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뉴스'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08.12.31 불온한 삶을 꿈꾸다
  2. 2008.12.18 2008 하이브리드 비평상 공모
  3. 2008.12.12 한독협, 공부하자!
  4. 2008.11.21 장르 비평을 넘어서 - 컬처뉴스, 하이브리드 비평상 공모
  5. 2008.10.29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 - ①]'한국독립영화의 아버지' 김동원 감독 (1)
  6. 2008.10.02 사회는 우리를 패배자 혹은 노예라고 한다 - [영화소개]일본다큐멘터리특별전, 아와부치 히로키,《조난 프리타 遭難 フリーター》
  7. 2008.10.02 아카펠라와 비트박스의 만남 - “스윙글 싱어즈” 새 음반 'Beauty and the Beatbox'
  8. 2008.10.02 여성주의에서 에코페미니즘으로 - 윤석남 개인전 《사람과 사람없이》
2008.12.31 12:21

불온한 삶을 꿈꾸다

[컬처뉴스가 뽑은 2008년 10대 뉴스] ⑨ 국방부 불온서적 선정
                                                                                                                                       이주호 기자
국방부 선정 불온서적 목록.
▲ 국방부 선정 불온서적 목록.


7월 19일 이상희 국방장관의 지시로 국방부 보안정책과는 북한 찬양, 반정부·반미, 반자본주의 등 세 분야 23개 불온서적 목록을 지정하여 각 군에 “불온서적 차단 대책 강구(지시)”를 내려 보냈다. “불온서적 무단 반입 시 장병 정신 전력에 저해요소가 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이에 공군은 24일 각급 부대에 공군참모 총장 명의의 공문을 보내 7월 28일부터 8월 8일까지 불온서적 반입 여부를 일제 점검하여 8월 11일 상급부대에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국방부가 불온이라는 말을 들고 나오자 매도, 척결의 시린 계절이 다시 오려는가 염려도 잠시, 인터넷은 오히려 국방부에 대한 조소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포문은 진중권 교수가 열었다. 그는 진보신당 홈페이지에 자신의 책들이 국방부 선정 리스트에서 제외된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글을 올렸다.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의 저자 소개를 보면 노골적으로 적화를 선동하고 있는데도 왜 그 책이 배제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 ‘빨간’이라는 색깔을 적나라하게 노출하고, 거기에 ‘바이러스’까지 붙여 강력한 전염성을 경고”한 『빨간 바이러스』 역시 불온서적 리스트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은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국방부는 23권 선정 과정에서 출판사측과 검은 거래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도서 선정의 기준과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라는 조소도 잊지 않았다.

『88만원 세대』의 저자이자 경제학자인 우석훈 교수도 자신의 블로그에 “사회과학이 금서가 되는 시기가 돌아왔으니, 사회과학이 찬란하게 꽃피던 사회과학 르네상스가 정말로 오기는 올 것 같다. … 국방부의 금서 목록에 내 책이 들어가지 않은 것을 보고 정말 깊이 반성하였다. 이 시대착오의 세상에 너무 말랑말랑하게 쓴 것이 아닌가, 정말 마음 속 깊이 반성한다.”고 하는 반성 아닌 반성의 글을 올렸다.

물론 한총련과 같이 국방부 앞에서 규탄 시위를 하는 구태의연한 대응 방식도 여전했다. 하지만 불온서적에 관한 생각지도 못했던 반향의 진원지는 따로 있었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불온서적 중 자신이 읽은 책에 200자 평을 달면 적립금을 쌓아주겠다는 이벤트와 함께 대대적인 불온서적 마케팅을 벌인 것이다. 이 책들의 판매량이 급증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10월 22일에는 현역 군법무관 7명이 “국방부가 23권의 서적을 불온서적으로 선정한 것은 장병들의 행복 추구권을 침해한 것”이라며 헌법 소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행복을 위해, 사회지식을 얻고자 책을 사 읽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이라는 것이다. 국방부의 엄포가 그들이 의도한 분위기 조성은커녕 희화화되고만 있었으니 내부적인 자성의 제스처 하나쯤은 여론 환기용으로 너그럽게 눈감아 줄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 김수영 시인과 이어령 씨가 불온한 시에 관해 논쟁을 벌인 일이 있었다. 문화의 불온함, 질서 순응적이고 안이한 방식의 예술에서 불온함이란 무엇일까 역설하는 김수영 시인의 글에 시종일관 정치적 불온성만을 물고 늘어지던 이어령 씨의 천진난만함이 더해져 문학에서의 불온성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했던 계기였다.

국방부가 불온서적을 언급했을 때의 불온함은 단지 정치적인 의미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불온함은 뜻하지 않게 사람들이 대놓고 권위를 비웃을 수 있는 기회가 되고 말았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새벽까지 깨어 있는 눈더러 보란 듯이 기침을 해대는 젊은 시인의 불온성, 규정된 틀을 깨고 새로운 시대의 문고리를 휘어잡는 문화의 본질로서의 불온성의 얼굴이 언뜻 내비친 것도 같았다.

박정희 귀에 불온하기 그지없었던 김민기와 한대수의 음악, 전두환에게 있어 불온하기 그지  없었던 김남주의 시, 어느 샌가 불온성은 7080 추억담 속에 잠자고 있었다. 꽉 짜여 숨 크게 내뱉기도 힘든 완고한 순환의 한 끄트머리를 잘라내고 싶은 소심한 일탈의 꿈은 여전했다. 그러다가 만난 정치적 불온성은 낭만적이기마저 했다. 일률적인 눈요깃거리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차가운 대형 상가 뒤편, 피맛골과 황학동에서 삶의 불온성이 보였다. 정부가 나서서 부동산과 주식을 파는 세상에서, 뉴타운과 재개발 열풍에 머리털 하나 날리지 않으며, 뉴라이트들이 주 7일 근무를 하든 야간근무를 하든 상관없이 적게 벌고 많이 생각하며 사는 불온성을 무척이나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 동족을 위해 /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 테고 / 대포도 안 만들고 / 탱크도 안 만들 테고 / 핵무기도 안 만들 테고 / … /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 더 많은 것을 아끼고 / 사랑하며 살 것이고 // 세상은 아름답고 / 따사로워질 것이다" 
                                         권정생, 「애국자가 없는 세상」 일부,『우리들의 하나님』(녹색평론, 2008) .

오렌지를 오렌지라 부르는 불온한 사람들이 애타게 찾던 불온성의 씨앗이여, 너 거기 철책 안에서 자라고 있었구나!



 

[관련기사]
개발과 보존의 아이러니
그 해 온라인은 흉흉했네
비정규직 권하는 사회, 예술가들의 복지는?
누가 먼저 내민 '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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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8 15:51

2008 하이브리드 비평상 공모


컬처뉴스는 문화예술종합웹진으로 예술장르의 비평은 물론 각종 문화현상과 정책에 이르는 문화전반을 가로지르는 매체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현재 문화예술계는 저널리즘 침체로 예술비평이 점차 위축되면서 예술가와 대중을 매개하는 생산적 소통부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예술현장은 나날이 변화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비평은 관습적인 기존 장르의 틀로 구획되어 있는 게 현실입니다.

이에 컬처뉴스는 저널리즘 비평의 활성화와 젊고 참신한 시각의 깊이 있는 비평 활성화를 위해 ‘하이브리드 비평상’을 공모합니다. 장르의 틀에 갇히지 않는 새로운 비평 모색에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관심과 응모를 바랍니다.


