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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18 밴드 뉴크, "음악적 변화에 대한 강박은 없다"
  2. 2009.03.05 시베리안허스키, 우리가 느낀 밴드란 이런 것이다
  3. 2009.02.27 당신은 추방으로부터 자유로운가
  4. 2009.02.25 다문화가 주는 에너지에 단점은 없다
  5. 2009.02.24 “구호가 아니라 노래를 부르고 싶다”
  6. 2009.02.17 서울 가려 했으면 진작에 갔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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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8.12.17 몸의 학교, 삶의 현실과 관계를 맺는 예술
  10. 2008.12.16 "우리는 창조자들의 창조자들이다"
2009.03.18 08:29

밴드 뉴크, "음악적 변화에 대한 강박은 없다"

[하이웨이스타] ③ 정통 헤비메탈 밴드 뉴크
강종택 _ 기타리스트
정통 헤비메탈 밴드 '뉴크'
▲ 정통 헤비메탈 밴드 '뉴크'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던 당시 대전으로 공연을 하러 간 적이 있다. 그 날 클럽공연에는 꽤 많은 밴드들의 공연이 있었는데, 한 밴드의 연주가 유독 인상 깊었다. 80년대의 정통적인 메탈을 연주하는 그들의 공연을 보며 우리 밴드는 너나 할 것 없이 그들의 음악에 매료되고 말았다. 공연이 끝나고 이야기를 나눠 보니 “뉴크”라는 이름의 이 밴드는 아프리카 멤버들과 나이도 비슷하고 음악에 관한 생각도 비슷했다. 이후 우리는 돈독한 친분을 쌓게 되었고, 개인적으로는 뉴크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그들의 곡들을 연습할 정도로 말이다. 많은 공연을 함께 다녔고, 한 무대에 올라 함께 연주를 하기도 했다.

3월 14일 홍대에 위치한 상상마당에서 SS FEST가 열렸다. 일본의 헤비메탈밴드 Black masquerade를 비롯해 뉴크와 아프리카의 공연도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이었기에 더욱 반가웠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대기실에서 잠시 뉴크 멤버들을 만나 보았다.

작년 서울에서 한 단독공연을 보았다. 뉴크는 언제나 에너지가 넘치고 나를 뜨겁게 만드는 것 같다. 어떻게 지냈는가?

(최동섭 / 기타 / 리더) 그렇게 생각한다니 고마울 따름이다. 3집으로 활동하다가 요즘은 4집을 준비하고 있다. 물론 공연도 많이 하고 있다.

4집 준비는 잘되어가고 있는가? 얼마만큼 작업이 진행이 되었는가?

(윤제인 / 베이스) 이미 곡은 다 만든 상태다. 요즘은 멤버들과 합주를 하면서 편곡을 하고 있다. 올해 여름 즈음 앨범이 나올 예정이다. 기대해도 좋다(웃음)

얼마 전 TV를 통해 뉴크의 다큐멘터리를 봤다. 꾸밈없는 모습이 그대로 연출된 것 같아서 미소를 띠면서 봤다.

(최동섭) 찍는 동안 재밌었다. 우리의 일상생활부터 음악적인 모습까지 자연스레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뮤지션의 진정한 면모는 공연을 통해 알 수 있지 않는가? 매스컴을 통해서는 우리의 전부를 알 수가 없다.

뉴크의 멤버들은 밴드 이외에도 각자의 직업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한 직업들로 인해 공연 일정이나 팀의 활동에 제약을 받지는 않는가?

(고재웅 / 기타) 물론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가급적으로 일 때문에 공연 일정을 조절하는 일은 안 하려고 노력한다. 웬만하면 공연을 하도록 스케줄을 맞춘다. 이것은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인데, 일 때문에 공연을 조절하기보다는 공연에 더 중점을 두려 한다.

인터뷰를 준비하며 1집부터 3집까지 앨범을 다시 들어 봤는데, 사운드와 서정적인 멜로디 라인은 언제 들어도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대중들이 들었을 때, 음악에 있어 새로운 시도나 변화가 없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세 장의 앨범에 차별적인 무언가가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아쉬움으로 남는다.

(최동섭)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곡을 쓴 사람이 같기 때문이다. 곡은 나 혼자 쓰는데 이런 것이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일 수도 있다. 비슷한 느낌의 곡이 앨범마다 실려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본조비의 음악 또한 매우 비슷비슷하다. 팬들이 그 음악을 원하는데 굳이 변화할 필요가 있겠는가? 의도적인 변화로 인해 실패를 한 대표적인 팀이 데프레퍼드이다. 그들은 정통 하드락을 탈피하고 얼터너티브음악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 너바나처럼 얼터너티브를 잘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변화에 대한 강박관념은 없다.

뉴크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라우드니스나 임팰리테리와 같은 음악을 추구하며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최동섭) 당시 임팰리테리와 라우드니스의 음악에 한창 꽂혀 있었다. 물론 지금도 무척 좋아한다. 하지만 그들을 추종하면서까지 음악을 만들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는 헤비메탈이 좋아서 만난 사람들이고, 그 틀 안에서 우리의 음악을 만들어나갈 뿐이다. 그러다보니 그 범주 안에서 비슷한 곡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윤제인) 멤버들이 전부 다 곡을 만드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만들 사람만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행여 다른 멤버가 작곡을 해왔는데 그 곡이 좋으면 그게 우리밴드의 노래가 되는 것이다. 어느 밴드더라도 작곡을 하는 사람이 정해져있다. 시나위나 블랙홀과 같은 팀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물론 다른 멤버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을 전제 하에 말이다.

밴드가 클럽이나 라이브홀 말고도 행사에서 공연할 때도 많지 않은가. 그래서 많은 팀들이 행사를 위한 레퍼토리를 정해 놓고 있다. 그러나 뉴크는 행사공연에서도 뉴크의 음악을 고집한다. 대중들이 알만한 노래를 해서 그들을 충족시켜줄 필요도 있지 않은가?

(허주희 / 드럼) 우리도 행사에 맞춘 레퍼토리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생각보다 별로였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우리음악을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많은 이들이 아는 곡을 연주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을 충족시켜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밴드의 노련함과 에너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카피곡이든, 자작곡이든 상관없다. 무슨 노래를 해도 연주자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면 된다. 적어도 밴드라면 자기음악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뉴크를 알리는 것도 우리가 음악을 하는 목적 중에 하나다. 마니아층의 소수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클럽에서의 공연도 매력이 있다. 그러나 행사공연은 수많은 사람 앞에서 우리의 음악을 보여줄 수 있는 일종의 기회이기도 하다. 불특정 다수 앞에서 우리의 음악을 연주했을 때, 1,000명 중 10명만이라도 뉴크를 기억해주고 좋아해준다면 우리는 성공했다고 본다.

뉴크는 멤버교체가 거의 없는 안정적인 밴드 중 하나다. 그러나 최동섭과 함께 뉴크 사운드의 기반을 다졌던 기타리스트 송인재(현 아프리카 기타리스트)가 2004년 팀을 나가게 되었다. 당시 많이 흔들리지는 않았는가? (인터뷰 당시 대기실에는 아프리카의 기타리스트 송인재도 함께 있었다)

(최동섭) 엄밀히 말하면 내가 송인재를 채용을 한 거였지, 기반은 내가 잡았다. (웃음)

그렇다면 송인재는 해고된 것인가?(웃음)

(최동섭) 그렇다.(웃음) 농담이고, 인재가 뉴크에게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가 나가고 나서 들어온 멤버들에게도 각자의 개성이 있었다. 테크니션이었던 김용진(前 기타리스트)이 그랬고, 현재의 고재웅 또한 감성이 풍부한 기타리스트이다. 어떻게 보면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훌륭한 뮤지션들과 함께 팀을 꾸려 나간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드러머가 허주희(아프리카 드러머 정현규의 제자이다)로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공연을 본 적이 있는데, 강렬한 헤비메탈 음악을 하는데 여자 드러머가 잘 적응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로 초창기 허주희의 플레이는 뉴크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불과 6개월 후 다시 공연을 봤을 때 깜짝 놀랐다. 실력이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리더로써 그런 잠재력을 알고 있었는가?

(최동섭) 물론 처음부터 허주희의 실력을 보고 뽑은 것은 아니다. 前 드러머가 팀을 나갔을 때, 아프리카의 드러머 정현규가 자신의 제자라고 허주희를 소개시켜줬다. 나는 실력보다는 마인드를 먼저 봤다. 주희가 뉴크에 마인드를 맞춰줄 것인지. 실력은 그 후의 문제였다. 그리고 나는 허주희를 뉴크의 훌륭한 드러머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우리 팀이 원하는 것만 연주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같이 팀을 하기로 한 것이다.

안정적인 멤버들이 있는 한 뉴크의 음악은 더욱 성숙하리라고 믿는다. 공연 시간이 다가오니 마지막 한 마디를 듣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쳐야 할 것 같다.

(최동섭) 음악에는 정답이 없다. 밴드의 기본적인 틀을 유지하면서 변화한다는 게 참 쉽게 보이면서도 어렵다. 그 둘 사이의 경계는 참 미묘하다.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우리가 음악을 하는 동안의 숙제라고 생각한다. 곧 발매될 우리의 앨범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이제 곧 공연이 시작된다. 지켜보길 바란다.

인터뷰가 끝나고 최동섭은 아직 발매되지 않은 뉴크의 4집 데모 CD를 들려줬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된 메탈사운드가 또 한 번 나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음악을 듣고 있는 나에게 그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미소를 띠며 “어때? 어때?”하고 묻고 있었다. 음악 중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말할 수 있는 헤비메탈을 하는 그들에게서 묻어나오는 순수함이야말로 그들이 무대에서 보여주는 열정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곧이어 그들의 무대가 시작됐다. 대기실에서의 장난기 많은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뉴크는 카리스마와 열정으로 공연장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록 밴드는 공연을 봐야 진정한 면모를 볼 수 있다는 그들의 말을 실감하며 나는 그들이 몸소 보여주는 Metal will never die의 세계를 몸속 깊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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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5 12:54

시베리안허스키, 우리가 느낀 밴드란 이런 것이다

[강종택의 하이웨이스타] ② 시베리안허스키
펑크 밴드 시베리안허스키.
▲ 펑크 밴드 시베리안허스키.

2002년으로 기억된다. 평소 존경하던 전설적인 밴드, ‘송골매’의 헌정앨범이 후배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그러나 너무 많은 기대를 해서인지 막상 앨범을 접하고 나서는 별로 큰 감흥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처음 본 순간>, <한줄기 빛>, <모두 다 사랑하리>는 확연히 귀에 들어온 곡들이었다. <한줄기 빛>은 A-frica가 작업을 한 것이었고, <처음 본 순간>, <모두 사랑하리>는 한 팀이 맡았는데, 바로 시베리안허스키였다. 1년에도 수많은 밴드가 생겼다가 사라지는 홍대 앞에서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자신만의 음악을 고수하며 열정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시베리안허스키를 하이웨이스타 인터뷰 연재의 두 번째 순서로 만났다.

1년 만에 보는 것 같다. 예전 멤버(드럼, 베이스)는 없고 기타와 보컬 두 명뿐이다.

(유수연 / 보컬) 멤버문제로 더 이상 고생하고 싶지 않다.(웃음) 그냥 편한 마음으로 다음 앨범을 준비하면서 시베리안허스키 제 2기의 콘셉트에 대해 구상중이다. 멤버가 2명이라고 해서 특별히 걱정은 하지 않는다.

음반시장이 침체되어 있지만 밴드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앨범을 내고 있다. 얼마 전 아프리카도 새 앨범을 냈다. 하지만 메이저 가수들은 이제 디지털 앨범만을 내고 있는 실정이다. 시베리안허스키에게 있어서 앨범작업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용운 / 기타) : 음반시장이 불황인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앨범을 발매하는 이유는 팔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니아 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손에 잡히는 앨범을 소장하기 원한다. 우리는 그들을 충족시켜줄 필요가 있다. 디지털앨범이 아니라 CD형태의 앨범을 발매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니아마저도 잃게 된다. 그들에 대한 일종의 배려라고 보면 된다. 물론 그뿐 아니라 오프라인에서 홍보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유수연) : 비록 많이 팔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경제적인 부분이 필요하긴 하다. 다시 말해 앨범을 찾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발매를 하는 것이다. 물론 디지털앨범처럼 편하게 한곡씩 내는 것이 금전적으로 부담이 되지 않기 때문에 수월할 수는 있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그 만큼 음악도 쉽게 만들 수밖에 없다. 이 같은 현상은 음반시장을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은 음악에 대한 진지성을 저하시킬 수도 있다. ‘한곡 발표해 놓고 안되면 말자’라는 생각은 음반시장의 침체에 악순환을 불러온다. 우리와 더불어 뮤지션들이 음반발매에 대해 ‘음악에 대한 순수성을 가지고 작품집을 발표하는 것이다’는 생각을 한다면 향후 우리의 음반시장에 굉장한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이번 음반에 대해 몇 가지 질문하겠다. <첫 번째 사랑>을 듣고 많이 놀랐다. 기존의 시베리안허스키 음악과는 전혀 달랐다. 드럼은 미디로 작업한 것 같다. 명색이 록밴드인데 이러한 시도를 한 이유는 무엇인가?

(유수연) : 시베리안허스키를 록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좀 그렇다. 록을 해야지 하면서 록적인 노래를 만들지는 않았다. 우리는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했을 뿐이다. <첫 번째 사랑>은 다른 시도를 해보고자 한 거다. 미디로 녹음을 했다는 것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우리는 라이브를 할 때도 이곡을 연주한다. 다른 뮤지션들도 어쿠스틱 드럼으로 녹음을 하는 것보다 미디나 전자드럼으로 작업하는 경우가 많다. 뉘앙스가 다르기 때문에 뭐가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용운) : 록의 정의를 누구도 내릴 수 없다. 예전에는 디스토션 기타 유무에 따라 록을 정의했다.(웃음)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비트가 강하면 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음악에 안무를 곁들이면 댄스가 되는 거다. <첫 번째 사랑>은 기타와 보컬을 빼고는 미디로 작업을 한 실험적인 곡이다. 우리는 특별하게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2002년 송골매 헌정앨범에서 <처음 본 순간>과 <모두 사랑하리>를 리메이크했다. 그 곡을 들으면서 원곡을 보존하면서도 밴드의 색깔을 잘 보여줬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리메이크를 할 때는 원곡을 훼손시키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번앨범에도 송골매의 <오늘따라>를 실었는데, 가사만 같고 멜로디 라인이 전혀 다르다. 이러한 것도 리메이크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가사만 가지고 왔다고 생각하는가?

(유수연) : 원래 <오늘따라>를 송골매 헌정앨범에 담으려고 했지만, 사정상 다른 곡으로 참가했다. 하지만 공연 때는 종종 연주를 했다. 그러다가 음원을 구하고 싶다는 팬들이 많아서 이번 앨범에 실었다. 리메이크를 하면서 가사도 좀 바뀌었고, 첨부된 것도 있다. 귀로 듣고 가사를 땄기 때문에 ‘활짝 웃는’이 ‘살짝 웃는’으로 바뀌기도 했다.(웃음) 리메이크에 대해서는 뮤지션들도 의견이 상충된다. 원곡에 충실하면, 리메이크다. 그렇지만 완전 다르게 해석했다고 해도 샘플링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새로 탄생한 거라고 볼 수도 있다. 원곡을 싸구려화시키는 작업이 아니고, 고급스럽게 대중한테 가까이 다가간다면, 그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리메이크를 잘했나 아닌가는 듣는 사람들의 몫이다.

(이용운) : 리메이크된 곡을 듣고 이 음악은 ‘원곡이 OOO라는 것이다’라는 것을 사람들이 느낀다면 그 또한 리메이크라는 범주 안에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결론은 대중이 들었을 때 좋으면 되는 것이다.

시베리안허스키의 훌륭한 카피능력은 그동안 봐와서 알고 있다. 언젠가 공연에서 펑키밴드임에도 불구하고 속주기타리스트의 로망인 곡 Mr. Big의 <Daddy& Brother& Lover Little Boy>를 연주하는 모습을 봤다. 하드록 풍인 그 곡을 디스트가 거의 없는 생톤에 가까운 기타톤으로 연주했었다. 매우 훌륭했고 개인적으로 많은 감탄을 했다. 그러한 것은 모두 의도된 것이었는가? 그렇다면 보통 카피 곡을 편곡할 때는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

(이용운) : 선곡은 거의 유수연 씨가 한다. 밴드에서는 보컬이 표현하는 부분이 절반 이상이다. 그래서 곡을 선정하는 것은 유수연 씨에게 맡긴다.

(유수연) : 카피 곡을 편곡할 때 선곡도 내가 하지만 아이디어도 내가 낼 때가 많다. 그러나 실질적인 섬세한 부분은 이용운 씨가 한다.

좀 무안한 질문이 될 수도 있는데, 시베리안허스키의 창단멤버는 현재 아무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떻게 보면 창단 멤버 없이 현재의 밴드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는 않아 보인다. 밴드명을 바꿔서 새롭게 시작할 생각은 없었는가? 밴드들의 고질적인 문제인 멤버교체가 허스키에게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유수연) : 처음 시베리안허스키가 결성되었을 때는 본격적인 음악작업을 하지 않았다. 보컬이었던 김용이 탈퇴하고 시나위로 간 다음 내가 보컬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팀의 리더가 탈퇴를 하면서 와해됐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시베리안허스키에 모든 열정을 바쳤기 때문에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용운을 영입하고 멤버를 모으고 추슬렀다. 열정적으로 다시 시작하려고 했다. 그때 작업한 곡들이 <도마뱀>을 비롯해, 송골매 헌정앨범의 곡들이었다.

