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0.02 14:43

여성주의에서 에코페미니즘으로 - 윤석남 개인전 《사람과 사람없이》

윤석남 개인전 《사람과 사람없이》전이 아르코 미술관에서 11월 9일까지 열린다.
▲ 윤석남 개인전 《사람과 사람없이》전이 아르코 미술관에서 11월 9일까지 열린다.

1,025개의 눈빛들. 차마 맞서보기 애처롭도록 퀭한 눈빛이 있는가하면 천진난만한 발랄함이 있다. 맘이 시리도록 쓸쓸한 눈빛이 있는가하면 무덤덤한 체념의 기운이 맴돈다. 아르코 미술관에서 26일 개막한 윤석남 개인전 《사람과 사람없이》전에는 1,025개의 나무조각이 설치되어 있다. 자세히 보면 어떤 작품은 희미한 형상만 남아있고, 윤곽조차 흐릿한 작품마저 보인다.

놀라지 마시라. 전시장을 가득 채운 작품들은 모두 개를 조각한 것이다. 작가가 3년 동안이나 자신의 동생과 함께 나무를 자르고 깎고, 그림을 그려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유기견을 주제로 해서일까. 작품들에서는 어딘가 모르게 아픔을 간직한 표정이 드러난다.

작가가 유기견을 주제로 작업을 하게 된 것은 5년 전의 일이다. 신문에서 1,025마리의 유기견을 거두어 기르는 이애신 할머니의 기사를 본 작가는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의 느낌을 작가 자신은 “인간이 너무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한다. ‘애신의 집’을 직접 방문한 후부터 긴 작업이 시작됐다. 작가는 그때의 충격이 너무 생생해 차마 다시 애신의 집을 다시 찾지는 못했다고 전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우선 그 많은 수의 작품에 놀라고 개들의 표정과 형태가 그토록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는 데 놀란다. 1, 2층으로 구성된 전시실의 1층은 무채색의 작품들이 어두운 조명 아래 설치되어 병들고 아픈 개들을 보여준다. 반면 2층은 강렬한 색상표현으로 건강하고 씩씩한 개들을 표현했다. 작가가 애신의 집을 찾았을 때 150여 마리의 개들이 한꺼번에 작가에게 달려드는데 그렇게 튼튼하고 예쁜 개들마저 버림을 받는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웠다고 한다. 나머지 개들은 밖에 내놓지 못하고 별도의 막사 안에 들어있었는데, 사람을 봐도 꼼짝 않고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살아있다는 자각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1층에 전시된 작품 중 흐릿한 형태나 외관만 남은 작품들은 생사마저 불분명한 개들을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5년 동안 작품을 제작하며 버려진 존재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던 작가는 자연스레 채식을 하게 됐다. ‘남의 살을 먹는 일’이 끔찍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윤석남은 한국의 여성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다. 버려진 나무와 빨래판으로 어머니와 여성을 표현한 그의 작품은 미술에 관심이 적은 이라도 한번은 접해봤음직한 이미지다. 정규미술교육을 받지도 않은 그녀는 나이 마흔에 미술을 시작해 30년 동안 여성미술을 꾸준히 실천해 왔다. ‘실천’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은 작가가 개인 창작에만 머무르지 않고 ‘또 하나의 문화’ 동인, 여성문화예술기획 이사장, 페미니스트 잡지 ‘이프’의 발행인 등 다양한 사회적 활동 속에 자신의 작업을 위치시키며 활동의 폭을 넓혀왔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 역시 그런 측면에서 자연스러운 확장으로 느껴진다. 유기견이라는 주제가 여성주의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돌봄노동’이라는 시대의 화두에 걸맞는 인식과 실천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꼭, 유기견만의 문제가 아니라 소외되고 버려진 존재, 소수자와 약자의 현실이 작품 안에 고스란히 배어 있는 것은 작가의 지향과 활동이 작품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에코페미니즘(생태여성주의)를 표방하지는 않지만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생태여성주의의 지향을 공유하게 됐다는 것을 전시는 보여주고 있다.

2층 전시장 한켠에는 ‘윤석남의 방’이 설치되어 작가의 과거 작업을 슬라이드로 감상할 수 있으며, 한국 페미니즘 미술과 생태여성주의에 대한 주요 문헌을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는 전시와 관련된 프로그램들이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 26일 전시개막 당일에는 김금화 만신이 오프닝 퍼포먼스로 ‘진혼굿’을 열며, 전시기간 중인 10월 18일(토)에는 2001년 타계한 일본의 미술사학자 지노 가오리 교수의 추모강연이 열린다. 추모강연에는 윤석남 작가가 직접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강연할 예정이다. 10월 11일(토)과 24일(토) 오후 5시에는 아르코미술관 세미나실에서 야생동물 교통사고에 대한 다큐멘터리 <어느날 그 길에서>(황윤)와 생명에 대한 성찰을 담은 이형석의 단편영화 <호흡법, 제2장>, <155마일>이 상영된다.

전시는 11월 9일까지 계속된다. 입장료 어른 2,000원, 어린이 1,000원. 문의 아르코미술관(02-760-4724)



  
* 2008-09-26 오후 3:51:44  컬처뉴스 안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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