<하이브리드 비평상>
1. 대상
- 기성 신인을 망라한 젊은 감각의 비평가(연령제한 없음)
- 복합장르, 두 장르(분야) 이상의 예술현상에 대한 비평을 통해 작금의 예술현실을 진단하고 예술의 사회적 소통을 모색하는 비평작업

2. 상금 및 특전
- 상금 당선작 150만원, 가작 50만원
- 당선작, 가작 모두 컬처뉴스 고정필자로 활동(타 매체 추천 병행)

3. 분량
- 원고지 30매 안팎

마감 : 2009년 1월 30일
발표 : 개별통보 및 컬처뉴스 기사 발표
시상 : 2009년 2월중 예정(별도 통보)
보낼 곳 : cnews33@hanmail.net(이메일로만 접수)
문의처 : 컬처뉴스 편집실 02-739-6851 cnews33@hanmail.net

응모요령
1. 모든 응모작은 기존에 발표되지 않은 순수 창작물이어야 합니다.
2. 같은 원고를 다른 매체에 중복 투고한 경우 심사에서 제외합니다.
3. 원고에 성명, 주소, 전화번호, 이메일주소를 꼭 써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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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2 10:22

한독협, 공부하자!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⑦] 맹수진 영화평론가

맹수진 영화평론가
▲ 맹수진 영화평론가

한 편의 영화가 극장에 걸리고 ‘상영’된다고 그것이 그 영화의 ‘종착점’이라 할 수 있을까. 한 영화가 만들어지고 거기에 건강한 피드백이 없다면 감독 개인의 차원에서도 영화산업 전체의 차원에서도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만나본 사람이 독립영화비평의 최전선에서 활동해 온 맹수진 영화평론가다. 맹수진 씨는 한독협 운영위원뿐만 아니라 영화진흥위원회 소위원, 영화제 심사위원 등 독립영화의 안팎에서 꾸준하고 활발하게 활동해 왔다. 어쩌면 독립영화계의 내부 사정을 잘 알면서도 비판의 날이 가장 서 있는 인터뷰이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애정 어린 충고가 담긴 인터뷰 시작해 본다.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소감 한마디 해달라.

아쉬움이 좀 남는다. 10주년 기념 영화도 만들고 포럼도 하는 등 여러 가지 행사를 했는데 행사가 너무 회고적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의 ‘올해의 독립영화’, 독립영화인들을 쭉 살펴보면서 한독협의 출범 의의라든지 지금까지 어떤 활동을 해 왔는지에 관해 나름대로 잘 정리하는 시간이긴 했다. 문제는 지금 정세가 많이 변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변화의 시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과거에 한독협이 정부와 대립하는 단체였다면, 지난 10년은 한독협이 제안하는 사업을 정부가 많이 받아 들였던 시기였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많은 사업이 이루어졌고, 독립영화의 외연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많은 지원을 받다 보니 NGO가 갖고 있는 긴장이 좀 없어진 느낌이다. 옛날에는 허리띠 졸라매는 게 기본이었는데 최근 10년 동안은 어떻게 보면 좀 배부르게 살아왔다. 그러다보니 한독협의 역할이 너무 사업에 치우쳤고 정책 연구에는 소홀했다.

그게 아쉬움이 남는다는 건가.

정권이 바뀌면서 많은 사업이 축소되고 있다. 다른 방향에 대해서 정부나 영화진흥위원회와 싸워야 하는데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정책이 없는 거 같다. 지금 집중해야 하는 것은 사업이 아니라 앞으로 10년을 내다보는 정책 개발이다. 그런 이야기가 10주년 사업에서는 별로 없었다. 굉장히 많은 사업을 했지만 어떻게 보면 액기스가 좀 빠진 것 같다.

영화, 사랑하고 끔찍하다

처음부터 숨 가쁘게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웃음) 분위기 전환 차원에서 영화평론가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소개해 달라.

영화진흥위원회 예술영화인정소위원회 위원과 <무비위크> 스탭 평론가로 활동했다. 또 예술영화 전용관 하이퍼텍나다에서 2주마다 정기적으로 하는 다큐멘터리 기획전을 진행했다. 그리고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와 전주국제영화제(이하 전주영화제)에서 활동을 했다. 전주영화제에서 6년 동안 활동을 했는데 거기서 독립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본격적으로 서독제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2005년부터다.

많은 일을 한다. 영화평론가로서의 삶은 어떤가.

평론가로서의 삶이라, 그건 뭐 다 짐작할 것 같은데 연애하는 느낌이다.(웃음) 연애하다 보면 좋을 때도 있고 싫을 때도 있고, 또 너무너무 끔찍할 때도 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특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도 독립영화에 있고 가장 싫어하는 영화도 독립영화에 있다. 충무로 상업영화들에는 안정적인 틀이 있지만 동시에 답답하고 고루한 면이 있다. 독립영화 중 그걸 벗어나는 영화, 예상치 못한 영화를 만나면 진짜 신난다. 남들이 모르는 뭔가를 내가 발견한 느낌, 정말 좋다.

그럼 끔찍할 때는 언제인가.(웃음)

충무로에서는,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지만, 아닌 영화는 냉정하게 시장에서 버려진다. 근데 독립영화의 경우 함량 미달인 영화도 있는데 독립영화라는 울타리 안에서 보호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어떤 목소리를 내야할지 갈등하게 된다. 특히 ‘힘들게 만들고, 양적으로 늘릴 필요가 있으니까 욕하기 보다는 격려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말을 들으면 갈등은 심해진다.

그걸 잘 표현하는 타입인가.

난 외교적인 화법을 잘 구사하지 못해 공식적인 자리에서 내 맘속에 있는 말을 결국 드러내게 된다. 싫은 영화나 그 감독을 만나면 표정관리도 안된다. 뒤에서는 욕하면서 겉으로는 웃으면서 영화 잘 봤다고 할 수도 있는데 난 맘에 안 드는 작품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앞에 앉아 있다가 서먹해지는 상황도 많이 있다.(웃음)

민주화를 꿈꾸던 자유주의자

영화는 언제부터 시작했나.

본격적으로 시작한건 대학 졸업하고 회사 다니면서다. 그 때 내가 1주일에 한번씩 들렀던 것이 종로에 있던 코아아트홀이다. 또 라이브러리를 회원제로 운영하는 시네마테크에 영화를 보러 다니면서 열심히 활동하기 시작했다. 집안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 회사는 다녀야했다. 나 돈도 잘 벌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웃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돈도 빨리 모으려고 했다.

"독립영화 비평의 경우 장기적인 관점에서 내부적으로 비평가들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년에 한독협에 비평분과가 처음 생긴 거다"

왠지 학창시절이 평탄하지만은 않았을 거 같다.

내가 89학번인데 그때만 해도 정치조직들이 굉장히 많았다. 내가 편지 한 장 달랑 써 놓고 몇 달 동안 안 들어오고 그러니까 집에서 학교도 못 가게 했다.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맞듯 맞은 적도 있었다.(웃음) 근데 그땐 몰랐는데 그 시기에 학생운동을 하다 영화 쪽에 들어온 사람들이 되게 많다.

영화에서 새로운 운동의 방향을 발견한건가.

그때 영화로 방향을 틀면서 남들에게 공식적으로 그렇게 얘기를 했다. ‘그동안 사회문제에 직접적으로 투쟁했다면 이제는 영화를 통해서 문화운동을 해 보겠다’고 말이다. 그 즈음에 문화담론이 굉장히 활성화 되면서 문화를 통해 사회 변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시류에 내가 묻어간 것 같기도 하다. 근데 가만히 나를 되돌아보면 뼛속깊이 자유주의자고 개인주의자였던 것 같다.

얘기가 점점 흥미로워진다.

