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09.03.09 워낭소리, 초월적 우정의 기막힌 전도
  2. 2009.02.20 재일 조선인 위안부의 지지 않은 싸움
  3. 2009.02.09 <워낭소리> 마음의 고향, 그것뿐이다. (7)
  4. 2008.12.15 불법체류자는 있는데 왜 불법사장은 없는가? (1)
  5. 2008.11.25 노년은 아름다워라 - 황혼의 의미와 아름다운 음악의 조화, <로큰롤 인생>
  6. 2008.11.14 안티가족 다큐, <쇼킹 패밀리>
  7. 2008.10.29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 - ①]'한국독립영화의 아버지' 김동원 감독 (1)
  8. 2008.10.08 내 밥그릇과 네 밥그릇은 다르지 않다 -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농민가> 윤덕현 감독 인터뷰
2009.03.09 09:27

워낭소리, 초월적 우정의 기막힌 전도

소와 노인의 우정이 은폐하는 풍경들
                                                                                                                박우성 _ 영화 칼럼니스트
<워낭소리>의 초월적 우정은 현실적 비탄으로부터 눈을 감아버림으로써 비로소 성립된 게 아닐까?
▲ <워낭소리>의 초월적 우정은 현실적 비탄으로부터 눈을 감아버림으로써 비로소 성립된 게 아닐까?

나는 <워낭소리>의 감독이 영화를 둘러싼 예상치 못한 사태들을 두고 ‘무섭다’고 한 것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이것은 결코 복에 겨운 수사적 넋두리가 아니다. 무서운 속도로 찾아드는 관객들이 무섭고, 경북 봉화에 직접 찾아가 영화의 주인공에게 돈까지 건네며 사진 한 장 찍자고 해도 크게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하는 일부 관객의 뻔뻔함이 무섭고, 그것에 발맞추어 아예 그곳을 관광 상품으로 만들겠다는 지자체의 속물근성 역시 무섭다. 하지만 예측건대 가장 무서운 것은, 취임 후 처음으로 대통령이 직접 납시어 <워낭소리>를 봐버렸다는 게 아닐까? 그것은 결코 간단한 사안이 아니다. 독립영화의 발전을 위해서라고? 골계의 극치다. 반대로, 대통령이 그것을 봤다는 것은, 대통령이 봐도 크게 문제될 게 없다는, 대통령도 봤으니까 국민 여러분도 봐도 된다는 혹은 반드시 봐야만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다름 아니라 그것은 대통령이 만천하에 영화를 ‘허락’한 사태인 것이다.

최근 <워낭소리>를 둘러싼 논쟁이 화제다. 요컨대 영화가 작위적인 편집방법, 그러니까 소가 눈물 흘리는 이미지를 두 군데의 핵심 장면에 억지로 집어넣어 관객의 감동을 기만적으로 조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너무나 타당한 지적이다. 게다가 이는 단지 편집에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가령 자막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워낭소리>는 인물들의 말(음성)을 화면의 우측 하단의 자막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굳이 ‘번역’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것이 음성중심의 지역어(방언)를 문자중심의 국민국가언어(표준어)로 확대생산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막(표준어) 덕분에 우리는 너무나 편하게 영화에 빠져들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지나치게 그것에 의존하다보니 정작 사운드(특히 음성언어)나 이미지 자체를 등한시해버리는 기만이 발생한다. 더구나 ‘번역’의 전 과정에 새겨진 감독의 입김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런 식의 논쟁이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접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결국에 그것은 ‘다큐는 작위적(가짜 혹은 픽션)이어서는 안 된다’ 식의 계몽적 언명으로 수렴될 뿐이다. 정말이지 다큐영화는 ‘진짜’를 ‘진짜의 방법’으로만 다루어야 하는가? 아니, 애초에 그런 것들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감히 말하건대 나는, <워낭소리>가 배치한 작위적 장치보다, 영화를 그런 식의 ‘진짜(다큐)/가짜(극영화)’로 구분하려는 태도가, 훨씬 더 작위적이라 생각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가 설사 작위적인 장치에 기만당한다 하더라도 크게 기분 나빠할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점이다. 속아도 상관없다는 말이 아니다. 반대로 과연 몇 명의 관객이 정말이지 소(牛)가 바로 그 절묘한 순간에 ‘인간적인’ 눈물을 흘렸다고 있는 그대로 믿어버리겠는가? 그러기에는 작위적 장치의 도식이 너무나 거칠다. 그런데 분명 속지 않았음에도, 그러나 감동해버린다면?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속아버린다면? 주목해야 할 것은 단지 속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영화가 작위적으로 감동을 조장한다는 것을 분명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쉽게 감동해버리는 사태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워낭소리>만의 특출한 방식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보편적이다. 일테면 최근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드라마만 해도 그렇다. 그것은 과장이라는 것을 굳이 감추지 않고(아니 오히려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반대로 우리는 그것이 허위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주체적으로’ 휘둘려버린다. 하물며 광고의 경우는 또 어떠한가? 이런 점에서 나는 기만성이 뻔히 보이는 장치들이 아니라 반대로 결코 기만적으로 보이지 않는, 그리하여 영화를 보는 내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장치들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말장난 같지만 단순한 작위성이 아니라 작위적이지 않은 것들의 작위성, 기만적이지 않은 것들의 기만성 말이다. 

알다시피 <워낭소리>의 영어 제목은 'Old Partner'다. 물론 그것은 ‘워낭소리’의 명시적 의미, 즉 노인과 소의 우정을 지시한다. 처음부터 영화는 노인과 소의 우정, 그것도 몇 십 년이 넘는 우정을 그리겠노라 선언하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사소해보이지만 내가 볼 때 이것이야 말로 간단히 넘어가서는 안 될 문제다. 실제로 확인해 보니 <워낭소리>에 노인과 소의 우정 따위는 없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워낭소리>가 <워낭소리>일 수 있는 공리(公理)이며, 그렇기에 결코 무너져서는 안 될 경계이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선험적으로 그냥 그렇게 주어지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점이다. 역으로 영화 <워낭소리>는 공리(경계=우정)를 사수하기 위해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장치를 동원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앞서 인물들의 말이 대부분 심한 사투리로 발화되기 때문에 쉽게 알아들을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하여 감독은 자막을 사용한 것이지만, 그런데 개중에는 굳이 그런 식의 도움 없이도 누구나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발화가 있다. 예상했다시피 그것은 할아버지의 중얼거림, 즉 ‘아파’이다. 그런데 <워낭소리>에서 할아버지는 그냥 아픈 게 아니다. 물론 이것 역시 할아버지께서 실제로는 편찮으시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반대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제 할아버지의 건강과는 별도로 적절한 영화적 조율을 거쳐 철저히 구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파’의 중얼거림이 본격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하는 지점은 정확히 수의사의 발언이 있은 직후, 즉 소가 채 일 년도 살지 못할 거라는 진단이 나온 이후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볼 때 그것은 둘이 함께 죽어가고 있다는 운명론적 징후 혹은 설정된 것으로서의 ‘동병상련’이다. 쉽게 말해 영화에서 노인은 그냥 혼자서 아픈 게 아니라 소가 아프니까 아픈 거다. 소 역시 그냥 아픈 게 아니라 할아버지가 아프니까 아픈 거다. 요컨대 우리는 이런 식의 조율로 물 흐르듯 구성되는 상상적 동일화(=우정)의 광경을 뚜렷하게 목격한다.

물론 그것만이 아니다. 사실 <워낭소리>의 초반부는 다소 불편하다. 다 죽어가는 소가 노인이 탄 달구지를 너무나 힘겹게 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인과 소의 우정이 깨지고 마는가? 아니다. 상황은 오히려 정반대다. 구축을 위한 일시적 탈구축이었다고나 할까? 그것과 병행하여 이어지는 장면들에서 이제는 소의 힘겨움만큼이나 힘겹게 소의 먹잇감을 구하는 노인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둘의 관계는 철저히 쌍방향적이다. 더구나 클로즈업된 할아버지의 앙상한 다리 옆의 또 정확히 그만큼 앙상한 소의 체구를 확인하시라. 아니, 영화가 영사되는 동안 지속적으로 우리의 귀를 자극하는 워낭소리 자체가 둘의 커뮤니케이션(=우정)을 끊임없이 구성하는 음성적 기표이다. 물론 노인과 소 사이를 질투하는 할머니만큼은 조금 다르게 해석할 수 있겠다. 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닌 것이, 할머니가 소가 죽어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말하는 이유는, 소가 빨리 죽어버렸으면 하는 게 아니라, 죽음이야 말로 소와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구시대적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게끔 하는 유일한 해방구이기 때문이다. 물론 소의 입장에서 죽음이라는 사태는 가혹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과 할머니의 진심은 별개다. 더구나 할머니는 몇 차례나 영감이 죽으면 따라 죽겠다고 선언하지 않는가. 말하자면 표면적으로는 엇갈리는 듯한 삼각관계가 실은 단단히 묶여 있는 상상적 동일화이자 우정의 공동체인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공동체는 해질녘 역광으로 잡힌 노인과 소의 초월적 미장센으로 기어이 완결된다.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 말하는데, 나는 지금 실제 경북 봉화의 할아버님과 이미 세상을 떠난 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더구나 앞서도 강조했듯 둘의 관계가 그다지 특별할 게 없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결코 아니다. 분명 할아버님과 소는 감히 몇 마디 말 따위로 표현할 수 없는 각고의 인연을 형성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내가 여기서 거론할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할아버님과 노인의 실제 관계가 영화가 그려내는 식의 운명론적 우정과는 결코 동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설사 할아버님과 소의 우정이 존재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카메라에 포착되는 한, 그리하여 편집과정을 거치고 다양한 영화적 기법 속에 재현되어버린 이상, 작위성의 침입을 막을 길은 없다. 말하자면 그 각고의 인연은 영화라는 매개체를 거치면서 보다 일관되게, 보다 가지런하게, 보다 균질적으로 계량화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워낭소리>는 실제의 그것보다 휠씬 더 딱딱하고 견고하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주의사항 하나! 방금 말한 실제 현실과 영화적 재현 사이의 관계를 혼동해버리면 위험하다는 점이다. 그것을 혼동하는 순간 경북 봉화의 할아버님과 할머님은 돈을 주고 사진을 찍어도 크게 문제될 게 없는 객체 혹은 관광 상품의 도구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영화의 상상적 균질화가 너무나 부드럽게 형성되는 탓에, 그것을 능동적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2월 15일 대학로 동숭아트센터에서 <워낭소리>를 관람했다.

