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낭소리'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09.03.26 국내 신작 다큐 영화와의 반가운 만남
  2. 2009.03.09 워낭소리, 초월적 우정의 기막힌 전도
  3. 2009.03.02 유인촌 장관, 정체를 밝히시지요
  4. 2009.02.13 워낭소리 성공 오히려 독 될까
  5. 2009.02.09 <워낭소리> 마음의 고향, 그것뿐이다. (7)
  6. 2009.01.01 몰락의 시작인가, 부진의 고착화인가
  7. 2008.10.29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 - ①]'한국독립영화의 아버지' 김동원 감독 (1)
2009.03.26 10:27

국내 신작 다큐 영화와의 반가운 만남

한독협, 인디다큐페스티벌 2009 개최

<인디다큐페스티벌이> 3월 26일부터 4월 1일까지 인디스페이스와 삼일로 창고극장, 명보아트홀에서 개최된다.

▲ <인디다큐페스티벌이> 3월 26일부터 4월 1일까지 인디스페이스와 삼일로 창고극장, 명보아트홀에서 개최된다.



                                                             이주호 기자

한국독립영화협회 주최 <인디다큐페스티벌 2009>가 “만나서 반갑습니다”라는 주제로 3월 26일부터 4월 1일까지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와 삼일로 창고극장, 명보아트홀에서 개최된다. 26일 7시 명보아트홀에서 개막하는 이번 영화제의 개막작으로는 <바보는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김경만, 2008), <잊지 않을 거야>(영, 2009), <철탑, 2008년 2월25일 박현상씨>(변해원, 2008) 등 단편 3편이 선정되었다.

이외 <워낭소리>의 고영재 PD가 제작을 맡아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장편 다큐멘터리 <농민가>(윤덕현, 2008)와 기지촌의 새 이름인 아메리칸 앨리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을 다룬 <아메리칸 앨리>(김동령, 2008)를 비롯한 국내 신작 다큐멘터리 35편과 해외작 7편이 상영된다.

부대행사로는 3월 27일 금요일 자정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6편의 영화를 연속 상영하는 심야상영회와 29일부터 31일까지 매일 저녁 8시 30분 창고극장에서 감독들과 대화할 수 있는 <다큐로 이야기하기> 등이 준비되어 있다.

1회 관람료는 5,000원이며 상영일정을 비롯한 영화제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인디다큐페스티벌 2009> 홈페이지(http://stunet.c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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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9 09:27

워낭소리, 초월적 우정의 기막힌 전도

소와 노인의 우정이 은폐하는 풍경들
                                                                                                                박우성 _ 영화 칼럼니스트
<워낭소리>의 초월적 우정은 현실적 비탄으로부터 눈을 감아버림으로써 비로소 성립된 게 아닐까?
▲ <워낭소리>의 초월적 우정은 현실적 비탄으로부터 눈을 감아버림으로써 비로소 성립된 게 아닐까?

나는 <워낭소리>의 감독이 영화를 둘러싼 예상치 못한 사태들을 두고 ‘무섭다’고 한 것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이것은 결코 복에 겨운 수사적 넋두리가 아니다. 무서운 속도로 찾아드는 관객들이 무섭고, 경북 봉화에 직접 찾아가 영화의 주인공에게 돈까지 건네며 사진 한 장 찍자고 해도 크게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하는 일부 관객의 뻔뻔함이 무섭고, 그것에 발맞추어 아예 그곳을 관광 상품으로 만들겠다는 지자체의 속물근성 역시 무섭다. 하지만 예측건대 가장 무서운 것은, 취임 후 처음으로 대통령이 직접 납시어 <워낭소리>를 봐버렸다는 게 아닐까? 그것은 결코 간단한 사안이 아니다. 독립영화의 발전을 위해서라고? 골계의 극치다. 반대로, 대통령이 그것을 봤다는 것은, 대통령이 봐도 크게 문제될 게 없다는, 대통령도 봤으니까 국민 여러분도 봐도 된다는 혹은 반드시 봐야만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다름 아니라 그것은 대통령이 만천하에 영화를 ‘허락’한 사태인 것이다.

최근 <워낭소리>를 둘러싼 논쟁이 화제다. 요컨대 영화가 작위적인 편집방법, 그러니까 소가 눈물 흘리는 이미지를 두 군데의 핵심 장면에 억지로 집어넣어 관객의 감동을 기만적으로 조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너무나 타당한 지적이다. 게다가 이는 단지 편집에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가령 자막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워낭소리>는 인물들의 말(음성)을 화면의 우측 하단의 자막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굳이 ‘번역’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것이 음성중심의 지역어(방언)를 문자중심의 국민국가언어(표준어)로 확대생산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막(표준어) 덕분에 우리는 너무나 편하게 영화에 빠져들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지나치게 그것에 의존하다보니 정작 사운드(특히 음성언어)나 이미지 자체를 등한시해버리는 기만이 발생한다. 더구나 ‘번역’의 전 과정에 새겨진 감독의 입김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런 식의 논쟁이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접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결국에 그것은 ‘다큐는 작위적(가짜 혹은 픽션)이어서는 안 된다’ 식의 계몽적 언명으로 수렴될 뿐이다. 정말이지 다큐영화는 ‘진짜’를 ‘진짜의 방법’으로만 다루어야 하는가? 아니, 애초에 그런 것들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감히 말하건대 나는, <워낭소리>가 배치한 작위적 장치보다, 영화를 그런 식의 ‘진짜(다큐)/가짜(극영화)’로 구분하려는 태도가, 훨씬 더 작위적이라 생각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가 설사 작위적인 장치에 기만당한다 하더라도 크게 기분 나빠할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점이다. 속아도 상관없다는 말이 아니다. 반대로 과연 몇 명의 관객이 정말이지 소(牛)가 바로 그 절묘한 순간에 ‘인간적인’ 눈물을 흘렸다고 있는 그대로 믿어버리겠는가? 그러기에는 작위적 장치의 도식이 너무나 거칠다. 그런데 분명 속지 않았음에도, 그러나 감동해버린다면?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속아버린다면? 주목해야 할 것은 단지 속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영화가 작위적으로 감동을 조장한다는 것을 분명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쉽게 감동해버리는 사태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워낭소리>만의 특출한 방식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보편적이다. 일테면 최근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드라마만 해도 그렇다. 그것은 과장이라는 것을 굳이 감추지 않고(아니 오히려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반대로 우리는 그것이 허위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주체적으로’ 휘둘려버린다. 하물며 광고의 경우는 또 어떠한가? 이런 점에서 나는 기만성이 뻔히 보이는 장치들이 아니라 반대로 결코 기만적으로 보이지 않는, 그리하여 영화를 보는 내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장치들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말장난 같지만 단순한 작위성이 아니라 작위적이지 않은 것들의 작위성, 기만적이지 않은 것들의 기만성 말이다. 

