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4'에 해당되는 글 28건

  1. 2009.04.24 기타에 갇힌 노동자에게 일할 자유를!
  2. 2009.04.22 야생마 이상훈, 이제는 뜨거운 기타리스트
  3. 2009.04.22 한국ㆍ일본의 문화예술 인력과 조직의 방향
  4. 2009.04.22 살인마는 우리의 이웃사람이었다
  5. 2009.04.15 '꼬마 소크라테스'들에게 배워라 (2)
  6. 2009.04.15 합창단 해체?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7. 2009.04.15 현실미학의 비판적 육성을 들어라!
  8. 2009.04.15 도서관, 세상을 읽는 힘
  9. 2009.04.14 사소한 독서 습관이 안내한 특별한 작가 (1)
  10. 2009.04.14 소수민족의 인권과 국제적 연대를 위하여
2009.04.24 11:08

기타에 갇힌 노동자에게 일할 자유를!

콜트ㆍ콜텍 릴레이 문화행동, 판화가 이윤엽

판화가 이윤엽. 기타에 갇힌 노동자를 표현한 판화작품으로 일인시위에 나섰다.

▲ 판화가 이윤엽. 기타에 갇힌 노동자를 표현한 판화작품으로 일인시위에 나섰다.



                                                  안태호 기자

4월 22일 수요일 낮 12시. 날씨는 화창했지만 바람이 몹시 불었다. 기분과는 달리 강렬한 바람이 얼굴을 절로 찌푸리게 했다. 바람에 물건들이 계속 자리를 못잡는다. 바람과 투닥거리며 일인시위 판넬에 작품을 붙이랴, 바닥에 현수막을 붙이랴, 인사동 남인사마당 복판이 분주하다.

3월부터 시작된 ‘콜트ㆍ콜텍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와 함께하는 문화예술인 릴레이 문화행동’의 일곱번째 일인시위가 시작됐다. 오늘의 시위자는 판화가 이윤엽. 그는 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하는 평택 대추리 주민들의 싸움이 있을 때, 아예 대추리에 들어가 살았다. 그곳에서 발표한 대추리 연작판화들도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사실 그의 가장 큰 활동은 대추리 주민으로 사는 것이었다. 올해 용산참사가 일어나자 <여기 사람이 있다>는 제목의 판화작품을 판매해 수익금 전액을 유족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그는 어느 순간 가장 뜨거운 곳에서, 가장 치열하게 작업하는 문제적 작가가 되어 있었다.

이윤엽 작가가 콜트ㆍ콜텍 노동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들고 나온 작품은 <일하고 싶다>. 콜트 마크가 새겨진 기타의 소리통 위로 마스크를 쓴 노동자가 머리를 내밀고 있다. 그의 손에는 톱과 망치가 들려 있고 머리 위에는 새 한마리가 그려져 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기타에 갇힌 사람들을 표현했단다. 비록 기타에 갇혀 있지만 일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손에 연장을 들려주었고, 이 상황이 조속히 해결되어 일 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평화를 되찾길 바라는 마음으로 머리 위에 새를 그렸다.

사실, 그가 이 작품을 구상한 것은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기막힌 사연이 미디어를 통해 알려진 직후였다. 작년 10월 무렵 이 소식을 접한 이윤엽은 즉석에서 기타에 갇혀있는 노동자의 이미지가 떠올랐다고 회상한다. 그런데 누가 먼저 사용했을거라 생각했던 이 주제는 이제껏 아무도 다루지 않았다. 작품은 시위 전날에서야 완성됐다.

이윤엽 작가는 작품을 말로 설명할 때가 가장 싫다며 쑥스럽게 웃어보였다. 딴은 그럴 것이다. 예술가에게 섬광처럼 떠오른 영감을 구구절절 말로 풀어내게 하는 것은 못할 짓이다. 예술가는 이미 작품으로 말을 다 했는데 거기에 말을 덧붙이는 건 그게 어떤 말이든 사족이 될 수밖에 없을테니까.

콜트ㆍ콜텍 노동자들 역시 그들의 기타로 이야기했다. 그들의 기타는 세계시장의 30%를 차지할 만큼 품질을 인정받았다. 그런데 그들은 기타로 이야기하는 것을 거부당했다. 지금 그들의 외침은 자신들의 일할 자유를 되찾기 위한 불가피한 투쟁이지만, 언젠가 그들 역시 다른 말이 필요없는 기타를 보란듯이 만들 날이 올 것이다.

수요 일인시위는 문화예술인들이 릴레이로 참여하고 있다. 기타노동자들의 사연인만큼 음악인들의 참여가 많았다. 한받(아마추어 증폭기), 김일안(처절한 기타맨), 목인(캐비넷싱얼롱즈), 최철욱(킹스톤루디스카) 등의 음악인들과 시인 김경주가 일인시위 판넬을 목에 걸었다. 앞으로도 한동안 매주 수요일 남인사마당에는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억울한 사연에 귀를 기울여줄 것을 호소하는 문화예술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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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2 09:34

야생마 이상훈, 이제는 뜨거운 기타리스트

▲ "특별한 꿈은 없다. 그냥 지금처럼 하는 것이 꿈이라면 꿈이다. 앨범을 내고, 공연을 하고…."

몇 해 전, 야구계를 주름 잡았던 LG트윈스의 Closer, 야생마 이상훈이 홀연 은퇴를 했다. 하지만 이걸로 놀라기엔 아직 이르다는 듯 곧이어 그가 야구공 대신 기타를 잡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리고 밴드 ‘What’이 결성은 놀람의 결정타였다.

나와 함께 A-frica에서 함께 활동하였던 베이시스트 장민규가 What의 멤버가 되었고, 어렸을 때부터 존경해 마지않던 시나위 출신의 드러머 신동현이 What의 안방마님으로 들어앉았다. What은 결성부터가 이슈였다. 내가 A-firca에서 활동했을 때, 이상훈이 우리밴드의 세컨 기타로 참여한 적이 있다. 지난 2007년, A-firca가 LA Guns의 내한공연의 오프닝 공연을 했을 때도 이상훈은 A-frica에서 기타를 연주했다. 그때 느꼈던 것이 ‘이제는 야구인 이상훈이 아닌, 음악인 이상훈이 되었구나.’였다.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Closer 47시절만큼이나 뜨거웠다. 프로야구선수 출신 이상훈, 시나위 출신 신동현 이라는 수식어는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이미 그들은 오직 “What”이라는 이름으로 그들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했다. 꼬리표처럼 달고 다녔던 지난 수식어들을 떨쳐버린 “What”과 그 중심에 서있는 뮤지션 이상훈을 만나기 위해 홍대에 위치한 연습실을 찾았다.


요즘 밴드활동에 미용실 사업에, 거기다가 이상훈의 <네버 엔딩 스토리>라는 인터뷰까지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너무 바쁘게 사는 거 아닌가?

(이상훈 / 기타&보컬 / 기타) 요즘은 멤버들과 함께 곡 작업에 매진중이다. 대신 공연을 많이 줄였다. 얼마 전에 부산에서 공연을 하고 왔는데, 그것은 그 전부터 잡혀있던 거라 어쩔 수 없었다. 지금 같은 경우는 일부러 공연을 잡아서 하고 있지는 않다. 주말마다 정기적으로 했던 클럽공연도 줄였다.

야구선수 이상훈의 밴드가 아닌, 록 밴드 What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한다. 간단히 소개를 해 달라.

(이상훈) 뭐 그냥 록 밴드다.(웃음) 다른 밴드들처럼 공연을 하고 앨범을 내고 좋아하는 음악을 하는 록밴드이다. 앨범은 EP 1장과 정규앨범 1집, 2집 이렇게 총 3장을 발매했다.

이상훈은 야구 현역시절부터 수많은 인터뷰를 했는데, 하지만 이번 인터뷰에서는 뮤지션 이상훈에 대해 많이 알고 싶다. 처음에 어떻게 기타를 치기 시작했는가?

(이상훈) 내가 고려대학교 재학시절 힘든 시기가 있었다. 그때 팀에서 이탈을 해서 방황을 했는데 공사현장의 일용직 노동도 해봤고, 나이트클럽에서도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거기에서 나와 함께 먹고 자고 하는 웨이터가 한 명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아이가 기타를 연주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훌륭한 연주는 아니었는데, 당시에는 ‘와~ 이게 뭐지?’ 하는 충격을 받았다. 그때부터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야구만이 이상훈의 전부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원래 음악에 관심이 있었는가?