그것과 더불어 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구성하는 상상적 경계가 자연스럽다 못해 지나치다는 것, 그리하여 그 경계에 포함되지 않는 것들이 부정되거나 골계의 대상으로 결락되어버린다는 점이다. ‘경계 안(선)/경계 밖(악)’의 단순한 이분법을 논하자는 게 아니다. 문제는 경계의 안쪽(공동체=우정)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자폐성이다. 물론 이것 역시 상대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워낭소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어쩌면 몇몇 예외적 상황을 뺀 대부분의 영화는 나름대로의 경계 쌓기에 충실하다. 급기야 프레임 속에 담는다는 것 자체가 안(볼 수 있는 것)과 밖(볼 수 없는 것)의 경계설정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워낭소리>의 경계를 단지 그것이 지나치다 하여 무작정 비판할 수만은 없다. 그런데 경계를 설정한다는 것과 그것이 유발하는 배제와 누락의 사태는 전혀 다른 문제가 아닐까? 비유컨대 아무리 도시재개발이 필요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억울한 추방자가 생겨서는 안 되는 것처럼, 영화가 설정한 자명성으로부터 추방되어 부정되거나 희화화되는 존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따라 상황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더구나 그것이 함부로 부정되거나 희화화되어서는 안 되는 그 무엇이라고 할 때 사태는 심각하다.

쉽게 잊어버리지만 <워낭소리>에는 단지 한 마리의 소만 등장하는 게 아니다. 정확히 말해 세 마리의 소, 즉, 늙은 소, 늙은 소를 대체하기 위해 들여온 젊은 소, 그리고 젊은 소가 낳은 송아지가 있다. 그런데 혹시 젊은 소가 지나치게 탐욕적으로 보이지는 않던가? 가령 늙은 소의 여물을 힘으로 빼앗는 모습, 자기가 낳은 송아지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모습, 늙은 소가 힘겹게 달구지를 끌 때 마구간에서 여물만 씹던 모습들 말이다. 물론 이런 식의 반복은 정서적 대비를 환기하고 그 둘의 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예증한다. 그러니까 젊은 소는, 늙은 소를 대체하기 위해 거기 있었던 거지만, 그러나 처음부터 그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물론 젊은 소가 어디까지나 외부에서 온 침입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무슨 이유로 철저히 외부적인가? 그런데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하다. 바로 이 속에 노인과 소를 30년 동안 묶어 왔던 우정의 역사성 혹은 기원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바로 이 지점에서 상상적 동일화로 구축된 공동체(=우정)가 실은 배제해서는 안 될 것들을 누락시킴으로써 성립된 가공물이었음이 드러난다.

젊은 소가 외부적 침입자로 머물러야만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달구지를 끌기에는 젊은 소가 지나치게 방정맞다는 점. 그러니까 젊은 소가 노인에게 ‘일소’로서의 역량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 실제로 노인은 그것을 ‘일소’로 교화시키기 위해 무단히 애를 쓴다. 하지만 봤다시피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그렇다면 반대로 늙은 소의 경우는 어떠한가? 늙은 소가 30년 전에 공동체로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스럽게도’ 달구지를 충분히 끌고도 남을 ‘일소’로서의 역량을 보여줬기 때문은 아닐까? 이런 사항을 가정한다고 했을 때, 그렇다면 둘이 관계를 형성하는 결정적 계기는 다름 아니라, ‘동물에 대한 인간의 착취’ 혹은 ‘타자(자연)에 대한 주체의 사유화(인간)’였던 게 아닐까? 이것이야 말로 ‘일소’가 되지 못한 젊은 소가 멀리 팔려가면서 우리에게 던진 공동체(=우정)의 기원이다. 착취당할 조건이 성립되지 않거나 폭력의 행사에 반항하면 공동체로부터 어김없이 추방당한다는!

나는 지금 <워낭소리>가 은폐시킨 폭력성을 문제 삼고 있다. 균질적이고 초월적인 우정을 구축하기 위해 폭력을 은폐해버리는 사태 말이다. 그런데 한 발 더 나아가 비판해야 할 것은 그것을 위해서라면 폭력성 따위 정도는 은폐되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비윤리적 발상 바로 그것이다. 할머니의 잔소리에 짜증이 난 노인이 늙은 소를 마구 때리는 장면이 떠오른다. 동시에 소가 아니었으면 9남매를 못 키웠을 거라는 소리도 들린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전혀 작위적인 것으로 아니면 불편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소의 희생적 사랑이 아름다운 경북 봉화의 풍경과 어울려 숭고의 수준으로 승화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인간중심의 은유가 아닐까? 그리하여 오히려 그것은 9남매를 키우기 위해 소가 30년 동안이나 착취당했다는 뜻이 아닐까? 계속해서 클로즈업되는 할아버지의 불편한 발을 30년 동안 대신했을 뿐이라고? 그런데 왜 말 못하는 소가 구타당하면서까지 그런 책무를 떠맡아야만 하는가? 아니, 그 문제는 둘째로 치고, 그것을 두고 과연 <워낭소리>처럼 ‘Old Partner'라 지칭해버려도 되는 것인가? 이것이야 말로 너무나 작위적이고 기만적이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덧붙여, 여전히 노인은 아프다. 그리하여 오늘도 다 쓰러져 가는 늙은 소에게 고집스레 달구지를 맡기고 병원으로 향한다. 그런데 그 때, 우연치고는 너무나 기막힌 장면이 연출된다. 우시장(牛市場)으로 보이는 곳을 달구지가 지나갈 무렵 그 너머로 소고기의 수입을 반대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그런데 이 순간,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전도가 발생한다. 있는 그대로 따지자면 이 장면이야 말로 가장 슬퍼야 한다. 죽음의 그림자가 덧씌워진 운명론적 우정과 절대자본주의의 물결에 떠밀려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축산농가의 슬픈 표정이 오버랩될 거라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 극장을 가득 채운 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성숙하지 못한 관객을 문제시 하자는 게 아니다. 반대로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영화가 배열해 놓은 친절한 규칙들에 몰입했다는 사실 뿐이다. 그러니까 축산농가의 현실적 비탄 역시 어디까지나 운명적 절대경계 너머에 있을 뿐이고, 초월적 우정에 비해 그것은 오히려 속된 것으로까지 보이는 사태가 발생한다. 과연 그러하다면 <워낭소리>의 초월적 우정은 원래 그렇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현실적 비탄으로부터 눈을 감아버림으로써 나아가 그것을 추방시킴으로써 비로소 성립된 게 아닐까? 경계 너머의 풍경은 추방되거나 무시되거나 희화화되어도 문제될 게 없다는 인식은, 탈역사의 풍경이라는 기막힌 전도를 낳고 만다. 끝으로 이 장면을 보면서 누가 제일 흐뭇했을까? 그리하여 장관의 권유에 따라 대통령까지도 직접 납시어 <워낭소리>의 관람을 ‘허락’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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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고향,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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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0 11:07

재일 조선인 위안부의 지지 않은 싸움

[독립영화로 말하다]안해룡,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재일 조선인 위안부 송신도의 투쟁'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안해룡 감독의 다큐멘터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의 문제를 다룬다

▲ '재일 조선인 위안부 송신도의 투쟁'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안해룡 감독의 다큐멘터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의 문제를 다룬다



                                  박혜미_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

'재일 조선인 위안부 송신도의 투쟁'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안해룡 감독의 다큐멘터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의 문제를 다룬다. 일본에 생존해 있는 위안부 피해자인 송신도 할머니와 '재일 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 다큐멘터리는 19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위안부 신고전화를 통해 알게 된 송신도 할머니의 증언 취재로 시작된 송신도 할머니와 지원 모임의 관계는 일본 정부의 사죄를 요구하는 재판과 강연, 대담, 농성, 시위에의 참여 등 활발한 활동과 투쟁을 통해 끈끈해진다. 다큐멘터리의 제목을 통해 추측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는 송신도 할머니의 이 말처럼 이 싸움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언제까지나 녹슬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우리에게 무척이나 익숙하게 느껴지는 주제이다.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3부작을 통해 우리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고통스러운 몸과 기억을 목격했고, ‘나눔의 집’에서 그녀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비단 <낮은 목소리> 뿐 아니라 여러 매체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역사적 진실로 입증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아직도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지 않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가 벌써 850차를 넘어섰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낯선 일이다.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아직도 끈질긴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싸움에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에 주목하고 이를 관객들에게 상기시키는 영화이다. 

