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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9.02.26 사람과 개와 고양이의 시간은 제멋대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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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8 09:44

봄바다에 실려 온 음악 다큐멘터리

시네마테크 부산, ‘봄날의 뮤직 카페’ 영화제 개최
                                                                                                                                        김나라 기자
국내에서 22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던 독립음악영화의 화제작 <원스> 역시 관객들의 뜨거운 요청으로 재상영 된다
▲ 국내에서 22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던 독립음악영화의 화제작 <원스> 역시 관객들의 뜨거운 요청으로 재상영 된다

시네마테크 부산은 3월 3일(화)부터 19일(목)까지 음악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4편과 극영화 1편을 묶어 ‘봄날의 뮤직 카페’ 영화제를 개최한다.

상영될 작품은 <존 레논 컨피덴셜>, <샤인 어 라이트>, <로큰롤 인생>, <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카페>, <원스> 등 5편이다.

<존 레논 컨피덴셜>과 <샤인 어 라이트>는 세계적인 음악 거장들을 다큐멘터리로 담아냈다. <존 레논 컨피덴셜>은 포스트 비틀즈 시기 존 레논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담았으며 <샤인 어 라이트>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전설적인 락 밴드 롤링 스톤즈의 ‘비거 뱅 투어’ 중 뉴욕의 비콘 극장에서 열렸던 콘서트를 생생하게 담아낸 영화다. 이 작품은 2008년 베를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로큰롤 인생>은 평균 나이 81세의 할머니, 할아버지로 구성된 ‘마음은 청춘’이란 뜻의 코러스 밴드 ‘영앳하트(Young@Heart)를 그린 작품이며, <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카페>는 지난 해 ‘아듀 2008 영화제’ 당시 좌석점유율 50%에 이르는 사랑을 받았던 영화로 영화를 보지 못한 관객들의 요청으로 재상영 된다. 또 국내에서 22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던 독립음악영화의 화제작 <원스> 역시 관객들의 뜨거운 요청으로 재상영 된다.

한편 ‘봄날의 뮤직 카페’ 상영작 5편 외에 3월 5일(목) 저녁 7시 30분에 열리는 독립영화 정기상영회에서 이탈리아의 음악 독립영화 <피아노, 솔로>가 무료로 상영된다. <피아노, 솔로>는 이탈리아의 천재적인 재즈 피아니스트 루카 플로레스의 삶과 사랑을 그린 영화다.

관람료는 일반 5천원, 회원 3천 5백원. 시네마테크 부산 홈페이지를 통해 예매할 수 있다. 문의: 051-742-5378(시네마테크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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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7 09:17

당신은 추방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인터뷰]『추방과 탈주』저자 고병권
                                                                                                                                        박휘진 기자
'추방과 탈주'의 저자 고병권. 그는 한국사회에서 대규모의 인구가 주변으로 내몰리는 추방이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 '추방과 탈주'의 저자 고병권. 그는 한국사회에서 대규모의 인구가 주변으로 내몰리는 추방이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경찰의 폭력적인 시위 진압을 목도할 때면 ‘왜 경찰은 그들을 때리고 있는가’를 자문하게 된다. 그 답은 이게 아닐까. ‘경찰이 ‘지킨다’고 말하는 국민의 범주에 더 이상 나 혹은 시위대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게 아니라면 왜 경찰이 시위대에게 폭력을 가하겠는가. 시위대도 그들이 지켜야할 국민일텐데. 경찰의 시선으로 본다면 시위를 택한 순간(실은 시위를 택하게 된 계기로부터) 시위대는 더 이상 국민이 아니다. 국민의 범주에서 ‘추방’되었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추방된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두 가지다. 그들을 추방한 국가권력에 더 간곡히 매달리거나 국가의 영역으로부터 탈주하거나. 현 한국사회를 ‘추방’과 ‘탈주’라는 두 키워드로 읽어낸 책이 출간됐다. 고병권(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의 『추방과 탈주』(그린비)가 그것이다. 저자를 만나 그가 책에 담고 싶었던 생각들을 직접 들어보았다.

책을 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궁금해 할 것 같습니다. 제목의 첫 단어가 추방인데요. 누가, 누구를, 어디로부터 추방한건가요.(웃음)

꼭 어떤 사람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취하고 있는 사회구조 자체가 추방을 야기한 것이라고 봐야겠죠. 좁게 말하면 국가에 의한 추방이라고 봅니다. 예전에 쓰던 말로하면 국가와 자본이죠. 더 구체적으로는 이 사회에서 주권을 행사하는 존재, 주권적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에 의한 추방이 일어난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조금 이상해져요. ‘어, 국민이 주권잔데 왜 추방되지?’ 위험한 말이지만 낱국민은 주권자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근대에 생긴 ‘국민이 주권이다’는 말은 국민 전체를 의미했을 때, 국민을 하나로 봤을 때 성립되는 말이고요. 낱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일을 저는 본 적이 없어요. 주권자는 사회에 매우 중요한 결정들, 우리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일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죠. 칼 슈미트 같은 철학자는 주권자를 ‘법을 중단시킬 수 있는 합법적 권리를 가진 사람’이라고 부르죠. 현재 한국 사회에서 그런 권리를 누가 쥐고 있느냐. 글쎄요. 낱국민들이 쥐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네요.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자꾸 변두리로 밀려나고 있고, 그걸 추방이라고 했죠.

책에 쓰진 않았지만 추방이라는 말을 처음 떠올린 것은 중증 장애인 이야기를 듣고 였어요. 중증장애인들을 사회가 방치하잖아요. 완전히 가족들이 다 떠안거든요. 가족 중 한 사람이 사회생활 포기해가면서 거기에 매달려요. 하다하다 지치면 구청에 연락을 해서 시설에 보내요. 주로 종교단체들이 국가보조금 받으면서 그런 시설은 많이 운영하죠. 그런 시설에 가서 살다가 나이가 먹으면, 나이 먹은 사람들을 위한 시설이 또 있어요. 그 후에는 묘지에 묻히겠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사람들은 한 번도 사회에 들어와 본 적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사회로부터 추방된거죠.

그런데 이 추방이 참 특이하다. 추방인 동시에 방치라는 느낌을 주잖아요. 영어로 방치하다가 ‘abandon'인데요. abandon 가운데 있는 ban이라는 말이 추방이라는 뜻이랍니다. 해서 방치는 추방의 한 형태다. 전통사회에서는 추방이 공동체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추방은 밖이 아니라 변두리로 몰아내고 있습니다. 대규모의 인구가 주변으로 방치되는, 추방은 추방인데 주변으로 몰고 주변에 방치한다는 거죠. 그런 추방이 한국사회에 지난 10년 동안 있어온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추방으로 인해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는 상황에서, 혹은 잠정적으로 주변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우리는 탈주해야한다는 것인가요.