이용운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기타리스트들 중 한명이다. 90년대까지만 해도 테크니컬한 플레이를 중시하였기에 일명 ‘기타선수’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그러한 실력을 갖춘 기타리스트가 많지 않은 것 같다. 나는 김도균(백두산, 외인부대)과 같은 깊은 맛의 피킹을 좋아하는데 요즘은 날리는 피킹을 하는 기타리스트들이 많은 것 같다.

(이용운) : 나는 오히려 예전보다 실력이 좋아졌다고 본다. 요즘은 예전에 비해 기타를 치는 사람의 수가 훨씬 더 많아졌다. UCC같은 곳에서 뽐내기 동영상을 보면 그들의 플레이는 훌륭하다. 음악을 업으로 하는 기타리스트들은 속주플레이 음악을 하기가 현실적으로 힘들다. 그러나 아마추어 기타리스트들은 메탈이나 속주플레이와 같이 자기가 좋아하는 곡을 열심히 연습해서 동영상을 올린다. 그것을 보면 정말 잘 친다는 생각도 많이 한다. 그리고 예전의 속주는 라인 자체가 참 촌스러웠는데, 지금은 오히려 더욱 깔끔한 라인으로 정교하게 연주하는 것 같다.

시베리안허스키 5집 앨범
1. 오늘따라
2. 오늘밤에
3. The Party
4. 저녁동안
5. 첫번째사랑.


예전에는 인디밴드라는 말보다 언더그라운드 밴드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인디밴드라는 것이 거의 일반적인 명칭이 되었다. 처음엔 나도 인디밴드라는 호칭에 자부심을 가졌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인디밴드라는 개념자체 또한 브랜드화 혹은 상품화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용운) : 나는 96년도에 처음으로 홍대에서 활동을 했다. 그때부터 인디밴드라는 말을 들었다. 처음에는 나도 자부심이 있었다. 어려서 그랬다. 알고 보니 일종의 말장난이었다. 인디레이블 소속밴드를 지칭하는 말인데 언더그라운드를 대신하는 말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면서 인디밴드를 폄하하는 시선들, 가난하고, 못되고, 나쁜 의미가 생겼다. 언더그라운드는 그래도 음악성으로 버틴다는 긍정적인 모습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인디밴드라는 말을 굉장히 듣기 싫어하기도 했다. 너도 나도 인디밴드라고 하니. (웃음) 쉽게 이야기하자면 ‘듣보잡’이라는 이야기다. 신인가수라고 하지 않고, 생소한 밴드면 무조건 인디라고 하는 것이 너무 싫다

(유수연) : 사회적 시선은 가요형태의 음악을 하는 밴드를 제외하고는 다 인디밴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인디가 뜨거운 감자처럼 되어 버렸다. 붙여도 그렇고 안 붙여도 그렇고. 좀 애매한 부분이다.

(이용운) : 한번 인디면 영원한 인디로 내버려두는 것 같다. 사실 인디레이블이 메이저 기획사들보다 더욱 거대해 질수 있다. 인디레이블은 말 그대로 독립적인 것이지, 경제적인 부분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물론 현재는 인디레이블이 중소기업, 메이저는 대기업처럼 되어있지만, 인디밴드도 대기업이 될 수 있다.

팬 층은 주로 어떠한가? 그리고 인지도는 밴드 스스로 봤을 때 어떠한가?

(유수연) 팬층은 주로 2․30대이다. 홍보를 거의 하지 못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그래도 소문은 조금씩 퍼지는 것 같다. 우리의 노래를 카피하는 학생들이나 직장인들도 꽤 많고, 라디오에서도 심심치 않게 우리 노래가 흘러나온다. 각종 차트에도 밴드 이름을 올리는 걸 보면 시베리안허스키가 대견스럽기도 하다.(웃음) 대학의 실용음악과 입시곡으로 우리 노래를 준비하는 학생들도 있다고 하니 영광이다.

홍대는 이미 주름잡고 있는 것 같고, 그 외에는 어디서 활동을 하는가?

(이용운) 예전에는 홍대 클럽에서 정기적인 공연을 했었지만, 5년 전부터는 홍대 클럽 공연이나 행사 등 모든 공연은 섭외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홍대 클럽뿐 아니라 지방의 많은 클럽에서도 공연을 했었고, 대학 축제나 행사 공연도 전국적으로 섭외가 이루어진다. 간혹 방송에서 연주를 할 때도 있고 축제에 초대되는 경우도 있다. 요즘은 누구나 하는 홍대 놀이터 공연도 했었고 작년에는 일본에서도 공연을 했었다.

무대에서 시베리안허스키가 가장 중점에 두는 점은 무엇인가?

(유수연) : 처음에는 우리도 눈빛만 보고 브레이크를 걸고, 섹션을 들어가고…, 그런 것을 추구했다. 그러나 이런 것도 멤버문제와 겹친다. 멤버를 영입할 때는 연주 잘하는 젊은 친구를 구해서 열심히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한다. 그러나 그들은 경험이 없다. 아무것도 모른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시베리안허스키가 이름도 좀 있으니깐 거기는 뭔가 틀리겠지, 혹은 돈이 되겠지 생각한다. 이러한 마인드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래서는 교감이 되지 않는다. 나이 차이가 아니라 시대적인 차이인 것 같다. ‘우리가 느꼈던 밴드는 이런 것이다’라는 생각이 변했다. 나는 하루를 같이 해도 멤버라는 생각으로 임한다. 시베리안허스키를 10년 동안 해왔는데, 그들은 주인의식이 없다. 우리 음악이 뭔지도 모르고 프로필 한줄 더 늘리기 위한 것이다.

블루스를 하더라도, 딱 떨어지는 싱코의 느낌이 안 나온다. 우리가 기계도 아닌데 어떻게 정박에 딱 떨어지겠는가? 그래서 합주가 필요한 것이다. 대화도 하고 술도 한 잔씩 하면서 서로 알아 가야한다. 이러한 인터뷰를 했을 때도 우리의 말을 대신 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들도 100:1 경쟁률 뚫고 들어온 사람들이다. 하지만 멤버가 되는 것은 너무 어렵다. 그래서 눈빛교환은 포기했다. (웃음) 지금은 그냥 묵묵히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고 있다. 나와 같은 마인드를 가진 친구가 한두 명 더 있는…, 내게 밴드란 그러한 의미로 다가온다. 그게 밴드다.

그렇다. 요즘은 기타플레이를 보더라도 진짜 손맛으로 연주를 하는 밴드를 보기 드문 것 같다.

(수연) 앞으로는 더 없을 것이다. 음식점만 보더라도 장인이 없어지고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이 체인점화되어 아무나 교육받고 음식을 만든다. 음악판도 똑같다. 장인이 없어졌다. 싱글앨범이라는게 좋은 의도로 쓰여야 되는데,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수연) : 밴드라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정말 절실히 느낀다. 멤버가 교체되면서 상처도 많이 받고, 격해지기도 한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다. 매번 오는 겨울이지만, 갈수록 추워지는 느낌이다. 매번 겪는 이별이지만, 아픔이 줄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힘든 것은 아무도 모른다. 올라이즈밴드를 보면, 그래 자기 음악을 꿋꿋이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참 멋있다.

용운 씨는 나에게 큰 도움이 된다. 묵묵히 동반자로 있어준다. 물론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냥 하고 싶은 음악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원수는 중요하지 않다. 마음 맞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된다고 본다. 언젠가 우리를 다시 찾아왔을 때도 우리는 항상 밴드음악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광고해도 되는가? 4월 10일 7시에 상상마당에서 우리의 단독콘서트가 열린다. 많이 와서 즐겨주길 바란다.(웃음)

꼭 공연을 보러 가겠다. 나는 시베리안허스키의 열정적인 팬이다. 앞으로도 계속 응원하겠다.

인터뷰가 끝나고 우리는 간단한 술자리를 가졌다. 인터뷰에서 못 다한 이야기를 하면서 기분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밴드 음악을 하는 것,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속사정들…, 그러나 이런 각오 없이 음악을 하겠다고 나선 건 아니지 않은가. 보잘 것 없는 글이나마, 이 글이 음악하기 힘든 이 땅에서 묵묵히 좋은 음악을 만들어 주는 시베리안허스키와 같은 밴드를 알리는 데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다음 인터뷰의 행선지는 대전이다. “뉴크”는 요즘 세상에 아직도 정통 헤비메탈을 고집하며 대전 지역을 중심으로 10여년이 넘게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밴드다. 어떻게 보면 나와 가장 음악적으로 공통된 점이 많은 밴드이기에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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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7 09:17

당신은 추방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인터뷰]『추방과 탈주』저자 고병권
                                                                                                                                        박휘진 기자
'추방과 탈주'의 저자 고병권. 그는 한국사회에서 대규모의 인구가 주변으로 내몰리는 추방이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 '추방과 탈주'의 저자 고병권. 그는 한국사회에서 대규모의 인구가 주변으로 내몰리는 추방이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경찰의 폭력적인 시위 진압을 목도할 때면 ‘왜 경찰은 그들을 때리고 있는가’를 자문하게 된다. 그 답은 이게 아닐까. ‘경찰이 ‘지킨다’고 말하는 국민의 범주에 더 이상 나 혹은 시위대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게 아니라면 왜 경찰이 시위대에게 폭력을 가하겠는가. 시위대도 그들이 지켜야할 국민일텐데. 경찰의 시선으로 본다면 시위를 택한 순간(실은 시위를 택하게 된 계기로부터) 시위대는 더 이상 국민이 아니다. 국민의 범주에서 ‘추방’되었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추방된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두 가지다. 그들을 추방한 국가권력에 더 간곡히 매달리거나 국가의 영역으로부터 탈주하거나. 현 한국사회를 ‘추방’과 ‘탈주’라는 두 키워드로 읽어낸 책이 출간됐다. 고병권(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의 『추방과 탈주』(그린비)가 그것이다. 저자를 만나 그가 책에 담고 싶었던 생각들을 직접 들어보았다.

책을 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궁금해 할 것 같습니다. 제목의 첫 단어가 추방인데요. 누가, 누구를, 어디로부터 추방한건가요.(웃음)

꼭 어떤 사람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취하고 있는 사회구조 자체가 추방을 야기한 것이라고 봐야겠죠. 좁게 말하면 국가에 의한 추방이라고 봅니다. 예전에 쓰던 말로하면 국가와 자본이죠. 더 구체적으로는 이 사회에서 주권을 행사하는 존재, 주권적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에 의한 추방이 일어난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조금 이상해져요. ‘어, 국민이 주권잔데 왜 추방되지?’ 위험한 말이지만 낱국민은 주권자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근대에 생긴 ‘국민이 주권이다’는 말은 국민 전체를 의미했을 때, 국민을 하나로 봤을 때 성립되는 말이고요. 낱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일을 저는 본 적이 없어요. 주권자는 사회에 매우 중요한 결정들, 우리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일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죠. 칼 슈미트 같은 철학자는 주권자를 ‘법을 중단시킬 수 있는 합법적 권리를 가진 사람’이라고 부르죠. 현재 한국 사회에서 그런 권리를 누가 쥐고 있느냐. 글쎄요. 낱국민들이 쥐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네요.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자꾸 변두리로 밀려나고 있고, 그걸 추방이라고 했죠.

책에 쓰진 않았지만 추방이라는 말을 처음 떠올린 것은 중증 장애인 이야기를 듣고 였어요. 중증장애인들을 사회가 방치하잖아요. 완전히 가족들이 다 떠안거든요. 가족 중 한 사람이 사회생활 포기해가면서 거기에 매달려요. 하다하다 지치면 구청에 연락을 해서 시설에 보내요. 주로 종교단체들이 국가보조금 받으면서 그런 시설은 많이 운영하죠. 그런 시설에 가서 살다가 나이가 먹으면, 나이 먹은 사람들을 위한 시설이 또 있어요. 그 후에는 묘지에 묻히겠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사람들은 한 번도 사회에 들어와 본 적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사회로부터 추방된거죠.

그런데 이 추방이 참 특이하다. 추방인 동시에 방치라는 느낌을 주잖아요. 영어로 방치하다가 ‘abandon'인데요. abandon 가운데 있는 ban이라는 말이 추방이라는 뜻이랍니다. 해서 방치는 추방의 한 형태다. 전통사회에서는 추방이 공동체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추방은 밖이 아니라 변두리로 몰아내고 있습니다. 대규모의 인구가 주변으로 방치되는, 추방은 추방인데 주변으로 몰고 주변에 방치한다는 거죠. 그런 추방이 한국사회에 지난 10년 동안 있어온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추방으로 인해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는 상황에서, 혹은 잠정적으로 주변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우리는 탈주해야한다는 것인가요.

물론 탈주를 하자고 하는 것도 있는데요. 일단 탈주를 강요받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불가피한 측면이 있는 거죠. 밀려나는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대의성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대표하는, 매개하는 사람이 없어요. 비정규직 노동자는 조합이 없는 거죠. 어떻게 조합을 결성하겠어요. 매일 매일이 불안정한 사람들이고 사장이 바로 해고할 텐데요. 농민 같은 경우에도 17대에는 비례대표가 없었어요. 인구가 약 300만명이 되는데도 말이죠. 의사수보다 훨씬 많죠. 그런데 의사는 비례대표가 있어요. 이 말은 곧 농민은 정치적으로 대의가 안 된다는 말이죠. 지금 시골의 농민들이 대의되는 방식은 ‘농민 문제’가 아니라 ‘시골 노인’문제나 혹은 ‘가난한 사람들’문제로 여겨지죠. 범주가 빈곤층과 노년층이 되는 거죠. 농민의 문제는 희석되고, 대의가 안 되기 시작합니다.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은 대의성이 없기 때문에 극한 상황에 닥치게 되면 확 돌변하게 됩니다. 아주 사소한 사건으로 인해서 ‘아, 아니다’라고 느끼게 되면 이 사람들은 태도가 180도 달라지죠. 정말 극렬한 투쟁을 하게 되요. 용산참사도 비슷한 문제죠. 어쩌면 그들 중에는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찍은 사람도 있을 거에요. 경제적으로 살아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요. 그런 사람들도 이런 사건들로 인해서 돌변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돌변할 때 의사가 대의되지 않기 때문에, 점거나 난입의 형태로 탈주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선 직접 뛰어들 수밖에 없죠. 노사정위원회 비정규직 난입이라던지, 촛불집회처럼 거리로 뛰어나온다던지, 도시개발정책에 반대해서 점거를 한다던지. 이런 것은 강요받은 탈주에요. 그들은 이게 아니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말해달라고 하죠.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는 거죠.

국가에서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는 대중’이라고 합니다. 만약 국가에서 애초에 그들을 함께 할 존재로 여기고 끊임없이 소통하려 했었다면 그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대중이 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나 주변으로 밀어내고 방치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대중이 된 것이죠. ‘이해할 수 없다’, ‘소통이 안 된다’ ‘괴담이 떠돈다’ ‘난동을 부린다’ 는 말들이 한국사회에 정말 많이 있었잖아요. 이 모든 것의 종합이 ‘이해할 수 없는 대중’입니다. 화염병 던지고, 얼굴 가리고, 평소에 우리가 봐왔던 친숙한 모습이 아닌 흡사 반란군처럼 낯선 모습을 한 채로 그들이 불가피한 탈주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겠죠. 

추방된 사람들이 강요받은 탈주를 할 때 보이는 낯선 모습들을 국가에서는 ‘폭력시위’같은 말로 매도하고 있잖아요. 그러나 그 사람들에게는 말씀하신 것처럼 점거나 난입 또한 어쩔 수 없는 단 하나의 선택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이 ‘폭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2009년 1월에 발간된 고병권의 '추방과 탈주'(그린비).

폭력은 진짜 어려운 주제에요. 폭력에 대해 쉽게 생각하는 건 합법이냐 불법이냐인데요. 이런 이야기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만약 외계인이 지구에 와서 대추리에서 싸우는 모습을 봤다. 한총련 사람들이 죽봉을 휘두르고 경찰과 대치하는 것을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봤다면, 순전히 ‘물리적’ 의미에서 경찰의 폭력이 압도적으로 보였을 거에요. 초등학교 하나를 없애버렸으니까요. 그럼에도 대추리 시위 현장을 ‘폭력 시위’라고 하는 것은 그 ‘불법성’과 깊은 관련이 있을 거예요. 이른바 ‘주권자’ 혹은 ‘공권력’은 불법을 저지를 수가 없어요. 어떤 물리력을 행사해도 그건 공무집행이죠. 그러나 국가 폭력성은 분명히 있어요. 아, 이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정말 인생 헛 산거에요.(웃음) 따라서 법으로는 폭력의 문제를 정의할 수가 없는 거죠. 법 자체의 폭력성이 있죠. 그렇다면 폭력은 물리력을 의미하는냐. 그것도 아니죠. 정신적 폭력, 언어적 폭력 등도 폭력이니까요. 그래서 폭력이 뭐냐에 대한 논의를 하다보면 끝이 없어요.

