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4.13 16:40

악마의 터널_로타이 슈바거 석탄 광산

[남미액션투어]④칠레 _ 콘셉시온
                                                                                                  김강 _ 프로젝트 스페이스 LAB39 디렉터
광부들은 지하갱도를 지옥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곳에는 악마의 터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갱도의 입구에는 1884년부터 1976년까지 영업했음을 알려주는 숫자가 쓰여 있다.
▲ 광부들은 지하갱도를 지옥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곳에는 악마의 터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갱도의 입구에는 1884년부터 1976년까지 영업했음을 알려주는 숫자가 쓰여 있다.

칠레 산티아고에서 서남방향으로 500KM를 가면, 콘셉시온(Concepción) 시에 도착하는 데, 로타이 슈바거 광산(이하 로타 광산)은 이 도시의 바닷가에 자리한다. 콘셉시온은 70년대의 학생운동이 발발했던 곳이자,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 선거에서 결정적인 지지를 획득했던 곳이다. 

『칠레의 모든 기록』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장소를 방문하여 촬영하고자 했던 2006년, 잠깐의 시간을 내어 김윤환, SP38과 이 도시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약 6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콘셉시온은 도시라기보다는 작은 읍내 같은 느낌을 풍겼다. 뜨거운 태양빛 아래 인적은 드문 마을. 이 마을의 작은 호텔에 여정을 풀고 SP38과 우리는 각자의 길로 헤어졌다. 읍내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물어물어 로타 광산 입구에 도착했다. 분홍색 와이셔츠를 입은 멋쟁이 신사가 내릴 곳을 상세히 설명해 주더니 우리와 같이 내린다. 잠깐 머뭇머뭇 하더니만 우리에게 자신이 로타 광산의 가이드를 해 주겠다고 한다. 감사! 언덕에 위치한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아래로 내려오는데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광산은 언덕과 바다 그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태백이나 사북 등 산속 광산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바닷가 탄광은 초현실적인 느낌이었다.

로타 광산이 있는 바닷가 마을 풍경


악마의 터널

로타 광산의 입구에는 <Chiflón del Diablo>라는 간판이 크게 쓰여 있다. 분홍 와이셔츠의 가이드는 ‘악마의 터널’이라는 뜻이라고 알려준다. 지하갱도를 이곳의 광부들은 지옥으로 여겼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라는 것이다. 이 광산은 1884년에 개발되어 1976년까지 탄광으로 기능했다. 현재는 박물관처럼 만들어서 석탄을 캐던 당시의 상황을 전달하고, 갱도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전문 가이드가 안내한다. 한 쪽 팔이 절단된 전직 광부 출신 가이드는 열심히 우리에게 이것저것 설명한다. 에스파뇰로... 그러면 분홍 와이셔츠의 아저씨는 우리에게 영어로 설명을 한다. 그러면 나와 김윤환은 한국말로 서로 이해한 영어를 해석하면서 이 광산을 탐색했다. 3개 국어가 동시에 탄광 안을 맴돌았다.   

로타 광산 입구

로타 광산은 바다 밑으로 400M가량 들어가서 석탄을 캐는 탄광이다. 체험이 가능한 갱도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전등이 달린 헬멧을 착용했다. 약간 경사진 계단을 걸어 갱도 입구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입구의 햇빛이 멀어지자 우리는 헬멧에 달린 전등의 불빛만 의지해야 했다. 서로의 헬멧 전등 불빛에 의지해 도시락을 먹고 있는 장면을 그린 황재형의 그림이 순간 떠올랐다. 머리가 닿을락말락한 갱도를 걸어서 지나가다 150M, 200M라는 간판을 보았다. 지상에서부터 내려온 지점의 표시이다. 더듬더듬 걸어가니 갑자기 수직 구멍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구멍에는 철제 사다리가 약 30M가량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이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바라만 봐도 아찔한 높이, 또한 사다리는 안전하게 고정되어 있는 거 같지 않았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저 아래로는 도저히 못 내려가겠다고 버텼다. 가이드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그러면 모든 일행은 내려갈 테니 나는 혼자서 아까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라고 한다. 헉~! 물론 이곳까지 온 길은 하나이다. 그냥 뒤를 돌아 걸어가면 입구에 도착하기야 하겠지만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갱도의 암흑은 고소공포증 따위는 순식간에 날려 버릴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가이드가 먼저 내려가고 내가 두 번째다. 아니나 다를까, 철재 사다리는 수직 터널에 잘 고정되어 있지 않아 사다리를 밟을 때 마다 덜커덩 거린다. 사다리를 내려가는 시간이 천금과도 같이 느껴지고, 이 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다녔을 광부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바다 밑 300M 이상 내려갔다.