(이상훈) 물론이다. 그전에도 음악을 굉장히 좋아했었다. 하지만 악기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그러다가 기타연주에 대한 관심이 생기면서 그때부터 혼자 책을 보며 기타연습을 하기도 하고, 이리저리 정식으로 배우러 다니기도 했다. 밴드를 하게 되면서 다른 팀들의 연주를 보기도 하고, 좋아하는 기타리스트들의 연주도 보면서 많이 배웠다.

존경하는 기타리스트가 있는가?

(이상훈) 존경하는 것은 아닌데 좋아하는 기타리스트들은 많다. 슬래쉬(건스 앤 로지즈), 잭 와일드(오지 오스번 밴드), 덕 앨드리치(배드 문 라이징)를 좋아한다. 지미 헨드릭스도 좋아하지만 슬래쉬, 잭 와일드가 더 와 닿는다.

What은 어떻게 결성되었는가?

(이상훈) 드러머 신동현이 야구를 무척 좋아해서 그전부터 나와 알고 지내고 있었다. 사실 그때부터 What이라는 밴드를 했었다. 2002년에 시즌 끝나고 팬 미팅할 때도 동현이와 함께 밴드를 했었다.

그런데 언론에는 What의 존재가 2004년도 즈음 공개가 되었는데.

(이상훈) 2004년에는 우리가 단지 앨범을 발매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앨범을 홍보하려고 언론에 알린 것은 아닌데, 기자들이 알아서 기사화시켰다.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홍보를 안 한다는 걸. (웃음) 우리는 라이브가 홍보다.

초창기 What의 음악적 기반은 어떻게 잡았는가?

(이상훈) 우리가 초도를 잡을 때, 외국의 어떤 밴드를 모델로 잡고 시작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런 음악을 많이 듣기는 하지만, 우리가 한다고 해서 그런 음악이 나오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냥 우리에게 어울리는 음악, 할 수 있는 음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What의 앨범 3장에는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음악도 있다. 하지만 앨범을 내면서 점점 더 ‘우리화’되어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로 가득 채워져 가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좀 민감한 질문이 될 수도 있겠다. 이상훈도 물론 기타는 20대 초반부터 잡았지만, 나머지 멤버들은 평생 음악만을 하던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로 드러머 신동현은 Zero-G, 시나위 등에서 활동할 때부터 나에게 영웅과 같았던 뮤지션이다. 이렇게 국내에서 내로라는 최고의 뮤지션들과 음악을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지는 않는가?

(이상훈) 부담이라기보다는 그들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을 해봤다. 내가 30대 중반이 되어서 평생 음악만 하던 동현이에게 ‘나와 같이 밴드를 하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동현이에게 ‘내가 너하고 밴드를 같이 해도 되냐?’라고 조심스럽게 물었었다. 그때 동현이가 ‘음악, 뭐 같이 하면 되지’라고 대답을 했고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신동현의 입장도 많이 고려했었다. 평생 음악만 하던 신동현이 야구선수 이상훈과 음악을 한다고 하면 동현이 주변사람들이 색안경을 끼고 보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What이라는 밴드가 존재하고 있는 자체가 그러한 편견을 지워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추구하는 음악적 욕심이 있어서 시작을 한 것 이었나? 하드록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만든 것인가?

(이상훈) 아니다. 하드록이든, 팝메탈, 심지어 데스메탈까지 어떻게든 갖다 붙이면 장르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드록이라고 규정짓지는 않고 싶다. 물론 그렇게 불러주면 어쩔 수 없지만, 우리는 단지 밴드 What이 할 수 있는 음악을 하는 것이다. 누군가 물으면 그냥 ‘밴드 What이 하는 음악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대중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대에 서있는 뮤지션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만들면 대중들이 좋아하겠다.’라는 생각은 그 다음에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이러다보면 우리를 좋아하는 팬들이 생기고, 반면에 싫어하는 사람도 생기는 것이다.

곡 작업을 할 때는 누가 주도적으로 하는가? 작곡에 참여를 하기도 하는가?

(이상훈) 저작권 등록할 때 이름 올리는 것은 수익 때문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다. (웃음) 사실 저작권이라는 규제가 없으면 그냥 What의 이름으로 올리고 싶다. 곡 작업을 할 때도 특별히 작곡이라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냥 기타를 치다가 좋은 리프가 나오면 멤버들끼리 모여서 거기에다 살을 붙이고, 그 다음 MR을 제작한다.

멜로디 라인은 본인이 직접 만드는가?

(이상훈) 내가 보컬이다 보니 MR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그냥 들으면서 흥얼거린다. 그러면서 가사를 적는다. 그리고 일단 녹음을 하는데 입에 달라붙는 가사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 아닌 경우에는 녹음 도중이라도 가사를 바꿔버린다. 그러다보면 완성이 된다. (웃음) 완벽하게 틀을 잡아놓고 녹음하지는 않는다. 물론 80%정도는 기반을 잡아놓지만, 마지막 보컬녹음을 할 때는 변수가 많이 생긴다. 그래서 조금씩 수정을 하면서 곡을 완성시킨다.

삶에 있어 음악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가? 미용 사업에 야구인으로서, 그리고 뮤지션으로서. 음악을 단순히 취미라고 생각한다면 다른 멤버들에게 미안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상훈) 어떤 사람이든지 여길 가면 이것을 열심히 해야 하고, 저길 가면 저것을 열심히 해야 한다. 이것을 하는데 저걸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뮤지션으로 불리고 싶다, 사업가로 불리고 싶다, 프로야구선수로 불리고 싶다’ 이런 것이 없다. 물론 사람들은 나를 뮤지션으로도 얘기를 안 하고, 사업가로 부르지 않는다. 사람들은 아직도 나를 ‘이상훈, 저 사람 야구선수였잖아. LG트윈스. 왼손잡이’라 부른다. 언제까지 그렇게 부를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인식이 그러한데 난들 어떡하겠는가. 단지 사업을 할 때는 비즈니스를 열심히 하는 것이고, 기타를 치거나 무대 위에 있을 때는 뮤지션의 마인드로 살고 싶다.

결성 당시부터 매스컴으로부터의 관심을 받았다. 야구선수라는 꼬리표가 음악을 하는데 불편하지는 않았는가? 공연장을 찾아온 팬이 What의 음악보다 LG트윈스의 팬이었다고 말하면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상훈)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다. (웃음) 그 사람이 그렇게 부르는데 내가 어떡하겠는가. 날더러 야구선수라고 하는데 그 앞에서 ‘나는 지금 뮤지션이다.’라고 하는 것도 웃기지 않는가? 오히려 나에 대한 기억을 가져준다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반대로 지금의 나를 보며 ‘뮤지션이 다 되었다’, ‘사업가가 다 됐네.’ 이렇게 불러주는 사람도 있다.

아프리카의 정현규는 이상훈을 일컬어 화려한 테크니션은 아니지만, 뜨거운 플레이를 하는 기타리스트라고 했다. 본인은 스스로 어떤 기타리스트, 어떤 보컬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상훈) (웃음) 아휴~ 내가 무슨 기타리스트인가. 그리고 나는 보컬도 아니다. 그냥 기타가 좋아서 치는 거다. 노래를 하기 위해 음악을 한 것은 아닌데, 그래도 우리 팀에서는 내가 노래를 가장 잘한다. (웃음) 우리 팀이 하는 음악에 내 목소리가 가장 어울려서 보컬을 한 것이지 특별한 것은 없다. 솔직히 노래연습은 합주할 때나 하고, 평소에는 기타연습에 더 비중을 둔다.

방송출연을 많이 하지 않던데, What의 공연은 어디에서 볼 수 있는가? 행사공연도 많이 하는 편인가?

(이상훈) 방송섭외는 안 들어오더라. (웃음) 그러나 방송이든 뭐든 라이브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공연을 하는 편이다. 행사공연 또한 잘 안 들어온다. 홍보를 안 해서. (웃음) 우리는 클럽공연을 주로 한다.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인천, 광주, 청주 등 각 지역 클럽은 모두 다녔다. 사실 이러한 라이브무대가 홍보가 아닌가.