물론 탈주를 하자고 하는 것도 있는데요. 일단 탈주를 강요받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불가피한 측면이 있는 거죠. 밀려나는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대의성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대표하는, 매개하는 사람이 없어요. 비정규직 노동자는 조합이 없는 거죠. 어떻게 조합을 결성하겠어요. 매일 매일이 불안정한 사람들이고 사장이 바로 해고할 텐데요. 농민 같은 경우에도 17대에는 비례대표가 없었어요. 인구가 약 300만명이 되는데도 말이죠. 의사수보다 훨씬 많죠. 그런데 의사는 비례대표가 있어요. 이 말은 곧 농민은 정치적으로 대의가 안 된다는 말이죠. 지금 시골의 농민들이 대의되는 방식은 ‘농민 문제’가 아니라 ‘시골 노인’문제나 혹은 ‘가난한 사람들’문제로 여겨지죠. 범주가 빈곤층과 노년층이 되는 거죠. 농민의 문제는 희석되고, 대의가 안 되기 시작합니다.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은 대의성이 없기 때문에 극한 상황에 닥치게 되면 확 돌변하게 됩니다. 아주 사소한 사건으로 인해서 ‘아, 아니다’라고 느끼게 되면 이 사람들은 태도가 180도 달라지죠. 정말 극렬한 투쟁을 하게 되요. 용산참사도 비슷한 문제죠. 어쩌면 그들 중에는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찍은 사람도 있을 거에요. 경제적으로 살아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요. 그런 사람들도 이런 사건들로 인해서 돌변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돌변할 때 의사가 대의되지 않기 때문에, 점거나 난입의 형태로 탈주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선 직접 뛰어들 수밖에 없죠. 노사정위원회 비정규직 난입이라던지, 촛불집회처럼 거리로 뛰어나온다던지, 도시개발정책에 반대해서 점거를 한다던지. 이런 것은 강요받은 탈주에요. 그들은 이게 아니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말해달라고 하죠.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는 거죠.

국가에서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는 대중’이라고 합니다. 만약 국가에서 애초에 그들을 함께 할 존재로 여기고 끊임없이 소통하려 했었다면 그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대중이 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나 주변으로 밀어내고 방치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대중이 된 것이죠. ‘이해할 수 없다’, ‘소통이 안 된다’ ‘괴담이 떠돈다’ ‘난동을 부린다’ 는 말들이 한국사회에 정말 많이 있었잖아요. 이 모든 것의 종합이 ‘이해할 수 없는 대중’입니다. 화염병 던지고, 얼굴 가리고, 평소에 우리가 봐왔던 친숙한 모습이 아닌 흡사 반란군처럼 낯선 모습을 한 채로 그들이 불가피한 탈주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겠죠. 

추방된 사람들이 강요받은 탈주를 할 때 보이는 낯선 모습들을 국가에서는 ‘폭력시위’같은 말로 매도하고 있잖아요. 그러나 그 사람들에게는 말씀하신 것처럼 점거나 난입 또한 어쩔 수 없는 단 하나의 선택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이 ‘폭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2009년 1월에 발간된 고병권의 '추방과 탈주'(그린비).

폭력은 진짜 어려운 주제에요. 폭력에 대해 쉽게 생각하는 건 합법이냐 불법이냐인데요. 이런 이야기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만약 외계인이 지구에 와서 대추리에서 싸우는 모습을 봤다. 한총련 사람들이 죽봉을 휘두르고 경찰과 대치하는 것을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봤다면, 순전히 ‘물리적’ 의미에서 경찰의 폭력이 압도적으로 보였을 거에요. 초등학교 하나를 없애버렸으니까요. 그럼에도 대추리 시위 현장을 ‘폭력 시위’라고 하는 것은 그 ‘불법성’과 깊은 관련이 있을 거예요. 이른바 ‘주권자’ 혹은 ‘공권력’은 불법을 저지를 수가 없어요. 어떤 물리력을 행사해도 그건 공무집행이죠. 그러나 국가 폭력성은 분명히 있어요. 아, 이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정말 인생 헛 산거에요.(웃음) 따라서 법으로는 폭력의 문제를 정의할 수가 없는 거죠. 법 자체의 폭력성이 있죠. 그렇다면 폭력은 물리력을 의미하는냐. 그것도 아니죠. 정신적 폭력, 언어적 폭력 등도 폭력이니까요. 그래서 폭력이 뭐냐에 대한 논의를 하다보면 끝이 없어요.

다만 좁혀서 이야기를 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앞서 말한 법의 폭력성이라던지, 국가 폭력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잠시 제쳐 두고요. 사안을 아주 좁혀서 내가 시위현장에서 떳떳하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의 문제만 놓고 이야기를 하자면, 두 가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물리적 폭력을 쓰는 것이 이로운가. 둘째는 폭력은 공격적인 것인가.

첫 문제와 관련해서 보면, 저도 80년대, 90년대 초에 그런 현장에 많이 있었어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참 공허한 느낌이 들었어요. 시위가 시작되면 이른바 사수대라고 하는 사람들이 앞에 나가서 쇠파이프로 부수고 하는데, 저기를 뚫어서 뭘 하려고 할까. 10미터 더 전진하고, 또 전진하고. 그렇게 시위하는 동안 오히려 사람들은 다 떨어져나가더라고요. 물리적 폭력의 증대가 전체 시위대 힘을 감소시키는 희한한 현상이 발생하는 거죠. 그런데 얼마 전 대추리에서 아주 인상적인 장면을 봤습니다. 한쪽에서는 사수대가 죽봉으로 대치하면서 수세에 몰리고 있는데, 한 쪽에서 어떤 분이 그 초등학교 교문에 자기 몸을 쇠사슬로 묶었어요. 그 모습을 사람들이 카메라로, 핸드폰으로 마구 찍었고 웹에서 퍼졌죠. 그 모습이 알려지고 나서 사람들이 대추리로 많이 몰려왔어요. 죽봉과 물리적 폭력은 사람들을 시위에서 떨어져 나가게 했지만, 그 깜찍하고 작은 디지털 카메라는 사람들을 현장으로 불러 온 거죠.

그 현상을 보면서 엥겔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엥겔스는 “낡은 혁명이 미래 혁명의 발목을 잡고 있다.”, “폭력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히려 저쪽이다.”면서 이제는 시위도 바뀌어야 한다고 했어요. 엥겔스가 보기에 그 당시의 혁명들이 낡았다는 거예요. 바리케이트를 치고, 시간을 오래 끌어서 사람들 시각을 바뀌게 하고, 경찰을 ‘동료 시민’으로 느끼게 하는 것들이요. 그런데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서 대포가 와서 ‘빵’ 하면 모든 게 끝나잖아요. 게다가 폭력으로 맞설 때 여론은 더더욱 안 좋아지고요. ‘저 폭력배들’ 이렇게. 더 안 좋은 것은 바리케이트를 치면 대표자가 생기고, 군대화되고, 대표자가 협상가서 배신해버리거나 구속되면 우왕좌왕하게 되고. 지금과 똑같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엥겔스와 맑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줄곧 이야기했었는데 마지막에 가서 뜬금없이 기독교 이야기를 합니다. 로마의 전복당이라고. 어떻게 로마시대에 이들이 혁명에 성공했을까. 그들은 군대와 싸우기 전에 그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들어버렸다. 이건 뭐냐면 소통과 전염이에요. 대추리에서 카메라로 찍었던 것. 그리고 웹에서 퍼졌던 것. 그것이 더 많은 사람을 불러왔고, 그건 죽봉이나 쇠파이프의 힘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겠죠.