학창시절 끊임없이 사회 운동을 하면서도 조직이 ‘나’라는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못 견뎠다. 난 너무나 감성적이고 감정적인 인간으로 조직이 원하는 정치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근데 그때는 조직이 개인을 억누른다는 생각을 차마 못했다. 그래서 나는 비조직적이고 쁘띠부르주아적이며 나약한 인간이라는 자기학대를 끊임없이 했다. 조직의 이익이 있고 목표가 있을 때 나의 이익과 관심은 뒤로 빠지는 전형적인 집단주의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개인을 찾기가 쉽지 않았겠다.

점점 힘들어졌다. 연애도 깨지고 부모님과도 갈등이 심화됐다. 나는 너무 힘든데 조직의 논리는 개인을 보듬어 주지 못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그게 회의가 들면서 내가 감성적인 인간이고 문학과 영화를 좋아하며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을 떠올리게 됐다. 결국 무엇을 택하든지 내가 좋아하는 거를 하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책 읽고, 영화 보고, 글을 쓰는 걸 하게 됐다.

영화에도 다양한 분야가 있는데 평론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딱히 평론을 하려고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냥 막연히 영화를 해 보고 싶었다. 사실 논문 마치면 쓰려고 구상해 놓은 시나리오도 있다. 만날 사람들한테 하는 말이 ‘나 논문 끝내고 미디액트 등록할거야’다.(웃음) 내가 상업영화를 만들 건 아니지만 그냥 개인 비디오로 장롱 영화라도 만들고 싶다. 결국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과 마찬가지로 카메라로 세상을 본다는 건 또 하나의 글쓰기인 것 같다.

독립영화? 가장 재미있는 놀이터

언제 본격적으로 평론을 하기 시작했나.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게 전주영화제를 하면서부터다. 처음에 영화 공부를 할 때는 현장 비평보다는 한국영화사를 새로 한 번 써보고 싶다는 그런 학문적인 관심이 많았다. 근데 전주영화제에서 단편영화 프로그래밍을 하면서 책을 한 권씩 쓰는데, 그 때 현장의 영화들, 그때그때 나오는 영화들에 대한 글쓰기에 재미를 느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한독협과 인연을 맺은 건가.

2005년도에 조영각 서독제 집행위원장이 연락을 해 왔다. 전주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쓴 글을 보고 제안해 온 것이다. 영각 씨가 다른 데서 글 쓰는 사람들과 독립영화를 연결하는 역할을 많이 했다. 영각 씨가 바쁜 사람인데도 보면 되게 바쁜데도 독립영화에 대한 글들은 꼬박꼬박 챙겨 읽는다.(웃음) 그때 2005년도 서독제 예심을 봐 달라 해서 인연을 맺게 됐다. 2006년에도 예심, 2007년에는 본심, 올해 다시 예심 심사를 했다. 그러다보니 서독제  집행위원도 하고 한독협 운영위원도 하게 됐다. 옛날에는 영화보고 글 쓰는 거에 만족했는데 한독협과 인연을 맺다 보니 독립영화가 내 울타리가 되었다. 나의 놀이터라고나 할까?

독립영화란 놀이터가 재미있나.

일단 상업영화보다 독립영화에 더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전에 주류 영화에 대해 글을 쓰긴 했었는데 그렇게 재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영화들은 재미있는데, 대학원에서 배운 서구이론들을 영화들에 재밌게 적용시키지 못했다. 미국영화나 스페인영화에 대해서 내가 써봤자 같은 문화적 공감을 갖는 그 나라 사람들만큼 못쓰지 않겠나. 그래서 허무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약간 ‘구라’ 치는 거 같고.(웃음)

독립영화에 대해 글을 쓸 때는 ‘구라’를 안 치나보다.(웃음)

내가 독립영화에 끌릴 수밖에 없었던 게 내가 관심을 가졌던 이슈들, 사회문제들이 독립영화에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물론 넓게 보면 다른 영화들도 마찬가지지만 보다 직접적으로 내가 옛날에 갈등하고 고민하면서 겪었던 문제들이 독립영화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더 재밌게 할 수 있다.

한국 독립영화 비평이 활성화됐다고 생각하나.

어느 정도 이뤄졌다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취약하고, 절실한 문제들이다. 사실 그렇다. 독립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게 돈이 안 된다. 주류 평론가 중에 독립영화에 관심이 있으니까 비평하겠다고, 심사하겠다고 연락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한두 번 단기적으로는 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하려면 힘든 부분이 있다. 월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직간접적으로 일을 해도 돈을 받는 일은 없다. 독립영화계에서 살려면 정말 좋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은 리뷰를 써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면 삶에 타격이 있다.(웃음) 어찌 보면 이게 독립영화계가 해결해야할 문제다.
 
독립영화 비평이 활성화 되지 않은 건 평론가의 수요가 부족하기 때문인가.

독립영화는 분명 영화이기 때문에 ‘영화’라는 일반적인 잣대로 봐야할 부분이 있고, 독립영화라는 특수성으로 봐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그걸 다 이해하면서 글을 써야만 정말 좋은 글이 나올 수 있다. 그러려면 독립영화를 많이 봐야 한다. 영화를 정말 사랑해서 많이 본 사람들의 글에는 깊이가 있고 향기가 있지 않나. 근데 독립영화를 그렇게 열심히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독립영화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글을 보내고 전화를 하는 사람은 많지만 독립영화를 그렇게 열심히 보겠다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해결책으로 고민한 것은 무엇인가.

독립영화 비평의 경우 장기적인 관점에서 내부적으로 비평가들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년에 한독협에 비평분과가 처음 생긴 거다. 정책 단위가 필요하고, 독립영화계 내부에서 비평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독립영화에서 가장 깨져야 할 화석이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생각한다. 정치
적인 올바름이 있다면 다소 못 만들어도 용인이 되고 상영이 되고, 진정성이 있다고 평가
가 되는 것이 이제는 깨져야 한다"


독립영화 비평의 새로운 장을 열겠다

그건 독립영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갖는 영화 저널이 없는 것과 비슷한 거 같다. 한독협이 비평 활성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다고 생각하나.

지금까지는 없었다.(웃음)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다. 그나마 전에는 독립영화 비평은 필요하니까 외부 비평가들한테 같이 일하자고 제안하는 식이었지 한독협 내부에서 비평가들을 육성하는 건 없었다. 근데 그런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변화의 움직임이 있다. 영각 씨는 한국영상자료원에 진행하는 독립영화 정기상영회 ‘해피투게더’를 진행하면서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같이 세미나를 하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을 서독제 자원활동가나 데일리 기자로 쓰면서 조금씩 글을 쓸 기회를 준다. 독립영화계 내부에서 독립영화 비평 자원을 키워가자는 논의가 나온 게 최근 2, 3년 사이다.

한독협 비평분과에는 몇 명의 평론가가 있나.

8명 정도 가입되어 있다. 내가 책임을 맡고 있는데 잘 안되고 있다.(웃음) 다 자기 일들이 있는 사람들이니까 자꾸 일에 치인다. 난 영화 같이 보고 세미나 하고, 비평을 하는 계획이었다. 근데 계획대로 잘 안됐다. 현재 한독협 내에서 비평분과에 요구하는 일들, 예를 들어 인디스페이스 리뷰, 10주년 기념 책자 등 외부에 돈 주고 하기 힘든 일들을 하고 있다. 내년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계획을 짜서 진행 할 거다.

독립영화 비평의 최전선에 있다. 이번 서독제 출품된 작품들의 경향에 대해 말해 달라.