팬 층은 주로 어떠한가?

(이상훈) 팬들이 없다. (웃음) 3명이랑 공연을 한 적도 있고, 30명과도 한 적이 있다. 이런 것은 다른 밴드도 비슷하지 않은가.

뮤지션 이상훈으로 꿈이 있다면?

(이상훈) 특별한 것은 없다. 그냥 지금처럼 하는 것이 꿈이라면 꿈이다. 앨범을 내고, 공연을 하고…. 새로운 앨범에 대한 욕심이 있기에 우리는 더욱 성숙해지리라 믿는다. 음악활동을 하면서 좋은 일이 있을 수도 있고, 사람들이 알아주면 더욱 고마울 뿐이다. 사람들이 우릴 알아주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처음에 내뱉었던 말을 지켜가면서 열심히 하고 있다.

록 마니아들에게 어떠한 밴드로 기억되고 싶은가?

(이상훈) 그냥 변질되지 않고 열심히 꾸준하게 음악을 하는 밴드, 그렇게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마음 같아서는 환갑이 넘어서도 외국의 훌륭한 밴드들처럼 앨범을 내고, 순회공연을 다니며 그렇게 살고 싶다. 사실 다른 밴드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환경이 열악하니깐 그렇게 하고 싶어도 쉽지가 않다. 현재 곡 작업을 하고 있고 녹음도 진행 중이라 7~8월이면 새 앨범을 선보일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기대를 해도 좋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어느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지 않아 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미 자신의 인생에서 전설의 반열에 올랐던 사람이지만 뮤지션 이상훈의 열정은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음악이라는 제 2의 삶, 나아가 사업가의 삶 앞에서 여전히 청춘인 이상훈, 그의 삶 자체가 음악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뜨거운 기타리스트’ 이상훈이 각인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설레는 마음으로 달려온 록의 하이웨이의 톨게이트가 저만치 보인다. 록의 불모지에서 20여 년간 ‘Metal Will Never Die’를 외치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밴드, 살아있는 한국 헤비메탈의 신화, 밴드계의 큰형님. 어떤 수많은 수식어를 붙여도 그들을 표현하는 데 모자람을 느낀다. 마지막으로 만날 밴드는 내가 음악을 하면서 가장 많은 가르침을 받은 ‘블랙홀’이다. 한국 헤비메탈의 토대를 구축한 밴드 ‘블랙홀’, 하이웨이 스타의 대미라면 이 정도쯤 돼야 하지 않겠나.

[관련기사]
서울 가려 했으면 진작에 갔다
우리가 느낀 밴드란 이런 것이다
음악적 변화에 대한 강박은 없다
우리는 가요 밴드다, 그게 나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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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2 09:31

한국ㆍ일본의 문화예술 인력과 조직의 방향

한국문화예술경영학회 봄 학술대회, ‘문화예술조직의 창의적 혁신과 다변화’
                                                                                                                                        안태호 기자
한국문화예술경영학회 봄 정기학술대회가 4월 25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다.
▲ 한국문화예술경영학회 봄 정기학술대회가 4월 25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다.

한국문화예술경영학회(회장 박신의) 2009 봄 정기학술대회가 <문화예술조직의 창의적 혁신과 다변화>를 주제로 4월 25일 오후 1시 30분부터 국립중앙박물관 교육관 소강당에서 열린다.

이번 학술대회는 일본 아트 매니지먼트학회 소속의 미야마 요시오교수와 카타야마 타이스케 교수가 참석해 한일 국제 심포지엄 형식으로 진행된다. 인력양성과 문화시설 및 문화예술 NPO의 운영방식에 대해 한일 양국의 현황과 전망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심포지엄에서는 ▲일본예술경영인력 양성의 새로운 방향(미야마 요시오, 게이오 대학 예술경영학과 교수) ▲지방공립문화시설의 지정관리자 제도의 의의와 전망(카타야마 타이스케, 시즈오카 문화예술대학교 문화정책 및 경영학과 예술경영전공 교수) ▲일본 예술 NPO(예술비영리조직)의 현황과 쟁점(신두섭, 지방행정연구원 연구위원ㆍ문화경제학 박사) ▲한국 문화예술경영 인력 양성을 위한 새로운 접근(전수환,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경영과 교수) ▲한국 공연예술 시설의 재정자립도 기준에 따른 조직 운영 양태분석(이철순, 예술의 전당 예술기획팀장) ▲한국의 문화예술 NPO의 현황과 전망(이중재, 문화우리 사무국장) 등의 주제발표가 계획되어 있다.

박은실(추계예술대학교 문화예술경영대학원 교수), 이용관(사단법인 한국예술경영연구소장),  정재왈(전 서울예술단 이사장), 조주연(시민문화네트워크 <티팟> 대표), 오세곤(순천향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 등이 토론자로 참여한다.

문의 한국문화예술경영학회 02-961-9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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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2 09:29

살인마는 우리의 이웃사람이었다

[신간소개] 강풀 『이웃사람①~③』

강풀, 『이웃사람』(전 3권), 문학세계사, 2009, 값 각권 12,000 원.

▲ 강풀, 『이웃사람』(전 3권), 문학세계사, 2009, 값 각권 12,000 원.



                                                                 이주호 기자

내 이웃에 연쇄 살인범이 산다. 이웃의 피자 가게에서 패스트푸드를 사 먹고 이웃의 상가에서 가방을 사고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나간 이웃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때론 주차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기도 하는 내 이웃이 정해진 주기, 정해진 방식으로 게임을 하듯 살인을 한다. 연쇄 살인범의 주변 사람들이 뉴스에 등장해 살인범의 신변에 대한 증언을 하고, 설마 우리 옆집에 그런 사람이 살았을 줄 몰랐다고 끔찍해 하듯, 살인범은 내 주위에 있고 그래서 내 이웃이라 불린다.

국내 인터넷 만화에 관련한 모든 기록을 가지고 있는 강풀이 2008년 미디어 다음에서 연재했던 <이웃사람>(전 3권)이 출간됐다. 보통 사람들의 소박한 정 나눔을 작품 중심 정서로 두어 왔던 강풀이었던 까닭에 연재 당시부터 댓글을 통한 이런 저런 말들이 많았다지만, 완결에 가서는 어김없이 인간적 공감, 마음씀으로 마무리 된다.

비가 내리던 어느 밤, 수줍고 말없던 한 여고생이 실종되고 며칠 후 여행 트렁크 속에서 사채로 발견된다. 그리고 며칠 뒤 피해자와 같은 주택 단지에서 일하는 경비가 실종된다. 범인이 이웃에 있다는 단서는 주택 단지에 사는 사람들을 두렵게 하지만 이 단서를 통해 저마다의 의혹을 품은 이웃들은 각자 단서를 확보해 간다. 문제는 무고한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노파심과 혼자 살인범과 맞서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한 단지 내에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들의 삶은 개별적이다. 이들의 연대는 오로지 집값이나 개발에 따른 이익을 논의하는 경우로 한정되어 있다.

연이어 터지는 사건과 깊어가는 의혹, 이들은 자신의 용기와 맞대면하고자 하지만 불안 앞에선 여전히 혼자다. 살인범과 나의 1:1 싸움에서 승산은 없다. 하지만 1:다수의 싸움이라면? 살인범의 범행을 가운데 두고 사건의 중심부로 걸어들어 갈수록 사람들은 조금씩 내 이웃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절대적인 악과 선한 다수의 싸움이라는 대결구도는 잘 짜인 구성 덕에 예상할 수 있는 결말을 일부러 예상하지 않고 시종 긴장을 유지하게 하지만, 악에는 이유가 있을 수 없다는 작가의 인식은 어쩐지 석연치 않다. 이명박 역시 민주화 순행의 연결고리일 수 있다는, 살인범 역시 피해자일 수 있다는 식의 과감한 상대론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지만, 악에는 이유가 없다는 직접적인 표현은 아무래도 거슬린다. 이웃에 사는 살인범이라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가 뒤섞인 상황 설정을 절대적 악을 절대적 보복으로 갚는다는 결말로 이끄는 것은 너무 쉬운 선택이 아니었나 하는 아쉬움이다. 하지만 누가 언제 범죄자로 돌변할지 모르는 기막힌 현실을 누구라도 할 것 없는 마음씀씀이를 통해 이해해 가는 방식은 왜 강풀 만화가 매체를 달리하며 거듭 태어나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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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5 12:17