두 번째로 폭력은 공격적인가의 문제.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중증 장애인 투쟁 때 특히 많이 느끼는데요. 2001년 ‘버스를 타자’ 이동권 투쟁 때 그 사람들이 철로에 내려와서 몸을 묶었어요. 육교에 몸 매달기도 하고요. 엄청나게 위험한 시위에요. 또 한번은 한강다리 건너는 것도 지켜본 적이 있는데요. 이른바 보통 사람은 15분이면 건너는데  그들은 전동 휠체어에서 내려서 온 몸으로 기어가는데 3시간 넘게 걸려요. 그나마도 보통 절반 쯤에서 다들 혼절해요. 너무 힘들어서. 그 시위는 경찰 한 명도 다치게 한 적이 없지만, 그 사람들은 목숨을 내걸고 해요. 너무 과격하죠. 전에 박경석 (장애인이동권연대 공동대표)선생한테 물어본 적이 있어요. “왜 이렇게 엄청나게 과격하게 하냐. 이건 ‘비폭력 과격시위’라고”. 근데 그게 메시지가 강해요. 공격적이라는 걸 확 느껴요. 그들은 경찰도 두려워하지 않아요. 곤봉에 그냥 몸을 내 던져요. 어떤 두려움도 없는 것. 그들 시위의 진실성. 이런 것들이 매우 공격적으로 느껴지는 거죠. 5월과 6월의 촛불집회 때도 그랬죠. 물대포 쏘면 처연하게 맞고, 구속하겠다고 하면 ‘닭장차 투어’라고 자기가 먼저 올라타고. 매우 공격적인 시위죠. 이게 바로 비폭력 직접행동이죠.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만 간디의 이미지가 달라요. 우리는 간디를 평화로운 사람으로 보고, 혼자 단식하는 사람으로 보는데, 사실 간디는 매우 공격적인 사람이고 물러나지 않는 사람이에요. 대추리에서 쇠사슬로 문에 자기 몸을 묶었던 주민, 철로에 몸을 묶은 장애인처럼요. 비폭력 직접행동이라는 것은 폭력에 물려나지 않겠다는 거예요. ‘폭력같이 저열한 것에 굴복하지 않겠다. 나는 한발도 못 물러난다’고 그 자리에 딱 서는 거에요. 충돌을 회피하지 않아요. 우리는 비폭력 시위를 충돌하지 않는 시위라고 생각하는데, 이 사람들은 충돌하죠. 신화 같은 이야기지만 두려움 없이. 두려움을 초월해서 맞서는 것이죠.

지금의 사회구조가 계속 주변인들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불안해하면서 밀려나지 않으려 매달리고요. 반면 국가는 나의 범주에서 나가면 더 이상 살펴주지 않겠다는 식으로 ‘협박’하고, 실제로 그 폭력성을 대놓고 보여주기도 하고요. 책에서는 국가의 이런 폭력성이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고 하셨는데요.

요즘 학자들이 많이 하는 이야기고 저도 공감하는 건데요. security 담론이란 게 있어요. 치안으로 해석하는데요. 이것은 안팎을 구별하지 않아요. 테러리스트가 아프간에 있는지 미국에 있는지 알 수 없고, 누군지도 알 수 없잖아요.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적에 대해서 초법적인 관리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모두가 수용하는 거죠. 이건 범인이 집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국가를 집에 들이는 거죠. 한국에서도 최근에 전화감청법 통과되려고 하고, 사이버 관련법들도 만들려고 해요. 그런 것을 보면서 저는 ‘뭐가 두렵길래 저럴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마치 밤을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항상 불을 켜두려고 하고, 네 얼굴 봐야겠다고 가리지 말라고 하고, 댓글까지 다 관리하겠다고 하고요. 이게 테러와의 전쟁에서 드러나는 특징이에요. 적이 어디서 오는지 모른다는 것. 누가 적인지 모른다는 것이요. 그런데 이것은 한편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과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0개월 계약서’처럼 언제 해고될지 모르고, 혹은 호출 노동자처럼 오늘 문자오면 일하고 없으면 공치는 거고요. 이렇게 극도로 불안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는 거죠.

이건 신자유주의 이후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그 전에는 어찌됐든, 어떤 의도로 그랬는지는 몰라도 국민을 안에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배워야 된다. 모두가 잘 살아야 된다’는 식의 국민주의가 있었어요. 그런데 신자유주의 이후에는 ‘이들을 끌고 갈 필요가 없다. 관리나 하는 게 낫다’로 바뀐 거죠. 그리고 그런 관리의 대상이 된 것이 정부 정책에 의해 밀려나고 방치됐던 사람들 인거죠. 이해하려 하지 않고 방치하니, 그 사람들이 누군지 알 수 없게 되고 관리하려고 할 때 앞서 말했던 이해할 수 없는 대중과 마주하게 되고요. 알 수 없게 되니까 더 관리하려고 들고요. 더 폭력적으로 행동하고요. 더 강화하고요. 신자유주의에서 정부는 모든 게 축소되는데 딱 하나 커지는 부분이 바로 치안입니다. 기동대도 만들고. 왜냐면 빨리 대응해야 하니까요. 정부에 의해서 대중이 불안에 빠졌는데, 그 불안한 대중을 보고 정부도 불안해하는. 서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각각 더 강화하는 것뿐이죠. 이런 알 수 없는 게임.  
  
지식인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식인’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자신의 문제이기도 할 테고요. ‘연구자 대중’이란 말을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요. 

마치 다른 대중들이 각자의 생활영역에서 살아가듯이 공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죠. 공부를 해서 다른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하면서 쭉 살아가는 사람이 연구자 대중이죠. 저는 지식인 이미지를 다르게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그간 지식인 이미지가 좋게 봐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위에 있고, 더 멀리 보는 존재’정도 였는데, 그게 아니라 저는 ‘연구자 대중’이어야 한다고 보는 거죠.

사실 대중 안에 포함된 사람들은 각자 다른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잖아요. 공장사람들 데려다가 농사일시키면 그 사람들은 농작물 다 말려 죽일 거예요. 그들은 삶의 양식이 다르거든요. 근데도 그 사람들을 다 대중이라고 불러요.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책 읽고 글 쓰고 개념이나 담론 만들고 하는 건데, 따지고 보면 그게 또 그렇게 다른 일들은 아니거든요. 농민이 공장노동자가 만든 공산품들도 쓰면서 살아가듯이, 농민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 더 생산적으로 살아야겠다고 느끼게 하듯이, 예술가의 창조성이 우리 연구자들에게 또 다른 영감을 불러오듯이, 우리가 만든 담론들을 다른 사람들도 같이 공유하는 거죠. 그게 지식인이 하는 일이라고 봐요.

2006년 대추리 시위 현장. 대추리 주민들은 '올해도 농사짓자'는 구호를 외쳤다.
삶과 투쟁의 현장은 다르지 않다.

책에서는 지식인의 죽음을 예견했지만 그건 또 분명히 지식인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 상황에서 지식인의 역할이랄까요.  