사다리를 내려오니 300M라는 간판이 보인다. 우리가 땅 아래로 300M 이상 내려왔고, 이 곳은 바다 밑이라고 한다. 약간 경사진 갱도를 따라 내려가자니 이제는 머리위로 바람이 조금씩 느껴진다. 바다 밑에서 불어오는 바람. 이 바람은 탄광이 활황이었을 때는 광부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 바다 밑 천연가스가 바람을 통해 갱도로 유입되다가 순식간에 불이 붙기도 했다는 것이다. 천연가스+석탄, 왜 이곳을 ‘악마의 터널’이라고 하는 지 실감했다. 갱도의 중간 중간에는 이런 바람을 막기 위해 나무문이 설치되어 있다. 석탄을 실은 차가 이동하고 나면 이 문을 닫아서 천연가스가 갱도 전체로 퍼지지 않도록 차단하는 역할을 하는 문이라고 한다. 문 옆에 붙어 서서 문을 열고 닫고 하는 일은 모두 어린이들의 몫. 어른 한 사람이 채 허리를 펴기도 힘든 갱도에서 적당히 몸집이 작은 어린이들이 날렵하게 이 일을 잘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의 옆에는 쇠사슬이 매달려 있다. 문 관리 어린이가 달아나지 않도록 발에 쇠사슬을 채웠다고 전한다. 암흑천지의 갱도 안에서 희미한 전등에 의지한 10살이 채 안 된 어린이가 하루 종일 발에 쇠사슬을 달고 문을 여닫았다. 이 어린이들 중 대부분은 시력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어른들만의 장소라고 생각했던 탄광에서 어린이의 흔적을 느끼게 되다니... 지각적 현실과 감각적 현실의 차이를 실감했다.
 
갱도에서 수직으로 올라가는 낡은 철재 엘리베이터를 타고 순식간에 태양 아래로 올라왔다. 낡은 엘리베이터는 당시 사용하던 것 그대로라고 한다.

또 하나의 작은 악마의 터널. 덜컹거리던 철제 사다리. 이곳을 통과해야 밖을 나가는 길이 있다.

천연 가스를 막아 주던 나무문에 쓰인 숫자. 이 문을 어린이들이 열고 닫았다.


광부들의 삶 재현

주변을 둘러보니 당시 광부들이 살았던 집을 복원한 건물이 눈에 띈다. 판자로 만들어진 2층집. 그곳에 위치한 가게에 들어가니 현대의 것이라는 느낌이 안드는 물건들이 놓여져 있다. 이 곳은 Marcelo Ferrari 감독이 2003년에 제작한 <Sub Terra>의 영화제작을 위하여 만든 세트다. 영화 제작이 끝나고도 세트를 유지하여, 방문객들이나 학생단체관람객에게 역사를 알리는 곳으로 기능한다고 한다. 이곳에서 판매하는 엽서를 보니 아까 타고 올라왔던 엘리베이터 앞에 8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이가 같이 찍힌 사진이 있다. 그 어린이가 아마도 갱도 안에서 나무문을 여닫았을 것이다. 그 아이는 시력을 잃었을 지 어떨지..... 그 아이는 쇠사슬을 풀고 탈출하고자 했을지 어떨지.... 그 아이의 평생의 삶이 이 탄광과 함께 했을지.... 그 아이는 어른으로 성장했을지 어떨지.... 막막한 감정이 들었다. 

Sub Terra 영화촬영을 위해 지어진 당시의 집들.


시를 존경하는 광부들 

<악마의 터널>이라는 별명이 붙은 로타 광산은 전통적으로 빈곤 때문에 소요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땅속에서 캐는 물질만 다를 뿐이지 당시 사기업에 의해 개발된 탄광이나 초석 광산들은 광부들의 열악한 노동현실과 빈곤 문제들을 언제나 야기한다. 네루다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아옌데 대통령 후보의 지지연설을 하러 로타 광산의 노동자들을 만났던 일화를 평생 잊을 수 없는 의식이었다고 기억한다. 당시 약 1만여 명의 광부가 참석한 로타 광장 집회에는 후텁지근한 정오의 대기와 뜨거운 햇빛을 피하기 위해 광부들은 검은 모자와 헬멧을 착용하고 있었다. 연단에 올라선 네루다에게는 광부들의 검은 모자와 헬멧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자가 네루다의 이름과 그의 시「스탈린그라드에 바치는 새로운 찬가」를 소개하자 그 많은 광부들이 조용히 모자를 벗었다. 시를 낭독하겠다고 하니 모자를 벗었던 광부들의 모습을 네루다는 이렇게 묘사한다.