변영주 감독이 <낮은 목소리> 3부작을 통해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손녀처럼 각기 다른 몇 명의 일본군 위안부 여성의 삶의 궤적을 따라갔다면,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는 송신도 할머니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싸움과 투쟁이 무엇을 남겼는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계속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열여섯 살에 중국 무창에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했던 할머니의 피해 증언보다는 '재일 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과 송신도 할머니의 만남, 그리고 집회나 강의 등 피해 체험을 나누는 과정을 통해 송신도 할머니가 어떠한 변화를 겪었는지, 할머니와 지원 모임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해가고 있는지에 더 애정어린 시선을 쏟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주인공인 송신도 할머니 역시 전쟁의 피해자이기보다는 거침없고 당당한 말투와 쾌활하고 유머러스한, 그러면서도 솔직하고 거침없는 성품을 가진 여성으로 그려진다. 재판에 패한 후 침울해진 집회장의 분위기를 살려내는 힘찬 발언이나, “바보 같은 전쟁은 두 번 다시 하지 마라!”는 따끔한 외침,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는 매력적인 할머니의 모습은 그녀가 가진 당당함과 웃음을 보여준다. 물론 여기에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역사적 증언으로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고 사람들에게 이해받으면서 상처를 치유해나가는 시간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송신도 할머니는 피해 체험을 토로하고 믿어주는 사람을 만나면서 상처를 회복해나가고, 끝까지 함께 싸운다는 각오를 나누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지원 모임과도 조금씩 신뢰관계를 쌓아간다.

일본의 시민단체와 개인 670여명의 자발적인 모금과 참여로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가 만들어진 것을 보면 송신도 할머니의 목소리는 일본 사람들에게도 적지 않은 울림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완성된 다큐멘터리는 2007년 8월, 도쿄에서 첫 상영회를 열었고 작년까지 80여 차례가 넘는 상영이 일본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영화배우 문소리가 내레이션을 맡았다. 2월 26일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개봉. 문의: 02-778-0366 

 

* 이 글은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에서 제공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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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9 11:08

<워낭소리> 마음의 고향, 그것뿐이다.

[강성률 _ 영화평론가, 광운대 교수] 


영화 <워낭소리>는 이제는 사라진 과거의 모습에 카메라 초점을 맞추어 외국인과 한국의 도시인이 보고 싶은 한국의 이미지를 그려냄으로써 정서적 감흥을 일으킨다.
▲ 영화 <워낭소리>는 이제는 사라진 과거의 모습에 카메라 초점을 맞추어 외국인과 한국의 도시인이 보고 싶은 한국의 이미지를 그려냄으로써 정서적 감흥을 일으킨다.

<워낭소리>가 독립영화사상 최초로 관객 10만 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이번 주말은 예매율 1위라는 기염을 토하면서 조만간 2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독립영화사상 최초로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사실, 조만간 20만 명을 돌파할 것이라는 예상 그 자체도 놀랍지만, 요즘처럼 한국영화가 위기를 맞고 있는 시기에, 웬만한 상업영화도 흥행에 참패하고 마는데 독립영화가 이런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워낭소리>가 이처럼 큰 흥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가?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관객들이 편하게 볼 수 있는 소재적 차원에서 먼저 접근해야 할 것 같다. 30년이나 인생의 동반자였던 할아버지와 소의 관계를 통해 인생이라는 성찰의 문제를 이끌어내고,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화면에 담아냄으로서 팍팍한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준다. 소외된 듯한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잔잔한 재미를 느끼기도 하고, 소의 죽음을 대하면서 막막한 슬픔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인생과 삶, 자연 등에 대해 편안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워낭소리>의 영화적 완성도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다큐를 보면서 내가 놀란 것은 감독의 연출력이었다. 이 영화에는 감독의 내레이션이 없다. 주인공인 할아버지도 말씀이 거의 없으시다. 그렇다고 소가 말을 하겠는가? 단지 할아버지에 대한 불평을 늘여놓으시는 할머니의 독백만이 영화 속에 살아있을 뿐이다. 결국 이 영화는 소와 할아버지의 관계를 별다른 설명 없이 화면만으로 이끌고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거나 불명확하지도 않다. 이런 솜씨는 아무나 가진 게 아니다 장담컨대 이충렬 감독은 탄탄한 영화적 실력을 지니고 있는 감독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나서 그리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영화 속에 내장되어 있는 정서적 울림에 깊이 동감했으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 영화를 보자마자 어느 정도 흥행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간단한다. 지금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부분을 적절하게 건드리게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적절하게’ 건드린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소를 지극히 사랑하는 할아버지와 소에 대한 이야기이다. 40살이나 된 소는 죽을 나이이고 할아버지는 노년에 접어들었다. 둘 다 인생의 황혼기인 것이다. 그런 할아버지는 아직도 쇠죽을 끓여 소에게 먹이고, 소 달구지를 타고 읍내에 나가고, 소꼴을 베기 위해 농약을 치지 않는다. 논이나 밭에서 일을 할 때도 소의 도움을 받는다.

이런 풍경은 지금 현재 농촌의 풍경이 아니라 몇 십 년 전 과거의 농촌의 모습이다. 요즘 농촌에서는 기계화되어 이런 일소를 기르지 않는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일소를 구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굳이, 이제는 사라진 풍경을 영화 속에, 그것도 사계절의 순환 속에 녹여낸다. 때문에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은 참으로 편안하게 이 영화를 보게 된다. 왜냐고? 머리 아프게 만드는 현실적 문제가 이 영화에는 빠져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라진 마음속의 풍경이 영화 속에 녹아있기 때문에, 관객들은 부모님 세대나 할아버지 세대를 생각하면서 편안히 영화 속에 빠져들게 된다.

이 영화가 해외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외국인들이 보고 싶은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이 영화에 그려진 것과 비슷한 것이다. 마치 <북극의 나누크>를 만들었던 로버트 플래허티나, 과거의 중국을 빨간 색의 풍광 속에 담아냈던 초기의 장이머우와 마찬가지라고 할까. 이제는 사라진 과거의 모습에 카메라 초점을 맞추어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정서적 감흥을 일으키는 방법말이다. 이런 방법을 통해 관객들의 호기심도 채워주고, 새로운 구경거리도 제공한다. <워낭소리>는 외국인이, 그리고 한국의 도시인들이 보고 싶은 한국의 이미지를 적절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는 농촌의 현실에 대한 묘사가 없다. 미국 소 수입을 반대하는 집회장 앞으로 할아버지와 소가 지나갈 때 현실을 환기하기보다는 웃음이 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할아버지의 모습, 포근한 마음속 고향의 느낌에 심정적으로 동조하지 않을 수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관객들이 쉽게 영화 속에 빠져들도록 감독은 극영화의 편집 체계를 사용하고, 사계절의 순환 속에 사건을 재배치했다.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온 가족이 모두 앉아 편하게 볼 수 있는, 프라임 시간대의 TV 다큐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토록 평안한 다큐라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를 보면서 고영재 PD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프로듀서한 <우리 학교>, <농민가>, <워낭소리> 사이의 관계가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기본적으로는 인간의 문제에 집중적으로 다가갔지만, <우리 학교>는 조총련의 현실적 문제에, <농민가>는 한미 FTA와 몰락하는 농민의 현실적 문제에 깊이 다가간 반면 <워낭소리>는 현실적 고민이 거의 증발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소재로 두 편의 영화를 프로듀싱했지만, 정치적으로는 거의 정반대적인 입장을 담고 있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워낭소리>와 <농민가>를 같은 사람이 프로듀싱했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점점 더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그래서 독립영화인들이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2>를 만들자고 의견을 모으고 있는 지금, 한독협 사무총장이 프로듀싱한, 매우 비정치적인 성향의 영화와 쉽게 매치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랜만에 독립 다큐가 워낙 큰 흥행을 하니 별 생각이 다 든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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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5 10:30

불법체류자는 있는데 왜 불법사장은 없는가?

[인터뷰]서울독립영화제 초청작 '쫓겨난 사람들' 감독 마붑 알엄(이주호, 김나라 기자)

11일 개막한 서울독립영화제에 2007년 작 <쫓겨난 사람들>을 초청 받아 상영하게 된 마붑을 컬처뉴스 사무실에서 만났다
▲ 11일 개막한 서울독립영화제에 2007년 작 <쫓겨난 사람들>을 초청 받아 상영하게 된 마붑을 컬처뉴스 사무실에서 만났다

마붑 알엄이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그의 둘째 형이 한국에서 일을 하면서부터였다. 그전까지 그는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도 몰랐고 한국에서 살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그가 한국에 온 게 1999년이니 그의 한국 생활도 10년이 다 되어 간다. 그간 그는 공장노동자에서 이주노동 활동가로,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최근에는 영화배우로까지 생활권역을 넓혀갔다. 한국이라는 나라의 여건상 이주노동자의 삶의 궤적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다.

11일 개막한 서울독립영화제에 2007년 작 <쫓겨난 사람들>을 초청 받아 상영하게 된 마붑을 컬처뉴스 사무실에서 만났다.

서울독립영화제 초청 작품으로 <쫓겨난 사람들>을 상영하게 되었다. 어떤 영화인가?

<쫓겨난 사람들>은 2007년에 만든 다큐멘터리인데 같이 활동하던 친구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2002년부터 지금까지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법무부의 표적단속으로 강제 추방된 사건이 있었다. 그때 추방당한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고국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이주노동자활동을 하던 사람들인가?

처음부터 인권이나 노동 문제를 위해 한국에 와서 활동하던 사람들은 아니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에 관한 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사람들 중 아마 그런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다들 한국에 일하러 왔다가 돈 버는 것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다보니 자연스럽게 활동을 하게 된 것이고, 그 중 7명의 이야기를 담았다.

극영화든 다큐멘터리든 원래 영상에 관심이 있었나?