지식인만의 특별한 책무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농부가 책무로부터 면제되지 않고, 노동자도 그렇듯이. 학자들도 대중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죠. 그런 면에서 지식인에게도 노동자에게, 농부에게 묻듯이 ‘너는 지금 뭘하고 있냐’고 물을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지식과 정보가 상품이 되면서 도리어 삶과 무관한 지식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런 측면에서 지식인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보고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지식인의 역할은 분명히 있다고 봐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할 일들이 모두 있듯이. 지식인이 뭔가 다른 위치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역할을 해야죠. 

그런 측면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나의 앎이 곧 실천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06년에 행진하면서 인상 깊었던 것 중에 하나는 대추리에서 본 “올해도 농사짓자”였습니다. 그리고 중증장애인 투쟁의 형태 ‘비폭력 과격시위’같은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오냐고 박경석 선생한테 물었을 때 그는 “어디서 나오는 게 아니다. 우리는 이게 삶이다”라고 했습니다. 위험하니까 줄로 묶고 하는 것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지식인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삶을 단절시키고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내 앎을 곧 실천으로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영역에서든지 싸워서 혁명하겠다가 아니라, 삶이 바뀌었을 때 그게 바로 혁명인거죠. 지식인들에게 투쟁이란 지식투쟁이 되겠죠. 그 지식 투쟁을 통해 우리의 삶도 바뀔 테고요.

지식인도 그렇고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현장’으로 연장시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자신의 불안한 삶을 알면서도 모른척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현장은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죠. ‘왜 현장에 가지 않느냐’는 곧 ‘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느냐’는 말일 거예요. 그리고 그 사건은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계기이고요. 그 현장은 언제든지 나타나고, 사건은 도래합니다. 모두가 그 사건 속에 우리를 적극적으로 열어야 됩니다. 사건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맡기고 내던져야 변화가 오는 거겠죠.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은 현장에 있어야 하고, 자신의 삶을 현장화 해야 합니다. 그건 어느 누구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저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라고 봐요. 중요한 것은 자기가 있는 곳이 현장이 되게 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현장 안에 있다 보면 우리는 당연하게 알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 엮여 있다는 걸요. 사건은 나 개인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일어나는 거고, 그 사건을 같이 겪으면서 함께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죠. 그리고 거기서 고립이 극복되는 거겠죠. 선언문에서도 썼는데요. “나는 내 자리에서 싸우지만, 내 친구자리가 또한 내 자리라는 것을 안다”고요. 우리는 같은 이유로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그 속에서 서로 연대가 될테고요.

고병권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면서 ‘느낌을 받았다’, ‘인상적이었다’라는 말을 자주 썼다. 같은 일을 경험하고도 아무 감응 없이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그 일에 자신을 온전히 열어 온 신경으로 그것과 교감하는 사람들이 있다. 후자만이 일을 사건으로 경험하며, 일상을 현장으로 변화시킨다. 지금 한국사회는 어떤가? 우리는 충분히 열려있는가? 우리는 충분히 교감하고 있는가? 고병권은 추방이 적극적인 방치라고 했다. 이는 비단 국가와 국민의 관계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범주를 좁혀 나와 나의 삶을 대입해보자. 우리는 우리의 삶을 방치하고 있진 않은가. 사회와 개인이 무관하지 않음에 이의가 없다면, 우리는 좀 더 열린 자세로 일상을 대해야 할 것이다. 일상을 현장으로 변환시키는 ‘열림’이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첫 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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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7 09:15

미술관 인턴, “편의점 알바가 부럽다”

최저임금 못 미치는 미술관ㆍ갤러리 인턴제도 개선 필요
                                                                                                                                        안태호 기자
한가람미술관 인턴 모집 공고. '근무보수 없음'이 뚜렷하다.
▲ 한가람미술관 인턴 모집 공고. '근무보수 없음'이 뚜렷하다.

2년 전 신정아 씨의 스캔들이 불거져 나왔을 때, 많은 이들이 ‘큐레이터’라는 직업에 대해 선망의 눈길을 숨기지 않았다. 비록 여러 언론에서 큐레이터의 현실이 상상하는 것만큼 우아하고 고고한 것이 아니라는 인터뷰와 기획기사를 실었음에도 이 믿음은 여전히 굳건하다. 큐레이터는 ‘미술관의 꽃’이고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트렌디한 주인공들은 어김없이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도도함을 뽐낸다. 아무래도 당분간, ‘큐레이터=고상한 직업’이라는 일반의 오해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것 같다.

정작 큐레이터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연못 위의 백조’와 같다고 이야기한다. 물 위에 떠 있는 모습은 당당한 자태를 뽐내지만 물속에서는 쉴 틈 없이 다리를 젓기 바쁘단 거다. 학예사라고 불리기도 하는 큐레이터들은 실제로 본업인 전시기획부터 작품ㆍ전시장 관리, 홍보, 전시장에 못 박는 일까지 수많은 잡무에 시달려 스스로를 ‘잡예사’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그런데, 정직원 큐레이터를 꿈꾸는 이들의 처우는 어떨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인턴 급여 : 0원
서울시립미술관 인턴 급여 : 교통비, 중식비
일반 상업 화랑/갤러리 인턴 급여 : 10~60만원
일반 상업 갤러리 어시스턴트 큐레이터/정직원 급여 : 70~100만원

다음 아고라에 올라온 미술관ㆍ갤러리 인턴 처우에 대한 글의 일부분이다. 일주일에 4일 출근을 요구하는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의 인턴 급여는 0원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은 그나마 교통비와 중식비를 제공한다. 문제는 대다수 국공립미술관들이 비슷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대전시립미술관은 무급, 국립현대미술관은 일당 15,000원, 광주와 부산은 일당 1만원에 인턴제를 유지하고 있다. 2009년 현재 최저임금은 시급 4,000원이다.

그러나 국공립미술관이 학예사 시험에 필요한 경력인정기관이다 보니 보수가 없다시피 한 인턴자리도 경쟁률이 치열하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미술계의 분석은 ‘예비군’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 중론이다. 큐레이터를 지망하는 예비인력이 넘쳐나다 보니 사람을 쓰는 쪽에서 아쉬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거다.

시각예술 관련자들의 온라인 커뮤니티 네오룩닷컴에서는 최근 미술관ㆍ갤러리 인턴제에 대한 성토가 한창이다. 이들은 전시기획자를 뽑아놓고 ‘전시 디자이너, 회계업무, 비서 노릇, 고객 서비스’를 다 시킨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심지어는 화장실 청소까지 인턴의 몫으로 넘어오기도 한다는 게 이들의 증언이다.

사실, 인턴 문제는 미술계 내에서 고질적으로 제기되어 오던 문제다. 그러나 번번이 무관심 속에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고 말았다. 네오룩닷컴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이들은 ‘이번에야말로 인턴제의 문제점을 뿌리뽑자’는 입장이다. 이들은 갤러리 구인 모집 글들에 댓글을 달기도 하고 포털사이트 다음의 아고라에 미술관 인턴제 폐지에 대한 청원을 올리는 등 활발하게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최저임금법 위반 사업장 명단을 만들자’, ‘공공기관인 서울시립미술관에 민원을 넣자’ 등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만들어 서로 활동을 독려하고 있다.