다만 좁혀서 이야기를 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앞서 말한 법의 폭력성이라던지, 국가 폭력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잠시 제쳐 두고요. 사안을 아주 좁혀서 내가 시위현장에서 떳떳하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의 문제만 놓고 이야기를 하자면, 두 가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물리적 폭력을 쓰는 것이 이로운가. 둘째는 폭력은 공격적인 것인가.

첫 문제와 관련해서 보면, 저도 80년대, 90년대 초에 그런 현장에 많이 있었어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참 공허한 느낌이 들었어요. 시위가 시작되면 이른바 사수대라고 하는 사람들이 앞에 나가서 쇠파이프로 부수고 하는데, 저기를 뚫어서 뭘 하려고 할까. 10미터 더 전진하고, 또 전진하고. 그렇게 시위하는 동안 오히려 사람들은 다 떨어져나가더라고요. 물리적 폭력의 증대가 전체 시위대 힘을 감소시키는 희한한 현상이 발생하는 거죠. 그런데 얼마 전 대추리에서 아주 인상적인 장면을 봤습니다. 한쪽에서는 사수대가 죽봉으로 대치하면서 수세에 몰리고 있는데, 한 쪽에서 어떤 분이 그 초등학교 교문에 자기 몸을 쇠사슬로 묶었어요. 그 모습을 사람들이 카메라로, 핸드폰으로 마구 찍었고 웹에서 퍼졌죠. 그 모습이 알려지고 나서 사람들이 대추리로 많이 몰려왔어요. 죽봉과 물리적 폭력은 사람들을 시위에서 떨어져 나가게 했지만, 그 깜찍하고 작은 디지털 카메라는 사람들을 현장으로 불러 온 거죠.

그 현상을 보면서 엥겔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엥겔스는 “낡은 혁명이 미래 혁명의 발목을 잡고 있다.”, “폭력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히려 저쪽이다.”면서 이제는 시위도 바뀌어야 한다고 했어요. 엥겔스가 보기에 그 당시의 혁명들이 낡았다는 거예요. 바리케이트를 치고, 시간을 오래 끌어서 사람들 시각을 바뀌게 하고, 경찰을 ‘동료 시민’으로 느끼게 하는 것들이요. 그런데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서 대포가 와서 ‘빵’ 하면 모든 게 끝나잖아요. 게다가 폭력으로 맞설 때 여론은 더더욱 안 좋아지고요. ‘저 폭력배들’ 이렇게. 더 안 좋은 것은 바리케이트를 치면 대표자가 생기고, 군대화되고, 대표자가 협상가서 배신해버리거나 구속되면 우왕좌왕하게 되고. 지금과 똑같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엥겔스와 맑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줄곧 이야기했었는데 마지막에 가서 뜬금없이 기독교 이야기를 합니다. 로마의 전복당이라고. 어떻게 로마시대에 이들이 혁명에 성공했을까. 그들은 군대와 싸우기 전에 그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들어버렸다. 이건 뭐냐면 소통과 전염이에요. 대추리에서 카메라로 찍었던 것. 그리고 웹에서 퍼졌던 것. 그것이 더 많은 사람을 불러왔고, 그건 죽봉이나 쇠파이프의 힘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겠죠.

두 번째로 폭력은 공격적인가의 문제.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중증 장애인 투쟁 때 특히 많이 느끼는데요. 2001년 ‘버스를 타자’ 이동권 투쟁 때 그 사람들이 철로에 내려와서 몸을 묶었어요. 육교에 몸 매달기도 하고요. 엄청나게 위험한 시위에요. 또 한번은 한강다리 건너는 것도 지켜본 적이 있는데요. 이른바 보통 사람은 15분이면 건너는데  그들은 전동 휠체어에서 내려서 온 몸으로 기어가는데 3시간 넘게 걸려요. 그나마도 보통 절반 쯤에서 다들 혼절해요. 너무 힘들어서. 그 시위는 경찰 한 명도 다치게 한 적이 없지만, 그 사람들은 목숨을 내걸고 해요. 너무 과격하죠. 전에 박경석 (장애인이동권연대 공동대표)선생한테 물어본 적이 있어요. “왜 이렇게 엄청나게 과격하게 하냐. 이건 ‘비폭력 과격시위’라고”. 근데 그게 메시지가 강해요. 공격적이라는 걸 확 느껴요. 그들은 경찰도 두려워하지 않아요. 곤봉에 그냥 몸을 내 던져요. 어떤 두려움도 없는 것. 그들 시위의 진실성. 이런 것들이 매우 공격적으로 느껴지는 거죠. 5월과 6월의 촛불집회 때도 그랬죠. 물대포 쏘면 처연하게 맞고, 구속하겠다고 하면 ‘닭장차 투어’라고 자기가 먼저 올라타고. 매우 공격적인 시위죠. 이게 바로 비폭력 직접행동이죠.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만 간디의 이미지가 달라요. 우리는 간디를 평화로운 사람으로 보고, 혼자 단식하는 사람으로 보는데, 사실 간디는 매우 공격적인 사람이고 물러나지 않는 사람이에요. 대추리에서 쇠사슬로 문에 자기 몸을 묶었던 주민, 철로에 몸을 묶은 장애인처럼요. 비폭력 직접행동이라는 것은 폭력에 물려나지 않겠다는 거예요. ‘폭력같이 저열한 것에 굴복하지 않겠다. 나는 한발도 못 물러난다’고 그 자리에 딱 서는 거에요. 충돌을 회피하지 않아요. 우리는 비폭력 시위를 충돌하지 않는 시위라고 생각하는데, 이 사람들은 충돌하죠. 신화 같은 이야기지만 두려움 없이. 두려움을 초월해서 맞서는 것이죠.

지금의 사회구조가 계속 주변인들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불안해하면서 밀려나지 않으려 매달리고요. 반면 국가는 나의 범주에서 나가면 더 이상 살펴주지 않겠다는 식으로 ‘협박’하고, 실제로 그 폭력성을 대놓고 보여주기도 하고요. 책에서는 국가의 이런 폭력성이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고 하셨는데요.

요즘 학자들이 많이 하는 이야기고 저도 공감하는 건데요. security 담론이란 게 있어요. 치안으로 해석하는데요. 이것은 안팎을 구별하지 않아요. 테러리스트가 아프간에 있는지 미국에 있는지 알 수 없고, 누군지도 알 수 없잖아요.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적에 대해서 초법적인 관리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모두가 수용하는 거죠. 이건 범인이 집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국가를 집에 들이는 거죠. 한국에서도 최근에 전화감청법 통과되려고 하고, 사이버 관련법들도 만들려고 해요. 그런 것을 보면서 저는 ‘뭐가 두렵길래 저럴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마치 밤을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항상 불을 켜두려고 하고, 네 얼굴 봐야겠다고 가리지 말라고 하고, 댓글까지 다 관리하겠다고 하고요. 이게 테러와의 전쟁에서 드러나는 특징이에요. 적이 어디서 오는지 모른다는 것. 누가 적인지 모른다는 것이요. 그런데 이것은 한편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과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0개월 계약서’처럼 언제 해고될지 모르고, 혹은 호출 노동자처럼 오늘 문자오면 일하고 없으면 공치는 거고요. 이렇게 극도로 불안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는 거죠.

이건 신자유주의 이후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그 전에는 어찌됐든, 어떤 의도로 그랬는지는 몰라도 국민을 안에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배워야 된다. 모두가 잘 살아야 된다’는 식의 국민주의가 있었어요. 그런데 신자유주의 이후에는 ‘이들을 끌고 갈 필요가 없다. 관리나 하는 게 낫다’로 바뀐 거죠. 그리고 그런 관리의 대상이 된 것이 정부 정책에 의해 밀려나고 방치됐던 사람들 인거죠. 이해하려 하지 않고 방치하니, 그 사람들이 누군지 알 수 없게 되고 관리하려고 할 때 앞서 말했던 이해할 수 없는 대중과 마주하게 되고요. 알 수 없게 되니까 더 관리하려고 들고요. 더 폭력적으로 행동하고요. 더 강화하고요. 신자유주의에서 정부는 모든 게 축소되는데 딱 하나 커지는 부분이 바로 치안입니다. 기동대도 만들고. 왜냐면 빨리 대응해야 하니까요. 정부에 의해서 대중이 불안에 빠졌는데, 그 불안한 대중을 보고 정부도 불안해하는. 서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각각 더 강화하는 것뿐이죠. 이런 알 수 없는 게임.  
  
지식인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식인’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자신의 문제이기도 할 테고요. ‘연구자 대중’이란 말을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요. 

마치 다른 대중들이 각자의 생활영역에서 살아가듯이 공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죠. 공부를 해서 다른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하면서 쭉 살아가는 사람이 연구자 대중이죠. 저는 지식인 이미지를 다르게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그간 지식인 이미지가 좋게 봐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위에 있고, 더 멀리 보는 존재’정도 였는데, 그게 아니라 저는 ‘연구자 대중’이어야 한다고 보는 거죠.

사실 대중 안에 포함된 사람들은 각자 다른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잖아요. 공장사람들 데려다가 농사일시키면 그 사람들은 농작물 다 말려 죽일 거예요. 그들은 삶의 양식이 다르거든요. 근데도 그 사람들을 다 대중이라고 불러요.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책 읽고 글 쓰고 개념이나 담론 만들고 하는 건데, 따지고 보면 그게 또 그렇게 다른 일들은 아니거든요. 농민이 공장노동자가 만든 공산품들도 쓰면서 살아가듯이, 농민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 더 생산적으로 살아야겠다고 느끼게 하듯이, 예술가의 창조성이 우리 연구자들에게 또 다른 영감을 불러오듯이, 우리가 만든 담론들을 다른 사람들도 같이 공유하는 거죠. 그게 지식인이 하는 일이라고 봐요.

2006년 대추리 시위 현장. 대추리 주민들은 '올해도 농사짓자'는 구호를 외쳤다.
삶과 투쟁의 현장은 다르지 않다.

책에서는 지식인의 죽음을 예견했지만 그건 또 분명히 지식인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 상황에서 지식인의 역할이랄까요.  

지식인만의 특별한 책무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농부가 책무로부터 면제되지 않고, 노동자도 그렇듯이. 학자들도 대중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죠. 그런 면에서 지식인에게도 노동자에게, 농부에게 묻듯이 ‘너는 지금 뭘하고 있냐’고 물을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지식과 정보가 상품이 되면서 도리어 삶과 무관한 지식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런 측면에서 지식인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보고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지식인의 역할은 분명히 있다고 봐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할 일들이 모두 있듯이. 지식인이 뭔가 다른 위치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역할을 해야죠. 

그런 측면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나의 앎이 곧 실천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06년에 행진하면서 인상 깊었던 것 중에 하나는 대추리에서 본 “올해도 농사짓자”였습니다. 그리고 중증장애인 투쟁의 형태 ‘비폭력 과격시위’같은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오냐고 박경석 선생한테 물었을 때 그는 “어디서 나오는 게 아니다. 우리는 이게 삶이다”라고 했습니다. 위험하니까 줄로 묶고 하는 것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지식인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삶을 단절시키고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내 앎을 곧 실천으로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영역에서든지 싸워서 혁명하겠다가 아니라, 삶이 바뀌었을 때 그게 바로 혁명인거죠. 지식인들에게 투쟁이란 지식투쟁이 되겠죠. 그 지식 투쟁을 통해 우리의 삶도 바뀔 테고요.

지식인도 그렇고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현장’으로 연장시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자신의 불안한 삶을 알면서도 모른척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현장은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죠. ‘왜 현장에 가지 않느냐’는 곧 ‘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느냐’는 말일 거예요. 그리고 그 사건은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계기이고요. 그 현장은 언제든지 나타나고, 사건은 도래합니다. 모두가 그 사건 속에 우리를 적극적으로 열어야 됩니다. 사건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맡기고 내던져야 변화가 오는 거겠죠.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은 현장에 있어야 하고, 자신의 삶을 현장화 해야 합니다. 그건 어느 누구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저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라고 봐요. 중요한 것은 자기가 있는 곳이 현장이 되게 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현장 안에 있다 보면 우리는 당연하게 알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 엮여 있다는 걸요. 사건은 나 개인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일어나는 거고, 그 사건을 같이 겪으면서 함께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죠. 그리고 거기서 고립이 극복되는 거겠죠. 선언문에서도 썼는데요. “나는 내 자리에서 싸우지만, 내 친구자리가 또한 내 자리라는 것을 안다”고요. 우리는 같은 이유로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그 속에서 서로 연대가 될테고요.

고병권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면서 ‘느낌을 받았다’, ‘인상적이었다’라는 말을 자주 썼다. 같은 일을 경험하고도 아무 감응 없이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그 일에 자신을 온전히 열어 온 신경으로 그것과 교감하는 사람들이 있다. 후자만이 일을 사건으로 경험하며, 일상을 현장으로 변화시킨다. 지금 한국사회는 어떤가? 우리는 충분히 열려있는가? 우리는 충분히 교감하고 있는가? 고병권은 추방이 적극적인 방치라고 했다. 이는 비단 국가와 국민의 관계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범주를 좁혀 나와 나의 삶을 대입해보자. 우리는 우리의 삶을 방치하고 있진 않은가. 사회와 개인이 무관하지 않음에 이의가 없다면, 우리는 좀 더 열린 자세로 일상을 대해야 할 것이다. 일상을 현장으로 변환시키는 ‘열림’이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첫 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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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5 12:29

다문화가 주는 에너지에 단점은 없다

[인터뷰]이주노동자의 방송 이병한 대표
                                                                                                                                         이주호 기자
이주노동자방송 이병한 공동 대표.
▲ 이주노동자방송 이병한 공동 대표.

2월 22일 이주노동자의 방송MWTV가 경선을 통해 이병한, 소무뚜(버마) 두 사람을 공동 대표로 선출했다. RTV의 지원 중단, MB정권의 이주민 탄압, 실업 증가로 인한 이주민에 대한 근거 없는 배타 의식 고조 등 한결 같은 악화 일로의 상황에서 이주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MWTV 이병한 대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어 봤다.

이주노동자의 방송이 최초로 경선을 시도했다. 경선을 통한 선출을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종래에는 후보를 추천하고 추천인을 대상으로 표결을 했다. 공약 같은 것을 내세우면서 대표를 뽑는 건 아니었는데 내부에서 경선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 단체의 경우 이주민들이 만들어가는 단체이기에 후보에 대한 정보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고, 선거와 관련된 공지가 전부 한글로 돼 있기에 이 또한 정보를 공유하는 데 장애가 된다. 경선 과정에서 생겨날지도 모르는 불평등을 생각하면 경선을 하기에는 때가 이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대표가 외국인 1명, 한국인 1명이다. 각자의 역할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인가?

이주민 대표는 주로 이주민 공동체와의 네트워크 확장에 중점을 둔다. 한국인 대표는 전반적인 업무를 조정하는 일을 맡는다. 처음에는 네 명이 공동대표를 맡았고 나 역시 거기에 속했다. 한국인인 내가 이주노동자방송의 대표를 맡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행정적인 면에서 특히 관청에 드나드는 문제에 있어선 한국인들의 역할이 필요했다. 이주민 대표가 처리하기에는 접근조차 힘든 부분이 있다. 그러다 업무 효율 때문에 두 명으로 줄였고, 개중에는 한 명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업무 효율을 내세우는 것은 실질적으로 이주민 대표를 배제하는 것일 수 있다. 한국 활동가들이 어느 순간부터 강한 리더십을 필요로 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여기서 이주민 활동가들이 소외되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리더십이란 게 얼마만큼 일의 완성도에 기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다른 미디어 단체에 비해 완성도가 미비하다는 사실은 남도 알고 우리도 안다. 한국 사람들이라면 이주민들과 보조를 맞추는 데에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고 업무가 느슨해진다는 느낌도 받겠지만, 이주노동자의 방송은 이주민들이 만드는 미디어 단체고 생생한 이주민들의 소리를 내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다.

이주노동자의 방송 내에서도 역할이 나뉠 수밖에 없고 여타 단체에서라면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들을 일정 부분 포기해야 한다면, 사회적으로 봤을 때 이주민과 한국인의 구분이 없는 통합사회를 이룬다는 건 결국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일하는 방식의 차이 때문에 생겨나는 불편함을 들어 다문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소통이 힘들고 일의 효율이 떨어지는 등, 다름이 주는 에너지를 얻기까지는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리 내부에서도 다문화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다.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면 사회적으로도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내부의 갈등이나 차이를 줄여나가면서 성공적으로 단체를 꾸려 가면 외부에 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다문화가 주는 에너지가 무엇이기에 불편한 과정을 감수해야 하는 것인가?

