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09.03.17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예술 공격
  2. 2009.03.13 리얼 디스토피아, ‘멋진 신세계’는 없다!
  3. 2009.01.28 여기, 예술이 있다
  4. 2008.11.25 예술을 통한 골목길의 재발견
  5. 2008.11.21 장르 비평을 넘어서 - 컬처뉴스, 하이브리드 비평상 공모
  6. 2008.11.19 예술의 네 가지 빛깔 - 예술경영지원센터 4인4색 전문가 대담, 내달 1일부터
  7. 2008.11.06 [김성희의 페이지]칼 가는 젊은 오빠
  8. 2008.10.27 예술은 예술가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채널로써 ‘생태문화예술’ 하기
2009.03.17 09:15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예술 공격

[신간소개]<뱅크시, 월 앤 피스>

“이 세계의 거대한 범죄는 규율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규율을 따르는 것에 있다. 명령에 따라 폭탄을 투하하고 마을주민을 학살하는 사람이 곧 거대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 “이 세계의 거대한 범죄는 규율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규율을 따르는 것에 있다. 명령에 따라 폭탄을 투하하고 마을주민을 학살하는 사람이 곧 거대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안태호 기자

6,180,998 유로의 경매낙찰 총액, 경매횟수 102회, 최고 낙찰가 1,166,540 유로. 안드레아 거스키, 안젤름 키퍼, 신디 셔먼, 길버트와 조지, 줄리앙 슈나벨 등 기라성 같은 거장들을 제치고 22위 랭크. 미술시장 분석 전문회사 아트프라이스가 1945년 이후 출생한 작가들을 대상으로 2007년 7월부터 2008년 6월까지의 판매기록을 분석한 차트에서 이 같은 기록을 보유한 작가는 누구일까.

문제가 너무 어려운가? 조금 더 쉬운 힌트. 대영박물관과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자연사 박물관 등에서 이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몰래 가지고 들어가 전시중인 작품들 사이에 태연자약하게 걸어놓는 방식으로 ‘도둑전시’를 했다. 재밌는 것은 그의 작품이 발견되자마자 떼어내고 폐기처분한 전시장이 있는가하면 대영박물관 같은 경우 원시인이 쇼핑카트를 끌고 있는 그의 작품을 영구소장하기로 결정했다는 거다.

그래피티 작업을 주로 하는 그를 누구도 본 적이 없다. 유일하게 그를 인터뷰한 한 언론에 의해 이름과 1974년생 고등학교 중퇴자라는 일부 경력만이 밝혀졌을 따름이다. 그는 ‘얼굴 없는 작가’, ‘아트 테러리스트’, ‘그래피티의 살아있는 전설’ 등으로 불린다.

국내에서도 이 작가의 작품은 블로그와 각종 사이트를 통해 수없이 퍼날라지고 복제되었다. 복면을 한 채 꽃다발을 던지는 시위대의 모습, 총을 들고 헬맷까지 착용한 경직된 경찰의 얼굴자리에 들어가 있는 스마일 마크, 아나키스트의 상징을 그리고 있는 영국 왕실 근위병의 모습, 폭탄을 사랑스럽게 끌어안고 있는 소녀의 초상, 열렬한 키스를 나누고 있는 정복차림의 경찰 동성애 커플 등 통념을 뒤집고 상식의 허를 찌르는 그의 작품은 많은 이들을 열광케 했다.

이제 아시겠는가? 그의 이름은 뱅크시. 영국출신의 그래피티 아티스트인 그는 이미 위의 수치에서 확인했듯 더 이상 뜨내기나 얼치기 예술가가 아니다. 주류예술계에서도 몇 손 가락 안에 꼽히는 중요한 작가가 되어버린 뱅크시의 작품과 그의 짧은 글들을 소개한 책이 나왔다. <뱅크시, 월 앤 피스>는 우연한 계기로 출간되었다. 영화감독 임진평이 뱅크시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던 중 국내에 출시된 책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출판관계자에게 뱅크시를 소개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 수많은 미술인들을 제쳐두고 영화감독을 통해 출간되었다는 게 아리송하긴 하지만, 아무튼 덕분에 우리는 뱅크시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게 됐다.

지금까지 웹에서 만날 수 있던 그의 작품들을 보는 것이 산발적이라는 아쉬움이 있었다면 <뱅크시, 월 앤 피스>는 그 갈증을 조금은 풀어준다. 원숭이, 경찰, 쥐, 소, 아트, 거리의 조각상 등 소재에 따라 분류된 책은 뱅크시의 작품을 조금 더 체계적이고 집약적으로 접근해 분석의 여지를 마련해 준다. 주로 해프닝식으로만 알려졌던 미술관 도둑전시에 대한 그의 입장들과, 그래피티에 대한 태도, 자본주의와 소비문화에 대한 날카로운 패러디 등 그의 촌평들은 짧고 거칠지만 뱅크시의 작품들이 가진 특성들을 잘 보여준다.

