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진흥위원회'에 해당되는 글 10건

  1. 2009.04.06 지금 강한섭에게 필요한 것은
  2. 2009.03.24 영진위가 강한섭과 측근들의 놀이터인가?
  3. 2009.02.25 서울아트시네마를 지켜라!
  4. 2009.02.13 워낭소리 성공 오히려 독 될까
  5. 2009.01.15 "한국영화 10년 흥망성쇠 담았다"
  6. 2009.01.09 비약은 없다, 조금씩 꾸준히 발전하자
  7. 2009.01.01 몰락의 시작인가, 부진의 고착화인가
  8. 2008.12.12 한독협, 공부하자!
  9. 2008.11.05 상상 이상의 '센 영화'들을 기다린다 -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 -②]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10. 2008.10.29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 - ①]'한국독립영화의 아버지' 김동원 감독 (1)
2009.04.06 08:59

지금 강한섭에게 필요한 것은

영진위 노조의 강한섭 위원장 퇴진 요구에 대해 영화 단체들 입장 표명

영진위 강한섭 위원장.

▲ 영진위 강한섭 위원장.




                                        이주호 기자

(사)영화인회의, (사)한국독립영화협회, (사)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한국영화감독조합, (사)여성영화인모임, 한국예술영화관협회, (사)한국영화제작가협회 이상 7개 단체는 공동으로 성명을 내고 최근 영화진흥위원회 노조에서 강한섭 위원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사태에 대한 영화인들의 입장을 표명했다. 영화단체들은 <지금 강한섭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에게 필요한 것은>이란 제목의 성명서를 통해 이번 사태를 “지금껏 쌓여왔던 강한섭 위원장의 잘못된 소통방식으로 인한 수많은 문제들을 가로지르는 근원”으로 규정하고 “강한섭 위원장과 4기 영진위의 행보와 그 정책들에 대해 더 이상 관조자적 입장으로 침묵”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2008년 예산집행률이 66%, 여러 소위원회의 폐지, 폭언과 말실수로 2008년도 국정감사에서 공개 사과한 사건 등 강한섭 위원장을 둘러싼 논란은 취임 직후부터 지금까지 끊이지 않아 왔다. 급기야 최근에는 재계약 대상자인 영진위 산하 영상산업정책연구소의 정책개발팀과 조사연구팀 연구원 5명을 인사위원회 절차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해고하면서 노조 측의 퇴진 요구에 직면하기도 했다.

영화단체들은 “여러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영진위의 공적 역할을 기대하며 비판을 자제해” 왔으나 “최근 일련의 사태는 과연 강한섭 위원장과 4기 영진위에 대한 영화인들의 신뢰”를 다시 묻게 한다며, 이 사건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상호 신뢰를 회복하고 사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길 촉구했다. 또한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을 데려다 쓰는 것은 위원장의 권한”이라는 강 위원장의 발언을 예로 들며 “생각이 다르더라도 우리 영화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누구와도 대화를 해야 하는 것이 위원장이 해야 할 일”이라 지적하고 “현실에 걸맞은 중장기 영화발전계획 등의 정책을 제안하고 대화의 물꼬를” 터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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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4 09:18

영진위가 강한섭과 측근들의 놀이터인가?

영진위 노조, 강한섭 위원장과 김병재 국장 퇴진 요구

영진위 노조는 22일  강한섭 위원장과 김병재 사무국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 영진위 노조는 22일 강한섭 위원장과 김병재 사무국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이주호 기자

영화진흥위원회 노조는 3월 22일 강한섭 위원장과 김병재 국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강 위원장은, 5월 재계약 대상자인 영진위 산하 영상산업정책연구소의 정책개발팀과 조사연구팀 연구원 5명을 일괄 해고하는 것으로 인사방침을 정하고 인사위원회 절차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해고를 통보했다.

결의문은 이번 사태를 “강위원장이 부임한 이후 지속적으로 제기되던 측근들을 위한 각종 자리 만들기 행태”의 일환으로 보고 “소위 ‘강한섭 이너써클’이라 불리는 인사들을, 없던 자리까지 새로 만들어 무리하게 고용”하는 일이라 비난했다. 강 씨는 2008년 부임 이후 정책간사, 자문위원 등의 보직과 특별 TF를 신설한 뒤 자신과 친분이 있는 인사들을 고용해 왔다. 이러한 전례에 비추어 이번 해고 역시 자신과 친분이 있는 인사들을 직원으로 채용하기 위한 무리수라는 것이 영진위 내부의 공통된 의견이다.

“강위원장과 그의 앵무새 김병재 사무국장의 무원칙, 무소신, 안하무인 행태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는 참담하게도 우리 영화진흥위원회의 위상 추락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에 대한 퇴진 요구는 영화계와 문화계에서 “추락된 영진위의 위상”을 바로 세우고 원칙 없는 업무로 일관하며 끝내 영진위를 자신들의 “측근들의 놀이터”로 만든 데 대한 책임 추궁이라는 것이다.

이어 노조는 “영화계와 영진위의 암적 존재인 강한섭 위원장과 그의 하수인 김병재 사무국장”이 퇴진할 때까지 총력을 다 할 것이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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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5 12:26

서울아트시네마를 지켜라!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긴급토론회 개최

2월 28일(토) 오후 2시부터 '시네마테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주제로 긴급토론회가 열린다

▲ 2월 28일(토) 오후 2시부터 '시네마테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주제로 긴급토론회가 열린다



                                                               김나라 기자

2009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폐막 약 1주일을 앞두고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당초 예정되었던 두 번째 포럼이 긴급토론회 ‘시네마테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로 대체되어 2월 28일(토) 오후 2시부터 낙원동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2월 초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는 시네마테크 전용관 위탁사업을 공모제로 변경한다는 통보를 해 왔다.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이하 한시협)는 이를 위기국면으로 인식, 대응 방향을 모색코자 긴급토론회 개최를 결정한 것이다.

시네마테크 전용관인 ‘서울아트시네마’는 순수하게 민간이 주도하여 설립되고 운영되어 온 민간 기관이다. 다만 영진위는 위탁사업의 형식을 빌려 운영비의 30%를 지원해 왔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위탁이 아닌 공모제로 전환하여 사업운영주체를 자신들이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계약 갱신을 한 달 앞 둔 시점에서 말이다.

서울아트시네마와 한시협은 영진위의 이 같은 결정을 받아 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7년째  운영되어 온 국내 유일의 시네마테크 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는 그 동안 고전 및 예술 영화 상영을 통해 한국 영화문화 성숙에 이바지 해 왔다. 그런데 사업에 대한 정당한 평가나 절차 없이 공모제로 변경한다는 일방적인 통보는 부당하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공모제 전환에 반대하는 일부 관객들은 자발적으로 공모제 반대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서울아트시네마의 로비 한쪽에 지난 21일(토) 부스를 차리고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들른 관객들을 대상으로 서명을 받고 있으며 홍보물도 자체 제작하여 배포하고 있다.

토론회에는 김영진(영화평론가), 오승욱(영화감독), 정윤철(영화감독),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김홍록(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사무국장) 등이 참여할 예정이며 참석을 원하는 이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문의: 02-741-9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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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3 09:43

워낭소리 성공 오히려 독 될까

 - 독립영화 감독모임, '독립영화 환경, 열악해지고 있다'
                                                                                                                                         박휘진 기자
2009년 눈부신 성과를 기록하고 있는 한국의 독립영화들, 그러나 아직 현실은 냉혹하다.
▲ 2009년 눈부신 성과를 기록하고 있는 한국의 독립영화들, 그러나 아직 현실은 냉혹하다.

<워낭소리>가 독립영화 최초로 30만 명 관객을 기록하고, <똥파리>는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타이거상 수상, 최근 개봉한 <낮술>은 매진사례를 기록하는 등 2009년 현재 한국의 독립영화는 생생하게 팔딱거리고 있다. 그럼에도 ‘독립영화의 현실을 걱정하는 감독모임’은 2월 11일 광화문 미디액트에서 ‘독립영화가 살아야, 한국영화가 산다’며 긴급 기자 간담회를 열었다. 독립영화계는 지금 성공을 자축하는 축배를 들 수가 없는 것이다.

워낭소리 제작자이자 한국독립영화협회 사무총장인 고영재 PD는 “워낭소리가 잘 돼서 너무 좋지만 마냥 좋지만은 않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그는 “워낭소리를 비롯한 많은 독립영화들이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는 것과 무관하게 독립영화 환경은 더욱 열악해지고 있다. 여전히 극장을 확보하지 못 해 개봉조차 할 수 없는 영화가 너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진흥위원회(이하영진위)에서는 독립영화 지원 정책을 축소시키거나 폐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현실이 워낭소리와 여타 독립영화들의 성과에 가려져서는 안 된다”며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2008년 영상물등급위원회 선정 올해의 좋은 영상물 대상을 수상한 <동백 아가씨>는 영화 제작부터 관객을 만나기까지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동백 아가씨>의 박정숙 감독은 “영진위의 제작 지원이 천에서 천오백만 원 정도인데, 나는 이 영화를 찍는데 3년이 걸렸다. 지원금으로는 영화 제작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각종 아르바이트와 병행하고 빚을 질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제작이 끝난 후에도 배급에 대한 생각을 할 수가 없는 게 그간 진 빚을 갚으려면 다시 아르바이트에 전념해야 한다. 그런 후에야 배급을 생각할 수 있다.”며 독립영화의 팍팍한 현실을 언급했다.

제작 및 배급의 어려움은 비단 박정숙 감독만의 문제는 아니다. 간담회에 참여한 <워낭소리>의 이충렬 감독,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의 안해룡 감독,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 <할매꽃>의 문정현 감독 모두 비슷한 경험을 지녔다. 게다가 영진위가 몇 년째 예산을 6억원으로 고정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2009년에는 ‘다양성 영화 개봉지원사업’을 폐지하여 앞으로 독립영화가 관객을 만나는 길은 더더욱 요원해질 전망이다.

안해룡 감독은 “워낭소리가 히트해서 이제 개봉지원 안 해도 되겠다는 말들을 하는데 이게 바로 현실 왜곡 아니겠느냐”며 이처럼 계속 지원을 없애려고만 하면 독립영화를 지속할 수 있는 인력이 더 이상 유지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양익준 감독은 “내 영화가 다양성영화 개봉지원에 지원을 못 하게 된 첫 작품이다. 아버지께 영화 개봉하려고 돈 좀 더 빌려달라 했더니(양감독은 이미 영화 제작을 위해 아버지께 9000만원을 빌린 상태다) 나도 대출받아야 된다고 하셨다”며 “직접 닥치니까 지원이 끊어지는 게 정말 무시무시한 일이더라. 제발 지원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문정현 감독은 “지원 사업도 끝나고, 독립영화에서 이제 ‘독립’은 빼버리겠다고 하고, 정말 이 판이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기분이다”라며 다양한 문화를 양성, 지원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언급했다.

독립영화는 예술영화이고 실험영화인 동시에 상업영화이기도 하다. 독립영화를 단순히 비상업영화의 범주로 넣겠다는 것은 ‘너희는 돈이 안 되는 것’이라는 표식을 다는 것과 마찬가지고, 독립영화에는 더 이상의 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고영재 PD에 따르면 향후 독립영화에 대한 지원은 대부분 공모전으로 이뤄질 예정이다. 독립영화지원은 끊고, 모든 지원을 공모전 식으로 진행한다면 실질적인 독립영화 지원은 앞으로 더더욱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CJ나 싸이더스 같은 대기업들도 모두 공모전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승자독식의 자본의 세계가 독립영화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있다. 간담회를 마치며 고영재 PD는 “독립영화를 제발 영수증 처리되는 금액이 아닌 실제 콘텐츠의 가치로 인정해 달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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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5 11:24

"한국영화 10년 흥망성쇠 담았다"

《한국영화, 중독과 해독》낸 강성률 영화평론가 
                                                                                                                                         김나라 기자
강성률 영화평론가를 만나기 위해 현재 교수로 재직 중인 광운대를 찾았다.
▲ 강성률 영화평론가를 만나기 위해 현재 교수로 재직 중인 광운대를 찾았다.

한국영화는 위기다. 그 중에서도 영화비평의 위상은 어느 때보다 낮아져 있다. 개인 홈페이지와 블로그에는 영화에 대한 나름의 비평과 평론이 넘쳐나고 그 중에는 심도 있는 시각을 갖고 영화를 해석한 글도 꽤 찾아 볼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주간지를 비롯한 인터넷 매체의 평론가의 짧은 글도 읽지 않는 상황에서, 영화비평 책을 낸 강성률 영화평론가를 만나보았다.

영화 관련 서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시기에《한국영화, 중독과 해독》이라는 책을 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책에도 썼지만 비평가로 활동을 시작한 게 1999년부터니까 2008년까지 10년 됐다. 지난 10년 동안을 뒤돌아보면 99년 <쉬리>가 크게 흥행한 것을 시작으로 조폭코미디 붐이 일고 제작 편수도 늘고 시장 점유율도 올라가고 더 나아가 해외수출도 하게 됐다. 또 국제 유수 영화제 수상 소식도 많았다. 이러면서 한국영화가 유래 없던 엄청난 활황을 누리다 위기를 겪고 2008년에는 거의 몰락에 다가가고 있다. 이런 하나의 큰 10년의 순환이 보여서 그 1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비평가의 역할과 한국영화 경향, 영화 산업 이런 것들을 정리하는 글이 필요할 듯해서, 그간 발표했던 글 중 주제에 맞는 것들만 골라서 책을 엮게 됐다.

