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4.14 09:04

소수민족의 인권과 국제적 연대를 위하여

문화나눔마당 “소수민족인권과 재한줌머인연대” 개최

로넬 차크마 나니 재한줌머인연대 사무국장.

▲ 로넬 차크마 나니 재한줌머인연대 사무국장.




                                                                   이주호 기자

문화를생각하는사람들의 제31차 문화나눔마당 “소수민족인권과 재한줌머인연대”가 4월 15일 오후 7시 30분 한성대입구 인권연대 교육장에서 개최된다. 방글라데시 동남부 치타공산악지대에 살고 있는 줌머족(Jumma)은 오랜 기간에 걸쳐 방글라데시 정부와 다수 민족인 벵갈인들에게 각종 차별과 인권 침해, 강제 추방을 당해 왔다. 한국에는 약 30명의 난민이 정착해 있으며 2002년 경기도 김포에서 이들의 연대 단체인 재한줌머인연대가 결성되었다.

문화를생각하는사람들의 제31차 문화나눔마당에서는 로넬 차크마 나니 재한줌머인연대 사무국장에게서 줌머족 탄압 역사와 투쟁에 대해 들어 보고 다문화사회를 준비하는 한국인들이 줌머인들이 겪고 있는 탄압과 차별정책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 방글라데시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벵갈리족과 인종, 언어,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고 있는 줌머족의 문제를 생각해 봄으로써 한국사회 내 다문화 공존의 조건은 무엇이며 이들과 연대하여 국제 인권 보호 운동의 방향을 설정해 본다.

문화를생각하는사람들은 생활 속의 문화를 지향하며 인권, 평등, 생태에 관한 열린 문화를 나누기 위해 공연, 강좌 기획, 교육 사업, 연대 활동 등을 벌이고 있는 비영리단체이다. 참가비는 4,000원이며 행사에 관한 자세한 문의는 문화를생각하는사람들 사무국 02-336-5642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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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4 09:01

기타 치는 도깨비 김광석

[필살의 라이브]김광석의 음악여정 보여준 '기타 치는 도깨비'
                                                                                                                      김형찬 _ 대중음악평론가
클럽 바다비에서 기타리스트 김광석의 공연이 열렸다. 이번 공연은 김광석의 1집부터 3집에 이르는 음악의 변모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클럽 바다비에서 기타리스트 김광석의 공연이 열렸다. 이번 공연은 김광석의 1집부터 3집에 이르는 음악의 변모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90년대 중반기에 시작되었던 초창기의 홍대 앞 클럽가는 쏠림현상이 심했었다. 모던록, 펑크, 댄스 등의 장르편중현상이 휩쓸고 지나가면서 음악위주의 클럽보다 상업성 위주의 클럽들이 더 번성하는 폐단을 낳기도 했다. 물론 이런 현상이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10년이라는 기간을 거치는 동안 살아남은 음악인들의 수준은 상당한 내공을 지니게 되었고 다양한 음악으로 승부를 걸어온 음악위주의 클럽들은 매달 한 번씩 사운드데이(매달 마지막 금요일 음악위주의 클럽들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집중공연순례 프로그램)를 거치면서 홍대 앞뿐만 아니라 한국대중음악에 창작곡과 다양성을 공급하는 수원지의 구실을 하고 있다.

이런 좋은 음악을 중심으로 공연을 하는 클럽 중의 한 곳이 ‘바다비’ 라는 클럽이다. 여기서 지난 3월28일부터 4월3일까지 기타리스트 김광석의 ‘기타 치는 도깨비’ 라는 공연이 열렸다. 기타리스트 김광석은 본인의 2006년 6월의 칼럼에서 다룬 바 있다. 그는 1978년 이후 주로 녹음실과 연주무대에서 세션기타리스트로 활약해 온 한국의 대표적인 기타리스트이다. 1960년대부터 한국의 대표적인 록그룹이었던 히파이브에서 1976년 이후 기타리스트로 활약했으며 1980년대 중반에는 들국화의 객원기타리스트로 많은 공연에 참가했으며 1995년에 1집과 2003년 2집, 2009년 3집 등 자신의 독주곡집을 발매한 바 있다.