그의 작업들을 보고 있노라면, 시스템에 대한 저항을 조직하며 시스템에 함몰되지 않고 시스템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나도 모르게 고심하게 된다. 특히 팔레스타인을 격리하고 있는 벽에 진행한 그의 작업들과 일화는 그가 예술가인 동시에 명민한 활동가의 속성 역시 가지고 있음을 훌륭히 보여준다.

그의 말을 하나만 인용해 보자.

“이 세계의 거대한 범죄는 규율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규율을 따르는 것에 있다. 명령에 따라 폭탄을 투하하고 마을주민을 학살하는 사람이 곧 거대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마치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보여준 악의 평범성에 대한 고찰을 보는 것만 같다.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그의 공격은 가차없으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으며 언제나 핵심을 찌른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지금부터다. 해설을 쓴 이태호 교수는 “그의 작품이 자본주의 시장에서 고가로 매매되기 시작한 이후, 과연 그가 어떤 행보를 보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그를 주목할 것이다”라고 글 말미에 밝히고 있다. 첫머리에 쓴 것처럼 그는 이제 세계에서 손꼽히는 고가의 잘 팔리는 작가가 됐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데미안 허스트와 뱅크시를 동급에 놓기도 한다. 물론, 작가로서의 자기 연출이라는 측면에서 둘은 닮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역시 뱅크시가 제도화된 반항을 넘어 예술이 세계를 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는 기대가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는다고 해서 이태호 교수가 던진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책을 손에 든 이들이 동일한 문제의식을 갖고 뱅크시의 앞날을 주목하게 될 것이란 사실이다.

<뱅크시, 월 앤 피스>, 위즈덤하우스. 값 1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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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3 11:03

리얼 디스토피아, ‘멋진 신세계’는 없다!

용산참사 게릴라 기획전 제1부 ; “망루전亡淚戰
                                                                                                                             김종길 _ 미술평론가
예술행동주의는 제도와 권력, 악의적 법이 실행하는 파괴적 문명화를 안티테제로 내재화하여 그 거름의 자양분으로 키운 실천의 나무이며, 꽃이다. 배인석 작가의 출품작.
▲ 예술행동주의는 제도와 권력, 악의적 법이 실행하는 파괴적 문명화를 안티테제로 내재화하여 그 거름의 자양분으로 키운 실천의 나무이며, 꽃이다. 배인석 작가의 출품작.

아수라의 ‘까쇠’들이여,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그대는 1991년 5월의 굿판을 기억하는가? 그해 김지하는 조선일보 확성기로 “젊은 벗들이여,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고 목청을 찢었다. 결기와 비장의 음율로 타전하는 그의 소리는 민주주의의 제단에 나부끼는 독재의 깃발보다 더 절망적으로 우리의 몸을 휘 감았다. 시대는 위선과 반역, 탐욕, 독선, 기만, 환멸의 정치로 치달아 갔고, 세계는 그것들이 살포한 위장 정의의 이름으로 잠식당하고 있었다. 그 세계에서 삶을 회복하거나 제 이름의 윤리학을 확보하는 것은 그 자체로 투쟁일 수밖에 없었으며, 미세하게 떨리는 주체의 자율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형이상학적 논리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었다.

1987년 6월은 1991년 5월의 권력자들에게 단지 지나간 과거의 역사일 뿐 어떠한 양심적 정치의식을 견인해 주지 않았다. 그해, 청년들은 광막한 시대의 벼랑으로 달려가 예수가 광야에서 던진 씨알의 소리처럼,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소리쳤다. 그리고 몸을 불살랐다. 참된 정의와 민주주의에 중독된 자들만이 할 수 있는 불의 시학을 그들은 온몸으로 새겨 넣었다. 그러나 불의 제단은 쉬 꺼지지 않았고, 오히려 모든 참된 것들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듯 자꾸만 번져 갔다. 강경대가, 김귀정이, 박승희가 죽었다. 한홍구의 표현대로 정말 하룻밤 자고 나면 새로운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죽음의 의미는 죽임을 즐기는 자들에 의해 왜곡 과장되고 확대되었으며, 당시 조선일보는 최전선에서 이 죽음을 죽임의 논리로 바꾸어 선전했다.

김지하는 바로 그 확성기에 대고 소리친 꼴이 된 것이다. “나는 너스레를 좋아하지 않는다. 잘라 말하겠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 당신들은 잘못 들어서고 있다. 그것도 크게!” 그의 소리는 얼음보다 차가워서 일순간에 불의 제단을 침묵으로 바꿔 버렸다. 침묵하는 자에게 민주주의는 결코 오지 않는 봄과 다를 게 없다. 그리고 오직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꽃을 피위기 위해 불살랐던 그 모든 것들의 ‘잘못’으로 인해 1990년대는 1980년의 봄보다 더 짧은 시련과 더 긴 공허를 견뎌야 했다. 김지하의 외침은 그래서 폐부로 가 닿는 절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로부터 20여년이 되는 동안 하나의 사실을 간과했거나 부정했다는 것을 잊고 있다. 죽음의 찬미를 선동한 ‘까쇠Casseur’들의 정체는 청년들이 아니었다는 사실. 하여, 우리는 김지하의 ‘젊은 벗들이여’를 ‘탐욕의 까쇠들이여’로 바꿔 읽어야 한다.