원래 방글라데시에서는 회계를 전공했다. 한국에서는 그것과 상관없는 일을 했지만. 이주노동자에 대한 편견과 열악한 싸움, 법 개선도 중요하지만 사람들 의식도 넓혀야 할 것 같아서 이주노동 활동을 시작했다. 방글라데시 공동체 활동과 노동자 활동 같은. 일반적인 방송에서는 이주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왜곡 돼서 화가 나기도 하고 그래서 무엇을 해야 바뀔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러면서 미디액트를 알게 되었고, 8mm 카메라를 빌려서 찍기 시작했다. 우리 안에도 할 이야기가 많으니까. 시민방송을 2004년에 알게 되었는데 시민방송에서는 시민이 직접 만든 방송을 하게 해 주었다. 그렇게 우리 이야기를 하기 위해 모여서 찍기 시작했다. 다큐가 조금 다른 매력이 있다. 주제 의식이 있고,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할 수 있어서. 그래서 다큐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극영화를 찍을 생각도 있는가?

시나리오 작업을 끝내 놓은 게 하나 있다. 제작비가 문제인데, 우선 단편 영화라면 시도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쫓겨난 사람들>에 등장했던 사람들도 그렇고, 한국에서 활동을 하다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 추방을 당해서 돌아간 사람들과 아직도 교류가 있는가?

그렇다. <쫓겨난 사람들>을 찍기 시작한 건 2006년부터다. 방글라데시와 네팔에서 촬영을 했는데, 방글라데시는 내 고향이기도 해서 통화도 자주하고, 태풍 피해 돕기, 어린이 돕기 등의 활동을 하면서 계속해서 교류해 왔다. 2007년 11월에도 한국에서 후원행사를 하고 그때 모인 돈을 방글라데시에서 현지 활동가들과 함께 전달하고 왔다. 방글라데시에는 한국에 오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들에게 한국문화, 역사, 언어 등에 대한 교육을 하는 게 바로 그들(한국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나는 방글라데시에서 이주민 라디오를 만들 생각을 하고 있다. 한국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는 라디오 방송을 만들어서 동시에 한국으로 오려는 사람들이나 한국에서 돌아간 사람들 간의 정보교환의 통로를 만들고 싶다. 이주의 문제는 한국에서 일을 하면서 겪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방글라데시를 떠나는 절차의 문제이기도 한 까닭이다.

네팔에서도 역시 한국으로 오려는 사람들에게 교육하는 일을 하고 있다. 동시에  다시 네팔로 돌아간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할 수 있을 찾을 수 있게 도움을 주고 있다.

해외에서 촬영을 하려면 제작비가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충당했나?

한국을 떠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자니 한국에서 찍는 것보다 제작비가 많이 들 수밖에 없었다. 우선 MWTV(이주노동자 방송)에 지원을 부탁했다. 적자는 자비로 채워 넣겠다는 것을 전제로 지원금을 받아 카메라와 장비를 짊어지고 혼자 떠났다. 당시 방글라데시 평균 온도가 35도 정도였고 만나야 하는 사람들은 다 다른 지역에 살고 있었다. 한국과 같지 않아서 그곳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힘든 일이다. 힘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쫓겨난 사람에 대해 개인적인 미안함도 있었다. 나는 비자가 있어서 그래도 편하게 활동할 수 있으니 이런 게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20분이란 짧은 시간 동안 할 수 없는 이야기가 많아서 아쉽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충격을 받았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미국, 캐나다, 인도 등 해외 영화제에서도 상영을 했었고, 앞으로 방글라데시에서도 상영할 예정이다.

<쫓겨난 사람들>의 후속편이라든가, 혹시 새로 하고 있는 작업은 없는가?

지금은 이주노동자 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가족 관계나, 쫓겨난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게 무얼까 하는 내용으로 새로운 작업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마숨은 한국에서 12년 동안 활동했다. 사실 자기 나라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했다. 그러다 한국에서 표적 수사에 의해 강제 추방을 당했는데, 그의 가족들은 그가 돌아왔다고 오히려 좋아했다. 외국에서 일을 하더라도 1년에 한 번은 가족을 만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마숨은 12년간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그는 딸의 얼굴을 못 보고 떠났는데, 돌아가 보니 어느새 아이가 12살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떠났던 땅이다 보니 물이 안 맞아 배탈이 나거나 잠을 못 자거나 하는 신체적인 어려움도 있었다. 그런 이야기들을 담은 다큐멘터리인데, 이제 촬영은 다 됐고 편집 중이다.

영상 제작을 하는 활동은 다른 이주노동자 활동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

개인적으로 꼭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면에서 좋다. 방글라데시 친구들은 그래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네팔이나 다른 나라에 사는 친구들은 만날 수 없었는데, 그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다. 영화도 찍지만 친구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그리고 앞으로 내가 뭔가 더 많은 일을 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면에서 그렇다. 현지에서 학교를 만들어 활동하는 친구도 있었는데, 친구들이 잘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다문화를 내세우고 있고, 한국 이주노동의 역사도 이제 20년이 넘었다. 하지만 얼마 전 마석 가구 단지의 대대적 단속사건만 해도 정부의 태도는 물론 그런 정부를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시선도 여전히 불법체류자는 법을 어긴 사람이니 법대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불법체류자는 정말로 범법자인가?

불법적인 행위가 무엇인가? 체류가 불법인가, 노동이 불법인가. 3D 업종에서, 한국 사람들이 기피하는 일을, 한국 사람은 생각도 못 하는 적은 돈을 받으며 일한다.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살아 갈 수 있는 건 한국에서 그런 노동력을 끊임없이 원하기 때문이다. 한국 이주노동의 역사는 20년이 넘었다. 처음에는 법조차 없었다. 단지 한국에 그런 노동력이 필요해서 사람들을 들여왔다. 그러다 이주노동이 사회적 문제가 되다보니 이후 산업연수생이라는 이름으로 외국 노동자들을 받아 들였다. 연수생이라면 당연히 일을 하면서 기술을 배워가야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지만 하루 12시간 노동에 주말도 없고 2,30만원의 월급을 받으며 일했다. 이게 어떻게 연수생인가.

그러다 고용허가제가 만들어졌다. 이 제도에 의하면 이주노동자는 공장이 망하지 않는 한 그 공장을 떠날 수 없다. 노동자를 필요로 했지만 거기에 대한 법을 만들지 않았던 20년 전과 비교해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다. 불법체류가 인정되는데 어떻게 불법 사장은 인정되지 않는가? 불법의 노동력을 활용하고, 그 돈으로 세금을 내고, 돈을 버는 자체가 불법이 아닌가. 정부가 거둬들이는 세금 자체도 불법적인 생산 활동으로 인해 생겨난 돈이 아닌가? 사장은 인정하지만 노동자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건 어떤 논리인가? 이주노동자는 힘이 없으니 이들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장기적 체류, 숙련 노동자들이 안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정말 필요한 건 시민권이다. 한 국가에서 체류한 시간이 길어지면 시민권이 나와야 하는데 나오는 것이라곤 범죄자라는 낙인뿐이다. 한국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범죄 문제도 그렇다. 100만 이주민이 있는데 범죄자가 없을 수 있겠나? 범법자는 법으로 다스리면 된다. 그 범법은 범죄자의 문제이지 이주노동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 캐나다, 일본에서 저지르는 한국인 이주자의 범죄율이 한국 내 이주노동자의 범죄율보다 더 높다는 것은 왜 생각 안 하는가? 이건 실제 통계자료로 나온 것이다.

한 사람이 불법 체류자가 되는 것은 실제 이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노동이 불법이 아니니. 몇 년간 그 나라에 거주를 하면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거주하고 싶은 사람도 있지만 사실 자기 나라로 돌아갈 사람이 더 많다. 그 사람들에게는 다시 비자를 받을 수 있게, 다른 회사와 계약을 하면 그 계약으로 비자를 연장해 주면 되지 않겠나.

영화 <반두비>(신동일, 2008)에 출연한 마붑 알엄  

영화를 찍기도 하고 출연하기도 했다. 신동일 감독의 <반두비>에 출연했는데 영화에 관한 소개를 해 달라.

‘반두비’는 벵갈어로 ‘참 좋은 친구’라는 뜻이다. 이 영화에서 나는 한국에 온지 3년 된 이주노동자 ‘카림’이라는 역할로 출연했다. 상대 배우로 박지민이 여고생 역할을 맡았다. 둘이 우연히 만나서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인데 멜로와 드라마가 들어있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이주노동자의 이야기도 하는 영화다. 올해 10월까지 촬영했고 내년 4월에 개봉될 예정이다.

신동일 감독이 ‘카림’ 역할에 미리 생각해두었다는 말을 들었다. 전부터 감독과의 인연이 있었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라는 작품에 엑스트라로 출연했었다. 담배 피는 역할. 그러다 신동일 감독이 이번에 이주노동에 관한, 방글라데시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찍는다고 의견을 달라 해서 스크립트를 받아봤다. 또 주변에 잘 생기고 비자문제 없는 20대의 배우를 소개해 달라고 했는데 스크립트를 읽어 보고 내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내용이 좋았다. 참여하고 싶어서, 직접 하면 어떨까, 이야기했는데, 오디션을 보게 해줬다. 계속 다른 배우를 찾기는 했는데 그게 쉽지 않아 내가 하게 됐다. 그때는 살이 많이 찐 상태였기 때문에 10kg 감량하라, 해서 연기 연습과 더불어 외모를 만들어 가야했다. 살이 쉽게 빠지지 않아서 감독도 걱정하고, 나도 걱정했다. 결국 굶고 물만 먹고 운동해서 살을 뺐다. 여배우보다 일찍 참여해서 미리 영화에 관련된 일도 하고, 연기연습도 할 수 있었다.

얼마 전 우연히 TV를 보다가 드라마 <종합병원2>에서 잠시 본 것 같다. 본인 맞는가?

