리스트, 어떤 보컬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상훈) (웃음) 아휴~ 내가 무슨 기타리스트인가. 그리고 나는 보컬도 아니다. 그냥 기타가 좋아서 치는 거다. 노래를 하기 위해 음악을 한 것은 아닌데, 그래도 우리 팀에서는 내가 노래를 가장 잘한다. (웃음) 우리 팀이 하는 음악에 내 목소리가 가장 어울려서 보컬을 한 것이지 특별한 것은 없다. 솔직히 노래연습은 합주할 때나 하고, 평소에는 기타연습에 더 비중을 둔다.

방송출연을 많이 하지 않던데, What의 공연은 어디에서 볼 수 있는가? 행사공연도 많이 하는 편인가?

(이상훈) 방송섭외는 안 들어오더라. (웃음) 그러나 방송이든 뭐든 라이브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공연을 하는 편이다. 행사공연 또한 잘 안 들어온다. 홍보를 안 해서. (웃음) 우리는 클럽공연을 주로 한다.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인천, 광주, 청주 등 각 지역 클럽은 모두 다녔다. 사실 이러한 라이브무대가 홍보가 아닌가.

팬 층은 주로 어떠한가?

(이상훈) 팬들이 없다. (웃음) 3명이랑 공연을 한 적도 있고, 30명과도 한 적이 있다. 이런 것은 다른 밴드도 비슷하지 않은가.

뮤지션 이상훈으로 꿈이 있다면?

(이상훈) 특별한 것은 없다. 그냥 지금처럼 하는 것이 꿈이라면 꿈이다. 앨범을 내고, 공연을 하고…. 새로운 앨범에 대한 욕심이 있기에 우리는 더욱 성숙해지리라 믿는다. 음악활동을 하면서 좋은 일이 있을 수도 있고, 사람들이 알아주면 더욱 고마울 뿐이다. 사람들이 우릴 알아주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처음에 내뱉었던 말을 지켜가면서 열심히 하고 있다.

록 마니아들에게 어떠한 밴드로 기억되고 싶은가?

(이상훈) 그냥 변질되지 않고 열심히 꾸준하게 음악을 하는 밴드, 그렇게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마음 같아서는 환갑이 넘어서도 외국의 훌륭한 밴드들처럼 앨범을 내고, 순회공연을 다니며 그렇게 살고 싶다. 사실 다른 밴드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환경이 열악하니깐 그렇게 하고 싶어도 쉽지가 않다. 현재 곡 작업을 하고 있고 녹음도 진행 중이라 7~8월이면 새 앨범을 선보일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기대를 해도 좋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어느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지 않아 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미 자신의 인생에서 전설의 반열에 올랐던 사람이지만 뮤지션 이상훈의 열정은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음악이라는 제 2의 삶, 나아가 사업가의 삶 앞에서 여전히 청춘인 이상훈, 그의 삶 자체가 음악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뜨거운 기타리스트’ 이상훈이 각인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설레는 마음으로 달려온 록의 하이웨이의 톨게이트가 저만치 보인다. 록의 불모지에서 20여 년간 ‘Metal Will Never Die’를 외치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밴드, 살아있는 한국 헤비메탈의 신화, 밴드계의 큰형님. 어떤 수많은 수식어를 붙여도 그들을 표현하는 데 모자람을 느낀다. 마지막으로 만날 밴드는 내가 음악을 하면서 가장 많은 가르침을 받은 ‘블랙홀’이다. 한국 헤비메탈의 토대를 구축한 밴드 ‘블랙홀’, 하이웨이 스타의 대미라면 이 정도쯤 돼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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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5 12:54

시베리안허스키, 우리가 느낀 밴드란 이런 것이다

[강종택의 하이웨이스타] ② 시베리안허스키
펑크 밴드 시베리안허스키.
▲ 펑크 밴드 시베리안허스키.

2002년으로 기억된다. 평소 존경하던 전설적인 밴드, ‘송골매’의 헌정앨범이 후배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그러나 너무 많은 기대를 해서인지 막상 앨범을 접하고 나서는 별로 큰 감흥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처음 본 순간>, <한줄기 빛>, <모두 다 사랑하리>는 확연히 귀에 들어온 곡들이었다. <한줄기 빛>은 A-frica가 작업을 한 것이었고, <처음 본 순간>, <모두 사랑하리>는 한 팀이 맡았는데, 바로 시베리안허스키였다. 1년에도 수많은 밴드가 생겼다가 사라지는 홍대 앞에서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자신만의 음악을 고수하며 열정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시베리안허스키를 하이웨이스타 인터뷰 연재의 두 번째 순서로 만났다.