책에 언급된 영화들을 보면 가족주의를 경계하면서도 ‘마초’적인 영화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이 살아오면서 자라온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나는 가장 보수적이라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장남으로서 주입되어 온 게 있어 그런 요소가 없을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은 장남의 특권도 있지만 막대한 책임감도 따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부담이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장남이라는 콤플렉스나 짐이 현실적으로 다가오고, 한국 가부장적 가족주의가 가진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또 그것을 깨는 대안적인 가족을 생각하게 되었다. 올해 출판을 목표로 그런 내용의 책을 준비 중이다.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은 코드가 맞는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초적인 영화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지만, 내가 마초적인 성향이 있어서 좋아하는 것이라기보다 그 영화 안에 있는 여러 요소가 맞물려서이다. 조폭코미디의 경우 마초적인 면이 강한데, 그 안에서 왜 가부장적인 면을 다루나, 가부장적인 것들을 희화화하나 하는 것들을 주목하다 보니 옹호하게 되었다. 한국의 가족이나 학교, 종교 등은 가부장적인 구도가 핵심이고 그 틀을 깬다는 면에서 조폭코미디를 좋아하는 것이다. <실미도>나 강우석 영화 같은 마초 영화는 노골적으로 비판도 했다. 아내한테 물어보면 정확히 얘기하는데 ‘노력하는 마초’라고 말한다.(웃음) 집안일도 열심히 하고 양육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 하니까. 우리 윗세대의 마초는 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은 한다.

대안적 가족주의에 관한 새 책을 준비한다고 했는데 짧게 소개해 달라.

올 해 안으로 나올 거다. 가칭이긴 한데 <가족으로 영화 읽기, 영화로 사회 읽기>라고 지었다.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반란은 어떻게 일어났나, 로드무비의 동성애 구조, 가부장제의 폭력, 자본주의 병폐, 유교적 시각, 한국적 남녀의 문제 이런 것들이 맞물려 있는데 그것이 왜 깨지고, 어떻게 깨지는가, 영화가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지에 관한 책이다. 영화를 통해서 가족주의의 문제점을 밝히고 대안을 찾으려 했다. 

책을 보면 김기덕 감독에 대한 애정을 확인 할 수 있다. 이 외에 좋아하는 감독이나 작품에 대해 더 이야기 해 달라.

좋아하는 감독은 많다. 허진호나 임권택, 김기덕, 홍상수, 아주 좋아하는 임순례, 이준익, 젊은 감독 중에서는 김태용, 나홍진을 좋아한다. 이창동 감독은 반반. 작품적으로 그 영화 세계관에 동조할 수 없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면 일단 강우석 감독, 여성을 다루는 시각에서의 김기덕 감독, 강제규 감독의 영화도 옹호하기에는 문제가 있고. 지금 활동하는 감독 중에서는 그렇다. 홍상수 감독은 너무 반복해서 신선함을 잃은 듯한 느낌이 있다. 류승완 감독도 너무 과대평가된 면이 있는 것 같고.

김기덕 감독은 좋아하면서도, 싫어하는 감독인 건가.

좋아한다고 해도 그 사람을 100% 좋아할 수는 없다. 장점을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여성에 관한 시각에는 좀 문제가 있다. <시간>, <빈집> 등에서는 바뀐 모습을 확인 할 수 있지만 아직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이전의 초기 작품은 누가 봐도 문제가 있다. 사회 저층민 시각에서 한국사회의 착취와 폭력의 먹이사슬을 보여주는 것, 상징적 코드로 풍부한 해석거리를 주는 것, 저예산으로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가는 것, 여러 면에서 김기덕 영화는 높이 평가한다. 지금 같은 시기에서도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 수 있고, 해외에서도 꾸준히 반향이 있고.

<집으로>, <나쁜 남자>를 비교해서 페미니즘 비평의 불공정성에 대해 썼다. <집으로>의 할머니와 손자의 관계, <나쁜 남자>에서의 남녀 관계를 비교하는 것은 비약인 것도 같다.

약간의 비약은 있다. 그건 인정한다. 초기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보면 남성이 강제로 여성의 공간에 들어와서 결국 여성을 자기 뜻대로 만들어서 비주체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주로 페미니즘 비평가들이 했던 이야기다. 즉 여성을 비주체적으로 그렸다고 해서 영화가 좋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기존 페미니즘의 시각인 것이다. 그러나 이정향 감독의 이야기도 같은 구조인데도 이정향 감독의 작품에 대해서는 그렇게 비난하지 않는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미술관 옆 동물원>, <집으로> 모두 크게 보면 김기덕 감독의 영화와 같은 틀이다.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는데도 단지 김기덕 감독이 만들어서 다르다고 말하는 비평은 문제가 있다.
물론 다른 요소도 있다. 김기덕 감독의 작품에는 폭력이 등장하고 이정향 감독의 작품에는 폭력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인데 어떻게 보면 이정향 감독의 작품에는 폭력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강성률, 리토피아, 2008

<집으로>에 대해서 유교적 외할머니 상이라 비판한 면은 없었나.
거의 없었다. 비평도 좋았고 평점도 높았다. 찾아 봐도 한두 줄 정도의 조건이 있었지 그 외에 전면적인 비판은 거의 없었다. 영화를 만들 당시 감독의 진심을 호도하는 것은 아니나 감독의 손을 떠났을 때 잘못 읽힐 위험이 많은데 그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영화 비평의 위기는 세계적 추세인 것 같다. 영화가 산업이기 때문에 경기침체와 맞물려 더욱 큰 위기에 맞닥뜨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 비평은 좀 더 학문적 영역에 중점을 두어야 하지 않나?

영화뿐 아니라 비평 전반의 위기다. 지금은 누구나 비평가이기 때문에 그러다보니 비평가의 글을 잘 안 읽게 되고. 가장 큰 이유는 비평가 내부에 있다. 인터넷 시대가 되고 영화 전공자가 많아지기도 하면서, 단기간에 너무 많은 영화 비평가가 양산 됐다. 영화평론가, 영화 칼럼니스트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많아졌는데 실제로 영화는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분야다. 깊이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이 성급하게 글을 많이 쓰면서 기본적으로 비평에 풍부한 지식과 시각이 얕아졌다.

반대 측면은 영화학과 출신들이 영화 자체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을 써먹으려는 글을 쓰려다 보니 대중과 멀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또 한편으로는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종이 매체의 글을 잘 읽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설, 클래식, 미술의 경우 보고 말하기가 힘들지만 영화라는 매체 특성 자체가 보기 쉽고 말하기 쉽다. 그러다 보니 자연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글을 잘 읽지 않는 경향이 생겼다. 이런 상태에서 이 영화가 무엇을 담고 있는가를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전반적인 시대적 흐름이라는 것은 명확하고. 특히 학생들과 이야기하다보면 관심이 학점, 취업에만 있다. 상당히 불쌍한 세대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평의 전문성을 위해서 오히려 학문을 강조해야 하는 게 아닌가.

긴 글을 쓸 수 있는 지면이 없다. 일간지 같은 경우 7-8매 정도의 청탁이 온다. 계간지만 어느 정도의 지면을 주는데, 영화 계간지는 없다. 문학 계간지에 끼어 들어가야 한다. 문학은 출판사의 홍보 효과가 있어서 그나마 계간지가 활발한데, 영화는 영화사가 계간지를 내지 않을뿐더러 낸다고 해도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고, 판매 수익을 생각했을 때도 수익성을 보장할 수 없다. 짧은 글로 흐름을 잡고 그 후 긴 글을 통해 영화의 현재와 미래를 짚어야 하는데, 누가 읽을 수 있을까. 긴 글을 읽을 독자가 과연 있을까. 그러다 보니 지면이 줄고, 그런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지금으로선 가장 확실한 방법론이 페미니즘 비평인데, 영화 전공이 전문화되어 있자 않은 것과 관련 있다는 생각이 든다.

페미니즘 비평이 진영도 폭넓고 확실한 이론 틀과 방법론이 있기 때문에 비평가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 하고 있다. 여성평론가 중 페미니즘을 기반에 두지 않은 사람이 없고, 몇몇은 노골적으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 평론가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렇게 깊이 있게 한 방면으로 들어가서 전문적인 시각을 확보해야 한다는 면에서 공감한다.

영화 전공은 왜 전문화되지 않았나.

이전에는 영화학과가 중앙대, 동국대, 한양대 정도에 밖에 없었다. 그것도 제작 중심이었다. 90년대 중반부터 유학한 사람들이 와서 영화 담론을 이끄는 역할을 했는데, 그들 역시 전문화된 분야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영화 전반에 대한 모든 것을 다 관여하게 되다 보니 지식이 얕아졌다. 또 얕아진 것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고 안주하게 된 측면이 있다. 그 밑의 세대가 흩어져서 전문화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여전히 얕은 것 같다.

전문화 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나.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전문화 한다는 것은 자기가 무엇을 잘 할 수 있는가, 잘 하는 면을 보여줘서 살아남는 것인데, 현재는 한국 영화사에 치중되어 있다. 한국 영화사에서 장르나 근대화나 식민주의 등을 연구하는 사람은 많다. 오히려 비평을 덜 하게 되는 것 같다. 밑에 세대를 보면 비평을 하면 돈도 안 되고 힘만 들기 때문에 비평 하려는 사람이 적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비평분과에 대한 지원은 어떤가?

책 출판, 신진연구인력지원 정도가 전부인데, 막대한 돈을 제작이나 배급에만 지원하고 있다. 문학의 경우에는 막대한 지원이 비평분과에 이루어지고 있다. 영진위가 있기 때문에 문예진흥기금 신청은 아예 할 수가 없고. 영진위는 다 제작에 치우쳐 있고, 학술, 비평에 관해서는 지원이 없다. 비평, 학술 부분이 시장에서 얼마나 외면당하는지 뻔히 아는 사람이 영진위 위원장이 됐는데도 불구하고 이루어지지 않는 것엔 문제가 있지 않나. 우수논문지원 같은 경우도 어리석은 짓이다. 이미 학위를 따기 위해 낸 석사논문을 지원하는 일보다 새로이 논문을 내려는 사람을 위해 지원해야 하는 게 아닌가.

다시 언급할 것도 없이 한국영화계는 위기에 처해있다. 극복 방안이 있다면.

제일 큰 위기는 부가 시장이 함몰되면서 왔다. 전에는 비디오, 케이블, 공중파 시장이 극장시장보다 배로 컸지만 이제 그 시장이 다 죽었다. 케이블 시장도 거의 끝났고 비디오 빌릴 곳도 없다. 대여점에 가도 수량도 그렇고 종류도 그렇고 빌릴 게 없다. 그 돈이 다 어디로 갔겠는가. 수업 시간에도 학생들과 이야기해 보면 다 죄의식 없이 불법 다운로드로 영화를 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법다운로드를 빨리 합법화시켜 거기서 나온 돈이 영화 제작비로 돌게 해야 한다.

최근 희망적인 게 IPTV 시장이다. 깜짝 놀란 게, 2년 전인가 모 IPTV회사의 기획위원이었는데 <미녀는 괴로워>의 경우 2천원, 3천원이었는데도 몇 만 단위로 봤다. 사실 나 역시 별로 안 볼 줄 알았다. 그런데 요즘 집에 홈씨어터를 갖춰 놓은 사람들도 많아 졌고, 특히 바쁜 직장인들이 퇴근 후 편하게 보기 위해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운로드 시장도 합법화 시켜서 대형 배급사가 판권을 사서 5:5로 수익을 나눠 그 돈을 다시 영화 제작으로 돌아오게 하는 구조를 만들면 위기에서 좀 벗어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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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9 12:24

비약은 없다, 조금씩 꾸준히 발전하자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⑩] 임창재 한독협 이사장 
                                                                                                 컬처뉴스 김나라, 필름온 안효원 기자
임창재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
▲ 임창재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

한국독립영화협회 창립 10주년 특집으로 준비했던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 마지막 인터뷰는 한국 독립영화 1세대이자 한독협 이사장으로 재임 중인 임창재 감독과 함께했다. 마지막 인터뷰는 그동안 아홉명의 독립영화인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며 이야기 했던 독립영화계의 현안과 독립영화인들의 고민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한독협의 이사장으로서 또 동시에 한 사람의 창작자로서 임창재 감독의 의견을 들어 볼 수 있는 유의미한 시간이었다.

한국독립영화협회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소감 한마디 해 달라.

일단 시간이 빨리 갔다. 돌이켜 보면 그동안 많은 일을 한 것 같다. 한편으로는 변화가 있었지만 많은 변화는 아닌 것 같다는 양면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으로 들린다.

이건 협회의 일원이 아닌 한국 사회의 창작자 입장에서 말하는 건데, 우리는 창작을 통해 자기 존재를 인식하고 성찰하며 산다. 그 원칙에서 비춰볼 때 작품을 더 치열하게 만들지 못한 것 같다. 물론 양적으로 따지는 게 능사는 아니지만, 중간에 사라지는 감독들을 볼 때 더 할 수 있었는데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사라지는 감독들 또한 창작하고 싶은 열망이 없어서 작업을 그만둔 것은 아닐 텐데.

지난 10년의 정권이 독립영화 환경에 영향을 주긴 했다. 그런데 그런 외적인 요인과 무관하게 내적으로 계속 만들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그런 부분을 쌓는 데 있어 더 강화할 수 있었는데 못했다는 말이다.

가치와 미학에 영화란 옷을 입히다.

언제 창작자의 길을 걷게 됐나.