단편은 지금까지와 그렇게 큰 차이는 없는 것 같다. 내가 중심적으로 심사한 건 단편보다는 장편인데, 장편의 경우 올해 굉장히 센 영화들이 많이 있다. 가장 큰 특징은 지금까지 의례적으로 상영되던 성격의 작품들이 많이 빠졌다. 지금까지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고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흔히 얘기되는 영화들은 기본적인 미학에 대한 고려가 별로 없이 상영돼 왔다. 난 그게 가장 불만이었다. 소재 차원에서 독립영화가 아닌 독립영화만의 미학을 담은 영화들을 선정하고자 했다. 그래서 극영화가 많고, 다큐멘터리 중에서 사회적 이슈를 다룬 영화들을 욕먹을 각오하고 뺐다.

심사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이 뭔가.

아무래도 6명이서 토론을 하다 보니 이렇게 저렇게 타협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난 반이 절대 찬성하고, 반이 절대 반대하는 논쟁적인 영화가 본선에 올라가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근데 반대가 너무 심해서 안 되는 영화들이 있고, 상대적으로 무난한 영화들이 올라가는 경우가 있다. 근데 ‘그 정도면 괜찮다’는 것은 다시 말해 안틀어도 무방하다는 말 아닌가.

심사 과정이 치열했겠다.

올해 비장한 마음으로 심사에 임했다. 지금까지 서독제가 한 해를 정리하는 독립영화 축제 같은 느낌으로 다양한 작품들을 포괄했다면 이번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편수를 과감하게 줄이고 고만고만한 영화들은 빼고 우리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영화들로 가자고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근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던 거 같다.

그 과정에서 끝까지 관철시키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독립영화에서 가장 깨져야 할 화석이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적인 올바름이 있다면 다소 못 만들어도 용인이 되고 상영이 되고, 진정성이 있다고 평가가 되는 것이 이제는 깨져야 한다. 그러다보니 다큐멘터리에 새로운 얼굴의 영화들이 등장 했다. <농민가>를 연출한 윤덕현 감독도 처음 들어보는 감독이고, <워낭 소리>의 이충렬 감독도 방송 쪽에 있던 사람이다. 그런 영화들이 자극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극영화도 논란이 예상되는 영화들이 많다. 사람에 따라서는 보기 힘들어할 영화도 있다. 물론 다 만족스럽진 않지만 상대적으로 올해 장편 경쟁 같은 경우 조금 선명하게 가려고 노력했다.

틀을 깨는 새로운 영화, 철학을 찾아서

새로운 영화들이 등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건가.

마츠모토 토시오가 쓴 <영상의 발견>이라는 책이 있다. 이 사람의 말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이 ‘어느 시대에나 뛰어난 작품은 있다. 그러나 그 뛰어난 작품을 발굴하는 눈이 없을 뿐이다’이다. 그게 맞는 말 같다. 분명히 새로운 시각을 가진 영화들이 있는데, 그게 어떤 관성에 의해, 지금까지 상영해온 영화의 미학적 틀이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누락될 수 있다. 현재 어디에서 새로운 영화가 등장하고 있는지 눈을 돌려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독립영화인으로서 현재 고민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주로 하는 일을 통해서 독립영화를 바라보고 걱정하고 기대할 수밖에 없는데 난 평론가이기 때문에 비평의 차원에서 고민이 있다. 주류영화도 마찬가지인데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하는 관행이 독립영화에도 있다. 솔직히 감독들과 많이 가까워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창작과 비평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있어야 할 것 같다. 근데 독립영화인이라고 통칭되면 그게 더 어렵다. 사실 사람들이 독립영화에 대해 글 쓰는 것을 되게 부담스러워 한다. 특히 안 좋게 본 영화는. 근데 이제 써야 할 것 같다.

한독협의 새로운 10년을 위한 제언을 해달라.

공부하자.(웃음) 한독협이 약간은 비대해졌다고 생각한다. 상대적으로 몸과 손발이 커진 것에 비해 머리는 커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외연이 확대되고 한국영화계에서 한독협이라는 단체의 입지도 과거와 다르게 매우 커졌는데 거기에 걸맞는 정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 한창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운동을 했었는데, 결국 유야무야 됐다. 만약 정책을 갖고 했다면 그게 끊어져서는 안 된다. 또 그 때 예술, 독립영화 의무 상영에 관한 ‘마이너쿼터’에 대한 얘기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 누구도 얘기하지 않는다. 이럴 때 한독협이 정책과 철학을 갖고 영화 문화를 이끌어가야 한다. 그런 면에서 지금은 사업보다는 정책 강화가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컬처뉴스 김나라 기자, 필름온 안효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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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1 17:01

장르 비평을 넘어서 - 컬처뉴스, 하이브리드 비평상 공모

장르의 경계를 넘어서는 예술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다. 홍성민의 토털시어터 <앨리스>
▲ 장르의 경계를 넘어서는 예술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다. 홍성민의 토털시어터 <앨리스>

현대예술에서 장르는 참 고약한 문제가 됐다. 여전히 장르의 틀은 견고하고 제도로서의 장르라는 공간 역시 여전히 유효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은 물론, 장르 간을 가로지르는 실험 등은 전통적인 예술개념으로 포괄할 수 없는 새로운 예술활동을 끊임없이 탄생시키고 있으며 장르라는 구분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최근 다원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관련 활동들이 부쩍 늘어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렇다면, 비평은 어떨까. 이미 대중적인 반향을 얻지 못한다는 회의적인 시선이 가득한 한켠에는 비평 역시 장르라는 안전한 제도 내에서 자신의 생존만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닐까.

컬처뉴스는 비평이 장르 내부의 관습적인 틀에 안주하고 있다는 인식 하에 '하이브리드 비평상'을 공모한다. 하이브리드 비평상은 ‘복합장르, 두 장르(분야) 이상의 예술현상에 대한 비평을 통해 작금의 예술현실을 진단하고 예술의 사회적 소통을 모색하는 비평작업’으로 장르의 틀에 갇히지 않는 새로운 비평을 모색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번 공모는 기성, 신인을 망라한 40세 이하의 젊은 비평가를 대상으로 하며 분량은 원고지 30매 안팎이다. 당선작에는 150만원, 가작에는 50만원의 상금이 주어진다. 선별된 필자들은 차후 컬처뉴스의 고정필진으로 활동하게 된다.

마감은 2009년 1월 30일(금)까지. 응모는 이메일(cnews33@hanmail.net)로만 접수한다. 문의 컬처뉴스 편집실(02-739-6851, cnews33@hanmail.net)



안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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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9 15:35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 - ①]'한국독립영화의 아버지' 김동원 감독

10월 23일 푸른영상 사무실에서 김동원 감독을 만났다.
▲ 10월 23일 푸른영상 사무실에서 김동원 감독을 만났다.

한국독립영화협회(한독협)가 10주년을 맞았다. 한때 생소하기만 했던 ‘독립영화’라는 존재의 정체성 확립과 자리매김의 역사는 한독협의 10년 역사와 나란히 놓여져 있다. 영화인들이 자본과 검열로부터 ‘독립’해 진정한 의미의 ‘표현의 자유’를 누리기까지 한독협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줬다. 컬처뉴스는 한독협 탄생 10년을 맞아 독립영화계의 10년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시대 한독협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해 보고자 감독, 배우, 활동가, 제작자 등 독립영화인들 10명의 인터뷰를 기획했다. 이번 기획은 한독협 사무국과 팀블로그 필름온이 함께해 이루어졌다.

첫번째 인터뷰 대상자는 '한국독립영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송환>의 김동원 감독이다. 여러모로 한국 독립영화계의 상징적인 인물인 김동원 감독은 한독협의 초기 모습과 현재의 지점을 역사적인 맥락에 위치시켜 새롭게 보게해 준다. 그가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에 입문하고 활동하게 된 계기들 역시 놓치기 아까운 역사의 기록이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 바란다. / 편집자.