1년 만에 보는 것 같다. 예전 멤버(드럼, 베이스)는 없고 기타와 보컬 두 명뿐이다.

(유수연 / 보컬) 멤버문제로 더 이상 고생하고 싶지 않다.(웃음) 그냥 편한 마음으로 다음 앨범을 준비하면서 시베리안허스키 제 2기의 콘셉트에 대해 구상중이다. 멤버가 2명이라고 해서 특별히 걱정은 하지 않는다.

음반시장이 침체되어 있지만 밴드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앨범을 내고 있다. 얼마 전 아프리카도 새 앨범을 냈다. 하지만 메이저 가수들은 이제 디지털 앨범만을 내고 있는 실정이다. 시베리안허스키에게 있어서 앨범작업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용운 / 기타) : 음반시장이 불황인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앨범을 발매하는 이유는 팔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니아 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손에 잡히는 앨범을 소장하기 원한다. 우리는 그들을 충족시켜줄 필요가 있다. 디지털앨범이 아니라 CD형태의 앨범을 발매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니아마저도 잃게 된다. 그들에 대한 일종의 배려라고 보면 된다. 물론 그뿐 아니라 오프라인에서 홍보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유수연) : 비록 많이 팔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경제적인 부분이 필요하긴 하다. 다시 말해 앨범을 찾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발매를 하는 것이다. 물론 디지털앨범처럼 편하게 한곡씩 내는 것이 금전적으로 부담이 되지 않기 때문에 수월할 수는 있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그 만큼 음악도 쉽게 만들 수밖에 없다. 이 같은 현상은 음반시장을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은 음악에 대한 진지성을 저하시킬 수도 있다. ‘한곡 발표해 놓고 안되면 말자’라는 생각은 음반시장의 침체에 악순환을 불러온다. 우리와 더불어 뮤지션들이 음반발매에 대해 ‘음악에 대한 순수성을 가지고 작품집을 발표하는 것이다’는 생각을 한다면 향후 우리의 음반시장에 굉장한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이번 음반에 대해 몇 가지 질문하겠다. <첫 번째 사랑>을 듣고 많이 놀랐다. 기존의 시베리안허스키 음악과는 전혀 달랐다. 드럼은 미디로 작업한 것 같다. 명색이 록밴드인데 이러한 시도를 한 이유는 무엇인가?

(유수연) : 시베리안허스키를 록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좀 그렇다. 록을 해야지 하면서 록적인 노래를 만들지는 않았다. 우리는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했을 뿐이다. <첫 번째 사랑>은 다른 시도를 해보고자 한 거다. 미디로 녹음을 했다는 것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우리는 라이브를 할 때도 이곡을 연주한다. 다른 뮤지션들도 어쿠스틱 드럼으로 녹음을 하는 것보다 미디나 전자드럼으로 작업하는 경우가 많다. 뉘앙스가 다르기 때문에 뭐가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용운) : 록의 정의를 누구도 내릴 수 없다. 예전에는 디스토션 기타 유무에 따라 록을 정의했다.(웃음)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비트가 강하면 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음악에 안무를 곁들이면 댄스가 되는 거다. <첫 번째 사랑>은 기타와 보컬을 빼고는 미디로 작업을 한 실험적인 곡이다. 우리는 특별하게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2002년 송골매 헌정앨범에서 <처음 본 순간>과 <모두 사랑하리>를 리메이크했다. 그 곡을 들으면서 원곡을 보존하면서도 밴드의 색깔을 잘 보여줬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리메이크를 할 때는 원곡을 훼손시키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번앨범에도 송골매의 <오늘따라>를 실었는데, 가사만 같고 멜로디 라인이 전혀 다르다. 이러한 것도 리메이크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가사만 가지고 왔다고 생각하는가?