김지하는 촛불의 현장에서 폭력을 행사한 일부 세력을 가리켜 프랑스어 ‘까쇠’라고 불렀다. 그 의미는 “시민들의 평화적인 시위에 복면을 쓰고 끼어들어 이렇게 저렇게 난장판을 만드는 자를 말하는 것”이며, “나는 이것을 약간 비틀어 ‘까부수고’(파괴), ‘까불고’(난동), ‘까발리는’(선동) 것을 본업으로 하는 쇠(마당쇠의 그 쇠)를 요약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 다음 그는 낮은 목소리로 현장에서 들었던 이야기 하나를 들려준다. “한 숨은 목소리가 음산하게 외친다. ‘아무개를 찢어 죽이자!’ 곁에서 한 여성이 외친다. ‘너나 죽여라!’ 내 곁에 있는 초등학생이 속삭이듯 외친다. ‘종이냐, 찢게?’” 이 이야기는 촛불의 내부에도 여전히 죽음의 굿판을 선동하는 자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들려주는 것인데, 과거와 달리 현재는 바로 그 현장에서 까쇠들의 선동을 부정하는 여성과 아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여성과 아이들이 촛불의 주체였고 희망이었으며, 기억의 상실 저편에서 스스로 깨어 걸어 나온 민주주의의 실체임을 깨닫는다. 한데, MB정권은 그 많은 시대의 청년들이 쌓아 올린 민주주의를 한 순간에 쓸어버리고, 촛불의 저 도도한 민중의지마저도 법적 테두리로 끌어 모아 ‘싸잡아’ 범죄화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용산참사에서 보여주듯 그들은 그들의 힘으로 민중의 몸을 불사른다. 시대의 역행이 아니라 시대의 추락이며, 현실적 아수라에 다름 아니다. 김지하의 ‘죽음의 굿판’은 이 시대에 충분히 예지적이다. 강경대의 절망이 그를 그토록 분노케 하였지만, 생명을 찬탈하려는 그 모든 까쇠들을 향해 우리는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소리쳐야만 할 것이다.  


생태적 에스노그라피를 실천하라!

아수라의 힘은 다시 온 대지로 향하고 있다. 용산참사로 확연히 드러났듯이 민중을 향한 화염의 비수와 더불어 우리를 경악케 하는 세종로 1번지 까쇠들의 도시 재개발과 대운하 정책은 전국토의 전면적 개토로 이어질 전망이다. 그것은 한반도에 인류가 정착한 이래 가장 잔인하게 전개될 대지에 대한 학살일 터이다. 세계의 환경론자들은 문명의 쾌속 질주에 대한 현실적 대안으로 ‘지속가능성’의 개념을 돌출시켰으나 오히려 그러한 이성적 판단이 지속적인 개발정책의 자기이념으로 합리화 되었다는 게 근본 생태론자들의 주장이다. 자연에 대한 생태론적 사유에는 이성과 합리적 사유로는 접근할 수 없는 신성한 생명성이 존재한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의 본뜻은 주체와 객체가 한 몸으로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는 어떠한 인위적 가해 없이 그 스스로 존립되었고 형상화되었으며, 또한 그 기세와 흐름으로 앞으로도 영구할 것임을 드러낸다.

그런데, 박정희가 독일 아우토반의 무한 질주 개념을 흉내 내어 경부고속도로를 직선의 폭력으로 뚫어 버렸듯이 MB정부는 그 자신을 중심으로 한 권력의 카르텔을 하나의 아비투스habitus로 형성시켜 토목국가를 위한 대중설교의 장으로 활용하면서, 박정희의 폭력을 내면화하고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MB정부의 그런 개념 활용을 알면 뒤로 넘어가겠지만, MB정부가 상상하는 에코토피아 대한민국에는 그래서 생태적 에스노그라피ethnography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땅이 지닌 최소한의 공공성이나 역사적 기억마저도 인정하지 않는 그들이 대운하를 운운하며 “고구려, 신라, 백제, 마한이 융성했던 이 강의 생명력으로 국운을 일으키자”고 떠벌리는 것은 모순의 구토이다. 대운하를 위한 비밀조직을 운영하면서 양심선언 연구자를 징계하는 이들의 태도에는 사회적 합의나 미래세대에 대한 역사적 책임보다 한 권력자의 탐욕만을 충족시키려는 복종의 패거리 의식만 엿보인다.