알다시피 <워낭소리>의 영어 제목은 'Old Partner'다. 물론 그것은 ‘워낭소리’의 명시적 의미, 즉 노인과 소의 우정을 지시한다. 처음부터 영화는 노인과 소의 우정, 그것도 몇 십 년이 넘는 우정을 그리겠노라 선언하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사소해보이지만 내가 볼 때 이것이야 말로 간단히 넘어가서는 안 될 문제다. 실제로 확인해 보니 <워낭소리>에 노인과 소의 우정 따위는 없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워낭소리>가 <워낭소리>일 수 있는 공리(公理)이며, 그렇기에 결코 무너져서는 안 될 경계이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선험적으로 그냥 그렇게 주어지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점이다. 역으로 영화 <워낭소리>는 공리(경계=우정)를 사수하기 위해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장치를 동원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앞서 인물들의 말이 대부분 심한 사투리로 발화되기 때문에 쉽게 알아들을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하여 감독은 자막을 사용한 것이지만, 그런데 개중에는 굳이 그런 식의 도움 없이도 누구나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발화가 있다. 예상했다시피 그것은 할아버지의 중얼거림, 즉 ‘아파’이다. 그런데 <워낭소리>에서 할아버지는 그냥 아픈 게 아니다. 물론 이것 역시 할아버지께서 실제로는 편찮으시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반대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제 할아버지의 건강과는 별도로 적절한 영화적 조율을 거쳐 철저히 구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파’의 중얼거림이 본격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하는 지점은 정확히 수의사의 발언이 있은 직후, 즉 소가 채 일 년도 살지 못할 거라는 진단이 나온 이후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볼 때 그것은 둘이 함께 죽어가고 있다는 운명론적 징후 혹은 설정된 것으로서의 ‘동병상련’이다. 쉽게 말해 영화에서 노인은 그냥 혼자서 아픈 게 아니라 소가 아프니까 아픈 거다. 소 역시 그냥 아픈 게 아니라 할아버지가 아프니까 아픈 거다. 요컨대 우리는 이런 식의 조율로 물 흐르듯 구성되는 상상적 동일화(=우정)의 광경을 뚜렷하게 목격한다.

물론 그것만이 아니다. 사실 <워낭소리>의 초반부는 다소 불편하다. 다 죽어가는 소가 노인이 탄 달구지를 너무나 힘겹게 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인과 소의 우정이 깨지고 마는가? 아니다. 상황은 오히려 정반대다. 구축을 위한 일시적 탈구축이었다고나 할까? 그것과 병행하여 이어지는 장면들에서 이제는 소의 힘겨움만큼이나 힘겹게 소의 먹잇감을 구하는 노인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둘의 관계는 철저히 쌍방향적이다. 더구나 클로즈업된 할아버지의 앙상한 다리 옆의 또 정확히 그만큼 앙상한 소의 체구를 확인하시라. 아니, 영화가 영사되는 동안 지속적으로 우리의 귀를 자극하는 워낭소리 자체가 둘의 커뮤니케이션(=우정)을 끊임없이 구성하는 음성적 기표이다. 물론 노인과 소 사이를 질투하는 할머니만큼은 조금 다르게 해석할 수 있겠다. 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닌 것이, 할머니가 소가 죽어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말하는 이유는, 소가 빨리 죽어버렸으면 하는 게 아니라, 죽음이야 말로 소와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구시대적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게끔 하는 유일한 해방구이기 때문이다. 물론 소의 입장에서 죽음이라는 사태는 가혹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과 할머니의 진심은 별개다. 더구나 할머니는 몇 차례나 영감이 죽으면 따라 죽겠다고 선언하지 않는가. 말하자면 표면적으로는 엇갈리는 듯한 삼각관계가 실은 단단히 묶여 있는 상상적 동일화이자 우정의 공동체인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공동체는 해질녘 역광으로 잡힌 노인과 소의 초월적 미장센으로 기어이 완결된다.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 말하는데, 나는 지금 실제 경북 봉화의 할아버님과 이미 세상을 떠난 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더구나 앞서도 강조했듯 둘의 관계가 그다지 특별할 게 없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결코 아니다. 분명 할아버님과 소는 감히 몇 마디 말 따위로 표현할 수 없는 각고의 인연을 형성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내가 여기서 거론할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할아버님과 노인의 실제 관계가 영화가 그려내는 식의 운명론적 우정과는 결코 동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설사 할아버님과 소의 우정이 존재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카메라에 포착되는 한, 그리하여 편집과정을 거치고 다양한 영화적 기법 속에 재현되어버린 이상, 작위성의 침입을 막을 길은 없다. 말하자면 그 각고의 인연은 영화라는 매개체를 거치면서 보다 일관되게, 보다 가지런하게, 보다 균질적으로 계량화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워낭소리>는 실제의 그것보다 휠씬 더 딱딱하고 견고하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주의사항 하나! 방금 말한 실제 현실과 영화적 재현 사이의 관계를 혼동해버리면 위험하다는 점이다. 그것을 혼동하는 순간 경북 봉화의 할아버님과 할머님은 돈을 주고 사진을 찍어도 크게 문제될 게 없는 객체 혹은 관광 상품의 도구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영화의 상상적 균질화가 너무나 부드럽게 형성되는 탓에, 그것을 능동적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2월 15일 대학로 동숭아트센터에서 <워낭소리>를 관람했다.

그것과 더불어 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구성하는 상상적 경계가 자연스럽다 못해 지나치다는 것, 그리하여 그 경계에 포함되지 않는 것들이 부정되거나 골계의 대상으로 결락되어버린다는 점이다. ‘경계 안(선)/경계 밖(악)’의 단순한 이분법을 논하자는 게 아니다. 문제는 경계의 안쪽(공동체=우정)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자폐성이다. 물론 이것 역시 상대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워낭소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어쩌면 몇몇 예외적 상황을 뺀 대부분의 영화는 나름대로의 경계 쌓기에 충실하다. 급기야 프레임 속에 담는다는 것 자체가 안(볼 수 있는 것)과 밖(볼 수 없는 것)의 경계설정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워낭소리>의 경계를 단지 그것이 지나치다 하여 무작정 비판할 수만은 없다. 그런데 경계를 설정한다는 것과 그것이 유발하는 배제와 누락의 사태는 전혀 다른 문제가 아닐까? 비유컨대 아무리 도시재개발이 필요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억울한 추방자가 생겨서는 안 되는 것처럼, 영화가 설정한 자명성으로부터 추방되어 부정되거나 희화화되는 존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따라 상황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더구나 그것이 함부로 부정되거나 희화화되어서는 안 되는 그 무엇이라고 할 때 사태는 심각하다.

쉽게 잊어버리지만 <워낭소리>에는 단지 한 마리의 소만 등장하는 게 아니다. 정확히 말해 세 마리의 소, 즉, 늙은 소, 늙은 소를 대체하기 위해 들여온 젊은 소, 그리고 젊은 소가 낳은 송아지가 있다. 그런데 혹시 젊은 소가 지나치게 탐욕적으로 보이지는 않던가? 가령 늙은 소의 여물을 힘으로 빼앗는 모습, 자기가 낳은 송아지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모습, 늙은 소가 힘겹게 달구지를 끌 때 마구간에서 여물만 씹던 모습들 말이다. 물론 이런 식의 반복은 정서적 대비를 환기하고 그 둘의 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예증한다. 그러니까 젊은 소는, 늙은 소를 대체하기 위해 거기 있었던 거지만, 그러나 처음부터 그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물론 젊은 소가 어디까지나 외부에서 온 침입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무슨 이유로 철저히 외부적인가? 그런데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하다. 바로 이 속에 노인과 소를 30년 동안 묶어 왔던 우정의 역사성 혹은 기원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바로 이 지점에서 상상적 동일화로 구축된 공동체(=우정)가 실은 배제해서는 안 될 것들을 누락시킴으로써 성립된 가공물이었음이 드러난다.