(유수연) : 원래 <오늘따라>를 송골매 헌정앨범에 담으려고 했지만, 사정상 다른 곡으로 참가했다. 하지만 공연 때는 종종 연주를 했다. 그러다가 음원을 구하고 싶다는 팬들이 많아서 이번 앨범에 실었다. 리메이크를 하면서 가사도 좀 바뀌었고, 첨부된 것도 있다. 귀로 듣고 가사를 땄기 때문에 ‘활짝 웃는’이 ‘살짝 웃는’으로 바뀌기도 했다.(웃음) 리메이크에 대해서는 뮤지션들도 의견이 상충된다. 원곡에 충실하면, 리메이크다. 그렇지만 완전 다르게 해석했다고 해도 샘플링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새로 탄생한 거라고 볼 수도 있다. 원곡을 싸구려화시키는 작업이 아니고, 고급스럽게 대중한테 가까이 다가간다면, 그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리메이크를 잘했나 아닌가는 듣는 사람들의 몫이다.

(이용운) : 리메이크된 곡을 듣고 이 음악은 ‘원곡이 OOO라는 것이다’라는 것을 사람들이 느낀다면 그 또한 리메이크라는 범주 안에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결론은 대중이 들었을 때 좋으면 되는 것이다.

시베리안허스키의 훌륭한 카피능력은 그동안 봐와서 알고 있다. 언젠가 공연에서 펑키밴드임에도 불구하고 속주기타리스트의 로망인 곡 Mr. Big의 <Daddy& Brother& Lover Little Boy>를 연주하는 모습을 봤다. 하드록 풍인 그 곡을 디스트가 거의 없는 생톤에 가까운 기타톤으로 연주했었다. 매우 훌륭했고 개인적으로 많은 감탄을 했다. 그러한 것은 모두 의도된 것이었는가? 그렇다면 보통 카피 곡을 편곡할 때는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

(이용운) : 선곡은 거의 유수연 씨가 한다. 밴드에서는 보컬이 표현하는 부분이 절반 이상이다. 그래서 곡을 선정하는 것은 유수연 씨에게 맡긴다.

(유수연) : 카피 곡을 편곡할 때 선곡도 내가 하지만 아이디어도 내가 낼 때가 많다. 그러나 실질적인 섬세한 부분은 이용운 씨가 한다.

좀 무안한 질문이 될 수도 있는데, 시베리안허스키의 창단멤버는 현재 아무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떻게 보면 창단 멤버 없이 현재의 밴드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는 않아 보인다. 밴드명을 바꿔서 새롭게 시작할 생각은 없었는가? 밴드들의 고질적인 문제인 멤버교체가 허스키에게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유수연) : 처음 시베리안허스키가 결성되었을 때는 본격적인 음악작업을 하지 않았다. 보컬이었던 김용이 탈퇴하고 시나위로 간 다음 내가 보컬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팀의 리더가 탈퇴를 하면서 와해됐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시베리안허스키에 모든 열정을 바쳤기 때문에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용운을 영입하고 멤버를 모으고 추슬렀다. 열정적으로 다시 시작하려고 했다. 그때 작업한 곡들이 <도마뱀>을 비롯해, 송골매 헌정앨범의 곡들이었다.

이용운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기타리스트들 중 한명이다. 90년대까지만 해도 테크니컬한 플레이를 중시하였기에 일명 ‘기타선수’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그러한 실력을 갖춘 기타리스트가 많지 않은 것 같다. 나는 김도균(백두산, 외인부대)과 같은 깊은 맛의 피킹을 좋아하는데 요즘은 날리는 피킹을 하는 기타리스트들이 많은 것 같다.

(이용운) : 나는 오히려 예전보다 실력이 좋아졌다고 본다. 요즘은 예전에 비해 기타를 치는 사람의 수가 훨씬 더 많아졌다. UCC같은 곳에서 뽐내기 동영상을 보면 그들의 플레이는 훌륭하다. 음악을 업으로 하는 기타리스트들은 속주플레이 음악을 하기가 현실적으로 힘들다. 그러나 아마추어 기타리스트들은 메탈이나 속주플레이와 같이 자기가 좋아하는 곡을 열심히 연습해서 동영상을 올린다. 그것을 보면 정말 잘 친다는 생각도 많이 한다. 그리고 예전의 속주는 라인 자체가 참 촌스러웠는데, 지금은 오히려 더욱 깔끔한 라인으로 정교하게 연주하는 것 같다.

시베리안허스키 5집 앨범
1. 오늘따라
2. 오늘밤에
3. The Party
4. 저녁동안
5. 첫번째사랑.