이들의 활동에 힘입어 한 공중파 방송에 이 문제가 소개되자 문제가 됐던 기관에서는 ‘관련 예산 확보에 힘쓰겠다’며 개선의 여지를 보이기도 했다. 시급 4,000원을 받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부럽다는 고학력 인턴들. 과연 이번에는 확실히 문제의 해결을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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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7 09:13

기업 경영인 미술관장 임명은 어불성설

문화연대 현대미술관장 임명 관련 성명, ‘임명 철회, 장관 사퇴 요구’
                                                                                                                                        김나라 기자
국립현대미술관 전경. 배순훈 씨가 신임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임명되자 문화연대는 지난 2월 25일(수) 성명서를 발표했다
▲ 국립현대미술관 전경. 배순훈 씨가 신임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임명되자 문화연대는 지난 2월 25일(수) 성명서를 발표했다

2008년 11월 김윤수 전 관장이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해임 된 이후 공석으로 있던 국립현대미술관장 자리에 배순훈 씨가 임명된 데 대해 문화예술계에서 비판적인 입장이 제기되었다. 문화연대는 2월 25일(수) “문화예술계는 이명박 정권의 무원칙적인 인사를 위한 장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성명서를 발표하고 배순훈 관장의 임명 철회와 유인촌 장관의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23일(월) 신임 관장에 임명된 배순훈 씨는 대우전자 회장과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바 있다. 이에 미술계와 무관한 비전문인을 한국 미술계의 상징적인 기관인 국립현대미술관 자리에 앉힌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 문화연대의 입장이다.

문화연대는 유인촌 문화부 장관의 문화예술 인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성명서는 “이번 인사에서 드러난 것처럼 가장 큰 문제는 유인촌 문화부 장관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인식이다. 유인촌 문화부 장관은 문화와 예술을 시장 중심적으로 접근하며, ‘선택과 집중’을 원칙으로 ‘경쟁’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문화를 도구화하여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문화부 정책과 사업을 진행시키고 있다”며 문화부 장관의 시장중심적인 예술관을 질타했다.

이어서 배순훈 신임 관장의 임명을 즉각 철회할 것을 요구하며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기관으로서 그 역할과 위상을 제대로 정립할 수 있는 인사로 신임 관장을 재임명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예술계 관계자들과 논의와 합의를 거치는 것은 재임명의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고 주장했다.

또한 “지난 1년 유인촌 문화부 장관은 문화예술계를 무원칙적인 인사의 대표적인 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임기가 보장된 산하기관 기관장들의 자진 사퇴를 종용하고, 결국 사임 구실을 만들어 김윤수 전 현대국립미술관장, 김정헌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등을 해임시켜버렸다”며 문화부의 인사정책을 비판했다.

문화연대는 "더 이상 한 국가의 문화전반을 총괄하는 수장으로서 자격이 없음이 자명해진 유인촌 문화부 장관은 이제 사퇴하여야 한다. 지금과 같이 유인촌 문화부 장관이 계속적으로 문화예술기관에 무원칙적인 인사를 임명하고, 자본과 수익만을 강조하며 파행으로 몰아간다면, 문화예술의 미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며 배순훈 신임 관장의 임명 철회와 함께 유인촌 장관의 사퇴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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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7 09:12

문학을 통해 본 한국의 재개발 정책

지행네트워크 정기 콜로키움 “재개발과 도시, 그리고 문학”

 

문학평론가 오창은 씨.

▲ 문학평론가 오창은 씨.

                                                                             이주호 기자


화근은 어디에 있었을까? 용산 참사에 관한 검찰의 발표는 불씨의 출처가 어디였는지를 밝히는 것이 용산 참사의 진상을 밝히는 것이라도 되는 양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둔갑술로써 사태를 일단락 지었다. 철거를 반대한 사람들 손에 들려 있던 화근은 그들의 깊은 반정부, 반민주로 분기탱천한 비뚤어진 마음에 있었을까? 한국 사회에 떠다니고 있는 헌집 주고 새집 받자는 정서는 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행동하는 지식과 소통 가능한 토론을 꿈꾸는 모임 지행네트워크는 3월 2일 오후 7시 30분 마포구에 위치한 지행네트워크 사무실에서 “재개발과 도시, 그리고 문학”이라는 주제로 열린 토론의 모임인 정기 콜로키움을 연다.

올해 첫 순서이자 13차 콜로키움인 이번 모임에서는 재개발을 명목으로 주거에 관한 권리를 빼앗겨가는 상황에서 용산 참사로 인해 사회적 분노와 환멸이 높아진 지금, 현 상황을 좀더 차분히 바라보기 위해 “재개발과 도시, 그리고 문학”을 주제로 정했다. 문학평론가 오창은이 논의를 주도할 이 자리에서는 하근찬의 「삼각의 집」,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박태순의 「정든 땅, 언덕 위」, 「무너지는 산」을 통해 한국의 재개발 정책이란 것이 어떤 감수성을 만들어 왔는가를 살펴 볼 예정이다.

참가비는 없으며 희망하는 사람은 누구나 참가할 수 있지만 토론 공간 사정상 지행네트워크 홈페이지(http://jihaeng.net)를 통해 선착순으로 참여 신청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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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6 09:22

청춘, 무모하고 낭만적인 싸움의 기록

두산아트센터 <청춘 18대 1>
                                                                                                                                         안태호 기자
<청춘 18대 1>은 우연히 독립운동에 말려든 청춘들이 보여주는 열정에 대한 이야기다.
▲ <청춘 18대 1>은 우연히 독립운동에 말려든 청춘들이 보여주는 열정에 대한 이야기다.

‘청춘 18대 1’? 제목만 두고 보면 최근 몇 년간 유행을 탄 철지난 조폭코미디가 연상되지만, 정작 공연을 보고 나면 빈 바람소리가 지나가는 것 같은 아스라한 느낌이 남는다.

<청춘 18대 1>은 독립운동 이야기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독립운동에 휘말린 청춘들의 이야기다. 아니,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우연히 독립운동에 말려든 청춘들이 보여주는 열정에 대한 이야기다.

때는 1945년, 징병을 피해 일본으로 도망간 세 명의 젊은이(강대웅, 정윤철, 기철 형제)는 우연히 조선인 독립운동가(김건우)를 도와주다 예상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삶을 살아가던 인생은 180도 바뀌어 댄스홀의 주인(이토에, 윤하민)과 여급(순자), 독립운동가의 아내(나츠카)와 함께 동경 경시청장을 살해하기 위한 모의에 동참한다. 댄스광인 경시청장을 초대한 댄스파티에서 폭탄을 터뜨리는 것이 이들의 계획이다.

작품은 폭발에서 홀로 살아남은 댄스홀의 주인 이토에가 경찰서에서 취조관에게 심문을 당하며 사건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무대의 한쪽 구석에서 진행되는 심문과 무대의 사건들은 서로 뒤얽히고 넘나들며 독특한 서사를 만들어낸다.