음악위주의 클럽들은 한국대중음악에 창작곡과 다양성을 공급하는 수원지 구실을 하고 있다

이 날의 공연은 제목이 의미하듯이 일정한 주제와 흐름을 가진 공연이었다. 어느 날 도깨비가 인간세상에 내려왔다가 <그리움>이라는 연주를 듣고 기타리스트가 되기로 결심하지만 인간의 따뜻한 마음이 없이는 연주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이야기를 가진 연주회였다. 두 번째로 연주했던 <혼돈>은 도깨비가 자신의 괴력을 발휘하며 종횡무진 연주를 들려주는 곡이다. 이 곡에서 연주한 악기는 ‘비타’ 라는 악기로서 김광석이 개발한 악기인데 기타의 몸통에 7줄의 명주실을 매서 한국의 전통악기 비파와 기타를 결합한 음향을 낸다. 김광석은 3집 음반부터는 한국의 전통음악을 현대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영역의 탐구를 시작했다. 비타라는 악기의 개발과 전통리듬을 도입한 연주곡 <혼돈>은 이런 경향을 잘 보여준다. 이어서 도깨비는 그가 반했던 <그리움>을 연주하려고 하지만 마치 말을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더듬거리기만 한다. 이 때 김광석은 기타를 왼손으로 잡고 이 장면을 연출한다.

 김광석이 개발한 악기 ‘비타’, 전통악기 비파와 기타를 결합한 음향을 낸다.

네 번째로 연주된 순서는 뇌성마비의 장애를 갖고 있는 퍼포먼스 예술가의 퍼포먼스와 <은하수>라는 연주곡의 결합이었다. <은하수>는 김광석이 몽골 여행 도중 캄캄한 밤하늘의 은하수를 바라보면서 얻은 느낌을 작곡한 곡인데 5음계와 3박자로 이루어진 아주 단순하지만 몹시 아름다운 곡이다. 이런 아름다운 곡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마룻바닥을 구르는 퍼포먼스는 바로 도깨비가 인간의 마음을 얻기 위해 겪는 고통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앞의 곡 <혼돈>처럼 기량과 위력을 과시하는 연주는 잘 하지만 자연과 교감하는 인간의 아름다운 심성을 표현하는 연주는 오히려 고통이 되고 할 수가 없는 상태가 도깨비의 마음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느껴졌다.

무대 전경

도깨비는 인간의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한 이후 드디어 그가 바라던 <그리움>을 연주하게 된다. 앞의 곡들이 추상적인 느낌인 것에 비해 이 곡은 아주 대중적이고 인간적인 느낌을 주는 연주곡이다.

이번 공연은 김광석의 1집부터 3집에 이르는 음악의 변모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집에서는 김광석의 역량을 과시하는 연주곡들로 구성이 되었고 2집은 인간과 자연의 교감을 4장의 음반에 대작의 형태로 담아내었음에 비해 3집은 2집의 느낌을 아주 단순한 음악으로 표현하면서 인간적이고 소소한 아름다움까지 감싸 안는 쪽으로 변모하고 있는 김광석의 음악여정을 한 편의 음악이야기로 풀어낸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음악인 김광석에게만 해당하는 것일까? 몸은 인간이나 짐승의 마음을 닮아가는 돈이라는 도깨비가 활개 치며 인간이 살 수 없는 세상으로 만들고 있는 현재 우리의 삶의 모습에 대한 예술가 김광석의 음악적 성찰은 우리에게 무언의 간절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고 느껴졌다.


기타 모양으로 새겨진 공연 현수막

 

 

 
 김광석 - 그리움 김광석 - 은하수, 퍼포먼스

 
 

김광석 - 혼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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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3 16:40

악마의 터널_로타이 슈바거 석탄 광산

[남미액션투어]④칠레 _ 콘셉시온
                                                                                                  김강 _ 프로젝트 스페이스 LAB39 디렉터
광부들은 지하갱도를 지옥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곳에는 악마의 터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갱도의 입구에는 1884년부터 1976년까지 영업했음을 알려주는 숫자가 쓰여 있다.
▲ 광부들은 지하갱도를 지옥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곳에는 악마의 터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갱도의 입구에는 1884년부터 1976년까지 영업했음을 알려주는 숫자가 쓰여 있다.

칠레 산티아고에서 서남방향으로 500KM를 가면, 콘셉시온(Concepción) 시에 도착하는 데, 로타이 슈바거 광산(이하 로타 광산)은 이 도시의 바닷가에 자리한다. 콘셉시온은 70년대의 학생운동이 발발했던 곳이자,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 선거에서 결정적인 지지를 획득했던 곳이다. 