'꼬마 소크라테스'들에게 배워라

[편집자가 독자에게]신경민은 왜 뉴스데스크를 떠나는가
                                                                                                                                     안태호 편집장
신경민 앵커가 결국 교체됐습니다. 생각해보면 사회의 질서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이 세상을 너무 뻔뻔하고 나른하고 움직일 수 없는 괴물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 신경민 앵커가 결국 교체됐습니다. 생각해보면 사회의 질서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이 세상을 너무 뻔뻔하고 나른하고 움직일 수 없는 괴물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지난 주말 모종의 모임에 참석했다가 초등학생 아이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놀게 됐습니다. 조그만 일에도 까르르 웃어대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에 저도 모처럼 활짝 웃었던 기분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아이들과의 대화는 흥미롭습니다. 아이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어른의 그것과 현저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아이들은 편견에서 무척 자유롭습니다. 누구라도 일단 스스럼없이 대하고 대상이 어떻든 간에 왕성한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접근하기 일쑤입니다. 물론, 교육이라는 것도 있고 미디어나 각종 사회적 노출로 인한 사회화과정을 피할 수 없는 이상(현대사회에서 누구도 날것 그대로의 사람일 수는 없을테니까요) 어느 정도의 사회적 편견이나 인식이 자연스레 배어들었다고 봐야겠지만, 이미 수십 년 동안 각종 편견으로 찌들대로 찌든 어른들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아이들의 대화방식은 주로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늘어놓는 것과 질문으로 이루어집니다. 아이들은 그야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상대방 어른이 그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그야말로 '아웃오브 안중'입니다. 자신의 이야기라고 해서 대단할 것은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경험을 분주하게 풀어놓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그 소탈함이 자주 어른들을 기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감정과 일상에 대해 선뜻 이야기해주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부모들의 즐거움을 이해할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지요.

또 하나의 방식은 질문입니다. 아이들을 키워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아이들은 정말 질문의 대마왕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저녁잠자리에 들기까지 질문의 연속, 이라기보다는 질문의 십자포화가 매순간 작렬합니다. 해는 왜 뜨는가, 고양이는 왜 야옹하고 우는가, 차 경적소리는 왜 빵빵거리는가 등등 현상의 이면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것부터 "분석이 뭐예요?" "저 아저씨를 왜 노숙자라고 불러요?" 등 개념에 대한 해설을 요구하는 경우, 좀 더 나아가면 관계에 대한 성찰이나 인과관계에 대한 논리적 설명 등 복잡해지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얘는 별게 다 궁금하대'라며 그냥 웃어넘기거나 '쓸데 없는 거 물어보지 마라'며 윽박지르고 넘어가지 않는 이상 이 질문들에 성의 있는 답변을 하려고 시도하다 진땀 흘린 경험이 아마 다들 있으실 겁니다. 당연시 여기던 일들을 하나하나 개념화하려다보면 ‘내가 이 일을 정말 알고 있긴 하는 건가’라는 의문’에 자괴감마저 생기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세상을 배워나가는 아이들의 시선에서 보면 우리가 구태의연하게 받아들이던 세상이 얼마나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 걸까요. 생각해보면 사회의 질서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이 세상을 너무 뻔뻔하고 나른하고 움직일 수 없는 괴물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사회적 이해관계에서 거리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발하고도 발랄한 상상력을 유발해낼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놀라울 따름입니다. 가끔은 작가들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노트를 들고 말을 채집하러 다녀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니까요. 평소 ‘꼬마 소크라테스’들에게 배울 게 많다고 생각해 왔던 것도 이런 까닭입니다.

뉴스에 ‘클로징 멘트’를 넣는다는 구상 역시 구태의연한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발상이었습니다. 각종 정치적 고려나 광고수익, 다양한 관계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공중파 방송에서 뉴스 진행자가 개인의 정치적 입장을 노출한다는 것은 퍽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는 TV뉴스에서 흘러나오는 몇 마디 안되는 촌철살인의 어휘들은 사회의 빈틈을 예리하게 파고들던 무기인 동시에 팍팍한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위안을 안겨주던 노래였습니다.

신경민 앵커가 결국 교체됐습니다. 뉴스의 사회적 역할을 재구성해보려 했던 시도 중 하나가 이렇게 무산되는 걸까요. 사회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누군가에게 당연한 것이 다른 누군가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렇게나 큰 허물이 되는 줄은 몰랐습니다. 아이들에게 이걸 어찌 설명해야 난감합니다. 요즘엔 초등학생들마저 우습게 보는 대통령 욕을 하는 건 쉽습니다. 그러나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그 내부에서 옴싹달싹 못하고 있는 게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부모가 아닌 것이 천만 다행이란 생각마저 드네요. 물론, 이 나라의 많은 부모들이 현명하기를 바라지만 그 전에 상식의 자리를 배제해버리는 사회적 관계들을 재배치하는 것이 먼저일겁니다. 당연하게도 지금 상황에선 그런 역관계가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 추문이 되어 움직일 수 없도록 만드는 힘의 존재를 증명해 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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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5 12:14

합창단 해체?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국립오페라합창단 해체반대 싸움 계속
                                                                                                                                      안태호 기자

국립오페라합창단 단원들이 문화부 앞에서 합창단 해체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거리공연을 펼치고 있다.
▲ 국립오페라합창단 단원들이 문화부 앞에서 합창단 해체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거리공연을 펼치고 있다.

두 달여가 넘게 해체반대를 걸고 활동했지만, 결국 3월 31일부로 공식 해체된 국립오페라합창단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전국공공서비스노동조합 국립오페라단지부는 앞으로 매주 수요일 오후 3시, 문화부 청사 앞에서 ‘국립오페라합창단 해체반대! 부당해고 철회! 총력 결의대회’를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17일(금) 오후 7시에는 기륭전자분회를 비롯한 비정규직 투쟁사업장들과 함께 보신각 앞 촛불문화제에도 공동개최로 참여한다.

진중권(중앙대 교수), 이상만(음악평론가) 등의 패널이 참여하는 토론회도 열린다. 21일(화) 오전 10시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리는 토론회의 주제는 ‘국립오페라합창단 해체로 본 국공립예술단체 발전방향’. 토론회는 공공노조 문화예술분과와 최문순 의원실의 공동주최로 열릴 예정이다.

22일(수) 오후 7시에는 국회 의원회관에서 <국립오페라합창단 희망 음악회>가 열린다. 오페라합창단 지부는 “음악회를 통해 문화예술인들과 제 정당, 사회단체, 시민들과 함께 연대의 마음을 모아가고자 한다”는 것이 행사의 취지다.

국립오페라합창단지부는 문화부와 교섭을 진행하고 있으나 서로 의견차가 커 교섭에는 큰 진전이 없는 상태다. 국립오페라합창단 지부의 이정상 대외협력부장은 “문화부에서는 국립합창단 밑에 연수단으로 들어가는 걸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고용승계가 되는 것도 아니고 오디션을 통해 선택적으로 선발하겠다는 이야기여서 받아들일 수 없는 안이다. 국립합창단 측에서도 반대의견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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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5 12:13

현실미학의 비판적 육성을 들어라!