열여섯 살 순자와 기철을 제외하면, 경시청장 암살에 가담한 이들은 모두 18세다. 그러나 작품제목인 ‘18대 1’은 생물학적 나이를 드러내기 보다 무모한 싸움을 대변하는 표현이다. 독립을 한 달여밖에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서 이렇다 할 신념도 없이 경시청장을 암살하기 위해 죽음을 향해 달려드는 이들의 무모함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정작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청춘의 열병이 가져다주는 열정이다. 독립운동도 사랑도 이들에겐 ‘춤 추는 것’의 다른 이름이다. 상대의 손을 잡고 몸을 밀착해 눈과 눈을 마주하는 순간의 두근거림처럼 이들은 목숨을 건 독립운동도, ‘당신의 늙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지는’ 가슴 저린 사랑도 왈츠의 박자감에 실어낸다.

이들의 행동과 감정은 경계에 서 있는 위태로움을 보여준다. 청춘의 불안정함이 갖고 있는 위태로움, 식민지 백성으로서 갖는 위태로움, 사랑에 대한 조바심과 애써 억눌러도 이내 역류하는 감정에 대한 위태로움. 이 위태로움들이 줄을 지어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가져오는 위태로움까지 이르면 이야기는 절정에 달하고, 홀로 살아남은 이토에의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청춘이야말로 삶에 대한 갈망이 가장 뜨겁게 들끓는 시기라는 것을 고개를 주억거리며 인정하게 된다.

공연에는 아코디언, 클래식기타, 하모니카, 밴죠, 디즈, 피아노, 클라리넷, 부주끼, 만돌린 등 평소 잘 쓰이지 않거나 일반인들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악기들이 쓰여 색다른 음향효과를 보여준다. 여기에 타자기, 축음기, 자전거 벨소리 등이 더해져 정서적 울림을 두텁게 만들어 낸다. 죽은 독립운동가의 자전거가 무대 위를 훑고 지나가며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관객들의 가슴을 파고든다.

<청춘 18대 1>은 2008년 초연당시 언론과 관객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으나, 공연 중 배우의 부상으로 예정보다 일찍 막을 내린 바 있다. 한아름 작, 서재형 연출. 두산아트센터 space111, 3월 1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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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6 09:20

사람과 개와 고양이의 시간은 제멋대로 흐른다

[신간소개]『펫로스, 반려 동물의 죽음』, 『부자 아빠의 몰락』

『펫로스, 반려 동물의 죽음』, 리타 레이놀즈, 조은경 역, 책공장 더불어, 2009.

▲ 『펫로스, 반려 동물의 죽음』, 리타 레이놀즈, 조은경 역, 책공장 더불어, 2009.




                                            이주호 기자

『펫로스, 반려 동물의 죽음』
“개 한 마리 죽었다고 너도 죽을래?”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온 애완동물에 보내는 애도 앞에서 동물을 반려로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람으로서는 짜증이 거의 대부분인 이런 위로밖에는 딱히 할 말도 없다. 펫 로스(pet loss)는 반려 동물이 죽었을 때 느끼는 슬픔을 말한다. 동물을 동물처럼 보는 사람에게 펫 로스란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지 못한 사람들이 동물에 애정을 쏟다가 느끼는 상실감 정도로 치부된다. 진심으로 사람을 대해봐, 함께 이야기하고 공감할 수 있는 친구가 있는데 개와 고양이가 뭐가 그리 대단하냐 따위의 위로를 내뱉을 수도 있고, 이럴 때일수록 원기를 차려야 한다며 보신탕에 소주 한 잔 하자 능청을 떨 수도 있다. 반려 동물과 애정을 나누고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정말로 퇴행적 행동에 불과한 것일까?

영화 <구구는 고양이다>는 한 공간에서 각기 다른 속도의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과 고양이의 교감을 다루고 있다. 고양이의 일생이 20년이고 인간의 일생이 80년이라고 한다면 고양이는 인간보다 4배 빠른 시간 속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이 다른 인간에겐 뒤집힌 시간으로 보이듯, 살아 있는 것들은 저마다의 시간을 살아간다. 그 다른 시간을 경험해 볼 수 있다면, 한 생명이 태어나 장성하여 번식을 하고 노쇠해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그 긴 과정들을 함께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나이듦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경이로운 학습이 되어 주지 않을까?

13년 동안 동물보호소를 운영하며 동물 호스피스 일을 해 온 저자가 들려주는 반려 동물에 관한 이 책은 반려 동물을 떠나보내는 사람의 자세와 슬픔을 극복하는 방법, 반려 동물과 함께 살아가며 얻을 수 있는 삶의 소중한 경험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리타 레이놀즈, 조은경 역, 책공장 더불어, 값 12,000원.



『부자 아빠의 몰락』
한 여성 속옷 브랜드에서 보석이 박힌 1,200만 달러짜리 속옷을 출시했다. 말할 것도 없이 안 팔렸다. 하지만 제조사는 큰 이익을 남겼다. 이 속옷 덕에 사람들은 100달러짜리 속옷을 전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사게 된 것이다. 이것은 물론 미국의 이야기다. 한국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다. 다만 이 일화는 소득 최상위 계층의 지출이 중산층의 소비패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출 연쇄 반응으로 중산층이 소유하는 주택, 승용차, 의류가 달라졌다. 그리고 이런 지출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노동 시간을 늘렸고 도심에서 멀어졌다.

통근 시간 30분의 24평 아파트와 통근 시간 한 시간의 40평 아파트 중에서 사람들은 대개 통근 시간을 늘리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가계 저축은 감소했고 부채는 늘었다. 스스로 노동 시간과 통근 시간을 연장했고 이에 따라 여가 시간이 줄었고 건강이 악화되었다. 물론 이것은 미국 중산층의 이야기다. 미국의 이러한 사정을 개선하기 위해 저자는 소득세 중심의 현행 조세 제도를 소비세 중심으로 개편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의 감세 정책은 이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중산층에게 부자의 소비패턴을 강요함으로써 세수가 줄었고 공공 서비스가 약화되었다. 약화된 공공서비스는 곧바로 질적 개선을 위한 민영화 정책으로 전환됐고, 사회복지는 축소되었다. 부시 정부가 행한 공급 중시의 감세 정책은 결국 최상위 1%에게 중간 소비계층의 40배에 해당하는 세금 혜택을 누리게 했다. 이것은 물론 미국의 사정이다. 부시 정부의 경제 정책을 그대로 들여와 밀어붙이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감세 정책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이야기다. 저자의 이름부터가 로버트 아닌가. 아, 라벗이라 해야 하나?

로버트 H. 프랭크, 황해선 역, 창비, 값 1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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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6 09:18

‘아시아 독립영화의 오늘’

아시아영화펀드 쇼케이스, 13일부터 인디스페이스에서
                                                                                                                                         김나라 기자

올 해 두 번째로 열리는 아시아영화펀드 쇼케이스 ‘아시아 독립영화의 오늘’이 오는 3월 13(금)일부터 18(수)일까지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에서 개최된다
▲ 올 해 두 번째로 열리는 아시아영화펀드 쇼케이스 ‘아시아 독립영화의 오늘’이 오는 3월 13(금)일부터 18(수)일까지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에서 개최된다

<워낭소리>가 15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독립영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어느 때 보다 높은 요즘, 국내외 관객과 평단이 열광한 아시아 각국의 독립영화를 미리 만나볼 기회가 온다. 올 해 두 번째로 열리는 아시아영화펀드(Asia Cinema Fund, 이하 ACF) 쇼케이스 ‘아시아 독립영화의 오늘’이 오는 3월 13(금)일부터 18(수)일까지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에서 개최된다. ACF 쇼케이스에서는 아시아 독립영화의 제작 활성화와 안정적 제작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펀드의 지원을 받아 완성된 작품 14편이 상영된다.