이 땅은 그들이 언급했듯이 유사이래 한민족의 역사가 골골에 새겨진 거대한 생명이다. 이 땅 어디에도 그 숨결 새겨지지 않은 곳이 없다. 우리 민족의 예술 미학은 그 근본부터 자연 미학의 본류를 흠모했고, 숱한 예술가들이 그것에 다가가기 위해 예술적 고투를 마다하지 않았다. 역사가들 또한 사기史記의 첫 페이지를 자연과 인간이 혼융된 신화적 판타지로 기록했던 것은 그 뿌리가 대지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 인간의 삶은 둘로 분리될 수 없으며,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억압하거나 해서도 안 된다. 이 구도가 조금씩 붕괴된 것은 인간이 자연의 신성을 밀어내면서 획득한 근대에 있다. 인간의 발과 수레로 새겼던 실크로드는 1920년대 후반 일본에 의해 ‘국도’로 확장 개발되었고, 그 길은 침략과 약탈, 전쟁의 아우성을 실어 날랐다. 근대화 도시화 현대화에서 ‘도로’는 문명이라는 괴물을 성장시켜 온 최대의 공신일 것이다. 그리고 그 괴물의 속도로 그들은 생명에 반하는 만행을 저지를 태세다. 유구무언. 그들은 역사 앞에 생명이니 숨결이니 환경이니 하는 따위의 미사여구를 내뱉을 자격이 없다. 이 땅은 반역자들의 영토가 아니다! 

좌파든 우파든 정권을 잡은 권력자들이 하는 일이란 온갖 난개발을 통한 파괴의 정치뿐이다. 자본주의 도시문명의 확장을 위대한 선진화의 척도로 내세우면서 ‘생태도시’ ‘휴먼시아’ ‘명품도시’를 부르짖고, 녹색성장과 녹색뉴딜이 정권의 미래비전이라면서 토건국가의 유토피아를 설교해 온 것은 참여정부든 실용정부든 똑 같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 부안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 새만금 간척사업, 서귀포 해군기지, 천성산 터널, 시화호, 행정복합도시에서 경인운하까지 지난 정부에서 현 정부까지 죽임의 정책과 집행은 계속되고 있지 아니한가!

예술행동주의는 제도와 권력, 악의적 법이 실행하는 파괴적 문명화를 안티테제로 내재화하여 그 거름의 자양분으로 키운 실천의 나무이며, 꽃이다. 우리는 이 예술의 이름으로 파괴의 문명을 생명의 문명으로 전환시킬 수 있고, 미래세대를 위한 예지적 전망을 타전할 수 있다. 하여, 예술행동주의가 발산하는 미적 이미지와 에너지는 고정되거나 관념화되기 이전의 상태로서 개념 전야의 혼돈을 보여주는 역동과 ‘엇’의 미학이며, 분열과 통합이 어그러진 ‘개체-융합’의 마당 굿이다. 용산참사 게릴라 기획전으로 치러질 <망루전亡淚戰>(제1부)과 <망루전望樓傳>(제2부)는 그 굿판의 서막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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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8 18:09

여기, 예술이 있다

[편집자가 독자에게]이윤엽과 송경동의 경우

오늘 예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짚어내고 지켜내는 이들은 누구인가. 이윤엽, '여기 사람이 있다'.

▲ 오늘 예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짚어내고 지켜내는 이들은 누구인가. 이윤엽, '여기 사람이 있다'.



                                                안태호 편집장

고향 다녀오는 길에 보니, 평소 왕래하던 길가에 어느 새 아파트 단지 공사가 한창입니다. 도로 옆 공터였던 곳에 시멘트를 부어넣은 철골구조물이 불쑥불쑥 솟아올라 있더군요. 안 그래도 주변이 고층아파트로 숲을 이루고 있는 지경인데 조금의 빈틈이라도 보이면 건물을 우겨넣고 보는 건설현장의 풍경을 보니 꽉 막힌 도로만큼이나 갑갑한 심정이 들었습니다. 딴은, 개발업자들 입장에서 보자면 노는 땅이 아깝기도 할테지요. 그곳에 건물을 지으면 단위면적에서 낼 수 있는 수익이 비약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들에게 빈 땅을 그대로 두는 것은 범죄에 가까운 방치행위일지도 모릅니다.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고 했던가요? 그렇다면 아파트로 대표되는 개발은 욕망을 먹고 자라는 나무라고 할 만합니다. 개발로 인해 생기는 이익이 몇몇 ‘가진 자’들에게 집중되는 현 상황에서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는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일입니다. 하여, 사람들은 개발이익이 공정하게 분배될 수 있는 시스템을 요구합니다. 물론 그 이전에 '개발' 자체에  대한 성찰이 먼저겠지만, 개발을 통해 소수가 독점적인 이익을 그러쥘 수 없다면 지금과 같은 막개발에 올인하는 일은 애당초 있지도 않았을 겁니다.

용산참사에 대해 민심은 절절 끓고 각계의 움직임도 분주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섯이나 되는 목숨을 앗아가는 참담한 일이 벌어졌음에도 정부여당은 이치에 닿지 않는 흰소리만 늘어놓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합니다.

