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09.03.09 워낭소리, 초월적 우정의 기막힌 전도
  2. 2009.02.17 빅뱅을 지켜라! (26)
  3. 2009.02.12 누가, 얼마나 바보인가
  4. 2009.01.10 경제 예측을 거부하라
  5. 2009.01.06 흑백 가른 오바마, 남북 가른 이명박
  6. 2008.12.24 성폭행도 양육의 일부라 생각하는 분들께 바칩니다 (1)
  7. 2008.12.17 5년간 꺼지지 않을 촛불들의 이야기
2009.03.09 09:27

워낭소리, 초월적 우정의 기막힌 전도

소와 노인의 우정이 은폐하는 풍경들
                                                                                                                박우성 _ 영화 칼럼니스트
<워낭소리>의 초월적 우정은 현실적 비탄으로부터 눈을 감아버림으로써 비로소 성립된 게 아닐까?
▲ <워낭소리>의 초월적 우정은 현실적 비탄으로부터 눈을 감아버림으로써 비로소 성립된 게 아닐까?

나는 <워낭소리>의 감독이 영화를 둘러싼 예상치 못한 사태들을 두고 ‘무섭다’고 한 것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이것은 결코 복에 겨운 수사적 넋두리가 아니다. 무서운 속도로 찾아드는 관객들이 무섭고, 경북 봉화에 직접 찾아가 영화의 주인공에게 돈까지 건네며 사진 한 장 찍자고 해도 크게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하는 일부 관객의 뻔뻔함이 무섭고, 그것에 발맞추어 아예 그곳을 관광 상품으로 만들겠다는 지자체의 속물근성 역시 무섭다. 하지만 예측건대 가장 무서운 것은, 취임 후 처음으로 대통령이 직접 납시어 <워낭소리>를 봐버렸다는 게 아닐까? 그것은 결코 간단한 사안이 아니다. 독립영화의 발전을 위해서라고? 골계의 극치다. 반대로, 대통령이 그것을 봤다는 것은, 대통령이 봐도 크게 문제될 게 없다는, 대통령도 봤으니까 국민 여러분도 봐도 된다는 혹은 반드시 봐야만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다름 아니라 그것은 대통령이 만천하에 영화를 ‘허락’한 사태인 것이다.

최근 <워낭소리>를 둘러싼 논쟁이 화제다. 요컨대 영화가 작위적인 편집방법, 그러니까 소가 눈물 흘리는 이미지를 두 군데의 핵심 장면에 억지로 집어넣어 관객의 감동을 기만적으로 조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너무나 타당한 지적이다. 게다가 이는 단지 편집에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가령 자막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워낭소리>는 인물들의 말(음성)을 화면의 우측 하단의 자막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굳이 ‘번역’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것이 음성중심의 지역어(방언)를 문자중심의 국민국가언어(표준어)로 확대생산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막(표준어) 덕분에 우리는 너무나 편하게 영화에 빠져들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지나치게 그것에 의존하다보니 정작 사운드(특히 음성언어)나 이미지 자체를 등한시해버리는 기만이 발생한다. 더구나 ‘번역’의 전 과정에 새겨진 감독의 입김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런 식의 논쟁이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접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결국에 그것은 ‘다큐는 작위적(가짜 혹은 픽션)이어서는 안 된다’ 식의 계몽적 언명으로 수렴될 뿐이다. 정말이지 다큐영화는 ‘진짜’를 ‘진짜의 방법’으로만 다루어야 하는가? 아니, 애초에 그런 것들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감히 말하건대 나는, <워낭소리>가 배치한 작위적 장치보다, 영화를 그런 식의 ‘진짜(다큐)/가짜(극영화)’로 구분하려는 태도가, 훨씬 더 작위적이라 생각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가 설사 작위적인 장치에 기만당한다 하더라도 크게 기분 나빠할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점이다. 속아도 상관없다는 말이 아니다. 반대로 과연 몇 명의 관객이 정말이지 소(牛)가 바로 그 절묘한 순간에 ‘인간적인’ 눈물을 흘렸다고 있는 그대로 믿어버리겠는가? 그러기에는 작위적 장치의 도식이 너무나 거칠다. 그런데 분명 속지 않았음에도, 그러나 감동해버린다면?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속아버린다면? 주목해야 할 것은 단지 속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영화가 작위적으로 감동을 조장한다는 것을 분명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쉽게 감동해버리는 사태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워낭소리>만의 특출한 방식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보편적이다. 일테면 최근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드라마만 해도 그렇다. 그것은 과장이라는 것을 굳이 감추지 않고(아니 오히려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반대로 우리는 그것이 허위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주체적으로’ 휘둘려버린다. 하물며 광고의 경우는 또 어떠한가? 이런 점에서 나는 기만성이 뻔히 보이는 장치들이 아니라 반대로 결코 기만적으로 보이지 않는, 그리하여 영화를 보는 내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장치들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말장난 같지만 단순한 작위성이 아니라 작위적이지 않은 것들의 작위성, 기만적이지 않은 것들의 기만성 말이다. 

알다시피 <워낭소리>의 영어 제목은 'Old Partner'다. 물론 그것은 ‘워낭소리’의 명시적 의미, 즉 노인과 소의 우정을 지시한다. 처음부터 영화는 노인과 소의 우정, 그것도 몇 십 년이 넘는 우정을 그리겠노라 선언하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사소해보이지만 내가 볼 때 이것이야 말로 간단히 넘어가서는 안 될 문제다. 실제로 확인해 보니 <워낭소리>에 노인과 소의 우정 따위는 없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워낭소리>가 <워낭소리>일 수 있는 공리(公理)이며, 그렇기에 결코 무너져서는 안 될 경계이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선험적으로 그냥 그렇게 주어지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점이다. 역으로 영화 <워낭소리>는 공리(경계=우정)를 사수하기 위해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장치를 동원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앞서 인물들의 말이 대부분 심한 사투리로 발화되기 때문에 쉽게 알아들을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하여 감독은 자막을 사용한 것이지만, 그런데 개중에는 굳이 그런 식의 도움 없이도 누구나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발화가 있다. 예상했다시피 그것은 할아버지의 중얼거림, 즉 ‘아파’이다. 그런데 <워낭소리>에서 할아버지는 그냥 아픈 게 아니다. 물론 이것 역시 할아버지께서 실제로는 편찮으시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반대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제 할아버지의 건강과는 별도로 적절한 영화적 조율을 거쳐 철저히 구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파’의 중얼거림이 본격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하는 지점은 정확히 수의사의 발언이 있은 직후, 즉 소가 채 일 년도 살지 못할 거라는 진단이 나온 이후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볼 때 그것은 둘이 함께 죽어가고 있다는 운명론적 징후 혹은 설정된 것으로서의 ‘동병상련’이다. 쉽게 말해 영화에서 노인은 그냥 혼자서 아픈 게 아니라 소가 아프니까 아픈 거다. 소 역시 그냥 아픈 게 아니라 할아버지가 아프니까 아픈 거다. 요컨대 우리는 이런 식의 조율로 물 흐르듯 구성되는 상상적 동일화(=우정)의 광경을 뚜렷하게 목격한다.