『칠레의 모든 기록』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장소를 방문하여 촬영하고자 했던 2006년, 잠깐의 시간을 내어 김윤환, SP38과 이 도시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약 6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콘셉시온은 도시라기보다는 작은 읍내 같은 느낌을 풍겼다. 뜨거운 태양빛 아래 인적은 드문 마을. 이 마을의 작은 호텔에 여정을 풀고 SP38과 우리는 각자의 길로 헤어졌다. 읍내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물어물어 로타 광산 입구에 도착했다. 분홍색 와이셔츠를 입은 멋쟁이 신사가 내릴 곳을 상세히 설명해 주더니 우리와 같이 내린다. 잠깐 머뭇머뭇 하더니만 우리에게 자신이 로타 광산의 가이드를 해 주겠다고 한다. 감사! 언덕에 위치한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아래로 내려오는데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광산은 언덕과 바다 그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태백이나 사북 등 산속 광산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바닷가 탄광은 초현실적인 느낌이었다.

로타 광산이 있는 바닷가 마을 풍경


악마의 터널

로타 광산의 입구에는 <Chiflón del Diablo>라는 간판이 크게 쓰여 있다. 분홍 와이셔츠의 가이드는 ‘악마의 터널’이라는 뜻이라고 알려준다. 지하갱도를 이곳의 광부들은 지옥으로 여겼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라는 것이다. 이 광산은 1884년에 개발되어 1976년까지 탄광으로 기능했다. 현재는 박물관처럼 만들어서 석탄을 캐던 당시의 상황을 전달하고, 갱도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전문 가이드가 안내한다. 한 쪽 팔이 절단된 전직 광부 출신 가이드는 열심히 우리에게 이것저것 설명한다. 에스파뇰로... 그러면 분홍 와이셔츠의 아저씨는 우리에게 영어로 설명을 한다. 그러면 나와 김윤환은 한국말로 서로 이해한 영어를 해석하면서 이 광산을 탐색했다. 3개 국어가 동시에 탄광 안을 맴돌았다.   

로타 광산 입구

로타 광산은 바다 밑으로 400M가량 들어가서 석탄을 캐는 탄광이다. 체험이 가능한 갱도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전등이 달린 헬멧을 착용했다. 약간 경사진 계단을 걸어 갱도 입구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입구의 햇빛이 멀어지자 우리는 헬멧에 달린 전등의 불빛만 의지해야 했다. 서로의 헬멧 전등 불빛에 의지해 도시락을 먹고 있는 장면을 그린 황재형의 그림이 순간 떠올랐다. 머리가 닿을락말락한 갱도를 걸어서 지나가다 150M, 200M라는 간판을 보았다. 지상에서부터 내려온 지점의 표시이다. 더듬더듬 걸어가니 갑자기 수직 구멍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구멍에는 철제 사다리가 약 30M가량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이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바라만 봐도 아찔한 높이, 또한 사다리는 안전하게 고정되어 있는 거 같지 않았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저 아래로는 도저히 못 내려가겠다고 버텼다. 가이드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그러면 모든 일행은 내려갈 테니 나는 혼자서 아까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라고 한다. 헉~! 물론 이곳까지 온 길은 하나이다. 그냥 뒤를 돌아 걸어가면 입구에 도착하기야 하겠지만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갱도의 암흑은 고소공포증 따위는 순식간에 날려 버릴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가이드가 먼저 내려가고 내가 두 번째다. 아니나 다를까, 철재 사다리는 수직 터널에 잘 고정되어 있지 않아 사다리를 밟을 때 마다 덜커덩 거린다. 사다리를 내려가는 시간이 천금과도 같이 느껴지고, 이 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다녔을 광부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바다 밑 300M 이상 내려갔다.