예전에는 인디밴드라는 말보다 언더그라운드 밴드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인디밴드라는 것이 거의 일반적인 명칭이 되었다. 처음엔 나도 인디밴드라는 호칭에 자부심을 가졌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인디밴드라는 개념자체 또한 브랜드화 혹은 상품화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용운) : 나는 96년도에 처음으로 홍대에서 활동을 했다. 그때부터 인디밴드라는 말을 들었다. 처음에는 나도 자부심이 있었다. 어려서 그랬다. 알고 보니 일종의 말장난이었다. 인디레이블 소속밴드를 지칭하는 말인데 언더그라운드를 대신하는 말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면서 인디밴드를 폄하하는 시선들, 가난하고, 못되고, 나쁜 의미가 생겼다. 언더그라운드는 그래도 음악성으로 버틴다는 긍정적인 모습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인디밴드라는 말을 굉장히 듣기 싫어하기도 했다. 너도 나도 인디밴드라고 하니. (웃음) 쉽게 이야기하자면 ‘듣보잡’이라는 이야기다. 신인가수라고 하지 않고, 생소한 밴드면 무조건 인디라고 하는 것이 너무 싫다

(유수연) : 사회적 시선은 가요형태의 음악을 하는 밴드를 제외하고는 다 인디밴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인디가 뜨거운 감자처럼 되어 버렸다. 붙여도 그렇고 안 붙여도 그렇고. 좀 애매한 부분이다.

(이용운) : 한번 인디면 영원한 인디로 내버려두는 것 같다. 사실 인디레이블이 메이저 기획사들보다 더욱 거대해 질수 있다. 인디레이블은 말 그대로 독립적인 것이지, 경제적인 부분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물론 현재는 인디레이블이 중소기업, 메이저는 대기업처럼 되어있지만, 인디밴드도 대기업이 될 수 있다.

팬 층은 주로 어떠한가? 그리고 인지도는 밴드 스스로 봤을 때 어떠한가?

(유수연) 팬층은 주로 2․30대이다. 홍보를 거의 하지 못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그래도 소문은 조금씩 퍼지는 것 같다. 우리의 노래를 카피하는 학생들이나 직장인들도 꽤 많고, 라디오에서도 심심치 않게 우리 노래가 흘러나온다. 각종 차트에도 밴드 이름을 올리는 걸 보면 시베리안허스키가 대견스럽기도 하다.(웃음) 대학의 실용음악과 입시곡으로 우리 노래를 준비하는 학생들도 있다고 하니 영광이다.

홍대는 이미 주름잡고 있는 것 같고, 그 외에는 어디서 활동을 하는가?

(이용운) 예전에는 홍대 클럽에서 정기적인 공연을 했었지만, 5년 전부터는 홍대 클럽 공연이나 행사 등 모든 공연은 섭외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홍대 클럽뿐 아니라 지방의 많은 클럽에서도 공연을 했었고, 대학 축제나 행사 공연도 전국적으로 섭외가 이루어진다. 간혹 방송에서 연주를 할 때도 있고 축제에 초대되는 경우도 있다. 요즘은 누구나 하는 홍대 놀이터 공연도 했었고 작년에는 일본에서도 공연을 했었다.

무대에서 시베리안허스키가 가장 중점에 두는 점은 무엇인가?

(유수연) : 처음에는 우리도 눈빛만 보고 브레이크를 걸고, 섹션을 들어가고…, 그런 것을 추구했다. 그러나 이런 것도 멤버문제와 겹친다. 멤버를 영입할 때는 연주 잘하는 젊은 친구를 구해서 열심히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한다. 그러나 그들은 경험이 없다. 아무것도 모른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시베리안허스키가 이름도 좀 있으니깐 거기는 뭔가 틀리겠지, 혹은 돈이 되겠지 생각한다. 이러한 마인드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래서는 교감이 되지 않는다. 나이 차이가 아니라 시대적인 차이인 것 같다. ‘우리가 느꼈던 밴드는 이런 것이다’라는 생각이 변했다. 나는 하루를 같이 해도 멤버라는 생각으로 임한다. 시베리안허스키를 10년 동안 해왔는데, 그들은 주인의식이 없다. 우리 음악이 뭔지도 모르고 프로필 한줄 더 늘리기 위한 것이다.