1994년 동숭아트센터에서 열린 실험영화제에서 <오그>(ORG)라는 영화를 상영했다. 그 영화제는 내가 몸담고 있었던 실험영화연구소에서 주관했었는데, 국내 작품이 전무한 상태라 좀 부족하더라도 내가 만들게 됐다. 생각보다 관객이 많이 왔다. 당시 실험영화가 낯선 개념의 영화였는데도 매체에서도 관심을 보여 힘이 됐던 기억이 난다.

처음부터 실험영화에 뜻이 있었나.

그때는 그런 생각을 별로 안했다. 군대 제대한 후인 1990년대 초반은 우울하고 패배적인 사회 상황이었다. 제대하고 노동자문화운동연합에 속해 있는, 거의 해체 위기에 있는 영화모임에서 공부를 했다. 시네마테크에서 외국 영화를 빌려와 보고 토론하고 그렇게 1년간 했다. 그러다 서서히 창작, 제작에 대한 논의를 했었다.

당시 어떤 일들이 있었나.

권병순 감독님이 영화 미학의 기초가 되는 실험영화 공부를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연구소도 만들었고, 노동자문화운동연합의 영화분과가 서울영상집단으로 독립했다. 당시 충무로를 경험한 선배들이 있었는데 충무로에서 수순을 밟는 것이 결코 최선의 코스는 아니라는 걸 알았다. 또 1980년대에 대학에서 인문사회를 공부하면서 영화 쪽에 관심을 가졌던 선배들이 1990년대에 영화를 만들면서 7,80년대의 관행들에 균열을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독립영화를 선택한 이유인가.

그때 충무로 방식이 합리적이진 않다는 판단을 했다. 그렇다고 충무로를 반대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 안으로부터 출발해 만들어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또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렸는데, 그 연장선에서 내가 하고 싶은 개인 창작, 즉 역설, 가치, 미학을 그림이 아닌 영화란 옷을 입혀 만들고 싶었다. 그림이나 영화, 모두 비주얼이 중요한 언어라는 공통점도 있고.

2002년 충무로에서 <하얀방>을 연출했다.

그쪽에서 의뢰가 왔다. 사실 고민을 많이 했다. 당시 협회의 운영위원이었고, 한독협 원년 멤버인데 상업영화를 하면서 협회에 누가 되지 않을까 선배들과 많은 고민을 나눴다. 근데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도 있었고 독립영화가 상업영화와 적대관계는 아니니까 개인적으로 좋은 경험일수도 있겠다 싶었다. 독립영화건, 상업영화건 영화가 최종적으로 가야할 지점은 관객, 대중이기 때문에 다르지는 않을 거라고 봤다.

직접 해보니 어땠나.

돌이켜보면 준비를 더 철저히 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충무로는 역할이 분화되어 있고 시스템화 되어 있다. 그게 장점이고 단점인데 단점을 장점으로 만들기엔 시야도 좁고 경험도 부족했다. 스탭 개개인은 오랫동안 작업을 해 온 사람들이라 능력 있는 분들이다. 근데 그분들의 노하우를 작품에 녹여 내는 방향으로 했어야 하는데 시원하게 못한 것 같다. 어떤 순간에는 더 과감하게 결정하고 고집도 부렸어야 했다.

다시 한 번 충무로에서 작업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나.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이 제작비이다. 제작비를 쓸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면 감독의 입장을 넘어 프로듀서적인 마인드도 같이 갖고 해야 할 것 같다. 더 나아가 관객, 대중을 한 축에 놓고 사고를 해야 한다. 과연 이 많은 제작비를 갖고 관객들을 상대할 때 그 정도 가치를 담고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나 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럴 가능성이 있고 내가 준비가 되어 있다면 할 것이다.

독립영화, 결코 주저앉지 않는다!

이후에도 꾸준히 독립영화를 만들어 왔다. 독립영화의 매력이 뭔가.

독립영화를 통해서 크든 작든 꾸준히 성과를 쌓아가는 게 가치 있는 작업 아닌가. 지금 충무로가 어렵다고 하지만 독립영화는 절대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있다. 그 속에서도 창작의지를 잃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하는 게 창작자의 본분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로 10년이 넘게 작업을 했는데 작업 환경의 변화가 있나.

물론 있다. 양적인 변화도 있고, 독립영화라는 개념도 생겼다. 그 전에는 작은영화, 상업영화, 단편영화라는 말만 있었다. 지금은 독립영화라는 개념과 지향성을 갖고 작업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그 과정에는 한독협의 설립이 독립영화 진영에서의 가장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때 충무로 방식이 합리적이진 않다는 판단을 했다. 그렇다고 충무로를 반대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 안으로부터 출발해 만들어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독협 10년 동안 가장 인상적인 사건이나 경험이 있다면.

한독협이 생긴 이후에는 그렇게 큰 사건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 전부터 있던 인디포럼이 한독협이 출범하는데 가장 큰 모티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인디포럼은 독립영화인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고 역할 분담해서 만드는 영화제였기 때문에 그 자체가 모임이었다. 인디포럼이 협회가 만들어지는 돌다리 역할을 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 이후에는 독립영화에 대한 개념과 신념이 생기면서 창작자들이 수적으로도 늘어나고, 사적으로도 교류를 하게 됐다.

작년에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창작자와 협회의 이사장을 병행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협회의 결정은 개인의 결정이라기보다 집단의 결정이기 때문에 내가 이사장이라는 직책이 있어도 협회의 한 구성원일 뿐이다. 이 때문에 외부에서 보면 좀 힘이 없어 보이는 이사장일 수 있다.(웃음) 실제적으로 긍정적인 자극을 주는 것 같다. 부담되지는 않는다.

기획 인터뷰를 하면서 한국 독립영화계가 ‘변화의 시기’에 도달했다고 한 사람들이 많았다. 한독협 10주년을 맞은 2008년 독립영화의 상황은 어떤가.
 
결국은 독립영화인들이 자생력을 키우는 시기였던 것 같다. 자생력은 다른 일을 하지 않더라도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 나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근데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아직 미진한 게 많다. 인디스토리가 10년 됐고, 독립영화 전용관도 1년 됐고, 미디액트도 4, 5년 됐다. 또 지금 독립영화 배급사가 더 생기는 판이다. 이렇게 과거에 비해 성과를 내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시작일 뿐이고, 이제 또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총체적인 의미에서 영화를 만들고 배급되고 상영되고 평가 받는 소통 과정의 순환이 커져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미약한 부분이 있다.

소통 과정 순환의 최소한의 기틀은 마련했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최소한의 지원이 필요한데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바뀌면서 기존의 방향과 달라졌다는 인식이 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영화를 너무 산업적인 측면에서 사고하는데서 오는 문제다. 독립영화 진영에서 봤을 때, 영화를 산업으로만 볼 때에 독립영화가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 있다. 영진위의 지원금이라는 게 결국은 세금이고 관객들이 낸 입장료에서 모아진 기금, 즉 대중이 만들어준 재원이라는 거다. 그런 재원을, 나쁘게 이야기 하면, 일회성, 소비적인 부분에만 ‘올인’하면 사실 그건 다양성, 공공성을 해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건 독립영화인의 이익뿐만 아니라 관객의 입장에서 봤을 때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다.

독립영화 진영에 지원하는 것이 문화다양성 증진에 도움이 된다는 건가.

독립영화인들이 상대적으로 다양성이나 공공성을 더 생각하기 때문에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자생력을 가져야 한다. 지원에만 의지하면 좋은 창작태도는 아니다. 근데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업의 논리로만 영화를 풀어가야 한다고 하면 궁극적으로 가장 손해 보는 것은 관객이다. 독립영화인을 위해서라기보다 장기적으로 미래 한국 관객을 위해 그렇게 정책이 집행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진위, 정신 차려라!
 
서울독립영화제 기간에 한독협에서 성명을 발표한 것은 의외였다.

우리도 좀 껄끄럽기도 했다. 근데 워낙에 중요한 사안이기도 하고, 좀 더 강조하기 위해서 그랬다. 인식을 공유하고 문제점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영화제를 통해서 알려야 했다기 보다, 그 시점에 알려야 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성명서의 주안점은 무엇인가.

제일 중요한 것은 작년, 올해 논의됐던 복합상영관 건립 문제다. 예산까지 확보 됐었던 사업인데 그걸 성실하게 이행하지 못한 게 가장 큰 문제다. ‘아시아무빙이미지센터’(이하 이미지센터)로 확대된 건데, 청사진이 있더라도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응 전략이 없었다. 실질적으로 그걸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전략전술이 필요한데 그게 미진했고 결과적으로 추진할 역량이 안됐다고 생각한다. 강한섭 위원장의 리더십과 추진에 대한 신념이 부재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나 생각해서 그 쪽에 포커스를 맞춰 성명서를 냈다.

이미지센터는 복합상영관과 방향이 전혀 다르지 않나.

이미지센터는 국내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보다는 아시아를 포괄하는, 어떻게 보면 전시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없어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그걸 실현시킬 장기적인 비전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게 아닌가 생각한다. 거기에 복합상영관 문제가 묻혀서 이중적인 고통을 받아 찌그러진 것 같다.

그럼 복합상영관 건립은 폐기된 건가. 이미지센터는 문화다양성을 위한 공간은 아닌 것 같다.

공간보다는 활동이 더 중요한 거다. 어쨌든 복합상영관이 그런 기능을 할 수 있는 매개체인데, 그게 지금 불투명한 상태가 되니 답답한 거다. 또 3기 영진위에서 추진했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 같다. 그러니까 굉장히 화가 난다.

강한섭 위원장이 4기 영진위를 맡으면서 영화인들과 대화를 안 한 것 같다. 성명서의 내용도 그렇고.

외부적으로는 언제든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런 것 없이 많은 일이 진행됐다. 그래서 배신감 같은 걸 느낄 수밖에 없기도 했다.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식에서 강한섭 위원장이 “영진위의 사업은 독립영화가 거의 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땠나.

그게 아니라는 건 영진위 예산이나 정책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좀 다른 얘기지만 독립영화 진영도 영진위만 바라보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든다. 넓게 보면 스스로 굴러갈 수 있는 독립영화의 체계, 시스템을 만드는 게 더 큰 문제다. 영진위는 그 중 하나의 촉매제로 바라봐야 하는 거지 거기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물론 같이 힘을 모을 부분이 있지만 그건 부분이지 전체가 될 수는 없다.

한독협, 브레인을 찾습니다!

전체의 틀을 갖추기 위해서는 정책 연구가 시급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10주년 기념 사업만 해도 과거를 돌아보는 부분은 좋았지만, 앞으로의 10년을 위한 정책에 관한 부분은 미진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새로운 10년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

정책 개발에 대한 필요성은 느끼고 있다.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고 어떻게 목표를 도달할 것인가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것들을 연구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게 정책이라면 당연히 한독협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회의에서 그런 논의가 나오고 모임도 만들어지고 있다. 근데 우리가 대부분 창작자들의 마인드를 갖고 있어 그걸 전담 해서 하기가 어렵다. 자발적으로 뜻이 모아져야 되는데 조직적으로 너무 강제 한다고 해서 결과물이 금방 나오지는 않지 않나. 필요성은 있지만 요구만큼 시원하게 나올 정도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 같다.

어떤 식으로 풀어갈 예정인가.

글쎄, 그건 내가 한다고 되는 건 아닌 것 같다.(웃음) 한독협이라는 조직의 틀을 떠나 전문성을 갖추고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인력과 결합하는 게 필요하다. 비전과 능력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열려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함께할 수 있을 거라 본다.

"독립영화 했다고 계속 독립영화 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 없는 문제다. 중요한 것은 독립, 비독립을
떠나서 창작 자체가 고통스럽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방금 외부 인력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기획 인터뷰에서 한독협 내부 인력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었다. 영화를 만드는 스탭은 물론 활동가들 또한 일은 많고, 생활이 보장 안 된다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노동에 대한 대가가 합리적으로 나오면 일하기가 더 수월할 거다. 근데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이번에 좀 도와주면 다음 작품 할 때에 도와줄게”라는 식으로 노동력을 담보로 노동력을 빌려 온다. 100% 신용사회다.(웃음) 어쨌든 물질적인 부분을 많이 강화할 필요는 있다. 그걸 감수하면서 일하려는 사람이 적은 건 당연한 거고, 한 개인이 여러 가지 역할을 해야 하는 게 독립영화의 현실을 반영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협회가 전체적으로 조금씩 나아진다면 개인도 같이 나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한독협 초기에 비해 내부 구성원들 사이의 결속력이 좀 약화되었다는 지적이 있었다.

협회 초기에 인원이 적었을 때는 만드는 것 자체가 중요했지만, 협회가 커지면서 개인이 생각하는 협회의 가치, 목표가 넓어지기 때문에 협회 내부에서도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더 많이 발생하는 것 같다. 그런 부분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대화를 통해서 조절을 할 수 있는 정도는 됐다고 본다. 그걸 더 수용할 수 있는 폭넓은 조직이 되는 게 중요하다. 논의할 수 없다고 하는 건 우리 역할을 방기하는 거다. 이견까지도 대화하고 토론해서 합의를 도출해 낼 수 있는 구조와 열린 마인드를 가지도록 노력하고 있다.

창작의 고통을 마주하라! 그게 창작자다.

독립영화, 독립영화인이란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하는 젊은 독립영화인들이 많은 것 같다. 선배 독립영화인으로서 조언을 해 준다면.