사다리를 내려오니 300M라는 간판이 보인다. 우리가 땅 아래로 300M 이상 내려왔고, 이 곳은 바다 밑이라고 한다. 약간 경사진 갱도를 따라 내려가자니 이제는 머리위로 바람이 조금씩 느껴진다. 바다 밑에서 불어오는 바람. 이 바람은 탄광이 활황이었을 때는 광부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 바다 밑 천연가스가 바람을 통해 갱도로 유입되다가 순식간에 불이 붙기도 했다는 것이다. 천연가스+석탄, 왜 이곳을 ‘악마의 터널’이라고 하는 지 실감했다. 갱도의 중간 중간에는 이런 바람을 막기 위해 나무문이 설치되어 있다. 석탄을 실은 차가 이동하고 나면 이 문을 닫아서 천연가스가 갱도 전체로 퍼지지 않도록 차단하는 역할을 하는 문이라고 한다. 문 옆에 붙어 서서 문을 열고 닫고 하는 일은 모두 어린이들의 몫. 어른 한 사람이 채 허리를 펴기도 힘든 갱도에서 적당히 몸집이 작은 어린이들이 날렵하게 이 일을 잘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의 옆에는 쇠사슬이 매달려 있다. 문 관리 어린이가 달아나지 않도록 발에 쇠사슬을 채웠다고 전한다. 암흑천지의 갱도 안에서 희미한 전등에 의지한 10살이 채 안 된 어린이가 하루 종일 발에 쇠사슬을 달고 문을 여닫았다. 이 어린이들 중 대부분은 시력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어른들만의 장소라고 생각했던 탄광에서 어린이의 흔적을 느끼게 되다니... 지각적 현실과 감각적 현실의 차이를 실감했다.
 
갱도에서 수직으로 올라가는 낡은 철재 엘리베이터를 타고 순식간에 태양 아래로 올라왔다. 낡은 엘리베이터는 당시 사용하던 것 그대로라고 한다.

또 하나의 작은 악마의 터널. 덜컹거리던 철제 사다리. 이곳을 통과해야 밖을 나가는 길이 있다.

천연 가스를 막아 주던 나무문에 쓰인 숫자. 이 문을 어린이들이 열고 닫았다.


광부들의 삶 재현

주변을 둘러보니 당시 광부들이 살았던 집을 복원한 건물이 눈에 띈다. 판자로 만들어진 2층집. 그곳에 위치한 가게에 들어가니 현대의 것이라는 느낌이 안드는 물건들이 놓여져 있다. 이 곳은 Marcelo Ferrari 감독이 2003년에 제작한 <Sub Terra>의 영화제작을 위하여 만든 세트다. 영화 제작이 끝나고도 세트를 유지하여, 방문객들이나 학생단체관람객에게 역사를 알리는 곳으로 기능한다고 한다. 이곳에서 판매하는 엽서를 보니 아까 타고 올라왔던 엘리베이터 앞에 8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이가 같이 찍힌 사진이 있다. 그 어린이가 아마도 갱도 안에서 나무문을 여닫았을 것이다. 그 아이는 시력을 잃었을 지 어떨지..... 그 아이는 쇠사슬을 풀고 탈출하고자 했을지 어떨지.... 그 아이의 평생의 삶이 이 탄광과 함께 했을지.... 그 아이는 어른으로 성장했을지 어떨지.... 막막한 감정이 들었다. 

Sub Terra 영화촬영을 위해 지어진 당시의 집들.


시를 존경하는 광부들 

<악마의 터널>이라는 별명이 붙은 로타 광산은 전통적으로 빈곤 때문에 소요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땅속에서 캐는 물질만 다를 뿐이지 당시 사기업에 의해 개발된 탄광이나 초석 광산들은 광부들의 열악한 노동현실과 빈곤 문제들을 언제나 야기한다. 네루다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아옌데 대통령 후보의 지지연설을 하러 로타 광산의 노동자들을 만났던 일화를 평생 잊을 수 없는 의식이었다고 기억한다. 당시 약 1만여 명의 광부가 참석한 로타 광장 집회에는 후텁지근한 정오의 대기와 뜨거운 햇빛을 피하기 위해 광부들은 검은 모자와 헬멧을 착용하고 있었다. 연단에 올라선 네루다에게는 광부들의 검은 모자와 헬멧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자가 네루다의 이름과 그의 시「스탈린그라드에 바치는 새로운 찬가」를 소개하자 그 많은 광부들이 조용히 모자를 벗었다. 시를 낭독하겠다고 하니 모자를 벗었던 광부들의 모습을 네루다는 이렇게 묘사한다.