하나는 인권에 관한 문제다. 모든 인간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말하면서 다르다는 것 때문에 차별 받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또 하나는 다른 문화가 우리에게 이식됐을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장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다문화에 단점은 없다. 문화는 흐름이고 흡수하면서 발전하는 것이다. 보수적인 사람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그것을 정체성의 잃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정체성이란 것은 계속해서 달라지는 것이다. 흑인 한국인, 백인 한국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상황이 되면 인종 차별은 없어질 것이다. 다문화에 대한 인식으로 인종 차별의 문제마저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

보수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것보다 다문화의 장점과 이주민들의 가치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으로 보수를 변화시키는 방법일 수 있다. 문화적 다양성이란 용어의 정의도 다시 해야겠지만, 최종적으로는 차별 없이 문화가 뒤섞여야 한다. 서울이 전국에서 맛있는 음식점이 가장 많은 도시가 된 것은 일종의 다문화를 즐김으로써 얻는 풍요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이주노동자의 방송은 이제까지 이주노동자 실태를 보여주는 데 치중하고 있었다. 단순히 대변만 하는 입장이었는데, 통합 사회를 목적에 둔다면 한 측을 대변하는 것을 넘어서 통합적 관점을 제시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주노동자의 방송의 지향점이 두 가지다. 첫째는 한국에 이주민 문화를 알리는 것이고, 둘째는 이주민에게 한국을 알리는 것이다. 이주노동자방송은 11개 나라말로 다국어 뉴스를 하고 있는데 그 부분에서 RTV와 갈등이 있었다. RTV 입장은 똑같은 내용을 언어만 달리 내보내는 게 무슨 의미냐 하는 것이었고, 한국어를 잘 몰라 한국에 관한 정보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방송을 만든다는 게 우리의 취지였다. 언어적 장벽을 제거하는 게 우선이지 한국 사람들에게 흥미를 제공하는 것은 목적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편파적인 내용이라는 항의를 받기도 했는데, 우리는 주류 미디어에서 다루지 않는 어두운 면, 잘 알려지지 않은 면을 다룬다. 밝은 내용을 안 다루는 건 아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퍼블릭 액서스다. 퍼블릭 액서스에다 대고 왜 한쪽의 이야기만 하는가, 통합적 관점을 제시하라 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한다.

이주노동자의 방송은 참여자들의 자발성과 아마추어성에 힘입어 지탱되고 있다. 그러나 보도라는 것은 결국 여론을 형성하고 나아가 정책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가기 마련이다. 이런 측면에서 언제까지나 아마추어리즘으로 밀고나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전문성이라는 건 양날의 칼 같은 것이다. 전문성이 과하면 이주민들은 이해를 못 한다. 진보 미디어에서 이주민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보자면 어떤 부분에서는 이주민들이 접근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사용하는 어휘만 해도 최소한 10년 이상 한국에 살아야 어렵게나마 읽을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거기에 정책적이고 철학적 내용까지 포함되면 더 어려워진다. 이주민을 대상으로 할 때는 쉽게 풀어야 한다는 것과 그들의 의사를 반영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전문성이란 건 다문화나 다문화 관련 이슈에 관심이 있는 전문가들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이끌어가고 도와준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되고, 서로 나눈다는 관점에서 결합해야 한다. 정책, 문화, 미디어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지식과 기술을 나눠주고 대신에 다문화를 배워가는 것이다. 다문화란 쉽지 않다. 수업료를 지불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 문화적 차이를 스스로 겪어가다 보면 배우는 것도 클 것이다. 또한 우리가 가진 공동체 네트워크를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주노동자 관련 목소리들은 ‘교장선생님 훈화의 역설’이란 말을 떠올리게 한다. 정작 들어야 하는 애들은 듣지 않고, 듣고 있는 애들은 그 말씀을 듣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하는 애들이다. 관심을 갖는 이들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방안은 없는가?

답답한 부분이다. 컬처뉴스도 마찬가지 아닌가. 보는 사람만 보는데, 딱히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RTV가 중요하다. RTV의 지원이 없더라도 그쪽 일은 계속 해나갈 생각이다. 온라인 활동 역시 비중 있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주류미디어에서 다루기 쉽지 않은 부분, 거북한 내용을 담지 않으려는 습성 때문에 외면되고 있는 현실들을 온라인을 통해 알려 가려 한다. 유튜브도 주요 수단이 될 것이다. 포기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이렇다 할 대책 없이 꽉 막혀 있는 상황에서는 주류 미디어 말고는 모두 두들겨 봐야 하지 않겠나. 네팔, 방글라데시, 버마와의 콘텐츠 교류도 준비하고 있다.

얼마 전 연구 사업으로 이주노동자들의 미디어 사용 실태를 조사한 것으로 안다. 전문성을 키워간다는 측면에서, 문제를 드러내는 데서만 그치지 말고 사회적 관점을 형성해 가는 작업도 전개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문제는 이주노동자의 방송만으로는 힘들다. 우리 매체가 가진 한계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답답한 것은 의외로 진보 성향의 사람들도 다문화에 비중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다문화 사회로 넘어간다면 한국인에 대한 인식,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진보단체조차 인종 차별 의식을 가지고 있다. 민예총만 해도 단체이름에 민족을 붙이고서 배타성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니 담론 형성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민예총 내에서도 다문화가 큰 의제는 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문화 다양성에 관한 의제가 좀 더 많아지고, 폐쇄적으로 돌아가는 한국사회가 개방에 대한 의제를 설정해서 그 장점에 대한 논의를 계속해 갔으면 좋겠다. 정치적인 면에만 매달리는 태도를 버리고 사회적 개방부터 생각했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이다. 다문화라는 것은 내부에서 자기를 열어야 가능한 것인데, 일단 사람이 열리게 되면 다른 문제들도 열린 상태에서 논의가 가능해진다. 타자에 대한 이해나 수용이라는 측면만 해도 문화 다양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주민의 인권과 문화 다양성이란 것은 현실적으로 복지라는 것과 맞닿아 있다. 이주민 복지라는 현안에 대해서는 어떤 방안을 갖고 있는가?

방송에서 계속 다뤄왔던 문제인데, 정책적으로 풀어나가야 하는 부분이기에 정책 제안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회 영역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역할이 드러내는 것이라면 변화시키는 것은 진보단체의 역할이다. 보수진영에 대한 기대야 어차피 안 한다 하더라도 진보 진영에서만큼은 한국 사람의 집단 이기주의를 벗어난 이의 제기와 정책 변화 요구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보수적 관점에서 봐도 자기 나라에 차별이 존재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진정한 보수라면 분명 생각해 봐야 할 점일 텐데, 하물며 진보에서 이것을 남의 일로 생각한다는 것은 진보의 책무를 등한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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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4 07:57

“구호가 아니라 노래를 부르고 싶다”

[인터뷰]‘해체통보’ 받은 국립오페라합창단 조남은 지부장
                                                                                                                              김나라, 안태호 기자
국립오페라합창단 해체에 맞서 싸우고 있는 조남은 지부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 국립오페라합창단 해체에 맞서 싸우고 있는 조남은 지부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아, 구호말고 노래하고 싶다”

사실, 긴 인터뷰가 아니라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무대 위에선 노래로 빛을 발했을 합창단원들이 조끼를 맞춰 입고 농성을 하고 있는 장면은 왠지 익숙하지가 않았다. 아마 본인들에겐 더더욱 그랬으리라. 무려 7년 동안 연습생 신분으로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비용을 받아가며 상임화 약속 하나에 기대를 걸어온 그들이었지만, 오페라단이 그들에게 남긴 것은 ‘합창단 해체’라는 싸늘한 행정조치뿐이었다. 단원들은 이렇게 물러설 순 없다는 생각에 공공노조 문화예술분과에 가입해 노조를 결성하고 오페라단 측과 교섭을 진행하며 오페라단 사무실 입구에서 농성을 진행중이다. 그러나 정작 이소영 단장과 문화부는 서로 눈치만 보며 해결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오페라합창단의 문제는 문화예술의 시대라는 지금, 예술이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지 분명히 보여주는 사례라 할 만하다. 2월 18일 예술의 전당에서 조남은 지부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현재 교섭 상황은 어떤가.

어제 4차 교섭이 있었고 목요일에 단장과 5차 교섭을 앞두고 있다. 1차 교섭이 2월 3일이었다. 2주가 채 안됐는데 4차까지 끝났다. 어제 문화부 예술분과 과장님, 사측과 이야기를 했는데 진행된 것은 없다. 우리가 문화부에 찾아가서 항의 면담을 했었다. 왜 문화부에서는 가만히 보고만 있느냐, 해결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했더니 조만간 합창단원들과 이야기 하고 싶다고 해서 어제 만난 거다.

문화부에서는 중재나 해결의 의지를 보였나.

문화부는 발을 뺀 상태다. 사측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고 우리 입장을 이해하는 건 없다. 그분들은 음악 전공하지 않은 분들이 많으니까 우리 사정을 잘 모른다. 이번에 직원분이 많이 교체되었다고 하는데 합창단이 생긴 7년 전부터 계속 해 오는 분이 없는 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문화부에서는 우리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4차 교섭까지 오면서 주로 쟁점이 되었던 사안이 무엇이었나.

해고통보를 철회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12월 31일까지 계약기간이었는데 이소영 단장이 7월에 취임해서 아무런 만남이 없었다. 그런데 외부에서는 합창단 해체한다는 데 무슨 말이냐 하는 소문이 많이 들었다. 음악계가 좁으니까. 그래서 직접 이야기를 들으려고 면담 요청을 여러 번 했는데 바쁘다는 이유로 우리를 회피했다. 

상임단원은 몇 명인가.

상임단원에 성악가 세분이 계셨고 미술감독, 연출, 지휘자분들이 계셨다.

작년에 공연을 계속했는데 그분들이 지금 한분도 없었다는 말인가.

그렇다. 이런 일도 있었다. 상임단원들이 쓰는 방이 하나 있었는데 여름에 휴가 다녀온 후 보니 짐이 다 사라져 있었다. 이소영 단장이 자신이 프로젝트 팀을 데려와야 하는데 이 방을 써야 해서 뺐다고 했다. 말도 없이.

그럼 합창단 문제만이 아니라 상임단원들과도 문제가 있는 건가.

상임단원들도 다 해고한 상태다. 단장이 어디까지 힘이 있는 건지 궁금하다. 너무 자기 방식대로 부임하자마자 한번에 다 갈아 치웠다. 합창단원, 상임단원들, 팀장님들, 국장님도 다 나가고 지금 다 새로 오셨다. 취임한지 이제 7개월인데 이런 일들을 다 벌이고 있다.

'구호말고 노래하고 싶다' 이보다 더 절절하게 이들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사회적 기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던데 그건 무슨 말인가.

처음에는 단장을 못 만나서 국장님과 면담을 하게 됐다. 해고 통보 전에. 근데 그쪽에서 합창단을 재정적으로 운영할 수 없기 때문에 나가서 합창단을 따로 만들면 계약을 해 주겠다고 했다. 2월 3일에 나가서 만들라는 이야기를 한 거고. 2월 10일에 사회적 기업 이야기를 했다. 그 사회적 기업에 소개시켜줄 의향이 있다면서 창단하게 해 주겠다고 한 거다. 우리도 어느 단체인가 알아봤더니 ‘나눔과 기쁨’이라는 순복음 교회에서 하는 곳이었다. 83만원에 4대 보험 된다고. 우리는 금액 때문에 그런 건 아니고 7년 동안 모든 아픔을 참으면서 그런 대우를 참으며 일을 해 왔는데. 단장님 한 명 바뀌었다고 합창단을 없앤다는 것은 부당해고라고 생각한다.

2002년도에 80대 1의 경쟁을 뚫고 오디션을 통과해서 선발된 건데 지금에 와서 우리가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경제적으로 안 좋은 것도 아닌데 단지 규정에 없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우리가 나가야 한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국립이니까 외부에서 보면 임금도 많이 받고 대우도 좋고 복지도 좋을 것처럼 보이지만 남들 앞에서 이야기를 못했다. 2002년도에 30만원 받았고 최근엔 70만원 받은 거다. 타 음악회에 가서 일하려고 하면 사측에 허락을 받아야 하고, 그런 악조건이 많았다. 보험이 안되니까 공연 중 다친 사람이 있어도 전혀 혜택도 받지 못했다. 그렇게 억울하게 일을 해 왔다.

계약 당시 다른 약속을 받은 건 없었나.

당시 모집공고 상에는 2003년 3월에 상임화 예정이라고 써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상임화 되는 걸로 생각했고. 근데 상임화가 안 되서 매년 상임화 이야기를 많이 했다. 당시 단장은 상임화 하려고 노력은 했는데 올해 안됐다면서 내년에 다시 노력해 보자는 식으로 매년 말했다. 그렇게 7년이 된 거고 단장이 바뀌면서 해체 통보를 받았다.

외국 같은 경우 발레단, 합창단, 오케스트라 세 개 단체가 한 극장 안에 있는 시스템으로 운영하는데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다 따로 나가 있다. 그러다보니 오페라 공연을 할 때 가장 시급했던 문제가 합창단 문제였다. 합창단은 액팅도 있고 무대에서 보이기도 하기 때문에. 국립합창단이 있지만 거기는 콘서트 위주고 일정 맞추기도 힘들다.

이소영 단장도 국립은 국립다워야 한다고는 하지만 7월에 부임해서 국립합창단과 공연한 작품이 없다. 다 외부에서 불러서 한 거고 계명대 학생들을 쓰기도 했다. 국립오페라단이. 질적으로 말이 안되는 거다. 학생들을 썼다는 것은.

농성중인 단원들.

학생들이라니? 작년에도 계속 공연한 거 아닌가.

했었다. 35타임으로 계약되어 있어서(한 타임은 세 시간씩이다). 작품이 있으면 그 한 달 안에 35타임 연습을 해야 하는 거다. 이번에 이소영 단장이 국립합창단과 처음으로 계약했는데 국립합창단은 14타임으로 계약했다. 모든 연출가들은 자기 작품에 대해 욕심이 있으니까 충분한 연습시간을 갖기 위해 끝까지 연습시간을 늘리려고 한다. 14타임이면 음악연습 한 두 타임, 무대 리허설 4타임 정도 하고 나면 나머지 시간으로 액팅도 만들어야 하고 노래 연습도 해야 하는데 완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근데 우리는 국립오페라합창단이고 예술 하는 사람으로서도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서 35타임을 해 왔다. 또 35타임이 부족한 것 같으면 더 했다. 그렇게까지 노력을 했는데도 그걸 인정해 주지 않고 규정집에 없다고 해고하는 것은 누가 봐도 부당하게 생각할 거다.

성악가 40분들이 서명 운동에 동참했다고 들었다.

성악가뿐만 아니라 시합창단들, 지방합창단들도 서명해 주신 분들이 많다. 또 우리 공연을 보러 와 주셨던 분들도 많이 있다. 오페라합창단은 우리나라 최초 오페라 전문 합창단이다. 그래서 음악 교수님들도 필요하기 때문에 서명도 해 주신 거고. 시민들도 응원을 많이 해 주고 계신다.

오페라합창단이 평가가 좋았다고 알고 있다.

2004년도에 일본, 프랑스와 <카르멘>으로 축제를 했다. 일본 후지와라 합창단과 조인트로 우리나라에서도 하고 일본에 가서도 공연을 했다. 그때 지휘를 맡으신 분이 정명훈 선생님인데 “이런 합창단은 처음 봤다. 우리나라에 이런 합창단이 있었냐”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최근 열린 대구국제오페라페스티벌에서도 <라 트라비아타>로 공연을 갔었는데 합창부분에는 안주는데 이례적으로 대상을 받았다. 그리고 <루치아> 작품상을 받았다. 5월에 고양시 어울림극장에서 공연하기로 되어 있는데 이소영 감독이 우리를 다 빼버리고 다시 새 작품으로 <루치아>를 한다고 한다. 상 받은 작품에서의 무대, 캐스트, 합창단원들 은 한 명도 쓰지 않고 다시 연출을 하고 다른 사람들을 쓰는 거니 상 받은 작품이 아니라 다른 작품이 아닌가. 오페라합창단이 생기기 전에 이런 문제가 많았었는데 7년 전으로 역행하는 거다.

원래 단장에게 인사권이 다 있는 건가.

문화부에 물었더니 애매하게 말했다. 딱 부러지게 어디까지 권한이 있다고 말한 게 아니라 사측에서 알아서 하는 게 낫지 않느냐는 식으로. 

합창단 없애는 것도 우리가 납득이 가게 증거자료를 갖고 와서 답해 달라고 하니까 아직까지 아무것도 제시하는 것이 없다. 규정에 없는 것을 왜 합창단에 책임을 지워 쫒아 내는지 모르겠다. 규정을 만들지 않은 건 사측의 책임이 아니냐고 했더니 문화부에서는 사측의 책임도 아니라고 했다. 이사들과 기획재정부에서 예산이 나와야 상임화가 된다고 하더라. 그런데 기획은 문화부에서 하는 건데 문화부에서 기획을 올리지도 않았는데 예산이 나올 리 없지 않나. 문화부에서도 말이 안 되는 얘기를 하더라. 우리가 기획을 올려야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문화부 소속이고 그럼 그분들이 해야 할 일들인데 왜 우리에게 미루는지 모르겠다.

합창단 해체는 고용을 창출하겠다는 정부 정책에도 반하는 것 아닌가.

우리도 그렇게 따졌더니 그 점에 대해서는 아주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오페라단 사무실 앞은 대자보와 현수막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측에서는 오페라합창단을 왜 해체한다고 했나.

문화부 특별 지시, 재정 효율성, 3개 단체 합병 때문에 해체 한다고 하는데 문화부에서는 특별 지시를 내린 적도, 단체 합병 한다는 말도 한 적이 없다고 하고 있다. 재정 같은 경우 오페라단 예산이 8억이 올랐다. 이소영 단장은 합창단이 지금까지 경상비로 운영되어 왔는데 8억 인상은 작품비에 해당되는 거라고 하고 문화부에서는 우리가 작품비로 운영되어 왔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게 거짓말인거다. 하는 말이 다 틀리니까 신뢰가 깨졌다. 문화부는 지금 완전히 발을 뺀 상태고 이소영 단장이 댔던 세 가지 이유가 다 틀리니까 신뢰가 깨졌다.

그럼 문화부에서는 예술단체 통합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은 건가.