내가 욕심이 많아서, 드라마에 한 번 출연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MBC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는데 출연 제안을 받았다. 엄청 힘들었다. 또 <사람의 아들>이라는 이문열 소설을 각색한 작품에도 출연한다. 그건 종교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감독, 영화배우, 이제는 드라마 출연까지 못하는게 없는 것 같다.(웃음) 하나 더 보태서 학교에서 강의까지 한다고 하는데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내용을 가르치게 되는가?

지난 두 달 반 동안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다문화 교육을 하는 연수를 받았다. 아이들에게 다문화의 중요성과 흐름에 대해 교육할 이주민 10명, 한국인 20명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이제 구로에 있는 초등학교에 가서 다문화 교육을 하게 됐다. 전국의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강의하는데 방글라데시 이야기도 하겠지만 한국에 사는 이주민 이야기도 할 생각이다.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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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5 09:34

노년은 아름다워라 - 황혼의 의미와 아름다운 음악의 조화, <로큰롤 인생>

언제 마지막 공연이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끝까지 열정적으로 노래를 하는 모습은 깊은 흥분을 자아내게 한다.
▲ 언제 마지막 공연이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끝까지 열정적으로 노래를 하는 모습은 깊은 흥분을 자아내게 한다.

영화는 삶을 다룬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조금만 더 들어가 보자. 그러나 영화는 산업이다. 이것은 영화는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기 때문에 자본에 맞는 수익을 창출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말을 다르게 하면, 영화는 대중들이 선호하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된다. 대중들에게 생소한 이야기를 영화화하면 외면당하게 되고, 결국 이는 차기작을 만들 수 없는 여건에 처하게 한다. 코미디, 멜로드라마, 공포 영화 등등 장르가 등장한 것도 이런 장르를 대중들이 선호하기 때문이다. 장르라는 것은 대중들과 제작자들 사이의 일종의 약속이다. 대중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제작자들이 선사하겠다는 약속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제작자의 입장에서 장르란, 수익이 보장되는, 속칭 ‘안전빵’인 것이다.

영화가 대중문화의 총아인 것은 분명하지만, 영화의 대중은 실상 10대 후반과 20대, 더 나가봐야 30대 초반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영화에서 대중은 모든 세대를 대표하지 못한다. 대중에 포함되지 못하는 가장 불운한 세대가 있으니, 이들이 바로 60대 이상의 노년층이다. 어린이만을 겨냥한 영화가 방학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고, 중년층을 위한 영화도 가끔 등장하지만, 노년층을 위한 영화는 거의 없다. 노년층을 위한 영화가 없으니 노년층을 다룬 영화가 흔치 않을 수밖에 없다.

한국의 영화 가운데서도 노년층의 삶에 카메라를 깊숙이 댄 영화는 그리 많지 않다. 당장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손자의 시선으로 외할머니를 다룬 <집으로…>, 딸의 시선으로 어머니를 다룬 <마요네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근대화를 홍보하기 위해 노인을 출연시킨 <팔도강산> 시리즈 정도만 기억날 뿐이다. 이 영화들도 노년층의 문제를 노년층의 시각으로 예리하게 분석하거나 통찰한 것이 아니라 젊은 층의 시각에서 바라본 것에 그친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영화는 엄청나게 팽창했다고 하지만, 이렇게 한국영화는 우리의 실상과는 거리가 있는, 판타지에만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큰롤 인생>은 너무도 큰 흥분을 안겨 주었다. 이 영화는 두 가지 의미에서 중요하다. 첫째는 노년층의 삶을 진지하게 다루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극영화가 아니라 실제 노인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라는 점이다. 영화의 내용은 간단하다. 영앳하트라는 코러스밴드가 새로운 공연을 위해 연습하는 7주 동안의 풍경을 영화 속에 담아내고 있다. 7주 동안 코러스밴드가 공연을 위해 연습하고 마침내 공연을 하는 것이 내용의 전부이다. 그렇다고 피나는 노력과 성공적인 공연이라는 줄거리를 다루고 있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이 영화의 감동은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영앳하트의 멤버들은 모두 노년층이다. 노인도 보통의 노인이 아니다. 놀라지 마시라. 제일 젊은 사람이 73세이고, 나이가 제일 많은 멤버는 93세이다. 평균 연령이 무려 81세다. 사회생활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이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놀랍다. 그들이 주로 연주하는 곡도 라디오헤드, 롤링스톤즈, 소닉유스 등의 노래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런 곡을 자신들의 스타일로 재탄생시켜 공연을 한다. 영화의 재미는 이들이 준비하면서 겪는 여러 에피소드에서 온다. 박자를 맞추지 못하고 심지어 가사도 까먹는다. 그렇지만 그것이 너무도 유쾌한 웃음으로 이어진다. 

물론 이 영화에 웃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공연을 준비하던 두 명의 멤버가 갑작스럽게 저 세상으로 떠난다. 나이가 많은 멤버들의 밴드기 때문에 이런 사건이 없을 수 없지만, 멤버들은 그 슬픔을 곧바로 이겨내고 연습에 몰입한다. 마지막 장면, 공연을 하고 있는 사이에 죽은 멤버의 유서가 낭독될 때는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다. 삶의 깊은 의미를 깨달은 고인(故人)이 밴드 활동을 하면서 겪었던 좋은 추억을 되새길 때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건강에 이상이 있는 멤버들이 대부분이고, 심지어 수술을 몇 번 받은 이들도 있다. 그들에게 이 공연이 마지막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언제 마지막 공연이 될지 알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열정적으로 노래를 하는 모습은 깊은 흥분을 자아내게 한다.

어쩌면 이 다큐는 소재를 잘 잡았을 뿐, 다큐의 형식은 지나치게 편한 방식을 택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매우 반동적인 방식으로 노년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는 공연을 준비하는 멤버들의 모습, 각 멤버들의 인터뷰, 단장의 인터뷰가 번갈아 이어지는 매우 단순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내레이터는 신의 목소리의 위치에서 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면서 편안하게 관객들에게 이제껏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을 안내한다. 때문에 이 영화는 영화를 보는 내내 노년층의 삶에 대해 깊게 반추할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는다. 단지 화면과 내레이터를 따라가면 된다. 숱한 비판을 받은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황혼의 인생들이 펼치는 이야기에 감동을 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분명 이 영화는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게다가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 이것은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젊은 세대들은 이런 사실을 망각하고 그들을 홀대한다. 언제나 청춘이 아님은 자명한 사실임에도 자신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노인들에게도 삶이 있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발견’했다. 너무도 열정적으로 음악에 몰입하는 그들의 삶은 정말로 로큰롤 인생이었다.

영화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스타가 등장하는 극영화가 있는가 하면, 저예산으로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는 패기 있는 영화도 있고, 영화로 예술의 형식을 실험하는 극단적인 영화도 있다. 영화가 인생의 실상을 예리하게 포착할 수 있는 매체라는 것을 끊임없이 실험하는 영화도 있다. 언젠가 만난 다큐 감독은 자신은 극영화를 보지 않는다고, 아니 보지 못한다고 했다. 극영화를 보면 너무 시시해서 동일시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큐는 모든 것이 현실에서 직접 일어난 사건이다. <로큰롤 인생>에서 공연을 준비하다가 돌아가신 두 분의 노인은 연기로 죽은 것이 아니라 진짜로 돌아가신 것이다. 때문에 그들이 없는 무대가 더욱 가슴 저리게 다가온다. 추운 연말에 이 영화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행운이다.




강성률 _ 영화평론가, 광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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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4 16:20

안티가족 다큐, <쇼킹 패밀리>

<쇼킹패밀리>는 가족이라는 혈연 공동체의 틀 안에서 자유롭지 못한 ‘개인’들의 진정한 독립을 지지하는 영화다
▲ <쇼킹패밀리>는 가족이라는 혈연 공동체의 틀 안에서 자유롭지 못한 ‘개인’들의 진정한 독립을 지지하는 영화다

안티가족!을 부르짖는 세 명의 여자들이 있다. 어떤 이에겐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허울 좋은 족쇄일 뿐이고, 어떤 이의 꿈은 ‘이혼’이다. 얼핏 황당하게 들리는 이 이야길 어떻게 받아들여야할 것인가. ‘쇼킹패밀리’라는 제목만 보고는 대한민국 아줌마들의 온갖 욕을 다 들으면서도 부동의 시청률 1위를 지키는 주말 드라마의 콩가루 집안 이야기를 스크린에 담으려는 걸까, 아님 새로운 형태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일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극장의 불이 꺼지길 기다렸다. 두 시간 후, ‘쇼킹’함 보다는 ‘시원’함을 느끼며 극장을 나왔다.

‘가족은 늘 개인의 존재를 망각한다’

<쇼킹패밀리>는 가족이라는 혈연 공동체의 틀 안에서 자유롭지 못한 ‘개인’들의 진정한 독립을 지지하는 영화다. 물론 가족 안에서 행복한 사람들에게까지 가족이 족쇄라는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라는 틀이 때로는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폭력적인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소위 ‘정상적인 가족’이라는 틀을 깨고 싱글맘으로 살아가는 경순에게 사회는 ‘틀렸다’는 잣대를 들이댄다. 싱글맘으로 살아가는 현재의 삶이 경순 개인에게는 더 행복한 삶인데도 불구하고 사회는 그녀와 그녀의 딸에게 ‘결손 가정’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학교에서는 아무 생각도 없이 경순의 딸에게 아버지에 대한 질문지를 들이민다.
 
가화만사성?

국가가, 사회가 개인의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없듯이 가족이 구성원 개개인의 행복을 보장해 주진 못한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아직도 ‘가화만사성’을 외치며 가족의 행복이 곧 개인의 모든 행복을 책임질 것이라는 착각을 한다. 그리고 강요한다. 관습화 된 것은 무섭다. 그렇게 배우고 컸기 때문에 중년의 여성이 호주제 폐지 반대를 외치며 “예부터 곳간 열쇠는 안방 차지였으며 지금도 남편들 월급 통장은 여자들 수중”에 있다며 “그만하면 대접 받는 거 아니냐”고 외칠 수 있는 것이리라. 또 워킹맘의 밤10시 귀가는 ‘나가라’는 시어머니의 말을 들어 마땅한 것이 된다.