블루스를 하더라도, 딱 떨어지는 싱코의 느낌이 안 나온다. 우리가 기계도 아닌데 어떻게 정박에 딱 떨어지겠는가? 그래서 합주가 필요한 것이다. 대화도 하고 술도 한 잔씩 하면서 서로 알아 가야한다. 이러한 인터뷰를 했을 때도 우리의 말을 대신 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들도 100:1 경쟁률 뚫고 들어온 사람들이다. 하지만 멤버가 되는 것은 너무 어렵다. 그래서 눈빛교환은 포기했다. (웃음) 지금은 그냥 묵묵히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고 있다. 나와 같은 마인드를 가진 친구가 한두 명 더 있는…, 내게 밴드란 그러한 의미로 다가온다. 그게 밴드다.

그렇다. 요즘은 기타플레이를 보더라도 진짜 손맛으로 연주를 하는 밴드를 보기 드문 것 같다.

(수연) 앞으로는 더 없을 것이다. 음식점만 보더라도 장인이 없어지고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이 체인점화되어 아무나 교육받고 음식을 만든다. 음악판도 똑같다. 장인이 없어졌다. 싱글앨범이라는게 좋은 의도로 쓰여야 되는데,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수연) : 밴드라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정말 절실히 느낀다. 멤버가 교체되면서 상처도 많이 받고, 격해지기도 한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다. 매번 오는 겨울이지만, 갈수록 추워지는 느낌이다. 매번 겪는 이별이지만, 아픔이 줄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힘든 것은 아무도 모른다. 올라이즈밴드를 보면, 그래 자기 음악을 꿋꿋이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참 멋있다.

용운 씨는 나에게 큰 도움이 된다. 묵묵히 동반자로 있어준다. 물론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냥 하고 싶은 음악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원수는 중요하지 않다. 마음 맞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된다고 본다. 언젠가 우리를 다시 찾아왔을 때도 우리는 항상 밴드음악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광고해도 되는가? 4월 10일 7시에 상상마당에서 우리의 단독콘서트가 열린다. 많이 와서 즐겨주길 바란다.(웃음)

꼭 공연을 보러 가겠다. 나는 시베리안허스키의 열정적인 팬이다. 앞으로도 계속 응원하겠다.

인터뷰가 끝나고 우리는 간단한 술자리를 가졌다. 인터뷰에서 못 다한 이야기를 하면서 기분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밴드 음악을 하는 것,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속사정들…, 그러나 이런 각오 없이 음악을 하겠다고 나선 건 아니지 않은가. 보잘 것 없는 글이나마, 이 글이 음악하기 힘든 이 땅에서 묵묵히 좋은 음악을 만들어 주는 시베리안허스키와 같은 밴드를 알리는 데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다음 인터뷰의 행선지는 대전이다. “뉴크”는 요즘 세상에 아직도 정통 헤비메탈을 고집하며 대전 지역을 중심으로 10여년이 넘게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밴드다. 어떻게 보면 나와 가장 음악적으로 공통된 점이 많은 밴드이기에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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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가려 했으면 진작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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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7 07:58

서울 가려 했으면 진작에 갔다

[강종택의 하이웨이 스타]① 정통 하드록 밴드 '아프리카'
                                                                                                                      강종택 _ 기타리스트

뮤지션에 있어 장르는 중요하지 않다. 특정 장르에 한정시킨다기보다는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만들다보면 나오는 음악, 그것이 바로 우리의 색깔이다.
▲ 뮤지션에 있어 장르는 중요하지 않다. 특정 장르에 한정시킨다기보다는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만들다보면 나오는 음악, 그것이 바로 우리의 색깔이다.

레드제플린을 동경하며 겁도 없이 무작정 기타를 잡게 된 것도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모든 음악인들이 그러하겠지만 나 역시도 손끝에 물집도 안 잡혔던 시절엔 마지막 한국 정통 록을 지키겠다는 큰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수많은 밴드들의 공연을 찾아다니며 꿈을 키우던 그때가 가끔 생각이 난다. 두려울 것도, 잃을 것도 없었던 그 시절의 추억은 지금도 나에게 애틋한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그렇게 시작한 나의 음악생활은 밴드 <A-Frica>와의 만남 이후 큰 전환점을 가지게 된다. 평소에 존경해왔던 밴드 <A-Frica>의 기타리스트로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그때의 기억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풋내기 기타쟁이에서 탈피하던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A-Frica>와 함께 활동을 하면서 가장 많이 얻은 것은 다른 팀들과의 교류였다. 나에게는 종교와 같았던 <블랙홀>, <블랙신드롬> 등과 같은 훌륭한 밴드들과의 만남은 22살의 어린 나에게 벅찬 감동이 아닐 수 없었다.