예술은 추상적인 통로고, 창작자는 생각이나 의지를 그 통로를 통해 삶을 실현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일반적인 현실 속의 사람들과는 삶의 과정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자기가 체념하는 것도 생기고, 동시에 어떤 부분은 더 노력해야 한다는 자각을 하게 되는 데 그런 자각을 계속 하는 게 중요하다. 먼 관점에서 볼 때 독립이다 아니다 하는 경계 자체가 무너지길 바란다. 독립, 비독립은 자본의 성격 갖고 결정되는데 그런 경계를 넘어서 사고할 수 있으면 좋겠다.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는 건가.

독립영화 했다고 계속 독립영화 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 없는 문제다. 중요한 것은 독립, 비독립을 떠나서 창작 자체가 고통스럽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그 고통은 피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이외에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가까이 두고 살면 위안이 된다. 개인적으로는 고전음악을 접하면서 위안을 받기도 하고, 영감을 얻기도 한다. 영화는 종합예술이니까 음악, 문학 등 훌륭한 예술가들을 마음속에 두면 큰 힘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만날 독립영화 관객들과 한독협 회원들에게 한마디 해 달라.

독립영화에 조금이라도 관심과 애정을 갖고 보는 관객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근데 창작자와 관객의 거리가 쉽게 좁혀지지 않는 부분에서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럴수록 만드는 입장에서는 고민이 더 많아 진다. 예술성과 대중성의 괴리가 더 커질수록 창작자의 고민도 더 깊어지는 거다. 그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는 게 자본주의 사회 창작자들의 위치가 아닌가 싶다. 관객들이 독립영화를 통해서 삶에 힘과 자극을 받았다면 거기에 대해서 표현을 해주면 좋겠다. 창작자들에게는 큰 힘이다.

한독협의 새로운 10년을 위한 제언을 해 달라.

이제 첫 길을 건넜다. 뒤돌아보면 많은 일을 했고, 주변을 보면 한독협에 기대하는 사람들도 많이 늘었다. 전망을 계속 유지한다면 지금보다는 나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지금 그런 걱정을 한 단계는 아니지만, 스스로 조절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커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어쨌든 경계해야 할 것은 경계하고, 힘을 많이 쏟아야 할 데는 힘을 쏟아야 한다. 비약적인 발전이라는 것은 사실 바람일 뿐이지 비약하는 것은 없다. 이후 10년이 지나서 뒤돌아보더라도 조금씩 변해왔구나 하고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좀 더 프로페셔널하게.(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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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1 16:38

몰락의 시작인가, 부진의 고착화인가

[2008 장르결산 - ③]영화

올해 손익분기점을 넘어 실질적으로 수익을 낸 영화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포함하여 고작 8편에 불과하다.

▲ 올해 손익분기점을 넘어 실질적으로 수익을 낸 영화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포함하여 고작 8편에 불과하다.


                         강성률 _ 영화평론가, 광운대 교수

2008년 한국영화를 한마디로 평가하라면 ‘부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2008년 한국영화계의 어떤 수치를 보더라도 부진이라는 단어를 지울 수 없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의 통계에 따르면, 2008년 1월부터 12월까지 개봉한 영화는 105편 내외가 될 것이라고 한다. 올해 초 50편 내외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제작편수만 놓고 보면 결코 적지 않은 작품이 개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속사정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개봉된 영화 가운데 2005년이나 2006년, 2007년에 제작된 영화, 일명 창고영화가 적지 않는 수를 차지하고 있다. 활황기에 제작했지만 개봉 시기를 놓친 작품을 뒤늦게 개봉한 것이다(물론 창고영화 대부분이 매서운 시장의 버림을 받았다).

상황이 이러니 한국영화 점유율이 올라갈 수 없다. 역시 영진위의 통계에 의하면, 올 1월부터 11월까지 한국영화 점유율은 41.6%인데, 지난 해 같은 기간의 52.3%보다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영화관객 수도 줄었다. 1월부터 11월까지 전국 관객 수는 1억 3,490만 명인데, 이는 한창 관객이 늘던 2006년보다 1,500만 명이나 줄어든 수치이다. 개봉편수는 비슷한데, 한국영화 점유율이 줄고, 전체 관객이 줄어들었으니 영화의 수익률이 떨어진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손익분기점을 넘어 실질적으로 수익을 낸 영화가 고작 8편이라고 한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추격자>, <강철중:공공의 적 1-1>, <고死>, <영화는 영화다>, <아내가 결혼했다>, <미인도>, <과속스캔들> 등이 자랑스런(!) 목록이다. 이와 반대로 전국 관객 10만 명도 모으지 못한 영화도 12편에 이른 것으로 집계됐다. 105편 가운데 단 8편이 수익을 냈으니 과연 누가 영화에 투자하려고 하겠는가? 정말로 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외형적인 수치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현재 한국영화는 2006년을 정점으로 해서 서서히 내려오는 중이다.

외연적인 상황을 떠나 내부를 들여다봐도 실속이 없다. 올해 한국영화는 세계의 유수한 영화제에서 수상도 못했고 경쟁작으로 출품하지도 못했다. 수출은 거의 막히다시피해서 충무로에는 돈줄이 말랐다. 더 큰 문제는 쉽게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의 위기 상황을 불러온 가장 큰 원인은 부가 시장의 소멸을 들 수 있다. 지금 한국영화가 살아나려면, 이미 숱하게 주장한 것처럼, 부가 시장이 살아나야 한다. 한국의 영화 시장은 부가 시장이 소멸하면서 수익의 90% 이상을 극장에서 뽑아야 하는, 매우 불안정한 체제로 굳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영화가 살아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전 세계 영화최강국 미국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미국은 국내 극장 시장보다 두 배 이상 큰 국내 부가 시장, 그리고 국내 전체 시장보다 더 큰 해외 시장이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 영화 시장은 국내 극장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 그러니 홍보비가 과도하게 투입되면서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현 위기를 타파할 근본적인 방법은 단 하나다. 불법 다운로드 시장에서 합법적인 제작 자본을 확충할 수 있도록 다양한 윈도우를 개발해야 한다. 이것 없이 한국영화가 살아나길 바라는 것은 무리이다. 이와 더불어 해외 시장을 다시 개발해야 하고, 지나치게 상승한 제작비를 적당한 수준으로 낮추어야 한다. 100억 원짜리 영화를 소화하기에는 한국영화 시장은 아직 좁다. 부가 시장과 해외 시장을 모두 살린 다음 파이를 키워야 한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신기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등의 영화가 꽤나 많은 관객을 불러 모으고도 수익을 내기는커녕 손해를 본 것은 지나치게 고비용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암울한 산업 이야기만 나열한 것 같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논하지 않을 수 없어 그렇게 되었다. 이제 간단하게라도 2008년 한국영화의 경향과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논할 것은 팩션영화의 강세이다. <님은 먼곳에>, <신기전>, <고고70>, <모던 보이>, <라듸오데이즈> <미인도> 등 많은 영화가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루었다. 흥미롭게도 남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만주에까지 상상력을 넓혀갔지만, 결과는 참담한 패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팩션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왜,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특정 시기와 특정 지역을 불러오는가의 문제, 즉 역사 해석의 문제이다. 그런데 <님은 먼곳에>를 뺀 대부분의 영화에서는 그것이 부족했다. 2008년에 개봉된 많은 팩션영화에서 왜 역사를 영화의 소재로 다루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했다. 단지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소재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해석을 통해 관객과 대화해야 한다.

다음으로 논할 경향은 다양한 에로티시즘의 등장이다. 신윤복을 여성으로 해석해 그의 사랑을 그린 <미인도>, 가부장적 구조가 강한 한국사회에 반기를 든 <아내가 결혼했다>, 남성이 생각하는 여성의 섹슈얼리트를 뒤엎어버린 <미쓰 홍당무>,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과감한 동성애를 다룬 <쌍화점> 등 다양한 영화에서 에로티시즘을 다루고 있다. 얼핏 보더라도 매우 다양한 경향의 에로티시즘이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비단 볼거리로서의 에로티시즘에 그친 것이 아니라 성적 정체성과 가부장제의 문제점까지 파고드는 것이라서 의미 있다고 할 수 있다(물론 모든 영화가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독립영화의 경향을 살펴보면, 2008년의 독립영화 역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한독협이 10주년을 맞았지만, 왕성하던 창작의 에너지는 서서히 식어가고 있고, 뜨거운 열기를 지닌, 새로운 감독들은 쉽게 등장하지 않고 있다. 영화제에 출품된 수많은 단편들도 제한된 상상력 속에서만 진동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을 수 없었다. 그나마 진지한 울림이 있는 <농민가>, 삶과 죽음, 인생에 대해 고찰하게 하는 <워낭소리>, 한국 사회를 날카롭게 짚어본 <똥파리> 등의 영화는 언급해야 할 것 같다.

혹자는 한국영화가 위기 아닌 적이 있었느냐고 이야기 하지만, 지금 한국영화계는 상시적으로 반복되었던 위기 상황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위기 상황에 처해있다. 돈이 없어 투자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손해를 볼 것이 뻔히 보여 투자를 하지 않는 지금의 구조는 심각한 악순환을 몰고 온다. 때문에 아무리 긍정적으로 보더라도 내년의 영화계는 올해보다 더 어려워 보인다. 지금이야말로 영화인들이 머리를 맞대야 하는데, 그런 역할을 앞장서서 해야 할 영진위를 보면,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의 타는 갈증처럼 한없이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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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2 10:22

한독협, 공부하자!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⑦] 맹수진 영화평론가

맹수진 영화평론가
▲ 맹수진 영화평론가

한 편의 영화가 극장에 걸리고 ‘상영’된다고 그것이 그 영화의 ‘종착점’이라 할 수 있을까. 한 영화가 만들어지고 거기에 건강한 피드백이 없다면 감독 개인의 차원에서도 영화산업 전체의 차원에서도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만나본 사람이 독립영화비평의 최전선에서 활동해 온 맹수진 영화평론가다. 맹수진 씨는 한독협 운영위원뿐만 아니라 영화진흥위원회 소위원, 영화제 심사위원 등 독립영화의 안팎에서 꾸준하고 활발하게 활동해 왔다. 어쩌면 독립영화계의 내부 사정을 잘 알면서도 비판의 날이 가장 서 있는 인터뷰이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애정 어린 충고가 담긴 인터뷰 시작해 본다.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소감 한마디 해달라.

아쉬움이 좀 남는다. 10주년 기념 영화도 만들고 포럼도 하는 등 여러 가지 행사를 했는데 행사가 너무 회고적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의 ‘올해의 독립영화’, 독립영화인들을 쭉 살펴보면서 한독협의 출범 의의라든지 지금까지 어떤 활동을 해 왔는지에 관해 나름대로 잘 정리하는 시간이긴 했다. 문제는 지금 정세가 많이 변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변화의 시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과거에 한독협이 정부와 대립하는 단체였다면, 지난 10년은 한독협이 제안하는 사업을 정부가 많이 받아 들였던 시기였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많은 사업이 이루어졌고, 독립영화의 외연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많은 지원을 받다 보니 NGO가 갖고 있는 긴장이 좀 없어진 느낌이다. 옛날에는 허리띠 졸라매는 게 기본이었는데 최근 10년 동안은 어떻게 보면 좀 배부르게 살아왔다. 그러다보니 한독협의 역할이 너무 사업에 치우쳤고 정책 연구에는 소홀했다.

그게 아쉬움이 남는다는 건가.

정권이 바뀌면서 많은 사업이 축소되고 있다. 다른 방향에 대해서 정부나 영화진흥위원회와 싸워야 하는데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정책이 없는 거 같다. 지금 집중해야 하는 것은 사업이 아니라 앞으로 10년을 내다보는 정책 개발이다. 그런 이야기가 10주년 사업에서는 별로 없었다. 굉장히 많은 사업을 했지만 어떻게 보면 액기스가 좀 빠진 것 같다.

영화, 사랑하고 끔찍하다

처음부터 숨 가쁘게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웃음) 분위기 전환 차원에서 영화평론가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소개해 달라.

영화진흥위원회 예술영화인정소위원회 위원과 <무비위크> 스탭 평론가로 활동했다. 또 예술영화 전용관 하이퍼텍나다에서 2주마다 정기적으로 하는 다큐멘터리 기획전을 진행했다. 그리고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와 전주국제영화제(이하 전주영화제)에서 활동을 했다. 전주영화제에서 6년 동안 활동을 했는데 거기서 독립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본격적으로 서독제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2005년부터다.

많은 일을 한다. 영화평론가로서의 삶은 어떤가.

평론가로서의 삶이라, 그건 뭐 다 짐작할 것 같은데 연애하는 느낌이다.(웃음) 연애하다 보면 좋을 때도 있고 싫을 때도 있고, 또 너무너무 끔찍할 때도 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특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도 독립영화에 있고 가장 싫어하는 영화도 독립영화에 있다. 충무로 상업영화들에는 안정적인 틀이 있지만 동시에 답답하고 고루한 면이 있다. 독립영화 중 그걸 벗어나는 영화, 예상치 못한 영화를 만나면 진짜 신난다. 남들이 모르는 뭔가를 내가 발견한 느낌, 정말 좋다.

그럼 끔찍할 때는 언제인가.(웃음)

충무로에서는,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지만, 아닌 영화는 냉정하게 시장에서 버려진다. 근데 독립영화의 경우 함량 미달인 영화도 있는데 독립영화라는 울타리 안에서 보호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어떤 목소리를 내야할지 갈등하게 된다. 특히 ‘힘들게 만들고, 양적으로 늘릴 필요가 있으니까 욕하기 보다는 격려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말을 들으면 갈등은 심해진다.

그걸 잘 표현하는 타입인가.