설 연휴를 앞둔 23일 용산참사 현장에서는 문화예술인들의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각계의 목소리에 입장 하나를 더하는 것을 넘어서 예술인들은 자신의 작업을 통해 치열함의 일단을 보여줬습니다. '여기, 사람이 있다 '와 '너희가 누구인지 그 때 알았다'를 봅니다. 전자는 걸개그림으로 제작된 미술가 이윤엽의 판화작품이고 후자는 시인 송경동의 추모시입니다. 이 두 작품이 함께 실린 현수막이 참사현장 빌딩에 걸렸습니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싸움에 함께하며 인간다운 삶을 꿈꾸던 그들을 생각합니다. 대추리 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하며 땅을 일굴 권리를 옹호하던 그들을 생각합니다. 한국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충격과 상처를 남길 한미FTA에 반대하며 이윤보다 인간을 외치던, 티벳의 독립을 지지하며 억울하게 억압당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던 그들을 생각합니다. 이들은 그림값이 수 천 만원을 호가하거나 베스트셀러를 낸 유명예술가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술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불평등과 부조리와 모순과 추문을 고발하는 증언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두 예술가는 자신들만 특화시켜 이야기하는 것을 불편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많은 예술가들이, 활동가들이 자신들과 언제나 함께하고 있었다고 말이지요. 네, 맞는 말입니다. 현장예술의 이름을 사회적 갈등이 첨예한 곳에만 한정짓는 것 또한 단견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묻고 확인하고 싶어집니다. 오늘 예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짚어내고 지켜내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너희가 누구인지 그 때 알았다 _ 송경동

국민의 밥상에 독이 든 고기를 올리겠다고 했을 때
천년 강물의 가슴을 파헤치고 이윤을 위해 자연을 죽이겠다고 했을 때
교육의 전당을 시장으로 만들어 아이들을 죽음 같은 경쟁으로 내몰겠다고 했을 때
뉴타운을 지어 가난한 자들을 몰아내겠다고 했을 때

가녀린 촛불 하나하나를 곤봉과 방패로 짓이겨 갈 때
100만 촛불의 간절한 생명의 소리를 콘테이너산성으로 막고 귀막을 때
인터넷에 마저 재갈을 물리겠다고 압수수색해 올 때

96일 굶은 기륭 김소연이 오른 철탑 망루를 뒤흔들고 경찰차로 들이박을 때
죽어보라고 용역 구사대를 앞세워 이죽거릴 때
미포조선 100m 굴뚝농성장에 불기를 끊고 음식물을 끓을 때
용기 있으면 죽어보라고 사주할 때

바른 언론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곧은 교사들의 목을 단칼에 치고
교과서에 새겨진 참민주주의의 목을 조를 때

890만 비정규직 2년짜리 노예목숨도 부족해
4년짜리 노예, 영원한 비정규목숨들을 양산해
자본에겐 횡재를 민중에겐 살아도 죽은 목숨을 선사하겠다고 했을 때
가진 자들만을 위해 모든 법률을 개악하겠다고 했을 때
항복하지 않으면 어떤 인도적 지원도 할 수 없다고 북의 동포들에게 엄포를 놓을 때
팔레스타인 학살 규탄 유엔인권위 결의안에 기권표를 던질 때

알았다. 너희는 소수라는 것을
만인을 위한 정부가 아니라는 것을
만인을 죽음으로 내몰 잔인한 살인 정부라는 것을
폭력으로 밖에 자신을 유지할 수 없는 더럽고 추악한 파쇼 정부라는 것을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농민빈민서민의 위기로 돌리려는
극악한 정부라는 것을

너희에겐 그 무엇도 맡겨서는 안된다는 것을
뼈저린 고통을 당해봐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닌 너희라는 것을
보라. 미천한 자본과 폭력의 개들아
진실은 다시 모두가 잠든 새벽녘
가난한 삶의 현장에서 성난 불꽃으로 일어나
우리 모두의 나약한 가슴을 태우고
비겁과 나태를 밀어내고
양심과 도덕의 횃불에 다시 불을 당긴다
헐벗은 겨울 벌판을 정화하는 들불처럼
쥐새끼들을 몰아내고 병든 균들을 태워 없애고
노동자 민중이 주인되는
새로운 시대의 봄을 부른다

더 이상 오를 곳도
더 이상 내려 갈 곳도
더 이상 물러 설 곳도 없어
하늘로 하늘로 오르는 계단을 쌓듯 망루를 쌓아갔던 열사들이여
그러니 일어서라
일어서서 이 차디찬 새벽을 그 뜨거운 몸으로 증거하라
우리가 그대들이 되어
더 이상 물러 설 곳도
더 이상 안주할 곳도
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는
이명박 신자유주의 폭력 살인
반민중정권 퇴진을 위한 투쟁에 결연히 나서도록
살아서 비굴한 목숨이 아니라
열사들의 영전에 자랑스런 이름들이 될 수 있도록
열사들이여 그 뜨거운 분노
그 뜨거운 함성, 그 뜨거운 소망을 내려놓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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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5 09:31

예술을 통한 골목길의 재발견

진주민예총은 12월 3일부터 7일까지 <골목길 아트페스티벌>을 개최한다.
▲ 진주민예총은 12월 3일부터 7일까지 <골목길 아트페스티벌>을 개최한다.