컬처뉴스에서 밴드 인터뷰 연재 의뢰를 받고 이러한 나의 소중한 인연들로 작은 음악이야기를 엮어 보는 건 어떨까 생각해 봤다. 동시대에 함께 음악을 했던 사람으로서 요즘 밴드들은 어떠한 정신을 가지고 음악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이야기 나누는 것은 내 음악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기회도 될 것 같았다.

아프리카를 만나기 위해 그들의 공연이 열리는 동대문 두타야외무대를 찾았다. 도착하기도 전, 지하철 계단을 오를 무렵 낯익은 사운드가 들렸다.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보컬(윤성)의 목소리, 육중한 드럼사운드. 틀림없는 아프리카였다. 추운날씨에도 불구하고 야외무대에서 리허설을 하고 있는 아프리카의 연주를 잠시 감상했다. 함께 공연을 다니다가 이제는 객석에서 그들의 무대를 바라보는 기분이 참 묘했다. 리허설이 끝나고 간단한 저녁식사를 하면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나의 고향과 같은 밴드 A-frica를 인터뷰 한다는 것이 어색하기도 하고, 무엇을 물어봐야할지 난감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자가 아닌 동료로서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인터뷰에 임했다.

같이 공연을 하는 것이 아니고, 관객의 입장에서 연주를 지켜보니 기분이 묘했지만 무대 위에서나 아래서나 아프리카다운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간 어떻게 지냈는가?

(정현규, 드럼 / 리더) : 근황이야 뭐 항상 똑같다. (웃음) 항상 끊이지 않는 공연 일정을 소화하면서 지낸다. 평소에는 멤버들이 레슨을 하기 때문에 다들 나름대로 바쁘게 지낸다.

얼마 전 일본에서 공연을 하고 온 것으로 알고 있다. 반응은 어땠는가?

(정현규, 드럼) : 도쿄에 있는 “라이브 스테이션”이라는 유명한 클럽에서 공연을 했다. 일본공연을 하면서 많이 놀랐다. 우선 관객들부터가 한국이랑은 달랐다. 한국은 팬들이 객석을 채우는데 반해 일본은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이 관객의 대부분이었다. 그래서인지 락 밴드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 같지 않게 점잖하게 우리의 연주를 지켜보았다. 마치 평론가처럼 지켜보는 시선이 많이 낯설었다.

클럽문화도 한국이랑 많이 달랐는가?

(윤성, 보컬) : 솔직히 말하자면 한마디로 부러웠다. 세팅부터가 뮤지션이 원하는 것을 만족시켜주었다. 앰프하나부터 드럼 세팅까지 완벽했다. 그만큼 대관료도 비싸지만, 뮤지션이 꿈꾸는 무대를 만들어 주기 때문에 더욱더 높은 질의 음악이 나올 수밖에 없다. 좋은 경험을 하고 왔고, 그들의 마인드를 배울만하다고 생각한다.

연간 100회 이상의 많은 공연일정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새 앨범이 나왔다. 요즘 메이저 가수들은 디지털 싱글의 형태로 앨범을 내는 추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범을 냈는데 아프리카에게 있어 앨범발매는 어떠한 의미인가?

(정현규) : 특별한 의미를 둔다기보다 음악인에게 있어서 앨범 발매는 당연한 것이다. 앨범작업은 우리의 음악을 표현하는 것인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앨범발매를 안하는 밴드들에 대해서 반감은 없다. 트렌드에 민감한 밴드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냥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음악을 할 뿐이다.

이번 앨범은 정규 2집이다. 이번 앨범에 대해서 소개를 좀 해 달라. 신곡보다는 기존의 곡들로 이루어 있던데.

(윤성) : 그렇다. 우리는 예전에 “독립문화공동체”에서 3장의 앨범을 발매했었다. 그러나 그 앨범들은 소수에게만 알려졌을 뿐, 정식적인 앨범이 아니었다. 그래서 2006년에 정규1집을 발매했고, 올해는 예전의 곡들을 다시 정리해서 2집 앨범을 낸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별로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다. 2집 앨범은 기존 곡들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수준에서 더욱 성숙된 사운드와 곡 전개를 구성했다.

<작은새>라는 곡은 상당히 긴 대곡이다. “블랙홀”의 기타리스트 이원재와 “What”의 기타리스트 김인건이 마지막 기타 솔로를 함께했다고 들었다. 들어보니 마치 “레너드스키너드”의 Free birds와 같은 느낌이었다.