젊은 소가 외부적 침입자로 머물러야만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달구지를 끌기에는 젊은 소가 지나치게 방정맞다는 점. 그러니까 젊은 소가 노인에게 ‘일소’로서의 역량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 실제로 노인은 그것을 ‘일소’로 교화시키기 위해 무단히 애를 쓴다. 하지만 봤다시피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그렇다면 반대로 늙은 소의 경우는 어떠한가? 늙은 소가 30년 전에 공동체로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스럽게도’ 달구지를 충분히 끌고도 남을 ‘일소’로서의 역량을 보여줬기 때문은 아닐까? 이런 사항을 가정한다고 했을 때, 그렇다면 둘이 관계를 형성하는 결정적 계기는 다름 아니라, ‘동물에 대한 인간의 착취’ 혹은 ‘타자(자연)에 대한 주체의 사유화(인간)’였던 게 아닐까? 이것이야 말로 ‘일소’가 되지 못한 젊은 소가 멀리 팔려가면서 우리에게 던진 공동체(=우정)의 기원이다. 착취당할 조건이 성립되지 않거나 폭력의 행사에 반항하면 공동체로부터 어김없이 추방당한다는!

나는 지금 <워낭소리>가 은폐시킨 폭력성을 문제 삼고 있다. 균질적이고 초월적인 우정을 구축하기 위해 폭력을 은폐해버리는 사태 말이다. 그런데 한 발 더 나아가 비판해야 할 것은 그것을 위해서라면 폭력성 따위 정도는 은폐되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비윤리적 발상 바로 그것이다. 할머니의 잔소리에 짜증이 난 노인이 늙은 소를 마구 때리는 장면이 떠오른다. 동시에 소가 아니었으면 9남매를 못 키웠을 거라는 소리도 들린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전혀 작위적인 것으로 아니면 불편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소의 희생적 사랑이 아름다운 경북 봉화의 풍경과 어울려 숭고의 수준으로 승화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인간중심의 은유가 아닐까? 그리하여 오히려 그것은 9남매를 키우기 위해 소가 30년 동안이나 착취당했다는 뜻이 아닐까? 계속해서 클로즈업되는 할아버지의 불편한 발을 30년 동안 대신했을 뿐이라고? 그런데 왜 말 못하는 소가 구타당하면서까지 그런 책무를 떠맡아야만 하는가? 아니, 그 문제는 둘째로 치고, 그것을 두고 과연 <워낭소리>처럼 ‘Old Partner'라 지칭해버려도 되는 것인가? 이것이야 말로 너무나 작위적이고 기만적이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덧붙여, 여전히 노인은 아프다. 그리하여 오늘도 다 쓰러져 가는 늙은 소에게 고집스레 달구지를 맡기고 병원으로 향한다. 그런데 그 때, 우연치고는 너무나 기막힌 장면이 연출된다. 우시장(牛市場)으로 보이는 곳을 달구지가 지나갈 무렵 그 너머로 소고기의 수입을 반대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그런데 이 순간,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전도가 발생한다. 있는 그대로 따지자면 이 장면이야 말로 가장 슬퍼야 한다. 죽음의 그림자가 덧씌워진 운명론적 우정과 절대자본주의의 물결에 떠밀려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축산농가의 슬픈 표정이 오버랩될 거라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 극장을 가득 채운 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성숙하지 못한 관객을 문제시 하자는 게 아니다. 반대로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영화가 배열해 놓은 친절한 규칙들에 몰입했다는 사실 뿐이다. 그러니까 축산농가의 현실적 비탄 역시 어디까지나 운명적 절대경계 너머에 있을 뿐이고, 초월적 우정에 비해 그것은 오히려 속된 것으로까지 보이는 사태가 발생한다. 과연 그러하다면 <워낭소리>의 초월적 우정은 원래 그렇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현실적 비탄으로부터 눈을 감아버림으로써 나아가 그것을 추방시킴으로써 비로소 성립된 게 아닐까? 경계 너머의 풍경은 추방되거나 무시되거나 희화화되어도 문제될 게 없다는 인식은, 탈역사의 풍경이라는 기막힌 전도를 낳고 만다. 끝으로 이 장면을 보면서 누가 제일 흐뭇했을까? 그리하여 장관의 권유에 따라 대통령까지도 직접 납시어 <워낭소리>의 관람을 ‘허락’했던 것이다. 

 

 

[관련기사]
마음의 고향,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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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2 09:00

유인촌 장관, 정체를 밝히시지요

[기자의 눈]당신은 예술지상주의자입니까, 시장만능주의자입니까
                                                                                                                                         안태호 기자
설 연휴, 노숙인들에게 무료급식 봉사를 하고 있는 유인촌 장관.(사진 문화체육관광부)
▲ 설 연휴, 노숙인들에게 무료급식 봉사를 하고 있는 유인촌 장관.(사진 문화체육관광부)

"자립은 말하기도 싫으며 국립극장은 돈을 버는데 신경 쓰지 말고 단지 좋은 작품을 만드는 데만 매진해 달라"(유인촌 장관, 2008년 3월 21일 국립극장 업무보고 중)

문화부는 3개월 간 공석으로 있던 국립현대미술관장에 대우전자 사장 출신인 배순훈 씨를  임명했습니다. 배순훈 관장은 취임하자마자 ‘경제적 시각으로 미술계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의욕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국립극장에 돈벌이 걱정은 하지 말고 예술성과 공공성에 힘써달라던 유인촌 장관과 전문 경영인을 미술관장으로 데려와 미술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유인촌 장관 사이의 간격입니다

사실, 이런 의문은 어제 오늘 생긴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보면 공직에 나선 이후로 스스로도 헷갈릴 만한 질문이지요. 지금의 유인촌 장관은 막대한 적자를 감수하며 유씨어터를 운영하고, 공연할 때마다 손해가 나도 예술을 위해 마구(馬具)를 걸치고 연기했던 홀쓰또메르의 유인촌과는 다른 사람을 연기하고 있으니까요. 지금의 당신은 독립영화는 ‘될 놈을 지원해야 한다’고 이야기해야 할 입장이고, 미술관에 미술전문인이 아닌 기업 사장 출신이  와서 미술관을 '경영'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주장해야 할 형편이니까요.

아,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 지원할 3천만 원을 행사 일주일 전에 취소해 버린 게 재정자립도의 문제였다는데 사실인가요? 엠넷 등의 케이블 방송을 끼고 하는 음악상에 비해 재정자립도가 낮고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를 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SM 노래방에 가서 한국의 그래미를 호언장담하며 음악산업 진흥에 힘쓰겠다던 순간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시네요.

