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3.19 09:29

다름을 인정해야 공존이 가능해진다

한국러시아사학회 정기 학술대회 ‘러시아 제국과 민족 만들기’
박휘진 기자
3월 7일 러시아 역사 속에서 민족성 문제를 다룬 한국러시아학회 정기 학술대회가 한양대 국제대학원에서 열렸다.
▲ 3월 7일 러시아 역사 속에서 민족성 문제를 다룬 한국러시아학회 정기 학술대회가 한양대 국제대학원에서 열렸다.

근대 이후의 국가형태는 거주민의 인종적 동질성 여부에 따라 단일민족국가와 다민족국가로 나눌 수 있다. 한국 역시 단일민족국가 중 하나로, 이 국가정체성은 오늘날까지 국민을 결속하는 강력한 키워드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단일민족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단일민족이라는 정체성이 현실에서 어떤 방식으로 발현되기에 이를 지키려는 무리와 폐기하려는 무리가 생겨났을까. 이러한 민족성 문제를 러시아의 역사 안에서 다뤄본 한국러시아사학회 정기 학술대회가 3월 7일 한양대 국제대학원에서 열렸다.  

‘러시아 제국과 민족 만들기’를 발표한 기계형 교수(한양대)는 러시아 제국의 확장과정 속에서 형성된 러시아 정체성이 상당히 이중적이라고 언급했다. 그 이중성은 크게 러시아성-다인종 및 다민족성의 구조로 설명된다. 러시아는 단하나의 본질적 ‘러시아성’을 꿈꿨지만 적게는 70개, 많게는 175개의 민족이 포함된 다민족국가였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러시아의 이민족들은 난폭하게 민족성의 틀 안으로 끼워 맞춰져야만 했다.

러시아의 민족주의는 러시아가 한창 영토를 확장하던 시기를 지나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대두되기 시작했다. 기계형 교수는 그 이유를 “19세기 유럽의 민족주의와 낭만주의 운동에 영향을 받아, 혈연적·문화적으로 순수한 본연의 실체로서의 러시아 민족, 혹은 슬라브 민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은 이른바 ‘러시아성’을 발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러시아성’에 대한 발견 과정은 비러시아인에 대한 발견을 동반하는 것이었으며, 러시아성의 선택과 부각은 이종 및 혼종의 것에 대한 철저한 배제와 타자화 과정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1830년 니콜라이 1세의 등장은 배제와 타자화의 시작이었다. 니콜라이 1세는 가톨릭 성직자들에 대한 진압을 명령했고, 나아가 유대인, 무슬림, 이도교에게 정교도 개종을 강요했다.  유대인 징집을 위해 12살 아이들을 가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군 숙소에 데려갔으며, 18세 이후의 25년간 군 복역기간에는 일상생활에서 개종의 압력을 상사로부터 받아야만 했다. 발표자에 따르면 이는 “러시아에 의해 통제되는 비정교회에 대한 억압이며, 진압행위는 제국응집력의 원천으로서 러시아전통, 언어, 문화, 정교회를 끄어들여 제국관리들에게 통일성을 밀어붙이는 것”이다. 

기계형 교수는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 19세기 중 후반의 쇼비니즘적, 병리적 범슬라브주의가 누그러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 당시 자유주의적 민속학자들의 영향”이라고 주장했다. 1905년 혁명 이후 러시아의 민속학 연구자들은 러시아제국이 안고 있는 민족문제를 고민하면서 새로운 움직임을 보인다. 그 흐름의 가운데 있는 것이 ‘러시아의 민속지도’이다. 러시아인 공통의 민족성을 발견해내기 위해 실시한 현장조사에서 그들은 뜻밖의 것을 발견한다. 그들은 민족성에 대해서는 어떤 자료도 본질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음을 확인하게 된다. 다시 말해 그들이 발견한 것은 본질적 러시아성이 아니라 제국이 기본적으로 다양한 민족과 인종에 기초한다는 것이었다. 기계형 교수는 "이 사실의 인정이 개별 이민족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공존하며 소통하는 제국의 이상이 아닐까한다"고 언급했다. 

‘제국’이라는 말에 담긴 사회학적 논의들이 너무 머리를 아프게 한다면, 한국 사회를 떠올려보자. 어느 시대에 순수한 한민족만이 한반도 전체를 누리며 살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지금은 한국에 삶의 터전을 두고 살아가는 이민족과 어느 거리에서나 조우할 수 있는 시대이다. 묵과하려도 묵과할 수 없는 그들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그저 이민족이라는 틀 안에 그들을 두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민족이란 무엇인가. 왜 민족과 이민족은 구분되어야 하는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선을 긋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존하기 위해서이다. 공존, 그것이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이들의 이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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