(정현규) : 그렇다. <작은새>는 코드 3개로만 만들어진 노래지만 뜨거운 에너지가 넘치는 곡이다. 아프리카의 색깔을 함축시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동료뮤지션들이 기꺼이 연주에 참가해줘서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전한다.

거의 모든 작곡을 정현규가 하였다. 송인재(기타)를 비롯한 나머지 멤버들도 각자의 음악적 색깔이 있을 텐데, 표현에 대한 욕심은 없었나?

(송인재) : 물론 음악적 색깔이 전부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밴드이다. 당신도 알고 있지 않은가? 밴드라는 게 참 어렵다. 나는 작곡을 한 사람이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팀의 색깔을 내면서도 그 속에서 개인적인 모습을 음악으로 드러내야 한다. 아프리카는 그런 면에서 밴드라고 생각한다. “메가데스”의 前기타리스트 마티 프리드먼을 보라. 평소에는 지극히 메가데스적인 날카로운 사운드를 내면서도, 기타솔로에서는 완전히 마티 프리드먼의 개성 있는 플레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이런 것은 모두 존재감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같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아프리카 공식 2집 앨범

너무나 많이 들었을 질문이지만, 그래도 짚고 넘어가겠다. 지방(대구)에서 이렇게 (취미밴드가 아닌) 밴드를 하는 팀이 많지가 않다. 서울로 진출할 생각은 없었는가? 그리고 지방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한 제한적인 요소나 한계는 없었는가?

(정현규) : 너무 식상한 질문이다(웃음). 이 질문은 수백 번 들었다. 물론 우리도 인정받고 싶고, 인기를 얻고 싶다. 그리고 그에 따른 경제적인 수준도 높아지면 좋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앨범을 발매하면서 전국을 상대로 공연을 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공연을 하지 않았는가. 서울이나 지방이나 하는 일이 같은데 굳이 서울로 갈 생각은 애당초 하지 않았다. 진출할 거였으면 진작 갔을 거다. (웃음)

대구․경북지역에서는 상당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락 공연이 아닌 지역의 행사 공연도 많이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공연무대는 주로 어디인가?

(윤성) : 락 공연은 물론이고 행사공연도 많이 한다. 특히 여름이면 행사공연의 비율이 높아진다. 그리고 행사공연이라 해서 대구․경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을 다 다닌다. 대학축제 공연도 우리의 주무대라 할 수 있다.

나도 경험해봤지만 행사공연을 다니다 보면 열악한 음향시설을 비롯해 변변치 않은 대기실 등 여건이 좋지 않는 경우가 매우 많다. 어떻게 극복을 하는가?

(송인재) : 극복이라고 하기보다는 이제는 적응이 되었다. 행사공연은 음향팀이 항상 바뀌기 때문에 우리의 입맛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훌륭한 연주를 하는 팀도 많다. 그것이 다 경험이고 실력이다. 열악한 환경도 극복하는 것이 진정한 뮤지션이 아니겠는가. 사실 앰프를 비롯한 다른 장비들이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수준일 때는 장비들을 우리가 직접 가지고 가기도 한다.(웃음) 그러나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공연을 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즐거운 여행이다. 그래서 큰 불만은 없다.

공연을 찾는 사람들은 주로 어떠한 사람들인가? 그리고 고정 팬들은 얼마나 있는가?

(윤성) : 공연을 하다보면 낯익은 얼굴들이 보일 때가 많다. 대구에서 공연을 하면 멀리 부산에서 찾아오는 팬들도 있다. 그러한 팬들이 너무나 고맙다. 공연이 끝나면 함께 식사를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우리는 연예인이 아니기 때문에 팬과 스타의 관계라기보다는, 좋은 음악을 공유하는 친구 같은 사이다.

매니지먼트에 소속된 것이 아닌데, 공연일정을 잡거나 홍보 같은 것은 어떻게 하는가?

(윤성) : 우리 팀에게는 훌륭한 매니저가 있다. 그 분이 공연일정을 비롯한 아프리카의 활동을 계획하고 추진한다. 단순히 매니저라기보다는 우리 팀의 정신적 지주와 같은 역할을 하는 분이다. 음악적인 감각도 우리보다 훨씬 더 뛰어나기 때문에 많이 배운다. 홍보 같은 것은 주로 내가 한다. 카페에 글을 올리거나 하는 세세한 부분은 내가 틈틈이 하는 편이다.