물론 그것만이 아니다. 사실 <워낭소리>의 초반부는 다소 불편하다. 다 죽어가는 소가 노인이 탄 달구지를 너무나 힘겹게 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인과 소의 우정이 깨지고 마는가? 아니다. 상황은 오히려 정반대다. 구축을 위한 일시적 탈구축이었다고나 할까? 그것과 병행하여 이어지는 장면들에서 이제는 소의 힘겨움만큼이나 힘겹게 소의 먹잇감을 구하는 노인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둘의 관계는 철저히 쌍방향적이다. 더구나 클로즈업된 할아버지의 앙상한 다리 옆의 또 정확히 그만큼 앙상한 소의 체구를 확인하시라. 아니, 영화가 영사되는 동안 지속적으로 우리의 귀를 자극하는 워낭소리 자체가 둘의 커뮤니케이션(=우정)을 끊임없이 구성하는 음성적 기표이다. 물론 노인과 소 사이를 질투하는 할머니만큼은 조금 다르게 해석할 수 있겠다. 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닌 것이, 할머니가 소가 죽어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말하는 이유는, 소가 빨리 죽어버렸으면 하는 게 아니라, 죽음이야 말로 소와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구시대적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게끔 하는 유일한 해방구이기 때문이다. 물론 소의 입장에서 죽음이라는 사태는 가혹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과 할머니의 진심은 별개다. 더구나 할머니는 몇 차례나 영감이 죽으면 따라 죽겠다고 선언하지 않는가. 말하자면 표면적으로는 엇갈리는 듯한 삼각관계가 실은 단단히 묶여 있는 상상적 동일화이자 우정의 공동체인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공동체는 해질녘 역광으로 잡힌 노인과 소의 초월적 미장센으로 기어이 완결된다.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 말하는데, 나는 지금 실제 경북 봉화의 할아버님과 이미 세상을 떠난 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더구나 앞서도 강조했듯 둘의 관계가 그다지 특별할 게 없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결코 아니다. 분명 할아버님과 소는 감히 몇 마디 말 따위로 표현할 수 없는 각고의 인연을 형성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내가 여기서 거론할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할아버님과 노인의 실제 관계가 영화가 그려내는 식의 운명론적 우정과는 결코 동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설사 할아버님과 소의 우정이 존재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카메라에 포착되는 한, 그리하여 편집과정을 거치고 다양한 영화적 기법 속에 재현되어버린 이상, 작위성의 침입을 막을 길은 없다. 말하자면 그 각고의 인연은 영화라는 매개체를 거치면서 보다 일관되게, 보다 가지런하게, 보다 균질적으로 계량화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워낭소리>는 실제의 그것보다 휠씬 더 딱딱하고 견고하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주의사항 하나! 방금 말한 실제 현실과 영화적 재현 사이의 관계를 혼동해버리면 위험하다는 점이다. 그것을 혼동하는 순간 경북 봉화의 할아버님과 할머님은 돈을 주고 사진을 찍어도 크게 문제될 게 없는 객체 혹은 관광 상품의 도구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영화의 상상적 균질화가 너무나 부드럽게 형성되는 탓에, 그것을 능동적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2월 15일 대학로 동숭아트센터에서 <워낭소리>를 관람했다.

그것과 더불어 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구성하는 상상적 경계가 자연스럽다 못해 지나치다는 것, 그리하여 그 경계에 포함되지 않는 것들이 부정되거나 골계의 대상으로 결락되어버린다는 점이다. ‘경계 안(선)/경계 밖(악)’의 단순한 이분법을 논하자는 게 아니다. 문제는 경계의 안쪽(공동체=우정)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자폐성이다. 물론 이것 역시 상대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워낭소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어쩌면 몇몇 예외적 상황을 뺀 대부분의 영화는 나름대로의 경계 쌓기에 충실하다. 급기야 프레임 속에 담는다는 것 자체가 안(볼 수 있는 것)과 밖(볼 수 없는 것)의 경계설정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워낭소리>의 경계를 단지 그것이 지나치다 하여 무작정 비판할 수만은 없다. 그런데 경계를 설정한다는 것과 그것이 유발하는 배제와 누락의 사태는 전혀 다른 문제가 아닐까? 비유컨대 아무리 도시재개발이 필요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억울한 추방자가 생겨서는 안 되는 것처럼, 영화가 설정한 자명성으로부터 추방되어 부정되거나 희화화되는 존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따라 상황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더구나 그것이 함부로 부정되거나 희화화되어서는 안 되는 그 무엇이라고 할 때 사태는 심각하다.

쉽게 잊어버리지만 <워낭소리>에는 단지 한 마리의 소만 등장하는 게 아니다. 정확히 말해 세 마리의 소, 즉, 늙은 소, 늙은 소를 대체하기 위해 들여온 젊은 소, 그리고 젊은 소가 낳은 송아지가 있다. 그런데 혹시 젊은 소가 지나치게 탐욕적으로 보이지는 않던가? 가령 늙은 소의 여물을 힘으로 빼앗는 모습, 자기가 낳은 송아지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모습, 늙은 소가 힘겹게 달구지를 끌 때 마구간에서 여물만 씹던 모습들 말이다. 물론 이런 식의 반복은 정서적 대비를 환기하고 그 둘의 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예증한다. 그러니까 젊은 소는, 늙은 소를 대체하기 위해 거기 있었던 거지만, 그러나 처음부터 그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물론 젊은 소가 어디까지나 외부에서 온 침입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무슨 이유로 철저히 외부적인가? 그런데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하다. 바로 이 속에 노인과 소를 30년 동안 묶어 왔던 우정의 역사성 혹은 기원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바로 이 지점에서 상상적 동일화로 구축된 공동체(=우정)가 실은 배제해서는 안 될 것들을 누락시킴으로써 성립된 가공물이었음이 드러난다.