재정자립도가 평가의 가장 큰 기준이 되어 각종 문제를 야기시켰던 국립중앙극장의 경우, 당신은 예술은 돈 걱정 없이 해야 한다며 기업형 책임운영기관에서 행정형 책임운영기관으로 변경하셨지요. 책임운영기관이 성공한 제도였다고 자화자찬해오던 문화부와 국립극장에서 이리도 쉽게 태도를 바꾸시니 조금 당혹스럽기도 합니다만, 여하튼 예술계에서는 장관의 그 결정을 매우 반기는 분위기였습니다. 아직까지 그 전모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국립발레단ㆍ국립합창단ㆍ국립오페라단ㆍ서울예술단의 기타 공공기관 해제와 순수예술창작법인으로의 지위변경도 아마 재정자립도의 비중을 낮추고 이름 그대로 예술적 성취도를 제고하는 데 노력을 경주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요. 그 와중에도 '돈 걱정 없이' 7년간이나 부려먹던 국립오페라합창단은 해체를 해버리니 말입니다. 합창단원들이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연습생 신분으로 30만원에서 70만원을 겨우 넘기는 대가를 받으며 일궈낸 성과는 놀라웠습니다. 그럼에도 40여명 단원의 인건비 3억이 아까워 합창단을 해체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장관님 본인도 헷갈려서 이런 결과들이 나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문화부의 정책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은 이래저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 당혹스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조금 가닥이 잡히는 것도 같습니다. 작년에 가수 인순이 씨가 예술의 전당에 대관신청이 불허되어 문제가 되고 대중가수들이 집단적인 반발 움직임을 보이자 대중가요 전용 콘서트홀을 지어주겠다며 달래기에 나서신 적 있지요? 물론, 가수들이 대중가요 전용공간에 대한 압박을 위해 부러 그런 활동들을 벌였을 수도 있지만 제 생각에는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분리에 대한 문제제기였기 때문에 살짝 동문서답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얼마 전 <워낭소리>가 ‘대박’을 터뜨리자 독립영화인들과 간담회를 가지셨죠? 대통령의 워낭소리 관람에는 장관님의 역할이 있었을 거란 얘기도 있더군요. 주무부처 장관이시니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상영관에서 이명박 대통령 옆자리에 앉은 이충렬 감독에게 ‘배고프다고 말씀하세요’라고 부추기는 장면은 좀 코믹했습니다. <워낭소리>의 인기에 대통령과 장관이 ‘묻어가기’전략을 구사하시니 제가 몸둘바를 모르겠더군요. 지난 1년간 독립영화와 관련한 정책은 계속 뒷걸음질만 쳤는데 말입니다. 물론, 장관과 대통령께서 힘써주신 덕분에 후퇴하던 독립영화 정책이 그나마 제자리를 잡을 수 있다면 다행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건건마다 대중적으로 이슈가 되는 문제에 일일히 반응하며 인기에 영합하는 걸 뭐라고 부르는 지 아시는지요? 그걸 바로 포퓰리즘이라고 부릅니다. 정책의 장기적인 관점이나 전망 없이 그때그때 이벤트식으로 정책을 펴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쭤봅니다. 유인촌 장관님, 당신은 ‘좋은 작품을 만드는 데만 매진’하는 것이 중요한 예술지상주의자입니까, 아니면 ‘문화예술에도 경영효율성을 도입해야 한다’는 시장만능주의자입니까. 혹시 당신은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기 위해 단편적인 정책들을 즉흥적으로 내어놓기 바쁜 포퓰리스트는 아니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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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3 09:43

워낭소리 성공 오히려 독 될까

 - 독립영화 감독모임, '독립영화 환경, 열악해지고 있다'
                                                                                                                                         박휘진 기자
2009년 눈부신 성과를 기록하고 있는 한국의 독립영화들, 그러나 아직 현실은 냉혹하다.
▲ 2009년 눈부신 성과를 기록하고 있는 한국의 독립영화들, 그러나 아직 현실은 냉혹하다.

<워낭소리>가 독립영화 최초로 30만 명 관객을 기록하고, <똥파리>는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타이거상 수상, 최근 개봉한 <낮술>은 매진사례를 기록하는 등 2009년 현재 한국의 독립영화는 생생하게 팔딱거리고 있다. 그럼에도 ‘독립영화의 현실을 걱정하는 감독모임’은 2월 11일 광화문 미디액트에서 ‘독립영화가 살아야, 한국영화가 산다’며 긴급 기자 간담회를 열었다. 독립영화계는 지금 성공을 자축하는 축배를 들 수가 없는 것이다.

워낭소리 제작자이자 한국독립영화협회 사무총장인 고영재 PD는 “워낭소리가 잘 돼서 너무 좋지만 마냥 좋지만은 않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그는 “워낭소리를 비롯한 많은 독립영화들이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는 것과 무관하게 독립영화 환경은 더욱 열악해지고 있다. 여전히 극장을 확보하지 못 해 개봉조차 할 수 없는 영화가 너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진흥위원회(이하영진위)에서는 독립영화 지원 정책을 축소시키거나 폐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현실이 워낭소리와 여타 독립영화들의 성과에 가려져서는 안 된다”며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2008년 영상물등급위원회 선정 올해의 좋은 영상물 대상을 수상한 <동백 아가씨>는 영화 제작부터 관객을 만나기까지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동백 아가씨>의 박정숙 감독은 “영진위의 제작 지원이 천에서 천오백만 원 정도인데, 나는 이 영화를 찍는데 3년이 걸렸다. 지원금으로는 영화 제작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각종 아르바이트와 병행하고 빚을 질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제작이 끝난 후에도 배급에 대한 생각을 할 수가 없는 게 그간 진 빚을 갚으려면 다시 아르바이트에 전념해야 한다. 그런 후에야 배급을 생각할 수 있다.”며 독립영화의 팍팍한 현실을 언급했다.

제작 및 배급의 어려움은 비단 박정숙 감독만의 문제는 아니다. 간담회에 참여한 <워낭소리>의 이충렬 감독,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의 안해룡 감독,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 <할매꽃>의 문정현 감독 모두 비슷한 경험을 지녔다. 게다가 영진위가 몇 년째 예산을 6억원으로 고정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2009년에는 ‘다양성 영화 개봉지원사업’을 폐지하여 앞으로 독립영화가 관객을 만나는 길은 더더욱 요원해질 전망이다.

안해룡 감독은 “워낭소리가 히트해서 이제 개봉지원 안 해도 되겠다는 말들을 하는데 이게 바로 현실 왜곡 아니겠느냐”며 이처럼 계속 지원을 없애려고만 하면 독립영화를 지속할 수 있는 인력이 더 이상 유지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양익준 감독은 “내 영화가 다양성영화 개봉지원에 지원을 못 하게 된 첫 작품이다. 아버지께 영화 개봉하려고 돈 좀 더 빌려달라 했더니(양감독은 이미 영화 제작을 위해 아버지께 9000만원을 빌린 상태다) 나도 대출받아야 된다고 하셨다”며 “직접 닥치니까 지원이 끊어지는 게 정말 무시무시한 일이더라. 제발 지원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문정현 감독은 “지원 사업도 끝나고, 독립영화에서 이제 ‘독립’은 빼버리겠다고 하고, 정말 이 판이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기분이다”라며 다양한 문화를 양성, 지원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언급했다.

독립영화는 예술영화이고 실험영화인 동시에 상업영화이기도 하다. 독립영화를 단순히 비상업영화의 범주로 넣겠다는 것은 ‘너희는 돈이 안 되는 것’이라는 표식을 다는 것과 마찬가지고, 독립영화에는 더 이상의 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고영재 PD에 따르면 향후 독립영화에 대한 지원은 대부분 공모전으로 이뤄질 예정이다. 독립영화지원은 끊고, 모든 지원을 공모전 식으로 진행한다면 실질적인 독립영화 지원은 앞으로 더더욱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CJ나 싸이더스 같은 대기업들도 모두 공모전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승자독식의 자본의 세계가 독립영화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있다. 간담회를 마치며 고영재 PD는 “독립영화를 제발 영수증 처리되는 금액이 아닌 실제 콘텐츠의 가치로 인정해 달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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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9 11:08

<워낭소리> 마음의 고향, 그것뿐이다.

[강성률 _ 영화평론가, 광운대 교수] 


영화 <워낭소리>는 이제는 사라진 과거의 모습에 카메라 초점을 맞추어 외국인과 한국의 도시인이 보고 싶은 한국의 이미지를 그려냄으로써 정서적 감흥을 일으킨다.
▲ 영화 <워낭소리>는 이제는 사라진 과거의 모습에 카메라 초점을 맞추어 외국인과 한국의 도시인이 보고 싶은 한국의 이미지를 그려냄으로써 정서적 감흥을 일으킨다.