난 외교적인 화법을 잘 구사하지 못해 공식적인 자리에서 내 맘속에 있는 말을 결국 드러내게 된다. 싫은 영화나 그 감독을 만나면 표정관리도 안된다. 뒤에서는 욕하면서 겉으로는 웃으면서 영화 잘 봤다고 할 수도 있는데 난 맘에 안 드는 작품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앞에 앉아 있다가 서먹해지는 상황도 많이 있다.(웃음)

민주화를 꿈꾸던 자유주의자

영화는 언제부터 시작했나.

본격적으로 시작한건 대학 졸업하고 회사 다니면서다. 그 때 내가 1주일에 한번씩 들렀던 것이 종로에 있던 코아아트홀이다. 또 라이브러리를 회원제로 운영하는 시네마테크에 영화를 보러 다니면서 열심히 활동하기 시작했다. 집안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 회사는 다녀야했다. 나 돈도 잘 벌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웃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돈도 빨리 모으려고 했다.

"독립영화 비평의 경우 장기적인 관점에서 내부적으로 비평가들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년에 한독협에 비평분과가 처음 생긴 거다"

왠지 학창시절이 평탄하지만은 않았을 거 같다.

내가 89학번인데 그때만 해도 정치조직들이 굉장히 많았다. 내가 편지 한 장 달랑 써 놓고 몇 달 동안 안 들어오고 그러니까 집에서 학교도 못 가게 했다.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맞듯 맞은 적도 있었다.(웃음) 근데 그땐 몰랐는데 그 시기에 학생운동을 하다 영화 쪽에 들어온 사람들이 되게 많다.

영화에서 새로운 운동의 방향을 발견한건가.

그때 영화로 방향을 틀면서 남들에게 공식적으로 그렇게 얘기를 했다. ‘그동안 사회문제에 직접적으로 투쟁했다면 이제는 영화를 통해서 문화운동을 해 보겠다’고 말이다. 그 즈음에 문화담론이 굉장히 활성화 되면서 문화를 통해 사회 변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시류에 내가 묻어간 것 같기도 하다. 근데 가만히 나를 되돌아보면 뼛속깊이 자유주의자고 개인주의자였던 것 같다.

얘기가 점점 흥미로워진다.

학창시절 끊임없이 사회 운동을 하면서도 조직이 ‘나’라는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못 견뎠다. 난 너무나 감성적이고 감정적인 인간으로 조직이 원하는 정치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근데 그때는 조직이 개인을 억누른다는 생각을 차마 못했다. 그래서 나는 비조직적이고 쁘띠부르주아적이며 나약한 인간이라는 자기학대를 끊임없이 했다. 조직의 이익이 있고 목표가 있을 때 나의 이익과 관심은 뒤로 빠지는 전형적인 집단주의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개인을 찾기가 쉽지 않았겠다.

점점 힘들어졌다. 연애도 깨지고 부모님과도 갈등이 심화됐다. 나는 너무 힘든데 조직의 논리는 개인을 보듬어 주지 못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그게 회의가 들면서 내가 감성적인 인간이고 문학과 영화를 좋아하며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을 떠올리게 됐다. 결국 무엇을 택하든지 내가 좋아하는 거를 하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책 읽고, 영화 보고, 글을 쓰는 걸 하게 됐다.

영화에도 다양한 분야가 있는데 평론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딱히 평론을 하려고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냥 막연히 영화를 해 보고 싶었다. 사실 논문 마치면 쓰려고 구상해 놓은 시나리오도 있다. 만날 사람들한테 하는 말이 ‘나 논문 끝내고 미디액트 등록할거야’다.(웃음) 내가 상업영화를 만들 건 아니지만 그냥 개인 비디오로 장롱 영화라도 만들고 싶다. 결국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과 마찬가지로 카메라로 세상을 본다는 건 또 하나의 글쓰기인 것 같다.

독립영화? 가장 재미있는 놀이터

언제 본격적으로 평론을 하기 시작했나.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게 전주영화제를 하면서부터다. 처음에 영화 공부를 할 때는 현장 비평보다는 한국영화사를 새로 한 번 써보고 싶다는 그런 학문적인 관심이 많았다. 근데 전주영화제에서 단편영화 프로그래밍을 하면서 책을 한 권씩 쓰는데, 그 때 현장의 영화들, 그때그때 나오는 영화들에 대한 글쓰기에 재미를 느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한독협과 인연을 맺은 건가.

2005년도에 조영각 서독제 집행위원장이 연락을 해 왔다. 전주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쓴 글을 보고 제안해 온 것이다. 영각 씨가 다른 데서 글 쓰는 사람들과 독립영화를 연결하는 역할을 많이 했다. 영각 씨가 바쁜 사람인데도 보면 되게 바쁜데도 독립영화에 대한 글들은 꼬박꼬박 챙겨 읽는다.(웃음) 그때 2005년도 서독제 예심을 봐 달라 해서 인연을 맺게 됐다. 2006년에도 예심, 2007년에는 본심, 올해 다시 예심 심사를 했다. 그러다보니 서독제  집행위원도 하고 한독협 운영위원도 하게 됐다. 옛날에는 영화보고 글 쓰는 거에 만족했는데 한독협과 인연을 맺다 보니 독립영화가 내 울타리가 되었다. 나의 놀이터라고나 할까?

독립영화란 놀이터가 재미있나.

일단 상업영화보다 독립영화에 더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전에 주류 영화에 대해 글을 쓰긴 했었는데 그렇게 재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영화들은 재미있는데, 대학원에서 배운 서구이론들을 영화들에 재밌게 적용시키지 못했다. 미국영화나 스페인영화에 대해서 내가 써봤자 같은 문화적 공감을 갖는 그 나라 사람들만큼 못쓰지 않겠나. 그래서 허무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약간 ‘구라’ 치는 거 같고.(웃음)

독립영화에 대해 글을 쓸 때는 ‘구라’를 안 치나보다.(웃음)

내가 독립영화에 끌릴 수밖에 없었던 게 내가 관심을 가졌던 이슈들, 사회문제들이 독립영화에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물론 넓게 보면 다른 영화들도 마찬가지지만 보다 직접적으로 내가 옛날에 갈등하고 고민하면서 겪었던 문제들이 독립영화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더 재밌게 할 수 있다.

한국 독립영화 비평이 활성화됐다고 생각하나.

어느 정도 이뤄졌다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취약하고, 절실한 문제들이다. 사실 그렇다. 독립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게 돈이 안 된다. 주류 평론가 중에 독립영화에 관심이 있으니까 비평하겠다고, 심사하겠다고 연락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한두 번 단기적으로는 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하려면 힘든 부분이 있다. 월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직간접적으로 일을 해도 돈을 받는 일은 없다. 독립영화계에서 살려면 정말 좋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은 리뷰를 써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면 삶에 타격이 있다.(웃음) 어찌 보면 이게 독립영화계가 해결해야할 문제다.
 
독립영화 비평이 활성화 되지 않은 건 평론가의 수요가 부족하기 때문인가.

독립영화는 분명 영화이기 때문에 ‘영화’라는 일반적인 잣대로 봐야할 부분이 있고, 독립영화라는 특수성으로 봐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그걸 다 이해하면서 글을 써야만 정말 좋은 글이 나올 수 있다. 그러려면 독립영화를 많이 봐야 한다. 영화를 정말 사랑해서 많이 본 사람들의 글에는 깊이가 있고 향기가 있지 않나. 근데 독립영화를 그렇게 열심히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독립영화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글을 보내고 전화를 하는 사람은 많지만 독립영화를 그렇게 열심히 보겠다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해결책으로 고민한 것은 무엇인가.

독립영화 비평의 경우 장기적인 관점에서 내부적으로 비평가들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년에 한독협에 비평분과가 처음 생긴 거다. 정책 단위가 필요하고, 독립영화계 내부에서 비평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독립영화에서 가장 깨져야 할 화석이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생각한다. 정치
적인 올바름이 있다면 다소 못 만들어도 용인이 되고 상영이 되고, 진정성이 있다고 평가
가 되는 것이 이제는 깨져야 한다"


독립영화 비평의 새로운 장을 열겠다

그건 독립영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갖는 영화 저널이 없는 것과 비슷한 거 같다. 한독협이 비평 활성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다고 생각하나.

지금까지는 없었다.(웃음)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다. 그나마 전에는 독립영화 비평은 필요하니까 외부 비평가들한테 같이 일하자고 제안하는 식이었지 한독협 내부에서 비평가들을 육성하는 건 없었다. 근데 그런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변화의 움직임이 있다. 영각 씨는 한국영상자료원에 진행하는 독립영화 정기상영회 ‘해피투게더’를 진행하면서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같이 세미나를 하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을 서독제 자원활동가나 데일리 기자로 쓰면서 조금씩 글을 쓸 기회를 준다. 독립영화계 내부에서 독립영화 비평 자원을 키워가자는 논의가 나온 게 최근 2, 3년 사이다.

한독협 비평분과에는 몇 명의 평론가가 있나.

8명 정도 가입되어 있다. 내가 책임을 맡고 있는데 잘 안되고 있다.(웃음) 다 자기 일들이 있는 사람들이니까 자꾸 일에 치인다. 난 영화 같이 보고 세미나 하고, 비평을 하는 계획이었다. 근데 계획대로 잘 안됐다. 현재 한독협 내에서 비평분과에 요구하는 일들, 예를 들어 인디스페이스 리뷰, 10주년 기념 책자 등 외부에 돈 주고 하기 힘든 일들을 하고 있다. 내년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계획을 짜서 진행 할 거다.

독립영화 비평의 최전선에 있다. 이번 서독제 출품된 작품들의 경향에 대해 말해 달라.

단편은 지금까지와 그렇게 큰 차이는 없는 것 같다. 내가 중심적으로 심사한 건 단편보다는 장편인데, 장편의 경우 올해 굉장히 센 영화들이 많이 있다. 가장 큰 특징은 지금까지 의례적으로 상영되던 성격의 작품들이 많이 빠졌다. 지금까지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고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흔히 얘기되는 영화들은 기본적인 미학에 대한 고려가 별로 없이 상영돼 왔다. 난 그게 가장 불만이었다. 소재 차원에서 독립영화가 아닌 독립영화만의 미학을 담은 영화들을 선정하고자 했다. 그래서 극영화가 많고, 다큐멘터리 중에서 사회적 이슈를 다룬 영화들을 욕먹을 각오하고 뺐다.

심사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이 뭔가.

아무래도 6명이서 토론을 하다 보니 이렇게 저렇게 타협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난 반이 절대 찬성하고, 반이 절대 반대하는 논쟁적인 영화가 본선에 올라가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근데 반대가 너무 심해서 안 되는 영화들이 있고, 상대적으로 무난한 영화들이 올라가는 경우가 있다. 근데 ‘그 정도면 괜찮다’는 것은 다시 말해 안틀어도 무방하다는 말 아닌가.

심사 과정이 치열했겠다.

올해 비장한 마음으로 심사에 임했다. 지금까지 서독제가 한 해를 정리하는 독립영화 축제 같은 느낌으로 다양한 작품들을 포괄했다면 이번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편수를 과감하게 줄이고 고만고만한 영화들은 빼고 우리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영화들로 가자고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근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던 거 같다.

그 과정에서 끝까지 관철시키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독립영화에서 가장 깨져야 할 화석이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적인 올바름이 있다면 다소 못 만들어도 용인이 되고 상영이 되고, 진정성이 있다고 평가가 되는 것이 이제는 깨져야 한다. 그러다보니 다큐멘터리에 새로운 얼굴의 영화들이 등장 했다. <농민가>를 연출한 윤덕현 감독도 처음 들어보는 감독이고, <워낭 소리>의 이충렬 감독도 방송 쪽에 있던 사람이다. 그런 영화들이 자극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극영화도 논란이 예상되는 영화들이 많다. 사람에 따라서는 보기 힘들어할 영화도 있다. 물론 다 만족스럽진 않지만 상대적으로 올해 장편 경쟁 같은 경우 조금 선명하게 가려고 노력했다.

틀을 깨는 새로운 영화, 철학을 찾아서

새로운 영화들이 등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건가.

마츠모토 토시오가 쓴 <영상의 발견>이라는 책이 있다. 이 사람의 말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이 ‘어느 시대에나 뛰어난 작품은 있다. 그러나 그 뛰어난 작품을 발굴하는 눈이 없을 뿐이다’이다. 그게 맞는 말 같다. 분명히 새로운 시각을 가진 영화들이 있는데, 그게 어떤 관성에 의해, 지금까지 상영해온 영화의 미학적 틀이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누락될 수 있다. 현재 어디에서 새로운 영화가 등장하고 있는지 눈을 돌려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독립영화인으로서 현재 고민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주로 하는 일을 통해서 독립영화를 바라보고 걱정하고 기대할 수밖에 없는데 난 평론가이기 때문에 비평의 차원에서 고민이 있다. 주류영화도 마찬가지인데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하는 관행이 독립영화에도 있다. 솔직히 감독들과 많이 가까워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창작과 비평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있어야 할 것 같다. 근데 독립영화인이라고 통칭되면 그게 더 어렵다. 사실 사람들이 독립영화에 대해 글 쓰는 것을 되게 부담스러워 한다. 특히 안 좋게 본 영화는. 근데 이제 써야 할 것 같다.

한독협의 새로운 10년을 위한 제언을 해달라.