진주민예총은 12월 3일부터 7일까지 진주시 중앙로 일대에서 <제 1회 골목길 아트 페스티벌>을 연다. 이 행사는 유휴 공간을 문화 공간으로 활용함으로써 열린 문화 공간을 조성하고 시민들의 예술에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이 축제의 특징은 무대와 전시장에 갇힌 예술을 골목길에 풀어 놓음으로써 공연자와 관객의 거리를 없앴다는 것이다. 골목이라는 생활공간에서 딱딱함과 엄숙함을 벗어던지고 신명나게 노는 것이 이 축제의 본질이다.

축제 첫날인 3일에는 진주에서 가장 오래된 클래식 카페 ‘다원’에서 진주시립예술단의 가야금, 대금 공연과 제 4회 전태일문학상 수상자인 서정홍 시인의 초청강연이 있다. 4일에는 ‘현장 아트홀’에서 <세번째소원>, <메리 골라스마스> 등의 인권을 주제로 한 애니메이션이 상영된다. 이밖에 태평무, 살풀이춤, 판소리, 연극, 재즈 공연 등이 준비되어 있으며, 축제 마지막 날인 7일에는 ‘독거노인을 위한 사랑의 콘서트’ 길거리 공연이 펼쳐진다.

축제 기간 동안에는 축제 장소에서 사진과 서각, 전통 탈 등이 상설 전시된다. 모든 공연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행사 관련 문의는 진주민예총 055-747-7084로 하면 된다.





이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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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1 17:01

장르 비평을 넘어서 - 컬처뉴스, 하이브리드 비평상 공모

장르의 경계를 넘어서는 예술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다. 홍성민의 토털시어터 <앨리스>
▲ 장르의 경계를 넘어서는 예술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다. 홍성민의 토털시어터 <앨리스>

현대예술에서 장르는 참 고약한 문제가 됐다. 여전히 장르의 틀은 견고하고 제도로서의 장르라는 공간 역시 여전히 유효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은 물론, 장르 간을 가로지르는 실험 등은 전통적인 예술개념으로 포괄할 수 없는 새로운 예술활동을 끊임없이 탄생시키고 있으며 장르라는 구분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최근 다원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관련 활동들이 부쩍 늘어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렇다면, 비평은 어떨까. 이미 대중적인 반향을 얻지 못한다는 회의적인 시선이 가득한 한켠에는 비평 역시 장르라는 안전한 제도 내에서 자신의 생존만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닐까.

컬처뉴스는 비평이 장르 내부의 관습적인 틀에 안주하고 있다는 인식 하에 '하이브리드 비평상'을 공모한다. 하이브리드 비평상은 ‘복합장르, 두 장르(분야) 이상의 예술현상에 대한 비평을 통해 작금의 예술현실을 진단하고 예술의 사회적 소통을 모색하는 비평작업’으로 장르의 틀에 갇히지 않는 새로운 비평을 모색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번 공모는 기성, 신인을 망라한 40세 이하의 젊은 비평가를 대상으로 하며 분량은 원고지 30매 안팎이다. 당선작에는 150만원, 가작에는 50만원의 상금이 주어진다. 선별된 필자들은 차후 컬처뉴스의 고정필진으로 활동하게 된다.

마감은 2009년 1월 30일(금)까지. 응모는 이메일(cnews33@hanmail.net)로만 접수한다. 문의 컬처뉴스 편집실(02-739-6851, cnews33@hanmail.net)



안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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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9 17:59

예술의 네 가지 빛깔 - 예술경영지원센터 4인4색 전문가 대담, 내달 1일부터

예술경영지원센터는  ‘융합의 시대, 예술의 가치를 말하다’를 12월 1일(월)부터 4일(목)까지 대학로 아르코미술관 1층 테이크아웃 드로잉에서 개최한다
▲ 예술경영지원센터는 ‘융합의 시대, 예술의 가치를 말하다’를 12월 1일(월)부터 4일(목)까지 대학로 아르코미술관 1층 테이크아웃 드로잉에서 개최한다

예술경영지원센터는 4인 4색 전문가 대담 ‘융합의 시대, 예술의 가치를 말하다’를 다음 달인 12월 1일(월)부터 4일(목)까지 대학로 아르코미술관 1층 테이크아웃 드로잉에서 개최한다.

이 행사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으로써 각 계의 전문가들과 문화예술 현장의 연출가, 기획자, 경영자가 만나 예술의 가치와 미래에 대하여 생각을 나누는 자리”라고 예술경영지원센터는 밝혔다.

이번 대담은 박원순(변호사,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최문규(건축가, 연세대 건축공학과 교수), 배영호((주)배상면 주가 대표이사), 진중권(중앙대 문화연구학과 겸임교수) 등 네 명의 전문가가 각 주제별로 하루씩 맡아 진행한다.