젊은 소가 외부적 침입자로 머물러야만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달구지를 끌기에는 젊은 소가 지나치게 방정맞다는 점. 그러니까 젊은 소가 노인에게 ‘일소’로서의 역량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 실제로 노인은 그것을 ‘일소’로 교화시키기 위해 무단히 애를 쓴다. 하지만 봤다시피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그렇다면 반대로 늙은 소의 경우는 어떠한가? 늙은 소가 30년 전에 공동체로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스럽게도’ 달구지를 충분히 끌고도 남을 ‘일소’로서의 역량을 보여줬기 때문은 아닐까? 이런 사항을 가정한다고 했을 때, 그렇다면 둘이 관계를 형성하는 결정적 계기는 다름 아니라, ‘동물에 대한 인간의 착취’ 혹은 ‘타자(자연)에 대한 주체의 사유화(인간)’였던 게 아닐까? 이것이야 말로 ‘일소’가 되지 못한 젊은 소가 멀리 팔려가면서 우리에게 던진 공동체(=우정)의 기원이다. 착취당할 조건이 성립되지 않거나 폭력의 행사에 반항하면 공동체로부터 어김없이 추방당한다는!

나는 지금 <워낭소리>가 은폐시킨 폭력성을 문제 삼고 있다. 균질적이고 초월적인 우정을 구축하기 위해 폭력을 은폐해버리는 사태 말이다. 그런데 한 발 더 나아가 비판해야 할 것은 그것을 위해서라면 폭력성 따위 정도는 은폐되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비윤리적 발상 바로 그것이다. 할머니의 잔소리에 짜증이 난 노인이 늙은 소를 마구 때리는 장면이 떠오른다. 동시에 소가 아니었으면 9남매를 못 키웠을 거라는 소리도 들린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전혀 작위적인 것으로 아니면 불편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소의 희생적 사랑이 아름다운 경북 봉화의 풍경과 어울려 숭고의 수준으로 승화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인간중심의 은유가 아닐까? 그리하여 오히려 그것은 9남매를 키우기 위해 소가 30년 동안이나 착취당했다는 뜻이 아닐까? 계속해서 클로즈업되는 할아버지의 불편한 발을 30년 동안 대신했을 뿐이라고? 그런데 왜 말 못하는 소가 구타당하면서까지 그런 책무를 떠맡아야만 하는가? 아니, 그 문제는 둘째로 치고, 그것을 두고 과연 <워낭소리>처럼 ‘Old Partner'라 지칭해버려도 되는 것인가? 이것이야 말로 너무나 작위적이고 기만적이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덧붙여, 여전히 노인은 아프다. 그리하여 오늘도 다 쓰러져 가는 늙은 소에게 고집스레 달구지를 맡기고 병원으로 향한다. 그런데 그 때, 우연치고는 너무나 기막힌 장면이 연출된다. 우시장(牛市場)으로 보이는 곳을 달구지가 지나갈 무렵 그 너머로 소고기의 수입을 반대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그런데 이 순간,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전도가 발생한다. 있는 그대로 따지자면 이 장면이야 말로 가장 슬퍼야 한다. 죽음의 그림자가 덧씌워진 운명론적 우정과 절대자본주의의 물결에 떠밀려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축산농가의 슬픈 표정이 오버랩될 거라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 극장을 가득 채운 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성숙하지 못한 관객을 문제시 하자는 게 아니다. 반대로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영화가 배열해 놓은 친절한 규칙들에 몰입했다는 사실 뿐이다. 그러니까 축산농가의 현실적 비탄 역시 어디까지나 운명적 절대경계 너머에 있을 뿐이고, 초월적 우정에 비해 그것은 오히려 속된 것으로까지 보이는 사태가 발생한다. 과연 그러하다면 <워낭소리>의 초월적 우정은 원래 그렇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현실적 비탄으로부터 눈을 감아버림으로써 나아가 그것을 추방시킴으로써 비로소 성립된 게 아닐까? 경계 너머의 풍경은 추방되거나 무시되거나 희화화되어도 문제될 게 없다는 인식은, 탈역사의 풍경이라는 기막힌 전도를 낳고 만다. 끝으로 이 장면을 보면서 누가 제일 흐뭇했을까? 그리하여 장관의 권유에 따라 대통령까지도 직접 납시어 <워낭소리>의 관람을 ‘허락’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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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7 08:24

빅뱅을 지켜라!

[편집자가 독자에게]누구를 위한 나라사랑 캠페인인가
                                                                                                                                     안태호 편집장
나라사랑 캠페인이 먼저일까요, 좋은 나라를 만드는 일이 먼저일까요. 저는 빅뱅 팬은 아니지만, 빅뱅이 나라사랑 찬가를 부르면 좀 우울할 것 같습니다.
▲ 나라사랑 캠페인이 먼저일까요, 좋은 나라를 만드는 일이 먼저일까요. 저는 빅뱅 팬은 아니지만, 빅뱅이 나라사랑 찬가를 부르면 좀 우울할 것 같습니다.

언젠가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아산 현충사를 두고 “충무공 기념관이 아니라 박정희 기념관 같은 곳이다”라는 발언을 해 곤욕을 치렀습니다. 이 말에 대해 민족의 성웅을 모독했다는 비판이 많았지만,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순신 영웅 만들기'에 유독 열을 올렸던 것은 비교적 많이 알려진 사실입니다. 충무공이 ‘박정희 대통령 만들기’의 도구로 쓰였던 것이 역사적 진실에 가깝다면, 현충사에 대해서 박정희 기념관이라고 표현한 것이 공직자로서 조금 도에 지나친 면이 있다손 쳐도 근본에서부터 엇나간 말은 아닌 셈이지요.

이순신 장군이 뜻하지 않게 독재자의 정당성을 위해 활용됐다지만, 그런 활용은 우리 시대에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당장 빅뱅이 ‘MB 찬가’를 부르게 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청와대는 올해 3·1절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0주년(4월13일)을 맞아 ‘나라사랑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전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언론에 의하면,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미래의 주역인 10∼20대 젊은이들의 애국심을 고취시켜 나라에 대한 의미를 자연스레 되새길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며 “나라사랑을 주제로 한 랩송을 만들어 전파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는군요. 청와대는 전문가에 의뢰해 일명 ‘힘내라! 대한민국’ 등의 랩송 등을 제작한 뒤 인기그룹 ‘빅뱅’을 비롯한 여러 유명 가수들이 돌아가면서 부르게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합니다.