유난히 혈연주의, 가족주의에 목매는 한국 사회에 해외 입양아 빈센트는 일침을 놓는다. “가장 큰 아이러니가 뭔 줄 알아? 한국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다들 죽고 못 사는 것이 뭐야? 가족. 그런데 왜 해외 입양 1위인거야?”

이기적이라고?

영화는 한 가정의 ‘엄마’가 되는 것을 자신의 가장 큰 가치로 여기는 삶을 폄하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인다. 다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분명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틀이 그들 ‘개인’의 존재를 가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 엄마로서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관습화된 가치인지, 정말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인지는 돌아봐야 할 것이다. ‘다들 그렇게 산다. 남들 다 가족을 위해서 조금씩 희생하면서 사는데 그걸 못하겠다는 건 이기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세영의 어머니는 전업 주부로 세 딸을 키워냈지만 남편이 명예퇴직하자 낮에는 남의 집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밤에는 손 하나 까딱 않는 남편과 딸을 돌본다. 그러면서도 아무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히 여긴다. 이 땅의 수많은 어머니들이 그래왔으니까. 이런 생각들이 더 이기적으로 느껴지는 게 과연 이상한 걸까.

<오!인디풀영화제> ‘보다 자유롭게’ 섹션 네티즌 선정작으로 뽑힌 <쇼킹 패밀리>는 영화제가 끝나는 20일까지 단 한 번의 상영을 남겨두고 있다. 영화를 보려면 14일 오후 4시 홍대 시네마 상상마당으로 발걸음을 서두를 것. 많은 네티즌들에게 사랑을 받은 작품이니만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 2008-11-13 오후 4:16:52 컬처뉴스 김나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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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9 15:35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 - ①]'한국독립영화의 아버지' 김동원 감독

10월 23일 푸른영상 사무실에서 김동원 감독을 만났다.
▲ 10월 23일 푸른영상 사무실에서 김동원 감독을 만났다.

한국독립영화협회(한독협)가 10주년을 맞았다. 한때 생소하기만 했던 ‘독립영화’라는 존재의 정체성 확립과 자리매김의 역사는 한독협의 10년 역사와 나란히 놓여져 있다. 영화인들이 자본과 검열로부터 ‘독립’해 진정한 의미의 ‘표현의 자유’를 누리기까지 한독협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줬다. 컬처뉴스는 한독협 탄생 10년을 맞아 독립영화계의 10년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시대 한독협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해 보고자 감독, 배우, 활동가, 제작자 등 독립영화인들 10명의 인터뷰를 기획했다. 이번 기획은 한독협 사무국과 팀블로그 필름온이 함께해 이루어졌다.

첫번째 인터뷰 대상자는 '한국독립영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송환>의 김동원 감독이다. 여러모로 한국 독립영화계의 상징적인 인물인 김동원 감독은 한독협의 초기 모습과 현재의 지점을 역사적인 맥락에 위치시켜 새롭게 보게해 준다. 그가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에 입문하고 활동하게 된 계기들 역시 놓치기 아까운 역사의 기록이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 바란다. / 편집자.

독립영화, 무에서 유를 만들다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소감 한 마디 해 달라.

김동원 감독: ‘벌써 10년인가’하는 생각이 든다. 내 나이 또래는 세월이 빨리 가니까.(웃음) 한편으론 독립영화 활동한지 오래됐는데 10년밖에 안됐나 싶기도 하고. 내가 초대 이사장을 하면서 한독협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현재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조영각 사무국장하고 어린 사무원은 그 때 월급 20만원씩 받고 시작했다.

독립영화계에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예상했던 것인가. 

이런 날이 올지 몰랐다. 지금은 미디어 센터, 독립영화전용관, 독립영화 제작지원제도 등이 생겼다. 이런 건 외국사례로 말로만 듣던 것들인데, 일반 영화계에서 질투할 만하다.(웃음) 막 없던 게 생기고 점점 늘어나니까, 있던 게 없어진 사람들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독립영화계만 편애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근데 지원금 총액으로 보면 굉장히 작다. 

그만큼 독립영화계가 가시적인 변화를 일으켰다는 반증이 아닌가 한다.  

무엇보다 10년 전만해도 독립영화라는 말을 할 때 약간 켕기는 게 있었다. 그때 독립영화하면 반정부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당시 영화진흥공사(현 영진위)에 독립영화라는 말이나, 독립영화 지원은 없었다. 또 영진위 1기 위원회 생기고도 몇 년간은 없었고, 그 이후에 생겼다. 독립영화라는 단어를 공식화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 강한섭 위원장이 다시 뺀다고 한다. ‘작은 영화’ 이런 식으로 바꾼다고.

작은 영화라... 김동원 감독이 다큐멘터리를 시작한 게 20년이 지났는데, 독립영화란 말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난 원래 상업영화 지망생이었고, 독립영화란 말도 없었다. 1980년대 얄라성이나 장산곶매 등에서 영화를 만들고, 미국식 개념의 이름을 붙여준 거다. 사실 미국식 개념과는 많이 다른데,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사실 나는 독립영화를 하려고 한 건 아니다. 상업영화 조감독을 했는데 이게 나랑 안 맞더라. 당시 전두환 정권 때 이런저런 일이 많았는데 방송에서는 누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때 내가 결혼식 비디오를 찍은 아르바이트를 했을 땐데, 사회의 모습을 찍어서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날라리, 가장 감동적인 올림픽을 만나다

원래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나. 김동원 감독의 젊은 시절이 궁금하다.

날라리였다. 데모도 안했고.(웃음) 1970년대에 학교를 다녔는데 당시엔 운동권이란 개념도 없었다. 언더그라운드에는 좀 있었는데 그때는 몰랐다. 난 연극 많이 하고, 놀기 좋아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 때 무의식적으로 뭔가 답답함을 느꼈다. 고등학교 때는 ‘왜 우리학교는 데모 안하지? 데모하면 휴교하는데’하면서 데모가 나길 원하기도 했다. 출처가 불분명한 유인물 만들어서 뿌리기도 했다. 휴교 때문에. 그런 걸 보면 약간 반골 기질이 있었나 보다. 그런 게 정리가 안 되다가 상계동 가서 정리가 됐다. 사회과학 책도 한두 권 읽어봤지만 전혀 안 와 닿았는데, 상계동 가서 구조적 모순이라는 걸 느끼게 됐다.

상계동에 어떻게 들어간 건가.

상계동 철거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내가 아는 신부님이 거기 들어가 계셨는데 강제철거 당하는 장면을 증거자료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하셨다. 하루만 와서 촬영해달라고 부탁을 하셨다. 그게 내 팔자를 바꿀 줄을 몰랐다.

처음 <상계동 올림픽>을 촬영할 때 ‘다큐멘터리는 이런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었나.

처음에는 관심도 없었고, 또 당시 우리나라에는 필름으로 만든 다큐멘터리도 거의 없었다. 대학 영화과에서도 단편영화제를 했지만 다큐멘터리는 없었다. 서울영화집단에서 8미리 필름으로 십 분짜리 다큐멘터리를 1985, 6년인가에 만든 게 전부였다. 그저 머릿속에는 TV에서 본, ‘추적 60분’유의 다큐멘터리만 있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그런 관성들을 떨쳐버리기 힘들었다. 그런데 외국 나가서 여러 다큐멘터리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보니까 ‘아 다큐멘터리가 할 만한 거구나’ 싶었다. 상계동 시절에는 전혀 몰랐는데, 가서 보니까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작품들이 있었다. 그 때 ‘다큐멘터리의 영역이 이렇게 넓구나’ 했다.

그 이후에 다큐멘터리의 매력을 느낀 건가? 어떤 매력을 느껴서 다큐멘터리를 계속하게 된 건가.

조연출을 한 4년 정도 했는데, 현장이 지겨웠다. 촬영할 때도 긴장감을 못 느꼈다. 그런데 상계동에서 철거 현장을 찍을 때, 특히 위험한 상황에서 철거 깡패들이 위협해도 전혀 무섭지가 않은 거다. 카메라가 알아서 막 돌아다니는 신들린 경험을 했는데, 그게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다. 촬영하는 게 이런 거구나. 또 철거, 투쟁 현장 모습들이 외부에 알려지기 힘든 상황에 <상계동 올림픽>을 발표했는데, 엉성하게 만들었지만 대학가에서 상영되고 그러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 때 다큐멘터리의 굉장한 힘을 느꼈다.

그래도 뭔가 손에 잡히지 않을 시절,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았을 거 같다.

<상계동 올림픽> 하면서 사회가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촬영할게 많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외국영화 직배 관련해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는데 정지영 감독이 나에게 ‘다큐멘터리를 해라. 극영화 하는 사람은 많지 않냐. 넌 잘할 것 같고, 너라도 해야 한다’라고 하더라.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닌 것 같고, 싫지도 않고, 또 극영화가 잘 안 풀리고 해서 다큐멘터리의 길을 걷게 됐다. 그렇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 길을 걷게 됐다.

총 제작기간만 12년이 걸린 <송환>은 비전향 장기수를 다룬 다큐멘터리로, 2004년 선댄스영화제 '표현의 자유상'을 시상하기도 했다.