하지 않았다. 이소영 단장이 그렇게 이야기 하는 거다. 실제 2008년 4월 신문기사를 보면 유인촌 장관은 발레단, 합창단, 오페라단 3개 단체 합병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근데 그게 이소영 단장의 생각이라고 볼 수 없는 게 사람들을 다 아는 상태에서 다 자르고 그러는 게 위에서 이야기가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사측에서는 1월 8일 면담 때 문화부장관이 특별지시를 내렸다고 말했는데 지금은 그런 말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녹취한 자료를 갖고 있다.

오페라합창단이 해체 되면 당장 예상되는 부작용이 눈에 뚜렷하게 보이나.

우리가 공연을 매달 해 왔는데 합창단이 없다면 작품을 올릴 수가 없다. 지금 모든 합창단이 스케줄이 있는데 대학생을 쓸 수도 없는 거 아니지 않나. 국립 단체에서. 공연 횟수도 줄어들 것이고. 양질의 오페라를 볼 수가 없다.

합창단이 생기기 이전과 이후의 공연 횟수가 차이가 나나.

그렇다. 2002년도에 24회 정도 했는데 지금은 연 54회를 한다. 계속 늘어난 거다. 콘서트는 일년에 십 회 좀 넘게 하고, 오페라 공연이 많다.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공연도 많이 하고 있고. 이소영 단장은 지방 공연 때는 지역 문화 발전을 위해서 지방에 있는 합창단을 그때그때 쓴다고 하는데 이번 포스코에서 공연할 때도 합창단을 못 구해서 계명대 학생을 쓴 거다. 그래서 관객들의 항의를 많이 받았다. 첫 공연 하고 다음 날 공연에는 관객들이 반도안왔다.

이소영 단장 취임 이후 <휘가로의 결혼> 공연을 처음 올렸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했다. 객석 470석이 안채졌고 연말이었는데도 매진된 날이 하루도 없었다.

"상임화가 되어 국립답게 운영되어서 우리나라 대표 국립오페라합창단이 되었으면 한다".

몇몇 언론에서 이소영 단장이 감금됐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무슨 얘긴가?

교섭하다가 이야기가 잘 안되니까 업무 보러 가겠다고 해서 어떻게 교섭하다가 갈 수가 있냐고 했더니 그냥 방을 나갔다.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우리보고 다 나가라고 하고 안에서 문을 잠근거다. 그래놓고 그 날 밤에 경찰에 연락해서 방에 감금됐다고 해서 경찰이 왔다. 경비 아저씨한테 우리가 감금한거냐고 말해달라고 했더니 안에서 잠그던지 카드 대고 들어가는 건데 밖에서는 감금 할 수도 없다고 해서 경찰은 바로 돌아갔다. 근데 그걸로 감금했다고 했다.

지금은 철야농성 하고 있는 건가.

조를 나눠서 안 되는 사람들은 빼고 철야농성하고 있다. 일인 시위도 하고 있고.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단장이 방안을 갖고 오지 않으면 우리는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단원입장에서 얘기하자고 할 거다. 이 제안이 안 받아들여지면 밖으로 나가 시민들에게 알리고 문화부에 책임을 묻고 국회의원들에게도 나가서 선전을 할 거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소영 단장은 거듭 국립단체는 국립단체다워야 한다고 하는데 이소영 단장이 한 말은 지금까지 다 거짓말이었고 지금까지 운영되어 온 것도 국립다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소영 단장은 국립합창단이 최고의 합창단이라고 하는데 콘서트 분야에서 최고인거고 우리는 오페라 분야에서 최고다. 문화부에 계신 분들은 현장 상황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바라는 것은 이번에 상임화가 되어서 국립답게 운영되어서 우리나라 대표 국립오페라합창단이 되었으면 한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생활을 했지만 앞으로는 정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공연 하면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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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7 07:58

서울 가려 했으면 진작에 갔다

[강종택의 하이웨이 스타]① 정통 하드록 밴드 '아프리카'
                                                                                                                      강종택 _ 기타리스트

뮤지션에 있어 장르는 중요하지 않다. 특정 장르에 한정시킨다기보다는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만들다보면 나오는 음악, 그것이 바로 우리의 색깔이다.
▲ 뮤지션에 있어 장르는 중요하지 않다. 특정 장르에 한정시킨다기보다는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만들다보면 나오는 음악, 그것이 바로 우리의 색깔이다.

레드제플린을 동경하며 겁도 없이 무작정 기타를 잡게 된 것도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모든 음악인들이 그러하겠지만 나 역시도 손끝에 물집도 안 잡혔던 시절엔 마지막 한국 정통 록을 지키겠다는 큰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수많은 밴드들의 공연을 찾아다니며 꿈을 키우던 그때가 가끔 생각이 난다. 두려울 것도, 잃을 것도 없었던 그 시절의 추억은 지금도 나에게 애틋한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그렇게 시작한 나의 음악생활은 밴드 <A-Frica>와의 만남 이후 큰 전환점을 가지게 된다. 평소에 존경해왔던 밴드 <A-Frica>의 기타리스트로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그때의 기억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풋내기 기타쟁이에서 탈피하던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A-Frica>와 함께 활동을 하면서 가장 많이 얻은 것은 다른 팀들과의 교류였다. 나에게는 종교와 같았던 <블랙홀>, <블랙신드롬> 등과 같은 훌륭한 밴드들과의 만남은 22살의 어린 나에게 벅찬 감동이 아닐 수 없었다.

컬처뉴스에서 밴드 인터뷰 연재 의뢰를 받고 이러한 나의 소중한 인연들로 작은 음악이야기를 엮어 보는 건 어떨까 생각해 봤다. 동시대에 함께 음악을 했던 사람으로서 요즘 밴드들은 어떠한 정신을 가지고 음악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이야기 나누는 것은 내 음악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기회도 될 것 같았다.

아프리카를 만나기 위해 그들의 공연이 열리는 동대문 두타야외무대를 찾았다. 도착하기도 전, 지하철 계단을 오를 무렵 낯익은 사운드가 들렸다.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보컬(윤성)의 목소리, 육중한 드럼사운드. 틀림없는 아프리카였다. 추운날씨에도 불구하고 야외무대에서 리허설을 하고 있는 아프리카의 연주를 잠시 감상했다. 함께 공연을 다니다가 이제는 객석에서 그들의 무대를 바라보는 기분이 참 묘했다. 리허설이 끝나고 간단한 저녁식사를 하면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나의 고향과 같은 밴드 A-frica를 인터뷰 한다는 것이 어색하기도 하고, 무엇을 물어봐야할지 난감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자가 아닌 동료로서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인터뷰에 임했다.

같이 공연을 하는 것이 아니고, 관객의 입장에서 연주를 지켜보니 기분이 묘했지만 무대 위에서나 아래서나 아프리카다운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간 어떻게 지냈는가?

(정현규, 드럼 / 리더) : 근황이야 뭐 항상 똑같다. (웃음) 항상 끊이지 않는 공연 일정을 소화하면서 지낸다. 평소에는 멤버들이 레슨을 하기 때문에 다들 나름대로 바쁘게 지낸다.

얼마 전 일본에서 공연을 하고 온 것으로 알고 있다. 반응은 어땠는가?

(정현규, 드럼) : 도쿄에 있는 “라이브 스테이션”이라는 유명한 클럽에서 공연을 했다. 일본공연을 하면서 많이 놀랐다. 우선 관객들부터가 한국이랑은 달랐다. 한국은 팬들이 객석을 채우는데 반해 일본은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이 관객의 대부분이었다. 그래서인지 락 밴드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 같지 않게 점잖하게 우리의 연주를 지켜보았다. 마치 평론가처럼 지켜보는 시선이 많이 낯설었다.

클럽문화도 한국이랑 많이 달랐는가?

(윤성, 보컬) : 솔직히 말하자면 한마디로 부러웠다. 세팅부터가 뮤지션이 원하는 것을 만족시켜주었다. 앰프하나부터 드럼 세팅까지 완벽했다. 그만큼 대관료도 비싸지만, 뮤지션이 꿈꾸는 무대를 만들어 주기 때문에 더욱더 높은 질의 음악이 나올 수밖에 없다. 좋은 경험을 하고 왔고, 그들의 마인드를 배울만하다고 생각한다.

연간 100회 이상의 많은 공연일정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새 앨범이 나왔다. 요즘 메이저 가수들은 디지털 싱글의 형태로 앨범을 내는 추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범을 냈는데 아프리카에게 있어 앨범발매는 어떠한 의미인가?

(정현규) : 특별한 의미를 둔다기보다 음악인에게 있어서 앨범 발매는 당연한 것이다. 앨범작업은 우리의 음악을 표현하는 것인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앨범발매를 안하는 밴드들에 대해서 반감은 없다. 트렌드에 민감한 밴드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냥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음악을 할 뿐이다.

이번 앨범은 정규 2집이다. 이번 앨범에 대해서 소개를 좀 해 달라. 신곡보다는 기존의 곡들로 이루어 있던데.

(윤성) : 그렇다. 우리는 예전에 “독립문화공동체”에서 3장의 앨범을 발매했었다. 그러나 그 앨범들은 소수에게만 알려졌을 뿐, 정식적인 앨범이 아니었다. 그래서 2006년에 정규1집을 발매했고, 올해는 예전의 곡들을 다시 정리해서 2집 앨범을 낸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별로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다. 2집 앨범은 기존 곡들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수준에서 더욱 성숙된 사운드와 곡 전개를 구성했다.

<작은새>라는 곡은 상당히 긴 대곡이다. “블랙홀”의 기타리스트 이원재와 “What”의 기타리스트 김인건이 마지막 기타 솔로를 함께했다고 들었다. 들어보니 마치 “레너드스키너드”의 Free birds와 같은 느낌이었다.

(정현규) : 그렇다. <작은새>는 코드 3개로만 만들어진 노래지만 뜨거운 에너지가 넘치는 곡이다. 아프리카의 색깔을 함축시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동료뮤지션들이 기꺼이 연주에 참가해줘서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전한다.

거의 모든 작곡을 정현규가 하였다. 송인재(기타)를 비롯한 나머지 멤버들도 각자의 음악적 색깔이 있을 텐데, 표현에 대한 욕심은 없었나?

(송인재) : 물론 음악적 색깔이 전부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밴드이다. 당신도 알고 있지 않은가? 밴드라는 게 참 어렵다. 나는 작곡을 한 사람이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팀의 색깔을 내면서도 그 속에서 개인적인 모습을 음악으로 드러내야 한다. 아프리카는 그런 면에서 밴드라고 생각한다. “메가데스”의 前기타리스트 마티 프리드먼을 보라. 평소에는 지극히 메가데스적인 날카로운 사운드를 내면서도, 기타솔로에서는 완전히 마티 프리드먼의 개성 있는 플레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이런 것은 모두 존재감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같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아프리카 공식 2집 앨범

너무나 많이 들었을 질문이지만, 그래도 짚고 넘어가겠다. 지방(대구)에서 이렇게 (취미밴드가 아닌) 밴드를 하는 팀이 많지가 않다. 서울로 진출할 생각은 없었는가? 그리고 지방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한 제한적인 요소나 한계는 없었는가?

(정현규) : 너무 식상한 질문이다(웃음). 이 질문은 수백 번 들었다. 물론 우리도 인정받고 싶고, 인기를 얻고 싶다. 그리고 그에 따른 경제적인 수준도 높아지면 좋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앨범을 발매하면서 전국을 상대로 공연을 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공연을 하지 않았는가. 서울이나 지방이나 하는 일이 같은데 굳이 서울로 갈 생각은 애당초 하지 않았다. 진출할 거였으면 진작 갔을 거다. (웃음)

대구․경북지역에서는 상당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락 공연이 아닌 지역의 행사 공연도 많이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공연무대는 주로 어디인가?

(윤성) : 락 공연은 물론이고 행사공연도 많이 한다. 특히 여름이면 행사공연의 비율이 높아진다. 그리고 행사공연이라 해서 대구․경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을 다 다닌다. 대학축제 공연도 우리의 주무대라 할 수 있다.

나도 경험해봤지만 행사공연을 다니다 보면 열악한 음향시설을 비롯해 변변치 않은 대기실 등 여건이 좋지 않는 경우가 매우 많다. 어떻게 극복을 하는가?

(송인재) : 극복이라고 하기보다는 이제는 적응이 되었다. 행사공연은 음향팀이 항상 바뀌기 때문에 우리의 입맛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훌륭한 연주를 하는 팀도 많다. 그것이 다 경험이고 실력이다. 열악한 환경도 극복하는 것이 진정한 뮤지션이 아니겠는가. 사실 앰프를 비롯한 다른 장비들이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수준일 때는 장비들을 우리가 직접 가지고 가기도 한다.(웃음) 그러나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공연을 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즐거운 여행이다. 그래서 큰 불만은 없다.

공연을 찾는 사람들은 주로 어떠한 사람들인가? 그리고 고정 팬들은 얼마나 있는가?

(윤성) : 공연을 하다보면 낯익은 얼굴들이 보일 때가 많다. 대구에서 공연을 하면 멀리 부산에서 찾아오는 팬들도 있다. 그러한 팬들이 너무나 고맙다. 공연이 끝나면 함께 식사를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우리는 연예인이 아니기 때문에 팬과 스타의 관계라기보다는, 좋은 음악을 공유하는 친구 같은 사이다.

매니지먼트에 소속된 것이 아닌데, 공연일정을 잡거나 홍보 같은 것은 어떻게 하는가?

(윤성) : 우리 팀에게는 훌륭한 매니저가 있다. 그 분이 공연일정을 비롯한 아프리카의 활동을 계획하고 추진한다. 단순히 매니저라기보다는 우리 팀의 정신적 지주와 같은 역할을 하는 분이다. 음악적인 감각도 우리보다 훨씬 더 뛰어나기 때문에 많이 배운다. 홍보 같은 것은 주로 내가 한다. 카페에 글을 올리거나 하는 세세한 부분은 내가 틈틈이 하는 편이다.

멤버교체로 상당한 고통이 있었는데 지금의 멤버를 보니 정말 안정된 것 같다. 이 문제 말고도 한국에서 밴드음악을 한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 아닌가?

(정현규) : 아프리카에게도 멤버 교체와 같은 시련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밴드가 성숙해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본다. 여기서 우리가 힘들다고 하면 선배 밴드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선배 뮤지션들이 닦아놓은 길을 편하게 가고 있을 뿐이다. 행여나 우리가 막다른 길을 만나더라도 스스로 길을 만들어 가면 된다.

밴드들의 나이가 적지 않다. 특히 드럼은 체력이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현규) : 20대보다 체력적으로 한계를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바꿔서 말하면 그때는 힘으로만 친 것 같다. 그러나 음악은 스포츠가 아니다. 지금은 몸 전체를 이용해서 드럼을 연주한다. 여기서 몸 전체를 사용한다는 것이 바로 느낌으로 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맛을 알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최소한 나이가 30살이 훌쩍 넘어야 그때부터 진정한 연주와 음악이 나온다고 말하고 싶다.

하드락을 하는 팀인 만큼 시간이 흐를수록 추구하는 음악적 색깔이 약해지는 면은 없는가? 감각적이지 못하다거나, 기타리프가 조금은 촌스럽다는 말을 들을 법하다. 물론 나는 아프리카의 정통 하드락을 사랑한다.(웃음)

(정현규) : 우리의 음악이 촌스럽다는 말인가? 뮤지션에 있어 장르는 중요하지 않다. 곡을 쓸 때도 그렇다. 좀 더 꾸며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입에서 흥얼거리는 그 느낌을 최대한 살려서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장르에 한정시킨다기보다는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만들다보면 나오는 음악, 그것이 바로 우리의 색깔이다. 정리하자면 뮤지션들이 그 나이에 가장 잘 할 수 있는 음악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길이고, 아프리카의 장르라고 생각한다.

역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말이다. 항상 아프리카가 건승하길 바란다.

인터뷰를 마친 후 그들은 무대 위로 올라가 뜨거운 에너지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두타 야외무대 앞을 무심코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을 하나 둘 잡아 두는 그들의 사운드 속에서 아프리카는 어디에서도 최고라고 인정받을 수 있다고 다시 한 번 확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음악이 널리 알려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아프리카의 음악은 순수하다. 그 순수함을 많은 이들이 알아줄 날이 오리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언젠가는 같이 음악을 할 수 있는 날이 다시 오리라는 바람과 함께.

이 인터뷰의 다음 행선지는 홍대 앞이다. 아프리카에서 활동을 하면서 가장먼저 친해진 펑키밴드 <시베리안허스키>를 만나기 위해서다. 홍대 앞에서 10년 동안이나 활동을 한, 보기 드문 실력파 밴드 <시베리안허스키>. 다음은 그들의 음악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다.

(A-Frica)

드럼 : 정현규 (리더)
보컬 : 윤성
기타 : 송인재
베이스 : 오창근

A-FRICA 아프리카는 블루스에 기반을 둔 “정통 하드락 밴드”이다. 또한 국내에선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정통 하드락 보컬의 독자적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여성 보컬 윤성의 시원시원한 보이스가 팀의 컬러를 보다 확실하게 규정한다. 아프리카 대륙의 순수함, 자연스러움을 받아들여 장르의 구분 없이 무한한 가능성을 심어주고 싶다는 그들 음악의 본질은 라이브에서 더욱 여실히 들어난다. 연주가 시작되면 어떤 장소, 어떤 무대라도 그들의 콘서트 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파워풀하면서도 친화력 있는 퍼포먼스는 그들의 트레이드마크가 된지 이미 오래이다.