상영될 작품은 <똥파리>(양익준), <허수아비들의 땅>(노경태), <약탈자들>(손영성),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마리오), <샘터분식-그들도 우리처럼>(태준식), <농민가>(윤덕현), <태백 잉걸의 땅>(김영조) 등 국내 작품 7편과 <노인의 바다>(라제쉬 쉐라), <리버 피플>(허 지엔쥰), <멘탈>(소다 카즈히로), <개종자>(파누 아리), <유토피아>(왕 이런), <공성계>(지단), <우공이산>(조안나 바스케스 아롱) 등 중국, 태국, 인도, 일본 등의 아시아 각국의 독립영화 7편이다.

이번 상영작들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작품들이다. 특히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는 2009년 로카르노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타이거상을 수상했으며 이어 프랑스 도빌영화제, 스위스 프리브룩영화제에서 초청 상영되어 주목 받았다. 또 <허수아비들의 땅>은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베를린영화제, 홍콩국제영화제 등에 초청 상영되어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이 두 작품은 오는 4월 국내 개봉할 예정이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피프메세나상, 2008년 두바이국제영화제 경쟁부문 다큐멘터리 1등상을 수상한 소다 카즈히로 감독의 <멘탈> 역시 올해 6월 일본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번 행사를 공동 주최하는 부산국제영화제와 한국독립영화협회는 “‘아시아 독립영화의 오늘’은 아시아 독립영화의 현재를 가늠하고 아시아 독립영화의 희망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고 전했다.

ACF 쇼케이스는 서울에서 열린 후 4월 21(화)일부터 26(일)일까지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개최된다. 문의: 02-778-0366(인디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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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5 12:29

다문화가 주는 에너지에 단점은 없다

[인터뷰]이주노동자의 방송 이병한 대표
                                                                                                                                         이주호 기자
이주노동자방송 이병한 공동 대표.
▲ 이주노동자방송 이병한 공동 대표.

2월 22일 이주노동자의 방송MWTV가 경선을 통해 이병한, 소무뚜(버마) 두 사람을 공동 대표로 선출했다. RTV의 지원 중단, MB정권의 이주민 탄압, 실업 증가로 인한 이주민에 대한 근거 없는 배타 의식 고조 등 한결 같은 악화 일로의 상황에서 이주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MWTV 이병한 대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어 봤다.

이주노동자의 방송이 최초로 경선을 시도했다. 경선을 통한 선출을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종래에는 후보를 추천하고 추천인을 대상으로 표결을 했다. 공약 같은 것을 내세우면서 대표를 뽑는 건 아니었는데 내부에서 경선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 단체의 경우 이주민들이 만들어가는 단체이기에 후보에 대한 정보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고, 선거와 관련된 공지가 전부 한글로 돼 있기에 이 또한 정보를 공유하는 데 장애가 된다. 경선 과정에서 생겨날지도 모르는 불평등을 생각하면 경선을 하기에는 때가 이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대표가 외국인 1명, 한국인 1명이다. 각자의 역할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인가?

이주민 대표는 주로 이주민 공동체와의 네트워크 확장에 중점을 둔다. 한국인 대표는 전반적인 업무를 조정하는 일을 맡는다. 처음에는 네 명이 공동대표를 맡았고 나 역시 거기에 속했다. 한국인인 내가 이주노동자방송의 대표를 맡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행정적인 면에서 특히 관청에 드나드는 문제에 있어선 한국인들의 역할이 필요했다. 이주민 대표가 처리하기에는 접근조차 힘든 부분이 있다. 그러다 업무 효율 때문에 두 명으로 줄였고, 개중에는 한 명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업무 효율을 내세우는 것은 실질적으로 이주민 대표를 배제하는 것일 수 있다. 한국 활동가들이 어느 순간부터 강한 리더십을 필요로 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여기서 이주민 활동가들이 소외되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리더십이란 게 얼마만큼 일의 완성도에 기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다른 미디어 단체에 비해 완성도가 미비하다는 사실은 남도 알고 우리도 안다. 한국 사람들이라면 이주민들과 보조를 맞추는 데에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고 업무가 느슨해진다는 느낌도 받겠지만, 이주노동자의 방송은 이주민들이 만드는 미디어 단체고 생생한 이주민들의 소리를 내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다.

이주노동자의 방송 내에서도 역할이 나뉠 수밖에 없고 여타 단체에서라면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들을 일정 부분 포기해야 한다면, 사회적으로 봤을 때 이주민과 한국인의 구분이 없는 통합사회를 이룬다는 건 결국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일하는 방식의 차이 때문에 생겨나는 불편함을 들어 다문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소통이 힘들고 일의 효율이 떨어지는 등, 다름이 주는 에너지를 얻기까지는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리 내부에서도 다문화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다.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면 사회적으로도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내부의 갈등이나 차이를 줄여나가면서 성공적으로 단체를 꾸려 가면 외부에 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다문화가 주는 에너지가 무엇이기에 불편한 과정을 감수해야 하는 것인가?

하나는 인권에 관한 문제다. 모든 인간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말하면서 다르다는 것 때문에 차별 받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또 하나는 다른 문화가 우리에게 이식됐을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장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다문화에 단점은 없다. 문화는 흐름이고 흡수하면서 발전하는 것이다. 보수적인 사람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그것을 정체성의 잃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정체성이란 것은 계속해서 달라지는 것이다. 흑인 한국인, 백인 한국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상황이 되면 인종 차별은 없어질 것이다. 다문화에 대한 인식으로 인종 차별의 문제마저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

보수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것보다 다문화의 장점과 이주민들의 가치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으로 보수를 변화시키는 방법일 수 있다. 문화적 다양성이란 용어의 정의도 다시 해야겠지만, 최종적으로는 차별 없이 문화가 뒤섞여야 한다. 서울이 전국에서 맛있는 음식점이 가장 많은 도시가 된 것은 일종의 다문화를 즐김으로써 얻는 풍요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이주노동자의 방송은 이제까지 이주노동자 실태를 보여주는 데 치중하고 있었다. 단순히 대변만 하는 입장이었는데, 통합 사회를 목적에 둔다면 한 측을 대변하는 것을 넘어서 통합적 관점을 제시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주노동자의 방송의 지향점이 두 가지다. 첫째는 한국에 이주민 문화를 알리는 것이고, 둘째는 이주민에게 한국을 알리는 것이다. 이주노동자방송은 11개 나라말로 다국어 뉴스를 하고 있는데 그 부분에서 RTV와 갈등이 있었다. RTV 입장은 똑같은 내용을 언어만 달리 내보내는 게 무슨 의미냐 하는 것이었고, 한국어를 잘 몰라 한국에 관한 정보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방송을 만든다는 게 우리의 취지였다. 언어적 장벽을 제거하는 게 우선이지 한국 사람들에게 흥미를 제공하는 것은 목적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편파적인 내용이라는 항의를 받기도 했는데, 우리는 주류 미디어에서 다루지 않는 어두운 면, 잘 알려지지 않은 면을 다룬다. 밝은 내용을 안 다루는 건 아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퍼블릭 액서스다. 퍼블릭 액서스에다 대고 왜 한쪽의 이야기만 하는가, 통합적 관점을 제시하라 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한다.