공부하자.(웃음) 한독협이 약간은 비대해졌다고 생각한다. 상대적으로 몸과 손발이 커진 것에 비해 머리는 커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외연이 확대되고 한국영화계에서 한독협이라는 단체의 입지도 과거와 다르게 매우 커졌는데 거기에 걸맞는 정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 한창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운동을 했었는데, 결국 유야무야 됐다. 만약 정책을 갖고 했다면 그게 끊어져서는 안 된다. 또 그 때 예술, 독립영화 의무 상영에 관한 ‘마이너쿼터’에 대한 얘기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 누구도 얘기하지 않는다. 이럴 때 한독협이 정책과 철학을 갖고 영화 문화를 이끌어가야 한다. 그런 면에서 지금은 사업보다는 정책 강화가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컬처뉴스 김나라 기자, 필름온 안효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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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5 18:29

상상 이상의 '센 영화'들을 기다린다 -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 -②]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한독협 10주년 인터뷰의 두 번째 주자는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이다. 그 역시 한독협의 역사와 자신의 인생이 구분가지 않는 10년을 살아왔다. 특히, 서울독립영화제와 인디포럼에 깊숙이 관여해 오면서 독립영화의 지형을 세세히 관찰한 그의 시선은 날카로우면서도 독립영화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묻어난다. ‘독립영화 무한도전’을 연상케 하는 한독협 초기의 좌충우돌 시기부터 어엿한 정책의 주체로 목소리를 내게 된 시기를 지나 독립영화전용관을 가지게 된 지금까지. 때로는 활동가로, 때로는 제작자로 종횡무진 독립영화계를 누벼온 그를 통해 한독협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봤다.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소감 한 마디 해달라.

좀 짠한 마음이 들었다. 10주년 기념식 때 풍물놀이도 하고, 처음 사무실 오픈 할 때 동영상도 봤다. 감회가 새로웠다. 옛날에 고생했던 생각도 들고. 이렇게 커졌구나... 아무도 이렇게 커질 거라고 생각 안했던 것 같은데. 의지도 있고 열심히 한 것 같다. 예전에는 독립영화를 인정하지 않았고, 운동권 영화라고 치부했는데 이제 정부에서 지원도 한다. 한독협이 이제 정책 파트너가 됐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뿐만 아니라 문화관광체육부(이하 문화부)도 그렇다.

한독협 창단멤버다. 어떻게 한독협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나. 

문화학교서울이라는 단체에 있었다. 외국에서 비디오를 공수해 자막을 넣어 상영하고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또 영화공부, 제작, 강좌를 했다. 외국영화만 틀다보니까 한국영화를 발견해야하지 않나 하는 목적의식이 생겨 1996년에 ‘인디포럼’이라는 영화제를 열었다. 그런데 그때 인디포럼을 같이하던 김동원 감독이 잡혀갔다. 당시 푸른영상을 중심으로 영화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그때 무슨 얘기를 나누었나.

제일 중요한 것이 표현의 자유였다. 당시 김동원 감독이 불법비디오유포죄로 들어갔다. 그때 독립영화인들을 아우르는 단체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원래는 곽용수 씨가 가야하는 자리였는데 대신 갔다가 한독협 준비팀이 되었다. 당시 오정우, 이한숙, 이주영 등이 모여 정강, 회비 등에 대한 논의를 했다. 그때 워낙 쟁쟁한 감독들과 제작단체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무국장이 된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사무국장이 되었다. 결국 문화학교서울은 그만두고 한독협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게 됐다. 

원래 시네마 키드였나.
 
중고등학교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다. 근데 그때는 영화학과 경쟁률이 높아서 영화과 가기가 힘들었다. 배우들만 가는 줄 알았으니까. 그냥 영화보기 좋아하고, 영화에 대한 글을 쓰기를 좋아했다. 그때 집이 용인이었는데 혼자 영화를 찾아 서울로 자주 왔다. 그러다 문화학교서울을 알게 되었다. 회원 가입하러 갔다가 운영위원회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해서 위원회로 활동하게 되었다.

문화학교서울을 할 당시에 ‘독립영화’라는 인식을 명확히 갖고 있었나.

그건 나중 일이다. 1993년에 문화학교서울에 들어가, 1994, 5년에 가장 열심히 활동했다. 갓 대학졸업한 사람들이 모여 비전에 대해 고민했다. 처음에는 외국영화만 틀고 외국의 예술영화만 보다 왜 한국영화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많은 이들이 할리우드키드라고 하지만 나는 충무로키드였다. 김기영 감독 영화를 찾아보는 등 한국영화를 많이 봤다. 자연스레 충무로에 비판적인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영화를 보면서 토론하고 대안적인 방향에 대해서 고민했다.

고민에 대한 답이 나오던가.

당시 선댄스영화제가 생긴지 5, 6년 지나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던 때였다. 스티븐 소더버그, 쿠엔틴 타란티노 등 새로운 감독이 주목받았다. 근데 한국에는 왜 그런 사람들이 없을까 고민을 하다가 우리도 독립영화의 역사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푸른영상, 노동자뉴스제작단(이하 노뉴단) 등이 그 예다. 그래서 1995년 독립영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류승완, 송영숙 감독 등의 작품을 상영하고, 작가와의 대화를 진행했다. 문화학교서울에 모인 사람들이 대부분 20대 중후반이었다. 추상적인 비전을 갖고 있었지만 영화평론, 제작 등 자기 관심 분야로 자기 일을 찾아 갔다.


한독협 초창기? 무한도전이 따로 없다.

새로운 단체가 생기면서 어려움도 많았겠다. 한독협 초기의 난제는 무엇이었나.

기본적으로 돈이 없었다. 문화학교서울에서 40만원 받았는데, 그때는 그게 작은 돈은 아니었다, 한독협은 그 절반이었다. 새 직장으로 옮겼는데 돈이 반으로 준 거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했다.(웃음) 한독협 인건비로 쓸 수 있는 돈이 한달에 50만원정도였는데 사무차장에게 “니가 25만원 받고 나는 20만원 받겠다”했다. 근데 사무차장이 “사무국장이 20만원 받는데 내가 어떻게 25만원 받냐”면서 자기 월급 5만원을 줄였다. 바보같이 한 사람 월급을 올렸으면 됐을 텐데.(웃음) 다른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했다. 근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었다. 워낙 없어서 여기저기 손 벌리기도 편했다.(웃음)

손을 벌리는 건 벌리는 건데,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돈이 필요하지 않았나.

그때는 지금처럼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도 없었고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지원받는 시스템이 없었다. 아는 사람을 통해 기획안 들고 찾아가서 만나보고 사업을 확장하는데 노력했다. 근데 그게 될지 안 될지 모르니까 계획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그럼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거 아닌가. 완전 무한도전이다.

나는 한독협을 만드는 입장에서 어떤 모습을 그리고 있었지만 회원들은 그런 상이 없었다. 회원들이 가입은 했지만 협회가 뭔지 잘 몰랐던 거다. 협회가 무엇을 위해 있고, 왜 회비를 내야 하는지 설득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초기에는 한독협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독립영화인들을 직접 만나 하나하나 직접 설명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런데도 회원이니까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단체의 목적과 방향을 인식시키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협회 설립 초기 1, 2년 동안 그게 가장 어려웠다.

그렇다면 한독협이 처음 그리고 있던 상이 무엇인가.

그게 한마디로 얘기하기 어렵다.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위해 있다”고 해도 자기가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고, “제작 지원 정책을 만들고자 한다”고 해도 그건 남의 일이었다. 이런 건 사람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 근데 독립영화 감독들이 자기 영화 만들기에도 바쁘고. 먹고 살기도 바쁜데 자신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쉽지 않았다. 쉽게 말해 자기 일이 아니었던 거다. 그때 내가 주로 했던 말이 “혼자서 잘되는 것은 없다. 너 영화 잘 만들어봐라. 몇 년 가나.”(웃음)라고 했다.

어허, 그건 일종의 저주 같은데.(웃음)

아니다. 서울단편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 받는 사람들에게 “상 받았다고 혼자 잘 되는 거 절대 없다. 잘 나갈 때 회원가입하고 회비도 내고 해야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아무리 영화 만들면 뭐 하냐 틀면 잡혀가는데”라고 얘기했다. 절대 “도와주세요”라고 하지 않았다. 이게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이었으니까. 근데 논리적으로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위해 일하고, 제작 지원 정책이나 이런 독립영화발전을 위해서 일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게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자기들에게 실질적인 이익이 없으니까. 이걸 설득하는 게 한독협 사무국의 일이다. 지금 한독협은 어떻게 하면 감독들이 가려운 부분을 긁어줄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

 "2001년까지 한독협 사무국장과 서독제 사무국장을 같이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유령단체? 한국영화계의 비타민!

한독협 활동이 본 궤도에 올라간 시기는 언제인가.

2000년 이후인 것 같다. 의외로 빨리 자리를 잡았다. 영진위가 1999년에 생기고 더 투명해졌다. 예전에는 알음알음 대종상에 몇 억 주고, 그들 세미나에 2천만원씩 지원해주고 했는데 위원회로 바뀌면서 단체지원사업이 생기고, 독립영화제작지원제도(1998)도 생겼다. 처음에는 ‘소형단편영화제작지원’이었다. 처음엔 정액으로 300만원씩 줬는데 우리가 “100만원짜리 영화도 있고 1000만원짜리 영화도 있는데 똑같이 주면 어떡하나 차등지원해라”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명칭도 독립영화제작지원으로 바꾸고 다큐멘터리도 지원해 달라”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파트너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영화인회의가 1999년도에 생기고. 문화연대도 생겼다.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영진위가 구성되면서 우리끼리 성명서만 내는 게 아니라 정책적으로 이야기하게 된 거다. 정책적인 관점에서 파트너로 인정받았다. 당시 사단법인으로 바뀌는 것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1999년). 협회가 생기면서 독립영화인들이 김동원, 변영주 등 개별 창작자들이 아니라, 영화, 진보적인 문화 안에서 시민권을 획득한 것 같다. 영화제, 책 출간, 토론회 외에도 스크린쿼터 운동에 대해 제일 앞장서게 됐다. 독립영화계가 영화판에 활력을 불어넣게 된 거다. 물론 힘 있고 협상하고 했던 사람은 충무로에 있던 사람들이지만 동을 트는 역할은 우리 독립영화계가 했다. 표현의 자유 영역에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유효적절한 시기에 한독협이 생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고 해서 한독협의 발자취가 순조롭지만은 않은 것 같은데.

유령단체로 취급받고 명예훼손 소송에 걸릴 뻔한 사건이 있었다. 영진위 위원을 구성할 때 한독협에서 ‘영진위 위원이 되면 안 되는 인물 5인’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이건 한국 영화 문화 전반에 대한 차원에서였다. 그런데 김지미 영화인협회 이사장이 “문성근, 명계남이 한독협이라는 유령단체를 시켜서 괴문서를 뿌렸다”고 해 신문에 나오고 그랬다. 우린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으니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립영화인들이 위원회에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보다는, 위원회 구성이 잘 되고 투명하게 운영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그런 사건으로 사람들이 한독협의 존재에 대해 알기도 했다.

한독협이 많은 사건을 겪었다.(웃음) 이제 한독협과 서울독립영화제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내가 한독협 사무국장으로 있을 때 영진위가 꾸려지면서 ‘영화제를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냐’는 제안이 있었다. 그때 이효인 선생님이 집행위원장을 하고, 내가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 사무국장으로 갔는데 둘 밖에 없었다.(웃음) 보도자료는 영진위에서 돌리고, 후원도 영진위에서 따고 했다. 그러다가 2001년부터는 한독협이 서독제를 위탁받아서 진행했다. 2001년까지 한독협 사무국장과 서독제 사무국장을 같이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상반기 인디포럼, 한독협 사무국장하면서 하반기 영화제 사무국장을 했다. 미친 듯이 일만 한 거지. 너무 지쳐서 2001년쯤 한독협을 정리했다. 인디포럼도 그만두고. 한독협 사무국장만 4년, 인디포럼 진행을 6년 했다.

몸이 닳고 닳아 다른 일을 생각했을 법도 한데.

쉬면서 개인적인 일도 찾아보고 돈도 좀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체력과 정신력이 고갈된 상태였다. 근데 갑자기 이효인 집행위원장이 그만두고 내가 서독제 집행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결국 한독협 그만두자마자 영화제로 잡혀 와서 다시 일하게 됐다. 영화제 중심으로 일이 집중됐다. 2002년 서독제로 이름 바꾸면서 체제정비하고 스탭도 뽑고 하면서 지금은 영화제 중심으로 일하고 있다. 

한국 독립영화계의 가장 큰 영화제의 집행위원장, 멋지지 않은가.

영화제가 일년 내내 인건비를 주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이효인 선생님이 계실 때는 3달 인건비 받고 6개월 일했다. 나도 4, 5달 밖에 인건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보릿고개를 많이 넘었다.(웃음) 1월부터 4월, 5월까지는 정말 추웠다. 후원받으러 다니고, 영진위에 ‘이게 말이 되나. 좀 올려야 하는 거 아니냐’ 얘기하기도 했다. 뭐, 별로 오르진 않았다.(웃음) 그러면서 사업들을 구상했다. 순회상영, DVD 제작, 온라인 상영 등 다양한 사업을 구상했다.  그러면서 스탭들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게 했다. 근데 웃긴 게 영화제 끝나고 나면 나만 남았다. 사무국장도 새로 구해야 했다. 누구한테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으니까. 다행히 지금은 상근 시스템을 어느 정도 마련했다.

그놈의 지긋지긋한 보릿고개는 어떻게 넘겼나.(웃음)

글을 많이 썼다. EBS시네마천국 작가를 했는데, 한 달에 한 번 써도 작가 인건비가 한독협 사무국장 인건비보다 많았다.  대학 학보부터 교지까지 청탁 오는 건 다 썼다. 매일 통장 들고 다니면서 입금됐는지 확인 하는 게 취미였다.(웃음) 


독립영화, 두 마리 토끼를 잡아라!