한국처럼 대통령제가 강력한 나라에서 국가의 이미지는 대통령과 뗄레야 뗄 수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애국심 고취’ 노래는 ‘MB 예찬’과 그리 멀지 않을 듯합니다. 랩으로 만든다고 하니, 왠지 제가 군 시절 들었던 박진영의 ‘군진수칙’이 보여준 ‘아햏햏’함이 연상되기도 하는군요. 요즘에는 주로 유머게시판에서 떠돌아다니는 것 같긴 하지만.(그러고 보면 대선기간에 대운하예찬을 불렀던 이은하 씨도 생각이 납니다.)

백번 양보해 애국심마케팅이 국가운영 차원에서는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실제보다 부풀려진 마케팅을 해대면 ‘소비자’들이 배신감을 느낍니다. 제가 마케팅을 전공한 것은 아니지만, 마케팅은 기본적으로 상품의 핵심을 소비자들에게 전달하는 기술이지 없는 사실을 지어서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그런 왜곡과 과장을 거리낌없이 저지르는 건 마케팅이 아니라 사기에 가깝겠죠.

젊은 세대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행정력과 예산을 쏟아 붓기 전에, 당신들이 만들고 싶어 하는 나라가 어떤 곳인지 먼저 숙고해 봤으면 합니다. 그 나라는 최소한 당신들이 그렇게 맘을 얻고자 안달하는 젊은이들에게 좋은 나라입니까. 누구에게나 양질의 교육이 허락되고, 먹을 것을, 잠잘 곳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곳입니까. 일자리 하나를 얻기 위해 무한경쟁의 스트레스에 피를 말리지 않아도 되는 곳입니까. 쫓겨나지 않기 위해 골리앗에 올라가 악다구니를 쓰며 버둥거리지 않아도 되는 나라입니까.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나라사랑 캠페인이 먼저입니까, 좋은 나라 만들기가 먼저입니까. 애국심마케팅, 좋습니다. 그러나 애국심의 본령을 채울 내용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당신들의 나라가 1%만을 위한 파라다이스라면 애국심은 딱 그 1%에게만 기대하시는 게 좋습니다. 99%는 그에 적당한 방법으로 응해야 마땅합니다.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명백한 사기가 될 겁니다. 오히려 많은 이들이 대한민국에 사는 것이 이렇게 부끄러웠던 적이 없었다고 울음을 토하는 시절입니다. 썩은 곰팡이처럼 피어오르는 절망들을 힘없이 지켜보면서 나라를 사랑할 순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저는 빅뱅 팬은 아니지만, 빅뱅이 나라사랑 찬가를 부르면 좀 우울할 것 같습니다.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고, 저마다 누려야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아, 대한민국’의 가사가 새삼 가슴을 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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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2 10:07

누가, 얼마나 바보인가

[편집자가 독자에게]‘봉고차 모녀’와 삭제된 현실
                                                                                                                                     안태호 편집장
129 콜센터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
▲ 129 콜센터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

아지즈 네신을 아십니까? 풍자문학의 거장이자 실천적 지식이었던 그는 세상을 뜬 지금도 터키의 국민작가로 여전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저는 네신을 매우 좋아해서 “풍자는 세상을 웃음거리가 되는 것에서 구해준다”는 그의 격언을 항상 인용하곤 합니다.

오늘 소개하고 싶은 것은 국내에도 번역된 <생사불명 야샤르>라는 작품입니다. 주인공 야샤르는 아버지와 함께 동사무소를 갑니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주민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동사무소에서 놀라운 소식을 듣습니다. 야샤르가 아버지가 아직 꼬마였고 게다가 어머니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해에 벌어진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호적상에 기록되어 있었던 겁니다. 이 단순한 행정착오 때문에 야샤르의 인생은 완전히 배배꼬인 꽈배기마냥 뒤틀립니다. 야샤르의 아버지는 멀쩡히 살아있는 아이를 왜 죽은 사람 취급하느냐고 항의해보지만, 서류가 틀릴 수가 없다며 우겨대는 공무원들 앞에서 허탈하게 물러납니다.

결국 야샤르는 주민증이 없어서 학교도 못가고, 일자리도 얻지 못해 결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야샤르가 학교를 가기 위해 주민증을 발급받으려 할 때는 죽었다가, 세금을 내고 부채를 갚고 군대를 갈 때는 살아 있다가,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하고자 하니 다시 죽은 사람이 돼버린다는 겁니다.

야샤르가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관공서에서 요구하는 수많은 서류를 구비하려고 동분서주 뛰어다니는 장면도 압권입니다. 서류의 번호 하나가 누락되어 있다고 퇴짜를 맞은 야샤르는 번호를 받기 위해 다른 기관을 찾지만, 담당자는 자리를 비웠습니다. 담당자를 찾기 위해서 담당자가 만나러 간 다른 공무원을 찾지만 그 공무원은 또 다른 부서의 누군가와 만나고 있다고 하고 다른 부서의 누구는 커피를 마시러 나갔고 그 사람을 대체할 누구는 축구장엘 갔고 다시 그 사람을 대체할 누군가는 휴가를 갔고... 이 연쇄고리는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급기야, 관공서 내에서 자신처럼 번호 하나를 받기 위해 일년 이상 담당자를 찾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한 야샤르는 절망에 빠지게 되지요.

아지즈 네신의 관료제 풍자는 너무나 통렬해 읽는이를 요절복통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맘껏 웃을 수가 없습니다. 풍자가 남들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풍자의 칼끝이 우리 현실을 날카롭게 겨누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언론지상에는 ‘봉고차 모녀’를 도운 이명박 대통령의 미담이 훈훈하게 소개됐습니다. 인천에 사는 초등학생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생활고 때문에 매일 우는 엄마를 도와달라며 쓴 편지를 대통령이 공개하며 이들에게 직접 연락을 취했습니다. 정부의 지원뿐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 도움의 손길이 이어진 것은 물론입니다.

식당에서 일하던 어머니는 식당이 문을 닫아 직장을 잃었고, 세들어 사는 집에서는 2월까지 집을 비워달라던 이 모녀의 사정은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습니다. 궁금증이 생깁니다. 소득도 재산도 없는 이들은 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지정받지 못했던 걸까요. 이유는 단지 봉고차 한대였답니다. 이들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교회에서 장사나 해보라며 내준 낡은 봉고차 한대가 어머니 이름으로 되어 있어 지원대상자로 선별되지 못했다는 군요.