“잔잔한 바다에서 해일이 일어난 듯 1만여 개의 모자가 일제히 파도를 일으키더니, 무언의 존경을 담은 검은색 포말을 일으키며 아래로 사라져갔다.”(1)

시를 낭송하며 그 어느 때보다 전쟁과 해방을 강조했다는 네루다. 네루다는 로타 광산 이외에도 초석 기업이 개발한 초석 광산에서의 일화도 소개한다. 영국인, 독일인을 비롯하여 각국의 침탈자들은 초석 광산을 독점하고 회사 이름을 지명으로 사용했다. 문자 그대로 그들의 왕국인 것이다. 광산 지역마다 독자적인 화폐를 사용했던 그곳은 특별 허가증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지역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모든 종류의 집회를 금지했고, 정당활동이나 언론의 취재도 허용되지 않았다. 네루다는 어느 날 오후, 마리아 엘레나 초석 광산의 기계창에서 노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거대한 작업장의 바닥은 항상 물, 기름, 산(酸)이 고여 있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네루다는 웅덩이 위에 높이 널빤지를 밟고 다녔다. “이 널빤지 하나 놓으려고 파업을 열다섯 번 하고, 8년동안 줄기차게 회사와 씨름했습니다. 결국 일곱 명이 목숨을 잃었답니다.” 죽은 노동자들이란 회사 경비원들이 끌고 나간 파업 지도자들이다.(2) 이렇듯 당시의 현실은 작은 것 하나라도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비오비오 강. 광부들은 ‘석탄의 행진’으로 이강을 건넜다.

침탈자들의 왕국과도 같은 곳일지라도 로타 광산의 노동자들은 투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1958년 ‘석탄의 행진’이라고 알려진 운동이 로타 광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시꺼먼 탄가루를 뒤집어 쓴 수천 명의 광부들이 빽빽이 모여 소리 없이 비오 비오 강 다리를 건넜을 때 콘셉시온 시는 온갖 깃발과 플래카드, 그리고 투쟁의 결의로 물결쳤고, 정부는 심각한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세브히오 브라보’라는 칠레 감독에 의해 <민중의 깃발(Banderas del pueblo)>이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되었다. 콘셉시온 시에 모인 군중들 사이에 아옌데가 있었는데, 아옌데의 선거 참모였던 미겔리틴 감독은 이때 아옌데가 모든 민중의 확고하고 결정적인 지지를 획득한 것으로 생각한다. 나중에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후 그가 처음으로 방문했던 곳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광부들과 대화하기 위해 찾아간 ‘로타 광장’이었다.(3) 아옌데는 이 광산을 국유화하였는데, 이는 그가 대통령이 된 후 처음으로 시행했던 시책 중 하나이다.(4)

아옌데가 연설했던 로타 광장

광장 한켠에 아옌데 기념물이 서있다.


로타 광산 그리고 사북

우리나라의 경우 1993년 대부분의 태백, 사북의 탄광이 폐광되기 전까지 강원도 일대는 70 여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검은 노다지’의 지역이었다. 그러나 칠레와 마찬가지로 광부의 삶은 석탄 산업의 활황과 상관없이 열악한 것이었다. 석탄을 캐는 막장은 30~40도의 고온과 높은 지압, 습도, 공기순환의 불량 속에 석탄가루를 마시며 일을 해야 하는 지옥과 같은 곳이었다. 게다가 산업재해의 빈발과 진폐증 때문에 광부들은 언제나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이 같은 목숨을 건 노동의 대가로 주어진 임금은 월평균 15만 5천원의 저임금으로 최저생계비에 크게 못 미치고 있었다. 이러한 열악한 현실은 1980년의 유혈폭동으로 이어졌다. 1980년 국내 최대의 민영 탄광인 강원도 동원탄좌 사북영업소에서는 어용노조와 임금 소폭 인상에 항의해 광부들에 의해 유혈 폭동이 일어났다. 광부 및 그의 가족 약 6,000여명이 참여한 이 투쟁은 회사들이 광부들의 요구를 묵살한 채 경찰을 개입시켜 경찰과 충돌하면서 유혈사태를 빚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관 1명이 숨지고 160여명의 경찰과 민간인이 부상을 당했다. 사태가 진정 된 후 당시 계엄사령부는 관련 인물 31명을 구속하고, 50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등 총 81명을 군법회의에 송치하였다. 이 사태는 경직된 노사관계와 광부들의 누적된 불만, 값싼 노동력 등이 빚어낸 참사로서, 이 사건 이후 전국 각지에서 노사분규가 잇따라 일어나는 등 1980년대 노사문제를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 사북 투쟁을 계기로 노동자들의 투쟁은 새로운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5) 