서독제 집행위원장 하면서 한국의 독립영화는 지겹게 봤겠다.(웃음) 그러면서 한국 독립영화의 흐름과 경향을 봤을 거 같다. 

인디포럼을 할 때만 해도 침잠하는 영화들이 많았다. 당시 대부분이 사회, 문화운동, 학생운동 하던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우울하고 암울한 루저들의 이야기가 많았다. 재밌는 영화는 찾아보기 어려웠으니까. 이때는 사회적인 인식과 그것을 높은 영화적인 완성도를 성취한 영화가 좋은 영화였다. 이런 경향이 1990년대 후반까지 갔다.

뉴 밀레니엄이 오면서 독립영화의 경향도 바뀌었나.

2000년대가 오면서 디지털로 찍은 재기발랄한 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세대가 다른 젊은 친구들이 어설프게 SF를 한다거나 류승완 감독처럼 액션을 찍는다거나 하는 경향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 주류도 아니었고, 좋은 평가를 받기도 어려운 시기였다. 하지만 ‘독립영화는 이래야지’하는 고정관념이 깨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한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인가.

음, 그러한 경향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반면에 지금은 너무 장르영화나 드라마에 치우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근래 영화들은 사회이면을 다루거나 인물을 다룰 때 드라마는 강해졌지만 인물의 개성이나, 영화적인 표현들이 많이 약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 장편영화들이 많이 등장했다.

2004년 이후로 장편영화가 많이 나오고, 개봉도 할 수 있었다. 단편중심에서 장편으로 옮겨갔다. 인디스페이스에서 개봉을 할 수 있는 것도 큰 역할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봉 할 수 있는 영화들은 제한적이었다. 이제는 4, 5억들인 저예산 영화보다 독립영화가 완성도 면에서 뒤지지 않는다.

최근 장편 독립영화들의 경향은 어떤가.

기복이 있다. 예전에는 사회적 문제의식은 있었는데 영화적인 퀄리티가 떨어졌고, 요즘에는 영화적인 퀄리티는 높지만 사회 이면을 바라보는 안목들이 옅어져 아쉬운 영화들이 많다. 이주노동자, 장애인 등 신문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들, 잔혹한 현실의 이야기를 다루기만 하는 건 의미가 없다. 영화적 성찰이나 사회를 바라보는 깊이 있는 시선이 필요한데 10년이 지나면서 바뀐 것 같다. 영화 편수도 많아졌고, 어떻게 보면 영화가 쉬운 매체가 됐다. 예전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다. 지금 시대에 다룰 수 있는 얘기들이 어떻게 영화적 깊이와 사회적 안목과 결합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세다, 그래서 흥미롭다.

이번 서독제에는 사회적인 안목과 영화적인 완성도가 결합된 작품들이 보이나.

매년 눈에 띄는 작품들이 보이지만 성이 안 찬다. 이런 얘기하면 감독들이 섭섭해 하겠지만, 나는 제작자고 좋은 영화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분명 그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작품들이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욕심을 부리고 싶다.

2008년 서독제 슬로건 '상상의 휘모리'는 최근 독립영화들이 너무 자기 일상의 이야기,
주변의 이야기를 그리는 것에 함몰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거기서 벗어나
'센 영화'
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지은 것이다.


2008년 서독제 <상상의 휘모리>에 대해서 말해 달라.

결국 문제는 상상력이 아닌가. 사회를 비판하든 연애 이야기를 하든, 창작자가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문제다. 휘모리는 좀 더 세게 해야 한다는 의미다. 최근 좀 센 영화들이 없는 것 같다. 사회의 치부를 까발린다거나, 배우 몸이라도 벗긴다거나 하는(웃음). 너무 자기 일상의 이야기, 주변의 이야기를 그리는 것에 함몰된 것이 아닌가 싶다. 거기서 벗어나 ‘센 영화’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에 지은 것이다. 실제로 올해 예심을 하면서 기대보다 그런 영화가 많았다. 세고, 끝까지 가는 영화들.

센 영화? 이번 서독제가 기대가 된다.(웃음)

우리가 슬로건을 이렇게 지어서 그런가, 우연히 맞아 떨어졌다.(웃음) 장편부문에서 ‘아니 이런 영화가 있었단 말야’하는 영화들이 있다. 문제는 관객들이 이걸 어떻게 볼까 하는 것이다. 걱정 반 기대 반이다. 특히 장편영화들이 볼만한 영화들이 많다. 기대가 된다.

주목할만한 작품은?

그건 내가 얘기하면 안 된다.(웃음) 보도자료 보고, 영화 보고 기사 써 달라.

전체적 영화제 출품작들의 경향?

장편부문에서는 어떤 상황의 끝을 보여주는 것들이 많다. <고갈>, <사랑을 찾습니다>, <낙타는 말했다> 등은 어떤 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을 그냥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끝까지 쭉 가는 영화다. 상상 이상의 힘이 있다. 파워풀한 영화들을 좋아하는 편인데 그런 영화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다큐멘터리 같은 경우는 편수가 조금 줄었는데, 올해 볼 수 있는 최고의 작품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단편영화는 어떤가.

단편영화 같은 경우도 새로운 경향들이 발견되고 있다. 일상을 다루는 것에서 벗어나서 인물들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끌어내는 영화들이 많다. 이전 영화들이랑 조금 다른, 드라마 구성에만 머물러 있지 않은 그런 영화들이 많다. 우리 영화제에서 다 수용은 못했지만 최근 영화들을 보면 한국 문제만을 다루지 않고, 외국에서 찍은 영화도 있고, 외국 사람이 실제로 등장하는 영화들이 있다. 이전의 영화들처럼 이주노동자들이 주인공으로 나와서 그들의 문제를 보여주는 선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글로벌한 문제들이 독립영화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흥미로운 건 이런 현상이 다큐멘터리, 극영화, 단편 등에 고르게 나타나고 있다는 거다.

주요 섹션이 궁금하다.

항상 그랬듯 본선 경쟁이 있는데 작년과 편수가 똑같이 51편이다. 단편 40, 장편 11편. 올해는 촛불 영상을 별도로 공모했다. 익히 예상할 수 있는 것들부터 예상하지 못한 문제들 까지 촛불집회 현장에서 볼 수 있었던 다양한 논쟁들을 다룬 영화들이 출품됐다. 6ㆍ10항쟁 이후 20년이 됐는데, 6ㆍ10항쟁과 2008 촛불정국을 연결시키는 영화들이 많았다. 실험적인 작품, 학생 작품들도 있고, 칼라TV 같은 미디어 운동 단체도 있다. 최근 미디어 활동, 독립영화진영이 촛불과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에 대한 포럼도 기획하고 있다.

매년 해외 섹션이 흥미롭다. 올해의 해외 섹션은?
 
올해는 ‘상상의 휘모리’인만큼, 평범하게 않게 ‘성인영화 특별전’을 준비했다. 이른바 ‘섹스와 영화’.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센 영화들을 골랐다. 프로그래머들이 추천하고 감독들이 직접 소개할 거다. 이들이 영화소개하고 토크도 진행한다. 과연 ‘한국에 포르노그라피가 가능한지’, ‘섹스와 영화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한 포럼이 있을 예정이다. 성적인 부분을 건드리는데 있어서 관음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제를 통해서 인간 관계의 문제, 권력의 문제 등을 도발할 수 있는 좋은 주제라고 생각한다. 최근 그런 영화들이 너무 없어서 이런 영화들이 왜 중요한지 짚어보는 포럼도 필요할 것 같다.


하던 일이나 잘해! 이 친구야!

오호, 관객의 한 명으로 완전 기대된다.(웃음) 정신 차리고, 중요한 질문하겠다. 현재 독립영화인으로서 고민하는 지점은 무엇일까.

‘언제 그만둘까?’(웃음) ‘어떻게 더 재밌게 살까’가 고민이다. 집행위원장만 7년째하고 있는데, 개인적인 고민이 크다. 흐흐, 농담이다. 독립영화계에 영화들이 많이 나오고는 있는데 시장에 파란을 일으킬 수 있는 작품은 많지 않다. 관객 1, 2만 명이 아니라 2, 30만 명 들어서 ‘이런 영화들도 되는구나’하는 것을 관객들, 영화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영화제 하나가 잘 되고, 영화 한 편이 잘 되서 판이 좋아질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런 영화들이 많아져서 지원받지 않아도 다음 영화들이 제작될 수 있는 그런 환경이 되면 좋겠다. 그런 영화들이 나올만한데 왜 안나오나. 이런 고민들이 있다.

한독협 10년에 관한 제언 한 마디 해 달라.

어려운 얘기다. 현재 같이 일하고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측면도 있고. 그동안 사업이 많았다. 인디스페이스도 있고, 내부 사업도 있고. 그런 사업들이 아직 안착되지 못한 면이 있는 것 같다. 한독협 조직도 그렇고. 월급 줄 때마다 돈 없는 문제도 있고. 십년 됐으면 이제 이런 문제들은 극복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기존 사업은 어떻게 안정화 시킬지, 한 편의 영화가 나왔을 때 어떻게 대우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정책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음, 하던 일이나 잘해라(웃음)


 

*2008-11-04 오후 3:28:57    컬처뉴스 김나라 기자, 필름온 안효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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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9 15:35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 - ①]'한국독립영화의 아버지' 김동원 감독

10월 23일 푸른영상 사무실에서 김동원 감독을 만났다.
▲ 10월 23일 푸른영상 사무실에서 김동원 감독을 만났다.

한국독립영화협회(한독협)가 10주년을 맞았다. 한때 생소하기만 했던 ‘독립영화’라는 존재의 정체성 확립과 자리매김의 역사는 한독협의 10년 역사와 나란히 놓여져 있다. 영화인들이 자본과 검열로부터 ‘독립’해 진정한 의미의 ‘표현의 자유’를 누리기까지 한독협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줬다. 컬처뉴스는 한독협 탄생 10년을 맞아 독립영화계의 10년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시대 한독협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해 보고자 감독, 배우, 활동가, 제작자 등 독립영화인들 10명의 인터뷰를 기획했다. 이번 기획은 한독협 사무국과 팀블로그 필름온이 함께해 이루어졌다.

첫번째 인터뷰 대상자는 '한국독립영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송환>의 김동원 감독이다. 여러모로 한국 독립영화계의 상징적인 인물인 김동원 감독은 한독협의 초기 모습과 현재의 지점을 역사적인 맥락에 위치시켜 새롭게 보게해 준다. 그가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에 입문하고 활동하게 된 계기들 역시 놓치기 아까운 역사의 기록이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 바란다. / 편집자.

독립영화, 무에서 유를 만들다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소감 한 마디 해 달라.

김동원 감독: ‘벌써 10년인가’하는 생각이 든다. 내 나이 또래는 세월이 빨리 가니까.(웃음) 한편으론 독립영화 활동한지 오래됐는데 10년밖에 안됐나 싶기도 하고. 내가 초대 이사장을 하면서 한독협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현재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조영각 사무국장하고 어린 사무원은 그 때 월급 20만원씩 받고 시작했다.

독립영화계에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예상했던 것인가. 

이런 날이 올지 몰랐다. 지금은 미디어 센터, 독립영화전용관, 독립영화 제작지원제도 등이 생겼다. 이런 건 외국사례로 말로만 듣던 것들인데, 일반 영화계에서 질투할 만하다.(웃음) 막 없던 게 생기고 점점 늘어나니까, 있던 게 없어진 사람들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독립영화계만 편애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근데 지원금 총액으로 보면 굉장히 작다. 

그만큼 독립영화계가 가시적인 변화를 일으켰다는 반증이 아닌가 한다.  

무엇보다 10년 전만해도 독립영화라는 말을 할 때 약간 켕기는 게 있었다. 그때 독립영화하면 반정부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당시 영화진흥공사(현 영진위)에 독립영화라는 말이나, 독립영화 지원은 없었다. 또 영진위 1기 위원회 생기고도 몇 년간은 없었고, 그 이후에 생겼다. 독립영화라는 단어를 공식화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 강한섭 위원장이 다시 뺀다고 한다. ‘작은 영화’ 이런 식으로 바꾼다고.

작은 영화라... 김동원 감독이 다큐멘터리를 시작한 게 20년이 지났는데, 독립영화란 말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난 원래 상업영화 지망생이었고, 독립영화란 말도 없었다. 1980년대 얄라성이나 장산곶매 등에서 영화를 만들고, 미국식 개념의 이름을 붙여준 거다. 사실 미국식 개념과는 많이 다른데,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사실 나는 독립영화를 하려고 한 건 아니다. 상업영화 조감독을 했는데 이게 나랑 안 맞더라. 당시 전두환 정권 때 이런저런 일이 많았는데 방송에서는 누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때 내가 결혼식 비디오를 찍은 아르바이트를 했을 땐데, 사회의 모습을 찍어서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날라리, 가장 감동적인 올림픽을 만나다

원래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나. 김동원 감독의 젊은 시절이 궁금하다.

날라리였다. 데모도 안했고.(웃음) 1970년대에 학교를 다녔는데 당시엔 운동권이란 개념도 없었다. 언더그라운드에는 좀 있었는데 그때는 몰랐다. 난 연극 많이 하고, 놀기 좋아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 때 무의식적으로 뭔가 답답함을 느꼈다. 고등학교 때는 ‘왜 우리학교는 데모 안하지? 데모하면 휴교하는데’하면서 데모가 나길 원하기도 했다. 출처가 불분명한 유인물 만들어서 뿌리기도 했다. 휴교 때문에. 그런 걸 보면 약간 반골 기질이 있었나 보다. 그런 게 정리가 안 되다가 상계동 가서 정리가 됐다. 사회과학 책도 한두 권 읽어봤지만 전혀 안 와 닿았는데, 상계동 가서 구조적 모순이라는 걸 느끼게 됐다.

