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4.15 12:17

'꼬마 소크라테스'들에게 배워라

[편집자가 독자에게]신경민은 왜 뉴스데스크를 떠나는가
                                                                                                                                     안태호 편집장
신경민 앵커가 결국 교체됐습니다. 생각해보면 사회의 질서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이 세상을 너무 뻔뻔하고 나른하고 움직일 수 없는 괴물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 신경민 앵커가 결국 교체됐습니다. 생각해보면 사회의 질서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이 세상을 너무 뻔뻔하고 나른하고 움직일 수 없는 괴물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지난 주말 모종의 모임에 참석했다가 초등학생 아이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놀게 됐습니다. 조그만 일에도 까르르 웃어대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에 저도 모처럼 활짝 웃었던 기분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아이들과의 대화는 흥미롭습니다. 아이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어른의 그것과 현저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아이들은 편견에서 무척 자유롭습니다. 누구라도 일단 스스럼없이 대하고 대상이 어떻든 간에 왕성한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접근하기 일쑤입니다. 물론, 교육이라는 것도 있고 미디어나 각종 사회적 노출로 인한 사회화과정을 피할 수 없는 이상(현대사회에서 누구도 날것 그대로의 사람일 수는 없을테니까요) 어느 정도의 사회적 편견이나 인식이 자연스레 배어들었다고 봐야겠지만, 이미 수십 년 동안 각종 편견으로 찌들대로 찌든 어른들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아이들의 대화방식은 주로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늘어놓는 것과 질문으로 이루어집니다. 아이들은 그야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상대방 어른이 그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그야말로 '아웃오브 안중'입니다. 자신의 이야기라고 해서 대단할 것은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경험을 분주하게 풀어놓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그 소탈함이 자주 어른들을 기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감정과 일상에 대해 선뜻 이야기해주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부모들의 즐거움을 이해할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지요.

또 하나의 방식은 질문입니다. 아이들을 키워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아이들은 정말 질문의 대마왕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저녁잠자리에 들기까지 질문의 연속, 이라기보다는 질문의 십자포화가 매순간 작렬합니다. 해는 왜 뜨는가, 고양이는 왜 야옹하고 우는가, 차 경적소리는 왜 빵빵거리는가 등등 현상의 이면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것부터 "분석이 뭐예요?" "저 아저씨를 왜 노숙자라고 불러요?" 등 개념에 대한 해설을 요구하는 경우, 좀 더 나아가면 관계에 대한 성찰이나 인과관계에 대한 논리적 설명 등 복잡해지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얘는 별게 다 궁금하대'라며 그냥 웃어넘기거나 '쓸데 없는 거 물어보지 마라'며 윽박지르고 넘어가지 않는 이상 이 질문들에 성의 있는 답변을 하려고 시도하다 진땀 흘린 경험이 아마 다들 있으실 겁니다. 당연시 여기던 일들을 하나하나 개념화하려다보면 ‘내가 이 일을 정말 알고 있긴 하는 건가’라는 의문’에 자괴감마저 생기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세상을 배워나가는 아이들의 시선에서 보면 우리가 구태의연하게 받아들이던 세상이 얼마나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 걸까요. 생각해보면 사회의 질서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이 세상을 너무 뻔뻔하고 나른하고 움직일 수 없는 괴물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사회적 이해관계에서 거리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발하고도 발랄한 상상력을 유발해낼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놀라울 따름입니다. 가끔은 작가들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노트를 들고 말을 채집하러 다녀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니까요. 평소 ‘꼬마 소크라테스’들에게 배울 게 많다고 생각해 왔던 것도 이런 까닭입니다.

뉴스에 ‘클로징 멘트’를 넣는다는 구상 역시 구태의연한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발상이었습니다. 각종 정치적 고려나 광고수익, 다양한 관계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공중파 방송에서 뉴스 진행자가 개인의 정치적 입장을 노출한다는 것은 퍽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는 TV뉴스에서 흘러나오는 몇 마디 안되는 촌철살인의 어휘들은 사회의 빈틈을 예리하게 파고들던 무기인 동시에 팍팍한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위안을 안겨주던 노래였습니다.

신경민 앵커가 결국 교체됐습니다. 뉴스의 사회적 역할을 재구성해보려 했던 시도 중 하나가 이렇게 무산되는 걸까요. 사회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누군가에게 당연한 것이 다른 누군가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렇게나 큰 허물이 되는 줄은 몰랐습니다. 아이들에게 이걸 어찌 설명해야 난감합니다. 요즘엔 초등학생들마저 우습게 보는 대통령 욕을 하는 건 쉽습니다. 그러나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그 내부에서 옴싹달싹 못하고 있는 게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부모가 아닌 것이 천만 다행이란 생각마저 드네요. 물론, 이 나라의 많은 부모들이 현명하기를 바라지만 그 전에 상식의 자리를 배제해버리는 사회적 관계들을 재배치하는 것이 먼저일겁니다. 당연하게도 지금 상황에선 그런 역관계가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 추문이 되어 움직일 수 없도록 만드는 힘의 존재를 증명해 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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