“잔잔한 바다에서 해일이 일어난 듯 1만여 개의 모자가 일제히 파도를 일으키더니, 무언의 존경을 담은 검은색 포말을 일으키며 아래로 사라져갔다.”(1)

시를 낭송하며 그 어느 때보다 전쟁과 해방을 강조했다는 네루다. 네루다는 로타 광산 이외에도 초석 기업이 개발한 초석 광산에서의 일화도 소개한다. 영국인, 독일인을 비롯하여 각국의 침탈자들은 초석 광산을 독점하고 회사 이름을 지명으로 사용했다. 문자 그대로 그들의 왕국인 것이다. 광산 지역마다 독자적인 화폐를 사용했던 그곳은 특별 허가증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지역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모든 종류의 집회를 금지했고, 정당활동이나 언론의 취재도 허용되지 않았다. 네루다는 어느 날 오후, 마리아 엘레나 초석 광산의 기계창에서 노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거대한 작업장의 바닥은 항상 물, 기름, 산(酸)이 고여 있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네루다는 웅덩이 위에 높이 널빤지를 밟고 다녔다. “이 널빤지 하나 놓으려고 파업을 열다섯 번 하고, 8년동안 줄기차게 회사와 씨름했습니다. 결국 일곱 명이 목숨을 잃었답니다.” 죽은 노동자들이란 회사 경비원들이 끌고 나간 파업 지도자들이다.(2) 이렇듯 당시의 현실은 작은 것 하나라도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비오비오 강. 광부들은 ‘석탄의 행진’으로 이강을 건넜다.

침탈자들의 왕국과도 같은 곳일지라도 로타 광산의 노동자들은 투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1958년 ‘석탄의 행진’이라고 알려진 운동이 로타 광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시꺼먼 탄가루를 뒤집어 쓴 수천 명의 광부들이 빽빽이 모여 소리 없이 비오 비오 강 다리를 건넜을 때 콘셉시온 시는 온갖 깃발과 플래카드, 그리고 투쟁의 결의로 물결쳤고, 정부는 심각한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세브히오 브라보’라는 칠레 감독에 의해 <민중의 깃발(Banderas del pueblo)>이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되었다. 콘셉시온 시에 모인 군중들 사이에 아옌데가 있었는데, 아옌데의 선거 참모였던 미겔리틴 감독은 이때 아옌데가 모든 민중의 확고하고 결정적인 지지를 획득한 것으로 생각한다. 나중에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후 그가 처음으로 방문했던 곳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광부들과 대화하기 위해 찾아간 ‘로타 광장’이었다.(3) 아옌데는 이 광산을 국유화하였는데, 이는 그가 대통령이 된 후 처음으로 시행했던 시책 중 하나이다.(4)

아옌데가 연설했던 로타 광장

광장 한켠에 아옌데 기념물이 서있다.


로타 광산 그리고 사북

우리나라의 경우 1993년 대부분의 태백, 사북의 탄광이 폐광되기 전까지 강원도 일대는 70 여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검은 노다지’의 지역이었다. 그러나 칠레와 마찬가지로 광부의 삶은 석탄 산업의 활황과 상관없이 열악한 것이었다. 석탄을 캐는 막장은 30~40도의 고온과 높은 지압, 습도, 공기순환의 불량 속에 석탄가루를 마시며 일을 해야 하는 지옥과 같은 곳이었다. 게다가 산업재해의 빈발과 진폐증 때문에 광부들은 언제나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이 같은 목숨을 건 노동의 대가로 주어진 임금은 월평균 15만 5천원의 저임금으로 최저생계비에 크게 못 미치고 있었다. 이러한 열악한 현실은 1980년의 유혈폭동으로 이어졌다. 1980년 국내 최대의 민영 탄광인 강원도 동원탄좌 사북영업소에서는 어용노조와 임금 소폭 인상에 항의해 광부들에 의해 유혈 폭동이 일어났다. 광부 및 그의 가족 약 6,000여명이 참여한 이 투쟁은 회사들이 광부들의 요구를 묵살한 채 경찰을 개입시켜 경찰과 충돌하면서 유혈사태를 빚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관 1명이 숨지고 160여명의 경찰과 민간인이 부상을 당했다. 사태가 진정 된 후 당시 계엄사령부는 관련 인물 31명을 구속하고, 50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등 총 81명을 군법회의에 송치하였다. 이 사태는 경직된 노사관계와 광부들의 누적된 불만, 값싼 노동력 등이 빚어낸 참사로서, 이 사건 이후 전국 각지에서 노사분규가 잇따라 일어나는 등 1980년대 노사문제를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 사북 투쟁을 계기로 노동자들의 투쟁은 새로운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5) 