<워낭소리>가 독립영화사상 최초로 관객 10만 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이번 주말은 예매율 1위라는 기염을 토하면서 조만간 2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독립영화사상 최초로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사실, 조만간 20만 명을 돌파할 것이라는 예상 그 자체도 놀랍지만, 요즘처럼 한국영화가 위기를 맞고 있는 시기에, 웬만한 상업영화도 흥행에 참패하고 마는데 독립영화가 이런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워낭소리>가 이처럼 큰 흥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가?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관객들이 편하게 볼 수 있는 소재적 차원에서 먼저 접근해야 할 것 같다. 30년이나 인생의 동반자였던 할아버지와 소의 관계를 통해 인생이라는 성찰의 문제를 이끌어내고,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화면에 담아냄으로서 팍팍한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준다. 소외된 듯한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잔잔한 재미를 느끼기도 하고, 소의 죽음을 대하면서 막막한 슬픔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인생과 삶, 자연 등에 대해 편안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워낭소리>의 영화적 완성도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다큐를 보면서 내가 놀란 것은 감독의 연출력이었다. 이 영화에는 감독의 내레이션이 없다. 주인공인 할아버지도 말씀이 거의 없으시다. 그렇다고 소가 말을 하겠는가? 단지 할아버지에 대한 불평을 늘여놓으시는 할머니의 독백만이 영화 속에 살아있을 뿐이다. 결국 이 영화는 소와 할아버지의 관계를 별다른 설명 없이 화면만으로 이끌고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거나 불명확하지도 않다. 이런 솜씨는 아무나 가진 게 아니다 장담컨대 이충렬 감독은 탄탄한 영화적 실력을 지니고 있는 감독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나서 그리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영화 속에 내장되어 있는 정서적 울림에 깊이 동감했으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 영화를 보자마자 어느 정도 흥행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간단한다. 지금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부분을 적절하게 건드리게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적절하게’ 건드린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소를 지극히 사랑하는 할아버지와 소에 대한 이야기이다. 40살이나 된 소는 죽을 나이이고 할아버지는 노년에 접어들었다. 둘 다 인생의 황혼기인 것이다. 그런 할아버지는 아직도 쇠죽을 끓여 소에게 먹이고, 소 달구지를 타고 읍내에 나가고, 소꼴을 베기 위해 농약을 치지 않는다. 논이나 밭에서 일을 할 때도 소의 도움을 받는다.

이런 풍경은 지금 현재 농촌의 풍경이 아니라 몇 십 년 전 과거의 농촌의 모습이다. 요즘 농촌에서는 기계화되어 이런 일소를 기르지 않는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일소를 구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굳이, 이제는 사라진 풍경을 영화 속에, 그것도 사계절의 순환 속에 녹여낸다. 때문에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은 참으로 편안하게 이 영화를 보게 된다. 왜냐고? 머리 아프게 만드는 현실적 문제가 이 영화에는 빠져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라진 마음속의 풍경이 영화 속에 녹아있기 때문에, 관객들은 부모님 세대나 할아버지 세대를 생각하면서 편안히 영화 속에 빠져들게 된다.

이 영화가 해외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외국인들이 보고 싶은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이 영화에 그려진 것과 비슷한 것이다. 마치 <북극의 나누크>를 만들었던 로버트 플래허티나, 과거의 중국을 빨간 색의 풍광 속에 담아냈던 초기의 장이머우와 마찬가지라고 할까. 이제는 사라진 과거의 모습에 카메라 초점을 맞추어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정서적 감흥을 일으키는 방법말이다. 이런 방법을 통해 관객들의 호기심도 채워주고, 새로운 구경거리도 제공한다. <워낭소리>는 외국인이, 그리고 한국의 도시인들이 보고 싶은 한국의 이미지를 적절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는 농촌의 현실에 대한 묘사가 없다. 미국 소 수입을 반대하는 집회장 앞으로 할아버지와 소가 지나갈 때 현실을 환기하기보다는 웃음이 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할아버지의 모습, 포근한 마음속 고향의 느낌에 심정적으로 동조하지 않을 수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관객들이 쉽게 영화 속에 빠져들도록 감독은 극영화의 편집 체계를 사용하고, 사계절의 순환 속에 사건을 재배치했다.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온 가족이 모두 앉아 편하게 볼 수 있는, 프라임 시간대의 TV 다큐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토록 평안한 다큐라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를 보면서 고영재 PD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프로듀서한 <우리 학교>, <농민가>, <워낭소리> 사이의 관계가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기본적으로는 인간의 문제에 집중적으로 다가갔지만, <우리 학교>는 조총련의 현실적 문제에, <농민가>는 한미 FTA와 몰락하는 농민의 현실적 문제에 깊이 다가간 반면 <워낭소리>는 현실적 고민이 거의 증발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소재로 두 편의 영화를 프로듀싱했지만, 정치적으로는 거의 정반대적인 입장을 담고 있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워낭소리>와 <농민가>를 같은 사람이 프로듀싱했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점점 더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그래서 독립영화인들이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2>를 만들자고 의견을 모으고 있는 지금, 한독협 사무총장이 프로듀싱한, 매우 비정치적인 성향의 영화와 쉽게 매치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랜만에 독립 다큐가 워낙 큰 흥행을 하니 별 생각이 다 든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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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1 16:38

몰락의 시작인가, 부진의 고착화인가

[2008 장르결산 - ③]영화

올해 손익분기점을 넘어 실질적으로 수익을 낸 영화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포함하여 고작 8편에 불과하다.

▲ 올해 손익분기점을 넘어 실질적으로 수익을 낸 영화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포함하여 고작 8편에 불과하다.


                         강성률 _ 영화평론가, 광운대 교수

2008년 한국영화를 한마디로 평가하라면 ‘부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2008년 한국영화계의 어떤 수치를 보더라도 부진이라는 단어를 지울 수 없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의 통계에 따르면, 2008년 1월부터 12월까지 개봉한 영화는 105편 내외가 될 것이라고 한다. 올해 초 50편 내외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제작편수만 놓고 보면 결코 적지 않은 작품이 개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속사정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개봉된 영화 가운데 2005년이나 2006년, 2007년에 제작된 영화, 일명 창고영화가 적지 않는 수를 차지하고 있다. 활황기에 제작했지만 개봉 시기를 놓친 작품을 뒤늦게 개봉한 것이다(물론 창고영화 대부분이 매서운 시장의 버림을 받았다).

상황이 이러니 한국영화 점유율이 올라갈 수 없다. 역시 영진위의 통계에 의하면, 올 1월부터 11월까지 한국영화 점유율은 41.6%인데, 지난 해 같은 기간의 52.3%보다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영화관객 수도 줄었다. 1월부터 11월까지 전국 관객 수는 1억 3,490만 명인데, 이는 한창 관객이 늘던 2006년보다 1,500만 명이나 줄어든 수치이다. 개봉편수는 비슷한데, 한국영화 점유율이 줄고, 전체 관객이 줄어들었으니 영화의 수익률이 떨어진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손익분기점을 넘어 실질적으로 수익을 낸 영화가 고작 8편이라고 한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추격자>, <강철중:공공의 적 1-1>, <고死>, <영화는 영화다>, <아내가 결혼했다>, <미인도>, <과속스캔들> 등이 자랑스런(!) 목록이다. 이와 반대로 전국 관객 10만 명도 모으지 못한 영화도 12편에 이른 것으로 집계됐다. 105편 가운데 단 8편이 수익을 냈으니 과연 누가 영화에 투자하려고 하겠는가? 정말로 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외형적인 수치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현재 한국영화는 2006년을 정점으로 해서 서서히 내려오는 중이다.