독립영화, 무에서 유를 만들다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소감 한 마디 해 달라.

김동원 감독: ‘벌써 10년인가’하는 생각이 든다. 내 나이 또래는 세월이 빨리 가니까.(웃음) 한편으론 독립영화 활동한지 오래됐는데 10년밖에 안됐나 싶기도 하고. 내가 초대 이사장을 하면서 한독협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현재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조영각 사무국장하고 어린 사무원은 그 때 월급 20만원씩 받고 시작했다.

독립영화계에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예상했던 것인가. 

이런 날이 올지 몰랐다. 지금은 미디어 센터, 독립영화전용관, 독립영화 제작지원제도 등이 생겼다. 이런 건 외국사례로 말로만 듣던 것들인데, 일반 영화계에서 질투할 만하다.(웃음) 막 없던 게 생기고 점점 늘어나니까, 있던 게 없어진 사람들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독립영화계만 편애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근데 지원금 총액으로 보면 굉장히 작다. 

그만큼 독립영화계가 가시적인 변화를 일으켰다는 반증이 아닌가 한다.  

무엇보다 10년 전만해도 독립영화라는 말을 할 때 약간 켕기는 게 있었다. 그때 독립영화하면 반정부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당시 영화진흥공사(현 영진위)에 독립영화라는 말이나, 독립영화 지원은 없었다. 또 영진위 1기 위원회 생기고도 몇 년간은 없었고, 그 이후에 생겼다. 독립영화라는 단어를 공식화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 강한섭 위원장이 다시 뺀다고 한다. ‘작은 영화’ 이런 식으로 바꾼다고.

작은 영화라... 김동원 감독이 다큐멘터리를 시작한 게 20년이 지났는데, 독립영화란 말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난 원래 상업영화 지망생이었고, 독립영화란 말도 없었다. 1980년대 얄라성이나 장산곶매 등에서 영화를 만들고, 미국식 개념의 이름을 붙여준 거다. 사실 미국식 개념과는 많이 다른데,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사실 나는 독립영화를 하려고 한 건 아니다. 상업영화 조감독을 했는데 이게 나랑 안 맞더라. 당시 전두환 정권 때 이런저런 일이 많았는데 방송에서는 누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때 내가 결혼식 비디오를 찍은 아르바이트를 했을 땐데, 사회의 모습을 찍어서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날라리, 가장 감동적인 올림픽을 만나다

원래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나. 김동원 감독의 젊은 시절이 궁금하다.

날라리였다. 데모도 안했고.(웃음) 1970년대에 학교를 다녔는데 당시엔 운동권이란 개념도 없었다. 언더그라운드에는 좀 있었는데 그때는 몰랐다. 난 연극 많이 하고, 놀기 좋아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 때 무의식적으로 뭔가 답답함을 느꼈다. 고등학교 때는 ‘왜 우리학교는 데모 안하지? 데모하면 휴교하는데’하면서 데모가 나길 원하기도 했다. 출처가 불분명한 유인물 만들어서 뿌리기도 했다. 휴교 때문에. 그런 걸 보면 약간 반골 기질이 있었나 보다. 그런 게 정리가 안 되다가 상계동 가서 정리가 됐다. 사회과학 책도 한두 권 읽어봤지만 전혀 안 와 닿았는데, 상계동 가서 구조적 모순이라는 걸 느끼게 됐다.

상계동에 어떻게 들어간 건가.

상계동 철거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내가 아는 신부님이 거기 들어가 계셨는데 강제철거 당하는 장면을 증거자료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하셨다. 하루만 와서 촬영해달라고 부탁을 하셨다. 그게 내 팔자를 바꿀 줄을 몰랐다.

처음 <상계동 올림픽>을 촬영할 때 ‘다큐멘터리는 이런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었나.

처음에는 관심도 없었고, 또 당시 우리나라에는 필름으로 만든 다큐멘터리도 거의 없었다. 대학 영화과에서도 단편영화제를 했지만 다큐멘터리는 없었다. 서울영화집단에서 8미리 필름으로 십 분짜리 다큐멘터리를 1985, 6년인가에 만든 게 전부였다. 그저 머릿속에는 TV에서 본, ‘추적 60분’유의 다큐멘터리만 있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그런 관성들을 떨쳐버리기 힘들었다. 그런데 외국 나가서 여러 다큐멘터리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보니까 ‘아 다큐멘터리가 할 만한 거구나’ 싶었다. 상계동 시절에는 전혀 몰랐는데, 가서 보니까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작품들이 있었다. 그 때 ‘다큐멘터리의 영역이 이렇게 넓구나’ 했다.

그 이후에 다큐멘터리의 매력을 느낀 건가? 어떤 매력을 느껴서 다큐멘터리를 계속하게 된 건가.

조연출을 한 4년 정도 했는데, 현장이 지겨웠다. 촬영할 때도 긴장감을 못 느꼈다. 그런데 상계동에서 철거 현장을 찍을 때, 특히 위험한 상황에서 철거 깡패들이 위협해도 전혀 무섭지가 않은 거다. 카메라가 알아서 막 돌아다니는 신들린 경험을 했는데, 그게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다. 촬영하는 게 이런 거구나. 또 철거, 투쟁 현장 모습들이 외부에 알려지기 힘든 상황에 <상계동 올림픽>을 발표했는데, 엉성하게 만들었지만 대학가에서 상영되고 그러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 때 다큐멘터리의 굉장한 힘을 느꼈다.

그래도 뭔가 손에 잡히지 않을 시절,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았을 거 같다.

<상계동 올림픽> 하면서 사회가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촬영할게 많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외국영화 직배 관련해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는데 정지영 감독이 나에게 ‘다큐멘터리를 해라. 극영화 하는 사람은 많지 않냐. 넌 잘할 것 같고, 너라도 해야 한다’라고 하더라.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닌 것 같고, 싫지도 않고, 또 극영화가 잘 안 풀리고 해서 다큐멘터리의 길을 걷게 됐다. 그렇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 길을 걷게 됐다.

총 제작기간만 12년이 걸린 <송환>은 비전향 장기수를 다룬 다큐멘터리로, 2004년 선댄스영화제 '표현의 자유상'을 시상하기도 했다.

투사? 난 그런 사람 아니다

1990년대에 <송환> 촬영하랴, <명성 그 6일의 기억> 발표하랴 정신없었을 거 같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부터 장기수들이 출소하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경험한 사람이니까 저분들의 증언은 기록할 필요가 있다 생각해 촬영을 시작했다. 사실 그걸 어떻게 쓸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에 장기수들의 삶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어머니들이 함께 벌인 석방운동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몇 편 나왔다. 그 때까지만 해도 <송환>에 대한 생각도 없었고, 그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다. 사실 내가 오며가며 찍은 거지 찍어야겠다 해서 찍은 게 별로 없었다.(웃음)

 그럼 <송환>은 어떻게 나오게 된 건가.

1999년 초부터 송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그들의 송환을 돕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사회적으로 이슈화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남북정상회담하면서 송환이 급물살을 타면서 엄청 급해졌다. 그 다음 6월부터 9월까지는 정신없이 찍었다. 그 전에는 판판히 놀다가.(웃음)
 
1990년대 들어오면서 한국 다큐멘터리의 파이가 커졌다. 주로 어떤 사람들이 촬영했고 어떤 관심을 가졌나.