멤버교체로 상당한 고통이 있었는데 지금의 멤버를 보니 정말 안정된 것 같다. 이 문제 말고도 한국에서 밴드음악을 한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 아닌가?

(정현규) : 아프리카에게도 멤버 교체와 같은 시련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밴드가 성숙해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본다. 여기서 우리가 힘들다고 하면 선배 밴드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선배 뮤지션들이 닦아놓은 길을 편하게 가고 있을 뿐이다. 행여나 우리가 막다른 길을 만나더라도 스스로 길을 만들어 가면 된다.

밴드들의 나이가 적지 않다. 특히 드럼은 체력이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현규) : 20대보다 체력적으로 한계를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바꿔서 말하면 그때는 힘으로만 친 것 같다. 그러나 음악은 스포츠가 아니다. 지금은 몸 전체를 이용해서 드럼을 연주한다. 여기서 몸 전체를 사용한다는 것이 바로 느낌으로 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맛을 알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최소한 나이가 30살이 훌쩍 넘어야 그때부터 진정한 연주와 음악이 나온다고 말하고 싶다.

하드락을 하는 팀인 만큼 시간이 흐를수록 추구하는 음악적 색깔이 약해지는 면은 없는가? 감각적이지 못하다거나, 기타리프가 조금은 촌스럽다는 말을 들을 법하다. 물론 나는 아프리카의 정통 하드락을 사랑한다.(웃음)

(정현규) : 우리의 음악이 촌스럽다는 말인가? 뮤지션에 있어 장르는 중요하지 않다. 곡을 쓸 때도 그렇다. 좀 더 꾸며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입에서 흥얼거리는 그 느낌을 최대한 살려서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장르에 한정시킨다기보다는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만들다보면 나오는 음악, 그것이 바로 우리의 색깔이다. 정리하자면 뮤지션들이 그 나이에 가장 잘 할 수 있는 음악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길이고, 아프리카의 장르라고 생각한다.

역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말이다. 항상 아프리카가 건승하길 바란다.

인터뷰를 마친 후 그들은 무대 위로 올라가 뜨거운 에너지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두타 야외무대 앞을 무심코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을 하나 둘 잡아 두는 그들의 사운드 속에서 아프리카는 어디에서도 최고라고 인정받을 수 있다고 다시 한 번 확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음악이 널리 알려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아프리카의 음악은 순수하다. 그 순수함을 많은 이들이 알아줄 날이 오리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언젠가는 같이 음악을 할 수 있는 날이 다시 오리라는 바람과 함께.

이 인터뷰의 다음 행선지는 홍대 앞이다. 아프리카에서 활동을 하면서 가장먼저 친해진 펑키밴드 <시베리안허스키>를 만나기 위해서다. 홍대 앞에서 10년 동안이나 활동을 한, 보기 드문 실력파 밴드 <시베리안허스키>. 다음은 그들의 음악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다.

(A-Frica)

드럼 : 정현규 (리더)
보컬 : 윤성
기타 : 송인재
베이스 : 오창근

A-FRICA 아프리카는 블루스에 기반을 둔 “정통 하드락 밴드”이다. 또한 국내에선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정통 하드락 보컬의 독자적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여성 보컬 윤성의 시원시원한 보이스가 팀의 컬러를 보다 확실하게 규정한다. 아프리카 대륙의 순수함, 자연스러움을 받아들여 장르의 구분 없이 무한한 가능성을 심어주고 싶다는 그들 음악의 본질은 라이브에서 더욱 여실히 들어난다. 연주가 시작되면 어떤 장소, 어떤 무대라도 그들의 콘서트 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파워풀하면서도 친화력 있는 퍼포먼스는 그들의 트레이드마크가 된지 이미 오래이다.

1999년 3월에 결성되어 락 페스티벌, 대학축제, 클럽 공연 등 다양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으며, 2002년 여성 보컬 윤 성 체제로 라인업 제정비후, 자체 제작한 2장의 앨범 발표했다. 2008년 11월 앨범 발매를 기념한, 일본 도쿄 클럽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2008년 12월부터 2008~2009 앨범발매기념 전국 라이브 클럽 투어 중이다. 2009년 3월에는 한국, 9월에는 일본에서 한일 락 페스티벌이 예정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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