외연적인 상황을 떠나 내부를 들여다봐도 실속이 없다. 올해 한국영화는 세계의 유수한 영화제에서 수상도 못했고 경쟁작으로 출품하지도 못했다. 수출은 거의 막히다시피해서 충무로에는 돈줄이 말랐다. 더 큰 문제는 쉽게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의 위기 상황을 불러온 가장 큰 원인은 부가 시장의 소멸을 들 수 있다. 지금 한국영화가 살아나려면, 이미 숱하게 주장한 것처럼, 부가 시장이 살아나야 한다. 한국의 영화 시장은 부가 시장이 소멸하면서 수익의 90% 이상을 극장에서 뽑아야 하는, 매우 불안정한 체제로 굳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영화가 살아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전 세계 영화최강국 미국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미국은 국내 극장 시장보다 두 배 이상 큰 국내 부가 시장, 그리고 국내 전체 시장보다 더 큰 해외 시장이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 영화 시장은 국내 극장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 그러니 홍보비가 과도하게 투입되면서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현 위기를 타파할 근본적인 방법은 단 하나다. 불법 다운로드 시장에서 합법적인 제작 자본을 확충할 수 있도록 다양한 윈도우를 개발해야 한다. 이것 없이 한국영화가 살아나길 바라는 것은 무리이다. 이와 더불어 해외 시장을 다시 개발해야 하고, 지나치게 상승한 제작비를 적당한 수준으로 낮추어야 한다. 100억 원짜리 영화를 소화하기에는 한국영화 시장은 아직 좁다. 부가 시장과 해외 시장을 모두 살린 다음 파이를 키워야 한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신기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등의 영화가 꽤나 많은 관객을 불러 모으고도 수익을 내기는커녕 손해를 본 것은 지나치게 고비용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암울한 산업 이야기만 나열한 것 같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논하지 않을 수 없어 그렇게 되었다. 이제 간단하게라도 2008년 한국영화의 경향과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논할 것은 팩션영화의 강세이다. <님은 먼곳에>, <신기전>, <고고70>, <모던 보이>, <라듸오데이즈> <미인도> 등 많은 영화가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루었다. 흥미롭게도 남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만주에까지 상상력을 넓혀갔지만, 결과는 참담한 패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팩션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왜,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특정 시기와 특정 지역을 불러오는가의 문제, 즉 역사 해석의 문제이다. 그런데 <님은 먼곳에>를 뺀 대부분의 영화에서는 그것이 부족했다. 2008년에 개봉된 많은 팩션영화에서 왜 역사를 영화의 소재로 다루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했다. 단지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소재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해석을 통해 관객과 대화해야 한다.

다음으로 논할 경향은 다양한 에로티시즘의 등장이다. 신윤복을 여성으로 해석해 그의 사랑을 그린 <미인도>, 가부장적 구조가 강한 한국사회에 반기를 든 <아내가 결혼했다>, 남성이 생각하는 여성의 섹슈얼리트를 뒤엎어버린 <미쓰 홍당무>,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과감한 동성애를 다룬 <쌍화점> 등 다양한 영화에서 에로티시즘을 다루고 있다. 얼핏 보더라도 매우 다양한 경향의 에로티시즘이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비단 볼거리로서의 에로티시즘에 그친 것이 아니라 성적 정체성과 가부장제의 문제점까지 파고드는 것이라서 의미 있다고 할 수 있다(물론 모든 영화가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독립영화의 경향을 살펴보면, 2008년의 독립영화 역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한독협이 10주년을 맞았지만, 왕성하던 창작의 에너지는 서서히 식어가고 있고, 뜨거운 열기를 지닌, 새로운 감독들은 쉽게 등장하지 않고 있다. 영화제에 출품된 수많은 단편들도 제한된 상상력 속에서만 진동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을 수 없었다. 그나마 진지한 울림이 있는 <농민가>, 삶과 죽음, 인생에 대해 고찰하게 하는 <워낭소리>, 한국 사회를 날카롭게 짚어본 <똥파리> 등의 영화는 언급해야 할 것 같다.

혹자는 한국영화가 위기 아닌 적이 있었느냐고 이야기 하지만, 지금 한국영화계는 상시적으로 반복되었던 위기 상황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위기 상황에 처해있다. 돈이 없어 투자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손해를 볼 것이 뻔히 보여 투자를 하지 않는 지금의 구조는 심각한 악순환을 몰고 온다. 때문에 아무리 긍정적으로 보더라도 내년의 영화계는 올해보다 더 어려워 보인다. 지금이야말로 영화인들이 머리를 맞대야 하는데, 그런 역할을 앞장서서 해야 할 영진위를 보면,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의 타는 갈증처럼 한없이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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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9 15:35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 - ①]'한국독립영화의 아버지' 김동원 감독

10월 23일 푸른영상 사무실에서 김동원 감독을 만났다.
▲ 10월 23일 푸른영상 사무실에서 김동원 감독을 만났다.

한국독립영화협회(한독협)가 10주년을 맞았다. 한때 생소하기만 했던 ‘독립영화’라는 존재의 정체성 확립과 자리매김의 역사는 한독협의 10년 역사와 나란히 놓여져 있다. 영화인들이 자본과 검열로부터 ‘독립’해 진정한 의미의 ‘표현의 자유’를 누리기까지 한독협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줬다. 컬처뉴스는 한독협 탄생 10년을 맞아 독립영화계의 10년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시대 한독협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해 보고자 감독, 배우, 활동가, 제작자 등 독립영화인들 10명의 인터뷰를 기획했다. 이번 기획은 한독협 사무국과 팀블로그 필름온이 함께해 이루어졌다.

첫번째 인터뷰 대상자는 '한국독립영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송환>의 김동원 감독이다. 여러모로 한국 독립영화계의 상징적인 인물인 김동원 감독은 한독협의 초기 모습과 현재의 지점을 역사적인 맥락에 위치시켜 새롭게 보게해 준다. 그가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에 입문하고 활동하게 된 계기들 역시 놓치기 아까운 역사의 기록이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 바란다. / 편집자.

독립영화, 무에서 유를 만들다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소감 한 마디 해 달라.

김동원 감독: ‘벌써 10년인가’하는 생각이 든다. 내 나이 또래는 세월이 빨리 가니까.(웃음) 한편으론 독립영화 활동한지 오래됐는데 10년밖에 안됐나 싶기도 하고. 내가 초대 이사장을 하면서 한독협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현재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조영각 사무국장하고 어린 사무원은 그 때 월급 20만원씩 받고 시작했다.

독립영화계에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예상했던 것인가. 

이런 날이 올지 몰랐다. 지금은 미디어 센터, 독립영화전용관, 독립영화 제작지원제도 등이 생겼다. 이런 건 외국사례로 말로만 듣던 것들인데, 일반 영화계에서 질투할 만하다.(웃음) 막 없던 게 생기고 점점 늘어나니까, 있던 게 없어진 사람들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독립영화계만 편애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근데 지원금 총액으로 보면 굉장히 작다. 

그만큼 독립영화계가 가시적인 변화를 일으켰다는 반증이 아닌가 한다.  

무엇보다 10년 전만해도 독립영화라는 말을 할 때 약간 켕기는 게 있었다. 그때 독립영화하면 반정부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당시 영화진흥공사(현 영진위)에 독립영화라는 말이나, 독립영화 지원은 없었다. 또 영진위 1기 위원회 생기고도 몇 년간은 없었고, 그 이후에 생겼다. 독립영화라는 단어를 공식화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 강한섭 위원장이 다시 뺀다고 한다. ‘작은 영화’ 이런 식으로 바꾼다고.