[전시리뷰]이종구의 오지리 미학과 현실주의 의미론
                                                                                                  김종길 _ 미술평론가, 컬처뉴스 편집위원
이종구는 절망의 대지 위에 건강한 한우를 세웠다. 한우는 ‘삶’이라는 급박한 실존의 초상으로 새겨진 이 시대의 아버지며, 농민일 것이다. <검은대지, 질주>
▲ 이종구는 절망의 대지 위에 건강한 한우를 세웠다. 한우는 ‘삶’이라는 급박한 실존의 초상으로 새겨진 이 시대의 아버지며, 농민일 것이다. <검은대지, 질주>

지금, 갤러리 ‘학고재’에서 이종구의 <국토, 세 개의 풍경>이 열리고 있다.(1) 1976년 <이종구 습작전>이후 1982년 미술동인 <임술년, “구만팔천구백구십이”에서>의 창립동인으로 참여하고, 1986년 ‘그림마당 민’에서 <땅의 사람들>로 본격적인 민중미술을 발표해 온 그는, 그동안 1994년 ‘가나미술상’ 수상과 2004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2005년 올해의 작가’에 선정되는 등 괄목할 만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20여 년 동안 미학적 공간이었던 고향 오지리에서 나아가 ‘국토’ 연작을 시도하고, 민중미술의 시선을 세계적 지성으로 확장한 <주인을 찾습니다-이라크․이슬람 기행전>(2003), <두 개의 방: 대추리-바그다드>(2006) 등은 그의 현실주의 미학이 어떤 절정에 와 있음을 목도하게 한다. 이번 전시에선 농촌의 가장 당면한 문제로 부각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을 ‘한우의 초상’으로 풀어내고 있다. ‘검은대지’연작은 한층 농익은 화법과 언어로 새긴 시대의 암각화라 할 수 있을 터이다. 그 외 ‘살림’과 ‘만월’을 주제로 한 작품들도 이 땅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다만, ‘만월’의 작품들이 풍경의 보석처럼 빛나는 것은 그곳들이 모두 ‘미륵’의 여명을 간직한 상징공간이기 때문이다. 그가 참여했던 ‘임술년’과 오지리를 통해 완성한 ‘현실주의 미학’, 그리고 <국토, 세 개의 풍경>이 남기는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1982년, 남한의 현실과 ‘임술년’의 출현

임술년, 구만팔천구백구십이. ‘임술년’은 1982년을 말하고, ‘구만팔천구백구십이’는 1982년 당시 남한 국토의 총면적을 뜻한다. 2008년 기준 남한의 국토 면적은 10만32㎢이니 27년 전 남한의 국토는 지금 보다 작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2) 하여, 임술년 간지(干支)와 면적이 상징하는 바는 ‘지금(1982년) 이곳(남한의 땅)’이라는 당대적 절실함 혹은 구체적 실존자각을 표방한다고 할 수 있다.

<임술년, “구만팔천구백구십이”에서>는 ‘임술년’(1982)이란 시대성과 ‘구만팔천구백구십이’(우리나라의 총면적수치)란 장소성, 그리고 ‘~에서’란 출발의 의미를 동시에 포함한다. 즉 “지금, 여기서”라는 소박한 발언인 것이다.  - <임술년, “구만팔천구백구십이”에서> 창립선언문 중

1982년 10월, <임술년, “구만팔천구백구십이”에서>(이하 임술년)라는 다소 긴 이름의 미술동인은 관훈동의 덕수미술관에서 창립전을 열었다. 이종구를 비롯해 박흥순, 송창, 이명복, 전준엽, 천광호, 황재형 등 중앙대 동문들 중심으로 결성된 7인의 이 동인은 1987년 해체를 선언하기까지 비판적 현실인식을 극명하게 표출해 냈다. 그들은 창립선언문에서 “역사의식에 바탕을 둔 현실의 수용과 가치관의 성찰, 그리고 새로운 전통의 모색이 필연적”임을 강조하며, “우리가 갖고자 하는 시각은 이 시대의 노출된 현실이거나 감춰진 진실”이라 밝히고 있다. 선언문 내용에서 살필 수 있듯이 <임술년>동인들은 ‘현실’에 대한 미술적 모색이 주요한 미학적 테제였음을 인지할 수 있다.

<연혁-아버지>, 1984, 부대종이에 아크릴릭

창립전이 끝나고 이듬해 봄, 이종구는 《중앙미술대전》에서 <장․3.25㎡상황>이란 작품으로 차석을 수상했는데, 그는 『중앙일보』(1983.5.7)와의 인터뷰에서 “젊은 세대가 본 현실, 그리고 현실에 살고 있는 젊은이의 모습을 그리고 싶다. 앞으로 더 현실적인 이미지를 형상화시키겠다”고 당차게 발언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현실’은 현재적 시간만이 존재하는 추상공간이 아니라 그 시대와 민중적 삶이 역사적 사건으로 공존하는 체감공간이어야 했다. 그러므로 그의 ‘현실’은 대상화된 공간의 미의식을 벗고 완전히 그 대상으로 포복해 들어간 현실, 있는 그대로의 실체, 허구적 인식을 뛰어넘는 ‘앎’의 순수한 날것이어야 했다. 1983년의 <장․3.25㎡상황>이 1970년대의 회화적 이상으로서 -형식적인 측면에서- 극사실주의 도시풍경이었다면, 1984년 <임술년>동인전에 출품한 <연혁(조부)>와 <연혁-아버지>는 비판적 현실주의의 사실성이 현실미학의 뿌리로 새롭게 영글기 시작한 내부혁명에 다름 아니었다. 그로부터 25년 동안 작가 이종구는 그의 고향 ‘오지리’를 통해 현실미학의 테두리를 확장해 오면서 그만의 독특한 민중미술의 숲을 일궈냈다.

농촌의 현실이 응결된 오지리 미학 

1970년대 말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의 바람이 단색조 화풍의 시대를 흔들 때, 청년 작가들은 새로운 예감을 받아 들이 듯 하이퍼리얼리즘의 형식미학을 차용했고, 이종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삶과 예술이 분리되었던 것을 통합한 뒤 그것을 묶는 고리로 ‘현실’을 상정하고, 다시 그 ‘현실’을 미학적 화두로 깨치는 순간 모든 것은 달라졌다. 통상적으로 형식과 내용을 작품 컨셉의 두 축으로 본다면, 이종구의 회화적 개념은 그의 고향 ‘오지리’에 집중 되었다. 단지 오지리의 풍경이 아니라 온갖 부조리한 모순의 실체로서, 나아가 이 세계의 구조적 해체-세계화의 폭력이 미치는 현장이며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맨홀이고, 그래서 미적 표현의 형식조차도 오지리에서 차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임술년>의 이종구가 지향했던 미학은 ‘오지리 미학’이라 할 수 있을 터이다. 제3세계 국가의 마을들이 그랬던 것처럼, 남한의 작은 마을 충남 서산시 대산읍 오지리도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물결이 가장 끝지점에서 일렁이는 파고의 해안가였다. 이종구는 오지리를 통해 이 현실 세계의 이면을 갈파했던 것이다.

오지리 미학의 형식적 변화는 캔버스를 쌀부대로, 도시풍경을 오지리의 풍경과 인물로 바꾼 것에서 일차적으로 찾아진다. 1983년까지 그는 ‘캔버스에 유채’를 썼다. 그러나 오지리의 현실을 표현하기에는 캔버스가 부적절했다. 오지리의 현실은 오지리의 오브제에 의해 표현되어야만 했다. 오지리는 지극히 평범한 농촌이었고, 그의 뿌리는 농부였다. 그가 처음 오지리로 회귀한 뒤 선택한 주제는 ‘가족사’였는데, 농부의 가족사는 바로 그것, 즉 ‘쌀부대’에 그려져야만 했다.

내가 농부를 그리면서 미술재료인 캔버스나 고급종이 대신 헌 쌀부대를 화폭으로 사용한 것은, 검게 그을린 노동하는 농부의 진솔한 초상을 화려한 재료에 함부로 그릴 엄두가 나지 않았거니와 농부의 삶과 유기적인 재료로써, 그리고 현대미술의 개념인 오브제가 가지는 상징성과 현실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서였다.(3)
 