지금도 우리나라 다큐멘터리는 액티비즘, 즉 투쟁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1980년대에는 당연히 그래야한다고 생각했고. 서울영상집단, 노동자뉴스제작단(이하 노뉴단) 등의 집단은 일종의 운동으로 한 거다. 노뉴단은 노동운동, 서울영상집단이나 민족문제연구소, 민족영화연구소 등은 그 외 사회문제를 다뤘다. 한국의 다큐멘터리는 태생단계의 특수성 때문에 액티비즘이 강하다.

김동원 감독은 어느 편에 속했나.

난 아무데도 속해있지 않았다. 굳이 얘기하면 빈민운동 쪽인데, 빈민지역 청년들과 활동을 하면서도 작업은 혼자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내가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정체성은 없었다. 영화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는 현장의 기록이고, 일상이었다. 빈민운동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했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느 순간에 찾았나.

나는 아직도 감독이라는 말을 안 좋아한다. 난 다큐멘터리에서 감독이 너무 앞서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무리 감독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해도 감독이라고 부르고, 또 ‘그럼 뭐라고 부르냐’고 하니까 이젠 그냥 ‘맘대로 부르라’고 한다.(웃음) 감독이라는 말이 옛날보다는 많이 거슬리지는 않는다. 옛날에는 엄정한 사실성, 객관성 이런 것들이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래야 하는 줄로 알았는데 요즘에는 다큐멘터리도 연출을 해도 괜찮다는 게 일반적이니까. 내가 아무리 연출을 안 하려고 해도 할 수밖에 없다.

작업을 하면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경우도 많이 있었겠다.

글쎄, 잡혀갔던 거?(웃음) 푸른영상 하면서 몇 번 잡혀갔다. 1993부터 2년 터울로. 그 때만해도 영화법이 손질되기 전이고, 장기수들을 찍는다는 게 시찰 대상이었다. 안기부 직원한테 매일 안부전화를 받았으니. 그쪽에서 조작간첩 사건들과 엮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잘 안됐다. 1996년에는 심의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음란비디오 단속법을 걸고 넘어졌다. 참, 음란비디오라니. 그 외에도 청소년 보호법, 국가 보안법 등 다양하게 조사받았다. 다행이 변호사를 잘 만나서 기각시켰다. 

투쟁의 역사다.(웃음)

투쟁은 무슨.(웃음) 난 투쟁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냥 내가 그걸로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잘못한 것도 없으니 당당한 거다. 심의를 받으려면 10분에 얼마 돈을 내야 하는데 내가 골이 비었나.(웃음) 여하튼 몇 번 들어갔다 나오면서 이미지가 그렇게 됐는데, 내가 용감해서 싸운 건 아니다. 그냥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 때문에 그런 거 같다.

김동원 감독은 2004년 선댄스영화제 표현의 자유상(<송환>) 등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한국 다큐멘터리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이면의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면서 주변의 따가운 시선도 받을 거 같다.

글쎄. ‘왜 이렇게 구질구질한 얘기만 하냐’는 사람은 있지만 따갑지는 않다. 당연히 알려야 할 이야기고. 지금은 방송에서 그런 얘기를 많이 하지만, 그때만 해도 전혀 안했는데 당연히 나라도 해야지 그랬다.


한독협. 힘든 시작, 지금은 괜찮아 무엇이든!

한독협이 세워지기 전, 독립영화인들은 어디를 구심점으로 모였나.

1991년에 독립영화협의회라는 단체가 세워졌다. 내가 의장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거기는 구속이 너무 많았다. 그 때만 해도 운동한다는 기분으로 작업을 했고, 모여 봤자 운동하는 독립영화인들만 모이는 거 같고. 1990년대 중반 넘어가고, 독립영화계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다양한 독립영화인들과 함께 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립영화가 뭐냐’ 하는 정체성 논란도 있었고, 일련의 산통 끝에 한독협이 생겼다.

한독협이 생기고 어려움은 없었나.

내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웃음) 앞서 얘기한대로 한독협의 정체성 찾기가 가장 힘들었다. 한독협 초기에 독립영화협의회나 민예총 영화분과 등과 관계 설정하는 게 어려웠다. 1996년부터 한독협 설립 논의를 시작했으니까.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이 협회를 만든다는 거에 의구심 어린 시선도 있었고. 하여튼 초기에 발동 거는 게 좀 어려웠는데 발동 걸고 나서는 최근까지는 잘 굴러왔다고 생각한다.

영진위 3기 위원이었다. 어떻게 하게 됐나.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가면 회의만 많고, 그렇다고 독립영화에 관한 회의만 하는 것도 아니고. 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는데 가서 목소리를 내야 하니까, 가야 된다고 하니까 갔다. 별 재미는 없었다.(웃음)

어떤 목소리를 내고 싶었나.

목표가 너무 분명했다. 독립영화전용관 만드는 거. 10년 동안 만들자는 말만 있었지, 만들지 못했다. 더 이상 늦출 수 없었다. 난 다른 건 못해도 전용관 하나 만큼은 만들겠다는 각오로 들어갔다. 다른 영진위 위원들이 너무 적나라하게 의도를 내비치는 거 아니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런 독립영화인들의 노력 끝에 인디스페이스가 생겼다. 근데 인디스페이스가 위치한 중앙시네마 재건축 때문에 몇 년 안에 장소를 옮겨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럼 다른 곳을 찾아봐야겠지. 3기 영진위 때 미디어센터, 시네마테크, 독립영화전용관을 다 포괄하는 500억 규모의 복합상영관을 짓기로 서울시와 결정했다. 그런데 강한섭 위원장이 무슨 아시아센터를 건립한다고 한다. 지금 어떻게 진행 중인지 모르겠다.

규모를 500억에서 1,000억으로 늘린다고 들었다. 그런데 규모가 커지고, 새로운 사업계획을 만들면 그 만큼 그 과정이 늦춰지는 거 아닌가. 현재 미디어센터 미디액트나 서울아트시네마, 독립영화전용관 모두 공간 확보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아무래도 그런 측면이 있다. 음, 어떻게 보면 위기를 겪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어려움을 겪어보면 전화위복의 기회를 맞을 수 있다. 이건 좋은 극장이 생긴다는 측면이 아니라 독립영화인들에게 뭔가 좋은 공부가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하는 말이다.


다른 얼굴, 하지만 우린 가족이다

한독협 홈페이지를 보면 초기에는 게시판에 서로 안부도 묻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영화도 보고, 얘기도 하고, 술도 먹으면서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한독협 10주년을 맞이한 2008년. 지금 가장 큰 고민이 무엇인가.

글쎄. 내가 고민한다고 되나?(웃음) 이제 독립영화가 나름대로 사회적인 위상을 이제 갖게 됐다. 그런데 대안영화로서의 자기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영화가 잘 안 나오고 있다. ‘지금쯤 나올 때가 됐는데’하는 기대가 있는데 잘 그게 쉽지 않다. 예를 들어서 <은하해방전선>등 몇몇 작품은 기대를 많이 했고, 영화도 좋았음에도 불구라고 잘 안됐다. 영화는 관객과 함께 완성된다. 과연 이걸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보게 할 수 있을까. 영화가 안 좋은 게 아닌데, 왜 안볼까. 이런 고민들을 한다. 답 없는 고민.

최근에 등장하는 후배들의 작품들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나.

다큐멘터리만 보자면,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본 <워낭소리>란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좋았다. 나와 스타일은 다르지만 반가운 작품이다. <우린 액션배우다> <우리학교> 등 1년에 한 편씩은 문제작들이 나온다. 한편으론 기쁘고, 한편으로는 ‘아 이런 게 일 년에 열편은 나와야 하는데’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인 코드가 약해지고 있지만 그게 그렇게 아쉽지는 않다. 오히려 열심히 만들고, 진정성이 보이는 다큐멘터리가 1년에 3-4편만 나오면 좋겠다. 인디다큐페스티벌에 70여 편의 작품이 응모됐다고 한다. 아르헨티나만 해도 다큐멘터리 영화제 하면 700여 편이 응모된다고 하는데, 우린 고작 70여 편이다.