먼저 박원순 변호사가 ‘예술, 사회와 소통의 길을 묻다’를 주제로 첫 번째 대담을 맡을 예정이며 최문규 교수는 ‘공간의 예술, 예술의 공간’을 주제로, 배영호 대표이사는 ‘예술, 경영을 디자인하다’를 마지막으로 진중권 교수가 ‘상상력의 확장인가? 예술의 과용인가?’라는 주제로 대담을 진행할 예정이다.

대담에 참가하려면 11월 26일(수)까지 예술경영지원센터 홈페이지 ‘교육/행사 참가신청’ 게시판에서 각 주제별로 개별 신청하면 된다. 별도 참가비는 없으며 사전 신청자에 한하여 참석 가능하다. 문의: 02-745-3045

 


김나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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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6 14:11

[김성희의 페이지]칼 가는 젊은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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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7 10:07

예술은 예술가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채널로써 ‘생태문화예술’ 하기

생태문화예술은 인간이 전지전능한 위치에서 자연을 주무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연의 구성원임을 깨닫는 것이다. 최병수 작가의 새만금 솟대.
▲ 생태문화예술은 인간이 전지전능한 위치에서 자연을 주무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연의 구성원임을 깨닫는 것이다. 최병수 작가의 새만금 솟대.

‘이것은 내 작품이요’라고 말하듯 작품에 찍혀있는 낙관은 본래 작품을 만든 예술가의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오랜만에 친구의 집을 찾은 한 화가가 기와 위로 휘영청 떠오른 하얀 달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림을 한 점 남겨놓았다. 몇 달 후 같은 풍경을 목격한 다른 손님이 그 그림을 보고 “아, 당신도 그렇게 보았습니까? 저도 당신과 같이 느꼈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여백에 글을 써넣고 자신의 낙관을 찍어 넣었다. 낙관은 당신과 내가 통하였다는 기록이었다. 이처럼 예술은 애초에 예술가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예술은 소통의 수단이었다.

10월 23일 문화연대에서 ‘생태문화예술의 전망과 교육문화(임정희)’ 워크숍이 열렸다. 워크숍은 생태문화예술의 개요를 짚어보는 시간과 생태예술의 거장 앤디 골드워시의 다큐멘터리 <Rivers & Tides - working with the time>를 보는 시간으로 이루어졌다. 그 후 워크숍에 참여한 작가들과의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예술이 종교와 진리의 영역에서 벗어나 독자적 발언권을 갖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다. 기존 사회에 대한 반발로 가득했던 발언(예술작품들)으로 인해 예술가들은 사회로부터 소외되었다. 임정희 교수는 영화<타이타닉>의 잭 도슨(디카프리오 역)을 예로 들었다. “그들은 사회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회의 어두운 면들을 들춰냈죠. 창부를 그리고 노숙자를 그렸습니다. 이성보다는 반이성을 이야기했고, 인간 중심적 사고가 그르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당시로써는 너무 앞서갔던 그들의 발언은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베트남전을 목격한 세계는 예술가들이 쏟아냈던 인간에 대한 냉소와 비난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까. 그 시기에 들어서 예술가들은 비로소 희망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60년대 중후반 생물학(지금의 생태학)의 등장은 구축주의에 많은 영향을 줬다. 해체주의와 달리 대안적이고 긍정적 가치를 말하고자 했던 구축주의의 한 축을 생태론이 차지했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물들은 그 존립 근거를 가지며 그들 역시 자연 안에서 소통하고 있다’는 생태론의 주장은 인간을 모든 만물의 중심이 아니라 ‘생태계’ 안의 내적 존재로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자연이 가진 긍정적 가치-개발보다는 보전, 집중보다는 분산, 차별 아닌 평등, 소유보다는 공유, 폭력이 아닌 평화-를 바탕으로 인간은 겸손과 절제, 타자에 대한 배려의 윤리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축주의는 본원적 가치를 지향하는 생태학적 세계관의 영향을 받았기에 인간 내 계층, 집단, 민족, 성, 나아가 인간과 생태 그리고 현재와 미래를 모두 아우르는 보편성과 지속가능성을 가진다.

한편 20세기 중반에는 근대에 성립된 ‘부르주아적 공공영역’에 대한 재정의도 요구됐다. 임정희 교수는 부르주아적 공공영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부르주아적 공공영역은 현실적으로 신분, 계층, 성 등에 따라 분열되어 있는 개별영역들을 통일적으로 묶어내는 이데올로기적 장치였습니다. 그것은 부르주아 질서를 확립하는데 저항하거나 장애가 되는 것을 ‘사적인 것’으로 배제하고, 구성된 공공영역을 지속시키기 위해 법을 형식화했습니다. 나치가 집시의 문화를 악으로 규정했던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새로운 사회영역이 생겨나면서 공간에 대한 비판과 재정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진 것이다. 개인의 자발성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사적인 형태를 띠지만 비제도적인 형태로 정치적 기능을 수행하는 이 새로운 사회영역은 공간을 상호 연관적으로 사고하게 했다. 더불어 공공영역을 ‘다양한 주체들의 자율적 참여로 이루어지는 가능성의 사회적 공공 공간’으로 재 정의하도록 했다. 