오지리 김씨2, 비닐부대에 유채, 1986

대지를 일구는 농부들처럼 화가 이종구는 쌀부대에 ‘현실’이란 미학을 심고 가꿨다. 쌀부대에 그린 첫 작품 중의 하나인 <연혁-아버지>(1984)를 보자. 화폭이 된 쌀부대는 이미 회화의 대상이 된 ‘아버지’가 아니어도 당대의 시대성과 현실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기호적 인쇄 언어들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쌀부대의 앞면 “정부양곡 찐보리쌀”과 단순하게 디자인 된 보리의 심볼은 25년이 흐른 지금, 과거 가난한 농촌의 상징으로 읽힌다. 뒷면에 인쇄된 “찐보리쌀의 특징”과 함께 “우리 모두 보리혼식으로 건강을 유지하자”는 표어는 깊게 패인 주름과 검게 그을린 피부,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의 아버지 초상과 대비를 이룬다. 이 대비적 상징과 은유의 맥놀이가 이종구의 새로운 미학적 테제였다. 화폭이 된 쌀부대는 더 이상 보리와 쌀을 담는 종이가 아니라 그 자체로 회화적 의미를 발산하게 되었으며, 거기에 덧붙인 회화적 장치들은 인쇄된 기호들과 ‘대구’를 이루며 의미파장의 진폭을 상승시켰다. 종이 부대와 달리 <오지리 김씨2>(1986)처럼 비닐 부대에 그린 회화도 다르지 않다. 녹색 활자로 인쇄된 “정부수매양곡” 양 옆으로 그려 놓은 ‘김씨’와 ‘소’는 정부의 수매를 믿고 농사를 지어야 했던 한 농군의 팍팍한 노동을 떠오르게 한다. 이 규격 부대 몇 개를 채워야 자식 공부며 가족 살림을 해 나갈 수 있을 런지…. 마른 논의 갈라진 흙처럼 쩍 터져버린 오지리 김씨의 주름과 어두운 낯빛이 비닐 부대의 씨줄날줄에 걸려 고심에 빠져있다. <워낭소리>의 소처럼 노동이 삶의 전부여야 했던 김씨의 소도 살팍진 구석이 없다. 그럼에도 이 쌀부대에는 당당히 ‘검’이라는 검인이 박혀있다. 김씨에게 있어 노동의 잉여가치란 쌀의 수매가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음을 묵묵히 웅변하는 듯하다. 이렇듯 이종구의 ‘쌀부대 회화’는 ‘쌀부대’라는 오브제의 생생한 육성과 함께 혼합되어 ‘현실’이란 리얼리티를 뚜렷하게 구현해 냈다.

국토-오지리에서, 부대종이에 아크릴릭, 꼴라쥬, 1988 

오지리 풍경과 인물에 대한 묘사는 오지리 내부로 수렴되지 않고, 당대 현실과 시대가 투영된 남한의 농촌으로 확장된다는데 의미가 있다. 칠레나 멕시코, 인도네시아와 몽골의 농촌풍경 또한 오지리와 비슷했을 것이다. 지역적 특수성에 의한 상황의 시차적 관점은 다르겠지만, 거대 자본 권력의 신자유주의 망령은 내부의 합의와 저항조차도 무력화 시키면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분단국가로서 이데올로기 노선 투쟁과 탄압이 일상화 된 남한의 상황은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그 어떤 것도 자유로울 수 없었고, 민주적 삶을 지향하는 평범한 요구조차 ‘정치성’의 심판을 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오지리의 풍경은 정치적 풍경이라 할 수 있으며, 인물들도 그 정치적 시선에 의해서만 더 깊이 있게 이해될 수 있다. ‘농민화가’ 혹은 ‘농촌화가’로 곧잘 불리는 이종구의 예술적 정치성은 오지리에서 탄생한 것이지만, 그는 농촌과 농민의 대변자가 아니라 응결된 현실의 언어로 시대의 풍경을 새긴 탁월한 현실주의 작가라 할 것이다. 농민 출신의 화가를 통상 ‘농민화가’라 부른다면, 이종구는 농민화가가 아니다. 오히려 “농촌 생활이나 문제 따위를 소재로 한 문학”을 ‘농촌문학’이라 할 때 그는 ‘농촌미술’의 범주에 들 것이다. 농촌미술가 이종구의 정치성이 잘 표현된 작품 중의 하나는 <국토-오지리에서>(1988)이다.

민주화의 들끓는 투쟁에 의해 1987년 6월 항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 해에 치러진 국민의 직접 선거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세력은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고, 1988년 2월 25일 제 13대 대통령에 노태우가 취임하였다. 1988년에 제작된 <국토-오지리에서>는 찢겨진 대통령 선거 포스터가 배경을 이루고 있는데, 화면 중심에 “국민여러분 감사합니다. 약속을 꼭 지키겠습니다. 대통령 당선자 노태우”라는 당선사례 포스터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선거 얼마 뒤의 풍경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이종구는 쌀부대 종이 위에 실제 포스터와 세계의 이슈를 보여주는 잡지를 꼴라주 하였고, 화면 하단에 세 명의 오지리 어른들을 그려 넣었다. 어른들은 양지 바른 길가에 앉아 선거과정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벼를 수확했을 1987년의 가을과 겨울 동안 마을은 선거로 들썩였고, 마을 사람 몇몇은 선거에 휩쓸려 지지층 확보를 위해 선거운동을 자청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그들은 그 와중에도 민주니 독재니 군사정부니 하는 따위의 정치적 관심보다도 더 살만한 세상에 대해 얘기했을 것이고, 농사의 댓가가 제대로 인정받는 세상을 소망했을 것이다. 선거에 동원된 온갖 미사여구의 정책들과 유토피아적 개발 약속이 아니라 ‘농자천하지대본’의 근본을 세워주길 바라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시간은 흘렀고, 포스터는 찢겨지고 바래졌으며, 환한 낯짝으로 승리를 약속했던 후보들은 빠르게 뜯겨져 나간 자리의 흔적들처럼 잊혀졌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당장 배추 값 폭락과 수세폐지 문제였을 것이다. 농민들의 굵직한 투쟁사를 보면, 1988년 수세폐지 투쟁에서 1991년 미국쌀 수입반대 쌀값보장 투쟁, 1994년 UR협상 반대를 위한 삭발과 혈서 투쟁, 1999년 WTO 반대 농가부채 해결집회, 2001년 쌀수입 개방반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반대투쟁 등 ‘세금’ ‘부채’ ‘쌀’의 문제로 귀결된다. 세 명의 오지리 어른들의 표정에 담긴 근심은 앞으로 닥쳐 올 그런 불안의 그림자와 무관하지 않다. 파탄지경으로 내 몰린 오늘날의 농촌은 이미 그의 회화에서 숱한 징조로 예견되고 있는 것이다.   

조부상, 캔버스에 유채, 1980 

소리, 캔버스에 유채, 1980  

쌀부대, 그리고 농촌 현실의 정치성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오지리 미학 중의 하나는 회화적 완성도를 높이는 그리기 형식에 있다. 1980년의 <조부상>이나 <소리>, 1983년작 <경고>와 달리 1984년부터 제작된 오지리 회화들의 표현 형식은 마치 농부가 호미나 쟁기로 논밭을 갈 때의 느낌을 전달한다. 투박한 흙의 알갱이들이 두렁과 이랑을 만들어 낼 때의 그 느낌 혹은 싸리나무 빗자루로 쓸어 놓은 마당의 느낌이 회화적 질감을 형성하고 있단 얘기다. 옛 그림들처럼 이것을 준법이라 한다면 이는 ‘싸리준법’이나 ‘이랑준법’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그의 작품들을 자세히 보면, 일반적인 붓질들처럼 면을 칠해 쌓아 올리는 식이 아니라 일정하게 그은 선들이 작은 두렁을 이루고, 그것들이 이랑으로 묶이면서 전체적인 형상을 구현해 낸다. 붓의 긋기는 싸리 빗질과 닮아 있으나 상징적으론 산하와 들이면서 대지를 이룬다. 이러한 준법은 최근 작품들에서 더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국토, 세 개의 풍경이 남긴 의미

세 개의 풍경은 ‘검은대지’, ‘살림’, ‘만월’로 표상되는 세 개의 상징을 뜻한다. 그가 제시한 세 개의 상징어는 지금여기의 현실이면서 동시에 과거와 이어져있는 현실이기 때문에 ‘표상(마음 혹은 의식에 현전한다는 의미에서)’의 맥락을 가질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 세 개의 표상언어를 통해 이종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2008년에 제작된 ‘검은대지’의 작품 주제는 ‘한우’다. 한우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과 맞물린다. 주지하듯 2003년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하자 수입을 중단했던 한국 정부는 2006년 “30개월 미만, 뼈를 제거한 고기”를 조건으로 수입협상을 재개하였고, 그때부터 광우병에 대한 관심과 언론보도가 증가되었으며, 마침내 2008년 4월 18일에 “뼈와 내장을 포함한 30개월 이상, 대부분의 특정위험부위를 포한함 30개월 미만”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상이 체결되자 ‘광우병 논란’이 일지 않았던가! 그로 인해 2008년 5월부터 12월까지 인터넷을 통한 이명박 대통령 탄핵 서명에 138만 명이 참여했고, 6월 10일에는 전국적으로 100만 명이 참여하는 촛불집회를 통해 쇠고기 수입반대와 재협상이 요구되었다.