칠레의 탄광에서 우리나라의 광부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다. 국가를 초월하여 막대한 이익이 생산되는 광산 및 탄광은 대부분 사적 소유이고 이러한 곳에서 노동자들은 단지 ‘일회용 사람’들일 뿐이다. 따라서 광부들이 자신들의  삶과 노동의 조건을 인간화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건 투쟁의 과정이 뒤따라야 하는 곳이었다. 사북사태에 대한 내용이 MBC드라마 ‘에덴의 동쪽’에서 약간 그려졌다고는 하나 어느 정도 사실적으로 그렸을 지는 보지 못해 알 수가 없지만 공중파의 한계도 드러내고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폐허가 된 공터의 벽에서 프리다 칼로가 쳐다보고 있었다.


밤 거리에 붙은 프리다 칼로 

로타 광산을 나와 분홍색 와이셔츠를 입은 친절한 아저씨와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나니 오후 해질녘이다. 로타 광장으로 나와 커피를 한잔 마시면서 그 광장에서 연설했던 아옌데를 떠올려 보았다. 그 광장에는 아옌데의 기념비가 뜨거운 햇살과 텁텁한 바닷바람의 대기위에 서있다. 헤어졌던 SP38과 숙소에서 만나 비오비오(Bio Bio) 강가로 나섰다. ‘석탄의 행진’이 이 비오비오 강을 건넜다고 한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강가에는 초라한 집들이 무성하다. 강가를 걸어 숙소로 돌아오는 길. 거대한 벽화가 우리의 시선을 잡는다. 여러 사람이 하나의 테마를 가지고 좌우로 그 스토리를 연결하며 그린 듯한 벽화. 사회 비판적인 시선이 담긴 이러한 벽화는 칠레의 어디를 가나 무수히 볼 수 있다. 퇴락한 도시의 부서진 담장 한 켠에 프리다 칼로의 초상이 전시되어 있다. 이름 모를 예술가가 실크 스크린으로 제작하여 붙여 놓은 작품. 그에게는 이 도시 전체가 자신의 전시장일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작품을 보여 주고 싶었을 누군가를 생각하며 그 프리다 칼로를 조심스레 떼어냈다. 한국으로 가지고 와 집에다 걸어 두었다.

 

로타 광산이 있는 바닷가 마을 풍경

악마의 터널이란 글자가 보인다.

판자로 지은 광산의 입구는 박물관으로 되어 당시의 노동환경을 엿볼수 있도록 되어있다.

박물관에 걸려있는 광부들의 생활상.

우리를 친절히 안내해 준 분홍 와이셔츠의 아저씨. 머리에 헬멧을 쓰고 우리는 갱도로 내려갔다.

갱도 위아래의 연락을 담당하던 당시의 전화.

광산 벽에 그려진 벽화

당시 광부들의 삶을 알 수 있게 재현되어 있다.

광부들의 생활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2층에는 침실이 있는데 여러 가족이 함께 살았으며, 침대 하나에 여러 명이 번갈아 잤다.
그냥 나무바닥에 담요하나만 깔고 자기도 했다고 한다.

로타 광산에서 캔 석탄으로 만든 기념품들. 희한하게도 손에 석탄이 뭍어나지 않는다.
이런 가공 방법은 비밀이라고 한다.

로타 광장에 위치한 벽화

칠레의 어디를 가나 아옌데를 기념하는 기념물과 벽화를 볼수 있다.

밤거리에서 마주친 벽화

벽화의 부분들

벽화의 부분들

벽화의 부분들

벽화의 부분들

좀더 가까이 본 프리다 칼로.
지금은 내 방 침대 맡에 부착되어 있다.

20세기 초반의 광부들 모습.
엘리베이터 안 좌측에 어린이가 보인다.

로타 지역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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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박병규 옮김, 민음사. 2008, pp.380-381
2> 같은 책, p.259 참고
3>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칠레의 모든 기록』조구호 옮김. 간디서원, 1989, pp. 106~107
4> 그러나 피노체트가 처음으로 시행한 것은 국유화된 광산을 다시 사유화한 것이다. 피노체트는 광산, 공동묘비, 기차, 항만을 비롯하여 쓰레기장까지 거의 모든 것을 사유화, 민영화하였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칠레의 모든 기록』조구호 옮김. 간디서원, 1989, pp. 106~107 참조.
5> 유성재, 「사북사태」 국가 기록원, 200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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