1999년 3월에 결성되어 락 페스티벌, 대학축제, 클럽 공연 등 다양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으며, 2002년 여성 보컬 윤 성 체제로 라인업 제정비후, 자체 제작한 2장의 앨범 발표했다. 2008년 11월 앨범 발매를 기념한, 일본 도쿄 클럽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2008년 12월부터 2008~2009 앨범발매기념 전국 라이브 클럽 투어 중이다. 2009년 3월에는 한국, 9월에는 일본에서 한일 락 페스티벌이 예정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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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2 18:08

이주노동자방송은 지금이 가장 희망적인 시기다

이주노동자 방송 상임 대표, 미누(미노드 목탄)
                                                                                                                                       이주호 기자
이주노동자방송 상임 대표 미누 씨를 만나 RTV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 이주노동자방송MWTV의 자구책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들어 봤다.
▲ 이주노동자방송 상임 대표 미누 씨를 만나 RTV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 이주노동자방송MWTV의 자구책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들어 봤다.

사무실이 한산한 것 같은데, 요즘 할 일이 없나?

그런 건 아니다. 2월 22일 총회 준비 때문에 각자 할 일이 많다. 지난 12월 이후 RTV 제작 지원이 끊겼기에 독립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을 계획하고 있다.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실질적인 운영비는 RTV지원밖에 없었다. RTV에 이주노동자 뉴스와 이주노동자 세상이라는 두 개의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560만 원 정도를 받았었는데, 작년 12월에 방송통신위원회가 RTV에 지원을 끊었고, 공익채널에서도 빠지게 되어 케이블 방송도 어렵게 되었다. 우선은 후원회원을 늘리는 방안밖에 없지 않나 생각한다.

우리 매체도 후원회원에 관한 생각을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할 정도로 한국 사회가 훈훈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여태까지는 주변에 아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후원회원을 모집할 수밖에 없었는데, 후원회원에 관한 일만 해도 사실 일이 상당히 많았기에 우리로서는 벅찬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래도 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몰리고 말았다. 지금은 후원회원이 100여 명 정도 되는데, 금액으로 따지면 사실 100만 원 정도밖에 안 된다. 하지만 이분들은 지난 1년 동안 우리를 후원해 주신 분들이고 앞으로 이 부분에 우리가 신경을 더 쓰면 희망적이리라 본다.

후원회원을 모집하려면 후원해 주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후원하는 보람을 느끼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먹고 살기 어려운 판국에 컬처뉴스가 아니라 굳이 MWTV를 후원해 줘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가?

우리는 방송이라는 매체를 계속해서 하고 있었고, 계속 일이 주어졌기에 열심히만 하면 됐었다. 그러나 현재는 일이 없어지고 있고,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예전에는 방송을 만들어야 해서 만들었지만 이것이 누구를 위한 방송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은 바로 지금의 어려움 때문인 것 같다. 한국 사람들은 우리를 단순히 이주노동자라고 부르지만 이주노동자들도 서로가 외국인이다. 한국인과 외국인 사이에서는 물론 외국인끼리도 공감할 수 있는 장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런 장을 만들고 싶다.

이주민 100만 시대라고 하지만, 이주민, 이주노동자들을 대신해서 한국 사람이 그들의 권익을 대변해 주는 일은 있었어도 이주노동자가 직접 자신들이 원하는 것과 자신들이 생각하는 다문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통로는 없었다.

몽골에서 온 이주 여성 한 분이, 자신은 교회를 다니는데 교회 사람들에게 자기가 몽골 사람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남편도 그러길 바랐고, 아들을 위해서도 자신의 국적을 밝힐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몽골에 살 때는 성격이 활발했지만, 자기 정체성을 감추고 사느라 사람들과 만남을 지속하는 일도,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너무 어려웠다고 했다. 그러다 MWTV를 알게 되었고, 우리를 찾아와 몽골어 방송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방송을 시작한 이후로 그 분은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마음도 가벼워졌다고 했다. 제작 환경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주민이 주체가 되어 활동하는 일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문화라는 것은 이제 무시할 수 없는 사안이고, 50년 이후 다양한 색깔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한국 사회를 생각했을 때도 그 훈련이 필요한 시기가 아니겠는가.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 이주노동자 탄압을 금하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고, 지방자치단체나 문화단체들도 다문화 행사에 적극 나서고 있다. 반면 지난 번 마석에서처럼 대대적인 단속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두 가지 상황을 외국인노동자로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마석 이후로도 단속은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옛날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권 바뀐 다음부터는 굉장히 노골적으로 탄압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시민사회단체들도 역시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고, 사상 유래 없는 단속인 것은 분명하다.

다문화 행사에 관한 여러 가지 홍보를 보다 보면 이주노동자로서 반가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겠나. 다문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이주노동자를 빼놓을 수 없다. 한국 사람들이 다문화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고 그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도 이주노동자 때문이고, 이전부터 앞장서서 문화교류를 하고 있었던 것도 이주노동자들이지만, 현재 정부의 다문화 정책에는 이주노동자의 문제가 빠져있다. 외국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사회와 이주노동자 사회를 갈라놓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에 마붑알엄 씨의 인터뷰를 실었는데, 한국에 일자리 없다, 외화 유출한다, 이런 식의 말들이 있어 적잖이 짜증이 났었다. 당신네가 지금 얼마나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려줄 테다, 이런 오기가 생기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내 입으로 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 입을 빌리는 게 나을 듯해서 오늘의 인터뷰를 마련한 것인데, 이런 사람들에게 내가 해주려는 말이 무엇인지 미누 씨는 잘 알 것이다. 자 내 마음을 한 번 읊어봐 달라.

한국 정부는 고용허가제로 들어오는 노동자를 점차 줄여가고 있다. 정부 정책은 이주노동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일자리를 내국인에게 돌려주는 것이라 하는데, 도대체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알고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이주노동자들이 어떤 환경에서 일을 하고 있는지 현장 방문을 해 보기나 한 것인가? 얼마 전 한 노동자가 나를 찾아와서 일자리를 소개해 달라 했다. 그 사람은 한국에 들어온 지 두 달이 채 안 되는 사람이었는데 경기가 어려워 해고를 당한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은 두 달 안에 일자리를 못 찾으면 미등록이 된다.

한국 내 이주노동자들은 고용허가제라는 제도 안에서 한국에 들어오게 되어 있다. 한국의 업주가 사람이 필요하다고 한국 정부에 인력 신청을 하면 한국 정부는 자신들과 체결되어 있는 국가들에 사람 필요하다는 요청을 하고, 그 국가들은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한국의 일자리를 홍보한다. 대개 한국이란 나라는 첨단 기술이 발달한 나라여서 이곳에서 첨단의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식으로 홍보를 한다.

한국에 가겠다고 지원을 했어도 의사소통 문제 때문에 한국어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래서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학원을 다녀야 하는데, 당연히 돈이 많이 든다. 그리고 한국에 들어오기 위한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도 돈이 많이 든다. 그러면서도 이 노동자들에게 한국에 가서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어느 스리랑카 노동자가 나에게 “눈을 똑바로 뜨고 그런 치욕을 느끼기는 처음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했더니, 스리랑카에서는 한국에 가면 공장에서 물고기를 손질하는 일을 할 거라 이야기를 했는데, 실제로는 배 위에서 물고기 잡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추운 겨울에 바다 위에서 고기잡이를 했다고 하는데, 사실 이것은 한국 사람에게도 힘든 일이지 않은가? 이 사람은 더운 나라에 살다가 한국에 와서 추운 겨울 바다에서 쉬는 날도 없이 밤낮으로 일했다. 낮이고 밤이고, 오라는 통보를 받으면 가서 일해야만 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도 고문과 같았다. 너무 피곤해서 못 일어나면 발로 차고 물을 뿌리면서 깨웠다. 친한 사람끼리 발로 차고 주먹으로 치고 하는 것을 봤기에 문화적 차이구나 하고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때리는 건 별로 상관을 안 했는데, 최소한 일하는 시간만큼은 정해져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한국이 요청해서 들어왔고, 들어오면서 노동자 자신들도 투자를 했다. 노동자들은 제조업, 어업, 농업 한 분야를 정해야 하고 한국에 들어와서는 선택한 업종을 변경할 수 없다. 농업, 어업으로 등록된 외국인이 추운 겨울 일자리가 없어져 해고 되면, 두 달 안에 같은 업종으로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등록, 다시 말해 불법체류자가 된다. 농업에 일이 없으면 제조업으로 바꿔 주면 좋을 텐데 그럴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다.

들어 온 지 얼마 안 돼 해고된 이주노동자들 중에는 한국말을 잘 못해서 자신이 미등록인 줄도 모르는 사람도 많다. 이주노동자는 노동부와 계약을 맺고 한국에 온 사람들이니 노동부는 그들을 책임질 의무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도 있다.

요즘 한국인들 중 대학 안 나온 사람을 찾기도 어려운데, 그들이 공장을 생각할 것 같나? 이런 곳에 사람이 살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곳에서, 언제까지 일해야 할지 근무 시간도 모르는 조건에서 한국의 젊은이들이 일할 거라 생각하는가? 일자리 창출 이야기는 참으로 이상적이지만, 문제는 이런 열악한 조건에서 80만 원에서 100만 원의 임금을 받으며 일할 것인지 먼저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나.

돈을 벌어서 자기 나라로 가져가는 게 외국인노동자가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이유의 전부가 아니다. 우리가 1,000원의 임금을 받았다면 공장에는 최소한 1,000원 이상의 이윤을 남게 해준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한국에서 소비를 한다. 정권이 바뀌면서 숙박비가 본인 부담으로 돌려지고 있다. 그 임금으로 숙박비 내고 생활을 한다고 생각해 봐라. 버스를 탔는데 내가 네팔 사람이라고 네팔 환율을 적용해서 버스비를 받는 것이 아니다. 이주노동자들 역시 한국의 경제 흐름 속에서 살고 있다. 고용허가제 안에서의 시간 1년 안에는 자신의 입국 비용을 갚기도 어렵다. 고용허가제로 외국인들이 계속해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것은 업주들이 그만큼 신청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의 대체 인력으로 한국인을 채우겠다는 게 이상적이긴 하지만 내국인들은 공장에 오질 않는다. 정부 정책은 고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문을 닫으라는 것이므로 공장주들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주노동자는 불법체류자가 되지만 그걸로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사장마저도 일자리를 잃게 되고 그 가족들의 문제가 새로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한국인들도 역시 전세계로 퍼져가고 있고 가서 일을 하고 있다. 한국 사람은 외국에 가서 일을 해도 되지만 외국인들은 안 된다. 정말 안 되는 것인가? 내국인, 외국인을 떠나서 그런 상관관계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주노동자는 존재하고 있다. 서로가 필요하고 그 필요 때문에 존재하는 사람들인데, 현 상황에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하는 것이지 이주노동자가 없어져야 한다는 일방적인 인식으로만 문제를 풀려는 것은 잘못된 것 같다. 서로의 만족을 높이는 방식을 찾아야 옳지 않겠나.

그 정도면 할 말 다 하지 않았나 싶은데, 할 말 더 있으면 나중에 소주나 한 잔 하자. 같이 술 마신 지도 오래된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일이 많아서 술 마실 일도 많다. 조금 늙은 것 같지 않은가? 일이 많이 주어진다는 것은 행복한 일인 것 같다. 일에는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이 있고, 내가 필요로 하는 일이 있다. 지금은 그 두 필요가 만나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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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2 10:54

노숙인이 파는 잡지, 빅이슈를 아십니까?

빅이슈 한국판 준비하는 도서평론가 최준영
                                                                                                                                         안태호 기자
노숙인들이 판매하는 잡지 ‘빅이슈’(The Big Issue)의 한국판을 준비하는 도서평론가 최준영 씨를 만났다.
▲ 노숙인들이 판매하는 잡지 ‘빅이슈’(The Big Issue)의 한국판을 준비하는 도서평론가 최준영 씨를 만났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한 후배가 말했다. “왜 우리나라는 노숙인들에 대해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지원하려고 애들을 쓰는지 모르겠어요. 개인의 인생은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 빈곤은 사회적 문제라고, 노숙인을 포함한 빈곤계층은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제대로 작동한’ 결과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술기운에 휩쓸린 혀는 애석하게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노숙인 문제는 과연 개인이 짊어져야 할 멍에인가? 여기 노숙인 문제가 사회 구조적인 문제임을 직시하고 그 해결을 위해 새로운 시도를 준비하는 이들이 있다. 노숙인들이 판매하는 잡지 ‘빅이슈’(The Big Issue)의 한국판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한국판 추진 과정의 위원장 격인 도서평론가 최준영 씨를 인사동 찻집에서 만났다.

그는 얼 쇼리스의 클레멘트 코스를 본 따 설립된 성 프란시스 대학에서 노숙인들에게 글쓰기 교육을 시작한 이래 4년 동안 쉬지 않고 노숙인들과 작문교육을 진행해 왔다. 지금은 경희대 실천인문학센터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며 서울시가 운영하는 ‘비전트레이닝 센터’ 등 네 곳에 출강한다. 노숙인들과 격의 없이 강의하고 토론하며 강의 뒤엔 함께 생맥주를 들이키며 어울린 경험이 빅이슈를 고민하는 계기가 됐다. 노숙인들은 인문학교육을 통해 삶에 대한 의지와 자존감을 회복했지만, 그것이 직접적인 자활로 이어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간 성프란시스 대학이 4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지만 신용불량이거나 주민등록이 말소된 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이들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노숙인들이 실질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을 생각하던 와중에 빅이슈를 만났고 한국어판 발간을 추진하게 됐다. 노숙인들에게 스스로 일을 한다는 자긍심과 동기를 부여해주고 싶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빅이슈는 노숙인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영국에서 만들어진 주간지다. 1991년 창간된 이 잡지는 잡지의 판매 권한을 노숙인에게만 제공하는 특이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노숙인들이 판매를 통해 수익을 얻고 자립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대중문화를 주로 다루는 이 잡지에는 데이비드 베컴, 비욘세, 케빈 스페이시, 폴 메카트니 같은 유명인들이 발행취지에 동참하는 의미에서 무료 표지모델로 등장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빅이슈는 17년 역사를 통해 영국에서만 주간발행부수가 16만부에 달하는 유력지로 성장했으며 5천여명의 노숙인들이 자활에 성공했다고 한다. 현재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남아공 등 세계 28개국에서 발행되어 노숙인들의 자활을 돕고 있다.

“일부러 따라가 왜 잡지를 샀느냐고 물었더니, ‘옛날에는 저분이 저 자리에 쭈그려 앉아
구걸을 했는데, 지금은 다리가 불편한데도 당당하게 서서 잡지를 판매하고 있잖아요.’
라고
대답하더군요. 잡지의 취지에 공감하고 지지한다는 의견을 정확하게 밝혀준 겁니다.”
(사진출처 : 빅이슈 한국판 준비모임, http://cafe.daum.net/2bi
)

최준영 씨는 작년 초 경기문화재단의 지원으로 영국을 다녀왔다. 빅이슈 운영상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확인한 현장은 빅이슈 한국판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게 만들어줬다. 우선 조직부터가 활기에 넘쳤다. “젊고 조직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급여수준은 일반 기업의 7,80%밖에 안 되지만 빅이슈 출신을 우대하는 사회적 분위기 덕에 매우 각광받는 직장이라더군요.”

그러나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빅이슈가 갖는 의미와 힘을 직접 체험했다. 빅이슈를 판매하는 벤더(판매원)들은 짧은 입문교육을 받고 1주일 정도의 시범판매 기간을 갖는다. 최준영 씨는 그곳에서 목발을 짚은 채 빅이슈를 판매하는 노숙인에게 잡지를 구매한 한 여성을 만났다. 그 여성이 한 말은 그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일부러 따라가 왜 잡지를 샀느냐고 물었더니, ‘옛날에는 저분이 저 자리에 쭈그려 앉아 구걸을 했는데, 지금은 다리가 불편한데도 당당하게 서서 잡지를 판매하고 있잖아요.’라고 대답하더군요. 잡지의 취지에 공감하고 지지한다는 의견을 정확하게 밝혀준 겁니다.” 실제로 영국의 벤더들이 잡지판매시 반드시 지참하는 등록증에는 ‘Working, Not Begging’(구걸이 아니라 일하는 중이다)라는 말이 또렷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있는 잡지도 다 문을 닫고 망해가는 판에 새로 잡지를 만드는 일이 쉬울 리가 없다. 숱한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청했지만, 그들의 말은 한결같았다. “좋은 취지다, 일단 만들고 나면 기꺼이 도와주겠다.” 그러나 그에게는 지금 당장 함께할 사람들이 필요했다.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생긴다고 해도 실제로 잡지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답답함을 참지 못한 그가 한겨레 <왜냐면>에 기고한 이후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글에서 빈곤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 인식의 ‘빈곤’을 아쉬워했다. 글이 나간 후, 몇몇의 대학생들이 직접 연락을 해와 인터넷에 카페를 만들고 매주 회의를 진행하며 일이 체계를 갖추어 나갔다. 매체들에서도 관심을 갖고 조금씩이지만 보도가 되기도 했다. 몇몇 재단이나 정치인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얼마 전에는 기금마련을 위한 일일주점을 열기도 했다. 물론, 아직도 갈 길이 멀기만 하다.