이주노동자의 방송은 참여자들의 자발성과 아마추어성에 힘입어 지탱되고 있다. 그러나 보도라는 것은 결국 여론을 형성하고 나아가 정책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가기 마련이다. 이런 측면에서 언제까지나 아마추어리즘으로 밀고나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전문성이라는 건 양날의 칼 같은 것이다. 전문성이 과하면 이주민들은 이해를 못 한다. 진보 미디어에서 이주민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보자면 어떤 부분에서는 이주민들이 접근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사용하는 어휘만 해도 최소한 10년 이상 한국에 살아야 어렵게나마 읽을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거기에 정책적이고 철학적 내용까지 포함되면 더 어려워진다. 이주민을 대상으로 할 때는 쉽게 풀어야 한다는 것과 그들의 의사를 반영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전문성이란 건 다문화나 다문화 관련 이슈에 관심이 있는 전문가들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이끌어가고 도와준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되고, 서로 나눈다는 관점에서 결합해야 한다. 정책, 문화, 미디어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지식과 기술을 나눠주고 대신에 다문화를 배워가는 것이다. 다문화란 쉽지 않다. 수업료를 지불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 문화적 차이를 스스로 겪어가다 보면 배우는 것도 클 것이다. 또한 우리가 가진 공동체 네트워크를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주노동자 관련 목소리들은 ‘교장선생님 훈화의 역설’이란 말을 떠올리게 한다. 정작 들어야 하는 애들은 듣지 않고, 듣고 있는 애들은 그 말씀을 듣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하는 애들이다. 관심을 갖는 이들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방안은 없는가?

답답한 부분이다. 컬처뉴스도 마찬가지 아닌가. 보는 사람만 보는데, 딱히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RTV가 중요하다. RTV의 지원이 없더라도 그쪽 일은 계속 해나갈 생각이다. 온라인 활동 역시 비중 있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주류미디어에서 다루기 쉽지 않은 부분, 거북한 내용을 담지 않으려는 습성 때문에 외면되고 있는 현실들을 온라인을 통해 알려 가려 한다. 유튜브도 주요 수단이 될 것이다. 포기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이렇다 할 대책 없이 꽉 막혀 있는 상황에서는 주류 미디어 말고는 모두 두들겨 봐야 하지 않겠나. 네팔, 방글라데시, 버마와의 콘텐츠 교류도 준비하고 있다.

얼마 전 연구 사업으로 이주노동자들의 미디어 사용 실태를 조사한 것으로 안다. 전문성을 키워간다는 측면에서, 문제를 드러내는 데서만 그치지 말고 사회적 관점을 형성해 가는 작업도 전개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문제는 이주노동자의 방송만으로는 힘들다. 우리 매체가 가진 한계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답답한 것은 의외로 진보 성향의 사람들도 다문화에 비중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다문화 사회로 넘어간다면 한국인에 대한 인식,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진보단체조차 인종 차별 의식을 가지고 있다. 민예총만 해도 단체이름에 민족을 붙이고서 배타성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니 담론 형성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민예총 내에서도 다문화가 큰 의제는 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문화 다양성에 관한 의제가 좀 더 많아지고, 폐쇄적으로 돌아가는 한국사회가 개방에 대한 의제를 설정해서 그 장점에 대한 논의를 계속해 갔으면 좋겠다. 정치적인 면에만 매달리는 태도를 버리고 사회적 개방부터 생각했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이다. 다문화라는 것은 내부에서 자기를 열어야 가능한 것인데, 일단 사람이 열리게 되면 다른 문제들도 열린 상태에서 논의가 가능해진다. 타자에 대한 이해나 수용이라는 측면만 해도 문화 다양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주민의 인권과 문화 다양성이란 것은 현실적으로 복지라는 것과 맞닿아 있다. 이주민 복지라는 현안에 대해서는 어떤 방안을 갖고 있는가?

방송에서 계속 다뤄왔던 문제인데, 정책적으로 풀어나가야 하는 부분이기에 정책 제안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회 영역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역할이 드러내는 것이라면 변화시키는 것은 진보단체의 역할이다. 보수진영에 대한 기대야 어차피 안 한다 하더라도 진보 진영에서만큼은 한국 사람의 집단 이기주의를 벗어난 이의 제기와 정책 변화 요구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보수적 관점에서 봐도 자기 나라에 차별이 존재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진정한 보수라면 분명 생각해 봐야 할 점일 텐데, 하물며 진보에서 이것을 남의 일로 생각한다는 것은 진보의 책무를 등한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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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5 12:26

서울아트시네마를 지켜라!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긴급토론회 개최

2월 28일(토) 오후 2시부터 '시네마테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주제로 긴급토론회가 열린다

▲ 2월 28일(토) 오후 2시부터 '시네마테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주제로 긴급토론회가 열린다



                                                               김나라 기자

2009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폐막 약 1주일을 앞두고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당초 예정되었던 두 번째 포럼이 긴급토론회 ‘시네마테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로 대체되어 2월 28일(토) 오후 2시부터 낙원동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2월 초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는 시네마테크 전용관 위탁사업을 공모제로 변경한다는 통보를 해 왔다.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이하 한시협)는 이를 위기국면으로 인식, 대응 방향을 모색코자 긴급토론회 개최를 결정한 것이다.

시네마테크 전용관인 ‘서울아트시네마’는 순수하게 민간이 주도하여 설립되고 운영되어 온 민간 기관이다. 다만 영진위는 위탁사업의 형식을 빌려 운영비의 30%를 지원해 왔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위탁이 아닌 공모제로 전환하여 사업운영주체를 자신들이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계약 갱신을 한 달 앞 둔 시점에서 말이다.

서울아트시네마와 한시협은 영진위의 이 같은 결정을 받아 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7년째  운영되어 온 국내 유일의 시네마테크 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는 그 동안 고전 및 예술 영화 상영을 통해 한국 영화문화 성숙에 이바지 해 왔다. 그런데 사업에 대한 정당한 평가나 절차 없이 공모제로 변경한다는 일방적인 통보는 부당하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공모제 전환에 반대하는 일부 관객들은 자발적으로 공모제 반대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서울아트시네마의 로비 한쪽에 지난 21일(토) 부스를 차리고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들른 관객들을 대상으로 서명을 받고 있으며 홍보물도 자체 제작하여 배포하고 있다.

토론회에는 김영진(영화평론가), 오승욱(영화감독), 정윤철(영화감독),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김홍록(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사무국장) 등이 참여할 예정이며 참석을 원하는 이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문의: 02-741-9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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