작은 영화라... 김동원 감독이 다큐멘터리를 시작한 게 20년이 지났는데, 독립영화란 말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난 원래 상업영화 지망생이었고, 독립영화란 말도 없었다. 1980년대 얄라성이나 장산곶매 등에서 영화를 만들고, 미국식 개념의 이름을 붙여준 거다. 사실 미국식 개념과는 많이 다른데,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사실 나는 독립영화를 하려고 한 건 아니다. 상업영화 조감독을 했는데 이게 나랑 안 맞더라. 당시 전두환 정권 때 이런저런 일이 많았는데 방송에서는 누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때 내가 결혼식 비디오를 찍은 아르바이트를 했을 땐데, 사회의 모습을 찍어서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날라리, 가장 감동적인 올림픽을 만나다

원래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나. 김동원 감독의 젊은 시절이 궁금하다.

날라리였다. 데모도 안했고.(웃음) 1970년대에 학교를 다녔는데 당시엔 운동권이란 개념도 없었다. 언더그라운드에는 좀 있었는데 그때는 몰랐다. 난 연극 많이 하고, 놀기 좋아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 때 무의식적으로 뭔가 답답함을 느꼈다. 고등학교 때는 ‘왜 우리학교는 데모 안하지? 데모하면 휴교하는데’하면서 데모가 나길 원하기도 했다. 출처가 불분명한 유인물 만들어서 뿌리기도 했다. 휴교 때문에. 그런 걸 보면 약간 반골 기질이 있었나 보다. 그런 게 정리가 안 되다가 상계동 가서 정리가 됐다. 사회과학 책도 한두 권 읽어봤지만 전혀 안 와 닿았는데, 상계동 가서 구조적 모순이라는 걸 느끼게 됐다.

상계동에 어떻게 들어간 건가.

상계동 철거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내가 아는 신부님이 거기 들어가 계셨는데 강제철거 당하는 장면을 증거자료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하셨다. 하루만 와서 촬영해달라고 부탁을 하셨다. 그게 내 팔자를 바꿀 줄을 몰랐다.

처음 <상계동 올림픽>을 촬영할 때 ‘다큐멘터리는 이런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었나.

처음에는 관심도 없었고, 또 당시 우리나라에는 필름으로 만든 다큐멘터리도 거의 없었다. 대학 영화과에서도 단편영화제를 했지만 다큐멘터리는 없었다. 서울영화집단에서 8미리 필름으로 십 분짜리 다큐멘터리를 1985, 6년인가에 만든 게 전부였다. 그저 머릿속에는 TV에서 본, ‘추적 60분’유의 다큐멘터리만 있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그런 관성들을 떨쳐버리기 힘들었다. 그런데 외국 나가서 여러 다큐멘터리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보니까 ‘아 다큐멘터리가 할 만한 거구나’ 싶었다. 상계동 시절에는 전혀 몰랐는데, 가서 보니까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작품들이 있었다. 그 때 ‘다큐멘터리의 영역이 이렇게 넓구나’ 했다.

그 이후에 다큐멘터리의 매력을 느낀 건가? 어떤 매력을 느껴서 다큐멘터리를 계속하게 된 건가.

조연출을 한 4년 정도 했는데, 현장이 지겨웠다. 촬영할 때도 긴장감을 못 느꼈다. 그런데 상계동에서 철거 현장을 찍을 때, 특히 위험한 상황에서 철거 깡패들이 위협해도 전혀 무섭지가 않은 거다. 카메라가 알아서 막 돌아다니는 신들린 경험을 했는데, 그게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다. 촬영하는 게 이런 거구나. 또 철거, 투쟁 현장 모습들이 외부에 알려지기 힘든 상황에 <상계동 올림픽>을 발표했는데, 엉성하게 만들었지만 대학가에서 상영되고 그러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 때 다큐멘터리의 굉장한 힘을 느꼈다.

그래도 뭔가 손에 잡히지 않을 시절,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았을 거 같다.

<상계동 올림픽> 하면서 사회가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촬영할게 많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외국영화 직배 관련해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는데 정지영 감독이 나에게 ‘다큐멘터리를 해라. 극영화 하는 사람은 많지 않냐. 넌 잘할 것 같고, 너라도 해야 한다’라고 하더라.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닌 것 같고, 싫지도 않고, 또 극영화가 잘 안 풀리고 해서 다큐멘터리의 길을 걷게 됐다. 그렇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 길을 걷게 됐다.

총 제작기간만 12년이 걸린 <송환>은 비전향 장기수를 다룬 다큐멘터리로, 2004년 선댄스영화제 '표현의 자유상'을 시상하기도 했다.

투사? 난 그런 사람 아니다

1990년대에 <송환> 촬영하랴, <명성 그 6일의 기억> 발표하랴 정신없었을 거 같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부터 장기수들이 출소하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경험한 사람이니까 저분들의 증언은 기록할 필요가 있다 생각해 촬영을 시작했다. 사실 그걸 어떻게 쓸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에 장기수들의 삶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어머니들이 함께 벌인 석방운동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몇 편 나왔다. 그 때까지만 해도 <송환>에 대한 생각도 없었고, 그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다. 사실 내가 오며가며 찍은 거지 찍어야겠다 해서 찍은 게 별로 없었다.(웃음)

 그럼 <송환>은 어떻게 나오게 된 건가.

1999년 초부터 송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그들의 송환을 돕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사회적으로 이슈화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남북정상회담하면서 송환이 급물살을 타면서 엄청 급해졌다. 그 다음 6월부터 9월까지는 정신없이 찍었다. 그 전에는 판판히 놀다가.(웃음)
 
1990년대 들어오면서 한국 다큐멘터리의 파이가 커졌다. 주로 어떤 사람들이 촬영했고 어떤 관심을 가졌나.

지금도 우리나라 다큐멘터리는 액티비즘, 즉 투쟁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1980년대에는 당연히 그래야한다고 생각했고. 서울영상집단, 노동자뉴스제작단(이하 노뉴단) 등의 집단은 일종의 운동으로 한 거다. 노뉴단은 노동운동, 서울영상집단이나 민족문제연구소, 민족영화연구소 등은 그 외 사회문제를 다뤘다. 한국의 다큐멘터리는 태생단계의 특수성 때문에 액티비즘이 강하다.

김동원 감독은 어느 편에 속했나.

난 아무데도 속해있지 않았다. 굳이 얘기하면 빈민운동 쪽인데, 빈민지역 청년들과 활동을 하면서도 작업은 혼자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내가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정체성은 없었다. 영화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는 현장의 기록이고, 일상이었다. 빈민운동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했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느 순간에 찾았나.

나는 아직도 감독이라는 말을 안 좋아한다. 난 다큐멘터리에서 감독이 너무 앞서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무리 감독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해도 감독이라고 부르고, 또 ‘그럼 뭐라고 부르냐’고 하니까 이젠 그냥 ‘맘대로 부르라’고 한다.(웃음) 감독이라는 말이 옛날보다는 많이 거슬리지는 않는다. 옛날에는 엄정한 사실성, 객관성 이런 것들이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래야 하는 줄로 알았는데 요즘에는 다큐멘터리도 연출을 해도 괜찮다는 게 일반적이니까. 내가 아무리 연출을 안 하려고 해도 할 수밖에 없다.

작업을 하면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경우도 많이 있었겠다.