그는 지금도 하루에 3, 4개의 약속을 잡고 창간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중이다. 만나는 사람들도 시민단체 활동가나 언론종사자에서부터 각종 재단이나 기업 관계자는 물론 국회의원을 포함한 정치인들까지 폭이 매우 넓다. 빅이슈와 노숙인, 빈곤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는 일에서부터 창간을 위한 재원마련과 길거리 출판물 판매 금지라는 법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일까지 넘어야 할 산들이 즐비하다.

조니 뎁, 데이비드 베컴 등 유명인사들이 모델로 등장한 빅이슈의 표지
(사진출처 : 빅이슈 한국판 준비모임, http://cafe.daum.net/2bi)
 

그는 무엇보다 아쉬운 것이 ‘사람’이라고 한다. 창간을 위해 혼자 뛰다시피 하고 있는 상황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준비모임을 함께 하는 학생들이 있지만, 역시 온전히 창간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일 사람이 필요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창간 때까지 함께 기획서를 꾸리고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진행할 사람이 당장 2, 3명은 필요하다. 창간 무렵이 되면 편집장과 편집기자, 취재기자 등이 필요해질 것이다. 취지에 공감하는 것을 넘어 자기의 일 또는 전망으로 생각하고 함께할 이들이 절실하단 얘기다. 그는 매주 수요일 신촌 민들레영토에서 진행되는 준비모임회의는 언제나 열려있다고 귀띔한다. 누구든 취지에 공감하고 함께할 이들이 참여해도 좋다는 뜻이다.

빅이슈의 취지를 설명해 달라는 말에 그가 내민 브로셔 한 장에는 빅이슈 한국판 창간의 뜻이 오롯이 담겨져 있는 문장이 알알히 박혀있다.

추위에 움츠러든 가슴을 펴주는 ‘위안’같은 잡지, 차갑게 식은 마음을 훈훈하게 녹여줄 ‘연탄불’같은 잡지, 갈수록 혼탁해지는 우리네 정신의 어깨를 때리는 ‘죽비’같은 잡지, 답답함과 갈증을 날려주는 ‘단비’같은 잡지, 그러나 세상은 더불어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더불어숲’같은 잡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마음의 벽을 허물기 위해 서로에게 건네는 반가운 ‘인사’같은 잡지, 그런 잡지가 바로 '빅이슈(한국판)이다.

잡지창간은 준비호 등을 시험적으로 발간한 후 올해 10월경으로 예정하고 있다. 올해 본격적인 창간을 앞둔 만큼, 연예인이나 국회의원을 비롯한 명사들이 참여하는 캠페인을 포함해 각종 이벤트도 벌일 예정이라고 한다. 아마도 돌아오는 가을에는 거리 곳곳에서 노숙인들의 잡지 판매 모습을 확인하게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엄동설한을 종이박스 몇 개로 버텨내는 이들의 고달픔이 조금은 덜어질 수 있을까. 사회적 빈곤에 대한 시선이 한 뼘이라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아니, 우선 ‘빈곤은 개인의 책임’이라 우겨댔던 후배를 만나 빅이슈 한국판을 우격다짐으로라도 손에 쥐어줘야겠다.

 

빅이슈 한국판 창간준비모임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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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7 15:05

몸의 학교, 삶의 현실과 관계를 맺는 예술

[인터뷰]몸의 학교 공동교장 알바로 레스뜨레뽀, 마리 프랑스 드리유방 - ②
  (박정훈 _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위원)

알바로 레스뜨레뽀,
▲ 알바로 레스뜨레뽀, "예술가에게 더 중요한 것은 하나의 예술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삶이다. 진정한 예술 작품은 예술가의 일상적인 삶이다."

몸의 학교의 요람 까르따헤나는 어떤 도시인가?  

알바로
까르따헤나는 아름답고 유서 깊은 항구도시로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 도시의 현실은 아주 거대하고 복잡하다. 이 도시 인구의 70%는 빈곤선 이하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이런 현실은 갈수록 가시적인 것이 되고 있다. 이 도시는 아주 복잡하고 잔인한 도시이다.

까르따헤나에는 마리 프랑스의 말처럼 ‘혹독한 유산’이 존재한다. 이곳은 콜롬비아의 제1항구로서 흑인노예들이 이곳을 통해 유입되었다. 이 도시가 인류가 저지른 가장 큰 죄악 가운데 하나인 흑인노예무역의 거점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 과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책임 지려는 노력이 없다.

그래서 이 비극은 끝나지 않는다. 노예제도는 없지만 여전히 노예제도의 유산은 끈질기게 남아 있다. 흑인들은 여전히 이 나라에서 종노릇을 하고 있다. 흑인들은 이 나라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소외된 채 삶을 영위한다. 전쟁보다 포스트전쟁시대가 더 혹독하듯이 포스트노예제도 시대가 그들에겐 더욱 가혹하다.  

까르따헤나의 인종 분리는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보다 더 심각하다고 난 주장해왔다.  남아공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까르따헤나에는 은폐된 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남아공이 공인된 인종주의라면 까르따헤나는 은폐된 인종주의라 할 만하다) 인종문제가 있네 없네 시비가 붙지만 저쪽에 백인이 살고 이쪽엔 흑인만 거주한다. 흑인들의 거주지역이 따로 존재한다.

요즘엔 문제가 한결 복잡해지고 있다. 수 십 년 내전으로 인한 난민 문제가 심각한데 관광도시 까르따헤나에서 경제적 기회를 얻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도시 외곽에 빈곤의 띠를 이루고 빈민주거지역이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그리 심각하지 않았던 문제들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갈수록 가정폭력이 도를 더해가고 있다. 길거리에 까르따헤나 아이들이 버려지고 있다. 과거에는 없던 일이었다.

드리유방
아동 학대(폭력)는 물론이고 가정 내 성폭력 문제도 대표적인 가정폭력의 사례이다. 3년 전부터 나는 꾸준히 까르따헤나 지역신문을 보고 있다. 남편이나 애인에 의해 여성들이 살해되었다는 뉴스가 지속적으로 실리고 있다. 알콜, 주먹(폭력), 무지 등이 가정폭력의 요인들이다. 이 도시에서 폭력은 일상화되어 있다.

알바로
폭력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 도시에서는 이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소위 ‘민주적 치안’이니 ‘평화로의 이행’이라 부르는 최근의 정치 과정에 대해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이 나라에서는 그 무엇도 평화로워지지 않았다. 그저 무장 국가, ‘무장 평화’가 있을 뿐이다. 무장한 평화는 평화가 아니다.

즉 정치권은 폭력, 빈곤, 사회 몰락의 근본 원인들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하기에 지금 벌어지는 일들은 모두 ‘정치적 신기루’에 불과하다. ‘위장된 평화’이기 때문이다.

드리유방
까르따헤나는 ‘콜롬비아의 보석’이라 불린다. 그러나 이 도시에는 두 개의 세상이 존재한다. 빈자와 부자의 심각한 불평등은 주위를 한번만 둘러보아도 금세 느낄 수 있다. 그 차이는 너무나 가시적이다. 빈자와 부자는 서로 마주하고 있다. 그 지리적, 심리적 인접성이 도시를 더욱 폭력적으로 만든다. 최상과 최악이 공존하면서 마주 보고 있는 것이다.

도시의 사회적 균열 때문에 도시의 발전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보석, 돈, 권력을 가진 이들은 다른 이들에게 절대로 자신들이 가진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 도시의 아이들에게 지식과 자유를 준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런 자유는 권력과 충돌하게 된다. 우리 노력은 바로 그런 자유를 위한 것이다. 우리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우리가 늘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노력이 하나의 위험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 생각엔 도시 자체가 위험이기 때문이다.

75%의 빈민, 75만 명이 카리스마를 갖춘 지도자를 만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가난한 사람들은 모두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알바로
맞다.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드리유방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누구도 이와 같은 일의 발생 가능성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알바로는 까르따헤나를 가르시아 마르께스 소설의 에렌디라와 같다고 썼다.  

알바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소설 [순진한 에렌디라와 무정한 할머니의 믿을 수 없이 슬픈 이야기](La increíble y triste historia de la Cándida Eréndira y su abuela desalmada) 이야기와 이 도시를 비교해보았다. 주인공 에렌디라는 할머니의 강요로 인해 몸을 팔아야 하는데 오늘날 까르따헤나도 마찬가지다. 까르따헤나는 자식들에게 매춘을 시키는 ‘에렌디라 도시’에 불과하다. 이건 비극이다.

콜롬비아와 세상의 부자들은 까르따헤나로 몰려들어 빈곤과 비참의 한복판에서 유흥의 시간을 보낸다. 명백한 대조의 도시인 것이다.  

드리유방
그렇다. 빈곤의 한복판에서. 그 빈곤은 불과 10킬로도 떨어져 있지 않다. 빈곤의 한복판에 부유함이 있다.
(몸의 학교 매니저 알렉스는 콜롬비아의 가부장주의에 대해 말했다. 춤추는 남자들은 대체로 동성애자로 간주되는 콜롬비아의 문화 풍토에서 몸의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사회의 보수주의와도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레스뜨레뽀와 드리유방 씨는 공동교장으로 알고 있다. 학교 운영에 있어서 학생들의 참여는 이뤄지고 있는가? 
 
알바로 레스뜨레뽀
아주 좋은 질문이다. 지금 우리가 그 단계에 이르렀다. 11년간 우리와 함께 훈련해 온 이들이 있다. 그들은 대학과정까지 마쳤고 적절한 나이가 되었으며 학교운영을 책임질 잠재력도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예술적, 교육적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고 개개인 모두 학교운영의 책임자가 될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

‘몸의 학교’를 우리의 소유물로 생각한 적도 없고 우리의 유산으로 간주한 적도 없다. 이 학교는 바로 그들의 것이다. 이 학교는 하나의 공동체이며 이 공동체에 속한 이들이 바로 ‘몸의 학교’의 미래이며 그들이 바로 ‘몸의 학교’의 미래 책임자들이다.(인터뷰를 하다보면 던진 질문과 핀트가 맞지 않는 답을 종종 접하게 된다. 그런데 그 답이  월척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 대목이 바로 그랬다. 나는 일상적 학교 운영에 있어 학생 참여에 대해 질문했는데 알바로 교장은 학생들이 학교 운영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성장해가고 있다는 답을 주었다)

현재 ‘몸의 학교’는 아주 중요한 순간을 맞고 있다. 까르따헤나 시정부의 지원으로 교외에 4헥타르의 땅을 기증받았다. 그곳에 새로운 건물을 세울 계획을 세우고 있다. ‘몸의 학교’가 새 건물로 이주하는 일은 새로운 교사(校舍)가 생겼다는 의미만을 갖는 게 아니다. ‘몸의 학교’가 새로운 조건에 맞는 새로운 운영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드리유방
현재의 조건은 학교 운영을 위한 새로운 팀을 요구하고 있다. 넓은 시야로 좀 더 능률적으로 일을 수행할 사람들을 요구하고 있다. 11년간 우리와 함께 해 온 이들은 그들의 개성과 각 자의 전망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학교를 책임질 주역들이다. 그들의 경험이 충분하지는 않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다른 이들이 학교운영의 주체로 나서는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학생들이 학교운영의 실질적인 주체가 되기를 우리는 기대하고 있다. 지속적으로 그들과 대화하고 있다. 

알바로
우리가 속하는 개척자 세대 즉 제1세대는 실험 세대였다. 모든 실험에 성공과 실패가 있듯이 우리의 경험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했으며 미숙과 완숙 사이에서 시행착오를 겪어 왔다. 지금 우리는 학교운영의 방식을 쇄신하려고 하고 있다. 가령 학교 운영 초기 우리 태도는 가부장의 태도를 취한 게 아닌가 한다. 

드리유방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

알바로
그렇다. 원했던 것은 아니다. 학교 교육의 몰락, 사회적 불의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모든 것을 무상으로 제공하면서 자족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관계를 생각한다. 가령 인도의 ‘아쉬람’과 같은 마을을 생각해보곤 한다. 그 공동체에서 구성원들은 봉사의 정신을 갖고 있다. 그곳에 속하기 위해서는...... .

공동체에 공헌해야 한다?

알바로
그렇다. 그 공동체에 소속되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하며 그 공동체에 기여해야 한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모두가 공동체를 가꾸어야 한다. 모두 일을 해야 한다. 그저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즉 아이들은 공동체의 수혜자들이 아니라 아이들은........

드리유방
주인(actor)이여야 한다.    

알바로
맞다. 바로 아이들은 학교라는 공동체의 주인들이다. 아이들 모두가 동일한 수준의 소속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마다 차이가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몸의 학교’에 소속감을 느끼는 것은 학교가 그들의 것이 되기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몸의 학교 교육과정의 고유한 특징은 무엇인가?

드리유방
으음, 간단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알바로
춤은 나와 들뢰뱅이 맡아 전문적인 훈련을 해왔다. 들뢰뱅은 프랑스와 콜롬비아를 오가며 작업해왔다.

우리는 먼저 '조종사(piloto)' 그룹을 형성했다.(이들은 강도 높은 오디션 과정으로 선발된 소수의 영재들이 아니다. 10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강도를 높여가는 예술적 훈련 과정을 이수하면서 예술가로 걸러진 이들이다) 

이들은 강도 높은 예술적 감수성 훈련을 통해 선발되는 과정을 밟았다. 처음엔 480명이 출발했는데 서서히 훈련 강도를 높여 가며 90명, 30명, 22명, 18명, 10명(9명)으로 변하는 과정을 겪었다. 12년의 자연적인 선택 과정을 거치면서 소수정예그룹이 형성된 것이다.  

이들 선배그룹 다음으로 ‘부조종사(copiloto)’ 그룹을 형성해 약 7년간 감수성 훈련을 진행해왔다. 현재 20명으로 구성된 이 그룹을 한국방송이 취재했다. 이 그룹은 까르따헤나에서 최악의 가정 및 사회 환경에서 살아온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몸의 학교’가 본격적으로 사회적 소명을 갖고 추진한 일이다. 이 프로젝트는 세계은행을 비롯한 극빈층을 지원하는 국제 프로그램의 후원을 통해 훈련해왔다.

드리유방
그밖에 우리는 ‘예술학교’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두 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일반 학교 두 곳과 협정을 맺어 진행한다. 약 70명의 아이들과 함께 진행하고 있다. (일반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예술대안교육을 제공하는 프로젝트이다)  

마리 프랑스 드리유방, "한 명의 예술가, 춤꾼은 ‘움직임’으로만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는 예술은 물론이고 철학, 문학 등 광범위한 인문학적 성과를 흡수하며 지적으로 성장한다."

교직원 구성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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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학교는 16명의 직원들이 학사업무에 종사하고 있다.

드리유방
교원들 가운데는 조형예술, 연극, 요가, 영어, 문학 등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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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은행에 제출한 문서에는 몸의 학교 관련 통계가 두루 담겨 있다. 그간 ‘몸의 학교’는 콜롬비아 내외의 다양한 기관들의 후원을 받아왔다. 현재 우리는 좀 더 안정적이고 체계적인 학교재정마련을 위해 외부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갖고자 한다.    

몸의 학교가 양성하고자 하는 예술가 상은 무엇인가?

드리유방
한 명의 예술가, 춤꾼은 ‘움직임’으로만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는 예술은 물론이고 철학, 문학 등 광범위한 인문학적 성과를 흡수하며 지적으로 성장한다. 춤 교육은 예술가 양성 교육의 한 분야에 불과한 것이다.

철학도 있는가?

드리유방
철학 선생도 필요하다. 현재는 알바로가 명상과 성찰의 시간을 진행하고 있다.      

알바로
학생들에게 춤추는 법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법도 가르쳐야 한다. 예술가는 자신의 삶과 자신의 환경을 성찰해야 한다. 예술가는 어떻게 자신의 삶을 개선하고 자신의 속한 가족과 사회에 기여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예술가에게 더 중요한 것은 하나의 예술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삶이다. 진정한 예술 작품은 예술가의 일상적인 삶이다. 예술가는 삶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 무대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드리유방
무대 위도 무대 밖도 중요하다.    

예술가도 한 명의 시민이라는 의미인가?

알바로
물론이다. 무대만이 아니라 삶 자체도 아주 중요하다. 이 양자 사이에 단절이 있어서는 안 된다. 예술작품은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니 예술 작품은 삶의 현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몸의 학교의 실험을 더욱 확장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들었다.   

알바로
현재 우리가 ‘몸의 학교’를 여러 장르를 포괄하는 복잡장르 학교로 확대 개편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보고타에서 국립현대무용학교의 교장으로 일할 때 그 주변에는 다른 예술학교들이 있었다. 그때 나는 새로운 학교에 대한 영감을 얻었는데 ‘몸’을 예술교육의 중심으로 삼아 음악가, 미술가, 연극인, 무용수를 양성하는 통합교육과정에 기반한 다쟝르학교를 상상한 적이 있다. 예술의 시작이자 끝이고, 예술의 출발지이자 도착지인 인간의 몸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말이다. 이것은 좀 요원한 일이다.

현재 우리는 예술직업학교(Escuela de Oficio)를 만들 계획이다. 까르따헤나는 관광도시로 다채로운 문화행사들이 펼쳐진다. 그 문화행사들의 수준을 향상시켜갈 인력을 양성하려는 것이다. 문화기획, 프로덕션, 무대기술, 의상, 조명 등을 다룰 예술관련 종사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학교이다.