검은대지-9805, 한지에 아크릴릭,2008

검은 대지-2123, 한지에 아크릴릭,2008

이종구의 ‘검은대지’는 한우의 눈빛으로 쇠고기 수입과 ‘맞짱’ 뜨려는 의도를 깔고 있는 듯하다. 이 ‘맞짱’의 회화적 힘은, 붓의 힘찬 긋기와 묘사로 완성한 한우의 당찬 맵시, 그리고 그 몸짓이 발산하는 의미에 있다. 또한 그의 한우들은 대부분 코뚜레를 한 일소들인데, 이 소들은 오직 살코기 제공만을 위해 사육되는 소들과 다른 표정을 보여준다. 어떤 소는 화면 밖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어떤 소는 거친 숨소리를 뱉어내며 큰 소리로 울고, 어떤 소는 지축을 흔들며 질주하고 있다. 가령 <검은대지-9805>의 소는 핏발 선 눈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꿈쩍 않고 당당히 서서 휘어진 뿔과 코뚜레를 내보이며 어둠 밖을 응시하는 이 소의 묵언은 투쟁의 상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검은대지-무자년 여름>에서 곧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의 컨티넨털(Continental) 항공사의 비행기가 착륙을 위해 바퀴를 내리는 순간 앞의 소와 똑 닮은 누런 한우가 ‘음매’를 길게 내 뿜고 있기 때문이다. 관람 시선을 아래에서 위로 하여 이 장면을 보면, 소의 울음이 피부로 파고들어 온 몸에 소름을 돋게 한다. <검은대지-질주>의 소는 ‘싸움소’다. 한바탕 투우를 치르고 있는 이 소가 질주하는 곳은 미국이나 캐나다일 것이다. 이마와 옆구리의 핏자국으로 보아 몇 번의 몸싸움이 있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이 소는 두 눈을 부릅뜨고 꼬리를 후려치며 거대한 몸짓으로 ‘무소의 뿔’을 내지르고 있다. ‘검은대지’의 속뜻은 시커멓게 타버린 농민의 마음이자 더 이상 땅의 희망을 상상할 수 없는 절망의 영토를 상징한다. 이종구는 이 절망의 대지 위에 국토의 빛깔로 그린 건강한 한우를 세웠다. 한우는 ‘희망’이라는 추상명사가 아니라 ‘삶’이라는 급박한 실존의 초상으로 새겨진 이 시대의 아버지며, 농민일 것이다.

빨래1, 한지에 아크릴릭, 2008

‘살림’의 언어들은 ‘검은대지’와 많은 부분 중첩된다. <내 땅에서 농사짓고 싶다-대추리의 기억>은 <검은대지-무자년 여름>의 경우처럼 인물과 비행기의 상징을 통해 강제 이주에 대한 오마주를 재현하고, <풍경-봄,여름,가을,겨울>처럼 대지는 델타항공이 뒤덮은 그림자에 의해 검게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눈에 띄는 작품은 <빨래>연작이다. 일명 농부들의 유니폼인 몸뻬와 추리닝, 꽃무늬 셔츠에서 뚝뚝 떨어지는 옷의 눈물은 화면 귀퉁이에 붙여놓은 지적도와 토지대장에 의해 그 의미가 증폭되고 있다. 농토의 주인이 도회지 큰손들로 바뀌면서 농민들의 삶터가 붕괴직전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 없을 것이다. 빨래 연작은 농민들의 피와 땀, 그리고 상실과 실존을 은유하기에 색의 선명함이 더 강렬하게 부각되고 있다.         

만월1, 한지에 아크릴릭, 2003 

흰 보름달 아래 펼쳐진 검고 투명한 풍경 ‘만월’은 예지적 전망의 언어를 타전한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만월’의 검은 대지는 소가 딛고 선 투쟁의 대지와는 사뭇 다르다. ‘만월’에 녹아 있는 풍경의 속을 들여다보면, 그 곳은 두텁게 쌓인 유구의 역사와 신성한 기운을 간직한 곳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는 만월 아래에서 수천, 수만의 세월을 견디며 풍경의 영성을 이룬 이곳과 그래서 이 땅의 민중들이 곱게 새겨놓은 ‘모심’의 흔적들을 채굴했다.

삼존불, 캔버스에 아크릴릭, 2008

<삼존불>을 보자. 이 삼존불은 서산마애삼존불이다.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이 삼존불은 서산시 운산면 강당골 계곡의 절벽에 있다. 가야산의 끝자락인 수정봉 북쪽 산중턱에 위치한 큰 암벽을 안쪽으로 파내어 고부조로 새겼는데, “연꽃잎을 새긴 대좌(臺座)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또한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4)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는 삼존불의 발견과정에 대한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부여박물관장을 지낸 홍사준 선생이 보원사터 조사차 이곳에 왔다가 나무꾼에게 부처님이나 석탑 무너진 것을 본 일이 없냐고 물었다. 그러나 나무꾼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 봤지만유, 저 인바위에 가믄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 새겨져 있는디유, 양 옆에 본마누라와 작은 마누라도 있지유. 근데 작은 마누라가 의자에 다리 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볼따구를 찌르고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니까, 본마누라가 장돌을 쥐고 집어 던질 채비를 하고 있시유.” 

여래(如來)가 누군가. 그는 “진리에 따라 이 세상에 와서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 아닌가. 삼존불 중앙의 여래는 석가모니 부처이며, 그 옆에 미래불인 미륵이 앉아 있다. 40여년 동안 보호각에 갇혀 있던 삼존불이 지난 2006년 보호각이 철거 되고 제 모습을 보였을 때, 여래의 미소는 세상으로 스미기 시작했다. <부여-잠자는 부처>에도 세월을 견딘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몇 아름으로 나무를 잴 수 있을까? 나무는 푸른 어둠으로 빛나는 신성을 내 보인다. 손장섭이 그린 나무들이 ‘신목’의 ‘빛울(光背)’을 발산하듯이 이 나무도 그런 기운을 내장하고 있다. 백제의 도시 부여는 웅혼하고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하여 백제불교의 문화적 정신은 현대인에게 문명의 디스토피아적 현실을 치유하는 영적 가치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이종구의 만월은 우리 풍경이 보여주는 그런 내적 치유의 장면들이며,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문명의 야만이 결코 뒤덮을 수 없는 장엄한 역사적․신화적 풍경들이다. 그러나 그 풍경은 역사의 무게 따위의 중압감이 아니라 나무꾼의 소박한 현실적 시선일 때 더 명징하게 빛을 발할 수 있다. 그가 국토풍경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낱 생명들의 모심과 ‘살림’의 회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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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시기간은 2009년 3월 4일부터 4월 26일까지
2>『2008년도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연차보고서』(국토해양부. 2008) 참조.
3> 이종구, 『땅의 정신 땅의 얼굴』, (한길아트, 2004), 70쪽
4>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자료 참조. 서산마애삼존불상의 소재지는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2-10이며,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84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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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5 12:10

도서관, 세상을 읽는 힘

제 45회 도서관주관 행사 개최

한국도서관협회는 4월 12일에서 18일까지를 도서관주간으로 정하고 도서관별 특성에 맞는 행사를 개최한다.

▲ 한국도서관협회는 4월 12일에서 18일까지를 도서관주간으로 정하고 도서관별 특성에 맞는 행사를 개최한다.



                                                             이주호 기자

한국도서관협회는 제45회 도서관주간을 맞아 4월 12일부터 18일까지 전국 도서관에서 다양한 행사를 개최한다. “세상을 읽는 힘, 미래를 이끄는 힘, 도서관”이라는 주제로 펼쳐질 이번 행사에서는 도서관 홍보, 독후감 모집과 시상, 가두캠페인, 도서관 활동을 소재로 한 각종 대회를 연다. 또한 모범이용자 표창, 이용자와의 만남, 전시회, 강연회, 특별순회문고, 이동도서관 연장운행, 각종 감상회, 장서기증운동, 지역도서관 지도제작 및 각종 목록 제작, 소외계층 및 다문화 가정을 위한 행사를 여는 등 각 도서관의 특성에 맞는 프로그램들을 마련해 놓았다.

1964년 처음 시작된 “도서관주간”은 매년 4월 중 한 주를 정해 도서관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리고 도서관의 사회적 역할을 확대하기 위해 모든 관 종의 도서관에서 이용자들에게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해 왔다.