이 두 흐름의 교착 지점에 생태문화예술이 있다. 생태문화예술은 생태론 사고를 바탕으로 하며, 공공예술의 형태를 띠고 있다. 모두가 주체가 되고 모든 존재가 서로 얽혀있다는 연결망적 사고에 입각하여 예술가들은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작품으로 끌어안는다. 노숙자-빈곤, 열대림-환경, 가정폭력-폭력의 일상화, 에이즈-동성애도 그들의 작업 주제가 된다. 요셉 보이스의 <7000그루의 오크나무>프로젝트, 허문 페기 딕스의 <가정폭력 밀크 초콜렛 포장지>프로젝트, 앤 필빈이 기획하고 키스 헤링, 신디 셔먼 등 5명의 작가가 참여한 <거리에서: 에이즈에 맞서는 예술> 등이 모두 이 영역에 포함된다. 국내의 <노숙자 프로젝트>, <변산반도 솟대 심기>, <움직이는 횡단보도 퍼포먼스>, <마석 프로젝트> 등도 공공예술이자 생태문화예술이다.

<예술가 이주 실험 프로젝트: #진안>에 참여할 작가들은 자신들의 근거지가 아닌 공간에서 행해질 진안 프로젝트에 대한 고민이 많은 듯 보였다. “아무래도 저희들이 서로 다른 장르를 다뤘던 사람들이고 관심분야도 다들 다를 것 같은데 현장에서 이런 점들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요. 또 서로가 잘 융합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상상기획연구소 이공경창씨가 물었다. 서로 다른 작업을 하고,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예술가와 현지인의 협업이 동상이몽이 되면 어쩌나하는 고민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임정희씨는 작가들의 이 같은 고민에 마석프로젝트를 하나의 성공적인 사례로 언급해주었다.

 “한센 병을 앓던 이들이 모여 살던 서울의 한 외곽 지역에 임대 중소가구공장들이 자리를 잡았고, 3D업종 중 하나인 가구공장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일터가 되었습니다. 가구공장 단지 한 가운데에 초등학교가 하나 있었는데요, 공장뿐인 그 지역에 학교 운동장은 유일한 휴식공간이었죠. 그런데 학교에서는 외국인노동자들이 학교로 들어오는 걸 싫어했어요. 그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그곳에도 존재했던 거죠. 소수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 곳에 계층을 형성한 겁니다. 그곳이 마석이었습니다. <마석 프로젝트>는 지역에 예술가들이 들어가서 작업을 하기 전에 먼저 친선 축구경기를 지속적으로 열면서 관계 쌓기를 했어요. 만나는 기회를 늘려가면서 각자의 입장을 듣고, 이해한 후에 공동 작업으로 운동장 꾸미기를 했죠. 예술가들이 고안을 해오면 지역 사람들이 함께 운동장에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프로젝트는 아주 성공적이었습니다. 프로젝트를 하면서 다채로운 이해관계를 보지 못하고 군사 개입하듯이 일을 벌려놓는 경우도 아주 많아요. 그러지 않기 위해서 더 많이 이야기하고 더 많이 찾아가고 그래야겠죠”

생태문화예술은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채널이었던 예술의 본질에 한 발 다가가는 시도이다. 인간이 전지전능한 위치에서 자연을 주무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연의 구성원임을 깨닫는 것이 생태문화예술이다. 예술가가 격리된 존재로써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소통하면서 작품을 만드는 것이 생태문화예술이다.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만드는 사람과 잠재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문화예술을 공유하는 것이 생태문화예술이다.

이번 워크숍은 상상공간기획소(구 소수자문화교육기획단)에서 <예술가 이주 실험 프로젝트: #진안> 프로젝트 진행에 앞서 10월 21일부터 나흘간 진행한 것의 일부였다. <예술가 이주 실험 프로젝트: # 진안>은 지난 3년 동안 상상공간기획소에서 진행했던 공공 예술 프로젝트의 경험을 바탕으로 산골교육문화 프레임을 만들어보고자 기획되었으며, 음악, 미술, 영상 등 모든 분야의 예술가들이 참여할 예정이다. 워크숍에는 이광준(진안상상센터 기획자), 송성희(귀농통문 편집위원), 임정희(문화연대시민자치센터 소장, 연세대학교 겸임교수), 김달수(희망제작소 뿌리센터 소장) 등 생태 철학, 공공예술, 문화교육 분야 전문가들이 강연자로 참여했다. 워크숍을 바탕으로 프로젝트의 방향을 확정한 후 작가들은 11월 경 함께 진안에 내려가 현장 답사를 할 예정이다. 

 


* 2008-10-24 오후 6:27:37 컬처뉴스 박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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