드리유방
우리가 가르치는 학생들 가운데 몇몇은 세계적인 춤꾼으로 성장하고 있지만 모두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예술적 감수성 훈련을 받았다. 현재까지 까르따헤나는 물론이고 콜롬비아에는 직업적 예술기획자 혹은 예술 기술자 등을 양성하는 기관이 없다.

우리가 예술직업학교를 구상하게 된 것은 예술교육을 받은 이들이 각기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에게 적절한 직업을 찾고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하려는 목적에서다. 

까르따헤나에서는 국제회의와 축제가 자주 개최된다. 다양한 문화행사가 펼쳐지는 것이다. 
예술적 감수성 훈련을 받은 이들이 예술관련 일에 종사하게 되면 문화 활동의 전반적인 수준도 향상될 것이다.  

알바로
우리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도 공연했다. 한국 정부가 정치적 의지를 갖고 추진한 국가적인 프로젝트로서 전통, 현대, 실험 예술가들을 두루 양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주 흥미로웠다.  

몸의 학교는 주요 사립대학교 중의 하나와 협정을 맺었다. 예술 학부를 가진 대학교와 협정을 맺어 우리 학교에서 초등 및 중등과정을 마친 아이들이 그곳에서 더욱 전문적 훈련을 받기를 바란다. ‘몸의 학교’ 출신 학생들이 춤뿐만 아니라 연극 혹은 미술 등의 다른 예술 장르에 종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콜롬비아 교육제도는 몸의 학교 실험을 수용하고 있는가?  

알바로
콜롬비아 교육법은 커리큘럼의 다양성을 보장한다. 혁신적인 교육과정을 도입할 수 있는 것이다.

드리유방
프랑스는 커리큘럼의 다양성이 보장되지 못한다. 획일화된 공교육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알바로
반면 콜롬비아는 다양한 교육과정을 운영할 수 있다. 농업, 어업, 산업 지역 등 학교 소재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는 교육과정을 설계할 수 있다. 모든 학교가 가르쳐야 할 기본적인 내용만 반영한다면 나머지는 학교마다 특성 있게 교육할 수 있다. 

가령 ‘몸의 학교’가 혁신적 예술 교육과정을 도입할 수 있다. 예술을 매개로 수학, 기하학, 물리학을 가르치는 혁신적인 교육을 진행할 수도 있는 것이다. 

머리는 지성의 원천이지만 몸은 직관과 예술, 스포츠의 원천이다. 즉 학문과 예술의 원천은 우리의 몸이고 우리의 몸에서 학문과 예술은 통합된다.  

 

 

[관련기사]
한국판 ‘몸의 학교’ 만들자
"우리는 창조자들의 창조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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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6 11:19

"우리는 창조자들의 창조자들이다"

[인터뷰]몸의 학교 공동교장 알바로 레스뜨레뽀, 마리 프랑스 드리유방 - ①(박정훈 _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위원)
몸의 학교 설립자이자 공동교장인 알바로 레뜨레뽀, 마리 프랑스 드리유방.
▲ 몸의 학교 설립자이자 공동교장인 알바로 레스뜨레뽀, 마리 프랑스 드리유방.

14일과 15일 연달아 공연을 가진 구스타보 두다멜과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는 예술교육이 이루어낼 수 있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전체인구의 80%가 빈민인 베네수엘라에서 저소득층의 아이들에게 무상으로 악기를 제공하고 음악을 가르쳐주는 '엘 시스테마'는 시행 30년이 된 지금, 30여 만 명의 음악가를 배출했고 120여개의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만들어냈다. 구스타보 두다멜 또한 빈민가 출신으로 엘 시스테마를 통해 음악을 접했고 세계적인 지휘자의 반열에 올랐다. 공교육이 허물어지고 사교육만 기승을 부리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이들의 사례는 꿈만 같은 일이다. 그러나 예술교육이 특정한 계층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세계의 예술교육은 증명하고 있다.
콜럼비아의 대안예술학교인 몸의 학교는 예술교육이 가져온 또 하나의 기적과도 같은 사례다. 지난 10월 한국을 찾은 몸의 학교 창립자이자 공동교장인 알바로 레스뜨레뽀와 마리 프랑스 드리유방을 사회공공연구소의 박정훈 연구위원이 인터뷰했다. 사회공공연구소의 협조를 받아 인터뷰 전문을 3회에 걸쳐 전재한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 바란다. / 편집자.

 

몸의 학교 무용단은 10월 18일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에 [몸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라는 작품으로 참가하여 서울 예술의 전당 무대에 올랐다. 안산 예술의 전당이 주최한 라틴아메리카 연극제에 [또 다른 사도]라는 작품으로 참가했고 24일 안산 시민들과 만났다. 10월 21일과 22일 이틀간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안산 대안학교 ‘들꽃 피는 학교’ 중고등학생 30명과 워크샵 행사를 가지기도 했다. 인터뷰는 워크샵 행사가 끝난 뒤 ‘몸의 학교’ 무용단이 머물고 있던 호텔 1층 카페에서 이뤄졌다.

안산 청소년들과 워크삽 행사는 어떠했는가?  

알바로
시간적인 제약으로 이틀에 걸쳐 3시간씩 총 6시간에 불과했다.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드리유방
그 아이들이 예술이 뭔지 알겠는가. 춤이 뭔지 알겠는가. 그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아주 새로웠을 것이다.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의 시선 앞에 나서는 것을 쑥스러워했다. 그러다 서서히 마음을 열면서 반응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색해하면서 자신을 표현하지를 못하던 아이들이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예술가로서 모국 콜롬비아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알바로
콜롬비아라는 국가의 탄생 자체가 아주 복잡한 과정의 산물이었다. 아주 많은 고통이 담겨 있는 탄생이었다. 국가 형성 과정에서 트라우마가 형성되었다.   

이 나라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해야 한다. 엄청난 힘들의 충돌이 있었다. 물론 다른 나라들도 그런 특징이 있겠지만 콜롬비아는 그 같은 특징들이 얼키고 설켰다. 이 나라의 위치가 중미와 남미의 통로에 위치한다. ‘아메리카의 배꼽’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복기를 거쳐 식민지 시대에 끄리오요(스페인 후손이지만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계층)층이 등장했다. 이들은 스페인 정복자들보다 더 사악한 집단이었다. 스페인 식민주의자들의 나쁜 면들은 모두 지니고 있으면서 그들보다 더욱 악랄하게 권력을 활용했다.   
 
드리유방
콜롬비아는 아프리카 국가들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식민지 시대를 마감하고 독립된 나라들의 지배층은 과거 식민지 지배층을 모방하면서 똑같이 행세했다. 즉 탈식민지의 역사적 경험이 부재했다.

알바로
콜롬비아는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나라이다. 그래서 나는 이 나라를 ‘눈 먼 국가’라 부르곤 한다. 자신의 힘, 자신의 잠재력, 자신의 아름다움을 부인하는 나라. 그래서 결국 자신을 파괴하는 나라. 그 파괴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는 나라. 나는 이 나라가 힘과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콜롬비아는 카오스 속에서 허우적대기만 하는 게 아니다. 자기파괴적 경향으로 인해 스스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콜롬비아 아이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알바로
바로 이런 콜롬비아를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나는 자식이 없다. 하지만 자식이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책임감을 느낄 것이다. 이 아이들이 이 나라의 온갖 문제를 연장시키거나 해결하거나 하는 갈림길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드리유방
청소년기의 일반적인 특징이 있다. 그것은 전 세계 모든 청소년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일이다. 바로 거기에 콜롬비아의 내부 문제가 겹쳐 있다. 세계 곳곳에 폭력은 존재한다. 하지만 콜롬비아에서 폭력이 더욱 증폭되어 왔다. 콜롬비아 내부 위기가 폭력과 빈곤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고 아이들은 이런 상황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알바로
삶의 성스러운 가치가 파괴되고 있다. 아이들 청소년에 대한 강도 높은 폭력이 행사되고 있다. 방치, 빈곤, 기회 부족, 질 낮은 교육, 무지로 인한 가족 내 폭력 등. 아이들은 자신의 권리를 모르고 자신의 존엄성에 대해 자각하지 못한다. 그 결과 제대로 성장하지도 제대로 삶을 영위하지도 제대로 발전하지도 못한다.


콜롬비아의 인종 차별 문제는 어떠한가?   

드리유방
콜롬비아 도시들에는 노예제도의 유산이 여전히 살아 있다. 식민지 시대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노예들이 이 나라에 도착했다. 아프리카계 콜롬비아 사람들은 오늘날 가장 가난한 계층을 이루고 있다. 인종주의는 이 나라를 분열시키고 사회를 분열시킨다.

알바로
이 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주는 태평양의 초꼬(Choco)주로 그곳은 ‘흑인들의 게토’에 다름 아니다. 콜롬비아는 문화적, 인종적, 생태계의 다양성을 보유하고 있지만 이를 인정하지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한다. 이것은 아이들의 고통으로 이어진다.   

드리유방
자기 권리를 향유하지 못하고 자각하지도 못할 때 스스로의 인생에서 아무런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다. 자신의 삶, 삶의 발전, 집과 같은 기본적인 욕구들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타인의 삶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절실하고 이를 통해 각성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알바로
콜롬비아 아이들은 성장기를 빼앗겼다. 이 아이들이 유아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권리가 필요하다. 아이들을 홀대하는 나라는 미래가 없다.

두 분 다 예술가들이다. 교육자의 길은 예술가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드리유방
콜롬비아의 아이들은 버려진 아이들이다. 거리에 버려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국가제도에 의해 버려졌다. ‘유년기를 갖지 못한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국가가 버린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술가로서 내 고민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술가의 길을 버리고 예술교육자의 길로 나섰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 활동이 나의 예술 활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교육자가 되기 위해 예술 활동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나는 예술가가 되지 않은 채 예술교육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난 더 예술적인 생애를 살기 시작했다.
 
알바로
교육이 바로 하나의 예술이다. 예술가 양성이 바로 하나의 예술적 노동이다. 교육은 조각가의 노동과 유사하며 예술교육은 예술가를 조각하는 것이다. 예술가는 창조자들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창조자들의 창조자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산파들이다. 예술가 산모들이 예술작품을 잘 낳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나는 늘 사회적 소명을 느끼곤 했다. 청년시절 거리의 아이들과 연극을 하면서 연극이 훌륭한 교육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연극을 통해 아이들이 자신의 역사와 고통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 같은 경험이 현대무용으로 날 이끌었다.

현대무용가가 되어 외국에서 활동하다가 콜롬비아에 돌아와 현대무용가를 양성하려는 계획을 세웠을 때 이 프로젝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충분히 깨닫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대무용을 콜롬비아에 뿌리내리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 부모의 고향 까르따헤나로 가겠다고 결정하면서 나는 그곳에서 나의 뿌리를 만나게 되었다. 많이 접촉하지 않았던 사회적 계층과 만났다. 나는 그들과 완전히 다른 가정환경에서 나고 자랐다. 내가 까르따네하에서 만난 새로운 계층은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그 계층을 발견하고 소외된 그들을 대상으로 교육하는 것(civilizar)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계층은 눈에 보이지 않은 이들이었고 무시당해온 아이들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는 것 자체는 하나의 정치적 행위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의 프로젝트는 빈민 아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회 전체를 향해 내 놓은 제안이다. 인종과 계층을 불문하고 모두 통합하여 교육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콜롬비아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인종과 계층의 아이들 모두의 몸의 감수성을 계발하는 것이 우리의 교육목표이다. (콜롬비아의 교육제도내의 불평등은 심각하다. 계층과 인종에 따라 공교육의 분리가 알게 모르게 이뤄진다)

우리는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 착목한 프로젝트이다. 소유가 부의 원천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부유함의 진정한 원천이다.  
 

알바로 레스뜨레뽀가 들꽃학교 아이들과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알바로 선생님의 가정환경은 어떠했는가?  

알바로
나는 까르따헤나 중상층의 가정에서 태어나 수도 보고따로 이주했다. 상류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경제적으론 윤택했다. 아버지는 독학으로 공부했고 상업으로 자수성가했다. 예술적 감수성도 풍부한 사람이었다.

나는 전직 대통령의 자식, 전직 각료의 자식들이 공부하는 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난 그 세상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또한 콜롬비아의 또 다른 세상, 아주 커다란 현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드리유방 선생님이 콜롬비아 초대를 수락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콜롬비아의 경험이 선생님에게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드리유방
알바로가 콜롬비아 현대무용을 발전시키고자 수도 보고타에 현대무용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는 구상을 밝히고 협력을 요청했다. 프랑스 외교부 문화국은 프랑스 앙제 국립현대무용학교 교장으로 일하고 있던 나를 콜롬비아에 파견했다. 일종의 외교적인 목적의 공식적인 방문이었고 예술교육가로서 직업적인 관심의 방문이었다. 

나는 그 전에 콜롬비아를 방문한 적이 없었다. 보고타에 도착한 나는 유럽에서 이 나라를 본 것과 아주 다른 현실을 발견했다. 이 나라의 예술가들을 만났고 청년들과 함께 일하면서 이 나라엔 내가 모르던 전통이 살아 있고 예술적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는 여전히 양국의 문화교류 및 문화협력을 통해 전문무용수를 양성한다는 목적에 충실했다.

알바로가 까르따헤나행의 포부를 밝혔을 즈음엔 이미 나는 콜롬비아의 여러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 알바로가 까르따헤나의 일과 관련해 자문을 요청했다. 나는 까르따헤나에서 알바로가 추진하고자 하는 일이 가져올 사회적 충격과 힘을 알게 되었다. 

까르따헤나 아이들을 가르칠 계획을 세우면서 나는 근심거리가 있었다. 프랑스에서 예술교육에 종사할 때 느낀 점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아주 더디고 더딘 과정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한 프랑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밝혔지만 프랑스에서 5년이 걸려도 이루지 못한 일을 콜롬비아에서는 1년 만에 달성했다. 아이들의 발전 속도는 놀라웠다. 내 이 발언이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었다. 콜롬비아 아이들은 사회적 환경으로 인해 강렬한 욕구를 갖고 있었다. 아이들에겐 기회가 필요했던 것이다. 기회가 주어지자 아이들은 예술적 감수성을 키우는 노력을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콜롬비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내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런 삶의 변화는 분석을 통해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직관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예술가들은 대체로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사회적 조건으로 인해 사회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관점을 갖는 경우가 많다. 많은 예술가들이 세상의 바깥에, 사회 현실의 바깥에 거하고 있다. 

나는 현실을 느닷없이 충격적인 방법으로 발견했다. 나는 사회 속에서 예술의 역할에 대해 완전히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콜롬비아에서의 경험을 통해 내가 프랑스에서 예술가로 살아가는 법도 바뀌기 시작했다.(콜롬비아와 프랑스를 오가면서 교육자로 일하고 있다) 
교육에서 예술적 감수성 교육은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물론 세상 모든 이들이 그렇다고 말하기는 한다. 하지만 대체로 실천하지 않거나 혹은 실천하더라도 잘못 실천하고 있다.

교육에서 여전히 예술은 첨가물로 간주되고 있다. 수학, 언어, 문법, 과학 등의 일반과목과 달리 예술의 하나의 사치로 간주되고 있다. 하지만 예술적 감수성 교육은 교육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드리유방 선생님을 초청한 이유는 무엇인가?

알바로
현대무용학교를 세우려 했을 때 난 교육자의 경험이 없었다. 예술교육과 관련한 여러 가지 경험들을 듣고자 했다.

나는 프랑스 현대무용에 깊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예술교육 경험이 풍부한 사람의 지원을 받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나는 외국과의 문화적 대화에 늘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처음부터 내 프로젝트에 외부의 시각을 반영하고 싶었다. 내 경험으론 외부의 시각은 늘 나 자신을 새롭게 접근하는 데 유용했다. 한국인 무용가 조규현 씨를 통해 내 속의 동양적인 면을 발견한 경험이 있다. 

따라서 나는 처음부터 이 프로젝트가 외부의 시선의 도움을 받는 국제적인 프로젝트, 보편적인 프로젝트이기를 바랐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프로젝트는 성공 사례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우리 프로젝트는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문화 간의 국제적인 대화이다. 물론 아무하고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콜롬비아 사람들과 문화를 존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드리유방은 처음에 ‘양국을 잇는 다리’가 되겠다고 말했다. 

드리유방
나는 알바로에게 자문하거나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알바로 
또한 드리유방은 앙제 현대무용학교 교장으로 콜롬비아 예술가들을 프랑스에 초대하기도 했다. 문화적 상호 기여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드리유방
‘좀 더 발전한 나라들(avanzados)’. 다른 표현은 없을까요? 그 나라들을 좀 더 문명화된 나라들(civilizados)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좀 더 조직된(organizados) 나라들’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

하여튼 이 나라들은 콜롬비아를 도와야 한다. 그런데 이 나라들은 자신들이 어떤 도움이 필요한 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과 유럽 나라들은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데 프랑스 예술가로서 내가 콜롬비아에 예술적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 잠재력을 계발하면 유럽과 미국과 같은 나라들에 큰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프리카도 예술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대륙의 사정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현재는 적절한 시기가 아닌 것 같다.

요컨대 내게도 라틴아메리카와의 만남이 절실히 필요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알바로와의 만남은 콜롬비아의 발전에 기여하면서 동시에 우리를 살찌우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의 작업은 상호 교류이며 모든 교류가 그렇듯이 주고 받는 것이다. 모든 것을 주고만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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