동사무소에서 야샤르의 호적을 들여다본 직원이 눈 앞에 살아있는 야샤르를 보려하지 않았던 것처럼 해당 지역의 공무원에게는 이들 모녀의 생활상이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야샤르의 직원이 호적만을 근거로 대며 아이가 죽었다고 우긴 것처럼 이 모녀가 살고 있는 동네의 공무원 역시 낡은 봉고차만을 근거로 대며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될 수 없다고 우겼던 거지요.

물론, ‘봉고차 모녀’는 철저한 기획상품입니다. 대통령에게 가는 편지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분류를 해 처리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맘만 같아서는 대통령에게 편지쓰기 운동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지금 이 나라엔 백만 명 이상의 ‘봉고차 모녀’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런 사연도 저런 사정도, 우리의 억울함도, 이웃의 괴로움도 모두모두 알려주고 싶습니다. 대통령이 목도리 하나 걸어준다고 해서 겨울이 따뜻해지지는 않는 법입니다.

구체적인 현실을 삭제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은 위험합니다. 나아가 뚜렷한 사실들을 외면하는 것을 넘어 조작과 기만을 일삼는 이들은 두려운 존재들입니다. 위험하고 두려운 존재들에게 현실이 통째로 소거되는 것을 보고 싶은 이들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미 황량하고 메마른 구체적인 현실이 장밋빛 환상으로 대체된 저들의 매트릭스는 착착 완성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왕 아지즈 네신을 언급한 김에 그의 일화를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네신은 언젠가 "터키인의 60%는 바보다"라는 말을 해서 터키 전체를 뒤집어지게 만든 일이 있었습니다. 비난여론이 커지자 언론에서 네신에게 입장을 밝히라고 했더니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실은 그 때 터키 국민의 92퍼센트가 바보라고 말하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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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0 11:17

경제 예측을 거부하라

[기자의 눈] 미네르바 체포에 대한 단상

앙드레 고르는 '공식적인 경제 예측과 그로부터 출발하는 필요들을 거부하라'고 주장했다.

▲ 앙드레 고르는 '공식적인 경제 예측과 그로부터 출발하는 필요들을 거부하라'고 주장했다.


                                       박휘진 기자

'경제 대통령' 미네르바가 체포됐다. 50대 나이에 증권가 출신일 것이라는 누리꾼들 사이의 정설을 뒤집고 미네르바는 30대 무직자로 밝혀졌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그가 진짜 미네르바가 맞느냐, 누군가에게 글을 받아서 올려주기만 한 것이 아니냐 등 많은 추측들을 제기고 있다. 하지만 미네르바가 누군가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인터넷 상에 자신의 의견을 올렸던 한 개인이 국가 권력에 의해 긴급체포 되었다는 사실이다.

검찰은 왜 미네르바를 체포했는가? 미네르바에게 적용된 법은 ‘전기통신기본법 47조’로 ‘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전기통신설비에 의하여 공연히 허위의 통신을 한 자’를 처벌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에 누리꾼들은 ‘주가 3000선 돌파’, ‘747정책’등을 모든 통신수단을 통해 전국민에게 유포한 대통령도 잡아가야 하는 것 아니냐며 조소어린 반감을 표하고 있다.

미네르바든 대통령이든 예측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누구의 예측은 불법이 되고 누구의 예측은 ‘그것이 틀렸다 할지라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인가.

핵심은 ‘예측’이다. 사르트르가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고 불렀던 앙드레 고르에 따르면, 경제적 예측에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사회가 지속되어야 한다. 심층적 사회변혁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생산방식과 소비방식 그리고 삶의 방식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에콜로지카』, 생각의 나무) 즉, 경제적 예측은 기존의 질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구조 자체를 성찰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사실 미네르바의 경제 예측도 그렇다. 미디어 오늘의 이정환 기자는 한 심포지엄을 통해 “미네르바의 발언들도 사실은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만 작동하는 이야기들이다. 지금의 경제 위기는 잘 굴러가던 시장 경제의 ‘실수, 오류 같은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의 피해갈 수 없는 도착지점이다.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사고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경제 예측의 심층에 있는 이데올로기를 잘 드러내는 발언이다. 따라서 앙드레 고르는 다른 방식의 삶을 원한다면 경제 예측을 거부하라고 했다.

그렇다면 정부는 굳이 미네르바의 입을 단속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내용이야 무엇이든 예측이 현 질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가 시스템을 공격하려는 의도는 없는 것으로 봐야할테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경제 위기’ 상황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본주의 시장의 경제 위기’ 상황이다. 주가가 폭락하고 환율이 급등하는, 그래서 국가 경제의 기반이 흔들리는, 이런 상황들이 어쩔 수 없이 도래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그 ‘불길한 미래’를 접한 사람들에게는 ‘시스템 전복’에 대한 상상력의 틈새가 열릴 가능성이 커진다. 그 시스템은 현 정권이기도 하고,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이기도 하다. 미네르바 구속에서 읽을 수 있는 일차적 맥락은 정부의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행위들을 경찰력으로써 다스리겠다’는 확고한 의지다.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미네르바는 정부를 ‘30대 백수보다 못한’, '전문대졸보다 못한' 무능한 집단으로 만들었다. 정부는 지금 그의 예측에 허위사실 유포라는 죄를 입혀 국가 권력으로 현 시스템을 유지하려 하고 있다.

그에 반해 대통령, 혹은 정부기관의 경제 예측은 어떠한가. 그들은 시스템의 전복이 아니라 존속을 위해 예측한다. 대기업 위주의 경제 성장을 유도하면서 ‘공갈빵’같은 사회를 만들어내는 데 주력한다. 파이는 커져도 그 안은 텅 비어버린 사회. 한 시민단체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오는 2월에 졸업하는 대학생이 약 40만 명인데, 그 중 취업이 결정되지 않은 채 졸업하는 사람이 35만 명을 넘는단다. 이 많은 실업자들을 위해 정부에서 추진하는 4대강 정비 사업을 포함한 ‘녹색 뉴딜’을 통해 창출될(아니 될 거라 주장하는) 일자리 96만개 중 90만은 일용직이다. 대규모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사회. ‘주가 3000’ 돌파의 뒤편에는 이런 계산들이 있다. 이게 바로 대통령의 경제 예측이다.