칠레의 탄광에서 우리나라의 광부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다. 국가를 초월하여 막대한 이익이 생산되는 광산 및 탄광은 대부분 사적 소유이고 이러한 곳에서 노동자들은 단지 ‘일회용 사람’들일 뿐이다. 따라서 광부들이 자신들의  삶과 노동의 조건을 인간화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건 투쟁의 과정이 뒤따라야 하는 곳이었다. 사북사태에 대한 내용이 MBC드라마 ‘에덴의 동쪽’에서 약간 그려졌다고는 하나 어느 정도 사실적으로 그렸을 지는 보지 못해 알 수가 없지만 공중파의 한계도 드러내고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폐허가 된 공터의 벽에서 프리다 칼로가 쳐다보고 있었다.


밤 거리에 붙은 프리다 칼로 

로타 광산을 나와 분홍색 와이셔츠를 입은 친절한 아저씨와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나니 오후 해질녘이다. 로타 광장으로 나와 커피를 한잔 마시면서 그 광장에서 연설했던 아옌데를 떠올려 보았다. 그 광장에는 아옌데의 기념비가 뜨거운 햇살과 텁텁한 바닷바람의 대기위에 서있다. 헤어졌던 SP38과 숙소에서 만나 비오비오(Bio Bio) 강가로 나섰다. ‘석탄의 행진’이 이 비오비오 강을 건넜다고 한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강가에는 초라한 집들이 무성하다. 강가를 걸어 숙소로 돌아오는 길. 거대한 벽화가 우리의 시선을 잡는다. 여러 사람이 하나의 테마를 가지고 좌우로 그 스토리를 연결하며 그린 듯한 벽화. 사회 비판적인 시선이 담긴 이러한 벽화는 칠레의 어디를 가나 무수히 볼 수 있다. 퇴락한 도시의 부서진 담장 한 켠에 프리다 칼로의 초상이 전시되어 있다. 이름 모를 예술가가 실크 스크린으로 제작하여 붙여 놓은 작품. 그에게는 이 도시 전체가 자신의 전시장일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작품을 보여 주고 싶었을 누군가를 생각하며 그 프리다 칼로를 조심스레 떼어냈다. 한국으로 가지고 와 집에다 걸어 두었다.

 

로타 광산이 있는 바닷가 마을 풍경

악마의 터널이란 글자가 보인다.

판자로 지은 광산의 입구는 박물관으로 되어 당시의 노동환경을 엿볼수 있도록 되어있다.

박물관에 걸려있는 광부들의 생활상.

우리를 친절히 안내해 준 분홍 와이셔츠의 아저씨. 머리에 헬멧을 쓰고 우리는 갱도로 내려갔다.

갱도 위아래의 연락을 담당하던 당시의 전화.

광산 벽에 그려진 벽화

당시 광부들의 삶을 알 수 있게 재현되어 있다.

광부들의 생활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2층에는 침실이 있는데 여러 가족이 함께 살았으며, 침대 하나에 여러 명이 번갈아 잤다.
그냥 나무바닥에 담요하나만 깔고 자기도 했다고 한다.

로타 광산에서 캔 석탄으로 만든 기념품들. 희한하게도 손에 석탄이 뭍어나지 않는다.
이런 가공 방법은 비밀이라고 한다.

로타 광장에 위치한 벽화

칠레의 어디를 가나 아옌데를 기념하는 기념물과 벽화를 볼수 있다.

밤거리에서 마주친 벽화

벽화의 부분들

벽화의 부분들

벽화의 부분들

벽화의 부분들

좀더 가까이 본 프리다 칼로.
지금은 내 방 침대 맡에 부착되어 있다.

20세기 초반의 광부들 모습.
엘리베이터 안 좌측에 어린이가 보인다.

로타 지역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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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박병규 옮김, 민음사. 2008, pp.380-381
2> 같은 책, p.259 참고
3>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칠레의 모든 기록』조구호 옮김. 간디서원, 1989, pp. 106~107
4> 그러나 피노체트가 처음으로 시행한 것은 국유화된 광산을 다시 사유화한 것이다. 피노체트는 광산, 공동묘비, 기차, 항만을 비롯하여 쓰레기장까지 거의 모든 것을 사유화, 민영화하였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칠레의 모든 기록』조구호 옮김. 간디서원, 1989, pp. 106~107 참조.
5> 유성재, 「사북사태」 국가 기록원, 200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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