요즘 진행하고 있는 작업이 있나.

촛불 문화제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하고 있다. 올해는 촛불이 가장 활활 타지 않았나. 찍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간 건 아닌데, 나가다 보니 찍을 게 보이더라. 뭐 큰 건 아니지만 해야 할 거 같은 마음이 들어서 촛불 문화제에 대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독협의 또 다른 10년을 위한 제언을 해 달라.

제언이라. 아쉬운 건 한독협 홈페이지를 보면 초기에는 게시판에 서로 안부도 묻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물론 욕도 하고.(웃음) 뭔가 공동체적인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커져서 그런지 그렇지 못하다. 사실 이건 사업을 하는 게 아니다. 사업도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하는데.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끼리 식구라는 생각을 하면 좋겠다. 도움도 주고받고, 영화도 봐주고. 이런 커뮤니티가 활성화 되어야 하는데 그런 계기를 못 만들어 주는 거 같다. 여러 영화제가 그런 역할을 했는데 요즘엔 형식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영화도 보고, 얘기도 하고, 술도 먹으면서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 2008-10-28 오전 11:35:02  컬처뉴스 김나라 기자, 필름온 안효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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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2 15:07

사회는 우리를 패배자 혹은 노예라고 한다 - [영화소개]일본다큐멘터리특별전, 아와부치 히로키,《조난 프리타 遭難 フリーター》

영화는 꿈 꿀 수 없는 이 시대, 조난당한 청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 영화는 꿈 꿀 수 없는 이 시대, 조난당한 청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얼마 전 정부에서 공공부문 인턴 1만 명 채용 계획에 대해 발표했다. 대학 졸업생 또는 휴학생 대상, 월 100만원.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도 아니고 공무원 시험에 가산점이 붙는 것도 아닌, 별다른 혜택 없이 일시적으로 청년실업률을 낮추고자 하는 정부의 계획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이제 아예 정부가 나서서 계약직을 늘려 청년층에 ‘88만원 세대’ 낙인을 찍으려나 보다.

그런데 최근 10년 동안의 호황으로 일본의 대학생들은 취직 걱정 없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일본도 고용문제에서 자유롭지는 못한가 보다. 고이즈미 총리의 규제 완화 이후, 기업들은 파견사원이라는 이름 하에 계약직 직원을 채용해 해마다 엄청난 이익을 보고 있다. 일본 청년층의 소득 격차는 심화되고 있고 비정규직, 일용직 등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잇는 ‘프리타 족(Free+Arbeit의 일본식 조어)’은 더 늘었다. 티비에서는 아베 총리가 “젊으니까 다시 도전하라”고 말하고 있다.
영화는 꿈 꿀 수 없는 이 시대, 조난당한 청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감독은 대학 졸업 후 도쿄 근교에 있는 캐논 공장에서 일 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다. 가족들은 “그게 대학 나온 애가 할만한 일이냐”라지만 주중에는 공장에서 시급 1250엔을 받고 잉크병에 뚜껑 붙이는 일을 하고 주말에도 도쿄에 나가 일용직을 찾아야 겨우 생활이 가능하다.

사회는 우리를 패배자 혹은 노예라고 한다.
나는 누구에게 진 것일까? 나는 누구의 노예일까?

감독은 누구에게 이겨야만 비정규직 인생에서 벗어나 월급이 오르고 보너스도 있는 안정적인 직장을 가질 수 있을지 자문한다. 우연히 출연하게 된 NHK 방송 프로그램 속의 그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대변자’, ‘사회와 구조의 피해자’로 ‘연출’되지만 사실 감독 자신은 ‘사회 탓만은 할 수 없다’고도 생각한다.

도쿄에 있는 대학을 졸업한 후 큰 음반회사에 취직한 친구는 그에게 무슨 일을 하고 싶고 그걸 위해 뭘 하고 있냐고 묻는다. “글쎄...잡지사나 출판사 같은 곳에서 일하고 싶어. 확실하진 않지만…매일 조금씩 정보도 모으고…”어물거리는 그에게 돌아오는 친구의 말.
“넌 지금 아무것도 하는 게 없잖아. 내가 구직 활동 많이 했는데 너 그렇게 하면 왕쪽팔린거야. 그냥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해.”
순간 ‘왕쪽팔렸던’ 나의 구직 활동이 떠오르며 현재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내게 하는 말 같아 어두운 극장 안에서 혼자 낯을 붉혔다.

누가 잘못한 것일까? 누구 탓을 해야 하는 것일까? 점점 적어지는 ‘정규직’ 자릿수를 탓해야 하는 건지, 이력서 10만장까지 써 본 적 없는, 치열하게 살지 못했던 자신을 반성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영화 속에 “가득가득 일하고 싶어. 일하고 싶어~가득가득 웃고 싶어 행복 하고 싶어”라던 노랫말의 마음은 뚜렷이 와 닿았다. 구직 활동을 같이 했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 일하다 죽고 싶다”

봄, 여름, 가을을 지나고 겨울. 여전히 비정규직 노동자인 감독은 잘 곳을 찾지 못해 비 오는 밤거리를 무작정 걷는다. 밤새 발 길 닿는 대로 걷다보니, 비가 그치고 날이 밝아 온다. 멀리 바다가 보인다. 도쿄의 끝, 남쪽 바다. 밤새 방황하던 청춘은 말한다.

“자, 이제 돌아가 볼까. 나는 이제 겨우 입구에 도착했다.”



2008-09-29 오후 5:47:12 컬처뉴스 김나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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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2 14:58

아카펠라와 비트박스의 만남 - “스윙글 싱어즈” 새 음반 'Beauty and the Beatbox'

9월 22일 스윙글싱어즈의 신작 <Beauty and the Beatbox>가 발매되었다.
▲ 9월 22일 스윙글싱어즈의 신작 가 발매되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내 귓가에 속삭여 주며 아침 햇살에 나를 깨워달라는 마로니에의 노래 <칵테일 사랑>이 유행이던 시절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이 어떤 곡인지 잠시 궁금하기도 했었다. 어물쩍 사라져가는 유행가 따라 클래식에 대한 옅은 관심도 끝내 깊어질 날을 만나지 못했지만, 클래식은 화장품이나 가구 광고에서 늘상 들어오지 않았던가. 그러다 급기야 그 음악과 마주하게 되었으니 아, 이 음악이구나 싶다. 하지만 이 피아노협주곡은 피아노로 연주하지 않는다. 스윙글싱어즈가 부르는 아카펠라 버전의 모차르트인 까닭이다.

스윙글싱어즈의 새로운 음반 <Beauty and the Beatbox>를 소개하는 광고 문안에는 40년의 역사, 3,500번 이상의 콘서트, 50여 장의 음반, 5회의 그래미상 수상이라는 화려했던 지난날이 열거되어 있다. 화려한 경력이 음반의 질을 보장해 준다 치면 한국의 역대 최고 뮤지션은 단연 HOT가 아니겠는가. 일단 들어보자는 마음으로 앨범을 틀면 시작되는 베토벤의 운명, 이게 뭔가 싶다.