언제고 노동할 기회를 박탈당할 수 있는 비정규직을 원치 않는다면, 성장을 위해 자연을 거스르길 원하지 않는다면, 국가 권력이 그려주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삶을 꿈꾼다면 우리는 공식적인 경제 예측을 거부해야 한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이 때 쏟아져 나오는 경제 예측들에 이리저리 휘둘릴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예측의 심층을 바라봐야 한다. 그 필요성을 앙드레 고르의 글로써 대신하고자 한다.

“경제 예측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현행 시스템을 지속시키려는 암묵적인 정치적 선택이 반영된다. 이러한 선택은 객관성이나 과학적 엄정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현재 사회만이 유일한 가능성은 아니며 그 운용방식이 객관적 필연성을 담고 있는 것 또한 전혀 아니다. 우리는 공식적인 경제 예측과 그로부터 출발하는 필요들을 거부할 수 있다. 이 거부는 기존 사회질서의 거부이자 정치적 거부이다.” (같은 책 10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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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6 17:39

흑백 가른 오바마, 남북 가른 이명박

[컬처뉴스가 뽑은 2008 10대뉴스 ⑩]얼어붙은 남북문화교류
                                                                                                                                   안태호 기자
 2008년 남북관계는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악재의 연속이었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평양공연이라는 초유의 사태 앞에서 남북문화예술교류의 냉각은 더 도드라져 보였다.
▲ 2008년 남북관계는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악재의 연속이었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평양공연이라는 초유의 사태 앞에서 남북문화예술교류의 냉각은 더 도드라져 보였다.

버락 오바마가 미국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가른 것이 흑백만은 아니었던 것처럼, 대한민국의 이명박 대통령이 1년 동안 가른 것은 남북관계만은 아니었다. 그는 정부와 국민을 갈랐고, 여당과 야당을 갈랐고, 좌와 우를 갈랐으며, 부자와 가난한 이들을 갈랐다. 그럼에도 2008 10대뉴스의 마지막을 남북문화교류로 마무리하는 것은 남북관계가 갖는 상징성은 물론, 남북정상회담이라는 대형 정치이벤트가 성사된 다음 해임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를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파탄으로 만든 대비효과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2008년 남북관계는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악재의 연속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햇볕정책 대신 ‘비핵개방 3000’을 슬로건으로 제시하며 핵문제의 해결 없이는 남북관계의 진전이 없을 것임을 시사했고, 그 '바람'은 이뤄졌다.

7월 11일 금강산 관광객인 박왕자씨가 북측 초병의 총격을 받아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남북관계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금강산 관광은 즉시 중단됐다. 남북관계의 냉랭함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대북단체들의 연이은 전단살포를 남한 정부가 계속 방기하자 북측은 37년간 유지해왔던 남북 적십자간 직통 전화를 단절한데 이어 11월24일 12월1일자로 개성관광 중단, 남북 철도중단, 개성공단 상주인력 50% 철수 및 출입통제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12.1 조치'를 발표하였고 12.1일을 기해 행동으로 옮겼다.

그 와중에 북측의 ‘통미봉남’ 전략은 성과를 거두는 것처럼 보였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2월 26일 평양에서 전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공연을 가졌다. 성조기와 인공기가 나란히 걸리고 미국 국가가 연주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후 이뤄진 미국의 대북 식량지원 재개, 핵신고서 협상 타결 등 북미간 관계 진전은 이 순간의 충격에 비하면 예고된 수순처럼 보였다. 이후 북은 영변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하는 화끈한 쇼를 보여주었고, 미국은 20년만에 북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남북문화교류는 속성상 정치적 상황에 매우 민감하게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남북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지는 동안 문화교류 역시 정체를 피하기 어려웠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각종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된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지점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문화교류의 명맥은 유지되었다. 2005년 남북한 공동편찬위원회가 구성돼 지금까지 16차례 남북회의를 통해 준비 작업을 진행해 온 겨레말 큰사전은 내년부터 본격적인 편찬작업에 들어간다. 겨레말 큰사전은 2013년까지 모두 32만 단어를 담은 모습으로 탄생할 계획이다.

2006년 결성된 6.15민족문학인협회는 올해 초 남북문인들의 작품을 모은 통일문학 창간호를 발행했다. 남북한이 공동으로 발간하는 첫 문학잡지인 통일문학은 그러나 시작부터 순탄치 못했다. 북한 작품에 나오는 일부 구절을 문제삼아 반입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의 문구들을 종이테이프로 가리는 우여곡절 끝에 정부의 승인을 받아 발간 3개월여 만에 배포가 가능하게 됐지만, 이 사건은 현 단계 남북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져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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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먼저 내민 '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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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과 보존의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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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적출'에 날려버린 문화부 일년
5년간 꺼지지 않을 촛불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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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4 12:28

성폭행도 양육의 일부라 생각하는 분들께 바칩니다

언니네트워크 선정 ‘2008 꼬매고 싶은 입’ 

언니네트워크는 여성 비하 발언을 모아 2008 '꼬매고 싶은 입'을 선정하였다.

▲ 언니네트워크는 여성 비하 발언을 모아 2008 '꼬매고 싶은 입'을 선정하였다.


                                                         이주호 기자

한 해 동안 여성을 비하하거나 서슴없이 성적 대상화시킨 망언을 모아 그 중 최고를 가리는 ‘꼬매고 싶은 입’ 어워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입놀림의 향연, 이제 그 화려한 막을 올립니다.

“첫 번째 부분인 본드 상을 발표하겠습니다. 작년에는 신정아 씨 누드를 게재하고 사생활 침해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한 문화일보가 수상자로 선정되었었는데요, 아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나요. 올해도 단체입니다. 수상자는, 축하합니다, 한나라당 경기도의회 의원들입니다.”

한나라당 소속 경기도 지방의원 일부는 지난 3월 5일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 나이키 본사를 방문하여 ‘니케여신’ 동상의 가슴과 국부에 손을 올려놓고 사진을 찍는 철없는 행동을 하여 내외신 언론에 보도됨으로써 한국 남성의 스태미나를 세계에 알린 바 있습니다. 파리, 그리스, 이탈리아, 2009년에는 보다 폭넓은 활약 기대합니다.

“2008 꼬매고 싶은 입, 다음은 대바늘 상입니다. 시상에는 전년도 수상자인 한나라당 소속 진해시 시 의원 백학술 씨가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자, 영예의 대바늘 상 수상자는, 한나라당 국회의원 정몽준 님!”