특히 올해에는 ‘알기 쉬운 경제학 강연회’' 등 경제난 극복하기 위한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다. 행사에 관한 자세한 문의는 한국도서관협회 홈페이지(http://www.kla.kr)나 전화 02-535-4868(회원협력팀)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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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4 09:06

사소한 독서 습관이 안내한 특별한 작가

레이먼드 카버,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
                                                                                                                                       이주호 기자
레이먼드 카버,『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문학동네, 2008, 값 9,500원),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개정판)』(집사재, 2009, 값 11,000원)
▲ 레이먼드 카버,『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문학동네, 2008, 값 9,500원),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개정판)』(집사재, 2009, 값 11,000원)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포석으로 깔아 놓고 남은 칸들을 채워가듯 다른 책을 섞어 가는 게 10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는 내 나름의 독서 방식이다. 내게 책이란 하루키가 지은 책들과 하루키 이외의 작가가 지은 책으로 구분되어 있다. 점에서 점에 이르는 선은 하루키가 소설이나 에세이에서 언급했던 작가, 작품들로 채워 넣는다. 스콧 피츠제럴드, 트루먼 카포티, 토니 모리슨 등의 현대 미국작가에서 다자이 오사무, 나쓰메 소세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등의 근대 일본작가, 칸트, 헤겔의 철학서까지 작가의 실제 경험치가 작가가 형상화하는 소설의 모든 소재를 포괄할 수 없으므로 작가의 독서경험을 따라 가는 것이야말로 한 소설가의 작품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 구절은 이 책에서, 이런 생각은 이 사람에게서 영향을 받았구나 하는 식으로 이해의 폭을 넓혀가다 보면 읽을수록 이야기가 풍성해진다. <무서운 영화> 유의 짜깁기 패러디 영화를 볼 때 각 장면, 장면이 어떤 영화에서 빌려온 것인지를 알면 한층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레이먼드 카버는 1939년 미국 태생의 작가로 작가로서 원숙기에 접어들 시기인 49세에 생을 마치기까지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대성당』,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 등의 단편집과 다수의 에세이, 시집을 출간했다. 종종 하루키의 에세이에서 레이먼드 카버의 이름을 보긴 했지만 그의 소설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하루키의 근작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문학사상사, 2009)를 읽은 직후다. 이 책의 제목은 레이먼드 카버 단편집의 원제인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에서 따 왔다. 이 책은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문학동네, 2008)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개정판)』(집사재, 2009)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출간되어 있다. 이 제목은 한석규, 김지수가 출연했던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이란 영화의 제목과도 비슷해 사랑에 관한 마음 따뜻한 에세이를 기대하게 만들기도 했다.

영화 이야기부터 하자면, 이 영화는 사랑에 관한 낭만적이지 않은 묘사 때문에 <8월의 크리스마스>와 같은 가슴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기대한 관객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며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사랑에 관한 이 영화의 시선은 레이먼드 카버가 세계를 묘사하는 방식과 많은 부분 겹친다. 재혼하거나 이혼하고 각자 살아가는 부부, 서로에 무관심하거나 바람난 부부 등 그가 설정한 가정의 모습은 한 결 같이, 평탄하다는 뭉뚱그린 범주에 포함시킬 수 없다. 그것이 미국 사회의 보편적 가정 모습을 그린 것이라 하더라도 미국 사회의 보편이 결혼관에 대한 여타 문화의 보편마저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므로 가족관계의 한 극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대개의 주인공은 직업이 불안정하다. 혹 부부 관계가 원만하고 직업이 안정되어 있는 경우 알코올 의존성이 강하거나 가족 중 하나가 처한 경제적, 신체적 결함을 일정 부분 책임져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문제없는 사람은 없다는, 그보다 협소하게는, 누구든 자기만의 문제를 하나씩 갖고 있기 마련이라는 보편적 인간관을 레이먼드 카버는 소설적이라 할 만한 상황 설정 하나 없이 사실적으로 묘사해 간다. 극적 상황이 거의 배제되어 있기에 사실적 묘사는 오히려 극단의 불행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박봉과 대출이자, 쪼들리는 생활비, 원만하지 못한 남녀관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일관되게 유지되는 불행한 일상들은 작가가 지나치게 세상을 냉소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한다. 현실이란 다 어쩔 수 없는 거라는 철저한 비관주의가 책 읽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살면서 삶의 별다른 질적 변화는 기대하지 말라는 듯 숨 막히는 일상 속으로 속도감 있게 걸어들어 간다. 머뭇거림 없이, 감정 낭비 없이 이야기 속 인물들은 분노인지 체념인지 모를 표정을 하고 하루하루를 버텨간다. 발버둥 쳐 봤자 일상은 달라질 게 없다. 주인공들의 유일한 희망은 그들의 가계부나 장래 계획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획기적인 구원의 손길을 만나는 것이다. 획기적인 만큼 구원의 손길은 전적으로 우연에 기대야만 한다.

우연한 구원이라니, 카버는 불행 말고는 보여주는 게 없는 듯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읽는 사람들은 기어이 구원을 보고 만다. 작중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읽는 이 역시 냉소와 불안 속에서 근근이 하루를 버텨가지만 그렇다고 삶을 구원시킬 수 있는 희망마저 놓고 사는 건 아니다. 어떤 극적인 사건이 벌어져 작중 인물들이 구원돼야 한다는 일종의 의지를 품게 됨으로써 나를 내 삶 속에서 구해내고 싶어진다. 누가 품은 희망이 누구에게 투영되었는지를 따질 필요도 없이 인물과 독자의 공동 운명체는 보잘 것 없는 삶 속에서 사소하나마 도움이 되는 일들을 생각해 본다. 친구 집을 방문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기도 한다. 누군가의 전화, 달콤한 사탕 한 알, 공복의 우유 한 잔. 사소한 구원이 이어지면서 삶은 지속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소한 한 가지를 잃을 때 삶은 전체적으로 규형을 잃는 건지도 모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대로 카버는 다른 누구와 대체될 수 없는 작가다. 작풍이나 세계관, 냉소와 구원의 줄타기, 카버의 단명이 아쉬운 대목이다. 이제 레이먼드 카버는 하루키와 하루키 아닌 작가와는 별개로 레이먼드 카버의 영역으로 둬야 할 것 같다. 사소한 독서 습관 하나로 특별한 작가를 만날 수 있었다면 이건 분명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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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4 09:04

소수민족의 인권과 국제적 연대를 위하여

문화나눔마당 “소수민족인권과 재한줌머인연대” 개최

로넬 차크마 나니 재한줌머인연대 사무국장.

▲ 로넬 차크마 나니 재한줌머인연대 사무국장.




                                                                   이주호 기자

문화를생각하는사람들의 제31차 문화나눔마당 “소수민족인권과 재한줌머인연대”가 4월 15일 오후 7시 30분 한성대입구 인권연대 교육장에서 개최된다. 방글라데시 동남부 치타공산악지대에 살고 있는 줌머족(Jumma)은 오랜 기간에 걸쳐 방글라데시 정부와 다수 민족인 벵갈인들에게 각종 차별과 인권 침해, 강제 추방을 당해 왔다. 한국에는 약 30명의 난민이 정착해 있으며 2002년 경기도 김포에서 이들의 연대 단체인 재한줌머인연대가 결성되었다.

문화를생각하는사람들의 제31차 문화나눔마당에서는 로넬 차크마 나니 재한줌머인연대 사무국장에게서 줌머족 탄압 역사와 투쟁에 대해 들어 보고 다문화사회를 준비하는 한국인들이 줌머인들이 겪고 있는 탄압과 차별정책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 방글라데시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벵갈리족과 인종, 언어,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고 있는 줌머족의 문제를 생각해 봄으로써 한국사회 내 다문화 공존의 조건은 무엇이며 이들과 연대하여 국제 인권 보호 운동의 방향을 설정해 본다.

문화를생각하는사람들은 생활 속의 문화를 지향하며 인권, 평등, 생태에 관한 열린 문화를 나누기 위해 공연, 강좌 기획, 교육 사업, 연대 활동 등을 벌이고 있는 비영리단체이다. 참가비는 4,000원이며 행사에 관한 자세한 문의는 문화를생각하는사람들 사무국 02-336-5642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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