상계동에 어떻게 들어간 건가.

상계동 철거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내가 아는 신부님이 거기 들어가 계셨는데 강제철거 당하는 장면을 증거자료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하셨다. 하루만 와서 촬영해달라고 부탁을 하셨다. 그게 내 팔자를 바꿀 줄을 몰랐다.

처음 <상계동 올림픽>을 촬영할 때 ‘다큐멘터리는 이런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었나.

처음에는 관심도 없었고, 또 당시 우리나라에는 필름으로 만든 다큐멘터리도 거의 없었다. 대학 영화과에서도 단편영화제를 했지만 다큐멘터리는 없었다. 서울영화집단에서 8미리 필름으로 십 분짜리 다큐멘터리를 1985, 6년인가에 만든 게 전부였다. 그저 머릿속에는 TV에서 본, ‘추적 60분’유의 다큐멘터리만 있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그런 관성들을 떨쳐버리기 힘들었다. 그런데 외국 나가서 여러 다큐멘터리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보니까 ‘아 다큐멘터리가 할 만한 거구나’ 싶었다. 상계동 시절에는 전혀 몰랐는데, 가서 보니까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작품들이 있었다. 그 때 ‘다큐멘터리의 영역이 이렇게 넓구나’ 했다.

그 이후에 다큐멘터리의 매력을 느낀 건가? 어떤 매력을 느껴서 다큐멘터리를 계속하게 된 건가.

조연출을 한 4년 정도 했는데, 현장이 지겨웠다. 촬영할 때도 긴장감을 못 느꼈다. 그런데 상계동에서 철거 현장을 찍을 때, 특히 위험한 상황에서 철거 깡패들이 위협해도 전혀 무섭지가 않은 거다. 카메라가 알아서 막 돌아다니는 신들린 경험을 했는데, 그게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다. 촬영하는 게 이런 거구나. 또 철거, 투쟁 현장 모습들이 외부에 알려지기 힘든 상황에 <상계동 올림픽>을 발표했는데, 엉성하게 만들었지만 대학가에서 상영되고 그러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 때 다큐멘터리의 굉장한 힘을 느꼈다.

그래도 뭔가 손에 잡히지 않을 시절,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았을 거 같다.

<상계동 올림픽> 하면서 사회가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촬영할게 많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외국영화 직배 관련해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는데 정지영 감독이 나에게 ‘다큐멘터리를 해라. 극영화 하는 사람은 많지 않냐. 넌 잘할 것 같고, 너라도 해야 한다’라고 하더라.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닌 것 같고, 싫지도 않고, 또 극영화가 잘 안 풀리고 해서 다큐멘터리의 길을 걷게 됐다. 그렇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 길을 걷게 됐다.

총 제작기간만 12년이 걸린 <송환>은 비전향 장기수를 다룬 다큐멘터리로, 2004년 선댄스영화제 '표현의 자유상'을 시상하기도 했다.

투사? 난 그런 사람 아니다

1990년대에 <송환> 촬영하랴, <명성 그 6일의 기억> 발표하랴 정신없었을 거 같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부터 장기수들이 출소하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경험한 사람이니까 저분들의 증언은 기록할 필요가 있다 생각해 촬영을 시작했다. 사실 그걸 어떻게 쓸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에 장기수들의 삶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어머니들이 함께 벌인 석방운동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몇 편 나왔다. 그 때까지만 해도 <송환>에 대한 생각도 없었고, 그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다. 사실 내가 오며가며 찍은 거지 찍어야겠다 해서 찍은 게 별로 없었다.(웃음)

 그럼 <송환>은 어떻게 나오게 된 건가.

1999년 초부터 송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그들의 송환을 돕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사회적으로 이슈화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남북정상회담하면서 송환이 급물살을 타면서 엄청 급해졌다. 그 다음 6월부터 9월까지는 정신없이 찍었다. 그 전에는 판판히 놀다가.(웃음)
 
1990년대 들어오면서 한국 다큐멘터리의 파이가 커졌다. 주로 어떤 사람들이 촬영했고 어떤 관심을 가졌나.

지금도 우리나라 다큐멘터리는 액티비즘, 즉 투쟁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1980년대에는 당연히 그래야한다고 생각했고. 서울영상집단, 노동자뉴스제작단(이하 노뉴단) 등의 집단은 일종의 운동으로 한 거다. 노뉴단은 노동운동, 서울영상집단이나 민족문제연구소, 민족영화연구소 등은 그 외 사회문제를 다뤘다. 한국의 다큐멘터리는 태생단계의 특수성 때문에 액티비즘이 강하다.

김동원 감독은 어느 편에 속했나.

난 아무데도 속해있지 않았다. 굳이 얘기하면 빈민운동 쪽인데, 빈민지역 청년들과 활동을 하면서도 작업은 혼자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내가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정체성은 없었다. 영화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는 현장의 기록이고, 일상이었다. 빈민운동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했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느 순간에 찾았나.

나는 아직도 감독이라는 말을 안 좋아한다. 난 다큐멘터리에서 감독이 너무 앞서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무리 감독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해도 감독이라고 부르고, 또 ‘그럼 뭐라고 부르냐’고 하니까 이젠 그냥 ‘맘대로 부르라’고 한다.(웃음) 감독이라는 말이 옛날보다는 많이 거슬리지는 않는다. 옛날에는 엄정한 사실성, 객관성 이런 것들이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래야 하는 줄로 알았는데 요즘에는 다큐멘터리도 연출을 해도 괜찮다는 게 일반적이니까. 내가 아무리 연출을 안 하려고 해도 할 수밖에 없다.

작업을 하면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경우도 많이 있었겠다.

글쎄, 잡혀갔던 거?(웃음) 푸른영상 하면서 몇 번 잡혀갔다. 1993부터 2년 터울로. 그 때만해도 영화법이 손질되기 전이고, 장기수들을 찍는다는 게 시찰 대상이었다. 안기부 직원한테 매일 안부전화를 받았으니. 그쪽에서 조작간첩 사건들과 엮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잘 안됐다. 1996년에는 심의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음란비디오 단속법을 걸고 넘어졌다. 참, 음란비디오라니. 그 외에도 청소년 보호법, 국가 보안법 등 다양하게 조사받았다. 다행이 변호사를 잘 만나서 기각시켰다. 

투쟁의 역사다.(웃음)

투쟁은 무슨.(웃음) 난 투쟁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냥 내가 그걸로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잘못한 것도 없으니 당당한 거다. 심의를 받으려면 10분에 얼마 돈을 내야 하는데 내가 골이 비었나.(웃음) 여하튼 몇 번 들어갔다 나오면서 이미지가 그렇게 됐는데, 내가 용감해서 싸운 건 아니다. 그냥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 때문에 그런 거 같다.

김동원 감독은 2004년 선댄스영화제 표현의 자유상(<송환>) 등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한국 다큐멘터리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이면의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면서 주변의 따가운 시선도 받을 거 같다.

글쎄. ‘왜 이렇게 구질구질한 얘기만 하냐’는 사람은 있지만 따갑지는 않다. 당연히 알려야 할 이야기고. 지금은 방송에서 그런 얘기를 많이 하지만, 그때만 해도 전혀 안했는데 당연히 나라도 해야지 그랬다.


한독협. 힘든 시작, 지금은 괜찮아 무엇이든!

한독협이 세워지기 전, 독립영화인들은 어디를 구심점으로 모였나.

1991년에 독립영화협의회라는 단체가 세워졌다. 내가 의장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거기는 구속이 너무 많았다. 그 때만 해도 운동한다는 기분으로 작업을 했고, 모여 봤자 운동하는 독립영화인들만 모이는 거 같고. 1990년대 중반 넘어가고, 독립영화계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다양한 독립영화인들과 함께 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립영화가 뭐냐’ 하는 정체성 논란도 있었고, 일련의 산통 끝에 한독협이 생겼다.

한독협이 생기고 어려움은 없었나.

내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웃음) 앞서 얘기한대로 한독협의 정체성 찾기가 가장 힘들었다. 한독협 초기에 독립영화협의회나 민예총 영화분과 등과 관계 설정하는 게 어려웠다. 1996년부터 한독협 설립 논의를 시작했으니까.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이 협회를 만든다는 거에 의구심 어린 시선도 있었고. 하여튼 초기에 발동 거는 게 좀 어려웠는데 발동 걸고 나서는 최근까지는 잘 굴러왔다고 생각한다.

영진위 3기 위원이었다. 어떻게 하게 됐나.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가면 회의만 많고, 그렇다고 독립영화에 관한 회의만 하는 것도 아니고. 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는데 가서 목소리를 내야 하니까, 가야 된다고 하니까 갔다. 별 재미는 없었다.(웃음)

어떤 목소리를 내고 싶었나.

목표가 너무 분명했다. 독립영화전용관 만드는 거. 10년 동안 만들자는 말만 있었지, 만들지 못했다. 더 이상 늦출 수 없었다. 난 다른 건 못해도 전용관 하나 만큼은 만들겠다는 각오로 들어갔다. 다른 영진위 위원들이 너무 적나라하게 의도를 내비치는 거 아니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런 독립영화인들의 노력 끝에 인디스페이스가 생겼다. 근데 인디스페이스가 위치한 중앙시네마 재건축 때문에 몇 년 안에 장소를 옮겨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럼 다른 곳을 찾아봐야겠지. 3기 영진위 때 미디어센터, 시네마테크, 독립영화전용관을 다 포괄하는 500억 규모의 복합상영관을 짓기로 서울시와 결정했다. 그런데 강한섭 위원장이 무슨 아시아센터를 건립한다고 한다. 지금 어떻게 진행 중인지 모르겠다.

규모를 500억에서 1,000억으로 늘린다고 들었다. 그런데 규모가 커지고, 새로운 사업계획을 만들면 그 만큼 그 과정이 늦춰지는 거 아닌가. 현재 미디어센터 미디액트나 서울아트시네마, 독립영화전용관 모두 공간 확보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아무래도 그런 측면이 있다. 음, 어떻게 보면 위기를 겪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어려움을 겪어보면 전화위복의 기회를 맞을 수 있다. 이건 좋은 극장이 생긴다는 측면이 아니라 독립영화인들에게 뭔가 좋은 공부가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하는 말이다.


다른 얼굴, 하지만 우린 가족이다

한독협 홈페이지를 보면 초기에는 게시판에 서로 안부도 묻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영화도 보고, 얘기도 하고, 술도 먹으면서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한독협 10주년을 맞이한 2008년. 지금 가장 큰 고민이 무엇인가.

글쎄. 내가 고민한다고 되나?(웃음) 이제 독립영화가 나름대로 사회적인 위상을 이제 갖게 됐다. 그런데 대안영화로서의 자기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영화가 잘 안 나오고 있다. ‘지금쯤 나올 때가 됐는데’하는 기대가 있는데 잘 그게 쉽지 않다. 예를 들어서 <은하해방전선>등 몇몇 작품은 기대를 많이 했고, 영화도 좋았음에도 불구라고 잘 안됐다. 영화는 관객과 함께 완성된다. 과연 이걸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보게 할 수 있을까. 영화가 안 좋은 게 아닌데, 왜 안볼까. 이런 고민들을 한다. 답 없는 고민.

최근에 등장하는 후배들의 작품들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나.

다큐멘터리만 보자면,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본 <워낭소리>란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좋았다. 나와 스타일은 다르지만 반가운 작품이다. <우린 액션배우다> <우리학교> 등 1년에 한 편씩은 문제작들이 나온다. 한편으론 기쁘고, 한편으로는 ‘아 이런 게 일 년에 열편은 나와야 하는데’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인 코드가 약해지고 있지만 그게 그렇게 아쉽지는 않다. 오히려 열심히 만들고, 진정성이 보이는 다큐멘터리가 1년에 3-4편만 나오면 좋겠다. 인디다큐페스티벌에 70여 편의 작품이 응모됐다고 한다. 아르헨티나만 해도 다큐멘터리 영화제 하면 700여 편이 응모된다고 하는데, 우린 고작 70여 편이다.

요즘 진행하고 있는 작업이 있나.

촛불 문화제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하고 있다. 올해는 촛불이 가장 활활 타지 않았나. 찍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간 건 아닌데, 나가다 보니 찍을 게 보이더라. 뭐 큰 건 아니지만 해야 할 거 같은 마음이 들어서 촛불 문화제에 대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독협의 또 다른 10년을 위한 제언을 해 달라.

제언이라. 아쉬운 건 한독협 홈페이지를 보면 초기에는 게시판에 서로 안부도 묻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물론 욕도 하고.(웃음) 뭔가 공동체적인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커져서 그런지 그렇지 못하다. 사실 이건 사업을 하는 게 아니다. 사업도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하는데.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끼리 식구라는 생각을 하면 좋겠다. 도움도 주고받고, 영화도 봐주고. 이런 커뮤니티가 활성화 되어야 하는데 그런 계기를 못 만들어 주는 거 같다. 여러 영화제가 그런 역할을 했는데 요즘엔 형식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영화도 보고, 얘기도 하고, 술도 먹으면서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 2008-10-28 오전 11:35:02  컬처뉴스 김나라 기자, 필름온 안효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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