정몽준 님은 4월 총선 거리 유세 중 여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면서 기자의 뺨을 툭툭 건드린 뒤 4월 3일 해당 기자에게 ‘며칠 동안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해 그랬다’고 말한 공로가 인정되어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심사평은 정몽준 님의 발언이 지난 해 배학술 씨의 “집에서 남편 ×만 빨다가 그저 시의원이 돼 가지고…”라는 발언의 강도에 미치지 못한 측면도 있었으나 잠을 며칠만 더 안 잤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공포감을 주기에 충분해 이 상을 수여한다고 밝혔습니다.

“2008 꼬매고 싶은 입 어워드, 이제 대상 하나만 남겨둔 가운데 시상에는 ‘마사지걸들이 있는 곳을 갈 경우 얼굴이 덜 예쁜 여자들을 고르더라. 예쁜 여자는 이미 많은 손님을 받았겠지만 예쁘지 않은 여자들은 자신을 선택한 손님에게 고마워 성심성의껏 서비스를 하게 된다’는 발언으로 작년도 수상자에 올랐던 이명박 씨가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영예의 재봉틀 상 수상자는…, 발표하기 전에, 지금 후보로 오르신 많은 분들이 긴장하고 계실 텐데요. 특히 올해는 수상자 선정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싸구려 입놀림들이 여기저기서 맹활약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시간 그만 끌고 수상자를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여성주의 커뮤니티 포털사이트 ‘언니네(http://www.unninet.net)’ 운영자인 언니네트워크 주최 올해의 꼬매고 싶은 입 재봉틀 상 수상자는…, 축하드립니다, 청주지방법원 판사 오준근 님!”

수상자 오준군 님은 2008년 11월 20일 지적장애를 가진 소녀를 수년간 성폭행한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등 4명에게 어려운 경제적 형편과 고령, 지병이라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대신하여 양육을 책임져 왔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과 도움을 주리라 예상됨에 따라 각각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한 공로를 인정받아 만장일치로 재봉틀 상 수상자로 선정되셨습니다.

오준근 님은 이외에도 무면허 운전과 다방 여성을 성폭행하고 돈을 빼앗은 혐의로 구속기소된 오모(46) 씨에게 도로교통법위반죄만을 적용하여 징역 5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보호관찰과 120시간의 사회봉사를 명령한 공로를 세우셨습니다. 수상자에게는 상장과 재봉틀 이미지가 수여됩니다.

아깝게 수상을 놓치신 한나라당 장광근 씨(“어떤 년이고 나를 공모하면 가만히 안 놔두겠다 ”) 한나라당 부산시 구의원 안재권 씨(“찢어진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느냐. 여자들은 입이 두개라서 할 말 안 할 말을 다 하느냐”), 한나라당 홍정욱 씨(“대한민국 남성의 위상 위해 9개국 여성과 교제했다”), 서울고법 판사 윤재윤 씨(“강간공모 문자가 오갔어도 강간혐의 없다”)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내년에도 품격 있는 입놀림 부탁드립니다.

시상 후에는 영화 포스터 패러디 및 웹툰 제작을 통해 수상자들의 공과를 널리 알리고 상장과 부상을 수상자들에게 전달할 계획입니다. 전국 포주연합회에서 수상자들을 명예 회원에 위촉하자는 논의가 있다고 하던데 바람이 있다면 그 논의가 하루 빨리 좋은 결론을 맺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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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7 15:09

5년간 꺼지지 않을 촛불들의 이야기

[컬처뉴스가 뽑은 2008년 10대 뉴스] ① 촛불시위(이주호 기자)

▲ "나는 아직 15년밖에 못 살았어요"라던 여중생의 외침이야말로 촛불시위의 배후세력이 아니었을까? (사진 김수현)

2008년도 여느 해 못지 않게 다채로웠습니다. 그 다채로움의 무늬 속에는 격렬한 성토와 다툼이 있는가하면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과 회한이 있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올해가 인생의 전환점이 됐거나 가장 즐겁고 기쁜 나날들이었을 테지만, 사회적으로는 어찌된 일인지 사람들에게 휴식을 안겨주는 아름다운 무늬들을 찾아보기 힘든 해였습니다. 어찌됐든 2008년도 이렇게 지나갑니다. 한 해 동안 문화예술계에 가장 파고가 컸던 사건들을 모아봤습니다. 다루는 방식도 제각각이고 10대뉴스라고 꼽은 일들도 어쩌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컬처뉴스는 올해를 이렇게 봤습니다. 독자분들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 편집자.

컬처뉴스에서 올 한 해 주로 내가 담당했던 것은 문학과 책에 관한 소식이었다. 10개의 기획 기사를 꾸리며 그 중 첫 번째인 촛불집회 부분을 내가 담당하고자 한 건 2008 최고 베스트셀러인 이명박의 <네버엔딩스토리>를 짚고 넘어가지 않고서는 도무지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아주 먼 옛날 바다 너머 이웃 나라에서 소들이 미쳐 날뛰며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벌어지면서 시작된다.

제 1장 ‘배후세력’
이웃나라 왕은 미친소들을 진압할 방도가 없자 남반도국으로 특사를 파견해 싼 값에 질 좋은 고기를 주겠다고 왕을 회유한다. 마침 왜국으로 우동을 먹으러 갔던 왕은 우동집 주인에게 드디어 우리나라도 싼 값에 질 좋은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자랑하고 돌아와 쇠고기협상에 돌입한다. 이에 의심을 품은 한 방송 단체의 PD들이 저건 사람이 먹는 소가 아니라 사람을 먹는 소일지도 모른다는 방송을 내보내게 되고, 이에 성난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촛불을 켜고 항의를 하게 된다. 한데 이상하게도 그 군중의 주축은 여중고생이었다. 그들의 짧게 줄인 치마와 앳된 목소리에 정신 줄을 놓았던 모양인지 왕은 그들의 요구에 답할 생각은 안 하고 누가 너희들더러 밤늦게 불장난하라고 했느냐며 그들의 배후를 추궁한다.