입으로 베토벤의 운명을 소리 내는 것만큼 결정적 순간을 과장하는 통속적이고 가소로운 상황 연출도 없을 거라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 음반이 웅장하지도, 비장하지도 않은 여성의 고음으로 운명을 연주하고 있는 것이다. 우스꽝스런 비장미를 앞세우는 건가 생각하는 것도 잠시, 이어지는 현란한 드럼 소리, 심벌 소리. 비트박스 연주자 쉬로모(Shlomo)의 등장, 그리고 현기증 나는 협연. 이래서 음반 제목이 <Beauty and the beatbox>구나 실감하게 된다.

이어지는 알비노니의 <아디지오>와 라벨의 <볼레로>. 거기에 멕시코 민요까지 이어질 땐 이들의 레퍼토리가 어디까지인지, 귀에 들리는 음악보다 앞으로 들을 음악에 더 관심이 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음반의 매력은 다양한 레퍼토리가 아니다. 기존에 너무도 익숙해 그 이상 어떤 연주나 편곡도 본래의 곡이 가진 매력을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을 가볍게 뒤집는 통쾌하면서도 유쾌한 반전이 준비되어 있다.

이들이 다시 연주하는 볼레로는 어떤 모습일까, 이들이 연주하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들으면 불어터진 눈두덩으로 아침잠과 싸우는 연인이 갑자기 예뻐 보이기라도 할까, 다음엔 어떤 음악 또 다음엔 어떤 음악. 연이은 궁금증은 급기야 그래 니들 어디까지 가나 두고 보자 하는 오기를 일으키고, 실망스런 점을 찾고야 말겠다는 악랄한 트집 잡기마저 부리게 만들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음반의 첫 곡으로 돌아가 있다.

거기에 가장 최근 편곡되었다는 'It's Sand, Man!'은 흥겨운 상상력을 부채질한다. 미시시피 강을 건너는 증기선 안에서 시끌벅적한 빅밴드 연주를 들으며 되지도 않는 춤을 춰대는 나이 먹은 톰 소여를 상상하게 하다가, 사무실이든 도보 위든 갑작스럽게 춤과 노래 판이 벌어졌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이 진행되는 뜬금없는 뮤지컬 속에 놓인 나 자신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듣기도 전에 이들의 이름만으로 음반의 질을 의심치 않게 만드는 것은 역시 늘 새로운 시도를 하고 독창적으로 음악을 해석해 온 이들의 오랜 노력의 과정 때문이다. 그리고 40년 내내 고수해온 지독한 연습은 급기야 <Beauty and the Beatbox>라는 먹을 것 많은 소문난 잔치 같은 수작을 만들어내었다.


 

2008-09-26 오후 4:07:02   컬처뉴스 이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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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2 14:43

여성주의에서 에코페미니즘으로 - 윤석남 개인전 《사람과 사람없이》

윤석남 개인전 《사람과 사람없이》전이 아르코 미술관에서 11월 9일까지 열린다.
▲ 윤석남 개인전 《사람과 사람없이》전이 아르코 미술관에서 11월 9일까지 열린다.

1,025개의 눈빛들. 차마 맞서보기 애처롭도록 퀭한 눈빛이 있는가하면 천진난만한 발랄함이 있다. 맘이 시리도록 쓸쓸한 눈빛이 있는가하면 무덤덤한 체념의 기운이 맴돈다. 아르코 미술관에서 26일 개막한 윤석남 개인전 《사람과 사람없이》전에는 1,025개의 나무조각이 설치되어 있다. 자세히 보면 어떤 작품은 희미한 형상만 남아있고, 윤곽조차 흐릿한 작품마저 보인다.

놀라지 마시라. 전시장을 가득 채운 작품들은 모두 개를 조각한 것이다. 작가가 3년 동안이나 자신의 동생과 함께 나무를 자르고 깎고, 그림을 그려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유기견을 주제로 해서일까. 작품들에서는 어딘가 모르게 아픔을 간직한 표정이 드러난다.

작가가 유기견을 주제로 작업을 하게 된 것은 5년 전의 일이다. 신문에서 1,025마리의 유기견을 거두어 기르는 이애신 할머니의 기사를 본 작가는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의 느낌을 작가 자신은 “인간이 너무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한다. ‘애신의 집’을 직접 방문한 후부터 긴 작업이 시작됐다. 작가는 그때의 충격이 너무 생생해 차마 다시 애신의 집을 다시 찾지는 못했다고 전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우선 그 많은 수의 작품에 놀라고 개들의 표정과 형태가 그토록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는 데 놀란다. 1, 2층으로 구성된 전시실의 1층은 무채색의 작품들이 어두운 조명 아래 설치되어 병들고 아픈 개들을 보여준다. 반면 2층은 강렬한 색상표현으로 건강하고 씩씩한 개들을 표현했다. 작가가 애신의 집을 찾았을 때 150여 마리의 개들이 한꺼번에 작가에게 달려드는데 그렇게 튼튼하고 예쁜 개들마저 버림을 받는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웠다고 한다. 나머지 개들은 밖에 내놓지 못하고 별도의 막사 안에 들어있었는데, 사람을 봐도 꼼짝 않고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살아있다는 자각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1층에 전시된 작품 중 흐릿한 형태나 외관만 남은 작품들은 생사마저 불분명한 개들을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5년 동안 작품을 제작하며 버려진 존재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던 작가는 자연스레 채식을 하게 됐다. ‘남의 살을 먹는 일’이 끔찍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윤석남은 한국의 여성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다. 버려진 나무와 빨래판으로 어머니와 여성을 표현한 그의 작품은 미술에 관심이 적은 이라도 한번은 접해봤음직한 이미지다. 정규미술교육을 받지도 않은 그녀는 나이 마흔에 미술을 시작해 30년 동안 여성미술을 꾸준히 실천해 왔다. ‘실천’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은 작가가 개인 창작에만 머무르지 않고 ‘또 하나의 문화’ 동인, 여성문화예술기획 이사장, 페미니스트 잡지 ‘이프’의 발행인 등 다양한 사회적 활동 속에 자신의 작업을 위치시키며 활동의 폭을 넓혀왔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 역시 그런 측면에서 자연스러운 확장으로 느껴진다. 유기견이라는 주제가 여성주의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돌봄노동’이라는 시대의 화두에 걸맞는 인식과 실천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꼭, 유기견만의 문제가 아니라 소외되고 버려진 존재, 소수자와 약자의 현실이 작품 안에 고스란히 배어 있는 것은 작가의 지향과 활동이 작품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에코페미니즘(생태여성주의)를 표방하지는 않지만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생태여성주의의 지향을 공유하게 됐다는 것을 전시는 보여주고 있다.

2층 전시장 한켠에는 ‘윤석남의 방’이 설치되어 작가의 과거 작업을 슬라이드로 감상할 수 있으며, 한국 페미니즘 미술과 생태여성주의에 대한 주요 문헌을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는 전시와 관련된 프로그램들이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 26일 전시개막 당일에는 김금화 만신이 오프닝 퍼포먼스로 ‘진혼굿’을 열며, 전시기간 중인 10월 18일(토)에는 2001년 타계한 일본의 미술사학자 지노 가오리 교수의 추모강연이 열린다. 추모강연에는 윤석남 작가가 직접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강연할 예정이다. 10월 11일(토)과 24일(토) 오후 5시에는 아르코미술관 세미나실에서 야생동물 교통사고에 대한 다큐멘터리 <어느날 그 길에서>(황윤)와 생명에 대한 성찰을 담은 이형석의 단편영화 <호흡법, 제2장>, <155마일>이 상영된다.

전시는 11월 9일까지 계속된다. 입장료 어른 2,000원, 어린이 1,000원. 문의 아르코미술관(02-760-4724)



  
* 2008-09-26 오후 3:51:44  컬처뉴스 안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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