글쎄, 잡혀갔던 거?(웃음) 푸른영상 하면서 몇 번 잡혀갔다. 1993부터 2년 터울로. 그 때만해도 영화법이 손질되기 전이고, 장기수들을 찍는다는 게 시찰 대상이었다. 안기부 직원한테 매일 안부전화를 받았으니. 그쪽에서 조작간첩 사건들과 엮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잘 안됐다. 1996년에는 심의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음란비디오 단속법을 걸고 넘어졌다. 참, 음란비디오라니. 그 외에도 청소년 보호법, 국가 보안법 등 다양하게 조사받았다. 다행이 변호사를 잘 만나서 기각시켰다. 

투쟁의 역사다.(웃음)

투쟁은 무슨.(웃음) 난 투쟁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냥 내가 그걸로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잘못한 것도 없으니 당당한 거다. 심의를 받으려면 10분에 얼마 돈을 내야 하는데 내가 골이 비었나.(웃음) 여하튼 몇 번 들어갔다 나오면서 이미지가 그렇게 됐는데, 내가 용감해서 싸운 건 아니다. 그냥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 때문에 그런 거 같다.

김동원 감독은 2004년 선댄스영화제 표현의 자유상(<송환>) 등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한국 다큐멘터리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이면의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면서 주변의 따가운 시선도 받을 거 같다.

글쎄. ‘왜 이렇게 구질구질한 얘기만 하냐’는 사람은 있지만 따갑지는 않다. 당연히 알려야 할 이야기고. 지금은 방송에서 그런 얘기를 많이 하지만, 그때만 해도 전혀 안했는데 당연히 나라도 해야지 그랬다.


한독협. 힘든 시작, 지금은 괜찮아 무엇이든!

한독협이 세워지기 전, 독립영화인들은 어디를 구심점으로 모였나.

1991년에 독립영화협의회라는 단체가 세워졌다. 내가 의장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거기는 구속이 너무 많았다. 그 때만 해도 운동한다는 기분으로 작업을 했고, 모여 봤자 운동하는 독립영화인들만 모이는 거 같고. 1990년대 중반 넘어가고, 독립영화계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다양한 독립영화인들과 함께 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립영화가 뭐냐’ 하는 정체성 논란도 있었고, 일련의 산통 끝에 한독협이 생겼다.

한독협이 생기고 어려움은 없었나.

내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웃음) 앞서 얘기한대로 한독협의 정체성 찾기가 가장 힘들었다. 한독협 초기에 독립영화협의회나 민예총 영화분과 등과 관계 설정하는 게 어려웠다. 1996년부터 한독협 설립 논의를 시작했으니까.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이 협회를 만든다는 거에 의구심 어린 시선도 있었고. 하여튼 초기에 발동 거는 게 좀 어려웠는데 발동 걸고 나서는 최근까지는 잘 굴러왔다고 생각한다.

영진위 3기 위원이었다. 어떻게 하게 됐나.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가면 회의만 많고, 그렇다고 독립영화에 관한 회의만 하는 것도 아니고. 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는데 가서 목소리를 내야 하니까, 가야 된다고 하니까 갔다. 별 재미는 없었다.(웃음)

어떤 목소리를 내고 싶었나.

목표가 너무 분명했다. 독립영화전용관 만드는 거. 10년 동안 만들자는 말만 있었지, 만들지 못했다. 더 이상 늦출 수 없었다. 난 다른 건 못해도 전용관 하나 만큼은 만들겠다는 각오로 들어갔다. 다른 영진위 위원들이 너무 적나라하게 의도를 내비치는 거 아니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런 독립영화인들의 노력 끝에 인디스페이스가 생겼다. 근데 인디스페이스가 위치한 중앙시네마 재건축 때문에 몇 년 안에 장소를 옮겨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럼 다른 곳을 찾아봐야겠지. 3기 영진위 때 미디어센터, 시네마테크, 독립영화전용관을 다 포괄하는 500억 규모의 복합상영관을 짓기로 서울시와 결정했다. 그런데 강한섭 위원장이 무슨 아시아센터를 건립한다고 한다. 지금 어떻게 진행 중인지 모르겠다.

규모를 500억에서 1,000억으로 늘린다고 들었다. 그런데 규모가 커지고, 새로운 사업계획을 만들면 그 만큼 그 과정이 늦춰지는 거 아닌가. 현재 미디어센터 미디액트나 서울아트시네마, 독립영화전용관 모두 공간 확보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아무래도 그런 측면이 있다. 음, 어떻게 보면 위기를 겪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어려움을 겪어보면 전화위복의 기회를 맞을 수 있다. 이건 좋은 극장이 생긴다는 측면이 아니라 독립영화인들에게 뭔가 좋은 공부가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하는 말이다.


다른 얼굴, 하지만 우린 가족이다

한독협 홈페이지를 보면 초기에는 게시판에 서로 안부도 묻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영화도 보고, 얘기도 하고, 술도 먹으면서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한독협 10주년을 맞이한 2008년. 지금 가장 큰 고민이 무엇인가.

글쎄. 내가 고민한다고 되나?(웃음) 이제 독립영화가 나름대로 사회적인 위상을 이제 갖게 됐다. 그런데 대안영화로서의 자기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영화가 잘 안 나오고 있다. ‘지금쯤 나올 때가 됐는데’하는 기대가 있는데 잘 그게 쉽지 않다. 예를 들어서 <은하해방전선>등 몇몇 작품은 기대를 많이 했고, 영화도 좋았음에도 불구라고 잘 안됐다. 영화는 관객과 함께 완성된다. 과연 이걸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보게 할 수 있을까. 영화가 안 좋은 게 아닌데, 왜 안볼까. 이런 고민들을 한다. 답 없는 고민.

최근에 등장하는 후배들의 작품들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나.

다큐멘터리만 보자면,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본 <워낭소리>란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좋았다. 나와 스타일은 다르지만 반가운 작품이다. <우린 액션배우다> <우리학교> 등 1년에 한 편씩은 문제작들이 나온다. 한편으론 기쁘고, 한편으로는 ‘아 이런 게 일 년에 열편은 나와야 하는데’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인 코드가 약해지고 있지만 그게 그렇게 아쉽지는 않다. 오히려 열심히 만들고, 진정성이 보이는 다큐멘터리가 1년에 3-4편만 나오면 좋겠다. 인디다큐페스티벌에 70여 편의 작품이 응모됐다고 한다. 아르헨티나만 해도 다큐멘터리 영화제 하면 700여 편이 응모된다고 하는데, 우린 고작 70여 편이다.

요즘 진행하고 있는 작업이 있나.

촛불 문화제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하고 있다. 올해는 촛불이 가장 활활 타지 않았나. 찍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간 건 아닌데, 나가다 보니 찍을 게 보이더라. 뭐 큰 건 아니지만 해야 할 거 같은 마음이 들어서 촛불 문화제에 대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독협의 또 다른 10년을 위한 제언을 해 달라.

제언이라. 아쉬운 건 한독협 홈페이지를 보면 초기에는 게시판에 서로 안부도 묻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물론 욕도 하고.(웃음) 뭔가 공동체적인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커져서 그런지 그렇지 못하다. 사실 이건 사업을 하는 게 아니다. 사업도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하는데.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끼리 식구라는 생각을 하면 좋겠다. 도움도 주고받고, 영화도 봐주고. 이런 커뮤니티가 활성화 되어야 하는데 그런 계기를 못 만들어 주는 거 같다. 여러 영화제가 그런 역할을 했는데 요즘엔 형식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영화도 보고, 얘기도 하고, 술도 먹으면서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 2008-10-28 오전 11:35:02  컬처뉴스 김나라 기자, 필름온 안효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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