제 2장 ‘촛불은 북안산을 태우고’
배후 세력 발언이 기폭제가 되었던 것일까, 유모차를 끈 아기 엄마들, 군역을 마쳤던 장정들, 일과를 마친 장년들이 한데 모여 가두시위를 벌이게 된다. 이에 왕은 물대포를 동원하여 시위대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지만 시위대는 이에 아랑곳 않고 지금은 야심한 시각이라 추우니 온수를 뿌려달라며 왕의 화를 돋운다. 조류독감에 시름 겪는 농민을 위해서였을까, 닭장 여행에서 돌아온 시위대는 곧바로 ‘3일간 계속되는 국민 야유회’, ‘100만 촛불 대행진’을 밀고나간다. 왕도 이에 질세라 명박산성을 쌓고 고성능 귀마개로 무장한다. 긴 여정만큼이나 장군 멍군이 낭자했던 촛불 문화제는 장마와 한 여름 더위 속에서 점차 시들어간다.

제 3장 ‘청기와파의 반격’
왕의 직속 기관인 국토해양부가 4대강 정비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겠다는 발표를 하자마자 숨죽이고 있던 남반도대운하가 다시 논란거리가 된다. 이에 앞서 나라 교육을 담당하는 부패의 기라성 공노인이 학교자율화와 이에 따른 0교시 부활, 국제중 설립과 일제고사의 부활, 이에 반대하는 교사 해임 및 파면, 세탁소 집 아들 만수의 환율 놀이, 문화마을 양촌리 유이장의 통장 물갈이 자행 등, 청기와의 무사들은 그 많던 촛불들이 꺼지기를 기다려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공안정국에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피습당하기 시작한다.

출판사 평 ‘내 책상 위에 촛불 하나 있어’
촛불을 들고 모였던 일반 백성들은 끝내 하나의 의제를 끌어내지 못했고 따라서 정책까지 나아가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진다. 시위대 내에서도 청기와로 가자는 부류와 거길 가서 뭘 하느냐는 부류가 대립했고, 진압부대의 조직적 진압에 산발적으로 행진하던 대오들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후 공안 정국 속에서 더 큰 절망감을 느낀 사람들이 소주 한 잔으로 맘을 달래려 하지만 오늘 좋은 고기 왔다면서 푸줏간 주인들이 식탁 위에 미친소를 올려놓자 더욱 큰 절망감에 빠져든다. 출판사 평은 이와 같이 작품이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비판과 함께 그래도 촛불집회야말로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는 찬양을 적당히 버무리고 있다.

책 소개를 마치며 ‘내가 읽은 <네버엔딩스토리>’
이 이야기가 여타 사회적 갈등을 다룬 이야기와 변별되는 지점은 주인공들이 여중고생과 유모차를 끌고 나온 아기 엄마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시위에 나오게 된 이유도 다른 이야기들과 달리 대의를 위해서나 자신이 속한 집단을 위해서가 아니다. 여중생은 급식이라는 그들의 선택권을 벗어난 밥상이, 아기 엄마들은 내 아이에게 먹일 음식이 직접적인 이유였다. 더욱이 여학생들의 경우는 참정권이라는 게 없다. 자신의 신변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에서 애초부터 차단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목소리는 단순명쾌하다. “내 밥상에 놓일 음식 왜 니가 주문하는가.”

반면 기존 이야기에서 주도적으로 사회와 갈등을 일으켰던 노동 조직이나 대학생 단체의 활약은 이 이야기에서만큼은 무척 미미하다. 시위가 한창일 때 이들이 등장하는 장면이 있긴 하지만 한때 대학 운동 조직에 참가했던 사람들이나 현재 참가 중인 사람들, 노동 조직의 간부들로 등장하는 이 세력들은 그들이 이전에 해 온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여 작품의 주동 인물들과 번번이 갈등을 일으킨다. 노동조직의 경우 그들이 시위대의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시종 주장한다거나, 조직 내 의결을 통해야만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둥, 이들은 급변하는 시위 상황에 전혀 대처하지 못한다. 대학조직 역시 오늘 수업을 듣느냐 마느냐를 총학생투표에 회부해 가결된 학교에서만 시위에 참여한다. 물대포 장면에 가면 이들은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면서 여성 시위대를 후미로 몰아 시위의 선두에 서고 싶어 하는 여성들의 반발을 사기도 한다.

이 이야기속의 시위 모습 또한 다른 이야기 속 시위 모습과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인다. 앞서 언급했듯 결집-지도가 있어야 시위가 된다는 구시대적인 시위 문화를 완강히 거부하는데 그치지 않고 청기와파를 견제하는 정치세력마저 너희들이 감히 대표성을 운운하느냐, 미친소를 불러들인 책임에서 너희도 벗어날 수 없다며 그들을 철저하게 고립시킨다. 그리고 그 고립은 훗날 그들의 정치적 기반마저 흔들게 된다.

이러한 시위의 다핵적, 산발적 양상은 공중파TV 방송을 위시한 기존 미디어와의 단절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지 반발에만 그치지 않고 개인 미디어방송이라는 미래적 대안을 제시한다. 또한 위트 있는 피켓과 깃발, 춤, 노래, 그림 퍼포먼스 등,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이니 만큼 기존 시위문화가 주는 집단성을 배격하고 개인의 독특한 개성이 그대로 살아 있는 시위 문화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촛불이 시들해지고 시위자들 대부분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을 때, 일국의 학자라는 사람들이 모여 시위란 무엇이었는지 진지하게 토론하는 장면은 이 이야기의 마지막 반전이다. 이들은 시위대와의 정서상 거리를 좁혀보려 토론, 포럼, 대담 등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하지만 좀처럼 의견 접근을 이뤄내지 못한다. 미친소의 공격이라는 큰 문제가 촉발시킨 사건이긴 하지만 이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점차 자기만의 생각을 하게 되고 사회에 대한 생각, 정치적 입장도 순식간에 진화한다. 따라서 그들이 토론하고 있는 시위의 모습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시위대가 떠난 자리에서 그들이 누구였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오히려 이야기 첫 장면에서 배후 세력이 누구냐고 외치던 왕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논쟁과 한계 짓기, 열광적 찬양 등의 관찰자적 시선으로는 절대 시위 참가자들과의 거리를 좁힐 수 없었던 것이다.

나라-나 사이의 동일시가 사실은 허상에 불과했음을 깨닫고 왕과 왕의 나라에 냉소하며 돌아서는 사람들의 모습은 객관적이고 관찰자적인 시선을 견지하는 한 절대 파악할 수도 없고 공감할 수도 없다. 촛불로 타던 거리의 뜨거움과 촛불이 꺼진 후의 냉소가 사실 다른 게 아니라는 것이야말로 이 이야기가 주는 여운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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