투사? 난 그런 사람 아니다

1990년대에 <송환> 촬영하랴, <명성 그 6일의 기억> 발표하랴 정신없었을 거 같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부터 장기수들이 출소하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경험한 사람이니까 저분들의 증언은 기록할 필요가 있다 생각해 촬영을 시작했다. 사실 그걸 어떻게 쓸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에 장기수들의 삶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어머니들이 함께 벌인 석방운동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몇 편 나왔다. 그 때까지만 해도 <송환>에 대한 생각도 없었고, 그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다. 사실 내가 오며가며 찍은 거지 찍어야겠다 해서 찍은 게 별로 없었다.(웃음)

 그럼 <송환>은 어떻게 나오게 된 건가.

1999년 초부터 송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그들의 송환을 돕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사회적으로 이슈화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남북정상회담하면서 송환이 급물살을 타면서 엄청 급해졌다. 그 다음 6월부터 9월까지는 정신없이 찍었다. 그 전에는 판판히 놀다가.(웃음)
 
1990년대 들어오면서 한국 다큐멘터리의 파이가 커졌다. 주로 어떤 사람들이 촬영했고 어떤 관심을 가졌나.

지금도 우리나라 다큐멘터리는 액티비즘, 즉 투쟁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1980년대에는 당연히 그래야한다고 생각했고. 서울영상집단, 노동자뉴스제작단(이하 노뉴단) 등의 집단은 일종의 운동으로 한 거다. 노뉴단은 노동운동, 서울영상집단이나 민족문제연구소, 민족영화연구소 등은 그 외 사회문제를 다뤘다. 한국의 다큐멘터리는 태생단계의 특수성 때문에 액티비즘이 강하다.

김동원 감독은 어느 편에 속했나.

난 아무데도 속해있지 않았다. 굳이 얘기하면 빈민운동 쪽인데, 빈민지역 청년들과 활동을 하면서도 작업은 혼자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내가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정체성은 없었다. 영화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는 현장의 기록이고, 일상이었다. 빈민운동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했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느 순간에 찾았나.

나는 아직도 감독이라는 말을 안 좋아한다. 난 다큐멘터리에서 감독이 너무 앞서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무리 감독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해도 감독이라고 부르고, 또 ‘그럼 뭐라고 부르냐’고 하니까 이젠 그냥 ‘맘대로 부르라’고 한다.(웃음) 감독이라는 말이 옛날보다는 많이 거슬리지는 않는다. 옛날에는 엄정한 사실성, 객관성 이런 것들이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래야 하는 줄로 알았는데 요즘에는 다큐멘터리도 연출을 해도 괜찮다는 게 일반적이니까. 내가 아무리 연출을 안 하려고 해도 할 수밖에 없다.

작업을 하면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경우도 많이 있었겠다.

글쎄, 잡혀갔던 거?(웃음) 푸른영상 하면서 몇 번 잡혀갔다. 1993부터 2년 터울로. 그 때만해도 영화법이 손질되기 전이고, 장기수들을 찍는다는 게 시찰 대상이었다. 안기부 직원한테 매일 안부전화를 받았으니. 그쪽에서 조작간첩 사건들과 엮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잘 안됐다. 1996년에는 심의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음란비디오 단속법을 걸고 넘어졌다. 참, 음란비디오라니. 그 외에도 청소년 보호법, 국가 보안법 등 다양하게 조사받았다. 다행이 변호사를 잘 만나서 기각시켰다. 

투쟁의 역사다.(웃음)

투쟁은 무슨.(웃음) 난 투쟁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냥 내가 그걸로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잘못한 것도 없으니 당당한 거다. 심의를 받으려면 10분에 얼마 돈을 내야 하는데 내가 골이 비었나.(웃음) 여하튼 몇 번 들어갔다 나오면서 이미지가 그렇게 됐는데, 내가 용감해서 싸운 건 아니다. 그냥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 때문에 그런 거 같다.

김동원 감독은 2004년 선댄스영화제 표현의 자유상(<송환>) 등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한국 다큐멘터리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이면의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면서 주변의 따가운 시선도 받을 거 같다.

글쎄. ‘왜 이렇게 구질구질한 얘기만 하냐’는 사람은 있지만 따갑지는 않다. 당연히 알려야 할 이야기고. 지금은 방송에서 그런 얘기를 많이 하지만, 그때만 해도 전혀 안했는데 당연히 나라도 해야지 그랬다.


한독협. 힘든 시작, 지금은 괜찮아 무엇이든!

한독협이 세워지기 전, 독립영화인들은 어디를 구심점으로 모였나.

1991년에 독립영화협의회라는 단체가 세워졌다. 내가 의장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거기는 구속이 너무 많았다. 그 때만 해도 운동한다는 기분으로 작업을 했고, 모여 봤자 운동하는 독립영화인들만 모이는 거 같고. 1990년대 중반 넘어가고, 독립영화계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다양한 독립영화인들과 함께 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립영화가 뭐냐’ 하는 정체성 논란도 있었고, 일련의 산통 끝에 한독협이 생겼다.

한독협이 생기고 어려움은 없었나.

내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웃음) 앞서 얘기한대로 한독협의 정체성 찾기가 가장 힘들었다. 한독협 초기에 독립영화협의회나 민예총 영화분과 등과 관계 설정하는 게 어려웠다. 1996년부터 한독협 설립 논의를 시작했으니까.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이 협회를 만든다는 거에 의구심 어린 시선도 있었고. 하여튼 초기에 발동 거는 게 좀 어려웠는데 발동 걸고 나서는 최근까지는 잘 굴러왔다고 생각한다.

영진위 3기 위원이었다. 어떻게 하게 됐나.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가면 회의만 많고, 그렇다고 독립영화에 관한 회의만 하는 것도 아니고. 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는데 가서 목소리를 내야 하니까, 가야 된다고 하니까 갔다. 별 재미는 없었다.(웃음)

어떤 목소리를 내고 싶었나.

목표가 너무 분명했다. 독립영화전용관 만드는 거. 10년 동안 만들자는 말만 있었지, 만들지 못했다. 더 이상 늦출 수 없었다. 난 다른 건 못해도 전용관 하나 만큼은 만들겠다는 각오로 들어갔다. 다른 영진위 위원들이 너무 적나라하게 의도를 내비치는 거 아니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런 독립영화인들의 노력 끝에 인디스페이스가 생겼다. 근데 인디스페이스가 위치한 중앙시네마 재건축 때문에 몇 년 안에 장소를 옮겨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럼 다른 곳을 찾아봐야겠지. 3기 영진위 때 미디어센터, 시네마테크, 독립영화전용관을 다 포괄하는 500억 규모의 복합상영관을 짓기로 서울시와 결정했다. 그런데 강한섭 위원장이 무슨 아시아센터를 건립한다고 한다. 지금 어떻게 진행 중인지 모르겠다.

규모를 500억에서 1,000억으로 늘린다고 들었다. 그런데 규모가 커지고, 새로운 사업계획을 만들면 그 만큼 그 과정이 늦춰지는 거 아닌가. 현재 미디어센터 미디액트나 서울아트시네마, 독립영화전용관 모두 공간 확보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아무래도 그런 측면이 있다. 음, 어떻게 보면 위기를 겪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어려움을 겪어보면 전화위복의 기회를 맞을 수 있다. 이건 좋은 극장이 생긴다는 측면이 아니라 독립영화인들에게 뭔가 좋은 공부가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하는 말이다.


다른 얼굴, 하지만 우린 가족이다

한독협 홈페이지를 보면 초기에는 게시판에 서로 안부도 묻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영화도 보고, 얘기도 하고, 술도 먹으면서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한독협 10주년을 맞이한 2008년. 지금 가장 큰 고민이 무엇인가.

글쎄. 내가 고민한다고 되나?(웃음) 이제 독립영화가 나름대로 사회적인 위상을 이제 갖게 됐다. 그런데 대안영화로서의 자기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영화가 잘 안 나오고 있다. ‘지금쯤 나올 때가 됐는데’하는 기대가 있는데 잘 그게 쉽지 않다. 예를 들어서 <은하해방전선>등 몇몇 작품은 기대를 많이 했고, 영화도 좋았음에도 불구라고 잘 안됐다. 영화는 관객과 함께 완성된다. 과연 이걸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보게 할 수 있을까. 영화가 안 좋은 게 아닌데, 왜 안볼까. 이런 고민들을 한다. 답 없는 고민.

최근에 등장하는 후배들의 작품들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나.

다큐멘터리만 보자면,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본 <워낭소리>란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좋았다. 나와 스타일은 다르지만 반가운 작품이다. <우린 액션배우다> <우리학교> 등 1년에 한 편씩은 문제작들이 나온다. 한편으론 기쁘고, 한편으로는 ‘아 이런 게 일 년에 열편은 나와야 하는데’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인 코드가 약해지고 있지만 그게 그렇게 아쉽지는 않다. 오히려 열심히 만들고, 진정성이 보이는 다큐멘터리가 1년에 3-4편만 나오면 좋겠다. 인디다큐페스티벌에 70여 편의 작품이 응모됐다고 한다. 아르헨티나만 해도 다큐멘터리 영화제 하면 700여 편이 응모된다고 하는데, 우린 고작 70여 편이다.

요즘 진행하고 있는 작업이 있나.

촛불 문화제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하고 있다. 올해는 촛불이 가장 활활 타지 않았나. 찍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간 건 아닌데, 나가다 보니 찍을 게 보이더라. 뭐 큰 건 아니지만 해야 할 거 같은 마음이 들어서 촛불 문화제에 대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독협의 또 다른 10년을 위한 제언을 해 달라.

제언이라. 아쉬운 건 한독협 홈페이지를 보면 초기에는 게시판에 서로 안부도 묻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물론 욕도 하고.(웃음) 뭔가 공동체적인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커져서 그런지 그렇지 못하다. 사실 이건 사업을 하는 게 아니다. 사업도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하는데.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끼리 식구라는 생각을 하면 좋겠다. 도움도 주고받고, 영화도 봐주고. 이런 커뮤니티가 활성화 되어야 하는데 그런 계기를 못 만들어 주는 거 같다. 여러 영화제가 그런 역할을 했는데 요즘엔 형식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영화도 보고, 얘기도 하고, 술도 먹으면서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 2008-10-28 오전 11:35:02  컬처뉴스 김나라 기자, 필름온 안효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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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8 18:31

내 밥그릇과 네 밥그릇은 다르지 않다 -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농민가> 윤덕현 감독 인터뷰

다큐멘터리 영화 <농민가>의 윤덕현 감독.
▲ 다큐멘터리 영화 <농민가>의 윤덕현 감독.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 <농민가>는 2007년 봄부터 2008년 봄까지 경남 사천시 농민회 회원들의 일상을 담고 있다. 2006년 말, 한미FTA 반대집회를 촬영하기 위해 제주도를 찾았던 윤덕현 감독은 시위 현장에서 사천시 농민회의 여성 회원 김윤진 씨를 만나게 되고, 이후 사천으로 내려가 빈집을 얻어 생활하면서 농민회 회원들의 활동을 영상에 담았다.

<농민가>는 5일 밤 해운대 메가박스에서 첫 상영회를 가졌다. 이어진 감독과의 대화와 뒤풀이의 여독이 채 가시지 않은 다음 날 정오, 해운대 해변에서 감독과 만나 전날 밤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눴다.

일 년간 사천에서 집을 얻어 혼자 살았다고 들었다. 객지에서 혼자 살면서, 그것도 일하는 사람들에게 카메라 들이대면서 영화를 찍는 게 쉽진 않았을 것 같다.

처음에 이집 저집 다니며 카메라를 들이댈 때는 거부감도 많았다. 그런 식으로는 도저히 그분들의 진실된 일상을 담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나도 반 농군이 되어 일했다. 농사짓고, 중참 먹으며 소주 한 잔 하고, 그러다 보니 조금씩 마음을 여시는 것 같았다.

도중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가려 했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 많이 외로웠고, 몸도 힘이 들었다. 특히 겨울밤에 일을 마치고 혼자 있을 때는 너무 힘이 들어 다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사실 이 영화를 다 마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농민회 분들이 정말 많은 도움을 주셨다.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것을 비롯하여 마을의 이런저런 모임에 불러 함께 어울리게 해 주시고 영화 찍는 데 어려운 것 없냐, 일일이 살펴 주셨다. 이 영화에서 내가 맡은 부분은 정말 미미하다. 이것은 농민 분들이 찍은 농민의 이야기다.

농촌이 어렵다는 얘기는 늘 있어 왔던 이야기라, 농촌이 정말 이 정도로 심각한지 몰랐다.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필연적으로 메시지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감독으로서는 좋은 영상, 아름다운 화면에 대한 욕심도 있었을 것 같은데, 이 사이에 갈등은 없었나?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영상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도입 부분에는 농사짓는 장면을 많이 담았고, 나중에 시위 장면과 교차하게 했다. 물론 영상과 메시지 두 가지를 다 담고 싶은 욕심이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 상당히 고민한 부분이다. 최대한 나의 관점을 배제하려고 했지만 나 역시 정치적인 사람이고, 이명박을 직설적으로 비판하고 싶었다. 하지만 투쟁 영상이라는 건 뻔하지 않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서 그 맥락 속에서 자연스럽게 투쟁을 연결시키는 흐름을 가져가자는 생각이었다. 뭐랄까, 업그레이드된 투쟁 영상을 만들 수는 없을까? 그게 고민이었다.

어린 소의 모습을 길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물론 장면만으로는 아름답지만 이게 어떤 맥락일까, 영상에 대한 욕심이 자칫 영화 전체의 메시지와 어긋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장면 장면이 전략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인물들마다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하승원 씨는 축산을 하시는 분이라 당연히 미국 쇠고기 문제와 결부가 된다. 그 장면을 유심히 보다 보면 하승원 씨가 소를 먹이면서 소 울음소리를 내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물론 도살이라는 과정은 피할 수 없겠지만, 키우는 과정에서의 교감이 바로 미국산 쇠고기와의 차이라고 생각했다. 소와 이야기하며 교감을 나누는 모습을 관객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농민 분들이 하시는 말씀 중에, 작물들은 키우는 사람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작물과의 교감은 정말 중요한 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우연히 찍게 된 장면이지만, 이런 느낌이 아닐까, 친근감이나 정이란 이런 게 아닐까, 그게 대량 생산된 수입 농작물과 우리 농부들이 지은 농작물의 차이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잘 몰고 가면 보는 사람의 감정을 아주 격정적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영화는 감정을 터뜨리지 않고, 담담하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경향이었다. 영화적 취향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격앙된 감정도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냥 보여줘도 관객이 알 거라 생각했다. 인물들이 우는 장면들이 많았다. 돈을 벌겠다는 것도 아니고 평생 농사를 해 왔고, 농사를 좋아해서 농촌에 남은 사람들이 정부의 정책에 의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는데 어떻게 억울하고 답답하지 않겠는가. 카메라 들이대면 영화 아닌 게 없다. 하지만 감정을 몰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몰고 가지 않아도 보는 사람이 충분히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영화적 감정의 정점에 강기갑 의원의 당선 장면이 있었다. 의도된 구성인가?

의원하나 뽑으면 승리한 것인가, 그 승리가 영화의 결말이 될 수 있는가? 정치도 일상이고 참여도 일상이라는 측면에서 담은 장면이다. 보이는 것과 실제의 일상은 다른 것이다. 정치 활동과 농민 활동은 괴리된 것처럼 느껴지는데, 일상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괴리되어 보이는 것들 간의 연관성이다.

선거 장면 얘기가 나온 김에 하나 더 질문하자면, 대통령 선거 장면에서 농민회원이 “농민을 생각하는 후보를 찍자”고 하자 한 아주머니가 “농민만 생각하면 되겠나, 나라 전체를 생각해야지”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어제 극장 안에는 외국인 관객들도 많았다. 대내적으로도 대외적으로도 밥그릇 챙기기로만 보일 수도 있지 않겠나.

우선 이익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부터 생각해 보자. FTA도 이익이 있다. 경제 발전, 국익, 그것이 나를 잘 살게 하는 측면도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말에는 왜곡되어 있는 부분이 많다. 다 같이 잘 살자, 이런 말은 사실 지배 이데올로기의 전형이다.

농민 아닌 사람이 보기에는 밥그릇 챙기기일 수 있다. 스크린쿼터는 어땠나? 똑같은 비판이 있었다. 그렇다면 밥그릇은 챙기면 안 되는 것인가? 안 된다는 생각이 오히려 이기적이다. 그건 다른 사람들과 나를 분리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개개의 삶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나의 밥그릇과 너의 밥그릇은 한 밥상에 놓여 있다. 하나의 싸움은 하나의 싸움이 아니다. 연대의 싸움이고, 너를 위한 싸움이다.

먹을거리가 수입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먹을거리가 내 통제에서 벗어난 곳에서 생산되는 데 어떻게 안심할 수 있겠는가. 농민들이 하는 투쟁은 그들 밥그릇 챙기기이기도 하지만 내 먹을거리를 내 통제 범위에 두느냐 아니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들의 싸움을 나쁘게 보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내 밥그릇과 너의 밥그릇은 다른 게 아니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여태껏 투쟁이라는 말의 어감 때문에라도 투쟁이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공화국이라는 말의 한자를 풀어보면 한솥밥 식구, 함께 밥을 먹는다는 뜻이다. 내가 남보다 많이 먹겠다. 이건 한솥밥이 아니다. 공화국은 한 솥밥이다. 누가 많이 먹으면 누군가는 적게 먹어야 한다.

이익은 당연히 추구해야 한다. 하지만 이명박식의 공화국은 공동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지금의 논리는 남의 이익을 나의 이익으로 취하겠다는 것이다. 정당한 경쟁, 룰, 좋은 말이긴 한데, 자기 제어가 안 되고 있지 않나. 이윤을 향한 경쟁은 암세포처럼, 공생해야할 전체 속에서 자신의 몸만 확장하다가 결국 자신도 공동체도 다 죽이고 만다.

영화 내용 중에, 농사지을 여건이 안 되면 농사를 접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말이 나온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그렇다. 싸게 사 먹을 수 있는 것을 비싼 돈 주고 사 먹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지 않은가?

합리라는 사회적 합의에 따른다면, 농민들이 자기 농사를 짓다가 답이 안 나오면 접어야 한다. 농업이 수행하는 기능은 산업 그 이상이기 때문에 이윤논리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공공논리에 의해 지켜줘야 한다는 합의는 없다. 합리는 싸면 수입하고 소비한다는 합의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궁극적인 합리는 만물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통념상의 합리는 돈 안 되면 농사 접는 것이다. 이게 합리지만 정말 합리적인 것인가? 때리면 맞는 것이 당연하다. 이것이 합리인가? 합리 안에는 가치 판단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 누구를 함부로 때리면 안 된다, 이게 합리다.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회의장에 앉아서 준비된 자료를 검토하며 서류에 도장 찍는 것은 합리이고, 무지렁이 땅꾼들이 시청 앞에 모여 깃발을 흔드는 것은 합리가 아닌가? 농사를 접을 상황이라면 접는 것이 정황상 맞지만, 농사가 개인이 돈 버는 이상의 의미가 있고, 그것이 나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마음에 두어야 한다. 시대의 중심이 변방으로 밀려나가는 이런 현상이 내 삶에서 똑같이 되풀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는 이런 것이 합리라고 생각한다.

 



* 2008-10-07 오후 3:10:12  컬처뉴스 이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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